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기사 논쟁 ; 리처드 E. 에이버벡
2017-05-02 15:52:25
1. 창세기 1장을 바르게 읽으려면 문자적 6일 창조와 7일째의 안식을 고려해야 한다.이것은 창세기가 기록된 당시 근동의 문학에서 매우 흔했던 6일 창조, 7일째 안식이란 패턴을 형성하기 위함일 뿐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에게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기도하다. 창조 기사의 6일은 보통 문자적 6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나는 창세기 1장1절이 창세기 전체의 주제를 언급하여 일종의 제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독립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1절은 창조 기사 전체를 조망하는 출발점을 제공하며 이를 시작으로 창조 이야기가 형성되고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을 알며 그 하나님이 유일하심을 알고 그 분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알게 된다.
2.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와 고대 근동의 창조 및 우주론에 대한 문서들을 비교하는 요점 가운데 하나는 세계가 3개의 층으로 이루어졌다는 개념인데 이 개념은 창세기 1장의 첫 3일에 대응한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가 서술되는 방식의 근간을 형성하는 고대 근동의 특정한 기본 패턴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고대 근동 지역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창세기 기사를 허락해 주셨다. 요점은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형태가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던 3층 구조 우주론을 출발점으로 하여 의도적으로 세워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고대 근동의 창조 기사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신들이 창조 세계의 일부로 등장하며 그들은 세계와 자연의 힘이라는 관측 가능한 현상 안에 존재하거나 그 현상이 구체적으로 현시된 존재 자체인 반면에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 안에 놓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존재, 가능, 목적의 외부 원인으로서 스스로 거하신다는 점이다.
3. 나는 6일 창조 7일째 안식이란 창조 이야기는 유비이거나 일종의 의인화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 유비가 여기서 하나로 수렴하는데 그것은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의 삶을 형성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 첫째로 6일동안 일하고 7일째에 그 일을 쉬는 하나님의 모습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안식일을 준수해야 함을 강조하는 유비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고대 근동 문헌에서 성전은 신들의 안식처이자 휴식 장소다. 이는 이스라엘에게도 똑같다. 장막과 성전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사이에 거주하는 장소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고대 근동과 이스라엘의 성전이 완성되고 그 성전 안에 신이 머무르는 패턴을 바탕으로 기록된다. 성전과 우주는 서로를 반영하지만 성전은 우주가 아니며 우주도 성전은 아니다. 이것은 유비이자 의인화다. 하지만 이런 유비가 설명을 제시할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는데 창세기 1장은 그렇게 축적된 효과를 보여주기에 충분한다.
5. 창세기의 두번째 단락(2:4-25)은 첫번째 단락(1:1-2:3)을 반추할 뿐 아니라 창세기 4장까지 확장되는 단락의 도입부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2장 5절은 창세기 1장에서 창조의 셋째 날에 이미 식물이 존재했지만 아직 경작되는 식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줄 뿐이다. 본래 이 단락의 텍스트는 출애굽 후에 광야에 거주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기록되었다. 따라서 이 단락에 등장하는 에덴은 이스라엘이 이전에 머물렀던 애굽이나 지금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광야가 아니라 일종의 오아시스, 즉 천국이었다. 나는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역사적 인물이며 인류의 조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창세기 2장의 역사성을 입증하는 표지들 중 두드러지는 대목은 에덴에 있는 네 개의 강에 대한 언급이다. 우리는 비손과 기혼의 존재를 알지 못하지만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경우에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실제 역사와 연결점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리처드 E. 에이버벡에 대한 평가
1. 토드 비일은 에이버벡이 고대 근동의 병행문서들을 적절히 인용하면서도 그들의 사고구조를 성서 텍스트에 강요하는 방식을 대체로 배제하는 점에 동의한다. 그는 에이버벡이 창세기2장이 창세기 1장을 되돌아 볼 뿐 아니라 창세기 3-4장을 향해 나아가는 텍스트라는 요점은 잘 파악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토드 비일은 아담과 하와가 실제 역사적 인물이며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에이비벡의 견해에 적극 동의한다. 그러나 비일은 에이비벡이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채 창세기 1장의 날들에 대한 구조가설을 수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토드 비일은 에이비벡이 창세기 1장1절을 하나님의 실제 창조를 언급하는 구절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의 전체 주제를 언급하는 일종의 제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독립구절로 간주하는 것을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비일이 가장 반대하는 대목은 에이비벡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준수하기를 원하는 패턴 다시 말해 엿새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쉬는 노동주간이라는 일반 패턴을 형성하고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 창세기 1장이 순차적으로 7일 구조로 형성되었다고 가정하는 부분이다. 토드 비일은 창세기의 6일 창조 7일 안식은 문자 그대로 실제 창조를 가리키는 것이지 히브리인들의 노동주간을 강화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아니며,라 오히려 히브리인들의 노동주간과 인식일이 창조 주간의 패턴을 따라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2. 콜린스는 에이버벡의 글에 거의 반론을 제기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에이버벡의 견해와 달리 콜린스는 창세기 1장 1절이 6일 창조 이전의 창조를 묘사하는 실제 창조 기사이며 창세기2:5-7도 창세기1장의 여섯째 날에 대한 조건을 언급하는 단락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콜린스는 자신이 에이버벡의 견헤에 마음 깊이 전반적으로 동의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3. 트럼프 롱맨도 에이버비벡의 해석에 거의 동의한다. 특히 롱맨은 문자적 한 주간이란 개념이 창조 주간을 묘사하기 위한 일종의 유비로 사용된다는 에비버벡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롱맨은 창조 주간이 문자적으로 해석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롱맨은 창세기1장이 하나님의 창조를 알려주기는 하지만 적어도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창조의 방식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는 에이버벡의 견해에 공감한다. 롱맨은 이 부분은 창조에 대한 묘사는 고대 근동의 인지 환경에서 유래한다는 존 월튼의 견해에 이이베벡이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지점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롱맨은 창세기 1장의 창조순서가 필수 요소라는 에이버벡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롱맨은 에이버벡이 7일이라는 창조 기간이 문자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6일 패턴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고 비판한다. 롱맨은 에이버벡의 이런 견해가 구조가설을 지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그 논거가 모호하다고 말한다. 또한 롱맨은 에이버벡이 창세기 2장의 역사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를 문자적으로 주장하려는 의도라고 추측하면서 에이버벡의 논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롱맨은 창세기 2장이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같은 실제 지명을 언급하다고 해서 그 지명이 창세기 2장이 실제 역사임을 입증하는 분명한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4. 월튼 역시 에이버벡의 견해에 대부분 동의한다. 월튼은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동의할 뿐 아니라 창조 기사의 6일 패턴이 하나의 유비라는 의견에도 일치한다. 특히 월튼은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가 진술되는 방식의 근간을 형성하는 고대 근동의 특정한 기본 패턴이 존재하며 하나님은 고대 근동 지역의 민족중 하나인 이스라엘 백성이 이해할 수 있도록 창조기사를 허락해 주셨다는 에이버벡의 진술에 적극 찬성한다. 월튼은 창조기사의 핵심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형상인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리려는데 있다는 점에 에이버벡도 동의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월튼은 창세기1장1절이 문학적 도입부라는 것, 그리고 창세기1장과 시편104편을 비교하는 내용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롱맨은 창세기1장이 물질 창조와 관련된 이야기를 제공하는지를 놓고 의견을 달리한다. 롱맨은창세기1장의 기능적 창조를 인정하지만 물리적 우주가 실제로 물질로 창조되었음을 언급한다는 에이버벡의 주장에 반대한다. 월튼은 고대인이 실재를 인식할 때 우주의 물질적 양상에서 유비를 형성할만큼 그것에 흥미를 가졌을 것이라는 에이버벡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월튼은 창세기1장이 물질적 관점과 기능적 관점을 모두 보여준다는 에이버벡의 견해는 유지하기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월튼은 물질세계의 창조에 대해서는 창세기1장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창조의 7일 패턴을 일종의 유비로 해석하기 위해 물질 창조에 대해서는 시간체계를 의도적으로 포기하는 에이버벡의 견해는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한다.
창조기사 논쟁 ; 토드 S. 비일
2017-05-02 18:30:05
1. 과거 20여년 전 부터 복음주의 학계에서 일어난 주목할만한 변화는 창세기 1-11장의 본문들을 점차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비유적 해석은 유신진화를 허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시계추가 기울어서 창세기 1-11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종종 단순하고 고지식하고 학문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창세기 1-11장의 장르와 고대 근종의 병행문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그들은 비유적 해석을 위해 문자적 해석을 포기한다. 그러나 나는 창세기 1-11장도 그렇지만 특히 창세기 1장을 역사 내러티브로 간주하여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나는 창세기 1-11장과 12-50장에 서로 다른 해석학 전략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둘 다 역사성이 전혀 없는 신화로 해석하든지 문자적으로 해석하든지 일관되게 해석해야 한다, 피터 엔즈가 창세기 전체를 신화적 관점과 유사하게 나름 일관된 방식을 적용했지만 이런 신화적 관점은 아직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비유적 관점을 택하는 모든 이들이 가진 기본적 문제점은 창세기 1-11장은 역사가 아니므로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12-50장은 역사적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창세기의 이 두 부분을 다르게 해석하는 방식은 정당성이 없다. 어떤 종류의 해석 담론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면서 아담, 노아, 셈, 함, 야벳은 그렇지 않은 인물로 보게 하는가? 또한 창세기에는 10번에 걸쳐 "톨레도트"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6개가 1-11장에 있고 4개가 12-50장에 등장하므로 나는 창세기 저자는 이 두 부분이 연속되는 역사로 해석되기를 의도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3. 만약 한 단위인 창세기1-11장을 다르게 해석하는 별도의 해석 전략이 없다면 창세기 1-2장에 대해서는 어떤가? 창세기 3-13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복음주의자들도 창세기 1-2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별도의 해석 방식을 주장한다. 존 스텍은 창세기 1:1-2:3을 나머지 부분에서 분리하여 이를 서론이라 부르고 고든 웬함도 비슷한 방식으로 창세기 1장은 톨레도트 구조 밖에 있으므로 나머지 이야기의 서곡이며 따라서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창세기 1:1-2:3을 나머지 부분과 분리하는 해석의 근거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1장은 나머지와 다른 장르이기 때문에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세기1장을 별개의 장르로 보는 학자들 사이에도 창세기 1장의 장르에 대한 합의점이 거의 없다. 나는 창세기 1장은 평범한 내러티브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4.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은 창세기 1-11장을(혹은 적어도 1-2장을) 고대 근동의 사회 환경이라는 틀로 이해하려는 관점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관점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서가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기록되어야 할 내용을 하나님이 감독하고 지시하셨음을 뜻한다. 창세기 저자가 고대 근동 세계에 에 깊이 함몰되어 있으므로 그가 다른 고대 긍동의 문학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창세기 1-11장을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 기록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행위다. 창조 기사는 모세에게 초자연적으로 계시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첫 5일 동안 일어난 창조 행위를 증언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고대 근동 신화를 사용하여 이 득특한 사건에 담긴 자신의 진리를 모세에게 전달하실 이유가 무엇인가? 창세기에 나타난 성서의 기록과 고대 근동의 신화가 약간 유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점이 훨씬 더 많다. 사실 창세기의 기사는 다른 고대 근동의 문학들과 매우 달라서 많은 학자들은 창조 기사를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 신화들에 대한 일종의 반론으로 간주한다. 이렇게 창조 기사가 고대 근동의 세계관과 반대된다면 왜 창조기사가 그 세계관을 따라 작성되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5. 만약 창세기 1-2장이나 창세기 1-11장이 비문자적으로 해석된다면 신약 저자들은 이러한 해석 방식에 대해 중요한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데 실은 이와 정반대의 경우가 나타난다. 신약에서 적어도 25개 단락이 창세기 1-11장을 언급하는데, 이 모든 단락은 창조기사를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신약저자들이 창세기 1-2장과 1-11장을 역사 문헌으로 간주했다는 압도적 증거를 회피하려는 학자들은 예수, 바울, 베드로 및 다른 신약 저자들이 그들의 가르침을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 맞추었다고 보지만 그런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신약성서 기자들이 당시의 잘못된 관점에 자신들을 맞추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서의 무오성 교리와도 맞지 않으며 더욱이 예수가 그렇게 맞추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의 완전함과 죄 없음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분명히 예수와 사도들은 창세기 1-11장을 역사적 사실로 보았을 뿐, 신학적 사실이 담긴 부정확한 모음집으로 보지 않았다.
