세계종교사 개관
2017-10-20 22:12:51
개요
세계종교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지적․영적 모험입니다. 종교는 인간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세계관이기에, 우리는 세계종교를 공부함으로써 감추어진 인류의 꿈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인문학적 관심, 타자를 통한 주체의 반성, 그리고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과 화해를 위해 세계종교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본 세미나는 세계종교의 입체적 이해를 위한 모색으로써 ‘다학문적 접근’(철학, 종교학, 신학)을 시도합니다. 또한 세계종교의 다양한 경전들을 직접 읽으며 살아 있는 가르침을 생생히 체험하는 시간을 갖는다
목표
1) 세계종교를 전통별로 나누어 역사적으로 개관한다.
2) 종교의 다양한 차원들(경험, 신화, 교리, 윤리, 의례, 사회)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한다.
3) 경전의 주요 부분을 직접 읽음으로써 해당 전통의 가르침을 더욱 생생히 체험한다.
4)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전통을 객관화 할 수 있도록 한다.
주교재
1) 오강남, 『세계 종교 둘러보기 (10주년 기념 개정판)』, 현암사, 2013.
부교재
1) 오강남, 『종교, 심층을 보다』, 현암사, 2011.
2) J. B. 노스, 윤이흠 옮김, 『세계종교사 (상,하)』, 현음사, 1986.
3)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세계종교사 입문 (개정증보판)』, 청년사, 2003.
4) 니니안 스마트, 윤원철 옮김, 『세계의 종교: 동굴벽화에서 현대의 다원주의까지』, 예경, 2004.
5) 아르빈드 샤르마, 아베 마사오, 뚜웨이밍, 리우샤오간, 제이콥 뉴스너, 하비 콕스, 세예드 호세인 나스르, 이명권, 류제동, 이윤미, 최수빈, 주원준, 박태식, 박현도 옮김, 『우리 인간의 종교들: 비교의 눈으로 본 세계 종교 개론서』, 소나무, 2013.
6) 미르치아 엘리아데, 이용주, 최종성, 김재현, 박규태 옮김, 『세계종교사상사 (1,2,3)』, 이학사, 2005.
7) 로이 롭슨, 윤원철, 유요한 옮김, 『세계 종교 산책』, 시그마프레스, 2013.
8) 프랭크 웨일링 외 11인 지음, 니니안 스마트 엮음, 김한영 옮김, 『종교: 지도로 본 세계 종교의 역사』, 갑인공방, 2004.
9) 길희성 외 지음, 전통문화연구회 엮음, 『경전으로 본 세계종교』, 전통문화연구회, 2001.
추천도서
1) 카트린 클레망, 이원희 옮김, 『테오의 여행 (1,2)』, 작가정신, 2013.
종교란 무엇인가?
2017-10-25 20:12:43
1. 종교에 대한 정의
종교를 정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종교 연구를 위한 작업 가설로서 정의가 필요하다. 독일의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는 종교를 "엄청나고도 매혹적인 신비" 로 정의했다. 그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성스러운 것"에 대한 체험이며 그 체험은 대단히 압도적이고 매혹적인 신비라고 말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종교를 궁극관심 ultimate concern 으로 정의하면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바로 종교라고 말했다. 그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인 종교 religion 과 구별하여 준준궁극적인 것(재물, 권세, 명예, 성)에 대한 관심을 가종교 pseudo religion,로, 그리고 민족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정치이념이나 사상체계와 같은 준궁극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유사종교 quasi religion 로 정의한다. 한국의 종교학자 오강남은 종교의 핵심이 궁극 실재와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변화의 체험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오토와 틸리히의 정의를 종합한 것 같다.
2. 종교 체험이란 무엇인가?
종교학자 요아힘 바흐는 종교체험은 궁극 실재로 여기지는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이 반응은 순수하게 주관적인 허상이 아니라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낭만주의 종교학은 궁극실재의 존재를 가정한다.) 그는 이 반응은 인간의 지정의가 다 관련된 전인격적이고 전폭적인 반응이며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포괄적이고 심오한 체험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이런 진정한 종교체험은 동기부여와 행동을 위한 가장 강력한 근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바흐는 이런 종교체험은 매우 엄청나고 초상식적이므로 보통의 표현방법으로는 도전히 전달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상징적이고 은유적이고 유비적인 방법으로 표현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주로 신화, 교리 등의 이론적 표현, 경배 헌신 등의 실천적 표현 그리고 집단을 형성하고 전파되는 사회적 표현 등으로 나타난다. 바흐는 종교체험 자체는 큰 변화가 없지만 표현은 사회적, 역사적, 심리적 조건에 적응하며 변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종교에서 보다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체험이지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3. 종교를 구성하는 요소들
모든 종교는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보통 신화라는 말은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종교학에서는 그런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가 세상을 설명하는 성스러운 이야기를 의미한다. 또한 모든 종교는 생각과 행동의 지침이 되는 일단의 원칙으로서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 나름의 의식, 의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종교경험을 확대 재생산하기 위하여 종교적인 행동을 정형화하여 반복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종교는 궁극 실재에 대한 반응으로서 특정한 감성과 체험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특정한 장소나 시간을 구별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꼭 윤리나 도덕 규범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머 고대 로마의 시민종교는 윤리나 도덕에 별다른 지침을 제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체로 종교전통들은 개인과 사회에 적용되는 행위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종교를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이 전통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틸리히가 제시한 준준궁극적인 관심으로서의 가종교나, 준궁극적인 관심으로서의 유사종교에도 이런 요소가 있다.
4. 종교의 기원에 대한 이론들
a. 영국의 인류학자 타일러는 종교가 모든 물체에 영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그는 고대인들은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몸과 별개로 독립해서 존재하는 비물체적인 영(아니마, anima)이 있다고 믿었고 이 영들에게 기도도 하고 제사도 드려 이 영들을 달래는 일을 했는데 이런 믿음, 이런 형태가 바로 종교의 기원이라고 주장했다. 역시 영국 인류학자인 마레트는 고대인들은 타일러가 말하는 그런 인격적인 아니마를 믿기 전에 막연하나마 물체내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비인격적인 힘(마나)를 믿었고 이것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b. 종교학의 창시자 오토 뮐러는 고대인은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여 해나 달이나 바다와 같은 자연물을 의인화하고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서 신화를 만들어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현상들을 신들의 이야기로 신화화하는 식으로 여러 신들이 생겨나고 이런 신들을 중심으로 종교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자연숭배가 종교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c. 오스트리아 학자 빌헬름 슈미트는 타일러의 애니미즘 이론을 반대하고 아주 특이한 이론을 제시한다. 그는 고대인들이 애니미즘이나 다신론적 종교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대부분 지고신 high God을 믿었다고 말한다. 이 지고신은 보통 전지전능하고 도덕적인 창조주로 묘사되는데 처음 세상을 창조한 후에 물러가 세상과 접촉이 없게 되었지만 언젠가는 돌아와 세상을 심판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슈미트는 이 지고신에 대한 신앙이 종교의 기원인데 그것이 변질되어 다신론이 되었고 이른 바 고등 종교에는 이런 지고신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었다고 주장했다.
d. 영국 인류학자인 제임스 프레이저는 세계의 신화를 집대성한 그의 불후의 명작 "황금가지"에서 인간은 변덕스러운 자연의 힘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처음에는 마술에 의존했다가 점점 마술대신 종교를 계발했는데 종교도 자연의 힘을 제어하는데 불충분하므로 셋째 단계인 과학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결국 프레이저는 종교의 근원을 자연의 힘을 제어하기 위한 마술로 보는 셈이다.
e. 19세기 유럽의 사상가, 포이어바흐는 종교의 기원을 인간이 원하지만 가지지 못하는 이상들의 투사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은 지식, 지혜, 용기, 사랑, 도덕성, 능력 등 인간이 원하지만 지금 가지지 못하는 이상들을 어느 존재에다 투사하고, 이런 이상을 모두 가진 이상적인 존재를 바로 신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결국 포이어바흐에 의하면 신이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자기 이상대로 창조한 셈이다. 이처럼 신은 인간의 이상의 투사인 만큼 신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인간이 어떠한지를 알아 보면 되는데 이것이 그의 유명한 명제 "신학은 곧 인간학"이란 말이 성립되는 이유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이론에 사회학적 해석을 붙여 종교는 허구적 현실에 안주하며 현실의 아픔을 잊게하는 "인민의 아편"이라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포이어바흐의 이론에 심리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인간이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죄의식을 달래기 위해 신이라는 아버지상을 투영했다고 주장했다.
