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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유의지론- 김남호

조나단 에드워즈의 자유의지론- 김남호

2017-06-20 16:30:13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자유의지와 결정론은 양립 가능하다는 양립론과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비양립론(자유주의자들)이 있다. 자유의지 논쟁이 난해한 이유는 이 주제가 다른 주제 혹은 학적 영역과 복잡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 논쟁은 사건.행위. 행위자와 관련된 형이상학/행위이론/ 심리철학과 관련되고 책임귀속 조건에서는 윤리학과 교육 및 처벌의 목적과 방법론의 이해에서는 교육학이나 법학과 인과개념에서는 과학철학이나 실재론과 신경과학,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등에서는 실재론적 해석 및 함의와 그리고 신의 속성이나 섭리 및 악의 문제에서는 신학과 관련된다. 이렇게 자유의지는 인간론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이며 그 난해함과 다른 주제들과의 광범위한 연관성을 고려해 볼 때, 인류의 지적인 문제의 최고 정점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자유의지 문제를 다루지 않고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빅 퀘스천에 답할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8세기 경의 작품인 호메로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을 의지의 자유를 가진 행위주체로 이해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서는 자유의지와 자아, 영혼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5세기의 플라톤에 이르러서 의지의 자유문제는 영혼의 문제와 연관되어 탐구되기 시작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위의 자유"와 "의지의 자유"라는 자유의 두 개념을 구분하는데 전자가 행위할 수 있는 자유라면 후자는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행위의 자유가 피상적인 의미로서의 자유라면 의지의 자유는 더 근본적인 의미로서의 자유다. 형이상학에서 자유의지 논쟁은 행위의 자유가 아니라 의지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이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자유의지 논쟁은 다음 3가지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우리에게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둘째 만일 그렇다면 그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혹은 선택을 할 수 있기 위한 조건들은 무엇인가? 셋째 선택할 수 있는 힘의 정도는 어느정도인가? 그것은 제한된 힘인가? 혹은 물리적 인과사슬에 속한 힘인가? 아니면 물리적 인과사슬로부터 자유로운 힘인가? 

 