6. 나는 창세기 1-2장을 비문자적으로 읽으려는 시도가 그렇게 많이 존재하는 이유는 성서본문을 최근의 과학이론과 조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본다. 나는 이러한 복음주의 학자들이 진화론이나 지질학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1-2장을 가장 단순하고 정확하게 대하려면 예수와 신약저자들이 그러했듯이 이를 문자적, 역사적 사건으로 취급해야 한다. 창세기 1-11장을 해석하려고 창세기 나머지 부분과 다른 일관성 없는 해석을 적용하게 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창세기 1-11장이나 1-2장을 창세기 나머지 부분보다 더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주장의 정당성은 확보되기 어렵다. 근본적인 질문은 성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성서 자체에 의해 결정되느냐 혹은 그 밖의 다른 권위로부터 영향을 받는냐이다. 과학이 자율적 권위로 한번 자리잡게 되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성서를 해석하는 방식을 결정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내 결론은 창세기 1-2장이나 1-11장을 적절하게 해석할 유일한 전략은 그것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도록 의도된 역사 내러티브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토드 S. 비일에 대한 평가
1. 에이버벡은 성서 텍스트 내에는 고대 근동 신화들을 반박하는 변증이 있다는 비일의 견해는 동의하지만, 그 점이 창세기 1장이 모든 부분에서 고대 근동의 세계관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일의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에이버벡은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의 세계 내에 있을 뿐 아니라 이에 대항하여 존재한다고 말한다. 에이비벡은 16세기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성서를 읽어온 방식이 물리적 우주의 실체를 정당화하지도 않을 뿐더러 창세기 1-2장과 성서의 다른 텍스트들이 물리적 우주에 대해 말하려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이베벡은 자신도 과거에 수년동안 6일동안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젊은 지구론을 믿고 가르쳤던 사람이었지만, 젊은지구 창조론자들은 성서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문학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과학적으로 읽으려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에이비벡은 6일/7일 패턴이 성서와 고대 근동 텍스트에 흔히 등장하며 이런 패턴이 고대 이스라엘에게 문학 장치로 잘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창세기1장이 이런 패턴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조차도 창조 이야기 자체가 문자적으로 해석될 여지를 감소시킨다고 말한다.
2. 콜린스는 비일이 역사성과 문자적 해석의 견고한 관련성을 가정하는 것이 과도한 단순화라고 비판한다. 콜린스는 역사적이란 말은 문학 장르나 해석의 세부 사항에 대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실제 세계 안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문자적, 역사적이란 말과 비유적이란 말은 역사와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콜린스는 창세기1-11장이 내러티브 장르인 것은 맞지만 창세기1장의 문체가 독특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창세기 1장을 '고양된 산문 내러티브'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콜린스는 창세기 1-11장과 12-50장을 문법적으로 구별할 분기점이 없는 것은 맞지만 본문의 화자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갑자기 속도를 늦추는 점, 그리고 창세기 1-11장과 병행되는 메소포타미아 텍스트가 있다는 점에서 두 단락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콜린스는 이런 특성은 창세기 1-11장이 역사적 주장을 하려고 기록되었지만 그것이 문자적으로 해석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이란 단어를 이렇게 설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지시 대상의 역사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콜린스는 비문자적 해석이라고 부르는 관점의 동기가 최근의 과학이론과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라는 비일의 문제 제기에 반대하며 성서 해석에 대한 재평가는 과학에 대한 굴복이 아니라 성서의 하나님은 과학이 연구하는 세계를 언급할 권한이 있다는 확신으로부터 연유한다고 간주하는 편이 더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 콜린스는 성서 텍스트에 대한 적절한 태도는 텍스트의 언어, 문학적 특성을 고려함과 동시에 주석가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도 인간으로서 사유하고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롱맨은 창세기1-11장과 12-50장을 해석하는데 두 개의 서로 다른 해석 방법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비일의 견해에 동의한다. 롱맨은 창세기의 이 두 단락은 서로 다른 장르가 아니라 동일하게 문학 장르이며 신학적 역사라고 말한다. 하지만 롱맨은 두 단락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롱맨은 덜 비유적인 언어를 사용하면서 내러티브의 세부 사항에 더욱 관심을 보이는 창세기 11:27이 새로운 단락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롱맨은 비일이 내러티브를 역사 서술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류이며 비문자적이거나 정확한 역사기록이 아니라고 해서 이를 비유나 허구로 간주하는 것은 오해라고 지적한다. 롱맨은 창세기1장이 신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문자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비유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롱맨은 창세기1장은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한다는 비일의 비평은 정확하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일반화는 명백하게 틀린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롱맨은 예수와 신약 저자들이 해당 텍스트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비일의 주장은 전혀 분명하지 않다고 말한다. 롱맨은 성서를 과학에 맞추는 해석을 금해야 한다는 비일의 주장은 수긍하지만 우리의 성경 해석이 무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학이 성서 해석을 재고하도록 도와준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4. 월튼은 비일의 견해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반대한다. 월튼은 비일의 핵심 논지는 일관된 해석학이란 토대를 가지고 창세기 1-11장과 12-150장 사이의 해석적 불일치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월튼은 이러한 차이는 해석학 때문이 아니라 텍스트의 특성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해석이란 해당 문헌의 장르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일은 창세기 전체를 역사 내러티브로 이해하기를 원하지만 월튼은 우주론을 반영하는 내러티브와 가족의 내력을 다루는 내러티브 사이에는 문학적 차이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 다 진실로 간주할 수 있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는 것이다. 월튼은현대의 범주를 고대의 기록물에 강요하기 보다 고대의 관습에 깊은 관심을 주는 것이 정당한 해석학이라고 말한다. 월튼은 비일이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은 그가 창세기 1-3장의 장르를 신화 아니면 역사뿐이라고 믿는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월튼은 역사가 현대인의 기대를 따라 붙여진 이름표라면 신화는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그런 의미로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었던 용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고대 근동에서 신화는 허구적 환상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이 인식했던 심오한 실체를 나타내는 도구였다고 말한다. 따라서 월튼은 자신이 창세기 1-11장을 다른 종류의 문학으로 간주한다고 해서 그것이 실제로 과거에 있었던 실제 사람과 실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말한다. 월튼은 창세기 1-11장은 창세기 나머지 부분과는 다른 방식과 다른 장르로 소통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창세기 해석에 역사와 신화라는 두가지 선택 방식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롱맨은 건전한 해석은 저자가 비유언어를 사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데 달려있기 때문에 은유를 사용하는데 그것을 은유로 읽지 않고 문자적으로 읽는다면 잘못된 해석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월튼은 창세기 1-3장을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비일의 주장은 일관된 해석학도 아니고 성서의 권위에 충실한 것도 아니라고 비판한다. 월튼은 문자적, 역사적 해석의 정반대 개념이 비유적 신화적 해석이라는 비일의 주장은 그릇된 이분법이라고 말한다. 월튼은 고대 근동의 문화와 문학에 기반을 둔 비교 연구의 역할에 대한 비일의 잘못된 이해도 비판한다. 월튼은 고대 근동 문학이 고대세계에 살았던 사람들로 하여금 전형적으로 생각했던 방식에 접촉할 수 있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인도 종종 그런 방식으로 생각했음을 알려준다고 준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신화를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인들의 "인지 환경"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월튼은 성서는 유일하므로 고대의 세계관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야 한다는 비일의 주장은극단적이라고 비판하며 성서의 유일성은 성서의 하나님 안에 있을 뿐이지 이스라엘 안에 있거나 성서의 문학 장르안에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또한 월튼은 비일이 창조 기사를 자신과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은 누구나 유신진화를 수용하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불공평하고 부당한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우리의 성서 해석이 아무리 오랫동안 유효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틀릴 수 있으며 재고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우리의 해석을 재고하는 것이 과학 발전에 근거하든 더 많은 고대 근동 문헌의 발견에 근거하든, 성서 텍스트의 언어에 대한 지식의 증가에 근거하든 관계없이, 오직 성서 자체에만 속한 권위를 우리의 해석에 두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창조기사 논쟁; C. 존 콜린스
2017-05-02 18:30:38
1. 창세기 1-11장은 일관성을 갖춘 여러 개의 단락으로 전개되는데, 각 단락들은 톨레도트라는 히브리 단어들로 구분된다. 그리고 창세기 11장과 12장 사이에는 문법적 분기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창세기 1장 28절의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주제는 창세기 전체를 관통할 뿐 아니라 이를 넘어선다. 창세기 9장1절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하신다. 이때 노아는 "새 아담"으로 간주된다. 창세기 12장 2-3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를 천하만민을 위한 복의 통로로 만들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고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마엘(17:20), 이삭(26:3-4), 야곱(28:3 ; 48:3-4)에게서 반복된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생육하고 번성했다는 말로 시작되고 신명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신실하면 이 복을 계속 누릴 것이라고 약속한다.(신30:16, 신7:13) 이렇게 보면 우리는 노아와 아브라함을 가리켜 " 새 아담"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을 통해 창세기 1-2장이 얼마나 온전하게 전체 내러티브에 포함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의 유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머지 세상 전체를 위해서라고 믿는다. 그리고 구약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인 메시아 대망 사상이 메시아의 인도 아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빛을 이방 세계에 비추는 일을 담당하리라는 기대임을 믿는다. 이러한 성서 이야기는 모든 인류가 공동 기원을 가졌으며 며, 공통된 곤경에 처해 있으므로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가정 아래 형성되었다. 이러한 가정은 창세기 1-11장을 포함하는 이야기, 즉 전 인류의 타락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을 포함한다. 창세기 1-11장을 한 단락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것을 고대 근동의 병행 문헌들과 함께 읽는 것인데 특별히 메소포타미아 문헌이 이에 해당한다. 메소포타미아 문헌의 전반적인 형태는 창세기 1-11장 메시지의 문학적 관념적 배경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창세기 1-11장을 한 단락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의의 세번째 요점은 이를 구성하는 단락 간의 문학적 언어적 관련성에서 나온다.
