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킬더: 문화의 열쇠로서의 그리스도(헨리 반틸 번역 손성은)
2017-05-12 18:00:19
스킬더: 문화의 열쇠, 그리스도
클라스 스킬더(1890~1952)는 카이퍼(Kuyper) 이후 개혁신학계 내 알려진 가장 위대한 문화신학자입니다. 카이퍼와는 일반은총론에 있어서 차이가 있고, 또한 그것 대신 '일반명령'론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의 본 연구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게다가 카이퍼 이후 스킬더는 종교개혁의 신학에서 벗어나는 모든 경향들에 대항한 화란 칼빈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변증학자였습니다. 그는 인간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의 권위를 강조했던 칼빈의 강조하는 그 점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습니다. 하나님을 역사와 일치시켰던 헤겔(Hegel)에 대항해서, 스킬더는 하나님과 피조물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개념을 하늘이 선포하고 있음을 계속 주장합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와 그의 제자들인 바르트(Barth), 브룬너(Brunner), 틸리히(Tillich) 등에 대해서도 결코 적지 않게 비판합니다. 그들에 대항해서, 스킬더는, 하나님과 인간은 결코 분리되지(seperate) 않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구분(disjunction)은 언제나 더욱 깊은 결합(conjunction)의 기초 위에 있는 것이고, 또한 그 결합이 그 분리를 결정하며 상대화시키고 있다고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스킬더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자연, 하나님과 역사, 하나님과 피조물, 은총과 자연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습니다. 대립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죄와 은총 사이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를 회복하시는 그리스도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저항하는 적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우주 안에서의 대립입니다. 기원 후 1900년 동안의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연관성을 아무 것도 찾지 않고 있는 키에르고르에 반대해서, 스킬더는 그리스도께서는 역사의 중심에 서 계시며 또한 그 분의 승천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에 모든 것이 되시는 의미를 부여하고 계신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성육신은,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사역 곧 창조 없이는, 그리고 창조 이후의 섭리 가운데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사역 없이는,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이 없습니다. 칼케돈신조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인성과 연합되어 있으나 결코 혼합되어 있지 않으신 분이신데, 이런 고백에는 기독교적 역사관과 천국관이 농축되어 있습니다(앞의 책, p. 68). 역사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위한 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역사와 자연을 정죄하지 않으시며, 단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를 정죄하실 뿐이고, 오히려 자연과 역사를 그 원래의 무흠했던 목적을 성취하도록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문화의 비밀입니다. 그것은 기름부으신 자인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이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우리를 위하여 담당하셨던 대속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또한 우리들의 첫 번째 조상에게 원래 주어졌던 문화명령(the cultural mandate)를 우리가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를 원래의 자리에 회복시켜 놓으신 분(Replacement)이십니다.
크리스챤은 그리스도의 기름부음받으심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하이델베르그문답, 주의 날 12), 문화에 대해서 크리스챤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기름부음 받으심에 의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첫 번째 아담의 합법적인 상속자로 선포되셨고, 또한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이 성취하지 못했던 그 일, 곧 하나님의 만드신 작품 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수행하기 위한, 당대의 하나님의 직분자(God's officer of the day)로서 위임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에 의하여 능력이 입히우셨을(empowered)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능력으로 행하실(enabled) 수 있게 되셨습니다. 그 분의 기름부음받으심은 성취의 보증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만물을 아버지에게 화목시키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골1:20).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가져오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있었던 것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십니다.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애초에 계획하셨던 일을 일어나도록 하고 계십니다(앞의 책, p. 129). 산 영(a living soul)으로서의 아담은 당연히 인류사회의 조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현재 생명을 주시는 영(life-giving spirit)이셔서, 사람들을 당신과의 교제로 부르시고 계시고 또한 부르신 자들을 창조시에 첫아담에게 주어졌던 그 의무를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드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후자(곧 사람들)은 기본적으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자(image-bearer)로서,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받은 직분을 담지하는 자(officer-bearer)로서 여겨져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참된 종교였습니다. 이것이 원래의 우주의 질서였습니다. 그 안에서, 위임받았고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는 소명의 개념이 문화의 본질에 있어서 결정적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반역하였고, 아버지에 대한 자기자신의 관계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와 동맹하였습니다. 피조된 자연세계의 한 부분으로서 인간은 의식(consciousness)과 양심(conscience)을 모두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책에 쓰여진 편지이면서 동시에 읽는 자(해석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좋았던 땅을 개발시켜서 암시되어 있던 것을 구체화시키고, 잠재되어 있던 것을 열매맺게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래서 창조주되신 하나님과 더불어 일하는 자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세계를 좋다고 선포하셨지만 그 자체로는 완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문화적 활동으로 촉진되는 진화(evolution)와 발전(development)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영원한 쉼의 안식이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자기계발(self-culture)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성품 자체가 목적이 되게 하는 인격주의적 의미로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창조의 목적과 존재 자체의 목적은 하나님 당신 자신의 자기영광화이기에,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목적으로 두는 이러한 인격주의는 분명히 우상숭배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죄의 또 다른 결과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일로만 아니라, 문화의 도구들을 사랑하게 되는 일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은 목적에서 과정만을 떼어내어서 그 목적 대신에 수단만을 사랑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무익한 종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죄는 분리를 야기시킵니다. 창조 속에 있,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그 동료인간들, 종교와 문화, 이 모든 관계들이 단절되어 버렸습니다. 분해가 일어나고 우주의 아름다운 전체적 조화는 산산조각나 버렸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보편화시키는 영혼(catholicizing spirit)을 상실해 버려서, 더 이상 그 모든 것들의 통일과 목적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하나님의 창조적 규례(the creative ordinances)를 폐지시키지 않았습니다. 이 규례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그것은 행위의 언약 속에서 우리의 피조성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 의무(common obligation)이기 때문입니다. 문화는 결코 개인적 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서의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에 이르게 되도록 인도하려고 힘씁니다. 낙원(에덴동산)은 낭만적이고 고립된 장소로서 영혼의 한 기능으로서의 종교를 실행했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곳은 사람이 거주하게 된 땅의 시작이었고, 문화적 세계의 시초였습니다. 존 프린드(John Vriend)가 하나의 괴물적인 문장(a monstrous sentence)라고 부르면서 번역하였던, 문화를 정의한 스킬더의 문장에 의하면, 문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화는) 인류전체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생산되어질 자원개발노동의 총체(the aggregate of exploitive labor)를 향한 조직적인 노력이다. 인류에게는, 창조세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잠재성들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자신들의 범위 안에 들어오는 대로 그것들을 드러내어야 할 과제, 그것들을 그들 각자의 본성들의 법칙들과 일치하는 방식으로 개발해야 할 과제, 그리고 그것들을 원근에 있는 모든 이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두어야 할 과제가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의 기준에 복종해야 한다. 그 과제의 목적은 그렇게 함으로 인하여 얻어진 보물들을 예배적 피조물로서의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 되게 하며, 결과적으로, 이제는 더욱 철저하게 갖춰진 인간과 함께, 그것들을 하나님의 발 앞에서 가져오는 것이다.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이 영원토록 돌려져야 한다.”
