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자들은 세계종교로부터 배울 수 있는가? -제럴드 멕더모트
2017-12-12 19:37:33
1.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는 인간 문화에 대해 더 개방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타종교에 대한 태도는 이전의 근본주의와 비슷하다. 미국 복음주의는 비기독교 종교로부터 무언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거의 없다. 타종교 가운데 있는 진리를 인정하지 않는 복음주의자들의 이런 태도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 듣지 않겠다고 결심한 비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21세기 기독교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특수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particularity)이다.(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특수한 구원론을 의미) 이 도전에 직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타종교의 교조를 따르지 않고 오직 예수를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들의 전통은 무가치하고 유해하다고 추정하는 이런 종류의 전도 방식은 그리스도의 이름에 도움이 되기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친다. 최근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타종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지만 그 관심은 비기독교 종교들이 지니고 있는 진리의 계시적 가치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나는 복음주의 종교신학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계시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은 비기독교 전통들 가운데 그분 자신에 대한 증거를 남겨주셨다는 성경적 명제를 탕구하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복음을 더 잘 알기위해 신플라톤주의로 부터 배웠으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배웠으며, 칼빈이 르네상스 인문주의로부터 배웟다면, 현대의 복음주의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타종교로부터 배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2. 비복음주의자들은 타종교에 대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연구를 하는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전제를 갖고 연구한다는 근대주의적 비판은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유효하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학문은 전제를 가지고 있고 이해 관계로 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타종교들 가운데 있는 계시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객관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역사적 복음주의 전통을 존중하며 그 범위 안에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타종교들에 대해 논의할 때 복음주의자들은 계시의 문제가 아닌 구원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의 종교신학적 유형인 특수주의, 다원주의, 포괄주의라는 틀도 구원의 문제에 집중한 분류법이다. 특수주의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현세에서 예수님을 분명히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원주의는 구원을 받는 수많은 방법이 있으며 예수님은 그 중 한가지 방법일 뿐이라고 말한다. 포괄주의는 타종교를 믿더라도 그것은 그 종교에 감추어진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므로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이런 유형학은 비복음주의자들에 의해 붕괴되고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비복음주의자들은 종교들이 다른 목표를 갖고 있기 때문에 포괄주의는 비논리적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그들은 다원주의 역시 많은 목표들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오직 하나만을 믿는다고 지적한다. 존 힉에게 그것은 실재 중심성이며, 폴 니터에게 그것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정행이며, 윌프레드 캔트월 스미스에게 그것은 보편적인 공통의 합리성과 신앙의 보편적 특성이다. 조셉 디노이아와 마크 하임은 종교들이 다른 목표들이나 구원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다른 구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비판으로 말미암아 기존 유형학을 재고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구원을 중심으로 타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자유롭지 않다.
3. 타종교들 가운데 진리에 대한 계시가 있을 수 있는가라는 논의를 위해 먼저 계시가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계시의 종류에 대한 문제이다. 일반계시가 자연이나 양심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다면 특별계시는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며 따라서 그러한 전통들에 접근한 자들에게만 알려진다. 계시를 이렇게 두 종류로 구분하는 것은 계시의 문제를 논의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또 다른 어려운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타종교들 가운데 발견되는 어떤 계시들은 두 계시 중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종교들 가운데 나타나는 진리주장들은 오직 하나 혹은 소수의 종교들에만 특유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일반 계시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종교에서 발견되는 진리주장들은 특별계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반계시로 볼 수도 없다. 계시에 의해 전달되는 진리의 본질에 대한 문제도 논쟁거리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단어들로 묘사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더 적절히 묘사되는가 아니면 입으로 하는 말과 명제적 형태로 인간에게 전달되는 말로 적절히 묘사되는가? 내가 보기에 성경에는 둘 다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씀은 사건을 해석하고 사건들은 말씀으로 한 약속들을 성취한다. 그렇다면 계시된 진리는 개념화될 수 있는가 아니면 형언할 수 없는가? 나는 종교적 진리가 정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계시 중 일부는 명제적인 말로 표현할 수 있음도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내 요점은 계시는 명제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다차원적이라는 것이다. 계시를 해석하는 것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신적 계시라는 이 중대한 문제에 겸손하게 접근해야 한다. 계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우리의 죄와 유한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결함이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성경을 전체 성경과 연관지어 읽어야 하며 성령의 조명을 의지해야 한다.