2. 전통적으로 랍비 문헌은 창세기 2장의 창조가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을 자세히 묘사한다고 보았다. 나는 창세기 2장 4-7절이 두 창조 기사를 연결하는 방식을 보임으로써 전통적인 해석의 문법적 정당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2장 4절은 교차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과-땅의- 그것들이 창조되었을 때// 하나님이 만드셨던 그 날에- 땅과- 하늘을) 이것은 창세기 2장4절의 "하늘- 땅-창조했다"는 표현의 순서가 우리로 하여금 창세기 1장1절-2장3절을 전체로 이해하게 한다는 뜻이다. 아울러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에서 야훼로 바뀌는 것은 뒷 부분을 환기해준다. 또한 우리는 2장에서 하나님이 자기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한(1장27절) 방식을 상세히 설명하는 확장된 묘사를 접하게 된다. 이로부터 우리는 창세기 2장이 1장의 여섯째 날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창조 기사가 별개의 기사라고 주장할 근거를 더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바뀌는 것을 근거로 두 창조 기사가 별개의 원자료에서 유대했다는 주장은 과거만큼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엘로힘이라는 명칭은 광대한 초월자이신 창조주의 신격을 나타내지만 야훼라는 명칭은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분의 신격을 나타낸다. 두 용어의 합성어인 야훼 엘로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세운 하나님이 사실은 존재하는 모든 것 위에 계시며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초월하신 창조주라는 중요한 개념을 나타낸다.
3. 창세기 2장 4절을 시작하는 톨레도트는 창세기 전체에서 새로운 단락을 시작할 때 사용된다. 이것은 우리가 1장1절-2장3절을 독립된 첫 단락으로 분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단락이 창세기 전체에 대한 서문임을 보게된다. 이 말은 2장4절부터 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사 내러티브라고 부르는 것이 시작되며 첫 단락은 실제로 일반 내러티브가 아님을 알게된다. 나는 이 단락을 고양된 산문으로 부르고자 한다. 나는 첫 단락에 나타나는 7일 패턴은 6일 동안 노동을 하고 7일에 안식하는 하나님을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1장에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3절에서 시작하여 27절의 인간 창조에서 절정에 도달한다.이 절에서 "창조하셨다"는 동사가 3번이나 반복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첫 사람을 만드시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창조 행동의 핵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인 6일이 반드시 우주가 시작된 실제 처음일 필요도 없고 반드시 지구의 실제 처음일 필요도 없다,. 그 날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섬기며 지혜와 선한 의도로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나님이 지구를 이상향으로 만드신 기간일 뿐이다.
4.이 모든 것을 고려하면 헤르만 바빙크가 제안하는 개념을 받아들이는 것이 창조의 "날"들을 해석하는 최선임을 알 수 있다. 바빙크는 그 날들을 가리켜 하나님이 일하신 날들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창조 기사가 지구 나이에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날들이 우주의 첫 6일이 아닐 뿐더러 지구의 첫 6일일 필요도 없음을 알고 있다. 만약 그 날들이 단지 하나님이 일하신 날들이라면 그 날들의 기간이 얼마가 되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창세기 1-2장이 우리에게 우주의 기원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제공한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인류를 위해 지구를 이상향으로 만드시는 활동을 묘사하며 창조 이야기의 정점은 인간이 살고 사랑하며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경축한다고 말해야 한다. 아울러 창세기 2장은 하나님이 인류에서 선함과 사랑을 보이시고 복을 주심으로 그들과 맺은 관계가 시작되었음을 특정한 방식을 통해 보여주는데 촛점을 맞춘다고 할 수 있다.
5. 나는 창세기1장1절이 창조 기사의 요약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의 주된 줄거리가 시작되기 전 어느 시점에 일어난 실제 시간을 가리킨다고 이해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떻게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무로부터 창조라는 개념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만약 하나님이 태초에 어느 시점에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태초 이전에는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창세기 1장1절은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하셨으며 물질 우주에는 절대 시작점이 있다고 분명하게 암시한다.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으며 스스로 유기체가 될 수 없다. 유기체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출현했다. 이런 사실이 어떤 과학 이론을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설계라고 보이는 것들의 예를 발견할 때마다 전혀 놀라지 않게 될 것이다.
6. 창세기 1-2장의 창조기사를 처음으로 접했더 출애굽한 이스라엘인들은 하나님이 애굽의 신들을 부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 부족의 신이 아닌 그 이상이며 하늘과 땅을 지으신 단 하나의 진짜 신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세상을 향한 사명을 받은 민족이었다. 이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는 사명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스라엘이 창조기사를 통해 하나님, 세상, 나아가 그들 자신을 돌아볼 기반을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창조기사는 인간이 살아가기에 작합한 장소로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행위를 찬양하며 하나님의 행위가 얼마나 위대한 성취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줌으로써 하나님을 높인다. 창조기사는 하나님을 경외함, 그분의 선하심, 능력, 이 모든 일을 행하신 그분의 창조성을 지각함으로써 하나님이 하신 일을 숙고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이 부분에서 월튼의 논거가 약간의 통찰을 제공할 수 있다. 창세기1장1절-2장3절의 창조기사가 성전 건축이라는 주제를 따라서 세상의 형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그의 핵심 논지는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 나는 이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서술하고 싶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밖에서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곧 세상에서 번성하며 에덴의 복을 세상에 전파하고 모든 세상을 성소로 바꿀 사명이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 아담으로 부르셔서 일종의 회복된 에덴인 한 장소(가나안)에 살게 하섰다. 이스라엘은 신실함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모든 세상에 전해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기사에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이 현존하는 장소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기를 갈망하는 성서 텍스트를 접하게 된다.
C. 존 콜린스에 대한 평가
1. 에이버벡은 콜린스와 가장 동의하는 바가 많다고 말한다. 특히 콜린스가 창세기 1-2장을 1-11장과 아울러 창세기 전체와 통합하는 방식이 매우 유용하다고 평가한다. 또한 그는 콜린스가 창세기 1-2장을 일관된 전체에 속한 일부분으로 간주해 해석하는 것이 매우 정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이버벡은 창세기1장1절에 대해서는 콜린스와 의견을 달리한다. 콜린스는 이 구절이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지만 에이버벡은 이 구절이 한 단락의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에이버벡은 창세기 1장1절은 완성된 우주 전체를 바라보면서 시작하여 그 후에 전체를 구성하는 부분이 어떻게 6일이라는 과정을 통해 창조되었는지를 한 단계씩 보여준다고 말한다.(1장2절-2장3절)
2. 비일은 자신에게는 콜린스의 글이 가장 혼란스러운 글이라고 비판한다. 물론 비일이콜린스의 견해에 동의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일은 창세기 1-2장과 1-11장을 창세기 전체의 일부분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콜린스의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또한 콜린스가 창세기 1장과 2장을 두 개의 다른 창조기사가 아니라 함께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리고 창세기1장 1절이 일종의 표제나 요약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첫번째 창조 행위를 나타낸다는 그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비일은 콜린스가 창세기1장을 역사로 간주하면서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이 매우 당황스럽다고 말하다. 또한 비일은 콜린스가 창세기 1-11장을 나머지 전체를 읽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창세기 1:1-2:3이 첫번째 톨레도트 단락의 앞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따로 떨어진, 창세기 전체의 서문으로 본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비일은 창세기 1:1-2:3이 서문이 아니라 엿새 동안의 세계 창조를 묘사하는 하나의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비일은 콜린스가 창세기1장1절을 첫 번째 창조 행위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만 그것이 첫째 날의 창조행위가 아니라 창세기의 주된 줄거리가 시작되기 전 어느 시점에 일어난 실제 사건이라고 말한 것은 부정확한 결론이라고 말한다. 비일은 콜린스의 가장 치명적인 오류는 그의 해석학이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비일이 보기에 콜린스는 창세기 1장은 역사적이지만 문자적이지는 않은 텍스트로 보고 창세기 2-50장은 완전히 문자적 텍스트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비일은 창세기는 모두 역사적이며 문자적인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3. 롱맨은 콜린스의 견해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특히 창세기 1-11장을 일관된 전체에 속한 일부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에 적극 찬성한다. 또한 롱맨도 콜린스와 마찬가지로 창세기1:1-2:4을 P문서로 간주하고 2:4-25을 J 문서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자료비평을 거부한다. 그러나 롱맨은 창세기 2장을 일종의 확장된 여섯째 날로 간주하는 태도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롱맨은 콜린스가 창세기 1-2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것을 칭찬하며 노동주간에 대한 이스라엘의 이해를 근거로 창조의 날들을 비유로 이해하는 콜린스의 해석은 매우 유익하다고 말한다.