  양립론자들(고전적)과 비양립론자들(자유주의) 사이에는 충돌이 있어왔다. 양립론자들에는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흄, 존 스튜어트 밀이 있고 비양립론자들에는 토머스 리드, 임마누엘 칸트가 있다. 결정론은 그것이 옳든 틀리든 그 자체로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만일 결정론이 옳다면 발생하는 사건은 이전의 원인에 의해 발생하게 되므로 미래는 의지적 선택에 의해 열려있지 않게  된다. 또한 결정론이 틀릴 경우 원인이 없이 발생한 사건은 순전히 우연이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우연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의지의 자유에 입각한 행위라고 할 수 없다. 즉 행위자의 통제가 없다면 의지적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이렇게 결정론은 맞든 틀리든 자유의지와 양립하기 어려운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고전적 양립론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혹은 욕구하는 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제약이나 방해가 부재하다면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양립론(자유주의)에서는 결정론은 틀렸고 자유의지는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자연적 현상들은 물리적인 원인과 결과에 따라 발생하지만 행위자의 어떤 행위의 경우 물리적인 인과사슬로부터 초월적인 요인들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고전적 양립론자인 에드워즈는 의지한 정신이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의지와 욕구는 조금 다르지만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은 결코 자기 욕구에 상반되는 것을 하고 싶어하거나 자기 의지에 상반되는 것을 욕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에즈워즈는 고전적 양립론의 조건, 즉 의지의 자유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혹은 욕구하는 바를 할 수 있는 능력임을 전제하고 있다. 에드워즈는 의지가 의지를 스스로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의지 역시 원인에 의해 결정되며, 의지를 결정짓는 원인은 가장 강한 동기라고 말한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동기란 그것이 홀로 하나이든 혹은 여러가지가 복합되었든, 정신이 의욕을 향하도록 감동시키고 자극시키고 매혹시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의지를 움직이게만드는 동기는 경향인데, 경향은 좋은 것 혹은 유쾌한 것이며 여기에 의지가 있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에드워즈에게 의지는 항상 가장 강한 동기에 의해서, 혹은 의욕을 자극하는 가장 지대한 선행 경향을 갖고 있는 정신의 주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와 달리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의지의 자유를 영혼의 능동적인 활동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활동능력을 부여받은 한 존재로서 영혼이 자기 자신의 욕구룰 야기하며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시간적으로 우선하는 원인 없이 어떻게 영혼이 자기 결정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이에 대해 자유주의자 아이작 왓츠는 의지의 자유는 무관심 중립(indifference) 상태로 인해 가능하다고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무관심 중립 상태란 외적 원인들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어느 성향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텅빈 백지 같은 중립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아이작 왓츠는 의지가 무관심 중립 상태에서 활동할 수 있기 때문에 성향의 힘을 벗어날 수 있으며 의지의 활동과 정지를 결정하고 주도하는 것은 의지의 자유이며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의욕이나 의지의 활동은 모두 우발적이며, 따라서 자유의지에 입각한 행위와 같은 사건들의 경우엔 원인은 가지고 있지만 그 원인과 사건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에드워즈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입장은 대립하는데 두 입장은 모두 각각의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성향은 자연적으로 혹은 천성적으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며 원인과 결과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만일 우리의 행위가 성향으로 인한 결과물이라면 우리의 악한 행위에 대해 비난하거나 책임을 묻지 못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에드워즈의 아킬레스건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인과사슬에서 벗어난 의지의 무관심 중립 상태를 제안하지만 과연 그런 무관심 중립 상태가 가능한가?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아킬레스 건이다. 사실 이 두 입장의 아킬레스건은 양립주의와 자유주의에 여전히 해당하는 고질적인 문제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에드워즈는 우리는 타고난 성향들에 속박된 존재들이지만 자연적으로 불가능한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혹은 욕구하는 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말하며 약한 결정론의 입장을 취한다. 에드워즈는 인간에게 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의지의 무관심 중립 상태가 가능하지에 대해 영혼의 능동적 활동 이외에 다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역시 자유주의자들이 제시하는 본체적 자아, 영혼, 행위자 인과 같은 추가요인들이 미스테리하다는 고질적인 오명을 벗어버리지 못했다.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지의 자유가 원인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우발적인 사건에 불과하다고 집요하게 공격하는데 이런 지적은 아주 정확하다. 의지적 선택은 어떤식으로든 행위자의 통제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통제없이 발생한 시간은 우발적, 우연적 사건이고 이런 사건을 행위 이유를 가진 의지적 선택이라고 볼 수 없다. 에드워즈는 무원인(No- Cause)는 존재를 야기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모든 것과 구별되는 특정한 종류 하나를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비판한다. 현대의 자유주의자 로데릭 치솜은 행위자 인과 개념을 도입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행위자 인과란 물리적 원인과 달리 행위자로부터 연원하는 인과력인데 치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 개념을 응용해서 행위자를 와부적 원인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은 스스로 인과력을 행사하는 unmoved mover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위자 인과력의 존재론적 정체를 둘러산 의문점들은 여전히 남겨져 있다.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자유주의자인 로버트 케인은 자기 형성 행위 개념을 통해 무관심 중립 상태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선보인다. 그가 말하는 자기 형성 행위란 행위자가 어떤 선택을 하기 위해 숙고하는 과정 중에 두뇌 안에는 일종의 카오스 상태, 즉 미결정적 상태가 형성되며 이를 통해 본능이나 성향으로부터 벗어난 선택이 가능하다는 아이디어다. 

 

  에드워즈의 자유의지론은 자유주의자들처럼 미스테리한 외부적 요인들을 도입하지 않고 도덕적 불능과 자연적 불능 개념을 도입해서 객관적으로 선한 행위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대단히 인상적이고 현대적이다. 현대 신경과학의 발전으로 충동을 조절할 수 있는 생물학적 토대에 대한 지식이 증가했으며 이러한 지식들은 에드웨즈가 말하는 자연적 불가능에 대한 경험과학적 증거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도덕적 불능과 자연적 불능에 대한 구분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신경과학의 발전을 통해 충동을 제어하는 생물학적 토대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도덕적 불능은 자연적 불능의 연장성 상에 있거나 자연적 불능에 대한 지식만으로 도덕적 불능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원인없는 의지적 행위 가능성이나 무관심 중립 상태의 가능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반대 논증들은 높은 설득력과 심오함을 보여준다. 만일 미래의 사건들이 결정되어 있고 하나님이 그 결정된 사건을 모두 알고 있다는 예정론이 옳다면, 에드워즈의 자유의지 이론은 예정론에 가장 최적화된 이론이다. 그러나 로버트 케인의 지적처럼 과연 예정론과 책임의 귀속 가능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