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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시편이란 무엇인가?

시편이란 무엇인가?

2017-04-19 21:04:36


1. 유대인들은 구약성서를 셋으로 구분한다. 토라(모세오경), 느비임(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열왕기,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소선지서), 케투빔(나머지 전부)이 그것이다. 이와 달리 칠십인경은 모세오경, 역사서, 시와 지혜, 예언서로 구분하는데 이 전통이 라틴어 성경인 불가타로 이어지고 오늘날 개신교와 카톨릭의 공식적인 구분으로 받아들여졌다. 신약성경에서는 유대인의 구분을 따라 구약성경을 모세율법(토라)과 선지자의 글(느비임)과 시편이라고 말하는데(눅24:44) 여기서 시편은 케투빔을 대표하는 지칭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예수 당시에도 케투빔은 편집이 완성되지 않았고 시편만이 널리 인정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편의 영어 단어인 Psalms는 헬라어 psallo에서 온 것인데, 이 단어는 찬양의 노래들을 뜻한다. 제2권의 마지막에 나오는 다윗의 기도를 가리켜 시편을 기도(테필로트)의 책이라 불렀고 랍비들의 문헌에서는 세페르 테힐림, 곧 찬양의 책으로 불렀는데 히브리 전통에서 보존된 두 이름, 기도와 찬양은 시편의 두 가지 근본적인 형태를 잘 드러내준다. 

2. 히브리성경에서는 시편의 표제가 본문에 포함되어 있는데 많은 표제들의 경우, 표제의 내용이 시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것들이 많다는점을 고려하면 표제 역시 성경본문의 한 부분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히브리 성경에는 모두 116개의 시편들이 표제를 지니고 있고 칠십인경은 1편과 2편을 제외하고 모두 표제를 가지고 있다. 칠십인경이 맛소라 사본과 다른 표제를 지니고 잇다는 점은 , 표제는 주전 2세기까지는 고정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시편이 두 번 실린 경우(14편과 53편) 서로 표제가 다르다는 점도 표제가 원래부터 시편에 부착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되엇음을 알려준다.

 

3. 시편은 1권(1-41편), 2권(42-72편), 3권(73-89편), 4권(90-106편), 5권(107-150편) 이렇게 5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권의 마지막 시편에는 모두 송영과 아멘으로 마쳐지고 있다. 이것은 시편이 다섯 권 틀을 위해 시편이 의도적으로 편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탈무드에 의하면 시편의 5권 편집은 오경의 다섯부분에 상응한다고 한다.이것은 시편이 토라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시편의 이런 편집은 분명이 오경이 완성된 이후 일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오늘날의 시편 형태는 제2성전기에 이뤄진 것으로 여겨지며 제2성전 찬송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편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최종적으로 편집되기 전에는 편집자들이 개별 시편들을 모으고 배열하는 일을 통해 계속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드디어 최종적으로 오경의 체제로 완성되었을 때 비로서 사람들이 지은 시편을 하나님 말씀으로 여기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편의 편집 의도를 고려하여 최근의 시편 연구에서 각가의 시편들이 지지고 있는 표재들이 새로운 중요성을 띠게 되었으며 시편의 5권 편집과 제왕시, 토라시 등의 위치가 주는 의미들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시편이 5권의 책으로 이뤄진 것처럼 각 책의 신학을 연구하는 것이 요즘 시편 연구의 경향이 되었다.

 

4. 시편의 편집자들은 전체 시편집에 대한 서론격으로 시편1편과 2편을 첫머리에 두고 있다. 표제어를 모두 붙인 70인경에서도 유독 이 두 시편만은 표제없이 남겨두었다는 점은 이 두 편이 특별한 위치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1편의 첫 구절과 2편의 마지막 구절에 모두 "복있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이  구절이 두 개의 시편을 둘러싼 인클루지오 구조를 통해 두 시편을 한 덩어리로 묶으려는 편집적인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두 시편에는 모두 "Haga" 라는 동사가 스였는데 1편에서는 묵상하다는 의미로, 2편에서는 꾸미다는 의미로 각각 쓰이고 있다.  동일한 단어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어 복된 사람과 대적하는 자의 궁리가 서로 다름을 보여준다. 이렇게 1편과 2편에 등장하는 공통된 어위들에 대한 고려와 인클루지오는 1편과 2편을 하나의 덩어리로 다룰 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이 두 시편의 존재를 다른 시편들과 구별시킨다고 볼 수 있다.