4. 월튼도 콜린스의 견해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월튼은 콜린스의 관점에 동의하기 힘든 결정적인 부분 세가지를 제시한다. 월튼은 두 가지 창조 기사가 일관된 전체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창조기사를 함께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말한다. 월튼은 두번째 창조기사가 첫번째 창조 기사의 여섯째 날의 세부 사항을 묘사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더라도 두 창조 기사는 서로 겹치지 않고 일관성을 보인다고 말한다. 월튼은 첫 창조기사에서는 성소인 우주의 질서가 완전히 제자리에 놓여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두번째 기사는 다른 수준의 질서를 언급하는데, 이 질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와 삶 안에 있는 질서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월튼은 창세기 2장5-6절을 근거로 두번째 창조기사가 첫번째 창조기사의 일주일 내에 일어난 사건으로 여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월튼은 콜린스가 창세기 1장 1절을 일종의 문학적 도입부로 간주하기보다는 실제 일어난 창조 행위로 보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콜린스는 자신의 이런 주해의 정당성을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한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점에서 끌어오는데 월튼은 유대교 해석이 이미 헬레니즘 사고 방식 안에 위치하므로 더는 고대사상을 대표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월튼은 이렇게 기능이 아닌 물질에 관심을 두는 사고방식으로 전환된 것은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며 성서 해석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해석 전통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창조기사 논쟁 ; 트럼프 롱맨
2017-05-02 18:31:05
트럼프 롱맨
1. 창세기 1-2장이 하나님, 인간, 세계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창세기 1-2장을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질문이며 우주와 인간의 기원을 다루는 성서 텍스트와 과학의 관계처럼 논쟁이 되는 주제를 다룰 때는 특별히 더 그러하다. 이 질문은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오류가 없다는 관점을 견지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성서에 오류가 없다는 점을 믿는 것은 성서 전체가 같은 장르를 공유하며 같은 해석방식을 이끌어 낸다고 믿는 것은 다르다. 성서의 가르침은 온전히 참되지만 그 가르침은 문자적 혹은 비유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으므로 그 문학 장르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창세기 1-2장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가 모든 것과 모든 인간의 창조자이심을 선포하는 것을 주요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주와 인간을 창조하셨는지를 언급하는데는 전혀 흥미가 없다. 따라서 창조의 방법에 관련된 질문을 탐구하기 위해 과학으로 관심을 돌리는 태도는 온전히 수용할 만하며 심지어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2. 성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일관되지만 전달방식은 다양하다. 성서 저자들은 다양한 문학 스타일이나 장르를 사용했다. 따라서 우리가 읽고 있는 단락의 장르를 아는 것은 성서를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결국 장르는 독해 전략을 이끌어낸다. 창세기 1-2장의 적절한 장르를 결정하려면 본문의 특징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로 창세기 1-2장이 내러티브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이야기이며 두개의 이야기다. 창세기 1-2장은 독자들이 우주나 인간 창조에 관한 묘사를 문자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기를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비유 언어로 가득차 있다. 창세기 1-2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성서의 다른 부분에 대한 해석과 모순된 뿐 아니라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도 상충한다. 첫 창조기사가 우주와 인간 창조를 묘사한다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일주간에 실제로 일어난 일로 말하려는 의도는 없음을 알 수 있다. 성서는 창조를 일반 노동일인 6일로 구성된 한 주간 동안 발생한 것으로 생생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그 후에 안식일이 따른다. 사실 창조 행위의 순서는 우리가 이를 문자적으로 다루기 보다 문학적 묘사로 다루어야 한다는 개념을 지지한다. 창조의 첫 3일은 영역이나 거주지를 창조하고 그 다음 3일은 창조된 거주자들이 채울 장소를 의미한다. 비유 언어가 현저하게 등장하는 또 다른 예가 남자와 여자를 만드는 두 번째 창조기사에도 나타난다.성서 저자의 의도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알려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중요한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인간 창조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3. 창세기 1-2장의 장르를 조사하려면 우리는 이 장들과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물론 성서의 창조기사 전체는 고대 세계의 다른 창조기사들과 매우 다르다. 하지만 성서의 창조 이야기의 요소들이 분명히 고대 근동 이야기들의 특정 일화와 연관되는 것은 사실이다. 두번째 창조기사에서 아담이 창조되는 기사는 바빌로니아 창조기사에(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서사시) 등장하는 첫 인류 창조에 관한 묘사와 충격적으로 유사하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기사는 동시대에 존재했던 창조에 대한 이야기들의 배경에 저항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성서에는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신은 다른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라는 사실을 선포해주는 언어와 개념들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창세기1-2장을 읽은 현대인들에게는 이 창조기사가 다윈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바빌로니아, 가나안, 이집트인들의 주장에 대항하는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성서가 창조를 묘사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식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신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현대의 독자들은 성서가 고대근동 문학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종종 놓치곤 한다. 원래 독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고대 근동 문학이 오늘날의 세계를 사는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의 메시지를 본래 의도를 따라 이해하려면 성서 텍스트의 고대적 배경을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4. 창세기 1-2장에는 서로 다른 두 창조기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두 창조기사는 창조에 대해 각각의 관점을 보여준다. 첫번째 창조기사는 우주관을 보여준다는 점이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두 번째 창조기사는 첫번째 인간의 창조에 집중한다. 이런 두 창조기사가 서로 다른 원자료에서 왔을 수도 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함께 묶어서 읽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마치 같은 이야기를 같은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조화시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첫 창조기사와 두번째 창조기사의 가장 충격적인 차이는 창조순서에서 나타난다. 1장에서는 식물이 셋째 날에 창조되고 인간은 그 이후 제6일에 창조되었다고 말하는데, 2장에서는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는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창조기사가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 1-2장은 모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줄 뿐, 하나님의 창조방법이나 창조 순서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 창세기 1-2장의 문자적, 역사적 독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창세기 1-11장과 12-50장이 그 특징상 연속한다는 점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주요 논거는 내러티브 안에서 과거 행위를 나타내는 바브연속법 동사가 계속 사용된다는 점과 톨레도트 구조가 1-11장뿐만 아니라 12-50장에도 계속 아어진다는 점이다. 사실 내가 보기에 창세기1-11장과 12-50장은 모두 역사적 충동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창세기 1-11장과 12-50장은 모두 역사지만 그것의 역사서술의 정확도까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1-11장과 12-50장은 모두 역사적 충동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창세기 1-2장이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명백한 비유 언어를 극도로 많이 사용하고, 두 창조기사의 순서가 틀리며 본문이 고대 근동의 창조기사들과 현저하게 상호작용한다는 점은 우리에게 1-2장의 창조기사를 문자 그대로 혹은 정확한 묘사로 취급하지 말아야 함을 나타내준다. 핵심은 창세기 1-2장이 신학적 역사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사실 모든 창세기 기사는 신학적 역사이지만 창세기 12-50장에서는 비유 언어, 고대 근동 신화와의 상호작용, 시간 순서와 관련된 문제가 창세기 1-11장만큼 심하지 않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창세기 12-50장은 문학적 구체성이 매우 높다고 본다.
6. 그렇다면 창세기 1-2장은 역사와 관련해 무엇을 주장하는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이심을 주장한다. 그는 모든 사물의 존재 및 모든 인간 실존의 원인이시다.창세기 1-2장은 이러한 주장을 펴기 위해 우주와 인간을 만드신 이가 다른 신이라는 주변 경쟁 문화의 주장을 적절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만약 본문이 하나님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방식을 다룬다고 여긴다면 오해다. 창세기 1-2장은 인간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불행하게도 성서의 이 부분에 대한 토론은 대부분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방법에 관한 궁금증 및 진화와 특별 창조 사이의 대립이라는 진흙탕에서 허우적대는 형국이다. 하지만 본문이 그런 종류의 질문에 대답한다고 볼 수는 없다. 본문은 단지 인간의 창조를 인간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 및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통해 그들의 본질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묘사할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용어의 의미에 대해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한가지 강력한 예시는 성서의 다른 곳에서 "형상"은 왕이 자기 영토에 세우는 자신의 조상(statue)을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다시 말해 남자와 여자는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임재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반영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창세기 1-2장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방법을 알려준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종종 창세기 1-2장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놓치거나 과소평가하고 만다. 창세기1-2장이 창조를 묘사하는 유일한 텍스트인 것은 아니다. 욥기( 38:4-11), 잠언( 3:19-20 , 8:22-31), 시편(8/19/24/33/74/104/136편)에도 창조에 대한 진술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성문서에 나타나는 이 모든 진술들도 창세기 1-2장과 마찬가지로 고도의 비유 용어를 사용한다. 그중 많은 부분은 고대 근동 신화의 정보를 따른다. 창조를 서술하는 언어들이 고도의 비유이고 유연하다는 점은 이 텍스트들이 하나님이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신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별다른 관심이 없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든 창조 관련 텍스트들은 야웨만이 창조주이며 다른 것들은 창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관되게 증언한다.
7. 어떤 이들은 창세기1-2장에 관한 내 해석이 주해에 근거하기보다는 과학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나는 적어도 과학이 성서해석을 재고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갈릴레이의 예는 신학이 과학을 제한하는 위험성을 논하는 좋은 출발점이 된다. 교회는 이 주제를 놓고 하나의 특정 견해에 천착하면서 성서가 우주의 중심이 지구임을 가르쳐 준다고 믿었다. 이런 본보기는 진화에 대해 21세기 복음주의 교회가 보이는 반감을 유사한 상황으로 간주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임감있는 주석가라면 성서와 대립하듯이 보이는 과학의 결론에 대해 반사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과학의 발견과 이론에 비추어 전통적인 성서 해석이 적절한지 재고해야만 한다. 성서는 창조의 과정에 대해 말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과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탐구하는 바를 존중하면서 귀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장르 분석을 통해 칭세기 1-2장이 신학적 역사로서 하나님이 창조를 행하셨다고 가르칠 뿐, 그가 창조하신 방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창세기1-2장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주나 인간을 존재하게 하신 방법을 배울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물리학이나 생물학 같은 다른 분야의 학문을 통해 그 해답을 찾아야 할 수 도 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진화라는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개념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8. 창세기 1-2장을 일종의 "고양된 산문 내러티브"로 이해하면 이 본문의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점을 견지하기 위해 굳이 아담을 역사적 개인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 아담이 구약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종종 역대기의 첫 구절은 성서 저자들이 아담이 역사적 인물임을 믿었다는 증거로 인용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성서의 족보가 엄격하면서도 확실한 역사에 근거하므로 족보상에 있는 그대로 생물학적 후손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족보들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종종 신학적 혹은 이념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으며 이런 목적을 위해 실제로는 친족 관계가 아닌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다. 나는 역대기의 저자가 아담을 이스라엘 민족과 연결시킨 이유는 이스라엘 역시 인류 공동체의 일부라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성경의 족보가 아담이 역사적 인물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복음의 족보가 결국 신학을 담은 기록일 뿐 예수의 역사적, 혈통적 배경을 보여주는 순수한 기록이 아니라는 증거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누가의 족보 마지막 진술에서 드러난다. 물론 아담에 관한 기사는 누가의 족보 외에도 신약성서에 나타난다. 특히 로마서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아담을 근거로 삼는다는 사실이 신학적으로 중요하므로 많은 논쟁이 되었다. 나는 바울 신학의 요점이 아담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거나 그의 불순종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제임스 던의 견해에 동의한다. 제임스 던은 고대인들이 자연스럽게 아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으로 이해했다고 일반화하는 주장은 현대 해석의 영향이며 적절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던이 지적했듯이 아담과 그리스도의 경우처럼 문학적 인물(아담)과 역사적 인물(예수)을 관련짓는 유비는 이미 바울 시대에도 익숙한 것이었다.
트럼프 롱맨에 대한 평가
1. 에이버벡은 창세기 1-2장이 창조의 방법에 관해 세부 사항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에 롱맨과 동의하면서도 하나님의 창조 방식이 창세기 1-2장과 성서의 다른 부분에 분명히 나타난다고 주장하면서 롱맨이 오늘날 과학에 너무 많이 경도된 것 같다고 비판한다. 에이버벡은 창세기 1-2장 기사를 고대 근동의 배경 안에서 대조와 비교 둘 다에 유념하면서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롱맨의 말에 찬성한다. 하지만 에에버벡은 아담의 창조 이야기가 당연히 비유라는 롱맨의 주장은 지나치다고 말한다. 에이버벡은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이야기를 의인화된 문학의 형태로 간주하는 롱맨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창조기사의 첫단락과 두번째 단락에서 전환이 일어난다는 롱맨의 주장에는 반대한다. 에이버벡은 이 문제는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관한 논의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에이버벡은 창세기 2장이 역사적 기술이며 따라서 아담과 하와도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에이버벡은 롱맨이 창세기 5:1-5, 역대상 1:1, 누가복음 3:38 족보에서 언급된 아담을 단순히 문학적 그리고 신학적 장치에 불과한 존재로 치부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에이버벡은 창세기 2장의 톨레도트는 창세기 1장을 하늘과 땅에 대한 이야기로 2장을 인간 역사에 대한 서론으로 보게한다고 말한다. 에이버벡은 민약 신뢰할만한 과학 증거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면 성서를 읽는 방식을 재고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문제는 무엇이 신뢰할만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 에이버벡은 과학이론도 매우 급속히 바뀌는 경향이 있으며 유신진화론의 문제는 이 이론이 유신론에 근거하기 보다는 진화론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고 비판한다.