이슬람교
2017-12-05 00:18:51
1. 이슬람은 "복종"을 뜻하는 단어이고 무슬림은 "복종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서 이슬람 신도들을 지칭한다. 이슬람은 알라를 유일신으로, 무함마드를 그의 최고 ,최후의 예언자로 믿는 종교이다. 이슬람교의 유일신인 "알라"는 그저 신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이지만 그 신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의 신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무함마드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당시 성행하던 아라비아 반도의 다신교 사상을 거부하고 유일신 사상을 주창한 것이다. 이슬람 종교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에 대해서는 이슬람 외부의 자료가 없기 때문에 역사적 무함마드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문제보다 이슬람에서 역사적 무함마드에 대한 문제는 그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고 중심인데 반해 이슬람에서 무함마드는 알라의 계시를 그대로 전달한 인간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2.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서기 570년경 아라비아 메카에서 이스마엘을 조상으로 하는 쿠라이시족에서 태어났다. 무함마드는 25세에 하디자라는 40세의 부유한 과부 밑에서 노역을 하다가 결국 그녀와 결혼을 하면서 힘든 노역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후 그는 명상과 기도에 전념하게 되는데 610년경 40세 되던 해에 메카에 있는 히라 산 동굴에서 신비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가브리엘 천사로 부터 "읽으라 알라께서 사람들에게 계시한 것을" 이란 명령을 세 차례 듣게 되는데, 이 목소리는 그후 무함마드가 죽기 전까지 계속 반복되었다고 한다. 이후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자기가 받은 계시를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조롱하였다. 무함마드는 사람들에게 영아 살해(신들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와 우상숭배를 금하라고 가르쳤는데, 이는 당시에 매우 혁명적인 가르침이었으며 또한 무함마드가 가르친 윤리적 실천은 당시 메카의 지배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함마드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거기에 비례하여 박해가 심해지자 결국 무함마드는 메카를 떠나 메카 북쪽으로 400키로미터 떨어진 메디나로 피신하게 된다. 622년에 일어난 무함마드의 이 망명을 아랍어로 히즈라(hijra)라고 부르는데 무함마드 사후 이 해를 이슬람력의 원년으로 삼게된다.
3. 당시 메디나에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지만 무하마드는 "알라의 다스림"을 선포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다음 6가지 서원을 하게 했다. 우리는 한 분 알라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다. 우리는 도둑질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간음하지 않는다. 우리는 영아 살해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당한 일에 있어서 예언자(무함마드를 지칭)에게 불순송하지 않는다. 이런 6가지 서원은 구약성경의 십계명을 아라비아 상황에 단순화하여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를 따르는 자들은 메디나에서 기도하는 집(모스크)를 짓고 매주 금요일에 모여 함께 기도했으며 개인적으로 하루에 다섯 번씩 예배하는 제도를 수립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하다가 무함마드 사후에 유대인과 관계가 나빠지면서 메카를 향해 기도하게 되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의 세력은 점점 성장하여 630년경에는 아라비아의 중심지인 메카를 점령하여 아라비아 전역에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후 무함마드는 자신이 태어나고 계시를 받은 메카를 신성화하여 모든 무슬림들이 반드시 순례해야 할 성지로 만들었다.
4. 꾸란(Qur'an)은 원래 "읽다" ", 혹은 "읊다"는 뜻인데 무함마드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직접 들은 계시를 들은 그대로 읽거나 읇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슬람 전승에서는 무함마드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이 강조되는데 이는 꾸란을 통해 알라의 계시가 변개됨이 없이 순수하게 전달되었음을(인간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된 기계적 영감을 의미)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꾸란은 이슬람교의 유일무이한 경전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데 꾸란의 권위를 기독교에 비교하자면 신약성서의 권위가 아니라 예수의 권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신약성서 분량의 약 80%정도인 꾸란은 모두 114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무함마드가 외운 것을 전문기억사들이 기억하도록 하고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동안에 이미 종려나무 잎이나 돌 같은 곳에 기록하여 놓았다. 무함마드가 죽고 제2대 지도자인 "아부 바크르"가 기록된 것들을 한 곳에 모으고 제3대 지도자인 "우마르"가 이를 최종 확인해서 지금의 모습으로 내려오고 있다. 기독교 경전인 신약성서가 예수의 사후 상당한 기간이 흐른 후에 그의 제자들의 기억에 의해 기록된 반면에 꾸란의 기록은 무함마드 생존시에 이미 기록이 형성되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꾸란은 신약성서와 달리 역사적 내용은 거의 없고 대부분 무엇을 해라, 하지 말라는 율법적 명령들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이슬람 학자들은 대부분은 법학자들로 불린다. 처음부터 꾸란은 아랍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아랍어외에 다른 언어로 번역될 수 없고 만일 번역된다면 그것은 이미 꾸란이 아니게 된다. 이슬람에는 꾸란 외에 "하디스"라는 무함마드의 언행록이 있는데 이것은 경전은 아니지만 꾸란의 계시를 설명하는 역할을 하는 전승으로 대단히 중시된다.
5. 다신교를 믿는 아라비아에서 꾸란은 신이 한 분 뿐이라는 유일신 사상을 철저히 강조하며, 한 분 신 이외에 다른 것을 신으로 여기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에 해당한다고 가르쳤다. 물론 여기서 한 분 뿐이라고 말하는 신(알라)은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의 신을 전제한다. 꾸란은 알라는 창조주요,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시요, 말세에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자라고 가르쳤는데 이런 신관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관과 다를 바 없다. 꾸란에 의하면 알라의 예언자는 지금까지 12만 4천명인데 그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28명이고 이들중 가장 중요한 예언자 다섯명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예언자가 무함마드이다. 그는 말세를 위한 예언자, 혹은 예언자들의 인으로서 무함마드 이후에는 어떠한 예언자도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무함마드는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이면서도 알라의 계시를 완벽하게 보전하여 전달한 최고의 예언자이다. 꾸란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부활의 날까지 일단 잠자는 상태(영혼 수면설)로 있다가 부활의 날이 되어 알라의 천사가 나팔을 불면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의 행위를 기록한 책에 의해 상벌을 받는다. 꾸란은 예수가 위대한 예언자이며 동정녀에서 태어난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예수가 신성을 가졌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유일신을 부정하는 삼신론으로 이해한다.
