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노나이트의 성격과 기원- 김복기
2017-09-25 17:10:22
들어가는 말
작년 이맘 때 쯤, <메노나이트 삶The Mennonite Life>이라는 간행물의 편집장으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다. 미국에서 발행되는 이 간행물은 특집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가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 500주년에 앞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질문했던 것처럼, 1525년에 시작되어 이제 곧 맞이하게 될 아나뱁티스트 500주년 기념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학의 역사학자인 벤자민 구센은 “왜 500주년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다가오는 2025년 1월 21일에 기념할 아나뱁티스트 500주년에 대해 여러 가지 건강한 질문을 던졌다. 감사하게도 지구촌에 사는 메노나이트의 한 형제인 내게도 그의 질문에 대한 논찬의 기회가 주어져 “우리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기념해야 하는가?”라는 글을 쓰게 되었다.
지금 세계 기독교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고 있다. 개인적으로, 교회별로, 교단별로, 더 나아가 교단을 넘어 다채로운 모습으로 공동의 행사들을 진행하고 있다. 교회나 공동체별로 유럽의 종교개혁 도시와 유적을 방문하기도 하고, 방송매체는 물론 일간, 주간, 월간, 계간 등 정기 간행물을 통해 루터는 물론 종교 개혁가들을 재조명하며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에 의미 있는 교회개혁의 방향이 무엇인지 모색하고 있다.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기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여러 기관 및 교회에서 전체 기독교 역사를 재조명하고, 루터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에 다각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지난 500년 동안 분기되었던 기독교 내 여러 교파교단의 다양성을 되짚어 보는 것은 참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1세기 교회와 가장 닮을 꼴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철저히 잊혀져왔던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 운동에 대해 소개할 수 있게 된 것은 역사의 변곡점을 바라보는 듯하여 개인적으로도 큰 기쁨이 되었다. 그 어느 때 보다도 한국 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때에, 근원적 ‘종교개혁의 역사와 흐름’이라는 맥락 속에서 메노나이트 교회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큰 유익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1. 아나뱁티스트 운동과 메노나이트에 대한 이해
메노나이트 교회는 16세기 근원적 종교개혁으로 알려진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한 분파이자 교단이다. 모진 박해로 인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던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네덜란드 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1496~1561.1.31)가 다시 불씨를 지피게 됨에 따라 형성된 아나뱁티스트의 대표적인 교회운동이자 교단이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1525년 1월 21일을 그 첫 시작일로 삼는다. 정부의 규정에 따라 유아세례를 시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신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 다시 세례를 베풀면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믿음과 아무런 상관없이, 특히 신앙을 고백할 수조차 없는 유아들에게 베푸는 세례는 효력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1525년 1월 21일, 콘라드 그레벨, 조지 브라우락, 펠릭스 만츠를 비롯한 여러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유아세례가 효력이 없음을 선언하고, 서로에게 다시 세례를 베풂으로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시작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있기에 앞서, 츠빙글리는 성례전의 개혁, 미사 및 음식에 관련된 법의 폐지, 성상제거 등 아주 많은 내용의 개혁을 주창해왔었다. 특별히 1523년 1월,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의회를 통해 공개토론의 절차를 마련하고, 67개의 논제를 준비하여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제시하였다. 그해 10월에 열린 두 번째 시의회에서 츠빙글리는 미사 대신에 예수께서 제정하신 주의 만찬을 시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의회는 미사가 잘못된 것은 맞지만, 시기를 늦추자고 하였고 이에 대해 츠빙글리와 함께 오래전부터 성경을 공부해 오던 콘라드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는 배신감을 느꼈다. 1524년에는 시의회에 의해 개혁에 대한 주제들이 다시 거론되었는데, 이때 유아세례도 그 주제들 중 하나였다. 일전에 츠빙글리가 유아세례 폐지에 대해 공개적인 입장을 표명하였지만, 뚜렷한 결실을 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콘라드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는 이렇다 할 답을 얻지 못하였다.