2. 토드 비일은 롱맨의 견해 대부분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이다. 비일은 롱맨의 방법론에는 주해의 견실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비일은 롱맨이 창세기 1-2장의 장르가 "신학적 역사"라고 주장하지만 성서에 이런 장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창세기 1장의 장르는 "역사 내러티브"라고 강조한다. 비일은 창세기 1-2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성서의 다른 부분과 모순되며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도 상충한다는 롱맨의 주장은 과장되며 문자적 해석이 왜 그런 결과를 낳는지 잘 설명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비일은 롱맨이 수용한 구조가설도 반대하며 아담의 창조기사가 비유라는 주장도 동의하지 않는다. 비일은 일관되게 창세기 1-2장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주장하면서 롱맨이 비유해석의 근거로 제시하는 논거들을 수용하지 않는다. 특히 창세기 1/2장이 서로 다른 창조기사들이며 창조 순서에도 서로 모순된다는 롱맨의 주장에 반대하며 에이버벡과 콜린스가 주장했듯이 창세기 1/2장은 별개의 창조기사가 아니라 창세기 2장은 3장을 준비하면서 1장의 여섯째 날의 세부사항을 확장해서 보여준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비일은 창세기1장은 기본적인 히브리어 역사 내러티브이며 창조를 다루는 산문일 뿐이므로 문자적 해석이 정당하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비일은 아담이 실제 역사적 개인이 아닐수 있다는 롱맨의 견해는 성서를 최근의 과학적 가설에 맞추려는 시도가 지닌 위험성을 잘 보여준다고 지적하면서 창세기 1-2장을 비문자적 관점으로 해석하기를 선호하는 최근의 경향이 비로 이런 현상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한다. 비일은 인간의 유전자는 마스터 설계자의 설계이론을 입증하는 놀라운 증거일 뿐 그것이 진화 혹은 약 만명으로 이뤄진 인류 조상의 최초 모집단의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일은 역대상1장과 누가복음 3장의 족보에 나타나는 첫 인간 아담이 실제 존재 인물이 아니라면 두번째 아담인 예수를 역사적 인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냐고 반문한다. 결국 비일은 롱맨이 일관된 해석학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비판한다.
3. 콜린스는 성서가 참되다는 개념이 성서 전제가 같은 장르로 구성되어 있다는 개념과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는 (토드 비일을 비판하는) 롱맨의 주장은 유익하다고 평가한다. 나아가 콜린스는 창세기 1-11장과 병행을 이루는 고대 근동문서들을 연구하여 성서 해석에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월튼과 동일한) 롱맨의 주장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콜린스는 창세기 1-2장을 일종의 "고양된 산문 내러티브"로 이해하면 이 본문의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점을 견지하기 위해 굳이 아담을 역사적 개인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롱맨의 주장에는 반대한다. 또한 콜린스는 롱맨이 로마서의 논증이 아담의 실재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던의 견해를 인용하는 것이 논리적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롱맨은 바울 신학의 요점이 아담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거나 그의 불순종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제임스 던의 견해에 동의한다.) 콜린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는 비록 회화적 요소가 많지만 그 이야기는 성서의 스토리 라인에 없어서는 안 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롱맨은 아담과 그의 타락 이야기의 중요성을 섣불리 폄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콜린스는 오직 실제적 인간만이 인간의 실제 대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아담의 역사적 실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4. 월튼은 롱맨과 여러 부분에서 동의한다. 고대 근동의 배경이 중요하다든지, 창조기사가 지구 나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든지, 건전한 주해가 반드시 아담의 역사성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든지 하는 점에 동의한다. 월튼은 자신이 롱맨과 결정적 차이를 가지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월튼은 비유적 언어나 문자적 언어로 구분하는 범주는 인위적 이분법이며 지나친 단순화를 낳는다고 지적한다. 또한 월튼은 롱맨이 역사라는 단어에 신학적 역사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월튼은 서로 다른 장르의 문학이 각각 자기 기법을 사용하여 같은 실재와 진리를 반영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를 선호한다. 창세기와 고대 근동 신화들 사이에 나타나는 상호작용을 언급하는데 만족하는 롱맨과 달리 월튼은 그런 상호 작용은 신화든 아니든 관계없이 문학 작품 안에 명맥히 드러나는 인지 환경 사이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무질서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월튼은 롱맨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무질서가 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롱맨과 달리, 월튼은 창조시에 약간의 질서가 세워졌으며,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지배를 대리하는 대리자로서 성소를 계속 확장하고 질서를 세워나갈 의무가 주어졌다고 본다.
창조기사 논쟁 ; 존 H. 월튼
2017-05-02 18:31:30
1. 유능한 독자가 되려면 텍스트에 대한 시대착오적 질문과 인식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려고 드는 태도를 거부해야 한다. 비록 성서 자체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으며 또한 모든 인류를 위해 기록되었지만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능한 독자가 되려면 고대 이스라엘인이 이해했으리라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성서 언어를 이해해야 하며 그들이 고려했을 법한 방식으로 우주에 대해 숙고하고 무엇보다 그들이 살았던 문화를 통해 텍스트를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유능한 독서는 화행이론에서 발화(언어와 문학의 메카니즘을 의미)에 해당한다. 또한 유능한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서 텍스트에 오늘날의 장르 범주를 강제로 적용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그들의 사고방식과 문학을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범주화한 것처럼 여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2. 유능한 독자가 되기 위해서는 윤리적 독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텍스트에 맞서 그것을 단지 비평하려고 읽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였으므로 회의 주의와 불신앙을 배제하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순진한 태도를 보이거나 비평적 사고 자체를 회피한다는 뜻이 아니다. 먼저 유능한 독자가 되어야만 윤리적 독자가 될 수 있다. 유능한 독서는 성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화행이론에서 말하는 발화수반 행위(발화가 수반하는 내용을 전달자가 선택된 언어를 통해 전달하려는 바를 의미)야 말로 윤리적 읽기와 가장 관련된 행위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성서 텍스트보다 우월한 위치에 둔 채 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에 관한 진리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아니면 현대과학이란 렌즈를 통해 창세기1장을 읽음으로써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인을 위해 의도된 단어들의 의미를 무시한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성서를 읽는 행위가 아니다. 예를 들면 고대 이스라엘 문헌인 창세기1장은 발화가 수반하는 내용을 통해 진화를 수용하거나 반박할 의도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성서 텍스트 내에 은밀하게 새겨진 진리가 고대 이스라엘 청중의 지식이 닿기 힘든 너머에 존재했으며, 그 진리들이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때가 찰 때 드러난다는 주장은 윤리적 독서라고 볼 수 없다. 문자적 해석 역시 때때로 성서를 윤리적으로 읽는 행위를 위태롭게 한다. 예를 들면 히브리어 "바라"가 문자적으로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성서 텍스트를 윤리적으로 읽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문자적 해석이 아니라 윤리적 해석을 통해 성서를 읽어야 한다. 성서 텍스트는 독자에게 평생에 걸쳐 성실한 응답을 요구한다. 유능하고 윤리적인 독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독서는 행동과 신앙을 모두 산출한다.
3. 구약성서에 대해 유능한 독자가 되려면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문학 장르, 히브리어 단어와 구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이 고대 청중의 인지 환경에 자신을 맞추셔서 그들과 소통하셨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발화 행위는 인간의 발화수반 행위와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하나님의 발화행위가 장르와 수사 장치를 포함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이 인간 저자의 발화 안에 있는 수식 어구와 구조를 사용하여 인간 저자와 그의 청중에게 자신을 맞추기는 하지만 인간 저자의 측면에서 볼 때 잘못된 발화의 측면에 까지 자신을 맞추시지는 않는다고 나는 확신한다. 나는 인간 저자가 그의 발화수반 행위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했던 발화에 하나님이 영감을 베푸심과 동시에 그런 발화가 인간 저자의 세계와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예를 들어 창세기 앞부분의 장르는 내러티브 장르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역사 문헌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문제다. 역사문헌이 아니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역사와 신화를 일종의 토글 스위치로 간주하여 단지 둘 중의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사고방식이다. 장르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적어도 현대의 범주를 따라서) 오히려 인간 저자의 발화수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고대 근동의 인지 환경을 가능한 깊이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4. 고대 근동의 인지환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성서 저자들이 고대근동의 문학 작품에서 차용한 방식이나 그 정도를 평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에 널리 퍼져 있었더 우주에 대한 공통 견해를 상정하려는 것이다. 이런 공통 견해는 당시 이스라엘인들도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 공유했던 관점이었다. 그러한 공통점들이 이스라엘인들의 사고방식에 드러난다고 해서 그것들을 신화적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그것들이 성서의 발화수반 행위가 지닌 권위를 위협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성서 발화의 양상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청중을 위해 효과적으로 자신의 소통을 형성하셨던 방식을 보여준다. 성서 텍스트 안에 고대인의 우주론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을 볼 때, 우리는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진리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소통방식으로 성서에 사용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신학적 관점이야말로 성서 발화수반 행위의 정수다. 사실 신학적 관점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을 둘러싼 다른 사람들과 문화로부터 분명하게 구분해 준다. 그런 발화수반 행위는 그들의 우주론이나 인간 관계 개념들을 바꾸지 않더라도 쉽게 달성될 수 있다. 이때 사용되는 발화 행위는 어떤 문화적 양상을 띠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다른 발화 유형들을 본질적으로 불신하는 것은 아니다. 발화 자체에는 권위가 없다. 따라서 성서 텍스트의 발화수반 행위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한 다른 종류의 발화들은 수용 가능하다. 성서에 대한 유능한 독서는 우리의 성향과 우리에게 낯선 고대의 발화에서 연유되는 요소들을 인식함으로써 발전하게 된다. 그런 생각에 근거하여 나는 고대 근동 사람들의 우주 존재론은 오늘날의 우리와 달리 물질보다 기능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제안했으며, 아울러 고대 근동인들은 우주를 성소로 간주했다고 주장했다.
