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개관
2016-10-22 16:52:23
A. 구조- 레이먼드 브라운(Raymond Brown)
1. 서언(Prologue); 1장 1-18절
2. 표적의 책(Book of Signs) ; 1장 19절- 12장 50절
3. 영광의 책(Book of Glory) ; 13장 1절- 20장 31절
4. 결어(Epilogue) ; 21장 1-25절
B. 표적들을 행하심; 1장 19절- 12장 50절
표적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능력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다음 8가지의 표적들이 등장한다.
1. 물을 포도주로 만드심(2ㅣ1-11)
2. 성전의 정화(2:13-23)
3.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4:46-54)
4. 38년된 병자를 고치심(5:1-15)
5. 오병이어(6:5-13)
6. 물위를 걸으심(6:ㅂ16-21)
7. 소경을 고치심(9:1-7)
8. 나사로를 살리심(11:1-44)
그러나 이 표적의 결론은 그들의 불신이었다.(12ㅣ32) 그래서 예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격정적으로(외쳐 이르시되) 선포하신다.(12:44-50) 여기까지가 대중을 상대한 사역이었다면 13장 부터는 제자들을 상대로한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C. 영광을 받으심 ; 13장1절-20장 31절
13장부터는 제자들(13:1 ; 자기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한 사역이 시작되는데 여기서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진술이 다음과 같이 9번 나온다.
1.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7:39)
2.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아버지시니(8:54)
3.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12:16)
4.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5.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12:28)
6.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13:31-32)
7.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1)
8.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17:5)
9.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7:10)
14-16장에 고별설교가 등장하는데 이 설교에는 떠난다는 이야기와 떠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동시에 주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이란 약속이 주어진다. 제자들은 담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가 세상을 이기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7장에 대제사장적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기도를 마지막으로 예수는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신 후 죽임을 당하시고(18-19장) 마침내 부활하신다.(20장)
D. 에필로그
부활을 보고도 낙심한 제자들을부활한 예수님이 방문하는 이 부분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장면이다.
요한복음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에고 에이미'란 어구의 등장이다.
절대형으로 나타난 것이 5군데(4:26; 6:20; 8:58; 13:19; 18:5,8)이고 보어와 함께 나타난 것이 다음과 같이 7군데 인데 괴스텐버거는 에고 에이미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생명의 떡(6:35,48,51)
2. 세상의 빛(8:12)
3. 양의 문(10:7)
4. 선한 목자(10:11, 14)
5. 부활이요 생명(11:25-26)
6. 길과 진리 생명(14:6)
7. 참 포도나무(15:1, 5)
요한복음의 개인주의
2016-10-26 21:45:26
1. 1962년 모울(Molule)은 '요한복음과 개인주의'라는 논문을 작성했다. 모울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개인주의자와 집단주의 문화 사이의 현격한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요한복음의 개인주의는 요한복음이 신자 개인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상당히 강조한다는 의미이고 그리스도 공동체를 보다 집합적으로 이해하는 바울문헌과는 대조적이란 의미였다. 여기서 개인주의와 개체성 또는 개별성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인주의는 문화적 변수이지만 개별성은 모든 인간이 갖는 각자의 특성으로서 신체적으로나 주체적으로 개인을 식별할 수 있게하는 속성이다. 적어도 인간이 역사를 기록한 이래 개체성이 없었던 시대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범우주적인 특성으로서 이런 자기 인식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를 성찰하고 내적 대화를 할 수 있다. 이런 범우주적 자기인식은 근대 이후 개인주의가 수반하는 자신만의 강한 개성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체적 결정권자가 되는 근대 이후의 개인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많은 고대인들에게 개인의 이야기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야기와 깊이 맞물려 있었고 개개인은 다양한 개성으로 구별되기 보다는 집단내의 역할, 양상, 관계 등으로 구별되기 마련이었다. 고대인들이 타인들이나 자기들이 속한 집단과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상태에서 상관적 의미로 자아를 식별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아들이 서로 구분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서로 깊이 의존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개인주의의 반대는 집단주의인데,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목표는 집단의 목표에 우선하는 반면에 집단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의 목표는 개인의 목표에 우선한다.