콘라드 그레벨과 여러 사람들은 이미 개혁가들이 주창한 성경의 권위, 교황 및 가톨릭의 폐단,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 그리스도 중심적인 삶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그대로 따라 살기로 결정하였다. 1525년 1월 21일, 츠빙글리가 소속해 있던 시의회는 이러한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했던 급진적인 일단을 무리들을 상대로 모든 형태의 모임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취리히 관할 지역이었던 그로스뮌스터 근처의 노이슈타트가세에 있는 펠릭스 만츠의 어머니 집에 정부당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일단의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서로에게 재세례를 베풀었다. 이전에 없던 재세례를 베풂으로서 이 그룹은 저 불명예스러운 “다시 세례를 주는 자들”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아나뱁티스트라는 단어는 단순히 “다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지만, 16세기 기독교 사회를 표방했던 유럽에서는 이보다 더 불경스럽고 비난받을 만한 이름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문은 급속도로 번져나가 하나님의 나라를 열망하던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가톨릭 정부는 물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을 적잖이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 운동은 유럽의 종교와 사회 제도를 폭력적으로 파괴하는 아주 위험한 운동으로 간주되었고, 온갖 불명예스러운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처음 시작부터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아주 기괴하고 반사회적인 운동으로 여겨졌고, 이들의 신앙은 악마가 조종하는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무엇보다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생각아래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가톨릭 정부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정부에 의해 박해를 받게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유아세례 거부와 가톨릭의 성례전 중 주의 만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 문제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가톨릭 및 국가의 권위에 대한 도전, 교황권을 상대로 반성직주의 및 반성례주의 주장, 성서 해석에 대한 권위 문제 등이 보다 더 크게 작용하였다. 1525년에 생긴 운동은 박해로 인해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운동을 연명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실제로 첫 번째로 투옥된 사건은 다시 세례를 받은 지 채 열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2월 초에 발생했다. 감금, 벌금, 고문은 죄수들에게 일반적으로 부과되는 처벌의 과정이었다. 1527년 초, 취리히 지역의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박해로 인해 아 주 혹독한 붕괴의 위협을 받았다. 최초의 재세례를 시행했던 콘라드 그레벨은 병으로 죽고, 펠릭스 만츠는 수장을 당하고, 조지 브라우락은 취리히 시의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사형은 면할 수 있었지만, 시로부터 추방된 후 다시는 영원히 취리히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위협과 여러 문제들에 마주친 그 외 다른 리더들은 박해에 대해 이렇다 할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당시 시행되었던 박해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스위스와 독일 국경에 위치한 슐라이트하임이란 마을에서 발의된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를 통해 그 내용을 잘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어려움에 처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해준 최초의 아나뱁티스트 고백서로 열광주의와 순응주의 사이에서 분명한 입장을 정리하게 되었다는 점, 다양한 의견들에 대해 조직적인 합의를 이루어내고, 급진적 열성이라는 돌풍을 잠재우는 대신 운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 등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특별히 이 회의는 훗날 순교자들의 회의(Martyrs’s Synod)로 알려져 있는데 이 회의에 참석했던 리더들이 거의 다 순교를 당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는 다른 신앙고백서와 비교하여 볼 때 매우 간략하며, 독특하다. 1527년 2월 24일 1항 세례, 2항 권징, 3항 주의 만찬(빵을 나눔), 4항 세상과의 분리 5항 교회의 목자들 6항 검(무력의 사용) 7항 맹세로 모두 7조항으로 되어 있는 고백서이다. 마이클 잣틀러가 초안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슐라이트하임 고백서는 지금도 최초의 아나뱁티스트 고백서로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 관련 그룹들이 받아들이고 있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는 성경 다음으로 소중히 여기는 문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저 유명한 《순교자들의 거울》이다.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를 필두로 1세기부터 1660년까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다가 고난을 당하고 결국 순교를 당한 믿음의 인물들에 대한 기록이자 대하드라마이다. 특별히 16세기에 믿음 때문에 순교한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수많은 아나뱁티스트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제대로 서기도 전에 참혹한 박해가 일어나서 운동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운동이 그토록 오해를 받게 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급진적인 사회 변혁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일어난 1525년의 농민전쟁과 종말론 및 성령운동에 경도되었던 성령주의자들의 영향 그리고 더 나아가 1534-35년에 발생한 아나뱁티스트 이름을 자처했던 뮌스터 사건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우선 농민전쟁은 루터에 의해 사상적 영향을 받고 개혁의지를 표출하고자 했던 토마스 뮨쩌에 의한 농민개혁운동이었다. 1525년 5월에서 패하여 8,000명의 농민이 목숨을 잃게 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1534-5년의 뮌스터 사건은 얀 폰 라이덴과 얀 마티즈에 의해 일어난 비극이었다. 1535년 6월 가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연합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비극은 끝이 났지만, 이 운동으로 인해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다수의 평화주의자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오해의 대상이 되어 왔다. 헤롤드 벤더는 그의 연설에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독특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토마스 뮌처와 농민혁명, 뮌스터 사람들, 그리고 탈선의 길을 걸었던 그 어떤 모습의 종교개혁 운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메노나이트 역사학자인 크리스토퍼 딕 또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오해로 자리하고 있던 뮌스터 사건을 포함한 많은 다른 사건들이 메노나이트 역사에서 제외” 되어야 하며, “1525년에 일어난 농민전쟁과 아나뱁티즘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도 발표되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의 최근의 일일 뿐 16세기 정황에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불경스럽고, 이단적이어서 박해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겨졌다.
