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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고대 우주론을 반영하는 창세기 1장 - 존H 월튼

고대 우주론을 반영하는 창세기 1장 - 존H 월튼

2017-12-19 15:24:32


 

고대 우주론을 반영하는 창세기 1 - H 월튼

 

1. 구약성경에 대한 해석

1-1. 유능한(competent) 읽기

구약성경에 대해 유능한 독자가 되려면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문학 장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고대청중의 인지환경에 자신을 맞추어서 그들과 소통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능한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이해했으리라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성서언어를 이해해야 하며 그들이 살았던 문화를 통해 텍스트를 해석하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유능한 독서는 화행이론(speech-act theory)에서 말하는 발화행위(locution)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창세기의 우주론이 고대의 공통우주론과 같은 자리에서 출발하며 같은 언어개념들을 사용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창세기를 고대근동의 인지환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1-2 .윤리적(ethical) 읽기

유능한 독서가 성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도록 우리를 인도해 준다면 윤리적 독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서 텍스트의 가르침을 타당한 것으로 여기고 수용하도록 해준다. 유능한 독서가 발화행위와 관련된다면 윤리적 독서는 발화수반행위와 관련된다. 장르나 맞춤(accommodation)은 발화단계에서 발생하는 행위이며, 성서의 무오성과 권위는 발화수반행위에 해당한다고 이해하다면 성서의 권위가 장르나 맞춤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다. 신학적 관점이야말로 성서의 발화수반행위의 핵심이다. 신학적 관점은 이스라엘을 주변의 고대근동 문화로부터 분명히 구분해준다.(발화행위는 공통적이지만 발화수반행위는 독특하다는 의미) 그런 발화수반행위는 그들의 우주지리학이나 인과관계 개념들(발화행위들)을 바꾸지 않더라도 달성될 수 있다. 발화행위들에는 권위가 없다. 따라서 성서 텍스트의 발화수반행위들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 한 다양한 발화행위들은 수용 가능하다.

 

2. 고대근동의 인지환경

2-1. 기능창조론

a. 고대 근동, 성서의 세계에서 사물은 그것이 물리적 형태를 가졌을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잡힌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이름과 역할을 가질 때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물질(material) 우주존재론이 아니라 기능(functional) 우주존재론이다. 따라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즉 무언가 존재하게 한다는 것은) 그것에 기능이 주어짐을 의미할 뿐, 물질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이렇게 기능 존재론을 중시하는 경향은 수메르, 아카드, 이집트 문학에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b. 성서의 우주론은 물질의 부재에서 시작하지 않고 기능의 부재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창조가 시작되는 창세기12절에는 이미 어떤 물질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래서 토후 바보후(혼돈하고 공허)했다. “토후는 형태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기능의 부재를 나타난다. 창세기1장을 물질중심의 해석이 아니라 기능중심으로 해석하면 물질창조 활동의 시간 순서는 중요하지 않으며 창조의 날 대부분에는 물질과 관련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명백히 물질과 관련된 질문이다. 만약 창조기사가 물질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우리는 창조기사에서 무로부터 창조를 언급할 만한 어떤 근거로 기대하기 어렵다. “무로부터 창조는 철학적, 논리적 결론일 뿐, 창조기사에서 직접 도출된 결론이 아니다.

 

c. 기능적 관점에서 물질적 관점으로 넘어가게 된 이유는 알렉산더 이후 헬레니즘과 그리스 사고가 고대세계에 유입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영향으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우주의 물질 양상에 과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과학의 발전으로 물질우주라는 개념이 깊이 자리 잡게 되었다. 헬레니즘이 고대 근동의 사고방식을 지워버린 것이다. 고대문헌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이 사실은 숨겨져 있었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들을 분석하여 고대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기능창조의 관점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물질우주를 창조하시기 위해 진화과정으로 인식되는 방법들을 사용하셨을 가능성을 고려하도록 허용한다.