죄많은 세상 속에서 이러한 의미의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이 일반은총(common grace) 때문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스킬더는 또한 성령님의 일반적인 활동 속에 일반은총이란 것을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합니다. 죄의 억제라는 개념은 스킬더도 부인하지 않고 단지 그것을 은혜의 억제의 개념으로 보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억제는 시간 속에 고유한 것입니다. 이런 억제가 멈추게 되면 시간 자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낙원(곧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축복을 주시는 일에 억제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완전한 축복을 주셨다면) 타락이란 사건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억제란 우리의 한시적 존재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점이 하나님께서 세상 일반에 대하여 베푸신 은혜로우신 분배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일반은총을 적절한 맥락에서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추론적으로 일반저주(common curse)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카이퍼의 정의에 의하면, 세상은 기본적으로 저주의 대상으로 보입니다. 안식일은, 하나의 임시적인 휴지(katapausis), 곧 그 저주를 잠시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스킬더에게는 너무 부정적입니다. 인간이 지금 현재 지니고 있는(still has) 것 위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세울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가능성(may)은 하나의 당위성(must)입니다. 물론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에 우리들에게 남겨진 것으로 우리가 출발한다고 하는 것은 흥미롭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문제의 핵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여전히 지니고 있거나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하는 질문은 행위언약에 있어서의 우리의 위치를 다루게 됩니다. 이 언약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을 담지한 자(office-bearer)인데, 그 원래의 직무가 하나님을 위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우리들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what we still have)으로부터 논증하는 지성은 자아중심적이라고 일컫습니다. 그것은 모든 일들을 너무 쉽게 벗어버리고자 하는 게으른 종의 태도입니다(was is de Hemel, p. 286). 그는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진 위대한 과제를 여태(not yet) 끝내지 못했나이다”고 말하는 복종적인 아들의 말로 말하도록 촉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범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는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애당초부터 주어져 있었던 것을 계속 상기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애당초부터 주어져 있었던 그것을 우리들에게 지금도 의무적인 것으로 부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여태”(not-yet) 끝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팔복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배고프며 비참하고 애통하며 땅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불신세계의 사람들과 더불어서 그렇게도 많은 좋은 것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궁핍하고 은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킬더는 우리가 세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을 논증합니다. 그러기에 타락 이후의 시간의 연장은 은혜를 포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을 연장하신 것은 천국과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을 번성시키시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단순히 연장하셨다는 그것 자체는 축복이나 저주가 되는 것이 니라, 오히려 역사가 진행되고 문화가 산출될 수 있는 기층을 제공할 뿐입니다. 그래서 역시 자연을 개발하는 것도 은혜가 아니라, 단지 자연적인 과정의 부분일 뿐인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와 더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두신 내재적인 능력의 결과입니다. 과정 중에 있는 땅(becoming earth)으로 하여금 인간을 위해서 그 열매를 산출케 하는 그것은, 또한 자신도 과정 중인 인간 안에 있는 격렬하고도 열렬한 충동입니다. 문화에의 본능(the instinct to culture)은 심겨진 것입니다. 낙원(에덴동산)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활동이었다면, 타락 이후에는 그것이 마치 팔리터(Pallieter)의 사고방식과 같이 자아중심적이고 자기영광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스킬더는 말합니다. 곧, 시간 속의 자연(nature-in-time)은 운동과 발전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구상하고 실현하는 것은 역사 과정의 부분이며, 문화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에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시간상 연장되는 것, 곧 단순한 문화적 활동이란 사실 그 자체를 은혜로 지칭한다는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Chr. and Cult., p. 63).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일, 아니면 자녀를 낳는 일 자체에는 은혜라는 것이 없습니다. 또한 이런 일들 자체에 어떤 저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일(advent's-work)로서, 믿음 안에서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은혜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속하시는 역사에 참여하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공통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문화적 성취에 효과를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보편적인 은혜란 전혀 없습니다(Ibid., p. 64). 비슷하게, 믿음도 없이 먹고 마시며 모태인 땅으로부터 생산하게 되는 모든 불경건한 문화(colere) 위에는 저주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타락 이후에 대립이라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대립은 자연 자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사용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 곧 문화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킬더는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을 가져오게 될 파국적인 사건을 예견할 수 있는 열린 눈을 갖고 종말론적으로 사고하기를 기대할 것입니다. 이 빛 가운데서 우리가 문화를 보게 된다면, 문화조차도 천국을 위하여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하여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문화가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역사해서는 안된다면 오히려 놀라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우리들에게 폭넓은 전망을 제공해 주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반은총교리를 남용하는 자들의 폭만큼은 넓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은 감각주의자이고 에피큐리안들이어서 세상에서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며, 단지 질문하는 것은, 자신들의 영원한 복지에 위험을 주는 것이 아닌 한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킬더의 관점에 제공하는 전망의 폭은, 직분담지자(office-bearer)의 폭넓은 우주적 관점입니다. 직분담지자는 하나님의 안식을 준비하는 것으로서의 문화적 활동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는 시간 전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Was is de Hemel?, p. 285).