2. 메노 시몬스와 메노나이트
메노 시몬스는 1496년 네덜란드의 프리스랜드 (Friesland) 지방에 있는 비트마숨 (Witmarsum)에서 태어났다. 28세 가톨릭 사제가 된 후 메노는 매주 직접 미사를 집전하면서, 여러 가지 의구심이 들었다. 당시에 네덜란드에는 거룩한 사제의 손에 의해 주어지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 된다는 기존의 가톨릭 교리와 반대되는 가르침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사제의 일을 시작한 첫해부터 메노는 미사와 관련되어 생겨나는 의구심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약 2년 동안 이러한 의심을 품다가, 마침내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자신이 읽은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의 가르침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미사에 대한 의심은 권위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었다. 과연 성경과 교회 중 무엇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그는 성경을 선택하였고, 부가적으로 루터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점차로 그의 견해는 자신이 올바를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면서 홀로 설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졌다.
그가 분명히 해야 할 다음 질문은 유아 세례에 대한 것이었다. 유아 세례가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다시 세례를 받았던 어떤 사람이 단지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더욱 궁금해졌다. 왜 아나뱁티스트들은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유아세례를 받지 않고 미사를 거부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들의 믿는바 그리스도의 제자 됨을 강조하는 것일까? 질문하였다. 그는 다시금 성경의 권위로 돌아가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루터와 다른 개혁가들이 어떻게 성경을 다르게 읽고 있는지에 대해 확인하기 시작했다.
1532년 경, 자신의 회중에 재세례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너무나 급진적인 모습으로 보이던 그들을 대상으로 사악한 모든 사람들은 칼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는 설교를 하면서도 메노는 그들에게 얼마간의 연민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들을 상대하라는 교회의 요청에 따라 논쟁의 달인이 되어야 했고 이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설교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면에 있어서 자신과 그들의 의견이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별로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뮌스터 지역에서 일어난 폭력적 아나뱁티스트들과 정부 사이에서 생긴 전쟁으로 말미암아 자기 동생과 교회의 멤버들이 대거 죽게 되었을 때, 그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음을 감지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혁명을 일으키는 재세례신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과 싸움을 하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진리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재세례신자임을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며 아나뱁티스트들에게 혁명에 가담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1536년 겨울, 메노는 조용히 자기의 집을 떠나 믿음의 형제들이 추구하는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방랑하는 목사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그로닝겐 (Groningen)과 동 프리스랜드 (East Friesland)에서 일을 하였다. 동시에 그는 공부를 병행하며 영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고 믿음을 고양시키는 책자를 만들어나가며 복음주의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회심시켰다.
그 이후, 그는 네덜란드 아나뱁티스트들로부터 장로 (elder) 혹은 감독 (bishop)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러나 그 책임의 막중함에 주저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결국 이를 수락하였다. 1536년 그가 사제직을 떠난 즉시로부터 1554년까지 그는 현상 수배범이었으며, 그의 목에는 많은 상금이 걸려있었다. 그 자신이 1544년에 쓴 글에 보면 “나의 불쌍한 아내와 어린 아이들이 단 1년, 아니 반 년 만이라도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오두막이나 헛간은 내 나라 안에서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평생을 지내야 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과 칼뱅추종자들과 다방면에 걸치는 신학적 논쟁을 벌였으며, 자신과 교제하고 있는 동료들 안에서도 수많은 문제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약 25년 동안 그는 이러한 힘든 일을 감당해 나갔고, 밤에 여행을 하고, 형제들을 만나는 등 대부분의 일을 숨어서 해야만 했다. 그가 갖고 있는 인간적인 연약함과 더불어 (메노는 인생 후반기에 다리를 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나갔다. 그가 갖고 있었던 가장 큰 관심은 그리스도의 교회였다. 우리 모두에게 잘 알려진 그가 즐겨 사용하였던 좌우명은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었다. 그는 1561년 1월 31일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메노 시몬스의 활동으로 인해 사라질 뻔한 아나뱁티스트 운동이 되살아났다. 먼 훗날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모습을 드러내자 메노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이 주어졌고, 이로 인해 메노나이트라는 그룹이 생겨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메니스트 혹은 메노니스트라 불리다가 훗날 메노나이트로 불리게 되었다. 현재 전 세계에는 150만 명의 메노나이트들이 있으며,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대표하는 그룹이 되었다.