4. 나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인격과 방법의 측면들에 대한 계시를 주셨다는 생각을 성경이 지지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증거가 압도적이고 아주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타종교들 가운데 계시가 있다는 주장은 성경적으로 타당하다. 물론 나는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하는 지식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주제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이 그분을 알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또한 유대,기독교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부분적이나마 알았음을 보여준다. 구약에는 참된 하나님에 대해 무언가 알았던 사람들로 가득하다. 사도 행전의 구절(17장 28절)은 적어도 누가와 바울이 이방인들이 종교적 진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일부가 이교도들로 부터 유대 기독교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전통 바깥에 있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운다는 생각은 성경에서 생소한 현상이 아니다. 비록 모호하고 부분적이거나 간접적일지라도 타종교들 안에는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우리는 또한 성경언약들로부터 심지어 그리스도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에 대해 계시하신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종교들이 그들의 신자들에게 다른 것들을 요구한다고 해서 그 종교들에 진리에 대한 계시가 전혀 없다고 묵살해서는 안된다. 적어도 일부 종교들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불완전하지만 일종의 계시가 있다.
5. 기독교 전통에서 우리는 위대한 신학자들이 교회 밖에서 나온 생각을 이용해 그리스도의 계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음을 발견한다. 신플라톤 사상은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성경 정경보다 성경 외적 전통에서 더 유래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는데 강력한 수단을 제공했다. 중세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창조교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세계 개념과 조화시켰다. 아퀴나스가 자연과 은총의 관계에 대한 개념을 분명히 설명한 것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덕분에 아퀴나스는 이후 여러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유한한 언어를 사용하여 무한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존 칼빈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상당한 빚을 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유명론 철학은 이성은 복음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따라서 참된 하나님으로 인도하는 자연신학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칼빈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칼빈은 기독교 계시의 본질 또는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교도 사상가들의 도움을 받았던 종교개혁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이교도들로부터 배우는 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들이 플로티노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로 부터 배울 수 있었다면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는 타종교로부터 배울 수 있을 것이다.
6. 그러나 타종교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새로운 계시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고 성경에 묘사되어 있는 계시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종교는 기독교 정경에 나타난 계시에 새로운 내용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이해를 더하는 것이다. 타종교들이 진리를 갖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온전한 진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비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구원하는 관계를 맺지 않고도 하나님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런 지식은 구원을 얻기에 불충분하다. 그러므로 타종교에 있는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전도 및 선교에 대한 긴급성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우리가 타종교들로 부터 배우는 목적은 복음의 전도를 더 민감하게 그리고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또한 복음주의 제자도는 비기독교의 종교적 경험에 노출됨으로써 더 활기차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인간의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서 사회의 공공선을 위해 타종교인들과 교류 및 협력할 수 있다. 우리는 타종교를 배움으로서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방식으로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계심을 알게된다.
[추기]
1. 불교 사상가들은 초월적 진리는 감각에 의한 인식과 지적 개념 너머에 있다고 강조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할 때 유사한 괴리가 있음을 보았다. 그는 피조물을 통해 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그분의 본질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애매하고 거울에 비친 듯하고 멀리있는 지식이라고 말했다. 또한 불교 신자들은 초월적 실재를 인격과 비인격 너머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는 하나님을 마치 인간처럼 간주하는 기독교인들의 왜곡된 생각을 교정해 주고 하나님의 초월적 실재를 더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불교사상에서는 존재의 절대적 독립은 없으며 모든 현상은 다른 현상과 연결되어 있고 모든 사물을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연기 사상"이라고 부른다. 불교의 "연기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이 우주와 우리 자신들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에게 의존해 있음을 확증해 주며 나아가 세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나는 불교 교리가 "옛 사람"에 대한 바울의 개념을, 그리고 루터가 말한 "구부러진 자아"의 신학적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 인간 조건의 본질은 그들이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은 자아의 생각과 바람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욕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목적 자체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섬기는 수단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 신자들의 묵상(명상) 기술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고 마음과 몸으로 기도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쳐줄 수 있다.