5. 고대 근동과 성서의 세계에서 어떤 사물은 그것이 물리적 형태를 가졌을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잡힌 체계 안에서 다른 사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이름과 역할을 가질 때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나는 이것을 물질 우주론이 아니라 기능 우주론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 기능이 결핍되어 있다는 뜻일 뿐, 물질의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그것에 기능이 주어짐을 의미할 뿐이지 물질적 가치가 부여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 따라서 성서의 우주론은 물질의 부재에서 시작되지 않고 기능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창세기1장1절은 창조기사의 문학적 도입부로서 2절 이후의 창조가 일어나는 방식을 암시해 준다. 1절의 태초가 창조의 7일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은 천지 창조가 다 이루어졌다는 창세기 2장1절의 보도를 통해 확증된다. 이런 논의가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 2절부터 실제 창조기사가 시작하기 때문이고, 2절은 어떤 물질이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다만 기능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혼돈하고 공허하며) 을 보여준다. 성서의 세계는 기능 우주론에 기반두었기 때문에, 물질의 기원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 기능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제시하여 우주의 기능적 특성을 설명한다. 나는 창조 기사 전체의 관심이 물질의 기원이 아니라 기능의 양상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본문이 물질 창조를 서술하도록 의도되었다면 창조의 날 대부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창조기사는 기능이 없는 상태로 시작해서 우주의 기능을 세우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 증거는 성서 자체에서 나올 뿐 아니라 풍부한 고대 근동 텍스트 역시 이 관점을 지지한다. 고대 근동의 이런 기능 중심적 관점을 보여주는 증거들은 물질보다 기능에 대한 이스라엘의 관심 역시 그들의 인지환경 안에 있는 공통된 사고 방식이었음을 입증한다.
6. 고대 인지환경과 관련된 나의 두번째 주장은 우주 성소론이다. 고대 근동에서 성전은 미시 우주로 간주되었으며 따라서 우주가 성전의 특성을 보인다. 다 나아가 우리는 성전 건축이 때때로 창조 관련 텍스트들의 일부임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성전은 우주에 내재하며 그 중심을 차지한다. 하지만 성전이란 단어는 창세기1장에 나타나지 않으며 거기에는 현대의 독자가 어떤 관련성을 인식할 만한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고대의 독자에게 상황은 전혀 다르다. 어떤 고대인도 인식할 수 있었지만 현대 독자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성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안식이다. 고대 세계에서 안식은 성전과 관련되어 있다. 고대세계에서 신들은 성전 안에서 안식하고 성전이 세워짐으로써 신들이 그 안에서 안식할 수 있었다. 이런 문맥에서 안식은 무관심이 아닌 관련성을 의미한다. 안식은 신이 자신의 성소에서 우주를 지배하고 그것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대적으로부터 안식을 약속하실 때,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게 휴식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방해와 장벽을 제거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안정되고 안전한 일상상활을 하게 하신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안식하신다는 것은 조직화 질서화를 마침으로써 일상의 행동 유형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지배가 수립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안식은 성전의 중앙에서 일어나는데, 그곳은 우주를 지휘하는 장소이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안식은 그가 다스리시는 상태를 나타낸다. 시편132: 7-14절은 성서의 성전, 안식, 통치 개념이 서로 연관됨을 보여준다. 고대 근동의 문헌에서 신들의 안식이라는 개념은 폭넓게 입증되며 신의 안식과 성전은 불가분의 관계다.
7. 성전과 우주, 이 둘의 관계는 은유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일치에 근거한 관계다. 성전은 단순히 어떤 사소한 점에서 우주와 비슷하게 하니라 성전은 본질상 우주다. 그러므로 그 반대도 역시 참이다. 어떤 본질적인 측면에서 우주 역시 하나의 성전이다. 성전을 우주로 간주하는 증거는 고대 근동 문헌을 다양한 각도에서 관찰함으로싸 나온 결과다. 성전과 우주의 관련성은 질서가 세워진 우주를 성소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성전은 성소의 중심이며 성소는 거룩함이 존재하는 동심원의 중심부라는 특징을 지닌다. 그래서 성전이 위치하는 중심부와 무질서가 여전히 남아있는 주변부가 공존한다. 성소의 중심부에는 질서가 수립되어 있으며 주변부에는 무질서가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질서와 거룩한 상태는 같은 맥락을 의미한다. 창세기1-2장에서 우주는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성소로 간주되고 에덴은 인접한 정원을 지닌 지성소로 나타나는데 그렇다면 고대 근동의 배경 하에서 성막과 성전은 일반적으로 우주라는 의미를 보여줄 뿐 아니라 특별히 에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고 말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창조기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안식하시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장이 우주적 관점에서 성전을 세우는 기사로 인식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 우주의 기원을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우주에 긍극적으로 질서와 기능을 가져오는 행동이 우주를 만들고 그것을 통제하며 이 우주적 성전에서 안식하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8. 마지막으로 창세기1장의 모든 기능과 기능적 측면들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과 관련된다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인간이 제자리에 있지 않다면 기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이 없다면 성전은 무의미하며, 이는 우주도 마찬가지다. 성전은 본질상 관계적이며 창세기1장은 같은 관점으로 우주를 대한다. 고대 근동에서 성전이 세워졌을 때 그것이 기능하게 되는 시점은 7일동안 지속된 취임식을 통해서였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점은 신이 성소 가운데 위치하여 거기서 안식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때 성전이 기능하게 되었으며 존재하게 되었다. 만약 이것이 창세기1장의 패러다임이라면 7일이란 기간을 일반적인 날로 이해하기란 훨씬 수월해진다. 아울러 창세기1장은 우주적 성전의 시작으로 해석될 수 있다. 만약 창조기사의 7일이 우주적 성전의 취임식을 나타내는 7일, 즉 물질이 아닌 기능의 기원과 관련된 7일이라면, 7일뿐 아니라 창세기1장 전체는 지구의 연대를 다루는 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렇게 창세기1장을 기능의 창조로 간주할 때, 일곱째 날은 핵심이 된다. 하나님이 그의 처소에 거하시면서 우주에 성소를 세우는 통치를 수행하신다는 점이 바로 이 안식 개념이 나타내는 바다.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성전도 없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에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이 우주의 기능들을 세우시고 우주가 인간을 위해 기능하게 하신 후에 우주의 시작을 여시고 통치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해석은 이 본문을 일종의 상징이나 비유, 신학적, 문학적 표현으로 한정하지 않고(현대과학과 관련시키려는 시도들이 그러하듯이) 당시의 독자가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본문은 우주 성전이 지닌 기능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서 물질의 기원에 관현 현대 과학의 관심과 상관이 없으며 물질의 기원에 관한 성서의 관점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간격이론이나 날-시대 이론 같은 일치주의적 해석은 모두 물질 존재론을 기반으로 사유한 잘못된 해석들이다.
9. 첫번째 창조기사(창1:1-2:3)과 두번째 창조기사(창2:4-25) 간에 충돌이 있다는 사실이 일반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 충돌은 두 창조기사가 집중하는 핵심뿐 아니라 창조순서에도 나타난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렇게 인식된 문제들은 주로 두 창조기사가 물질의 창조순서를 알려준다고 기대하는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내가 제안한대로 첫 창조기사가 중요한 기능들이 세워지는 날들(1-3째 날)과 기능체들이 채워지는 날들(4-6째 날)로 구성되어 있다면 해당 본문은 물질 창조에 대해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두 번째 창조기사의 내용을 창세기 1장의 7일에 관련짓거나 그날들 안에 속하는 기사로 간주할 근거나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두 창조기사는 별개이며 기원에 대해 다른 수준으로 접근할 뿐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두 창조기사는 성소의 질서 수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아주 잘 들어맞는다. 첫 번째 기사는 우주적 단계에서 이 주제를 다루며 두번째 기사는 지상적 단계에서 그렇게 한다. 후자의 경우 사람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즉시 그 곁에서 성소를 돌보기 위해 성소 안에 위치한다. 첫번째 기사에서 우주는 곧 성소이며 인간을 위해 기능한다. 두번째 기사에서 사람들은 성소 안에 위치하여 성소를 위해 기능한다.
10. 두 창조기사가 그렇게 서로 다르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 즉 첫째 기사에서 언급되는 사람과 둘째 기사에서 나타나는 아담과 하와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질문을 야기한다. 첫 번째 기사의 인간이 두 번째 기사의 아담과 하와를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은 입증되기 힘들다. 왜냐하면 첫 창조기사는 모든 인간의 기능과 지위를 묘사할 뿐, 이 인간 집단이 한 부부에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두번째 창조기사가 없었다면 우리는 고대 근동 자료 전반에 드러나는 사고방식을 따라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창조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창세기1장에 등장하는 인간의 역할은 고대 근동의 나머지 자료에 등장하는 사람의 역할과 상당히 다르다. 창세기에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고대 근동의 여타 지역에서 믿었던 인간의 지위보다 훨씬 더 격상된 지위를 가진 존재다. 만약 첫번째 기사의 인간이 아담과 하와를 지칭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우리는 두번째 기사를 독립된 기사로 해석해야 하고 이 경우에 아담과 하와는 적어도 대표자의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에덴동산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두번째 창조기사도 인간의 물질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적 대표자라는 개념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이며 기능과 관련된 기사라고 주장한다. 아담과 하와가 원형임을 인식한다고 해서 그것이 역사성에 관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다. 성서 저자들은 아마도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인물이자 인류의 조상으로 간주했음이 틀림없다.