 

2-2. 우주성소론

a. 고대 근동 인지환경에서 우주는 성소와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성전은 단순히 어떤 사소한 점에서 우주와 비슷한 게 아니라 본질상 우주다. 성전을 우주로 간주하는 증거는 고대근동 문헌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함으로 나온 결과다. 성전은 미시 우주(micro-cosmos)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성전건축은 때때로 창조와 관련된 텍스트의 일부로 관찰된다. 이런 방식으로 성전은 우주에 내재하며 그 중심을 차지한다. 현대인은 창세기1장을 읽으면서 성전이나 성소를 연상하기 거의 불가능하지만 고대 독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b. 어떤 고대인이라도 인식할 수 있었지만 현대 독자가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것이 성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안식이다. 창세기1-2장에서 우주는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성소로 간주된다. 고대 근동에서 신들은 성전이 세워짐으로 그 안에서 안식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전이 신들의 집이고 거처였음을 나타낸다. 이런 문맥에서 신의 안식은 무관심이 아닌 관련성을 의미하며 휴식이 아닌 활동을 의미한다. 이 관점은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창조기사의 일곱째 날을 해당 단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우주에 궁극적으로 질서와 기능을 가져오는(창조하는) 행동이 우주적 성전을 만드시고 그 안에서 안식하시는(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c. 고대근동에서 신이 성소의 가운데 위치하고 안식을 누릴 때 성전은 기능하게 되었으며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창세기1장의 모든 기능과 질서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관련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인간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면 기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없다면 성전은 무의미하며 이는 우주도 마찬가지다. 성전은 본질상 관계적(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이며 창세기1장은 우주를 같은 관점으로 대한다. 우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였으며 하나님은 우주가 인간을 위해 기능하게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이 세우신 부통치자였으며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옷 입혀졌다.

 

3. 결론

3-1. 창세기 본문은 우주성전이 지닌 기능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서 물질의 기원에 관한 현대과학의 관심과 상관이 없으며 물질의 기원에 대한 성서의 관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만약 창세기1장이 기능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것은 물질에 대한 어떤 견해도 제시하지 않으며, 그 경우 성서는 지구의 나이에 대해 어떤 견해도 제공하지 않는다. 첫 번째 창조기사(1:1-2:3)과 두 번째 창조기사(2:4-25) 사이에 서로 충돌이 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주로 두 창조기사가 물질의 창조를 알려준다고 기대하는데서 나타난다. 두 창조기사는 성소의 질서수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주 잘 들어맞는다. 첫 창조기사는 우주적 단계에서 이 주제를 다루며 둘째 기사는 지상적 단계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첫 기사에서 우주는 곧 성소이며 인간을 위해 기능한다면 둘째 기사에서 사람들은 성소 안에 위치하며 성소를 위해 기능한다.

 

3-2. 과학과 공리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주를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청지기로 묘사하는 성서 텍스트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에 질서를 가져오는 창조행동에 이바지할 책임이 있는 자이다. 이것은 지구를 이용만하고 그것을 무질서에 빠뜨리는 인간의 역할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우주기원에 대해 오직 물질적 관점만 수용된다면, 하나님의 창조는 먼 과거에 수행되고 완성된 과업일 뿐이다. 이 경우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하는 것은 현재와 거의 완전히 단절된 일종의 역사적 진술이 될 뿐이다. 그러나 기능창조론과 우주성소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우주의 통치지이시며 무질서의 위협에 맞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활발히 관여하신다. 창조를 이렇게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은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며 다스리시기 위해 우주성소의 중앙에 거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부통치자인 인간은 하나님의 성소인 우주에서 책임 있는 자세로 청지기 역할을 감당해야 할 존재임을 인식하게 된다.