크리스챤들은 비중생자들의 문화적 테이블들에서 떨어지는 빵부스르기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속문화의 “북채”(drumstick)에 손을 대어 흥을 돋우는 “크리스챤” 식도락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부정적이고, 반동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일반은총에 대해서 말하려면 반드시 그 방계개념인 일반저주도 동시에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Ibid., p. 287). 그 둘은 모두 알곡과 가라지가 추수의 때까지 자랄 수 있도록, 완전한 축복과 완전한 저주를 잠시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주받기에 마땅한 자들이지만 우리들은 아름다운 자연, 훌륭한 교향악, 드라마와 텔레비전 같이 좋은 것들을 여전히 너무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화문제를 너무 좁게 제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게 되면, 낙원(에덴동산)에서 명령과 약속이 시작되었고, 사역의 명령과 사역의 재료들 모두가 미래, 곧 하나님의 안식이 시작되는 역사의 파국적 시점을 가르키고 있다는, 그 사실에 대한 전망을 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Ibid., p.287). 그러므로 은혜라는 말은 너무나도 좁은 의미를 담고 있는 용어입니다. 낙원을 잃었고 다시 찾는 것, 그 둘 사이에 있는 머나먼 여정은, 위임, 명령, 사명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인간에게 요구하셨던 그것을 지금도 수행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잘못이 아닙니다(Heidelberg Catechism, L.D. IV). 오히려 이것은 문화문제의 경외심을 고무시키는 측면을 구성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이 지고 계시는 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형벌을 받지 않고는 창조주의 이러한 주장을 회피하거나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Was is de Hemel?, p. 288).
스킬더는 “일반은총”이라는 용어를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반영역”(common terrain)이라는 개념도 폐기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불신자들과 신자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활동영역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일반은혜의 영역으로서 문화적 영역을 말하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과 교회의 두 개의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의 중립지대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휴식과 공통의 여흥을 줄기는 장소, 일반적인 쉼의 영역 말입니다. 우리가 최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하나의 공통의 작업장(a common workshop)인 세상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의 공통의 문화(a common culture)를 함께 갖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Ibid., p. 289). (물론) 하나님의 피조물인 형상담지자(image-bearer)의 보편적인 인간성의 결과로서 세상 속에 모든 인간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a being together, sunousia)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타락 이후에 세상을 두 부분으로 분리시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문화사명과 문화충동은 여전히 모든 인류의 구성원들에게 공통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자연만 있습니다. 단지 그 자연이 이중적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재료가 있습니다. 단지 그것이 이중적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영역이 있지만, 그것이 이중적으로 개발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문화충동이 있는데 단지 이중의 문화적 추구가 있습니다(Chr. and Cult., p. 76). 문화적 투쟁에 있어서 친구와 원수의 산물이 서로간에 엇비슷한 것은, 모든 작업이 자연의 법칙에 종속하는 것 때문이며, 또한 다루기 힘든 물질들은 공예인과 예술가의 뜻을 따라서 주조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일반은혜개념의 기초위에서 문화를 설명하고 있는, 아브라함 카이퍼와 그의 동시대의 제자들의 전체 구조물에 대항해서, 스킬더는 그리스도를 문화를 여는 열쇠요 단서의 위치에 두고 있습니다. 인류가 참된 종교와 참된 문화로 되돌아 오는 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두 가지 일이 성취되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적 공의와 분노하심이 해소되어야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복종이 수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주(Redeeemer-Saviour)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의 복수자(Avenger of God's justice)로서 타락 이후 즉각적으로 역사에 개입하셨습니다. 이 이중의 측면에서 그 분은 세상의 구주이시고 또한 문화적 성취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미래를 보증하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의 공동체, 그의 종들을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동력화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낙원(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던, 인류의 행군명령을 새롭게 선포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문화의 그 원초적 인간, 곧 아담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던 과업은 이젠 둘째 아담에 의해서 넘겨졌습니다. 그 분의 말씀과 성령이 구속받은 공동체의 마음들 위에 이 과업의 명령을 다시금 새기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 세기 간의 역사가 그 두 개의 낙원들 사이에, 첫 번째 범죄와 그 결정적인 저주 사이에 투입되어졌습니다. 단순히 구원의 역사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또한 구속주와 심판주가 되시는 분의 사역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Ibid., p. 66). 카이퍼는 교회를 일반은혜의 의존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일반은혜에 의해서 교회는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이것을 뒤집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모으시는 한에 있어서는 세상은 단지 회개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Was is de Hemel?, p. 290).
스킬더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참된 전인적 인간을 생산하심으로 문화를 회복시키십니다. 문화적으로 노쇠하고 파산해 버린 로마제국 안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소수의 무리들이 건전한 문화를 생산하는 누룩이었습니다. 문화적인 면을 고려하자면, 천막을 만들며 설교하였던 바울 한 명이 네로의 부패한 궁정의 수천의 궁신들과 고급매춘부들보다 더 가치가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도입은 단지 종교적 부흥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적 개혁이었습니다. 신교의 종교개혁은 이러한 문화적 르네상스의 부활이었습니다. 루터는 실제적인 캐더린(Kathryn)과 행복한 결혼을 하여 자신의 탁상담화에서 즐거우면서도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마침내 그의 성경 번역 속에 생생한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크리스챤적인 문화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새롭게 된 제네바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스킬더가 크리스챤적 문화라는 것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예증들입니다(Chr. and Cult, p. 71). 루터가 이성을 창녀라고 하였을 때 반문화적인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죄악되고 거만하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는 이성을 영적 간음죄를 지은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마치 호세아가 이스라엘을 간음한 백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역시 로마제국도 요한계시록에서 음부라고 불려지는데, 그 보호 아래에서 크리스챤들을 핍박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로서 지니고 있는 은사들을 창조주를 섬기는데 사용하지 않으려는 고집스러움 때문입니다. 음부는 그녀가 지니고 있는 여성적 본성 때문에가 아니라 그 여성으로서의 본성을 여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에 어긋나게 사용하기 때문에 정죄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지 않을 때, 헛된 것으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이런 세상의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칼빈이 미친 공헌에 대해서 스킬더는 칼빈이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지 않고 구분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살아있는 사랑을 가르쳤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칼빈은 역시 문화적이었던 그 당대의 질서를 갖고 하나님의 신병들(God's recruits)을 모집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라는 값진 용어를 이해하는 것을 배웠고, 그리고 그런 이해에 기초해서 또한 문화라는 값진 용어를 이해하는 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만물은 너희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스킬더는,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을 전인적으로 건전하게 만드심으로 인하여 그들이 다시금 그들의 문화적 사명을 이 세상에서 성취할 수 있게 하셨음을, 강조합니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독특한 크리스챤다운 스타일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크리스챤 가정이 건강한 능력의 계시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들은 할리우드 속에서 헛되게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가정생활에 대하여 문화적으로 슬픈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연히 자신을 크리스챤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크리스챤 노동자 한 명이 다시금 비역사적이며, 비즈니스적으로 미국화된 세계 속에 있는 한 조각의 건강함입니다: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보지 못한 모든 학문계의 사람들보다 그 (문화적) 정복력에 있어서 더욱 가치있는 사람입니다(Ibid., p. 73). 영적인 개발에 노력하고 그 지역에서 원칙들을 순수하게 지키고 있는 지방교회의 주간지가 화려한 무대보다도 문화건설에 있어서 더 유익합니다. 인생의 길을 인도해주는 성경적으로 건전한 묵상이 일곱 번의 드라마를 관람하는 것보다도 훨씬 값집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상의 능력보다 더욱 강하며, 교리가 이적보다 더욱 강한 것과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해서,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문화적인 건설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에만 이뤄집니다. 사람들이 동일한 본성과 동일한 이익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된 교제(koinoonia)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그 동일한 본성이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는 원리를 향한 사랑을 통해서 공통의 목표를 지향하게 될 때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문화의 교제는 기본적으로 신앙의 교제의 문제인 것입니다(Ibid., p. 75).