6. 모든 무슬림은 다섯 기둥이라는 종교적 의무를 실천해야 하는데 이슬람교는 이 다섯 기둥 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할 정도로 종교적 실천을 강조한다. 첫째는 "사하다"인데 이것은 "알라 외에는 신이 없으며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이다(라일라하 일랄라 무함마드 라슐를라)"를 반복해서 고백하고 증언하는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을 통해 누구나 무슬림이 될 수 있으니 이슬람에 입교하는 일은 매우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살라트인데 모든 무슬림은 개인적으로 하루에 새벽,정오, 오후, 일몰, 밤, 이렇게 다섯번의 살라트를 실천해야 한다. 살라트를 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결례를 행한 후에 신발을 벗고 깔개를 펴고 메카를 향해 엎드려야 한다. 살라트는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라기 보다는 알라의 위대함을 찬송하는 경배에 가깝다. 셋째는 "자카드"인데 이것은 모든 성인 무슬림이 1년 이상 계속 보유하고 있는 재산의 2.5%를 가난한 무슬림 형제들을 위해 자선금으로 바치는 일이다. 넷째는 "사움" 인데, 이것은 라마단(9월) 한 달 낮 시간에 단식을 행함으로써 무함마드의 고행과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념하는 것이다. 라마단 낮 시간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성행위 등이 완전히 금지된다. 다만 병자나 여행자, 젖먹이 엄마, 어린 아이는 단식에서 제외된다. 라마단이 끝나면 3일동안 축제가 벌어지는데,이 때 부자들은 음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하여 가난한 자들과 무제한으로 나눔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빈부차이가 없어진다. 다섯째는 "하지"라고 하는 메카 순례인데, 모든 무슬림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메카로 성지 순례를 다녀와야 한다. 무슬림들에게 메카는 매우 특별한 곳으로서 이슬람 전승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자리잡고 살던 곳이 메카이고,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알라를 위해 성전을 짓고 예배하던 곳도 메카이다. 메카를 순례한 무슬림은 새로 난 아기처럼 죄가 없어진 상태가 되고, 그 이름 앞에 ‘순례자’라는 표시를 한다. 메카 성지순례를 통해 전 세계 무슬림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요 동등하다는 공동체 의식과 유대를 강화하게 된다. 이상의 다섯 기둥 외에 이슬람 교파에 따라 지하드를 여섯 번째 기둥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요즘은 지하드 개념이 오해되고 있다. 지하드는 문자적으로 ‘성전(聖戰)’을 의미하지만,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본래 의미는 ‘알라의 길에 힘씀’이라는 뜻으로 무엇이든 알라의 일을 위하는 것이면 지하드가 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슬람 국가나 종교가 위협 받을 때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힘쓰는 일을 지하드의 주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생겼지만, 사는 곳에 모스크를 짓는 일, 멀리 떠나서 전도하는 일도 지하드이고, 무엇보다 큰 지하드는 이기적인 정욕과 본능을 물리치려고 힘쓰는 것이다. 현재 많은 무슬림들은 자유주의나 서구화에 저항하는 것을 지하드로 보기도 한다.
7. 무함마드는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여 이슬람교가 확산되는 토대를 마련했고, 그의 사후 이슬람은 아라비아를 넘어 635년 다마스커스를 함락하고, 636년 페르시아를 점령하고, 641년 알렉산드리아를 접수하는 등 파죽지세로 세를 확장시켰다. 제3대 칼리프 이후에도 이슬람 제국은 계속 팽창하여 711년 스페인을 점령하고 7세기 동안 다스렸다. 13세기 몽골 군대에 의해 패퇴했을 때도 몽골인 지배자들을 이슬람화 하여 오히려 이슬람 제국은 더욱 확장되었다. 나아가 이슬람은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본거지였던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여 도시명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오늘날 러시아, 파키스탄, 인도, 중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까지 세력을 떨치게 된다. 이슬람 상인은 중국 당나라 때 서안(西安)에 많은 수가 머물었는데, 이때 당나라 사람들이 이슬람을 ‘회교(回敎)’라고 불러서 우리나라에도 회교라는 명칭이 수용되었다. 특별한 교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이슬람이 이렇게 급격히 팽창할 수 있었던 원인(무력으로 강제한 것 때문만은 아님)은 무엇인가? 첫째는 이슬람이 인간을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알라의 피조물인 한 형제자매로 동등하다는 이슬람의 가르침은 대중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왔을 것이다. 둘째로 이슬람은 복잡한 이론이나 교리나 예식이 없는, 단순명료한 실천적 종교라는 점이 인민들에게 어필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는 당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틴 제국이 부패하고 억압적이어서 사람들은 이슬람 군대를 침략자로 보기보다 해방자로 보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의 급속히 확산에는 폭넓은 대중적 지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8. 무함마드는 모든 무슬림에게 이전까지 혈연 공동체에 충성하던 것을 버리고 믿음의 공동체인 ‘움마(umma)’에 충성할 것을 강권했다. 632년 무함마드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메카를 향한 순례를 떠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은혜의 산’에 모인 10만여 순례자들에게 무슬림의 결속을 강조하며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명심하도록 하고. 그대들은 알지니, 무슬림 개개인은 다른 무슬림의 형제이며, 따라서 모든 무슬림은 형제지간이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무함마드 사후에 이슬람은 서서히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무함마드’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고 죽었는데 그의 오랜 친구이며 장인 중 하나였던 ‘아부 바크르’가 1대 후계자(칼리파)1로서 2년 동안 후계자 일을 맡았고 그는 죽기 전 ‘우마르’를 2대 후계자로 지목했다. 우마르는 10년 동안 후계자로 일했고 그가 죽기 직전 여섯 명의 위원을 지명하여 그 중에 후계자를 선출하라고 명했는데 이 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내분이 생겼고 이후 이슬람 역사는 파벌 간 암투의 연속이었다. 무함마드의 심복 겸 사위였던 ‘우스만’과 그의 사촌 겸 사위였던 알리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고, 결국 우스만이 3대 후계자가 되었으나 12년 후에 암살당하게 된다. 우스만이 암살당한 후 알리가 4대 후계자가 되었으나 그도 역시 암살당한다. 이후 우스만을 지지하는 파와 알리를 따르는 파가 갈라섰고 그들의 후예가 이슬람의 양대 교파인 "순니파"와 "시아파"가 되었다. ‘순니파(Sunni)’란 ‘전승주의파’라는 뜻으로전 세계 무슬림의 85% 정도가 해당하는데, 이 파는 제1대 후계자 아부 바크르 이후 모든 칼리파를 인정하고, 종교적․율법적 권위를 꾸란과 하디스에서 찾는다. ‘시아파(Shiite)’란 ‘분리파’라는 뜻인데. 세계 무슬림 인구의 10~15% 정도에 해당한다. 이들은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가 무함마드의 참된 후계자인데, 처음 세 후계자가 자격도 없이 자리를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알리가 4대 후계자가 되긴 했지만 암살당했고, 지도자의 자리는 우마이야 가문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알리의 아들 후세인이 이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모두 죽임을 당한 후에 시아파는 우마이야 가문에서 세습적으로 내려온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고(오직 알리만을 칼리파로인정함) 알리가 죽은 후 후계자(칼리파)가 끊어지고, 알리의 후손인 열한명의 이맘2에 의해 공동체가 이끌어진다고 생각한다. 시아파는 알리 이후의 열한명의 이맘들 중 마지막 이맘이 죽지 않고 어딘가 숨어 있는데, 그가 다시 이 땅에 돌아와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 믿으며, 이렇게 다시 재림할 이맘을 ‘마디(Mahdi)’라고 한다. 오늘날 대표적 시아파 국가로는 이란이 있다. 순니파가 메카를 순례하는데 반해 시아파는 열한명의 이맘의 무덤을 순례한다. ‘수피(Sufi)’는 ‘양털 옷을 입은 자’라는 뜻인데, 수피는 독립적인 교단은 아니다. 이들은 교단적으로 순니파에 속한 경우도 있고, 시아파에 속한 경우도 있다. 이들은 이슬람의 율법주의, 형식주의에 반대하고 신비체험을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이슬람은 알라와 인간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시키는 것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로 간주하므로, 신인합일을 강조하는 수피의 가르침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수피는 알라는 ‘우리의 핏줄보다도 우리에게 더 가까운’ 분으로 묘사된 『꾸란』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알라 안으로의 몰입’ 체험을 강조하며 진리가 이론이나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라를 직접 체험하는 것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9. 근세에 와서 이슬람은 과거 찬란했던 권력과 문화를 뒤로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부터는 이슬람 국가들이 유럽의 지배 밑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은 그것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의 쇠퇴 원인은 외부적으로는 몽골인이 이슬람 지배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무슬림 학자들을 죽이고 도서관을 불태우는 등 과거 500년 동안 쌓은 이슬람 전통을 말살했기 때문이지만 가장 근본적으로는 이슬람교 자체가 탄력을 잃고 침체 내지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석유가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고, 이슬람 국가들이 서양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이슬람이 새로운 힘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이런 새로운 변화는 종교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현상을 잉태했다. 첫째로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등장한 일이다. 이슬람 사회가 서구화되면서 무슬림들 사이에는 자연히 물질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서구의 문화와 가치관이 수용되었는데, 상당수 무슬림들은 이를 이슬람에 대한 도전이나 위협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서구의 위협으로부터 전통을 보존하고 사수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서구 문화와 사고방식을 배척하고 이슬람 전통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겠다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부흥하게 되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비 운동’,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로는 서구 사회가 이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슬람 세력이 급부상하고 서구화에 대한 반동으로 이슬람 근본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외려 이슬람의 진짜 모습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고, 세계 각국은 이슬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9.11 사태 이후 이슬람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이슬람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이나 편견들이 일정 부분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진지한 대화의 장들이 마련되었다. 현재 전 세계 무슬림의 수는 16억으로 추산되며 수적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종교이다. 지리적으로 이슬람의 발생지인 중동 뿐 아니라, 아프리카,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필리핀, 중국, 러시아 등에서도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다.