 

5. 1편에서 권하는 복된 삶은 토라를 즐거워하고 묵상하는 삶인데, 토라는 바로 이하에서 나오는 여러 시편들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가르침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경을 따라 다섯권으로 나뉘어져 있는 시편은 그 자체로 일종의 토라로 제시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그런 점에서 시편집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주신 토라로 기능한다고 할 수 있다. 1편에는 악인과 의인이라는 이분법적 패러다임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다수의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에서 소수의 핍박받는 의인들을 정당화하고 지키는 주요한 방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의인은 여호와의 토라를 궁리하는(묵상하는)자들이지만 악인과 죄인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 메시아를 해칠 꾀를 궁리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악인은 단지 악하고 못된 성품을 가진 자들이라가 보다는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없는 이들, 그리고 메시아가 다스리는 세상을 거부하며 메시아 없는 세상을 궁리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의인이란 악이이 득세하는 이 어두운 세상에서 토라를 빛으로 삼고 메시아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소수의 무리들이라고 볼 수 있다.  포로후기 시대에 이미 왕이 더 이상 기능하지 못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2편을 비롯한 소위 제왕시들이 모아진 것은 현실의 왕에 대한 기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기름부음받은 자, 곧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1편과 2편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1편의 토라를 즐거워하는 의인이 2편에서의 왕과 동일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1편에서 의인이 묵상하는 토라의 내용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이고 2편에 등장한 메시아는 토라가 보여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세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3편 이후에 등장하는 다윗과 연관된 표제어의 시편들은 일상을 토라를 묵상하면서 미래의 메시아를 기대하는 의인의 표상으로 다윗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시편 1편의 토라, 그리고 2편의 메시아라는 두 주제는 시편이 그 최종적 형태를 갖추던 시기의 유대인의 기본적인 신앙을 이루는 것이다.

 

6. 3편 이후에 이어지는 시편들은 주로 탄식을 중심 주제로 하는 것들이다. 사실 시편의 1,2,3권은 대부분 이런 시편들이고 4권으로 가면서 찬양이 중심적으로 나타나는데 트괴 주님의 왕되심에 대한 찬양(93-99편)과 일련의 찬송시들(103-106편)에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마지막 권은 5권은 찬양으로 시작하여 119편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시편의 마지막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구절로 특징지워지는 다섯개의 시편으로 이뤄진다. 그러므로 시편 전체는 전반적으로 탄식에서 찬양으로의 흐름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수집된 시편들을 이렇게 탄식으로 시작하여 찬양으로 배열한 것은 일상에서 토라를 묵상하며 메이사의 등장을 기대하는 의인의 삶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제왕시들이 시편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각 책의 처음과 끝에 위치한다. 주전 2-3세기 왕이 없는 시대인 시편 편집기에 이미 과거사가 되어버린 왕에 대해 노력하는 이 시편들은 새로운 이상적인 왕이 단순한 한 시기의 왕에서 그쳐지는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인 왕인 메시아로 여겨진다는 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2권의 마지막 시편인 72편에서 왕의멋진 통치를 노래한다면 3권의 마지막 시편인 89편은 왕과 맺은 언약 그러나 언약의 파괴와 언약에 대한 기대 그리고 왕에 대한 탄식으로 끝난다. 그리고 4권에서는 여호와의 다스림, 왕이 되신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시편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인간 왕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 되심을 기대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여호와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마지막 권은 5권의 결론이 여호와가 통치하시므로 할렐루야로 마무리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138-145의 다윗시 묶음에서 하나님나라를 노래하고 있으므로 146-150편이 할렐루야로 끝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시편의 주제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시편의 편집은 대단힌 신학적이다. 나라가 없는 바벨론 포로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를 깨달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이 주로 이 시기에 선포된다.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이런 기대는 드디어 신약에 와서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로 나타난다. 