하지만, 이 충격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가운데서, 그 저주의 효과와 죄에 대한 당신의 진노하심을 완화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인간성(sunousia)의 기초 위에서, 자신들에게 부과된 하나님의 주장하심을 부인하는 사람들과 함께 파편적인 문화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 모두를 함께 붙들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께서 사탄을 이미 결박하셨고, 또한 적그리스도를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심판만 억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도 절정의 상태에 이르지 않았고, 어는 것도 완성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음악이나 귀신들의 음악 모두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여전히 얼마간 문화가 있다는 것은 사탄이 아직 풀려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스킬더는 말하기를, 불경건한 문화는 결코 진정으로 성숙해지 않으며, 결코 절정에 이르게 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문화적 마비증세를 일으키는 괴물은 문화를 언제나 뒤쫓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그 도구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영화를 위한 영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생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영화는, 교육과 양육의 매개가 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에 심취해서 눈을 가려버리게 되는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침내 적그리스도가 와서,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발명품들과 기술적 방법들을 동원해서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문화는, 하나님의 제한하시는 섭리가 더 이상 사람들을 억제하지 않게 될 때, 종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Ibid., p. 84, 85). “유리바다의 이 끝에서 지금도 보이고 있는, 저 하나님의 심판의 불길로 (역사의) 지평선이 활활 불타오르게 될 때, 적그리스도의 문화는, 그 전야제 후에 단지 손발이 없는 몸통만 남게 될 것이다”(Ibid., p. 85). 하지만 숫자 일곱으로 완전함을 상징하고 있는 성경은, 우리들에게 적그리스도가 단지 그 숫자의 절반에만 이르게 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계획이 중단될 것이라는 사실,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의 명예를 위하여 개최된 적그리스도의 문화축제(kermis)가 결국 중간에 무너져 내린 피라밋 모양이 되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중간에서 무너져 내린 우울한 피라밋의 모습에 대립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통치하는 한 애당초부터 참된 규범의 구조물인 교회와 천국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들의 교회됨과 문화적인 투쟁을 포함한 모든 투쟁에 있어서 그 교회가 믿음을 통해서만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던 만큼 종종, 그들은 자신들의 왕궁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한 때는 웅장하였던 그 나무의 그루터기를 서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추방은 단순히 영적인 배교가 일어난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 의미에서의 추락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과 그 아름다운 성전 모두가 파괴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교도들과 문화적으로 경쟁하기를 원하였던 그 백성들이 절망에 빠져서 아무런 내일의 소망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눈물 흘리는 것을 멈추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잘라져버린 믿음을 지닌 그루터기에서 새 순이 나올 것인데 곧 선한 목자되신 그리스도께서 나오셔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되 문화적인 것도 채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로운 문화의 하나의 건강하고 참된 목적지향의 구조물이, 규범을 확실하게 지키는 스타일을 지닌 모습으로, 강력한 실재가 되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특별은총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시며, 하나님의 사람을 모든 선한 일에 완전하게 구비되도록 하십니다(Ibid., pp. 87, 88). 왜냐하면 그리스도야말로 문화의 유일하게 참된 원천이시며, 또한 개인들을 상호적으로 함께 묶어주는 교제(koinoonia)를 가능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제가 목적론적으로 지향하는 문화건설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입니다(Ibid., p. 88).
문화에 대한 이러한 모든 해석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신앙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단순힌 영적인 일들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보는 것이나 경험으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기본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경적인 입장에서 말미암는 몇 가지 결과들에 대해서 요약해 보겠습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문화만을 위한 문화("de" cultuur)란 없습니다. “순수한” 이성(reine Vernunft)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순수한 문화(reine Kultur)란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순수한 문화란 단순히 상상 속에나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하나일지라도, 인류의 문화적 추구는 두 종류입니다. 죄와 저주로 인하여 이 이중성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그 대립을 인식해야 합니다(Ibid., p. 89). 세속화과정의 비극적인 드라마가 전개되는 무대로서의 죄의 세상에서는 오직 문화적 단편들만 생산될 뿐입니다. 기본적 통일성이 상실되어버렸고 죄인은 모두 엄청난 종파주의자이고 분리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혜와 능력이 지연되는 것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 세상의 핍박으로 인하여, 또한 세상 사람들 각각의 그리고 공통의 무지로 인하여, 크리스챤들조차도 문화적 단편들만을 생산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한) 반역의 고통을 감수하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 번째 결과는, 크리스챤과 문화에 대한 우리의 논의에 있어서, “문화 그 자체”(culture as such)의 공상에 기초해서 논의가 진행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추상이며 세계영혼과 세계이성(logos)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도덕적 법칙을 인식하지 못하는 집단형성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어서 사람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자는 자신을 불러주시는 부르심 안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이 부르심이 우리의 특별한 과제가 무엇인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들의 열심(aspiration)이 우리에게 주어진 영감(inspiration)에서 이탈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공통의 인간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으로서의 교제를 형성하는 것, 바로 이것이 크리스챤의 문화이다”(Ibid., p. 93).