더 읽어야 할 책들.
1) H.A.R. GIBB, 이희수 옮김, 『이슬람』, 주류성, 1997.
2) 안네마리 쉼멜, 김영경 옮김, 『이슬람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9.
3) 한스 큉, 손성현 옮김, 『한스 큉의 이슬람: 역사, 현재, 미래』, 시와진실, 2012.
4) 손주영, 『이슬람: 교리, 사상, 역사』, 일조각, 2005.
5) 정수일, 『이슬람 문명』, 창비, 2002.
6) 프랜시스 로빈슨 외, 손주영 외 옮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이슬람사』, 시공사, 2002.
7) 버나드 루이스 엮음, 김호동 옮김, 『이슬람 1400년 (개역판)』, 까치, 2001.
8) 김정위, 『이슬람사상사』, 민음사, 1987.
9) 김정위, 이희수, 손주영, 김영경, 황병하, 『이슬람 사상의 형성과 발전: 이슬람 종파 형성 과정과 현황 연구』, 아카넷, 2000.
10) 버나드 루이스, 서정민 옮김, 『무엇이 잘못되었나: 서구와 중동, 그 화합과 충돌의 역사』, 나무와숲, 2002.
11) 카렌 암스트롱, 유혜경 옮김, 『마호메트 평전』, 미다스북스, 2002.
12) 김용선, 『코란의 이해』, 민음사, 1990.
13) 김용선 옮김, 『코란(꾸란)』, 명문당, 2002.
각주 1
칼리파(Khalifah)는 원래 알라의 사도, 즉 무함마드의 대리인이란 의미인데 자츰 정교가 통합된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뜻하게 되었다. 술탄(Sultan)이 이슬람 제국의 한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적 지배자라면 칼리프는 이슬람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정치적, 종교적 최고 통치자이다.
각주 2
순니파에게 이맘은 단순히 꾸란을 잘 알고 가르치는 법학자나 선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맘은 사제 계급이 아니다. 하지만 시아파에게 이맘은 칼리파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시아파는 이맘의 호칭을 제4대 칼리파인 알리의 후손들에게만 사용한다.
- 칼리파(Khalifah)는 원래 알라의 사도, 즉 무함마드의 대리인이란 의미인데 자츰 정교가 통합된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뜻하게 되었다. 술탄(Sultan)이 이슬람 제국의 한 지역을 통치하는 정치적 지배자라면 칼리프는 이슬람 제국 전체를 다스리는 정치적, 종교적 최고 통치자이다. [본문으로]
- 순니파에게 이맘은 단순히 꾸란을 잘 알고 가르치는 법학자나 선생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맘은 사제 계급이 아니다. 하지만 시아파에게 이맘은 칼리파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시아파는 이맘의 호칭을 제4대 칼리파인 알리의 후손들에게만 사용한다. [본문으로]
힌두교
2017-10-31 17:14:49
1. 힌두교라는 말은 서구인들이 인도의 종교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이다. 하지만 힌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사다나(sadhana)라고 부른다. 넓은 의미에서 힌두교는 인도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을 일컫는 말이지만 좁은 의미로는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는 종교를 의미한다. 따라서 좁은 의미에서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는 힌두교에서 제외된다.
2. 기원전 3000-2000년전경 인도 서북쪽 인더스강 연안에는 인더스 문명이라고 불리는 소규모 도시 국가가 상당수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유적이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이다. 이 고대 인도의 토착민은 오늘날 드라비다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오늘날 드라비다족은 주로 안도 남부에 거주하며 피부가 상대적으로 검고 체구가 작다. 인더스 문명을 다른 고대 문명과 달리 아직 문자가 해독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문자 해독을 위한 사료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풍성한 결실을 비는 풍요의 여신을 숭배한 것으로 보이며 시바신을 연상하게 하는 점토판도 발견되었다. 하인리하 짐머는 인더스 문명은 힌두교 전통에 두 가지 중요한 공헌을 했는데 그것은 첫째는 우주를 음양으로 보았을 때 음에 해당하는 여성성 혹은 창조성(삭티)를 강조한 것이고 둘째는 윤회 사상을 남긴 것이라고 말한다.
3. 기원전 1500년경 지금의 이란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리안족은 인도 서북쪽을 침공해 인더수 문명을 정복하고 아리안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다. 이들은 신에게 드리는 예배의식을 위해 노래를 지어부르고 나중에 이를 모아서 베다라고 불렀다. 베다는 앎, 지식, 지혜라는 의미다. 힌두교에는 종교 문헌을 "슈루티"와 스므르티"로 구분하는데 슈루티는 들은 것이라는 의미로 신이 직접 말해준 것이고 스므르티는 기억한 것이란 의미로 인간이 인간이 저술한 것을 가리킨다. 힌두교에서 베다는 신의 직접 계시로 주어진 슈루티로 간주된다. 베다(veda)는 고전 힌두교의 핵심 경전으로서 신이 직접 계시한 "슈루티"문헌이다. 베다는 약 1000년의 기간동안 서서히 형성된 경전으로서 리그 베다(찬송집), 아주르 베다(제문집), 사마 베다(예식집), 아타르바 베다(주술집)의 네 권이 있으며 각각의 베다는 삼히타(본집: 신들에 대한 찬가), 브라흐마나(제의서: 제의 지침서), 아란야카(신림서: 제의 해석서), 우파니사드(사색서: 명상적 사색서)의 네개 쳅터로 구성되어 있다. 베다의 종교 사상은 자연숭배라고 할 수 있는데 76개의 자연 대상물이 의인화되고 신격화되어 찬양과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예를 들면 태양의 신은 수리아, 불의 신은 아그니, 폭풍의 신은 인드라 등) 힌두교는 이렇게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지만 다신교와는 달리 많은 신을 인정하되 그 중에서 어느 한 신을(각자가 자신에게 필요하고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신)을 골라 섬기는 형태인데 막스 뮐러는 이것을 유일신론(monotheism)과 구별하며 단일신론(henotheism)이라고 규정했다.