2. 요한 복음에는 개인과 예수의 관계를 상당히 강조하는 단서들이 많다. 그 단서들은 개인과 예수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경구적 말씀들로 나타난다. 유명한 경구인 3:16에서도 "저를 믿는 자"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현되었다. 이것은 단수를 취함으로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각 개인의 결단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유사하게 예수를 믿는 자(단수)라든지 그에 상응하는 인격을 표현할 때도 단수를 많이 사용한다. 요한복음의 이런 경구적 말씀들은 예수에 대한 신앙이 각기 개인적으로 반응할 문제라고 주장하는 듯 하며 개인이 혼자서 신앙적 결단을 할 가능성을 허용한다. 요한복음이 전개됨에 따라 예수의 계명들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새 계명으로 수렴된다(15:12) 즉 제자들이 서로 사랑 하는 것이 공동체의 생명이며 이 생명은 각 개인과 예수 사이의 개별적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후자로 인해 전자가 가능하며, 여기서 우선권은 개인과 예수와의 개별적 관계로 형성되고 후자에 있다. 따라서 요한 공동체는 예수와의 개별적 관계로 형성되고 예수와의 개별적 관계를 통해 연명하는 것이다.
3. 예수와의 개별적 관계에 관한 경구적 말씀들은 개인이 예수 신앙에 처음 입문하는 것뿐 아니라 개인과 예수 사이의 친밀한 내주 관계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생명을 지속하는 것도 포함한다. 요한복음 6:56(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은' 하나 안에 또 하나' 혹은 '사사로운 상호내재'라는 주제를 드러내는 요한복음 ' 최초의 본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이 본문에서 성찬식 언어가 개인화되어 사용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 안의 또 하나'(In-One-Anotherness ; Personal Coinherence) 라는 언어는 여전히 은유적이다. 그것은 가징 친밀한 사사로운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공간적 이미지를 사용한다.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14-17장에 더 자주 등장한다. 요한이 사용하는 관계 이미지를 바울이 쓴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과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바울과 달리 요한은 그 말을 상호적으로 사용하며 동일한 공식을 예수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에 사용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본문이 바울 서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요한복음에는 명확하고도 단순한 상호 의존적 공식이 나타난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상호관계(레26:12; 삼하7:14) 는 비대칭 공식들로서 요한복음의 단순한 상호의존적 공식과는 구별된다. 따라서 우리는 상호의존성에 관한 요한의 공식은 서로 사랑에 대한 사사로운 상호 내재성을 표현하기 위한 요한 자신의 창작물로 보아야 한다. '하나 안에 또 하나' 라는 이미지는 요한복음이 개인과 예수의 사사로운 관계를 강조한다는 점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근현대 서구의 개인주의는 자아를 독립적이고 경계가 확실한 단위로 이해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얽매여 자신의 독자성을 타협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개인주의 이미지는 자아를 중심에 두되 그 경계들을 열린 상태로 상정함으로써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부분이 될 수 있는 인격체들을 상정한다. 그것은 경계를 긋고 있는 자아의 독립성을 열고 들어가는 이미지다.
4. 요한복음 이야기들의 두드러진 특징은 예수가 등장 인물들과 개별적으로 길게 대화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화들은 대화당사자 외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물론 공관복음에도 예수와 개인이 만나는 장면이 많지만 그 대화들은 대체로 짧으며 사적인 경우는 거의 없다. 요한복음에서 대부분의 대화는 예수의 대화 상대자에게 일종의 여행 과정이다. 만나는 사람들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따라 요한복음의 예수는 대화 주제를 달리한다. 예수와 대화하는 사람들은 시작할 때와 다른 지점에서 대화를 한다. 대화후에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물론 요한 신학의 중심에는 공동체가 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요한복음에서는 공동체적 요소가 개인주의를 제거하거나 희석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신앙과 제자도에 대한 강조는 요한 복음의 두드러진 특징인데도 아직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사적인 대화들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듯이 신자나 제자들에 대한 경구적 말씀들도 예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인이 공동체로 이동하는 일은 개인이 예수에게도 이동하는 일이고 그 결과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로 이동하는 일이다. 요한복음은 예수에게 초점을 맞추어 전혀 다른 차원의 개인주의를 선보인다. 신자 개인과 예수 사이의 사사롭고 친밀한 관계에 가치를 두는 것이다. 개인이 살아계신 예수와 친밀함을 누릴 수 있다는 개념은 기독교 역사에서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만일 개인주의가 공동체의 예배나 단체 생활의 중요한 역할을 회피하는 일이라면 개인적 친밀감이 반드시 개인주의적일 필요는 없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개인주의는 단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사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의미다. 사랑받는 제자와 예수 사이의 친밀성(요13:2)은 아들과 아버지의 친밀성과 유사성이 있다. 그 유사성은 '하나 안에 또 하나' 언어를 양쪽 모두에 사용한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예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예수 안에 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친밀한 관계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기원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신적 생명으로 맺어지는 일대일 관계가 특별히 드러나는 것은 사랑받는 제자와 예수 사이의 친밀한 관계 및 모든 신자와 예수 사이의 ' 사적인 상호내재' 관계에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일대인 관계는 다른 관계를 배제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