존 H. 월튼에 대한 평가
1. 에이버벡은 월튼이 창세기1장의 발화에 상당한 정도로 고대 근동의 세계관이 수용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한다. 에이버벡은 성서는 고대 근동 세계관 안에 존재할 뿐 아니라, 그 세계에 맞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에이버벡은 창세기1장은 단지 하나님의 성전 봉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물질세계의 실제 형성을 다룬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에이버벡은 창세기1장의 우주창조와 달리 고대 근동의 성전봉헌 문헌들에는 실제로 성전을 건축하는 일과 관련된 용어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제시한다. 에이버벡은 월튼이 기능적 창조만을 강조하고 칭세기 1장에서 물질적 창조에 관한 언급을 배타적으로 제거하려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에이버벡은 창세기1장1절은 물질로 된 사물이 처음 창조되었다고 언급하는 구절이 아니라 1장의 주제를 소개하는 구절이라는 월튼의 견해에 동의한다. 그러나 창조기사가 2절에서 이미 존재하는 물질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므로 창세기1장을 물질 창조에 관한 기사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왜나햐면 기능을 창조한다는 것은 물질 창조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에이버벡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고대 근동 세계가 물질 창조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월튼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2. 토드 비일은 창세기1-11장에 대한 월튼의 견해는 매우 새롭고 창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일 윌튼의 관점이 옳다면 과학과 창세기1장 사이에는 어떤 충돌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일은 월튼의 해석이 아무리 참신하다 해도 그의 방법론은 결국 설득력이 없다고 비판한다. 무엇보다도 비일은 월튼이 창세기1-2장을 해석하면서 지나치게 고대 근동 문헌에 의존해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비일이 고대 근동문헌의 유용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월튼이 창조기사를 해석해주는 신약 성서 단락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비일은 창세기1-2장을 해석하는데 고대 근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이와 관련된 신약성서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비일은 창세기 1장은 창조를 바라보는 이스라엘인들의 견해가 아니라 창조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각이며 창조가 일어난지 오랜 후에 모세에게 초자연적 계시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비일은 창세기 1장의 의도된 독자는 이스라엘인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포함하며 이 사실은 특별히 창조에 대해 사실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창조 때 거기 있었거나 그 과정에 관여한 이스라엘인은 없기 때문이다. 비일은 콜린스가 적절하게 말했듯이 월튼이 창세기의 관점을 이스라엘의 관점과 동일시하는 것은 오해라고 말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세계관을 형성하려고 했을 뿐, 이스라엘의 세계관을 반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비일은 월튼 자신도 인정하듯이 창세기의 창조기사와 고대 근동의 창조기사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토록 거부하라고 말씀하셨던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포함하는 창조 기사를 모세에게 주셨겠냐고 반문한다. 비일은 창세기1장이 물질의 기원이 아닌 기능의 기원에 관심을 둔다는 월튼의 해석에 장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창조기사 본문이 물질 창조에 관해 사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비판한다. 비일은 고대 근동 문헌들이 물질보다는 기능에 관심을 둔다는 월튼의 주장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비일은 창세기1장이 물질 창조에 무관심하다는 월튼의 주장이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은 창세기1장 1절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비일은 창세기1:1이 단순히 창조기사의 문학적 도입부이며 따라서 창조는 실제로 물질이 이미 존재했던 상태인 1장2절에서 시작된다는 윌튼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창세기1:1이 참으로 물질로 된 사물, 즉 하늘과 땅이라는 거대한 두 사물의 창조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비일은 창세기2장 역시 기능의 창조로만 해석해서는 안되고 물질의 창조도 포함한다고 말하며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인물이 아닌 단지 인간의 원형으로 간주하는 것을 반대한다. 비일은 창세기1장의 7일을 우주적 성전이 시작되는 기간으로 해석하는 윌튼의 시도도 억지스럽다고 비판한다. 비일은 창세기1장의 해석을 위해 고대 근동의 사고방식을 좀 더 이해해야 한다는 월튼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더 좋은 해석방식은 이교도들이었던 고대 근동 민족들의 세계관을 성서에 강요하기 보다 성서 텍스트가 말하는 바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일은 설사 누군가 창세기1장에서 우주적 성전에 관한 유비를 발견했다고 해도(그럴 가능성도 없지만)그런 가능성에서 7일이 세상을 창조한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 취임을 나타낸다는 윌튼의 주장은 지나친 논리적 도약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비일은 월튼이 저자가 실제로 사용한 단어들(발화 행위)) 대신 저자의 의도(발화 수반행위)만이 성서의 무오성에 적용될 수 있다는 윌튼의 주장은 완전축자영감(verbal plenary inspiration)을 포기하고 사상영감(conceptual inspiration)을 선호하는 것 같다고 의심한다.
3. 콜린스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이해했을 법한 방식으로 창세기1-2장의 내용을 이해하려는 윌튼의 방법론이 매우 훌륭하며 창세기1장을 일종의 성전 건축 기사로 간주해야한다는 그의 제안도 유용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콜린스는 월튼이 창세기1장의 발화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에 대한 문자적 혹은 고대 과학적 묘사로 여기는 것은 창세기1장의 장르로부터 연유하기 힘든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콜린스는 창세기1장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성취를 깊이 경축하며 전려를 위해 마련된 문헌이기 때문에 창세기1장의 언어는 과학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 시적 묘사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콜린스는 윌튼이 왜 물질의 기원과 기능의 기원이 서로 유의미한 반론을 제기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하면서 창세기1장이 물질보다는 기능과의 관련성에 중정을 두는 특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태도가 물질적 요소에 관심을 거부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말한다. 콜린스는 결국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물질로 존재하는 사물인데, 왜 물질적 요소가 월튼의 해석 전략에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4. 롱맨은 월튼의 견해는 탁월하며 자신은 대부분 동의한다고 말한다. 물론 견해차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롱맨은 우리의 견해는 상당히 일치하며 이는 바로 우리가 창조기사가 서로 다른 특징을 강조하는 양상을 보이며 때때로 서로 다른 용어를 사용함에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롱맨은 윌튼의 가장 중요한 통찰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 우리는 창세기 1-2장이 이스라엘을 둘러싼 고대 근동 문화의 인지환경을 공유할 뿐, 현대의 과학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창조기사에서 과학을 읽어내는 것은 성서를 오해하는 것이다." 롱맨은 창세기1-2장을 읽는 방식으로 장르에 관한 질문에 대한 월튼의 대답이 매우 유용하다고 칭찬한다. 예를 들어 "그것들을 내러티브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을 역사문헌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라는 윌튼의 지적은 정확하며 아울러 "그것들이 역사문헌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과거를 참으로 반영하는 문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지적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적극 동의한다. 롱맨은 자신이 창조기사의 장르를 "신학적 역사"라고 규정한 것에 대해 윌튼이 이런 방식이 고대 텍스트에 현대의 범주를 강요하는 행동이라고 말하지만, 만일 적절히 규정되기만 한다면 창조기사의 장르를 다루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롱맨은 장르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저자의 발화수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월튼의 논지에 동의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고대 근동의 환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롱맨은 월튼의 기능창조론이 자신이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만드신 방법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견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마지막으로 롱맨은 우주와 성전의 관련성에 대한 월틴의 견해는 탁월하고 설득력있으며 장차 창조기사에 대한 자신의 해석에 포함하고 싶은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롱맨은 성전은 우주라는 것과 우주는 성전이라는 은유를 둘 다 수용하려는 월튼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한다. 왜나하면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의 기관이나 구조물로서 우주의 형태를 복제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에 대해서도 의견이 조금 다르다. 월튼의 견해는 아담과 하와는 인간의 원형이지만 그렇다고 당연히 비역사적 인물인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롱맨은 단호하게 아담과 하와는 원형이며 원형으로 기능하기 때문에 그들이 반드시 역사적 인물일 필요는 없으며 그들의 역사적 인물 여부는 신학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창조기사 논쟁: 총평
2017-05-07 23:40:07
1. 창세기 1장 1절의 의미
에이버벡은 창세기 1장 1절을 창세기 전체의 주제를 언급하는 일종의 제목과 같은 역할을 하는 독립구절로 본다. 토드 비일은 이런 견해를 반대하며 창세기 1장 1절은 하늘과 땅이라는 실제적인 물질 창조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콜린스도 창세기 1장 1절이 창조 기사의 요약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의 주된 줄거리가 시작되기 전 어느 시점에 일어난 실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며 그래서 이 구절이 하나님이 무로부터 창조하셨으며 물질 우주에는 절대적인 시작점이 있음을 분명히 암시한다고 말한다. 월튼은 창세기 1장 1절이 창조기사의 문학적 도입부라는 점에 동의한다.
토드 비일과 콜린스는 창세기1장 1절을 실제적인 창조 사건으로 보는데 반해 다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창세기1장 1절을 문학적 도입부로 보는데 동의한다. 월튼은 이런 해석의 차이가 창세기1장의 창조를 물질 창조로 보는 관점 때문이라고 보는데, 이 설명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문학적 구조로 보아도 창세기 1장 1절은 창조기사의 첫 단락의 톨레도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고 이것은 창세기 2장 4절의 두 번째 단락의 톨레도트로 연결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2. 창세기 1장 해석 방법론
에이버벡은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를 유비 혹은 일종의 의인화라고 해석한다. 그는 첫 번째 창조기사를 해석하는데 고대근동 우주론의 특정한 기본 패턴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창조기사를 고대 근동지역의 한 민족인 이스라엘이 이해할 수 있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6일 창조 7일 안식”이란 패턴은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이 6일간 일하고 7일에 안식하는 삶의 구조로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토드 비일은 창세기 전체를 역사 내러티브로서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학자다. 그는 창세기 1-11장의 문학적 장르와 고대 근동의 병행 문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비유적 해석이 주종을 이루게 된 것을 비판한다. 비일은 창세기1-11장과 12-50장을 읽는데 서로 다른 해석학 전략을 사용하는 것이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특히 비일은 창세기에 10번에 걸쳐 등장하는 “톨레도트”라는 문구들 중에 6개가 창세기1-11장에, 나머지 4개가 12-50장에 있는 것은 창세기 기자가 이 부분이 연속되는 역사로 해석되기를 의도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비일은 창조기사 첫 단락인 창세기1-2장도 나머지 부분과 분리되어 해석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비일은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창세기1-11장을(혹은 적어도 1-2장을) 고대 근동의 사회 환경이라는 틀로 이해하려는 관점을 반대한다. 그는 이런 관점은 성서의 신적 권위와 유일성을 부인하는 행위라고 비판하면서, 하나님이 고대 근동 신화를 사용하여 창조 행위에 담긴 독특한 진리를 전달하실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한다. 비일은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다른 고대 근동 문헌과 유사하기 보다는 다른 점이 더욱 많다고 말하며 따라서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다른 창조신화들에 대한 일종의 반론이라고 말한다. 또한 비일은 신약을 언급하며 신약 저자들이나 예수님이 창세기 1-11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강조하며 만약 이런 해석이 당시의 잘못된 관점에 맞추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성서의 무오성 교리나 예수의 신성 교리에도 위배된다고 지적한다.
콜린스는 창조기사의 두 단락을 서로 독립된 기사가 아니라 전체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면서도 동시에 두 단락을 서로 구분하여 둘째 단락은 일반 내러티브지만 첫 단락은 일반 내러티브가 아니라 “고양된 산문”이라고 제안한다. 그래서 그는 창조의 날들은 6일을 반드시 우주가 시작된 실제 처음의 날들이라고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 창조의 날들을 바빙크의 제안을 받아들여 “하나님이 일하신 날들”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날들의 기간이 얼마가 되는지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창세기 1-2장이 우주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트럼프 롱맨은 토드 비일에 대해 가장 직접적인 비판을 하는 학자다. 그는 성서의 장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동일하지만 그 전달방식인 장르는 다양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단락의 장르를 아는 것이 성서 해석에 필수적이며 결국 장르가 독해 전략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토드 비일을 비판하면서 성서에 오류가 없다는 점을 믿는 것과 성서 전체가 같은 장르를 고유하며 같은 해석 방식을 이끌어 낸다고 믿는 것은 다르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 1-2장이 내러티브지만 그 묘사들이 비유로 가득 차있으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창세기 1-2장의 장르를 알려면 이 창조기사와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들의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성서의 창조기사는 동 시대의 창조 이야기와 대단히 비슷하면서 동시에 그 이야기들에 저항하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롱맨은 성서의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창조방식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대 근동의 다른 신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천지의 창조주이심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롱맨은 창세기 1-11장과 12-50장이 그 특징상 연속한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창세기 1-2장도 문자적 역사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이 두 단락이 모두 내러티브이고 역사이지만 그것의 역사서술의 정확도는 다르다고 말한다. 특히 창세기1-2장의 경우 비유 언어를 많이 사용하고, 두 창조기사의 창조 순서가 다르고 고대 근동의 창조기사들과 현저히 상호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는 이 단락을 “신학적 역사”이며 “고양된 산문 내러티브”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래서 롱맨은 창세기 1-2장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로 우주와 인간의 창조주이심을 전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방법을 다룬다고 생각하면 오해라고 말한다. 그는 불행하게도 창세기 1-2장에 대한 토론이 진화와 특별 창조 사이의 대립이라는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는 형국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창세기 1-2장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방법을 알려준다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종종 창세기 1-2장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놓치거나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한다.