 

 

 H. 월튼에 대한 평가

 

1. 에이버벡은

월튼이 창세기1장의 발화에 상당한 정도로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수용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에이버벡은 성서는 고대 근동 세계관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그 세계에 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에이버벡은 창세기1장은 단지 하나님의 성전 봉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물질세계의 실제 형성을 다룬다고 주장한다. 에이버벡은 월튼이 기능적 창조만을 강조하고 칭세기 1장에서 물질적 창조에 관한 언급을 배타적으로 제거하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에이버벡은 창조기사가 2절에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므로 창세기1장을 물질 창조에 관한 기사로 볼 수 없다는 월튼의 주장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왜나햐면 기능을 창조한다는 것은 물질 창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2. 토드 비일은

창세기1-11장에 대한 월튼의 견해는 매우 새롭고 창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일 윌튼의 관점이 옳다면 과학과 창세기1장 사이에는 어떤 충돌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일은 월튼이 창세기1-2장을 해석하면서 지나치게 고대 근동 문헌에 의존해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비일이 고대 근동문헌의 유용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월튼이 창조기사를 해석해주는 신약 성서 단락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비일은 창세기1-2장을 해석하는데 고대 근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이와 관련된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비일은 창세기 1장은 창조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인들의 견해가 아니라 창조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이며 창조가 일어난 오랜 후에 모세에게 초자연적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일은 월튼 자신도 인정하듯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고대 근동의 창조기사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거부하라고 말씀하셨던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포함하는 창조 기사를 모세에게 주셨겠냐고 반문한다. 비일은 창세기1장이 물질의 기원이 아닌 기능의 기원에 관심을 둔다는 월튼의 해석에 장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창조기사 본문이 물질 창조에 관해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비판한다. 비일은 창세기1:1이 단순히 창조기사의 문학적 도입부이며 따라서 창조는 실제로 물질이 이미 존재했던 상태인 12절에서 시작된다는 윌튼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창세기1:1이 참으로 물질로 된 사물, 즉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두 사물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비일은 월튼이 저자가 실제로 사용한 단어들(발화 행위)) 대신 저자의 의도(발화 수반행위)만이 성서의 무오성에 적용될 수 있다는 윌튼의 주장은 완전축자영감(verbal plenary inspiration)을 포기하고 사상영감(conceptual inspiration)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의심한다.

 

3. 콜린스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이해했을 법한 방식으로 창세기1-2장의 내용을 이해하려는 윌튼의 방법론이 매우 훌륭하며 창세기1장을 일종의 성전 건축 기사로 간주해야한다는 그의 제안도 유용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콜린스는 윌튼이 왜 물질의 기원과 기능의 기원이 서로 유의미한 반론을 제기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하면서 창세기1장이 물질보다는 기능과의 관련성에 중점을 두는 특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태도가 물질적 요소에 관심을 거부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콜린스는 결국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물질로 존재하는 사물인데, 왜 물질적 요소가 월튼의 해석 전략에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4. 롱맨은

월튼의 견해는 탁월하며 자신은 대부분 동의한다고 말한다. 롱맨은 윌튼의 가장 중요한 통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이 이스라엘을 둘러싼 고대 근동 문화의 인지환경을 공유할 뿐,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창조기사에서 과학을 읽어내는 것은 성서를 오해하는 것이다." 롱맨은 창세기1-2장을 읽는 방식으로 장르에 관한 질문에 대한 월튼의 대답이 매우 유용하다고 칭찬한다. 롱맨은 자신이 창조기사의 장르를 "신학적 역사"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윌튼이 이런 방식이 고대 텍스트에 현대의 범주를 강요하는 행동이라고 말하지만, 만일 적절히 규정되기만 한다면 창조기사의 장르를 다루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롱맨은 장르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저자의 발화수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월튼의 논지에 동의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고대 근동의 환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롱맨은 월튼의 기능창조론이 자신이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만드신 방법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롱맨은 우주와 성전의 관련성에 대한 월튼의 견해는 탁월하고 설득력 있으며 장차 창조기사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포함하고 싶은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롱맨은 성전은 우주라는 것과 우주는 성전이라는 은유를 둘 다 수용하려는 월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기관이나 구조물로서 우주의 형태를 복제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