2016-10-26 23:48:03
1. 요한복음 본문에서 '하나'라는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유력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있다. 첫째는 '하나'라는 말은 독특성(uniqueness)이나 단일성(singularity)을 나타내며, 사람이나 사물이 하나뿐 임을 뜻한다. 둘째로 '하나'라는 말은 통일성(unity)을 뜻하기도 하는데, 통합되거나 연합된 상태라는 뜻이다. 전자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다수(many)의 반대가 되고 후자의 의미로 사용될 때는 분열(division)과 반대가 된다. '하나'라는 말이 신학적으로 어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그 용례를 살펴보려면 이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하나'라는 말로 한 사람이나 한 사물의 독특성을 표현할 때는 여럿 중에서 단지 하나라는 뜻이다. 또한 '하나'라는 말로 사람들이나 사물들의 집합이 통합되었음을 나타낼 때는 그 집합체가 분열되어 있지 않고 통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2. '하나'라는 매우 평범하고도 작은 말은 제2성전기 유대인들에게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단어였는데 이는 그것이 쉐마(신명기 6:4-5)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유대 문헌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혹은' 한 분 하나님'이란 표현이 나오면 그것은 틀림없이 쉐마에서 유래한 메아리라고 간주할 수 있다. 유사한 메이리들이 제2성전기 문헌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종교다원주의가 만연했던 당시에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야 말로 유대 신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한 분 하나님'이란 말은 단순히 신조에 불과한 표현이 아니었다. 쉐마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했으며 한 분 하나님을 예배라는 것을 물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인 토라에 순종함으로써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용례는 '하나'가 가지는 의미가 가운데 하나님은 여럿이 아니라 한 분뿐이라는 뜻이다. 당시 유대 문헌 가운데 '하나'를 이 외에 다른 의미로 쓴 경우는 없다. 하나님은 통합되고 나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하나'라고 표현한 유대 문헌은 없다. 유한한 피조물과 대조적인 신의 속성으로서 '하나'라는 사상은 그리스 철학 전통에 자리잡고 있는 불가분의 또는 불가합성의 사상으로서 초기 교회 교부들에게 비로서 문제가 되었을 뿐, 그 이전의 유대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그리스 철학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시킨 유대 사상가 필론의 작품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말은 하나님이 유일하시다는 뜻이다.
3. 여기서 우리는 유대 문헌에서 '하나'라는 말이 하나님의 백성에 관하여 사용될 때의 용법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한복음에서 사용하는 '하나'의 뜻을 풀어줄 열쇠 본문들은 다음의 예언서 구절들이다.(겔34:23; 37:15, 미가 2:12; 호세아 11:11, 이사야 45:20) 이 본문들은 솔로몬의 통일왕국 시대 이후에 이스라엘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분열되고 멸망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예언서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의 소망을 담아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다시 모아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노래했다. 이것은 새로운 다윗인 메시아의 통치 아래 이스라엘이 하나로 통일되고 그 메시아가 한 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가 된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일 이 본문들이 장차 하나가 될 이스라엘을 뜻한다면 그 의미는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의 통일된 백성으로 통합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독보적인(하나뿐인 특별한) 백성일지라도 그 본문들은 이스라엘의 독보성보다는 이스라엘의 통합에 집중한다. 그런데 예언서들은 하나의 왕이 하나의 통합된 백성을 다스린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여기서 통합된 백성 개념이 그들의 유일한 통치자 개념과 더불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하나'에 대한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등장하며 한 의미로는 백성을 정의하고 다른 의미로는 통치자를 정의한다.
4. 1세기 유대 문헌 가운데 '한 분 하나님'과 '하나 된 백성'의 상관관계를 다루는 본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유대교 신앙을 하나뿐인 백성, 그 성전, 그 율법의 독보성과 연관시킨다. 한 분 하나님, 한 성전, 한 율법, 한 백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려면 그 본문들의 골자가 하나님의 백성은 한 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하나가 된다는 것임을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한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 백성은 한 분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하나가 되어 한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한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필론에게도 요한 복음과 유사한 사상이 나타나는데, 필론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헌신은 서로에 대한 사람의 끈을 하나님의 백성을 한데 묶는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이 그들 모두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할 뿐만 아니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이 그들 가운데 사랑을 일깨워서 서로 연합하게 한다고 필론은 주장하는 것 같다.
