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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신 없는 사람들- 알리스터 맥그라스

신 없는 사람들- 알리스터 맥그라스

2017-05-14 18:45:37


 1.  2006년, 게리 울프는 샘 해리스(종교의 종말), 리처드 도킨스(만들어진 신), 대니얼 데닛(주문을 깨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신은 위대하지 않다), 이 네명을 새로운무신론의 기수들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새로운 무신론을 인류에 확산시켜야 하는 운동이라고 주장했다.  샘 해리스는 새로운 무신론을 태동시킨 사람으로서 911 테러의 주범을  종교하고 보고 종교 일반에 대한 혐오감을 조성했다. 그는 각자가 믿는 신 때문에 세상이 분열하는 것이니 차라리 신이 없으면 세상이 평화롭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신론 자체보다는 종교를 일종의 망상이라고 보는 종교에 대한 험오다.  도킨스는 종교는 증거도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환상이며 거짓된 신념이라고 공격한다. 그는 종교을 악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종교가 일체의 사유와 논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킨스는 이성과 과학은 합리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만 종교는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그래서 세상의 문제가 종교로 인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종교가 제거되면 갈등도 불식되고 종국에는 과학이 승리한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을 근거로 신앙심은 진화과정에서 생긴 우연한 부산물이고 종교는 유용한 것이 방향을 잘못잡은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눈먼 시계공]에서 의도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우연이라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진화 혹은 문화적 요인으로 만들어진 정신 바이러스가 사람들로 하여금 비합리적 사유를 하도록 만들어 신을 믿게 된다고 주장한다. 대니엘 데닛은 자연선택이 인간 안에 신을 믿게 하는 프로그램을 심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람들은 생존에 유익하다는 생각으로 신앙을 가질 뿐이지 신이라는 어떤 실체적 존재가 있어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크리스토퍼 허친스는 그의 책에서 퇴행적이고 타락한 종교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그 증거로 911테러를 제시한다. 그는 폭력과 지적 부정직, 억압, 사화분열의 원인이 종교에 있다고 하면서 종교를 제거하는 것이 새상을 훨씬 좋은 곳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는 종교적 신념을 즐기는 사람들은 망상에 빠져서 그들로 인해 사회전반이 위험한 요소들로 가득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2. 이상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특징은 신의 부재에 대한 이론적 과학적 주장보다는 종교를 자긴 자들의 행태나 심리에 대한 접근을 통해 신의 부재를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출발하여 종교의 긍정적 측면을 무시하고 부정적 측면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은 무신론의 악한 면을 간과한다. 이들은 종교 자체에 대한 깊은 분석보다는 종교의 사회적 문화적 현상만을 근거로 신의 부재를 주장함으로써 신학적 근거를 결여하고 있다. 새로운 무신론은 매우 강경한 주장과 관점을 가지고 종교적인 것은 무조건 없애애 한다는 극단적이고 호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성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며 유신론을 비합리적, 비과학적,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새로운 무신론은 다른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독단성과 종교에 대한 공격성을 가지고 있다.(덧붙이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무신론의 이런 태도는 그들이 비판하는 종교의 부정적 측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적 신념이 아닐까? )

 

3.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종교는 폭력적이라고 주장한다. 샘 해리스는 종교는 경전을 독단적,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선천적으로 폭력을 양산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종교는 때론 잘못될 수도 있고 그 비판도 당연하지만 종교 자체가 악하고 종교의 제거가 세상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새로운 무신론의 주장 역시 폭력적이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종교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를 잘못 일반화해서 신념, 가치관까지 다 포함하여 비판한다. 특히 샘 해리스가 아브라함계 종교는 폭력을 부추키지만 동양 종교의 영성은 평화를 증진시킨다고 말한 것은 종교와 영성에 대한 그의 몰이해를 보여준다. 사실 새로운 무신론의 주장대로 라면 정치적 가치나 신념도 종교와 같이 위험하다.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나 사상도 광신적으로 변하면 문제가 생긴다. 기독교는 비폭력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물론 역사 가운데 기독교가 폭력을 조장하고 행사한 적도 많았지만 반대로 평화의 도구가 된 경우도 많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공산주의와 같은 무신론적 사회의 폭력은 종교적 사회의 폭력 못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종교를 평가하는데 비폭력과 폭력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이 과연 충분한가? 하는 문제다. 비폭력인 과연 영원한 진리라고 보편적 가치인가? 어쩌면 폭력-비폭력이란 프레임은 비폭력주의를 절대화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아닌가? 예를 들면 정의를 위한 폭력이 정당화될 수도 있고, 인간의 죄악과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비폭력이란 이름으로 비판받아서는 안되지 않은가? 종교를 악으로 규정하고 종교는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새로운 무신론도 종교에 대한 폭력 아닌가?) 