3. 메노나이트 교회의 핵심 가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도되기 전까지, 이 운동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채로 있었다. 롤란드 베인턴과 같은 학자들은 이 운동을 “종교개혁의 좌파”로 칭하였고 어떤 이들은 “종교개혁의 볼셰비키”라고 칭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들은 ‘종교개혁의 서자’ 취급을 받았으며, 종교개혁의 비주류, 과격파 종교개혁자로 이해되었다. 그나마 20세기에 들어 하버드 대학의 조지 윌리엄스와 같은 학자에 의해 ‘급진적 종교개혁’으로 분류되었고, 이를 근원적 종교개혁으로 번역하기에 이르렀다. 특별히 미국 교회사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던 헤롤드 벤더와 같은 메노나이트 학자에 의해 조금씩 주류교단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저 유명한 “아나뱁티스트 비전”이라는 연설문은 1890년부터 시작된 아나뱁티스트 르네상스의 정점으로 기록 될만큼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핵심가치를 잘 정리해준 문서로 인정받고 있다.
헤롤드 벤더는 1943년 미국의 교회사 학회의 회장 수락연설에서 “아나뱁티스트 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제자도, 신자들의 교회, 모든 관계에 있어 사랑과 무저항을 실천하는 것, 곧 제자도, 평화, 공동체라는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의 핵심 가치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였다.
1) 제자도
16세기 한스 뎅크라는 사람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제자도는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는 데 있어 성령과 성경의 말씀의 균형을 이루며, 믿음과 행위를 일치시킨다. 특별히 하나님의 선물인 은혜와 인간의 노력에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고자 애쓴다. 메노나이트들에게 제자도는 매일 새롭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과 제자들의 자유 및 복종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이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며 제자의 길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2) 평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살아간다. 초기부터 아나뱁티스트들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 평화주의를 택했다. 물론 슈버틀러라는 그룹이 “검”을 지니며 자신들의 신변을 보호하였고, 무력을 옹호하였으나, 뮌스터 사건 이후로, 메노나이트들은 ‘검을 지니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확신하였다. 메노 시몬스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리더들은 중생하여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폭력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해야 한다는데 일치된 목소리를 보여 왔다. 현재 메노나이트 교회는 대표적인 역사적 평화교회로 잘 알려져 있으며, 1,2차 세계대전 이후는 물론 지금까지 평화화 화해의 제자도를 실천하고 있다. 메노나이트 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대표적인 평화활동은 “크리스천 평화건설팀Christian Peacemaker Teams”라든가 “회복적 정의 운동,” 그리고 “갈등전환” 프로그램 등으로 실현되고 있다. 크리스천 평화건설팀은 전 세계 분쟁지역에서 평화의 사도들로 활동하고 있으며, 회복적 정의운동은 하나의 사법 시스템으로 자리하고 있다. 응보적 처벌이라는 사법체계의 한계를 보완하여 관계의 회복을 도모하는 평화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갈등전환은 인간 관계 속에 얽혀 있는 갈등의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이 평화의 원칙도 결국은 예수의 모범을 따라 살고자 하는 제자도의 구체적인 실천 방식이기도 하다.