 

7. 시편의 저자들은 대체로 알려지지 않으며 그 저작의 시기와 배경도 알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다. 19세기까지 시편의 저자는 다윗으로 여겨졌으며, 시편 자체에서 다윗의 이름으로 칭해지는 시편은 모두 74편이나 된다. 신약성경도 시편 저자가 다윗인 것을 당연시하고 잇다.(막12:35-37) 그러나 이런 진술을 시편 저자 문제의 근거로 보는 것은 합당치 않다. 신약성경에서 시편을 다윗의 이름으로 칭하는 것은 당대의 일반적인  전통적 견해를 따른 것임을 짐직하게 한다. 물론 다윗과 시편이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시편 전체가 다윗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다윗의 이름이 붙여져 있는 것 시편도 다윗의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대부분 구전으로 전해져 왔던 고대의 시기를 생각한다면 어떤 시에 다윗의 이름이 붙어 있다고 그것을 오늘날의 저자개념으로 다루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라고 할 것이다. 다윗의 이름으로 칭하는 시편의 서두는 "레다윗"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것은 "다윗의" 라는 해석도 가능하고 "다윗을 위한" 혹은 "다윗에 관한"도 가능하다. 후자의 경우라면 시편은 다윗에게 바쳐진 혹은 다윗에 관한 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는 자신과 다윗을 하나님 앞에 동일시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윗의 역경에 대한 전승, 다윗의 시와 노래에 대한 전승, 그리고 다윗의 언약과 영광에 대한 인식들로 인해 다윗은 이스라엘의 예배 안에서 불려지는 시편의 가장 큰 주제와 소재가 되었을 것이다.

 

 

시편의 장르와 언어 양식

2017-04-26 09:41:36


평행법

 

1. 일반적으로 시는 다른 형식의 글과 구분되는 통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언어 양식이다. 특별히 히브리 시는 더 독특한 일련의 통제 원칙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 시편의 독특한 언어 양식 중 하나가 평행법이다. 평행법이란 용어는 1753년 성경 시와 관련해 영향력있느 연구물을 발표했던 영국 성공회 감독 로버트 로우쓰(Robert Lowth)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로우쓰는 동의적 평행법, 반의적 평행법, 통합적 평행법이라는 세 종류의 평행법을 제시하여 범주화시켰다. 그러나 이런 범주화는 독자들이 시편을 제대로 감상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히브리 시에서 평행법은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시의 행 안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며, 행과 행 사이에, 나아가 절과 절 사이에도 나타난다. 심지어 평행법은 단락과 단락 사이에도 발생할 수 있는데 시편 42편의  앞단락가 뒷 단락 그리고 시편 43편 이렇게 세 단락이 평행 구조를 보여준다. 평행법은 두 개의 시편 사이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시를 수집하여 한 권의 시편으로 배열한 편집자들은 어떤 시편들을 의도적으로 바로 옆에 배치시켜 서로 평행성을 나타내도록 만들었다. 이런 시편들을 소위 쌍둥이 시편이라고 불리는데 시편1/2편, 103/104편, 105/106편, 111/112편, 113/114편 등이 그것이다. 

 

2. 반향과 확장이라는 개념은 평행법의 구성 요소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익한 개념이다. 대부분의 평행법에서 두번쩨 요소는 첫번째 요소를 반향하거나 확장, 혹은 반향및 확장을 한다. 반향이란 두번째 요소가 첫번째 요소를 거의 반복하는 형태로서 동의어, 반의어, 보조개념, 하위개념 등등의 형식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이렇게 반향은 첫번째 요소의 의미를 취하여 다시 첫번째 요소로 돌려보낸다. 이와 달리 확장은 첫번재 요소에서 에너지를 취한 다음 그 에너지에 활력을 불러넣어 발전시키고 이어간다. 아무튼 히브리 평행법에서는 두번째 요소는 반향이든 확장이든 아니면 반향과 확장 모두이든 첫번째 요소와 평행적인 구조를 나타낸다. 

 

시편의 양식들

 

1. 장르는 범주, 종류, 혹은 문학 양식을 의미한다. 시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 장르이지만 시편의 장르 안에는 하위 장르들이 존재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애탄시(도움 요청시), 찬양시, 감사시, 그리고 신뢰시 4가지 장르이다. 이러한 장르 구분을 하는데 고려된문학 양식들은 상황과 화자, 청중, 그리고 사용되는 언어의 특징들이다.