월튼은 성서가 우리를 위해 기록되었지만 우리에게 먼저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유능한 독자가 되려면 고대 이스라엘인이 이해했으리라고 여겨지는 방식으로 성서 언어를 이해해야 하며 그들이 살았던 문화를 통해 텍스트를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구약성서에 대해 유능한 독자가 되려면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문학 장르,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고대 청중의 인지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서 그들과 소통하셨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월튼은 비록 하나님이 인간 저자의 발화 행위에 자신을 맞추신다고 해서 잘못된 발화 행위에까지 자신을 맞추시지는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는 창세기 1-2장이 내러티브 장르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역사문헌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역사와 신화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월튼은 고대 근동의 인지환경을 강조하는데 이는 성서가 기록된 당시의 고대 근동의 우주에 대한 공통 견해가 당시 이스라엘인들도 공유하고 있었을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인의 사고방식이 진리를 전달하는 하나님의 소통방식으로 성서에 사용되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성서 텍스트의 권위는 발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화수반 행위에 있기 때문에 발화수반 행위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한 다른 종류의 발화들을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윌튼은 고대 근동의 인지환경이라는 관점에 근거하여 창세기1장을 “기능창조론”과 “우주 성소론”이라는 독특하고 창의적인 해석학적 관점을 제안한다.
토드 비일을 제외한 다른 학자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창세기 1-2장을 고대 근동의 인지 환경을 고려하여 해석하는데 일치한다. 이런 전제는 이 본문을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특히 에이버벡은 이 본문이 비유로 가득한 것은 저자가 이 본문을 비유적으로 읽도록 의도했다고 말한다. 월튼도 고대 근동의 문화적 배경, 문학 장르,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고대 청중의 인지환경에 자신을 맞추어서 그들과 소통하셨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단언한다. 토드 비일은 이런 해석학의 흐름에 반대하여 창세기 1-2장이 역사적 내러티브이며 당연히 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성서에 오류가 없다고 믿는 것과 성서 전체가 같은 장르를 고유하며 같은 해석 방식을 이끌어 낸다고 믿는 것은 다르다고 강조하는 롱맨의 비판은(토드 비일에 대한) 적절하다.
3. 두 가지 창조기사(1:1-2:3과 2:4-25)의 관계
에이버벡은 첫 번째 창조기사와 두 번째 창조기사는 서로 독립된 별개의 기사가 아니라 두 번째 단락이 첫 번째 단락을 반추하면서 창세기 4장까지 확장되는 단락의 도입부라고 말한다. 그는 2장 5절에서 아직 식물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진술은 식물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직 사람이 창조되기 이전이므로 경작되지 못했다는 의미이므로 창세기1장의 창조기사와 모순되거나 독립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나아가 그는 첫 단락이 비역사적 진술이라면 둘째 단락에서는 구체적인 4개의 강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역사와 연결점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에이버벡은 2장의 아담과 하와를 실제 역사적 인물이며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고 본다.
전통적으로 랍비 문헌은 창세기 2장의 창조가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콜린스는 이 전통적인 해석에 동의하면서 이 두 창조 기사를 별개의 독립된 기사로 볼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2장 4절의 교차대구 구조는 창조기사의 첫 단락과 둘째 단락을 전체로 이해해야 하는 문법적 정당성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2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에서 야훼로 바뀌는 것에 주목하면서 1장의 엘로힘이 광대한 초월자이신 창조주의 신격을 나타낸다면 2장의 야훼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분의 신격을 나타낸다고 설명한다.
트럼프 롱맨은 창세기 1-2장의 두 가지 창조기사가 창조에 대해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첫 창조기사가 우주관을 보여주는데 집중한다면 둘째 창조기사는 인간 창조에 집중한다고 말하면서 이 두 창조기사의 가장 충격적인 차이는 창조순서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1장에서는 셋째 날에 식물이 창조되는데, 2장에서는 아담이 창조되기 이전에 식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는 두 창조기사 모두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가르치려는 것이지 창조방법이나 창조순서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월튼은 첫 번째 창조기사와 두 번째 창조기사 간에 충돌이 있다고 인식된 이유는 주로 두 창조기사가 물질의 창조순서를 알려준다고 기대하는데서 연유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두 창조기사는 별개이며 기원에 대해 다른 수준으로 접근할 뿐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두 번째 창조기사를 첫 창조기사의 7일에 관련짓거나 그 날들 안에 속하는 기사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대신에 월튼은 이 두 창조기사를 성소의 질서 수립에 관한 이야기로 보면 서로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그는 첫 번째 기사는 우주적 단계에서 성소의 질서수립을 말한다면 두 번째 기사는 사람들이 성소 안에 위치하며 성소의 질서를 위해 기능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에이버벡, 토드 비일, 콜린스는 모두 두 번째 창조기사가 첫 번째 창조기사와 독립된 별개의 기사가 아니며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이 관점은 두 번째 창조기사는 첫 번째 창조기사 중에 인간 창조 부분에 집중하여 묘사하는 것으로 두 창조기사 간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한다. 이와 달리 롱맨과 월튼은 이 두 창조기사를 서로 독립된 것으로 보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다. 롱맨은 두 창조기사 모두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가르치려는 것이지 창조방법이나 창조순서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월튼은 두 창조기사를 성소의 질서 수립에 관한 이야기로 보면 서로 잘 들어맞는다고 주장한다. 월튼은 자신의 독특한 주장인 우주성소론에 근거해 설명하고 롱맨은 발화수반 행위를 강조하며 두 창조기사의 조화를 설명하지만 이들의 설명보다는 전통적인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고 창조기사 전반의 맥락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특히 콜린스가 2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엘로힘에서 야훼로 바뀌는 것에 주목하면서 1장의 엘로힘이 광대한 초월자이신 창조주의 신격을 나타낸다면 2장의 야훼는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과 관계를 맺는 분의 신격을 나타낸다는 설명은 창세기 1-11장과 12-50장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통찰로 보인다.
4. 창세기 1-2장 해석과 과학의 관계
비일은 창세기 1-2장에 대한 비문자적 해석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는 성서 본문을 최근의 과학 이론과 조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유래하며 이것은 진화론이나 지질학을 지나치게 신봉하여 성서 해석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진 것이라고 비판한다.
월튼은 현대과학이란 렌즈를 통해 창세기 1장을 읽음으로써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인을 위해 의도된 단어들의 의미가 무시된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성서를 읽는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 문헌인 창세기 1장은 진화를 수용하거나 반박할 의도가 없었다고 보아야 하며 성서 텍스트에 은밀하게 새겨진 진리가 고대 이스라엘 청중의 지식이 닿기 힘든 너머에 존재했으며 그 진리들이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드러난다는 주장은 윤리적 독서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창조기사의 7일이 우주적 성전의 취임식을 나타내는 7일, 즉 물질이 아닌 기능의 기원과 관련된 7일 이라면 창세기 1장은 지구의 연대를 다루는 논의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창세기1장은 우주 성전이 지닌 기능에 관한 이야기로서 물질의 기원에 관한 현대 과학의 관심과 상관이 없으며 물질의 기원에 관한 성서의 관심을 제시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간격이론이나 날-시대 이론 같은 일치주의적 해석은 모두 물질 존재론을 기반으로 사유한 잘못된 결과라고 비판한다.
토드 비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자들은 창세기 1-2장과 과학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수용한다. 그들은 창세기 1-2장은 창조의 방식을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진리를 전달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본문에서 창조의 방법에 관한 정보를 얻으려는 시도는 잘못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특히 롱맨은 창세기 1-2장에 대한 자신의 해석이 과학에 의해 추동되었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그는 적어도 과학이 성서해석을 재고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월튼도 창세기 1장은 우주 성전이 지닌 기능에 관한 이야기로서 물질의 기원에 관한 현대 과학의 관심과 상관이 없으며 물질의 기원에 관한 성서의 관심을 제시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간격이론이나 날 시대 이론 같은 과거의 일치주의적 해석은 모두 물질 존재론을 기반으로 사유한 잘못된 결과라는 월튼의 비판은 흥미롭다.
5. 아담의 역사성 문제
트럼프 롱맨은 창세기 1-2장을 “고양된 산문 내러티브”로 이해한다면 이 본문의 가르침에 오류가 없다는 점을 견지하기 위해 굳이 아담을 역사적 개인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제임스 던을 인용하면서 바울 신학의 요점이 아담을 역사적 인물로 간주하거나 그의 불순종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개념에 의존한다거나 고대인들이 아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역사적으로 이해했다고 일반화하는 주장은 모두 부당하다고 말한다.
월튼은 첫 번째 창조기사의 인간이 두 번째 창조기사의 아담과 하와를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은 입증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는 첫 번째 창조기사는 모든 인간의 기능과 지위를 묘사할 뿐, 인간 집단이 한 부부에게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만약 첫 번째 창조기사의 인간이 아담과 하와를 지칭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면 두 번째 창조기사를 독립된 기사로 해석해야 하고, 이 경우에 아담과 하와는 적어도 대표자의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두 번째 창조기사도 인간의 물질적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기능적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보아야 하며, 그렇다면 아담과 하와는 인간의 원형적 대표자로서 에덴동산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월튼은 성서 저자들은 아마도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인물이자 인류의 조상으로 간주했음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토드 비일은 창세기 1-2장을 모두 문자적, 역사적 내러티브로 해석한대 비해, 에이버벡은 창세기 1장과 달리 2장은 역사적인 내러티브이므로 문자적, 역사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래서 에이버벡이나 토드 비일은 모두 아담과 하와가 실제 역사적 인물이며 모든 인류의 조상이라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고 있다. 윌튼도 성서 저자들은 아마도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인물이자 인류의 조상으로 간주했음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긍정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하지만 윌튼에게 아담의 역사성 문제는 필수적인 것은 아니고 중요한 것은 역사성 문제보다는 아담과 하와가 가진 인류의 원형적 대표로서의 기능과 역할인데 이것은 그의 기능존재론과 연관된다. 롱맨은 가장 분명하게 아담을 역사적 개인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창세기 1장의 장르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연유한다. 아담과 하와를 역사적 인물로서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는 문자적 해석은 과학적 발견에 합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굳이 문자적 해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롱맨이나 월튼처럼 해석의 유연성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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