2. 노자와 장자 같은 도가사상가들은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인간 존재의 모순들과 역설들에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역설과 모순을 이해해는데 어려움을 겪고 그 배후에 있는 신적 실재들을 보지 못한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 역설들이 신적 목적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음을 아는 일에 도가 사상가들은 유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노자와 장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종종 위장해서(숨어서) 일하신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도덕경은 "매우 교묘한 것은 오히려 서투른 것 같고, 뛰어난 웅변은 오히려 더듬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는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인다"는 바울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혹은 "무행동" 역시 복음주의자들에게 깊은 통찰을 준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식적인 숙고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자발적인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해준다. 바울에게 그런것 처럼 장자에게 "덕"의 삶은 심사숙고의 결과가 아니라 영적 연합의 산물이다. 장자에게 위대한 사람은 도가 그 안에서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사람인데, 장자의 이런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성령 안에서 거하고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도가사상은 하나님은 인간의 약함을 통해 강함을 낳으신다는 성경적 역설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노자는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이다. 이에 대해 바울은 특유의 깊이로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이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1:27~29)
3. 유교전통은 인간 본성을 낙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유교전통은 인간 본성의 잠재성과 현실성을 구별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인간 본성에 대한 유교의 교리는 인간의 현실적 선함보다는 잠재적 선함을 강조한다. 예컨데 맹자가 말하는 "사단"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너 가지고 나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람이 선하게 될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이지 현실의 인간이 악한 열매를 맺고 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유교 전통과 기독교 전통의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그렇게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유교가 도덕에 대한 정언적 명령법을 가진 것도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다. 유교 학자들은 고난 및 죽음에도 불구하고 "도"를 따르는 일에 기쁨을 발견했다. 어떤 외적 강제나 보상에서가 아니라 덕이 지닌 본질적 가치 때문에 그것을 추구한 것이다. 이것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그의 책 신앙감정론에서 참된 종교에 대한 적극적 표지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방법 그 자체에 대한 이끌림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즉 하나님의 일들이 어떤 사람 혹은 그의 이익에 대해 가지는 관계가 아니라 그 자체 속에 있는 탁월하고 사랑스러운 본성으로 인해 야기되는 감정들이 참된 기독교적 정서들의 객관적 근거라는 것이다. 또한 "덕을 닦지 못하는 것, 착하지 않은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걱정거리다"라는 공자의 말은 로마서 7장에 기록되 바울의 한탄을 연상시킨다. 유교와 기독교의 많은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교 전통이 진리를 따른다는 것이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지하게 상기시켜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미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4. 무함마드는 종교의 궁극적인 미덕은 알라의 뜻에 대한 복종이며 이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이라고 가르쳤다. 알라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강조하는 이슬람의 방식은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경건한 두려움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번 메카를 향해 예배 의식을 의무적으로 실천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개인적 필요를 구하는 간구가 아니라 알라의 성품과 속성에 집중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슬림의 예배 관습을 통해 일상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일과 기도의 핵심이 예배이며 간구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는 불균형하고 이기적인 것임을 배울 수 있다. 꾸란은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여 불운한 자를 돕지 않는 것을 지옥에 가야하는 두 가지 이유중 하나로 꼽는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무슬림들은 법적, 의무적으로 자카드(자선)ㅈ를 드린다. 자카드의 뜻은 순결인데 이는 적절한 돈을 이슬람 공동체에 바치기 전까지는 그 돈은 불결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우리는 신앙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자선이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가르치는 꾸란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무슬림들은 모든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므로, 참된 신을 예배하거나 아니면 우상을 섬기게 된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중립지대는 없으며 철저하게 도덕적 절대주의, 객관주의를 신봉한다. 이것은 서구의 도덕적 상대주의에 대항하여 무슬림들이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는 강한 힘들 중의 하나이다. 이런 이슬람의 가르침은 세속화된 서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본래적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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