 

2. 애탄시는 시편에서 가장 많이 나타난 장르인데 여기서 시인들은 불평하거나 탄식한다. 그러나 애탄시들의 무게 중심은 불평이 아니라 도움 요청이기 때문에 애탄시를 도움 요청 시라고도 부른다. 시편 13편은 애탄시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는 애탄시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중요한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애탄시들은 일반적으로 시인이 처한 위기의 상황들에 대한 정보가 어느정도 나타난다. 물론 사용된 언어가 모호하고, 위기의 구체성을 확인하기 어려운 시편들도 많이 있다. 애탄시의 일차 청중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애탄시에서 사용되는 하나님 호칭의 이미지들은(나의 왕, 나의 방패, 나의 피할 바위, 피난처)모두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과 구원을 표상하고 있다. 애탄시의 청중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지만 사람들을 향한 권면이나 설교의 형태도 나타난다.(이것은 시편들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여기서 시인은 공동체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하기도 하고 동시에 공동체를 행하여 설교나 권면도 한 것으로 보인다.) 애탄시에 나타나는 언어의 양식은 시인이 처한 위기 상황에 대한 불평(항의)로 시작하여 도움 요청으로 나아간다. 도움 요청 언어에서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촉구하거나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셔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한다. 애탄시는 도움 요청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나 찬양으로 마무리 된다.

 

3. 찬양시는 애탄시에 이어 두번째로 많이 나타나는 장르이다. 찬양시는 주로 공동체 예배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선포하고 그 분이 누구이신지를 노래하는 양식이다. 시편 113편은 찬양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찬양시는 찬양의 요청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데 이 요청의 핵심은 공동체를 예배로 초대하여 믿음을 기쁘게 표현하는 것이다. 찬양시가 애탄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애탄시의 청중이 일차적으로 하나님이라면 찬양시의 주요 청중은 인간 공동체라는 것과 찬양시는 애탄시와 달리 위기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찬양시의 두 번째 특징은 찬양해야 하는 이유 혹은 당위성이 제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찬양시의 본론에는 하나님의 행적을 선포하여 그의 정체를 묘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찬양시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란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행위와 정체에 대한 증거에는 화자가 삼인칭으로 하나님에 관해 노래하거나 이인칭으로 노래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삼인칭 표현 양식은 화자가 하나님을 공동체에 소개하거나 선포하는 경우에 사용되고 이인칭 표현은 화자가 (공동체를 대표하거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직접 노래하는 경우에 사용된다. 

 

4. 신뢰시는 애탄시와 유사하게 어떤 위기 상황을 전제하지만 애탄시와 중요한 차이점은 신뢰시의 지배적인 어조가 도움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뢰라는 것이다. 가장 잘 알려진 신뢰의 시는 시편 23편인데, 이 시에는 시인이 처한 위기 상황이 암시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을 불평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집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5. 감사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선포하여 그가 누구신지를 노래하며 하나님과 인간 청중을 향해 불린다는 점에서 찬양시와 비슷하다. 또한 감사시는 애탄시와 비슷하게 구체적인 위기의 상황이 등장한다. 다만 애탄시가 현재적 위기 상황 속에서 불렸다면 감사시는 위기가 끝난 후에 과거를 회상하여 불렸다는 점이 다르다. 시편 30편은 감사시의 탁월한 실례인데, 여기서 감사시의 특징적 요소들인, 과거 위기에 대한 회상, 받은 도움에 대한 묘사 그리고 찬양 드림의 삼중적 구조가 잘 나타난다. 애탄시들이 다양한 위기에서 표현된 것처럼, 감사시는 다양한 위기를 통과한 자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감사시의 핵심은 시인이 하나님께 받은 도움을 여러가지 방식과 표현으로 보고하는 장면이다.  감사시는 대체로 찬양으로 마무리되는데 찬양은 그 자체로 그들이 감사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사실 히브리 언어에서 감사를 의미하는 단어는 없고 감사로 번역된 단어는 사실 증언하다,고백하다, 혹은 알리다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히브리 시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하나님이 도우신 일을 공동체에 선포하며 하나님을 향해 기뻐 노래하는 일을 의미한다.

 

시편의 주제들

 