 

4.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종교는 비이성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들은 이성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며 종교를 가진 자들은 비이성적이고 무지몽매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성은 항상 객관적이고 절대적으로 옳은가? 서구 세계에서 인식론은 데카르트로 시작된 합리론과 베이컨으로부터 내려오는 경험론이 양대 주류를 이룬다. 합리론은 감각적인 경험과 관계없이 이성적인 과정을 통해 지식을 얻는다는 견해를 가진 반면에 경험론은 인간은 경험에 기반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통합한 인식론의 체계를 세우려고다. 그는 이성이 진리를 알아가는데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이성의 한계를 인정했다. 이성만이 실재를 바르게 인식하는 유일한 도구는 아니다. 실재를 인식하고 알아가는 도구는 이성 외에도 많다. 인간의 문화, 종교, 철학 등은 실증적 관찰이나 논리적 추론으로 입증될 수 없는 것들이다. 양심, 사랑, 형제애 등의 가치들은 분명히 실재하지만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실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인다. 인간 역사도 이성중심의 세계가 가진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다. 18세기에 등장한 계몽주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고 현존 질서를 개혁하려고 했다. 이성을 핵심으로한 계몽주의는 자연과학을 비롯하여 법, 의료, 국가체제 등 수많은 인류 역사 발전에 기여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말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였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신이 있다면 홀로코스트나 911테러는 신의 책임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신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라면 그 책임은 허구적 존재에게 돌릴 수 없고 허구적 존재를 만들어낸 인간에게 돌려져야 한다. (덧붙이자면 새로운 무신론자들의 주장처럼 신이 인간의 비이성적 결과물중 하나라면 신을 제거한다고 인간의 비이성도 제거될 수 있나? 신이 제거되어도 인간이 가진 비이성은 계속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낼 것이 아닌가? 사실 이성-비이성이란 프레임도 이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일 뿐이다. 이성은 항상 옳고 비이성은 항상 틀리다는 주장은 이성주의적 관점에서만 정당화될 뿐이다. 인간은 전지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적 한계를 가진 인간 이성도 항상 잠정적일뿐이다.)

 

5.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종교는 비과학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과학을 너무 절대적으로 과신하는 과학주의에 빠져 있다. 그들은 과학은 오직 증거에 입각한 학문이지만 종교는 증거를 철저히 외면하고 믿음만을 강요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은 잠정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에를 들면 단일우주론과 다중우주론은 모두 과학적 증거에 대한 해석이지만 어느 것이 옳은지 절대적 증명은 아직 불가능하다. 이때는 자신의 해석이 옳다고 하는 일종의 믿음이 작용한다. 우리가 과학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이 모든 이론을 증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입수 가능한 죄상의 증거들을 제시하며 우리가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주기 때문이다. 현대의 과학이 최종적인 해답이라고 그 누구도 증명할 수 없고 과학은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과학은 관찰과 실험에 의존하여 탐구하고 추론한다. 따라서 관찰을 넘어선 가치, 윤리 같은 비실증적인 개념은 과학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러나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흔히 과학의 범위와 한계를 무시하곤 한다. 종교는 신, 삶의 의미와 가치, 도덕과 같은 과학 너머에 있는 실재에 대한 질문을 탐구한다. 이런 질문들은 합리적이지만 비실증적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과학으로 무신론을 수호하며 유신론을 공격한다. 그들은 과학과 종교를 전쟁 구도에 비유하여 과학과 종교를 갈등과 대립관계로 상정한다. 물론 역사상 종교와 과학 사이에 길등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갈등만이 아닌 대화와 공존도 가능하다. 에를 들면 빅뱅이론이나 우주상수이론 등은 신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적 사고와 깊이 공명한다. 결국 종교로부터 인간 해방을 주장하는 새로운 무신론은 오히려 이성과 과학 안에 인간을 가둔 꼴이 되고 말았다. 

 

6. 새로운 무신론은 2006년 등장한 이래 기대만큼의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종교의 타락과 안일함을 네거티브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데 사용했던 이성과 과학은 도리어 기독교 변증가들이 기독교 신앙의 합리성을 변증하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조롱하고 모독하는 태도는 사회적인 동의나 지지를 얻는데 실패했는데, 이런 실태에 직면한 무신론 진여은 무신론적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마치 종교 근본주의와 흡사한 형태의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프로이트는 "사회학과 인류학, 심리학의 저명한 인사들은 유아기적 종교 환상에 관심을 갖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동터 오는 것을 목도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닌 오늘 여전히 종교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종교는 공적 영역으로 들어왔다. 도킨스는 인류의 본성이 원래 미신적이고 종교는 본질적으로 진화과정의 우연한 산물이기 때문에 본능적 신앙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따라서 종교는 과학과 이성 안에서 교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인간은 신을 그리워하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고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이해는 2천년 동안 공통된 기독교의 견해였다. 새로운 무신론자들은 종교적 신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면 기독교의 신뢰성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설명이 인간 안에 있는 그리고 인간 너머에 존재하는 신을 향한 깊은 본능을 규명하거나 부정하지 못한다. 챨스 테일러가 말하듯이 종교는 사리지지 않을 것이고 또한 그럴 수 없다. 왜나하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새로운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비이성적, 폭력적,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이성주의, 비폭력주의,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비이성, 폭력-비폭력, 과학-비과학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초이성, 초폭력, 초과학의 범주도 있지 않은가? 종교에는 이성적, 과학적 요소뿐만 아니라, 동시에 초이성적, 초과학적 요소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