셋째로, 문화적 추구로부터 회피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지에 대하여 의문이 일어납니다. 물론, 문화사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추구로부터의 회피는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며 결국 스스로 결핍상태에 빠져들고 말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며 또한 말씀(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과 기도(우리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로 인하여 거룩하게 됩니다. 그 자체를 위해서 문화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언제나 죄악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위급사태에서는 필요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크리스챤들은 자신들의 쾌락을 추구하며 포도원에서 일하기를 거부하는 아버지의 불신적인 아들들 때문에 수고해야 할 짐이 배나 많습니다. 스킬더는 보잘 것 없는 영화 한 편을 보기 위해서 1만원(two quarters)을 지불하는 사람을 세상적인 사람의 예로서 듭니다. 반면 신자들은 위대한 선교사역을 위하여 힘써 아껴 5천원(a quarter)을 절약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교회, 초중고등학교, 대학교, 출판사, 요양소 등을 세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자녀들은 그들의 불신의 형제들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 것 때문에 과중한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신자들이 영적 전쟁을 위한 훈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기를 힘쓴다면, 문화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금욕적) 태도에 있어서 크리스챤적 영웅주의(Christian heroism)가 가능할 것입니다. “고등교육을 위하여 자신들의 학교를 후원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그리스도께서 돌보라고 남겨두신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펴 그들을 (적그리스도의 선구자인) 국가절대주의의 마수에서 건져내며,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수천가지 다른 과업들을 수행하되,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가 아니라, 예를 든다면, 화려한 크리스챤들의 무대를 계획하거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고서,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지닌 하나의 광범위한 크리스챤 조직체를 만들어가는 그런 백성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웅적인 공동체입니다”(Ibid., p. 96). 이러한 포기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자기부인입니다(“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마19:12을 참고).
넷째로, 문화의 질문을 일반은혜의 것으로 제기하는 것은 무비판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을 개간하고 정복하라는 것이 단순히 허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명령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선물들의 “희미한 흔적들”을 “은혜”라고 불러서는 안되며, “자연적 빛”(natural light)이라고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명명하는 것을 "일반은총"(commune gratia)이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은, 스킬더가 하이델베르그를 해설하면서 그 증거를 제시하되, 도르트신조를 작성한 분들과 어거스틴은 인간이 자연(nature)에 의해서 지니고 있는 것을 “은혜”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는 창조때에 인간 본성(nature)의 원래적인 능력으로 주어진 것을 은혜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스킬더는 말하기를, 펠라기안자들은 율법이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이 율법을 “은혜”라고 말하기조차 하였다고 합니다. 참된 은혜(true grace),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혼동케 하기 위해서, 펠라기안들은 인간의 합리적 본성(nature), 자유의지의 은사, 율법과 교리 같은 것 모두를 은혜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반면에 어거스틴은 은혜라는 용어를 하나님의 회복과 재창조의 역사를 나타내는데만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사용하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스킬더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적 빛”과 그 빛의 사용 사이를 조심스럽게 구분해야 한다고 합니다. 스킬더가 보기로는 카이퍼가 일반은혜에 대한 서사시를 쓰면서 항상 이렇게 구분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카이퍼의 관점에 대해서 말하자면, “사명”(mission)이 “허용”(permission)으로 좁아져 버렸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인간에게 남겨져 있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결국 문화적 낙관주의에 빠져들게 될 위험에 놓여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사람들이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선주가 선장에게 배를 맡기는 것은 그 배를 사용해서 주인된 자신의 해양사업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과 같습니다. 문화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의 가능성(may)는 우리의 당연성(must)입니다. 능력이나 취향이 규범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완전하도록, 전적으로 인간적이 되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Chr.and Cutl., pp. 97~101).
다섯 번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문화적으로 큰 존경심을 갖고 유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의 위대한 총괄자(Recapitulator)이신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일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cf. 엡1:10; 골1:20). 교회는 결코 문화의 센터, “천박하게 위장된 대학교”(Vriend, p. 29)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가장 위대하면서도 간접적인 문화적 세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Schilder, op. cit., p. 112).
더욱이나 크리스챤 문화에 있어서는 인격(person)이 단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이 자신의 인격(personality)을 상실해 버리는 대중이 되어버리는 전체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어떤 것과도 비길 데 없는 당신의 문화경전( Cannon of Cuture )인 산상보훈에서 개인을 향하여 선포하고 계십니다. 반석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찍어 내어져 버린 자는 (세상과) 분리함 없이 자기자신을 돋보이게 할 것입니다(고전2장). (반면 그리스도 안에 여전히 붙어 있는 자들은) 세상의 소금으로서 문화적 퇴폐의 시대에서 그 위대한 집주인에 의하여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로 하여금 세상의 죄인들을 피하는 것을 금하고 있으면서(고전5:10) 동시에 바빌론으로부터 나올 것을 명하고 있는(계18:4), 성경의 역설은, 크리스챤들이 비록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임을 기억하게 되면 쉽게 해결됩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빌론을 음부로서 정죄하는 것은, 그녀의 간음이 실행되어지는 기초로서의 공통의 인간성(sunousia)를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속에서 누워있고 악한 자 속에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벌리는 지속적인 갈등과, “그” 세상으로부터 결코 나오지 말라는 명령으로부터 일어나는 긴장은, 사람들과 계속 접촉(sunousia)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우리의 몫과 교제에 대한 우리의 의무(koinoonia) 사이에서 생기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Ibid., p. 114).