3) 공동체
메노나이트들이 믿는 제자도의 삶은 또한 개인적인 예수 따름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항상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강조한다. 이들에게 교회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됨을 말하며, 교회의 멤버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헌신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기꺼이 서로에게 헌신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메노나이트들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신자들의 교회,” “자유교회,” “회중교회,” “평화교회”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현재 메노나이트들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귀한 원칙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모든 교회에서 실행되고 있는 공동체 운영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에게 교회란 신자들의 교회가 표방하는 것처럼,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이를 따르는 제자들이 이루는 “그리스도의 몸”을 말한다. 교회는 건물이나 제도가 아닌 신자들의 공동체임을 늘 고백하고 있다. 또한 이들에게 교회란 자발적으로 그러나 성령을 의지하며 예수를 따르기로 헌신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아나뱁티스트 메노나이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삶은 결국 교회 공동체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다. 현재 전 세계에 있는 교회 공동체의 모델로, 메노나이트, 아미시, 부르더호프, 후터라이트들이 주목을 받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나가는 말
1980년 독일의 루터란 교회는 옥스버그 신앙고백 채택(Augsburg Confession, 1530년) 450주년을 초교파적으로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하였다. 이들과 함께 메노나이트 교회의 지도자들도 초청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아나뱁티스트-메노나이트 신자들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루터란을 비롯한 국가 교회로부터 수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은 장본인들이다. 그 때 루터란 교회가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그 탄압을 정당화한 결정적인 문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1530년에 채택한 옥스버그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루터란 교회에서 메노나이트를 초청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아닐 수 없었다. 아마도 루터란 교회는 메노나이트를 초청하면서 옥스버그 신앙고백 안에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으로 정죄한 죄목이 실려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쨌든 이 기념행사에 초청을 받은 메노나이트 세계 협의회(Mennonite World Conference)는 루터란세계연맹(Lutheran World Federation)을 상대로 옥스버그 신앙고백에 실린 아나뱁티스트를 정죄한 문항들을 되짚어 보고 그것이 과연 정당했는지에 대한 신학적 논의의 필요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메노나이트 교회(MWC)의 이러한 입장에 대해 루터란 교회(LWF)는 옥스버그 신앙고백이 담고 있는 아나뱁티스트와 관련된 모든 조항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이 종교개혁 이후 겪었던 했던 고난의 역사에 동참하고 그들의 상처 입은 기억을 치유하며 두 교단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발판으로 삼고자 이 문제를 루터란 교단의 최상위 그룹에서부터 심도 있게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다음은 1980년 7월 11일 루터란 세계 연맹에서 발표한 선언문의 일부다.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합법적으로 성문화했던 특정 조항들이 루터란 교회가 (1530년) 채택했던 옥스버그 신앙고백 문서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이를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당시의 아나뱁티스트를 정죄했던 죄목들이 오늘날 더 이상 (아나뱁티스트 교회에)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음을 인정합니다. 비록 두 종파간의 교리적인 차이점들이 아직까지 남아있긴 하지만 우리는 이것 조차도 함께 극복할 수 있음을 희망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며 루터란 교회가 물려받은 공동의 유산을 축하하는 다른 모든 멤버 교회들을 감사와 인내의 마음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루터란 교회(LWF)와 메노나이트 교회(MWC)가 취한 용서와 화해의 움직임은 두 교단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공동 조사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논의는 프랑스(1981-1984), 독일(1989-1992), 미국(2001-2004)에서도 아주 광범위하면서도 심도 있게 이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화해의 물결은 드디어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열린 제 11차 루터란 총회에서 놀라운 결실로 나타났다. 2010년 7월 22일, 전세계 7400만 명에 이르는 회원을 갖고 있는 루터교 총회에 메노나이트 지도자들이 참여하였다. 이 두 교단이 지난 480년 동안의 갈등과 정죄를 씻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형제와 자매로서 용서와 화해, 협력을 선포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에서 두 교회는 지난 과거를 돌아보았다. 현재에 필요한 용서를 선택하고 미래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약속하였다. 지난 480년의 역사를 뒤돌아보면서 다가올 후손에게 더 이상 죄의식을 물려주지 않기 위한 성명서 채택하였다. 그 성명서는 1) 16세기에 아나뱁티스트들에 대해 루터란들이 행한 폭력적인 박해에 대한 깊은 뉘우침과 슬픔을 표하고 2) 메노나이트 교인들에게 과거에 행해졌던 박해에 대한 잘못과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체 해왔던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3) 앞으로도 자신들이 했던 잘못들을 기억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루터의 후예들로서 루터란이 어떻게 과거의 박해를 기억할 것이며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진지한 신앙의 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이들은 루터란과 메노나이트간의 대화를 시작하고 2002년에는 루터란-메노나이트 국제 학술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또한 2005년부터 2009년에는 학술위원회의 연구에 기초해 발표된 위원회활동에 관한 내용을 루터란 교회로 보냈다.