1. 제왕시들은 주제 면에서 이스라엘의 인간 왕을 다룬다. 이 시편들이 고정된 문학적 패턴이나 일관된 삶의 정황 혹은 청중을 나타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왕시를 시편의 주된 주제들 중의 하나로 받아들인다.  더욱이 시편의 편집자들도 제왕시들을 의도적으로 중요한 자리에 배치한 것은 그들이 그 시편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간주했음을 반증한다. 제왕시들은 대부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다윗 왕가의 마지막 왕이 바벨론으로 유수되기 이전, 즉 이스라엘의 왕정 제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 때 작성되었을 것이다. 이런 제왕시들은 인간 왕과 같은 지도자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증언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런데 시편이 편집될 시기는 이스라엘의왕정 제도가 사라진 식민지 시대인데 왜 제왕시들이 시편 편집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인가?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그 이유는 제왕시들은 메시아 기대 사상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제왕시들이 보존된 이유는 공동체가 이 시편들에 담겨진 약속들, 즉 도래할 왕 메시아에 관한 약속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지키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2. 즉위시에 해당하는 시편들(시47; 93; 96; 97)은 모두 여호와께서 통치하신다 혹은 여호와는 왕이시다는 표현을 공유하고 있다. 이 시편들은 하나님에 대한 우주적 경배와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요청하고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와 창조 사역을 연결한다. 지그문트 모빙켈은 추수와 신년을 축하하는 절기에 즉위시들이 상연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제왕시가 선택된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인간 왕들과 지도자들을 매재체로 삼아 일하신다는 점을 강조한다면 즉위시는 모든 창조물 위에 계서 만유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아야 할 홀로 왕이신 하나님을 강조한다. 

 

3. 지혜시(시37; 41; 49; 19)는 이스라엘의 지혜 전승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 시편이다. 그래서 지혜시에는 교훈적인 어조와 지혜와 관련된 용어, 질문, 주제들이 많이 등장한다. 시편73편은 대표적인 지혜시다. 이 시편의 주제는 욥기서의 주제와 매우 흡사하며 매우 교훈적인 어조로 자기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게다가 이 시편의 용어들은 전도서의용어들과 매우 유사하다. 

 

4. 창조시(시8; 19; 65; 90; 104; 139; 148)들의 공통된 주제는 창조자로서의 하나님과 그의 사역으로서의 창조세계다.

 

5. 역사시(시 78; 105; 106; 135; 136)는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과거를 노래하는 시편들이다. 그래서 역사시는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행위들을 이야기 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루었는가에 대해 고백한다. 역사시의 핵심은 이스라엘 역사의 연대와 이름들, 그리고 사건들을 단순히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로 부터 배우는 것이다.

 

6. 참회시는(시6; 32; 38; 51; 102; 130; 143) 양식으로 보면 애탄시의 하부 장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참회시는 애탄시 중에서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아 위기 상황에 빠진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참회시들은 인간은 사람과 하나님에게 죄를 짓지만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7. 저주시는(시69; 83; 88; 109; 137; 139; 140) 어느 정도 참회시와 반대 이미지를 지닌다. 둘 다 애탄시(도움요청시)의 하부 장르이지만 참회시는 자신의 죄악으로부터 구원을 기도하는 반면에 저주시는 자신의 대적들로부터 구원을 간구한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신약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저주시가 갖는 의미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저주시로 부터 몇가지 중요한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저주시들은 인간의 감정을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낸 매우 인간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믿음은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숨기는데 있지 않은데 여기에 정직함이 있는 것이다. 둘째는 저주시들이 원수 갚는 것을 직접 행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기는 비폭력의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저주시의 시인들은 분노를 하나님께 맡긴다. 불의를 하나님께 고발하고 원수 갚는 문제는 하나님에게 이양하는 것이다. 

 

8. 시온시는 찬양시의 하부 장르에 속한다. 시온은 성전이 세워진 예루살렘에 있는 산의 명칭이고, 예루살렘 자체의 명칭이기도 한데, 시온시들은 시온을 하나님이 거하시기로 선택한 장소로서 찬양한다. 또한 시온시들은 하나님의 약속들, 주로 다윗의 후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릴 영원한 왕이 나오리라는 다윗과의 약속 혹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아브라함과의 약속들을 찬양한다. 

 

9. 제의시(15; 24; 29; 47; 50; 74; 81; 91; 95; 115; 118; 121; 134)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어떤 제의적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누구인가?

2017-04-30 19:55:03


4장 시인(Psalmist)은 누구인가? 

시편의 목소리와 삶의 정황 이해하기

 

목소리와 장소 개념 파악하기

 

1.  시인이란 바로 어떤 시를 노래하는 목소리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이다. 우리는 시를 읽거나 노래를 들을 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화자를 상상하거나 혹은 그 내용에 자기 자신을 대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은 특별히 그 시나 노래가 일인칭 관점에서 불릴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시편의 일인칭 주어를 상상하는 행위, 즉 시인의 정체를 마음에 그려보는 일은 시편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일이다. 