마지막으로, 크리스챤 문화철학자는 문화적 낙관주의에 도취거나 문화적 금욕주의로 마비되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 부르심의 개념(직분의 개념)으로부터 더욱 논리적으로 추론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르심을 완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직분담지자(office-bearer), 곧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살아가야 할 존재임을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계시의 말씀의 빛을 좇아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연은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의하여 조명되지 않으면, 불가사의할 뿐입니다. 그의 제자인 울시누스(Ursinus)와 올레비안누스(Olevianus)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죄와 은혜의 투쟁, 복종과 불복종의 투쟁이 어떻게 문화 속에서 최절정에 이르게 되는가를 가르쳐 준 사람은 특별히 칼빈이었습니다(Ibid., p. 117).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왕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들으시는 것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망치나 삽, 책이나 바늘, 솔 등의 기구들을 사용하여서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넣어두신 것들을 이끌어내시는지를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말론적 설교와 신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들이 지금 갈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종말론적 문화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정원(에덴)이 아니라, 오히려 일해야 할 장소, 싸워야 할 경기장, 건축해야 할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낭만적인 기분에 젖은 영혼이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난 일로서의 종교를 실행하는 그런 은밀한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광장은, 세상만큼이나 드넓은 그 분의 일의 영역이며, 그 안에 우리들의 일터, 공장, 그리고 김이 나는 가마, 연구실과 실험실이 있습니다. 선한 모든 일을 위하여 온전히 구비되어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을 [신실하게 성취해 가는 모든 장소 말입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활성화된 이런 문화과정 속에서의 복종은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죄를 억제하시는 능력에 의하여 형성되고 또한 교정되어졌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상되어집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의 아들됨의 완전한 의미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일하지 않는 자들조차도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집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위대한 건물에 필요로 하는 돌들을 각각 운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문화적 과정을 그것의 종말론적-교육학적 가치의 기초 위에서 평가하고자 하였을 것입니다. 교육학적으로, 일하는 사람(worker)은 문화적 과정에서의 긴장들에 의해서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 문화적 과정이 무용한 것으로 선언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영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의 시련을 거쳐온 작품들(trial-pieces)이 최후의 날의 불길 속에 녹아버리게 되어진 후에도, 여전히 남아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종말론이라는 다른 용어로 인도하는데, 스킬더는 이 용어를 문자적으로 마지막 일들에 관한 논의로 사용합니다. 문화의 진정한 가치는 생산되어진 작품들, 곧 예술과 현대적 발명품 조각들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오르내리는 그 과정의 긴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경기장을 마련하는 일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곧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당신의 택하신 자의 마지막 사람조차 세상에 대해서 승리하게 되는 그 일을 성취하시고자 하는 목적을 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Ibid., p. 305).
이것과 관계해서 주목해야 할 것은, 첫 번째로 스킬더는 열방의 영광이 새예루살렘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카이퍼의 생각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석적인 근거로 스킬더가 제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흐레이다누스(S. Greijdanus)박사의 계시록에 대한 주석(21:24)을 인용하는 것인데, 흐레이다누스박사는 이 과정이 현재 세대에 일어나게 된다고 합니다. 곧 지상의 고귀한 자들 중에서 회개하게 되는 자들이 그들의 문화적 보물들을 그리스도의 발앞으로 가지고 오는 현 세대 말입니다. 그 효과가 영원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Ibid., pp. 291~292). 둘째로 비판되는 카이퍼의 주장은, 문화의 씨가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판되는 것은 카이퍼가 그의 논증을 부활의 때에 일어나게 되는 육체의 비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주석한 흐로샤이데(F.W.Grosheide)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카이퍼의 주장은 허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땅에 묻혀지게 되는 자연적 육체를 부활하게 되는 영적 몸의 씨앗으로 여기는 것은 가능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하나의 시체(a corpse)가 다시 돌아오는 것과 문화적 산물들(cultural products)이 도래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카이퍼는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비교(metabasis eis allo genos)하는 위험한 비유에 탐닉해 있었던 것입니다(Ibid., po. 293~94). “땅의 왕들이 그들의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계24:21)는 구절을 “아직 완전한 천국이 임하지 않은 예루살렘”의 활동들에 있어서 마지막 행위이거나 천상의 예루살렘에 일어나는 새로운 사태의 맨처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는 것보다는, 스킬더는, 이 구절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예루살렘의 도래와 발전의 과정 속에 있는 하나의 과정을 묘사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왕들이 새예루살렘으로 무언가를 가지고 들어간다는 생각에 스킬더가 반대하는 또 다른 하나의 논점은, 성도들은 부활의 과정에 있어서 수동적일 것과 하나님께서 그들을 당신의 은혜로 일으키시되 파국적으로 일으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인간의 몸이 급진적으로 변화될 것인데,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여자와 남자 같은 것은 천국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애문화의 풍요함이 (천국에서) 무슨 목적에 봉사하게 되겠습니까? 세상이 심판의 불길을 통과한 이후에 어떤 씨앗들(germs)이 남아 있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스킬더는 카이퍼의 이러한 전원적 서사시를 시대에 뒤진 것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킬더의 역사철학에 있어서 결정적인 개념은 파국적 시점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사건의 사태가 시작되는데, 이것이 역사의 절정에 일어나는 심판의 대단원 속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시대에서도 이미 있어왔다는 것입니다(Ibid., pp. 64, 67, 298, et al.). 천국은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그것을 하나의 전적으로 다른 세계(a totally other world)로 본다면, 우리는 성육신에 대해서 정당한 견해를 갖지 못하게 됩니다. 성육신이야말로 역사의 중심에서부터 역사의 목적을 통제하고 있고 또한 태초에서도 연루되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는 올바르게 있었던 것들 중의 하나였던 이 세상에서, 이제 완전이란 진화적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어떤 시간의 한 시점에서 일어나는 파국적 도약, 갑작스러운 변화에 의해서 오게 될 것입니다. 이허나 하나님의 절차가 역사의 구조 속에 구현되어 있다고 스킬더는 말합니다(Ibid., p. 64). 물론 그는 이 점에서 우리는 환상을 두려워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하고 건전한 추론에 의해서 성경으로부터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그 모든 함축되는 바와 더불어서 참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고도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스킬더는 인간이 창조되었을 때 그것에 이르게 될 계획으로 창조되었던 그 완전과 온전함의 천국세계는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단순히 정화되고 재생되며 그래서 완전하게 된 창조라고 추론합니다. 두 번째 단계의 논증은, 천국에서는 더 이상 결혼제도가 없고 또한 배를 위하여 먹을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바울이 우리들에게 성욕과 식욕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가 인간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렇습니다. 곧 성욕과 식욕을 추구하던 삶이 이러한 요소들이 나타나지 않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은, 격렬하고 파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킬더는 단언하기를, 창조의 과정에서조차 이러한 기법이 따랐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앞선 것을 초월하고 변형시키는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매일같이 추가되었습니다. 물질을 무로부터 불러내시는 첫 번째 창조행위의 기초 위에서, 충격요법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 창조주간의 매일 아침에 하나의 경이로운 새 일을 행하셨습니다(Ibid., p. 299). 하루도 그 다음 날에 진화론적인 점진성으로 짝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의 결과에 한 날의 일이 더하여지는 것은 급격하였고 또한 폭발적이었습니다.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외현상의 혼동이 조화롭게 변형되었습니다. 땅과 바다가 분리되었고, 계속되는 아침마다 새로운 어떤 것이 앞서서 창조된 세계가 그 생의 법칙에 봉사하게 된 그것에 의해서 첨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여섯째 날에 창조된 인간은 모든 힘을 다하여 힘써 일하도록, 그리고 그의 모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안식으로 밤중의 도둑처럼 파국적으로 또한 급격하게 완숙과 완전의 한 영원한 아침으로 들어오시게 될 때까지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작용방식을 망쳐버리지 않았습니다. 주의 날의 위대한 저녁이 다가와서 세상의 주간(world-week)이 그 영원한 아침을 위하여 물러나야만 하는 때에 왜 우리는 사물들을 다르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때, 문화적 산물들을 상실하게 될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맙시다! 물과 먼지의 거품들이 분리되어 땅과 바다가 되었을 때 그것이 하나의 손실이었던가요? 질문해 보는 것이야말로 답변에 이르는 길이라고 스킬더는 확언합니다.