5.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라고 말하는 본문이 6번 나타나는데(10:16 ; 11:52, ;17장에서 4회) 이 본문들은 전술한 예언서 본문들을 상기시키는 메아리를 분명히 포함한다. 예언서들처럼 요한 복음도 하나님 백성의 독보성/유일성이 아니라 통일성을 다룬다. 특히 17장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로 모여야 하고, 그들이 하나가 되어 마침내 완전하게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기도한다. 요한 복음 10장은 목자와 양떼에 대한 예수의 비유 담론으로서 앞서 언급한 예언자들의 소망과 연관이 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담론의 전체 배경은 에스겔서다. 에스겔서처럼 이 본문에도 둘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뉜 백성으로서 장차 메시아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어 단일 백성이 될 것이다. 백성의 통합은 그 지도자의 유일성/ 독보성과 연관이 되어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이 남왕조와 북왕조로 분열된 것을 거론하는데 요한은 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런 변용을 위하여 요한은 흩어진 무리들의 재통합을 말하는 다른 예언서은 이사야 56:8을 참조했다. 만약에 다른 양들이 이방인이라면 요한은 이스라엘 12지파가 다시 모이리라는 에스겔의 소망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이방인까지 포함하는 소망으로 확장시킨 셈이다. 요한은 예언서들 가운데 이방인들이 돌이켜 한 분 하나님을 예배하리라 기대한 본문들을 '하나의 무리와 하나의 목자가 있으리라'고 재해석함으로써 유대인들과 이뱅인들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통합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6. 요한복음 10장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는 단지 한 목자에 대한 충성 때문만이 아니라 목자가 양떼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12 장에서 예수가 말한 말과도 공명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12:32) 예수의 죽음은 종말에 하나님이 그의 백성이 되라고 부르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함께 모으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요컨데 이 본문들은 예수의 독보성, 한 목자, 백성을 위해 죽는 한 사람 들의 단일성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통합성과 연결시킨다. 17장에서 우리는 더 놀라운 사상을 접하게 된다. 거기서 예수는 우리(예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 처럼 그의 제자들도 하나가 되기를 기도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통일성에서 하나님의 통일성으로 이동해야 한다.
7. 요한복음 8:41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와 언쟁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하면서 아버지는 한 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하나님의 독보성/유일성을 말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임을 주장하면서,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을 반박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를 하나님과 연관짓는 요한복음의 다른 본문에는 유대전통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내용이 등장한다. 요한 복음 10:30에서 예수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은 쉐마처럼 한 분 하나님의 독보성/유일성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차원의 하나됨, 즉 서로 하나가 된다는 통합적 의미의 하나됨의 언어가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에 틀림없다. 아버지와 아들은 상호내주하면서 하나가 된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유일하신 신성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적 공유 상태로 이뤄진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두 인격이 하나로 통합된 상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초기 유대교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유대교 저자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외에 하나님이 하나 되는 다른 방식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고린도전서 8:6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등장하는데, 거기서 바울은 쉐마를 재해석함으로써 한 분 하나님과 한 분 주님, 즉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가 쉐마의 한 분 하나님을 구성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요한복음과 달리 예수를 그 아들이라고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하나됨을 아버지와 아들의 공동체로 설명하지 않는다. 쉐마에 대한 바울의 재구성은 외향적이어서 한 분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내지 그의 백성과의 관계로 향하는 반면에 요한의 재구성은 인격들의 공동체 안에서 신적 활동의 외적 통일성을 하나님으로 내면화한다.
8.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주장하자 유대인들을 예수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한다고 죽이려고 했다.(10:33) 이어지는 예수의 주장은 더욱 절정에 달하는데 그것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10:38)는 발언이다. 이 두번째 주장은 첫번째 주장과 결과적으로 동일하거나 첫번째 주장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하나 안에 또 하나' 언어는 아바지와 아들을 하나로 통칭하며 독보적으로 친근한 내적 공유관계를 나타낸다. 그 언어는 아버지와 아들의 통일성이 하나님께 받은 예수의 사명에 관한 의지의 통일일 뿐 아니라 예수가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전달하고 아버지의 일을 하도록 하는 말과 행동의 통일이기도 함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런 생각이 요한 복음 서론 자체에서 매우 중요하게 발전하면서 전개된다. 서문은 보다 심오한 신의 자기구분 형태로 끝을 맺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내적 관계를 의미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성(1:18) 그것이다. 서문의 끝부분에서 선포된 하나님 안에서의 사사로운 천성의 내적 공유관계는 복음서가 전개됨에 따라 점차 부연 설명되고 예수가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17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17장은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신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탄원기도다. 이 기도에서 보듯이 신자들의 하나됨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역동적인 과정으로서 종말에 가서야 완성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예수의 기도 마지막에 위치하며 요한복음 서사 구조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형성한다. 이런 배치는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신자들도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요한복음 신학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시사한다.