 

2. 어떤 사람들은 시편의 표제어들을 시편의 저자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로 이해한다.그러나 표제어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항상 분명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윗의" 혹은 "아삽의"와 같은 표현들이 원 저자를 나타내는 표시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제어는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종 전승 초기에 시편이 어떻게 해석되었고 사용되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시편들에는 독자들이 페르소나 혹은 시편의 목소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도와주는 표제어들도 있다. 예를 들면 시편 92편의 표제어 "안식일의 찬송시"는 이 시편이 안식일 예배에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며, 이 시편의 일인칭 주어는 안식일 예배자를 상징한다. 또 "다윗의 시,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어가 붙은 시편 30편은 이스라엘의 축제 절기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일인칭 주어는 절기에 예배를 드렸던 자를 나타낸다. 시편 102편의 경우 " 곤고한 자가 마음이 상하여 그 근심을 여호와 앞에 토하는 기도"라는 긴 표제어가 붙어 있는데, 이 시편에서 일인칭 주어는 고난 가운데 있는 누구에게 든지 해당된다. 그러니 이 시편은 고난받는 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초청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시편에서 페르소나의 역할

 

1. 시인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두 가지 실체를 조합하는 일과 관계가 있는데, 그 두 가지 실체는 바로 기도자의 목소리와 그가 기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질문은 독자를 시편 해석과 경험세계 안으로 초청한다. 시인이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것과 시편의 저자가 독자와 맺을 수 있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 시편의 페르소나가 누구이며 그 페르소나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끈다.

 

2. 시를 읽을 때 그 시의 목소리를 단지 이야기를 전달하는 서술자가 아니라 페르소나로 생각하는 것은 시편 이해에 도움이 된다. 시편(특히 애탄시, 찬양시, 감사시)에서 의미 파악은 독자가 그 시의 정서와 표현들을 직접 경험하는 순간에 더 많이 발생한다. 독자는 자신과 시를 노래하는 목소리를 동일시함으로써 그 시를 훨씬 더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시인의 경험, 즉 시의 일인칭 주어의 경험은 시편 독자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예를 들어 시편18편에서 일인칭 주어는 도움을 요청하고 죄를고백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일인칭 주어가 바로 이 시편의 페르소나인데, 시편의 독자는 페르소나에 관한 것을 식별한 후에 제기된 문제들을 이해하고 도전들을 평가하며 그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시편 18편은 대체로 왕의 감사시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일인칭 주어는 왕이고, 그 사람의 정황은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이후에 드리는 감사일 것이다.

 

3. 한 편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다수의 인물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우리는 시편의 저자, 마음 속에 상상한 화자의 목소리, 시편을 읽거나 듣는 공동체, 시편 안에 제시된 인물 등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일인칭 주어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인칭 주어만이 시편의 독자가 시인의 페르소나를 취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독자는 그 삶의 정황을 자신의 정황으로 대입시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페르소나는 시인과 독자 사이에 동질감을 형성하고 설명하기 때문에 시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중요한 출입구가 된다.

 

삶의 정황 개념 이해하기

 

1. 삶의 정황이란 하나의 시편을 작성하게 했던 상황을 말하며, 동시에 독자를 시편 안으로 초청하는 상상의 상황을 가리키기도 한다. 독자는 한 편의 시편이 언제, 어디서, 왜 불렸을가를 상상하게 되는데, 이것을 시편의 "삶의 정황"이라고 부른다. 일상에서 경험되는 삶의 기복으로 가득차 있는 시편에 나타나는 삶의 정황은 실로 다양하다. 삶의 정황을 이해할 목적으로 하나의 시편을 읽을 대 효과적인 출발점은 시편에 제시된 페르소나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한 편의 시편에서 일인칭 주어가 나타날 때, 그 시편이 어떤 상황에서 작성되었는지 혹은 그 시편이 어떤 이유에서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어느정도 드러나게 된다. 시편 22편은 이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 시편의 전반적인 삶의 정황은 오랫동안 질병을 앓는 자와 그의 고난을 기뻐하거나 혹은 그의 질병을 마땅한 결과라 생각하는, 심지어 하나님에게서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적들과의 갈등으로 그려질 수 있다.