2010년 루터란세계총회에 앞서 메노나이트 세계협의회의 사무총장 래리 밀러는 용서와 화해를 위한 루터란의 움직임을 환영하였다. 이 두 교회는 상징적으로 대표자를 파견하였다. 루터란은 2009년 7월 파라과이에서 열린 15차 MWC총회에 LWF 대표 이슈마엘 노코를 참석하게 하여 아나뱁티스트와 함께 치유와 화해의 길을 가기 원한다는 희망의 메시지 제안하였다.
결국 이러한 용서의 여정을 통해 두 교회는 2010년 7월 22일 LWF총회에서 루터교의 후손들이 메노나이트 후손들인 MWC 대표자들에게 용서 구함으로써 역사의 오류를 바로잡으며 화해의 장을 마련하였다. 이 화해에 대하여 레이너 버크아르트는 “종교개혁의 소용돌이로 상처받은 두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화해하게 되었다.”고 평하였다.
이러한 용서와 화해의 여정 뒤에도 여전히 역사 속에서 형성된 루터란과 메노나이트 사이의 큰 신학적 차이와 서로 다른 전통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결코 작지 않은 질문이다. 이에 대해 두 교회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고받았다. 특별히 두 교회전통 사이에 여전히 1) 세례(침례) 2)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3) 인도주의 목적을 위한 무력 사용에 대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 두 교회는 앞으로 두 교회에 참여하게 되는 세례교인들에게 역사를 바로 가르치기로 약속하였다. 특히 새로운 세례 교우들에게 과거의 역사는 물론 2010년에 두 교회가 시행한 용서와 화해의 사건을 가르치기로 약속하였다. 이들을 위해 문서를 마련하여 두 교회가 서로간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되 루터란은 새로운 시각으로 교리를 바라보고 메노나이트는 과거의 순교역사에서 치유(healing)로 나아가기로 약속하였다.
위원회의 보고서가 이야기하듯이 “과거의 역사는 바꿀 수 없지만, 현재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화해란 단지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공동의 교회가 함께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수많은 교회들이 서로 미워하고 정죄했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역사 속의 잘못을 자각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떻게 용서를 받고 용서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루터란과 메노나이트의 용서와 화해는 전 세계 교회에 용서와 화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과거를 어떻게 청산하며,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현재 우리가 어떻게 용서해야하며, 그리고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질문을 던져주었다.
메노나이트는 21세기를 살면서 여전히 제자도, 평화, 공동체를 강조하며 산다. 평화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존재한다. 글을 나가면서 루터교화 화해한 역사를 기록한 것은 이 평화의 사역은 역사의 한 정점에서 이루고 마는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찢기고 상처 입은 이 한국 교회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여정이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큰 우산 아래, 하나의 교회로 존재하는 메노나이트가 더 크고 넓은 하나님 나라의 포도원에서 자라나는 여러 다양한 포도나무에 맺힌 포도이지만 언젠가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의 여정이라는 식탁 위에 여러 다른 맛을 내는 포도와 으깨어져 아주 향기롭고 맛난 포도주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게 될 줄 그 누가 알겠는가? 프로그램으로 희석된 교회들의 식탁위에 참 제자도의 빛을 비추어주고,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을 하나로 이어주는 평화의 일꾼으로 자리하게 될 줄 그 누가 알겠는가?
메노나이트들의 신앙
2016-10-27 23:10:57
1. 저자는 메노나이트 신앙의 기본신념 7가지(하나님, 인간, 하나님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 교회, 성령, 종말)를 제시하는데 대부분의 내용은 다른 교파와 동일하다. 다만 눈에 띄는 것은 교회관이다. 그들은 교회를 내부적 생명력과 외부적 세상을 향해 다가오는 새 시대의 정의, 평화, 공의, 사랑을 드러내는 영적, 사회적, 경제적 실체로 본다는 점이다.(34쪽) 특히 교회를 영적인 것에만 국한 시키지 않고 사회적, 경제적 실체로 보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2. 기독교 역사 초기에 형성된 사도신경은 대체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도신경이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생애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침묵하고 있음을 지적한다.(37쪽) 그러나 저자는 메노나이트들이 대부분의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핵심 신앙에 있어 맥락을 같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38쪽)
3. 그러나 전통적으로 메노나이트들은 기독교 신앙을 교리나 공식적인 문서로 담아 설명하는 방식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방식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늘 부족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경은 교리 자체로 설명이 안 되고 신자들의 삶의 자리는 늘 지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40쪽) 그래서 메노나이트들은 신앙을 설명하기 위해 잘 훈련된 신학자들의 구미에 맞게 전문화되고 기술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모습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은 교리나 신앙고백이 믿음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분명하게 하고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모두 다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41쪽)
4. 메노나이트들은 교리화된 신앙고백들은 추상적인 개념들로서 그리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고 본다. 그들은 교리적 신앙은 단지 그 내용이 삶으로 드러나고 실제 삶의 공간 속에서 구체화될 때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참된 신앙은 항상 매일의 삶에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메노나이트들은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묘사하는 방법은 궁극적으로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확인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43쪽) 그래서 그들은 아나뱁티스트의 전통을 따라 교리나 추상적인 논쟁 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라는 실천적인 삶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正說(orthodoxy)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正行(orthopraxis)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메노들은 신앙이란 실제로 살아가는 모습에 의해서만 이해된다고 믿는다. 이런 입장의 핵심을 16세기 아나뱁티스트였던 한스 뎅크는 이렇게 간결하게 요약한다. "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으면서 진실로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메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제자도의 삶과 분리될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육화되면서 침 믿음이 되기 때문이다.