4. 기원전 1000년경 베다 후기 시대에는 "브라흐마나"라는 제의 지침서가 형성되는데 이 문헌은 베다의 브라흐마나 챕터를 집대성한 것으로서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이 제사를 지낼 때 필요한 제사요람으로서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시대는 제사를 통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제사절대주의 시대인데 이로 인해 제사장 계급인 브라만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5. 기원전 900-700년 경에는 "우파니사드"라는 문헌이 형성되는데 우파니사드란 학생이 스승 가까이에 경건하게 앉아서 우주와 인생의 깊은 뜻을 찾아 서로 문답한다는 의미다. 우파니사드는 베다 문헌 중에서 우파니사드 부분을 모아 편집된 것이다. 베다 시대에서 구원의 수단으로서 기도가 중시되고 브라흐마나 시대에서는 제사가 중시되었다면 우파니사드 시대에는 이해 혹은 깨달음이 강조되었다. 우파니사드에서는 우주의 궁극실재인 "브라흐만"이 나 자신의 참된 본질곧 "아트만"(자아)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브라흐만은 단순히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본질이며 참된 자아(아트만) 자체다. 나 자신은 바로 브라흐만이 구체화된 상태로서 나는 곧 브라흐만이다. 이것을 산스크리트어로 탓 트밤 아시(tat tvam asi)라고 하며 한자어로 "범아일여"1라고 한다. 이렇게 내가 곧 브라흐만이요 브라흐만이 나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바로 아비댜(무명)이요, 이를 몸소 체득해서 깨닫는 것이 목샤(해탈)이라고 본다. 범아일여 사상은 힌두교의 범신론(신이 세상을 만들고 세상 속에 들어와 세상의 본질이 되었으므로 신은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파니사드 시대에 불교가 등장하는데 우파니사드 힌두교에서 자아를 신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자아나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6. 불교와 자이나교의 등장으로 힌두교는 위기의식을 갖게 되고 자체 개혁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등장한 경전이 "마누법도론"이다. 경전을 신의 계시(슈루티)에서 인간의 저술(스므르티)로 생각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기원전 300년-기원후 300년 사이에 형성된 "마누법도론"이 바로 스므르티 문헌이다. 마누법도론은 힌두교의 실제 종교 생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문헌으로서 사성제도, 삶의 네 단계, 삶의 네가지 목적 등을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사성제도(카스트제도)는 사람을 바르나(varna: 색깔)에 따라 제사장 계급의 브라만, 무사계급의 크샤트리아, 상공인이나 농부 등의 장인계급의 바이샤, 단순 노동자나 종에 속하는 수드라 그리고 그 밑으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불가촉 천민으로 나누었다. 마누법도론은 리그베다에 근거하여 이 네 계급이 각각 신의 입, 팔, 넓적다리, 발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태어난 계급에 맞는 역활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거기에 따르는 법을 지키는 것이 종교 생활에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마누법도론은 또한 삶의 네단계를 가르치는데 이는 출가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우파니사드의 비대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삶의 네 단계는 사성제도에서 상류 세 계급의 사람이 평생을 통해 지나가야 할 네 단계를 제시한 것인데 수드라나 불가촉 천민은 제외된다. 그들은 베다를 읽거나 읽는 것을 들어서도 안된다. 마누 법도론이 제시하는 삶의 네 단계(바르나슈라마다르마)는 학생기(8-12세까지 집을떠나 스승과 지내며 베다 등 경전을 배우는 시기), 가장기(결론하고 자식을 기르는 등 사회에서 주어진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시기) , 은둔기(자식이 장성하고 가장이 의무를 마치고 숲으로 들어가 명상도하고 신에게 제사도 지내는 시기), 유랑기(부인과도 결별하고 완전히 속세를 떠나 걸식하며 고행과 명상에만 전념하는 시기)로 구성된다. 마누법도론은 삶의 네 가지 목적도 제시하는데 그것은 쾌락(카마: 성적 쾌락을 중심으로 하는 삶의 즐거움), 부(아르타: 재산의 축적), 의무(다르마: 법을 지키며 사회적 의무를 다하는 것), 해탈(목샤: 가장 궁극적인 최종 목표)이다. 마누법도론이 카마와 아르타를 긍정하고 삶의 목적으로 제시한 것은 흥미롭다. 하지만 카마, 아르타, 다르마는 궁극적 목적인 목샤에 비하면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목적일 뿐이다.
7. "바가바드 기타"는 기원전 200-기원후 300년 시기, 마누법도론보다 약간 늦게 형성된 스므르티 문헌인데 이 문헌 역시 불교나 자이나교의 도전에 대한 힌두교의 자체 개혁을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 문헌은 힌두교 종교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급진적인 경전이었다. 바가바드 기타에는 이전까지의 힌두교의 모든 종교사상이 흘러 들어가 있고 또 고기서 이후 모든 종교 사상이 흘러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힌두교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경전이다. 전통적으로 힌두교는 목샤)해탈)을 이루기 위해 두 가지 길을 제시해 왔다. 그것은 계율이나 도덕규범을 잘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은 행위의 길(카르마 마르가)와 궁극 실재를 꿰뚫어 보는 통찰과 직관과 예지 등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의 길(즈냐냐 마르가)였다. 그런데 바가바드 기타는 제 3의 길로서 신애의 길(박티 바르가)를 제시했는데 이는 구원을 위해 신애가 가장 중요함을 강조한 것이다. 심지어 이 문헌은 여자나 낮은 계급인 수드라, 불가촉 천민도 크리슈나를 경배하고 사랑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힌두교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이것은 인도 종교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인 셈이다. 불교도 같은 맥락에서 해탈에 도달하는 능력을 성별이나 계급에 따라 구별하지 않았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비슈누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인간이 필요할 때 여러 모양으로 세상에 나타난다는 아바타르("화신사상")도 말하고 있다.
8. 베다로 시작된 힌두교의 고전시대는 바가바드 기타와 함께 끝이 난다. 베다와 함께 나타난 다신론 혹은 단일신론 종교, 브라흐마나에 나타난 제의적 종교, 우파니사드에 나타난 철학적 종교, 바가바드 기타에 나타는 헌신의 종교 등이 힌두교 고전 시대에 속한다. 고전 이후의 힌두교에서 나타난 중요한 종교현상은 삼신 숭배와 철학적 학파들의 등장이다. 고전 이후 힌두교에서는 세 신이 크게 부각되는데 그것은 창조의 신 브라흐마(우파니사드에서 말하는우주의 궁극 실재 브라흐만이 아님), 파괴의 신 시바, 그리고 보존의 신 비슈나로서 이 신들 중 하나를 믿으면 목샤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브라흐마는 창조신으로 존경받고 있지만 그에게 경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로 잊혀진 신(데우스 오티오수스; deus otiosus)이었고 실제로 많이 숭배되는 신은 비슈누 신과 시바 신이었다. 비슈누 신은 보전의 신,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신으로서 인류를 돕기 위해 여러거지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고 믿어졌다. 시바 신은 파괴와 죽음의 신이다. 그러나 시바의 파괴는 건설을 위한 파괴로서 많은 수행자들이 시바를 경배하는 것은 옛 자아를 죽이고 새 자아로 태어나는데 시바가 도움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시바는 춤의 신이며 생식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다. 고전 이후 힌두교에서는 여신도 숭배의 대상이 되는 삭티 신앙이 등장하는데 비슈누의 아내인 락슈미는 풍요, 부, 승리의 여신으로, 시바의 아내인 칼리는 피, 복수, 암흑의 여신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삭타 신앙은 힌두교가 페미니스트에게 높은 평가를 받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9. 고전 이후 힌두교에서는 신을 숭배하는 것만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깊이 천착함으로써 목샤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을 통칭하여 "인도 정통 육파펄학"이라고 하는데, 쌍키야, 요가, 미만사, 바이세시카, 나야, 베단타 학파가 그것이다. 이들을 정통 힌두교로 간주하는 근거는 이들이 베다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점이다. 형식적으로라도 베다의 권위를 인정하면 힌두교의 정통 철학으로 인정되었다.
10. 근대에 이르러 현대문명의 도전으로 인해 힌두교는 변화를 겪게 되는데 특히 18세기 영국이 인도를 식민통치하면서 서양 문명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힌두교 내부에 개혁운동이 전개된다. 예를 들면 람 모한 로이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함께 화장 당하는 사티 제도와 열살도 채 안된 여자 아이를 중년 남자와 결혼 시키는 어린이 조혼 제도를 선교사와 협혁하여 불법화시켰고 기독교의 영향으로 힌두교의 다신 숭배와 우상숭배적 경향을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라마크리슈나는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모두 체험해보고 결국 이 종교들이 근본적으로 같은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며 산 정상은 하나지만 그리고 올라가는 길은 여럿이라고 주장했다. 간디의 경우 힌두교뿐 아니라 자이나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고 이런 다양한 종교 전통의 지혜를 토대로 현실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특히 간디는 아힘사(비폭력)과 진리 파지(사키아그라하) 원칙에 근거해 영국으로 부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간디는 불가촉 천민을 차별하는 것이 불법임을 헌법에 명시하기도 했다. 인도는 18세기 영국의 식민지기 되기 전에 여러 세기 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고 그 결과 피키스탄이나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국가가 되었고 인도 내에도 이슬람 교인이 많다. 일부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은 인도를 완전한 힌두교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슬람과 충돌을 빚기도 한다. 시크교인인 대부분은 펀자브 지방도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힌두교를 더 이해하기 위한 책 소개
1) 류경희, 『인도의 종교와 종교문화』,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2) 류경희, 『인도 힌두신화와 문화』,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3) 가빈 플러드, 이기연 옮김, 『힌두교, 사상에서 실천까지』, 산지니, 2008.
4) 존 M. 콜러, 허우성 옮김, 『인도인의 길 (제2판)』, 소명출판, 2013.
