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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여성신학(Feministic Theology)

여성신학(Feministic Theology)

2017-04-12 21:26:41


 1. 여성신학은 남성 가부장제 사회 아래 내재된 여성차별적 문화와 사회적 현실 그리고 여성 억압의 이델로로기 혹은 메카니즘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신학이다.  여성신학은 여성에 대한 억압의 문화와 성적 차별구조로부터 여성을 해방하려는 신학이라는 점에서 해방신학의 일종이다. 여성신학은 성서에 여성비하와 여성차별의 기원이 있다고 보고 성서언어의 남성중심적 표현을 비판한다. 그들은 신학과 신학자, 교회의 언어가 중립적이 아니라 남성의 가치, 의식, 희구룰 대변하고 있다고 보며 특히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에 대한 가부장적 표상으로서 남성성의 우월성과 지배력, 초월성을 신 개념에 대입한 것이라고 말한다.

2. 여성신학에는 다양한 유형들이 있는데 다신론적, 여신숭배 같은 종교전통을 사용해서라도 성서에 대한 대안적 상징체계를 발전시키려는 급진적, 여성해방적 페미니즘은 사실 탈기독교적 페미니즘이다. 이와 달리 성서주의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언어로 가려져 있는 성서의 메시지를 해방의 말씀으로 재번역하자는 입장이다. 성서주의적 페미니즘이 성서 안의 페미니즘적 요소를 발견하는데 초점을 둔다면 개혁적 혹은 재건적 페미니즘은 전통신학의 성차별적 편향을 비판하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들은 기독교는 본래 여성차별적 전통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의 과정에서 여성억압적으로 변형된 것이므로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돌이가 남녀평등적 전통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유산을 긍정하여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상징을 수용하되 이 부권적 상징 사용을 분권화하려고 한다. 류터는 하나님에 관한 언어는 남성과 여성을 뛰어넘는 포괄적인 성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죌레도 하나님 아버지 상징을 말하는 것은 무한성의 하나님을 유한성으로 가두게 된다고 비판한다. 피오렌자는 지금까지 성서가 남성을 표본적인 인간으로 간주하고 여성을 배제해 온 것에 대해 남성과 여성 모두를 포괄하는 해석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여성신학은 하나님 이미지에 대한 남성 위주의 문법과 형식을 의심한다. 아버지-하나님 이미지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억압의 기제를 정당화하며 남성의 여성을 차별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신학적 이데롤로기로 사용되었다. 셀리 메페이그는  하나님이라는 존재 자체는 언표 불가능하므로 하나님은 문자적으로 아버지가 아니라 단지 은유적이며 상징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여성신학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상징만이 아니라 다른 상지을 첨가하여 아버지 상징을 약화시키고자 한다. 기독교의 뿌리가 되는 은유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왕의 은유로서 하나님나라, 하나님의 지배라고 말한다. 그래서 멕페이그는 어머니, 연인, 친구라는 하나님 은유를 제안한다. 

 

4. 여성신학은 죄의 전통적 개념인 불신앙, 교만, 정욕은 남성 경험이 반영된 죄 개념이라고 본다. 죄의 여성적 개념은 교만이나 색욕이 아니라 자아의 부정, 혹은 자아를 개발하지 못하는 것이다. 류터는 예수의 남성됨은 역사적 우발성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가부장 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며 남성과 여성의 상호 평등한 상호존중에 근거한 공동체 형성운동이라고 말한다. 피로렌자는 예수를 여성과 남성의 온전한 동등성과 평등에 기초한 지혜의 예언자로 이해한다.  엘리자베스 존슨도 초기기독교에서는 말씀 기독론 보다는 지혜기독론이 시간적으로 앞섰다고 말한다. 여성신학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전통적은 속죄론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여성신학자들에게 구원은 속죄의 사건이 아니라  여성이 가부장적이며 성차별적인 체제에 억압받는 상태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칭의도 죄책감으로부터 해방과 같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가부장적 죄로부터 해방이며 여성이 하나님과 사회 앞에서 가치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도전하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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