 

2. 시편의 삶의 정황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게 상상력이 요구된다.  서로 다른 독자들은 주어진 시편의 삶의 정황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상할 것이지만 그 시편의 삶의 정황을 주목하면 의미있는 시편 읽기를 경험할 수 있으며 그 시편의 의미도 해석할 수 있다. 시편의 삶의 정황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신체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상황이다. 어떤 시편들은 이 두 가지 측면 가운데 어떤 것은 배제하고 어떤 것은 강조했다. 에르하르트 게르스텐베르거는 시편의 의미는 시인의 신체적이고 사회적인 상황에 역점을 두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클라우스 베스터만은 시편의 삶의 정황이 세속적인 제의라는 주장에 반대하며 시편의 진정한 문맥은 신자와 하나님의 영적인 관계라고 강조했다.

 

3. 주어진 시편의 페르소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즉 시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은 시편이 어떻게 의미를 창출하는가와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식일 뿐 아니라 시편에서 핵심이 되는 수사적 기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편에 있는 삶의 정황들이 독자가 처할 수 있는 삶의 정황과 항상 유사한 것은 아니다. 시편에 나타난 몇가지 삶의 정황들은 현재의 삶에 쉽게 적용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는 부득불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면 시편 137편은 종종 현대 독자들을 움츠러 들게 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삶의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편 137편을 읽고 그렇게 험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삶의 정황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 시편의 삶의 정황은 주전 586년 이스라엘 백성이 베벨론 제국에 포로로 끌려갔을 때다. 우리는 시인이 예전에 성전에서 노래하던 자였다가 바벨론에 강제로 끌려와서 조롱을 당하며 성전의 노래를 불러야 했던 자로 상상할 수 있다. 이 시편의 표현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취할 수 있는 언어들은 아니지만 이해할 수 없는 표현도 아니다.

 

시편의 배경으로서의 성전과 이스라엘 신앙

 

 시편 내용에서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삶의 정황 이외에 대부분의 시편들은 시편이 기록된 보다 분명한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 성전 예배에 시편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역대상 16장의 본문으로 잘 알려져 있고 저자 및 예배규례와 관련된 대부분의 표제어들에도 분명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시편을 심도있게 읽기 위해서 시편의고대 이스라엘 종교 배경을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시편들이 작성되었던 시기에 유포되었던 용어, 관습, 사회적 현실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편에 있는 회중과 개인

 

 시편은 개인 용도를 위해 기록되었는가 아니면 회중 전체를 위해 기록되었는가?  시편은 과거나 현재나 공동체 예배의 일부분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개인을 위해서도 사용된다. 각 시편들은 이러한 이중적인 용도를 염두에 두고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회중이 등장하더라도 개인을 염두에 두지 않은 시편은 혹 있더라도 그 수가 매우 적다. 개인과 회중을 의도적으로 연결시키는 시편들도 있다.  예를 들면 시편 74편에는 회중이 등장하지만 시편 111편에는 회중 가운데 개인 찬양이 이루어진다. 시편 78/85/106편의 경우 일인칭 주어 "나"에서 일인칭 복수 "우리"와 삼인칭 복수 "그들"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일인칭으로 전환되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이 시편들의 의의는 페르소나 즉 시편에서 제시된 인물을 독자가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편의 은유와 상징

2017-04-30 21:16:18


5장 시편의 은유와 상징

 

1. 시편의 은유적 언어들은 시편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영성을 형성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한다. 은유는 문학의 작은 단편들인 시편이 어떻게 그렇게 큰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피에르 벤 해키가 말하듯이 은유는 히브리 시 문체의 특징적인 부분일 뿐 아니라 실체를 개념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시편에 사용된 은유들은 독자들이 시편에 접근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접촉점이다. 은유는 독자의 상상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깊고 독자가 시편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해심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 은유는 단어로 채색된 그림이다. 은유적 언어는 본질적으로 대표성을 띤다. 은유는 언어를 활용하여 단어 그림들 혹은 언어 상징들을 창출한다. 이 그림들과 상징들은 어떤 특정한 사물을 다룬 사물에 빗대어 의미를 전달한다. 즉 어떤 것에 관한 무엇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른 어떤 것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나의 은유를 이해할 때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묘사되고 있는 것(목표영역; target domain)을 고려해야 하고 둘째는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것(근원영역; source domain)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시27:1)에서 여호와는 목표영역이고 빛은 근원영역이다. 시편에는 하나님에서부터 열 인간 군상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인간의 다양한 삶의 정황들에 이르기까지 은유 주제들이 다양하다. 이와 같이 다양한 목표영역을 묘사하는 근원영역 또한 동일하게 다양할 수 밖에 없다.