이상 4권은 종교로서의 힌두교에 대해 체계적으로 저술한 책들이다.
5) 길희성, 『인도철학사』, 민음사, 2001.
6) 라다크리슈난, 이거룡 옮김, 『인도철학사 1,2,3,4』, 한길사, 1996-1999.
이상 2권은 철학으로서 힌두교를 연대 순서로 다루었다.
7) R. 뿔리간들라, 이지수 옮김, 『인도철학』, 민족사, 1992.
8) 사티스찬드라 찻테르지, 디렌드라모한 닷타, 김형준 옮김, 『학파로 보는 인도 사상』, 예문서원, 1999.
이상 2권은 철학으로서 힌두교를 학파별로 다루었다.
9) 미르치아 엘리아데, 김병욱 옮김, 『요가: 불멸과 자유』, 이학사, 2015.
이 책은 요가를 중심으로 힌두교를 설명한다.
10) 이재숙 옮김, 『우파니샤드 1,2』, 한길사, 1996.
11) 박경숙 옮김, 『마하바라따 1,2,3,4,5,6,7,8』, 새물결, 2012-2017.
12) 길희성 역주, 『바가바드 기타 (범한대역)』,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13) 이재숙, 이광수 옮김, 『마누법전』, 한길사, 1999.
이상 4권은 힌두교의 주요 경전들을 소개하고 있다.
각주 1
힌두교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보는 서구적 이원론이 아닌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을 아루는 하나의 실재가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아트만(자아) 혹은 프류사(정신)이라고 부른다.
- 힌두교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보는 서구적 이원론이 아닌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을 아루는 하나의 실재가 있다고 보는데 이것을 아트만(자아) 혹은 프류사(정신)이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불교
2017-11-07 01:03:53
1. 불교가 등장한 이유는 베다에 의존해온 전통적인 힌두교가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힌두교는 주로 수행자나 제사장 중심의 종교가 되어 대중들로 부터 분리되기 시작함) 주전6세기 들어 육사외도라는 다양한 종교 사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불교도 이 때 등장했다. 초기 불교는 붓다가 열반에 든 후 교단이 분열하기까지(붓다 사후 약100년)의 불교를 말하는데 아함경에서 묘사하는 초기 불교의 핵심 교리는 연기, 삼법인, 사성제, 오온 등으로 요약된다. 연기란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사상인데 이것이 인과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삼법인은 불교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세 가지 표지라고 할 수 있는데 제행무상(모든 것은 변한다), 제법무아(모든 것은 자아가 없다), 일체개고(모든 것은 고통이다)가 그것이다. 사성제는 고성제(모든 것은 고통이다), 집성제(고통의 원인은 무명과 애욕이다), 멸성제(무명과 애욕을 제거하면 고통이 사라진다), 도성제(무명과 애욕을 제거하는 수행법으로 팔정도를 제시)이다. 팔정도는 무명(어리석음)과 애욕의 주체인 자아나 무명과 애욕의 대상이 모두 허상임을 깨닫기 위한 수행방법이다. 초기불교는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를 물질적인 요소인 색과 정신적인 요소인 수, 상, 행, 식으로 보았으며 죽음이란 이 다섯 요소가 분리되는 것으로 설명했다. 초기불교는 붓다와 구별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른 자를 아라한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역사적 붓다의 유일성을 주장한 것이다. 아라한은 붓다와 동일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지만 선업에서는 붓다에 못미친다. 그래서 붓다는 중생을 구원할 수 있지만 아라한은 자기만을 구원할 수 있다. 초기 불교에 대한 이런 묘사와 관련해 주목할 점은 이런 설명은 부파불교의 관점을 반영한 것으로서 사실상 초기 불교 그 자체에 대해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2. 붓다 사후 100년이 지나면서 승단이 교리상의 문제로 여러 부파로 분열되는데 이 때 가장 대표적인 승단이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인 대중부였다. 부파불교 시대에는 여러 부파가 교리와 실천에 관한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됨으로 이 시기를 아미달마(논쟁이란 의미) 불교 시대라고 부른다.부파불교 교학의 총체는 바수반두(세친)의 "아비달마 구사론"에 정리되어 있다. 부파불교는 수행자 중심, 개인적 사변적 성격 때문에 점점 대중들로 부터 외면을 당하면서 쇠퇴하게 된다. 부파불교에서 대중부는 소멸되지만 상좌부는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출가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상좌부 불교가 대중들의 외면을 받으면서 이에 대한 반성으로 대승불교가 등장하게 된다. 대승불교는 상좌부 불교를 비하하는 호칭으로 소승불교라고 불렀는데, 소승불교(상죄부 불교)가 개인의 구원에 촛점을 맞추었다면 대승불교는 중생의 구제를 목적으로 했다. 중생의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대승불교는 보살(보리살타의 준말)을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제시했는데 보살은 열반에 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의 열반을 유예한 사람이다. 대표적인 보살이 지장보살인데 그는 중생을 위해 지옥에 내려간 보살로서 지옥의 모든 중생을 구제한 후에 붓다가 되겠다고 서원한 보살이다. 소승불교가 아라한이 되기 위해 개인의 열반을 추구한 반면에 대승불교는 보살이 되어 모든 중생을 구제하려고 했다. 그래서 역사적 인물인 고타마 싯달타를 유일한 붓다로 인정하는 소승불교와 달리 대승불교는 누구든지 수행을 통해 붓다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대승불교에서는 붓다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불탑신앙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출가자가 아닌 대중들이 붓다의 공덕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대승불교의 양대 교파로는 "공 사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중관학파와 "일체유심조와" 여래장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식학파가 있다.
3. 이상하게도 중국, 한국 일본에서 대승불교가 번성함과 동시에 인도에서는 불교가 급속하게 쇠퇴했다. 인도에서는 서기 7세기 이후 불교가 꾸준히 쇠퇴하게 되었다. 이는 6세기 훈족이 인도 북부를 침공하여 불교 수도원을 약탈 파괴하고 불교 지도층을 와해한 것도 한 원인이겠지만 이런 외적인 요인은 사실 오랫동안 불교가 가진 내적인 취약성과 결합되었기 때문에 불교 쇠퇴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불교는 출가자 중심으로 운영되어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던데 반해 힌두교의 브라흐민들은 대중의 삶을 감싸주는 각종 길흉사와 관련된 의례를 충실하게 집전해주었다. 그리고 힌두교의 비쉬누 신자들이 서기 4세기 경부터 붓다를 비쉬누의 아홉번째 화신으로 수용하게 된 것도 불교의 독자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개혁된 후가 힌두교에 점점 신도들을 빼앗기게 되자 불교는 무지한 중생들을 교화시키는 방편으로 점차 주술화되고 시각화되어 주문을 외우거나 조각을 보는 것을 통해 불법을 깨닫고 열반에 이르려는 밀교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교적 밀교는 점차 힌두교화되었고 결국 밀교를 끝으로 불교는 인도에서 완전히 쇠퇴하게 된다. 마지막 치명적인 강타는 12세기 이슬람의 인도 침공으로 불교의 마지막 거점이 무너짐으로 불교는 인도에서 소멸되었다.
4.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시기는 후한 시대로 추정된다. 불교는 "격의불교"의 형식을 통해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격의불교란 인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중국의 도가철학의 옷을 입고 들어왔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공 개념이 도가의 무위 개념으로 변질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불교의 왜곡을 의미하는 것으로 후대에 이르러 이런 왜곡을 바로 잡고자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불교 경전의 번역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점차 불교의 원래적 모습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불교는 중국에 전래된 후에 중국화되어 삼론종, 유식종,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선종 등의 중국 불교가 형성되었다. 특히 선종은 가장 중국화된 불교로서 언어와 경전을 경시하고 직관을 통해서만 진리가 깨달아짐을 강조했다. 선종은 언어를 불신하는 중국의 도가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일부 서양학자들은 선종은 사실상 불교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불교는 중국을 통해 한국의 삼국 시대에 전래되었는데 초기에는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이차돈의 순교 이후에 점차 대중들에게 확산되었다. 신라의 원효(화엄, 정토) 고구려의 지눌(선) 등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불교를 개혁하고 대중화시켰다. 고려시대에 불교는 국교로 지정되어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으나 조선새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억압을 받았다. 한국 불교에는 승려들이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호국 불교의 전통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전통과 모순된다. 호국불교는 불교가 정치적 이데올로기화한 결과로 평가된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주류는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선종이다.