5. 메노들이 공식화된 교리문서들을 주저하는 다른 이유는 비폭력에 뿌리는 둔 자발적인 기독교 신앙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16세기 아나뱁티스트의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그런 방식이 믿음을 반대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고 핍박하는 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44쪽) 기독교 역사는 교리를 우상으로 바꾸는 인간들의 고집스런 성향으로 인해 관점이 다른 소수자들을 향해 교리적 무기를 휘둘러 이단으로 정죄하고 죽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메노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복음의 핵심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이 죄인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메노는 이 간단한 신념이 복음의 난제이자 핵심이라고 믿는다.(45쪽) 그래서 메노들은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도 비폭력적이어야 하며 관점이 다른 사람도 용납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메노들은 교리적 주장을 하기보다는 예수의 가르침 자체를 전달하거나 모범적인 일상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부활의 실재가 나타나도록 노력한다.
6. 주류 기독교 전통에 속한 교회는 교리를 명확하게 하고 정확하게 말하기 위해 분명한 권위체계와 수직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노나이트 교회는 일반적으로 감독의 위계질서를 따르거나 중앙집권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지역교회 혹은 지역의 노회가 성경을 해석하는 최적의 장소라고 여긴다.(47쪽) 메노들은 목회자나 교사의 목소리를 존중하지만 성경 공부나 성경 해석은 교회에서 특별히 임명받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로 다른 관점에 대해 다양성의 문을 활짝 열어주며 전체 공동체가 함께 지혜를 모으는 모습을 존중한다는 장점이 있다.(47쪽) 동시에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치를 원하는 마음으로 공동의 신념과 실천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추구한다.(48쪽)
7. 믿음에 대한 이런 독특한 접근 방식은 다른 전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약점으로 보일 수 있다. 성경 해석이 다양하다 보면 염려와 논쟁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노들은 분명한 리더십의 위계질서나 교리에 대한 최종 문서가 없을 때, 서로 다른 사람들을 소그룹으로 구성하여 멋진 모자이크를 형성하도록 노력한다. (이 말은 다름을 다양성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일 것임). 메노들이 수직적 리더를 중심으로 교회조직을 만드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는 교회는 모든 구성원이 책임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으며 성령께 기도하고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화하며 일상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변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변화하는 상황과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성경해석은 생명력 있는 교회에 주어진 끊임없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49쪽)
8. 저자는 재즈 연주를 예로 들면서. 재주 합주팀의 각 멤버들은 연주한 음악의 조표와 기본 코드의 진행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만 연주해야 할 곡의 음표 하나하나를 모두 다 기록하지 않듯이 메노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다양성 속에서 어떻게 일치를 추구하는지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특히 메노나이트 구제 시장을 예로 들면서 그 활동을 통해서 메노들이 얼마나 공동체적인 헌신과 자발성으로 일치를 이루는지를 설명한다.(50쪽) 메노의 개교회들이 모인 구제 시장의 거대한 활동은 그들이 개교회의 존재를 넘어서 모든 기독교 신자들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거대한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9. 메노들은 구원이 선한 행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잘 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사랑의 수혜자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말할 뿐 아니리 구체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진리라고 붙들고 있는 교리에 관한 신앙고백은 이 세상에 대한 그들의 실제적인 간증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교회의 교리는 단지 특정한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이라는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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