 

3. 은유를 강력하게 만드는 것은 객체가 언제나 주체와 다른 영역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시편 18편에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란 은유가 나오는데 여기서 은유의 주체는 여호와이고 객체는 바위다. 여호와와 비위는 문자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여호와가 바위가 될 수 있는가? 여호와를 바위로 간주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석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여호와를 바위로 상상하는 것은 안정성과 보호, 확실성과 믿음직함을 연상시킨다. 상상력은 은유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상상력이 어떤 통제없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된다. 상상력은 시편을 낳았던 고대 사회의 문화적 배경을 어느정도 연구함으로써 통제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이미지들은 특정한 문화에 깊숙히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은유의 문화적 영역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상상력을 발휘하면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4. 은유가 작동하는 방식은 어떤 개념(목표영역)위에 하나의 대른 개념(근원영역)을 덧 입히거나 겹쳐놓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원영역의 어떤 측면들이 목표영역과 연결되어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노래할 때 목자의  몇 가지 측면들이 여호와의 개념과 연결된다. 즉 여호와는 밤새 지켜주고 안전하게 인도하는 자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그러나 냄새가 난다든지, 긴 수염을 하고 있다든지, 혹은 텐트에서 잠을 잔다든지 하는 목자의 다른 측면들은 여호와 개념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학자들은 종종 은유가 작동할 때 그것은 진실이자 동시에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은유가 작동할 때 독자는 은유의 목표영역과 근원영역 사이에서 마땅히 연결되어야 할 측면들을 바르게 연결해야 하며, 동시에 연결되지 않는 측면들을 걸러내야 한다. 

 

5. 은유는 시편의 의미를 창출하고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평행법과 아울러 은유는 히브리 시 뿐만 아니라 시편 전체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시인의 삶의 정황은 은유를 통해 자주 제시된다.시편에 있는 은유는 삶의 정황을 반영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은유는 신학적으로도 매우 심오하다. 시편23편에는 확장되고 혼합된 은유가 나타난다. 이 시편에는 은유들을 혼합해서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는 목자인 동시에 잔치를 배설한 주인이시다. 시편23편에서 가장 중요한 은유는 공급하심에 대한 은유다. 공급자로서 하나님은 양떼를 안전한 목초지로 인도하는 목자와도 같고, 수치를 당하고 영예가 더럽혀진 자들에게 영적인 잔치에서 영광의 자리를 내어주는 주인과도 같다. 

 

6.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편이 하나님에 대해 긍정적이고 안전하면서도 친근한 은유를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시편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은유의 전부가 아니다. 시편에 있는 은유를 읽을 때는 해석적 상상력이 요구된다. 특별히 전사로서의 하나님(시78:65)이나 잠들어 계신 하나님(시44:23)에 대한 은유와 같이 난감한 은유를 접하게 될 때 더 그러하다. 현대 독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또 다른 은유는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의 이미지다. 사실 시편의 은유는 종종 헷갈리기도 하고 그 의미가 결코 항상 명료한 것도 아니다. 그런 은유들의 의미는 분명하게 확인되거나 해석되지 않는다. 이 경우 이 미묘한 이미지들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고 그것을 해석하기 위해더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은유를 해석할 때 헷갈리는 한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어떤 시기와 장소에서 매우 긍정적인 뜻을 지녔던 근원영역이 문화적으로 다른 시기나 장소에서 매우 부정적인 뜻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사야 25장에서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이란 은유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매우 긍정적 표현이었지만 현대 미국 문화에서는 혐오스러울 수 있다. 시133편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손님을 환대하는 고대 문화에서 긍정적인 이미지이지만 현대 서방 문화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야지지 않는다. 따라서 시편의 독자는 근원영역의 이미지가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7. 일부 은유가 헷갈리는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이미지들의 경우, 근원영역과 목표영역이 상당히 근접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편38편에서 시인은 자신을 마치 적들의 말을 듣지도 못하고 자신을 변호하여 말할 수도 없는 것처럼 표현한다. 여기서는 근원영역의 이미지가 목표영역의 동일한 감각들에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귀먹음과 말하지 못함의 은유는 시인의 실제적인 신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정황에 대한 시인 자신의 반응과 관계가 있다. 시인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다며 하나님이 들으싣고 대신 변호해 주시기를 기다린다. 시편의 은유들은 그 의미가 모호하고 따라서 다양한 답변들이 가능하다. 그러나 은유의 의미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그 본문에 담긴 일반적이고 보장되는 의미에 관해서는 일치하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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