우리는 문화를 말하면서 인본주의적 가치론을 주의해야 합니다.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하늘로부터 꽃같이 떨어지는 때, 문화의 씨앗(germs)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면전에서 그 로고스(Logos)가 계속해서 역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솜씨를 즐거워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확실히 이 세상에서 만물이 교회를 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결코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문화들은 교회에 전혀 어떤 영향을 끼치지 않은 채로 존재해 왔고 또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마지막 최종적인 것이 이르기 전 바로 직전에 있는 하나의 절정(penutimate)입니다. 문화의 진정한 목적이 기억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를 진행하시고 만물을 자신을 위하여 이뤄가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인 것입니다(Ibid., pp. 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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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문화관에 미친 스킬더의 공헌을 평가하고자 할 때, 철저하게 객관적이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존 프린드와 더불어서 “일반은혜에 대한 몇 가지 주장 외에는 나는 그 논증의 기본적인 일격에 온 마음으로 공감한다”(Op cit., p. 29)고 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싶을 것입니다. 의심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직분담지자로서의 인간(man as offfice-bearer of God)이란 개념이 되어야 할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 문화활동을 통해서 이 세상을 열매맺는데 이르도록 부름을 받았고 또한 자격이 주어진 자로서의 인간 말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고, 또한 기독교 역사철학의 기본(abc)입니다.
스킬더의 교회론적 경향, 교회정책에 대한 하나의 논쟁적인 질문 때문에 개혁주의공동체가 이 시적으로 재능이 넘치는 선지자의 탁월하고도 급진적인 칼빈주의적 공헌을 인식하지 못하여 결국 그 목욕물과 함께 목욕시키던 소중한 아이를 함께 쏟아버리는 일이 있게 된다면, 그것은 비극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열린 마음과 열렬히 기대하는 심정으로 단번에 성도들에게 전해진 믿음을 위한 이 용감한 변증학자의 진정으로 광대하고 서사시적 작품들을 연구할 때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스킬더의 논제에 대해서 비판하여 어떤 글을 썼는지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반 룰러(A.A Van Ruler)는 스킬더의 기본 논제에 대하여 반대하여, 우리는 세상을 일차적으로 저주의 대상으로 보아야지 하나님의 자기영광화의 도구로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게다가, 키에르케고르과 칼 바르트의 영향을 받아서, 반 룰러는 단순히 하나님과 죄 사이에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반정립(antitheses)을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만일 우리가 칼빈주의 성경해석으로 양육되어져 왔다면, 이런 혹평에 만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문화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행위언약의 완성에 대한 스킬더의 강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는 비난도 조리에 맞지 않습니다. 스킬더는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에 대하여 세 권짜리 방대한 설교집을 출간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설교들에서 스킬더는 그 파국적 저주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담당하셨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연관성 속에서 스킬더의 입장의 통전성 을 재진술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 최종분석에 있어서, 반 룰러는 자신의 반대하는 바를 한 가지로 요약하였는데, 말하기를, 스킬더는 구원론적인 것과 문화적으로 이론적인 것을 동일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는 스킬더가 종교를 문화로 보고 있다고 의미한 것입니다. 특별은혜를 지속적인 창조로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역시 스킬더가 건전한 기독론적 강조를 하고 있다고도 합니다.
스킬더의 공헌
스킬더가 종종 신앙(religion) 전체가 하나님을 문화적으로 섬기는 것으로 인간이 회복되는데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는 점이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과장입니다. 스킬더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religion)은 하나님과 별개로 고려될 수 있는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매일의 부르심 가운데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임을, 보게 합니다. 이 점에서 스킬더는 카이퍼를 대단히 신뢰합니다. 자신의 제자들에게 창조된 우주와 인간의 문화적 소명에 대하여 “예스”라고 답하면서 경건의 모든 종류의 병적인 경건적 이상(ideal))에 등을 돌려야 할 것을 가르친 사람은 바로 카이퍼였음을 스킬더는 인정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원래적인 관계가 언약적 책임관계로 분석하는데 있어서 만약 스킬더가 옳다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되돌아오는 것은, 인간의 모든 문화활동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동역하게 되는 존재가 되는 이 목적에 결코 모자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카이퍼가 인간의 문화를 일반은혜에 기초하여 설명함으로 일반은혜가 역사에 있어서 이차적인 종류의 목적을 설정하게 되는 것을 스킬더가 반대한 것은, 칭찬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스킬더는 카이퍼의 주장을 일반은혜가 없으면 세상은 즉각 추상과 사색으로 파멸해 버리게 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특징짓습니다. 이것 또한 추천할 만한 비판입니다.