5. 티벳불교는 티벳 특유의 법왕제도인 달라이라마 제도로 인해 '라마교'라고도 불린다. 티베트 불교는 밀교의 일종으로서 자신들의 전통신앙인 샤머니즘과 불교가 혼합되어 현세기복적이고 주술적인 것이 특징이다. 총카빠는 "보리도차제론"을 통해 티베트 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붓다가 되기 위한 이상적은 수행체계를 제시했다. 보리도차제론은 수행의 3단계를 강조하는데 첫 단계가 선행을 통해 내세의 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둘째 단계는 지혜의 추구를 통해 해탈에 이르는 것이고 셋째 단계는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더 읽어야 할 책들.
1) 케네스 첸, 길희성, 윤영해 옮김, 『불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994.
2) 소운, 『하룻밤에 읽는 불교 (개정판)』, RHK, 2014.
3) 교양교재편찬위원회, 『불교학 개론 (개정판)』, 동국대학교출판부, 2008.
4)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편찬위원회,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1999.
5)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불교 입문 (2017년 개정판)』, 조계종출판사, 2017.
6) 오강남,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현암사, 2006.
7) 길희성, 『보살 예수』, 현암사, 2004.
8) 이명권, 『예수, 석가를 만나다』, 열린서원, 2017.
9) 캐린 듄, 황필호 옮김, 『석가와 예수의 대화』, 다미원, 2000.
10) 래비 재커라이어스, 이상준 옮김, 『인생: 예수와 부처의 위대한 대화』, 두란노, 2002.
11) 고익진 엮음, 『한글 아함경 (재개정판)』, 담마아카데미, 2014.
12) 법정 스님 서문, 김용옥 지음,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통나무, 1999.
13) 쫑카빠, 양승규 옮김, 『보리도차제약론』, 시륜, 2006.
유교(Confucianism)
2017-11-16 01:55:32
1. 유교는 종교인가? 유교의 종교성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들이 있는데 첫째로 유교에는 신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시 유교는 "천"이라는 신의 존재를 인정했고 이를 근거로 명나라 때 마테오리티는 자신의 저서 "천주실의"에서 보유론을 주장했다. 신유교에서는 초월적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지만 원시유교에서 신앙되던 "천"이 신유교에서는 "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천"이 사물 외부의 초월적 존재임에 반해 "리"는 사물 안에 있는 내재적 원리임은 사실이지만 초월적 신의 존재 유뮤가 종교와 비종교를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초기 불교도 초월적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초월적 신의 존재 유무로 종교와 비종교를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 신관에 의한 편견의 산물이다. 그래서 종교사학자 막스 베버는 신의 종류를 초월적 신과 내재적 신으로 구분했다. 원시 유교가 초월적 신을 믿었다면 신유교는 내재적 신을 믿었다고 보아야 한다. 혹자는 유교는 종교라기 보다는 도덕과 윤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유교를 도덕과 윤리로만 환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교의 도덕과 윤리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다분히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유교는 도덕과 윤리를 "예"라고 하는데 이것은 유교의 궁극적 실재인 "천"이나 "리"에서 온 것으로서 궁극실재의 질서가 외현화된 것이다. 유교가 사후세계보다 현실세계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교에도 사후세계에 대한 교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설령 사후세계에 대한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유교가 종교가 아니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오늘날 유학자들 스스로 유학이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근래의 종교 개념에 대한 반발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종교는 여러가지 이유로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게 되었고 하여 일부 유학자들은 유교를 종교의 범주에 두어 현대인들에게 부정적 느낌을 주기보다 유교의 철학적 성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2. 흔히 유교는 공자가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공자가 유교를 새롭게 발명한 것은 아니고 주나라 때 부터 내려온 전통과 문명을 공자가 창조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공자는 자신이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을 전수했을 뿐이라고(술이부작) 하지만 유교의 가르침이 공자로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공자는 춘추전국 시대에 노나라에서 출생하여 정부에서 관리로 일하기도 했으나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유랑 생활을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공자가 집대성한 유교 사상은 전국 시대에 이르러 맹자와 순자의 사상으로 분화되었다. 맹자는 공자의 사후 100년 경에 태어난 사람인데 공자의 손자 자사에게서 배우며 공자의 사상을 변호하고 전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맹자 당시에 공자 사상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했는데 훗날 맹자의 해석이 적통으로 인정받게 된다. 순자는 맹자의 공자 해석에 반대하고 자신이 공자를 제대로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제자들을 가르쳤고 한 때 유교의 주류로 자리잡기도 했다. 유교는 전.한 시대에 국교로 채택되어 효에 대한 연장으로서 국가와 왕에 대한 충성이 강조되었고 국가를 떠받치는 정치철학이자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다른 제자백가 사상에 대한 유교의 본격적인 우위가 이 무렵 시작되었다.
3. 공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춘추전국 시대의 사회적 혼란을 해결할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공자는 이름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의 "정명"을 주장했는데 이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공자는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야 할 도덕적 특질로 "인"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사람됨을 의미했다. "의"는 나의 이득과 관계없이 그것 자체로 옳은 것을 의미하는데, 공자는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고 말했다. 공자는 충과 서에 대해서도 가르쳤는데 충이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서는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마음이다. 공자의 이런 가르침은 내세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세중심적이었는데, 사람도 잘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이야기 하겠는가? 이생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는 그의 말이 공자의 현세중심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공자가 내세를 부정한 것은 아니고 현세의 우선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공자는 유교의 이상적 인간상으로 군자와 성인을 제시했는데 군자가 불교의 보살과 같은 중간자적 존재라면 성인은 붓다와 같이 완성된 존재를 이른다. 맹자의 기본적 가르침은 성선설과 호연지기로 요약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착하므로 누구나 네 가지 착한 본성인 "사단"(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이 착한 네가지 인간 본성을 잘 개발하면 "인의예지"의 덕성이 형성되고 이를 극대화하면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맹자는 인간이 선한 본성을 개발하여 이기심을 줄이면 나와 남의 구별조차 사라져서 우주와 내가 하나가 되는 대자유의 경지에 이른다고 가르치며 이 경지를 호연지기라고 불렀다. 순자는 맹자의 이상주의에 반대하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은 본래 악하므로 엄격한 훈련을 통해 선한 성품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통제하는 엄격한 사회적 조직과 스스로 그런 욕망을 억제하는 "예"가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이런 순자의 생각은 법가 사상으로 이어져 전시황 재위시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당.송에 이르러 신유교에 의해 맹자가 유교의 적통으로 자리 잡은 후 순자의 영향력은 크게 쇠퇴하였으나 훗날 모택동에 의해 다시 부각되었다.
4. 당나라 시대에는 황제가 도교와 불교를 신봉하여 유교는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또한 대중의 초월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함으로 유교는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이에 당송 시대에는 한유 등의 유학자들이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고 유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도교와 불교에 맞서 유교가 스스로 대개혁을 단행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신유교(성리학)이다. 신유교는 한유, 주돈이, 정호, 정이 등에 의해 시작되고 주희에 의해 체계화되고 집대성되었다. 한유는 "원도"에서 "도통설"을 주장하고 맹자를 유교의 적통에 위치시켰으며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유교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체계화했다. 이들은 유교가 도교나 불교에 밀려난 것이 초월적 세계(형이상학)의 부재 때문으로 보고 우교의 형이상학을 정초시키는데 힘썻다. 그리하여 신유학은 형상적 원리인 "리"와 물질적 실체인 "기"를 통해 세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신유학은 "성학"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성인에게서 온 가르침이라는 뜻과 성인이 되기 위한 배움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신유교(성리학)은 정호, 정이, 주희를 중심으로 하는 "리학(주자학)"파와 육구연, 왕수인으로 대표되는 "심학(양명학)"파로 나누어진다. 이 두 학파는 성인이 되기 위한 첫 단계인 "격물치지" 즉 사물을 궁구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 달랐는데 주자학파가 여러 사물 속에서 "리"를 찾고자 한 반면에 양명학파는 "리"가 내 마음 속에 있으므로 마음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주류는 주자학파였고 양명학파는 이단적 가르침으로 배척되었다. 중국 공산당 문학혁명 당시에 공자와 유교는 반동으로 봉건질서의 원흉으로 배척되었지만 현재는 중국 전통문화의 하나로 인정되어 복권이 시도되고 있다. 또한 오늘날 유교는 페미니즘, 생태주의 등 다양한 현대사상의 도전에 응전하고 있다.