스킬더에 대한 비판
하지만, 스킬더가 자신이 우리들에게 인상깊게 심어주었던 그 해박함 속에서 지적하였던 그 오류, 우리들에게 피하기를 바라고 있는 그 오류를 자신도 또한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을 분명해 해야 하겠습니다. 첫세상이 파국적 대단원에 의하여 그 완성의 단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카이퍼가 일반은혜가 없으면 세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라고 한 주장만큼이나, 사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경우 모두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인간의 지식을 넘어서서 추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게다가 스킬더는 추상적인 사색에 치우쳐서,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성(all creaturliness)을 사랑하신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죄인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호의를 지니고 계심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피조성(creaturliness)이란 하나의 순수한 추상이며, 이런 것은 인간세계 어디에서고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마태복음5:44, 45와 그 병행구절들이 모든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는 점을 부인하는 명백한 주석적 폭력이 됩니다.
반면, 일반은혜의 영역론에 대항한 스킬더의 비판은, 칭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영역론이 마치 크리스챤과 비크리스챤 사이에 중립적인 활동의 장이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리더보스(S.J. Ridderbos) 박사가, 자신의 논문 속에서, 카이퍼가 일반은혜영역을 주장하면서 어떤 종류의 중립지대를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옳을 지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리더보스박사는 추론하기를, 은혜를 완전히 인식함을 통해서, 신자와 불신자들 사이에 상호적인 그것이 더 날카로운 초점을 갖게 되기 때문에 결국 “일반은혜영역”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Ibid., p. 312). 하지만 이런 논증은 카이퍼식의 사색의 분위기에서만 통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전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반은혜가 없다면 세상은 당장 파괴되어버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 편으로, 만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인의 구원 안에서 그리고 그 구원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역사의 동기이며, 그 목적이 타락 이후에도 세상이 여전히 운행되도록 하였음을 누군가가 믿게 된다면, 또한 만일 하나님의 형상, 내적인 빛, 이성, 도덕 등이 자연의 선물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구비물의 부분이고, 또한 그의 인간성의 구조의 부분임을 누군가가 믿게 된다면,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일반은혜의 영역이라는 개념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그 개념은 문화적 낙관주의자들이 반정립의 개념을 분쇄시키는데 즐거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또한 볼렌호번(Vollenhoven) 박사가 관찰하였던 것처럼, 인간 자신의 존재를 이중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하여, 한 번은 일반은혜의 영역에서 살고 다른 때에는 특별은혜의 영역에서 사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큰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과 은혜에 관하여 로마카톨릭의 입장으로 되돌아가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영역들(terrains)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일반은혜의 대상과 특별은혜의 대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종교가 고도로 발달하면 예술의 옷을 벗어 버리기 때문에 칼빈주의는 그 독자적 예술형태를 발달시킬 수 없었다고 한 카이퍼의 말을, 스킬더가 오해하였다고 한, 리더보스박사의 평은, 진실로 정당합니다. 리더보스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실은, 카이퍼는 “종교”라는 용어를 예전적 실행에 해당되고 있는 “예배”라는 느슨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카이퍼가 이 점에 대해서 분명치 못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Calvinism, pp. 145~155), 카이퍼는 자신이 종교와 예술 사이에 어떠한 분리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없이 분명히 표명하였고, 자기 자신의 나라에서 예술에 미친 칼빈주의의 효과에 대하여 상당한 열정을 갖고 입증하고 있습니다(Ibid., passim).
순수한 연장로서의, 곧 은혜와 진노를 제한하기 위한 중립적인 기층(substratum)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스킬 더적인 구성에 대해서 말해 보자면, 이것 또한 추상적 사변의 또 다른 본보기인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섭리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벌카우어(Berkouwer)가 지적한 것처럼, 스킬더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역사적 관계들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 대신에, 영원한 작정과 최후의 목적으로부터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것의 사실들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당신의 유일하게 독생하신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으로 그리고 당신의 작정에 따라서 세상을 계속 유지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온전한 핵심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시간의 연장, 역사의 발달도 축복과 저주의 발달, 은혜와 진노의 발달 사이에 있는 균형으로서 여겨져서는 안된다는, 벌카우어의 말은 옳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최소한 우리는 모든 작정들이 동등하게 궁극적이라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과 유기의 작정들 모두가 동등하게 궁극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구속의 교리가 성경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심성을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단지 유기는 선택과 동등하게 영원하고 주권적인 작정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구원받거나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지하셨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지 이전에 이것을 결정짓는 어떤 원인도 없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죄인들이 영원한 진노에 떨어지는 것은, 최종적인 분석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채, 자기 자신들의 자유 선택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점에서 벌카우어교수와 그의 몇몇 제자들은 칼빈에게서 이탈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성경에 기초해서(잠언16:4; 롬9:21~22), 그들의 유기로 인하여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창조되어졌음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은 유기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성을 특별하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Ibid., III, 22, 11; 23, 1).
마지막으로, 믄화의 영원한 가치에 관한 성가신 질문에 대하여는 어떻게 답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스킬더는, 우리의 현재의 문화의 씨앗(germ)이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는 카이퍼의 주장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비록 리더보스는 이 반박에 반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것을 스킬더는 주석적이면서 교의학적 근거로 주장합니다. 물론, 리더보스가 카이퍼의 입장을 설명하는 대로, 문화는 영원한 의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Op.cit., p. 313). 그렇다면 어떤 문화를 말하는 것입니까? 순수한 문화란 없습니다!(Es gibt kein reine cultur!) 이 현재의 악한 세상의 불경건한 문화의 어떤 부분의 씨앗들(germs)이 그 거룩한 성에 들어갈 것이라는 입장을 누가 방어하고 싶겠습니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될 그 성에 말입니다. “영원한 의의”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스킬더는 카이퍼보다 더 안전한 주석적 근거를 여기에서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총체적으로, 클라스 스킬더는, 낙원(에덴동산)에서 주어진 사명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서의 그의 문화개념을 제시함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위대한 봉사를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별히 칼빈주의 공동체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서의 문화적 사명의 성취를 향하여 자신들을 부르고 있는 이 나팔소리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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