더 읽어야 할 책들.
1) 유학과 교재편찬위, 『유학사상』,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6.
2) 김승혜, 『유교의 뿌리를 찾아서』, 지식의풍경, 2001.
3) 시마다 겐지, 김석근, 이근우 옮김, 『주자학과 양명학』, 까치, 2001.
4) 고지마 쓰요시, 신현승 옮김, 사대부의 시대: 주자학과 양명학 새롭게 읽기』, 동아시아, 2004.
5) 금장태, 『한국유교의 이해』, 한국학술정보, 2003.
6) 한국사상사연구회, 『조선유학의 [개념]들』, 예문서원, 2002.
7) 줄리아 칭, 변선환 옮김, 『유교와 기독교』, 분도출판사, 1994.
8) 김승혜, 『논어의 그리스도교적 이해』, 영성생활, 2002.
9) 배요한, 신학자가 풀어 쓴 유교이야기: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유교의 모든 것』, IVP, 2014.
10) 유교문화연구소 옮김, 『논어』,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6.
11) 박경환 옮김, 『맹자』, 홍익출판사, 2005.
12) 김학주 역주, 『대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2.
13) 김학주 역주, 『중용』,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도가철학과 도교
2017-11-28 00:53:59
1. 도가철학은 노자로부터 기원한다고 알려졌지만 노자라는 인물에 대해 역사적으로 밝혀진 것은 거의 없다. 노자는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전설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노자의 사상은 그가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도덕경'에 요약되어 있는데 노자가 전설적인 인물인만큼 도덕경의 저자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사회적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제자백가들이 나름의 대안을 제시했는데 노자 역사 그런 대안들 중의 하나였다. 다만 공자를 비롯한 다른 제자백가들은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도덕적 각성을 촉구하는 "유위의 도"를 제시한데 반해 노자는 그런 '유위'가 오히려 세상을 더 어지럽힌다고 보고 "무위의 도"를 강조했다. 그러나 노자의 '무위자연'은 루소의 자연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를 배척하고 '스스로 그러함'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상이다. 노자는 세상이 도를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도에 대한 온갖 논쟁은 세상을 더 혼란에 빠뜨릴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노자는 도를 회복하려면 모든 논쟁을 중단하고 시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무위자연' 사상이다. 이렇게 노자는 '무위자연'을 말했지만 역설적으로 노자의 철학은 강한 정치성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평가도 받는데, 그것은 노자의 '무위자연' 철학이 기존의 지배체제에 대해 순응하게 만드는 제국의 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 노자에 비해 장자의 역사적 실존은 분명한 편이다. 장자는 기원전 3세기 맹자와 동시대의 인물로서 전국시대 송나라의 옻나무 밭에서 일하며 평생 관직을 멸리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철학은 그의 저서인 "장자"에 담겨 있는데 '내편"만 장자가 직접 쓴 것이고 "외편"과 "잡편"은 후학들의 저술인 것으로 추정된다. 장자의 철학은 편견으로 부터의 해방과 철저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으로 요약된다. 장지는 "도"는 만물의 궁극 실재이지만 동시에 모든 만물에 내재해 있디고 말한다. 또한 장자는 모든 인식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논쟁을 통한 진실의 추구, 미추의 분별, 삶과 죽음의 구별이 무의미하다고 가르쳤다. 특히 그는 쓸모 있음(유위)와 쓸모없음(무위)의 사이에 "도"가 있으므로 이 도를 따라서 처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장자의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이 모두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장자의 목표는 모든 진위, 선악, 미추를 떠나 분별이 없어지는 절대적인 대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3. 도가철학이 노자, 장자, 열자를 중심으로 전개된 철학 사상이라면 도교는 도가 사상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중국의 민긴신앙에서 기원한 토착종교다. 도교는 기원후 2세기 후한 시대에 중국의 민간신앙에(온갖 잡신을 섬기는 백신사상, 불로불사는 추구하는 신선사상, 미래 예언을 추구하는 도참사상) 토대를 두고 형성된 종교로서 불로불사와 신선을 추구한다. 민간신앙의 혼합체였던 도교가 본격적인 종교운동이 된 것은 장도릉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는 당대의 온갖 민긴신앙을 종합해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는 길을 제시했다. 도교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신선이 되길 추구했는데 신선이 되기 위해 수행하는 도교의 승려를 "도사"라고 불렀다. 장도릉은 노자를 신격화하고 노자를 태상노군으로 격상시켰으며 스스로를 태상노군에 의해 봉함을 받은 천사로 칭했고 그를 따르는 종교집단을 천사도 혹은 오두미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도가철학과 인위적으로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도교는 성격이 다른 사상체계이다. 도가철학이 무위자연을 추구한다면 도교는 불로불사를 추구하므로 그 내용은 서로 대립적이기도 하다.
4. 기원후4세기에 이르러 도교의 이론과 수행을 체계화한 인물이 갈홍인데 그는 "포박자"라는 책에서 신선이 되는 구체적인 수행법을 제시했다. 그는 신선이 되는 수행법으로 외적인 도움을 받는 '외단'과 내적인 훈련을 하는 '내단'을 제시했다. 외단은 약초나 금단을 복용하여 손상되지 않는 육체를 만드는 방법과 소녀와의 성관계를 통해 음기를 흡입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의미했다. 내단은 숨을 최대한 천천히 쉬어서 수명을 늘리는 호흡법과 "공과격"을 통한 윤리적 삶의 실천(선행과 악행은 수명과 직접 연관)을 제시한 것이다. 도교의 초기에는 외단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차츰 내단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는데 이는 아마도 외단이 오히려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선의 개념도 원래는 불로불사를 의미했으나 점차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신선이 되는 것으로 변화했다. 현대의 도교는 대만에서 정일교(오두미교의 후예)와 중국에서 전진교(금나라 왕철과 그의 제자인 구처기가 창시)가 교단 도교로서 존재한다. 정일교가 주로 재가수행을 하는 반면에 전진교는 엄격한 출가수행을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 도교는 제도화된 종교보다 민간 신앙으로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중국과 달리 교단 도교가 존재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인 샤머니즘이 도교의 역할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도교가 샤머니즘을 흡수했던 반면에 한국에서는 사머니즘은 도교에 흡수되지 않았다. 오늘날 전세게적인 웰빙 열풍은 불로장생울 추구하던 도교의 현대적 부활로 평가되기도 한다.
더 읽어야 할 책들.
1) 이강수, 『노자와 장자: 무위와 소요의 철학』, 길, 2005.
2) 최진석,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 소나무, 2001.
3) 장자, 안동림 역주, 『장자』, 현암사, 2010.
4) 열자, 김학주 옮김, 『열자』, 연암서가, 2011.
5) 홈스 웰치, 윤찬원 옮김, 『노자와 도교』, 서광사, 1990.
6) 사카이 다다오, 최준식 옮김, 『도교란 무엇인가』, 민족사, 1990.
7) 요시오카 요시토요, 최준식 옮김, 『중국의 도교』, 민족사, 1991.
8) 앙리 마스페로, 신하령 옮김, 『도교』, 까치, 1999.
9) 모종감, 이봉호 옮김, 『중국 도교사: 신선을 꿈꾼 사람들의 이야기』, 예문서원, 2015.
10) 쿠보 노리타다, 정순일 옮김, 『도교와 신선의 세계』, 법인문화사, 2007.
11) 유향, 김장환 옮김, 『열선전: 중국 도교의 70선인 이야기』, 예문서원, 1996.
12) 잔스 추앙, 안동준, 김영수 옮김, 『도교와 여성』, 창해, 2005.
13) 갈홍, 석원태 옮김, 『신역 포박자』, 서림문화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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