9. 그렇다면 예수와 아버지의 하나됨과 신자들이 하나됨은 정확히 어떻게 연결되는가? 신자들은 예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요한복음에는 신자들에 대한 것이 "처럼"이란 단어로 예수 혹은 아버지에 대한 것과 연결되어 전자가 후자를 바탕으로 이해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이 그리스도 공동체의 하나됨과 유사함(analogy)을 의미한다. 신자들의 하나됨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과 유사한지를 알려면 우리는 다시 '하나 안에 또 하나' 언어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 언어는 하나됨을 위한 예수의 기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고 신과 인간의 공동체가 서로 닮았다는 것 이상을 말해준다. 사실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가 자신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신자들도 서로 안에 거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신 안에 자신이 아버지 안에 거하는 것 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아버지와 아들 안에) 거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요한복음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하는 내적 공유 관계에서 사랑이 흘러 넘쳣고 그결과 예수도 그 제자들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 때문에 제자들도 예수 및 그 아버지와 '하나 안에 또 하나'라는 친밀한 관계를 공유하게 되었고 세상으로 흘러 넘치는 신의 사랑 때문에 신자들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10. 요한 복음은 이후 수세기 동안 삼위일체 신학을 형성하는데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적어도 한가지 면에서 삼위일체 신학전통은 요한복음 자체의 경계를 넘었다. 비록 요한 복음이 성령이나 보혜사를 충분히 언급하고 성령이 그 고유한 방식에 따라 한 분 하나님의 정체성을 구성한다는 점은 분명하나 요한 복음에서 '하나됨'과 '하나 안에 또 하나'의 언어느 삼위일체적이기 보다 이위일체적인 본문들에 등장한다. 요한 복음은 성령과 아버지 및 아들의 관계를 직접 정의하지 않으며 다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정의할 뿐이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이해하지 않으며 '하나됨'과 '하나 안에 또 하나'라는 언너를 오직 이위일체적으로 사용한다. 다만 신학 전통에서 요한의 이 언어를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세 위격 사이의 관계에 확대 적용한 것은 적절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11. 삼위일체 신학은 20세기 후반에 주목할만한 르네상스를 맞이했는데, 그 주요 신학자들은 판넨베르크, 몰트만, 볼프, 지지울라스, 라쿠나 등이다. 이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적 삼위일체 교리'라고 부르는 것을 공유하면서 기존의 삼위일체 전통과는 매우 다르게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위격들 모두에 집중하고 한 신적 주체에 우선권을 두지 않는다. 그리고 세 위격을 활동하고 관계를 맺는 주체들로 보며 단일한 한 인격체가 세 가지 다른 모습들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상호내주(mutual sindwelling)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공동 천성(perichoresi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세 위격들 사이의 상호관계가 그들을 하나되게 한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들은 삼위일체 안의 관계들이 교회나 정치 사회내의 인간 관계들에 상응한다고 보며 그런 관계들을 모두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회성을 반영한다고 본다. 공동 천성(perichoresis)이란 개념은 요한복음의 '하나 안에 또 하나'라는 개념과 잘 맞는다. 이런 신학자들은 신의 유일성(하나됨)이 삼위일체 위격들 사이의 관계보다 우선하거나 그 관계에 덧붙여진 어떤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관계들이 바로 유일성(하나됨)이라고 봄으로써 서방의 삼위일체 전통을 눈에 띄게 격파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삼위이체론이나 순수한 의지의 도덕적 연합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 인격들은 그들 사이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런 관계들이 그 인격들을 구성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하나' 개념도 이런 방향을 말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됨은 그들 사이의 '하나 안에 또 하나' 관계에서 형성되고 또 이루어진다.
12. 하나님 공동체와 인간 공동체가 상응하는 문제에 관하여 인간 공동체가 따라야 할 모형이 삼위일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전술한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형성되는 인간 공동체를 생각한다. 특히 몰트만은 요한복음 17:21을 자세히 주해하면서 신의 유일성(하나됨)이란 '닫힌 유일성'이 아니라 '넓게 열어 초대하고 통합하는 유일성'이라고 매우 주목할만한 주장을 한다. 볼프는 하나님 공동체와 인간 공동체가 상응한다는 그 유사성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른 위격들에 내주하는 일은 하나님의 배타적 특권이라고 주장한다. 볼프는 어떤 인간도 타인의 자아 속에 흘러 들어가 행동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인간들은 오직 주체들로서 서로 외적으로만 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성령 하나님은 인간들 속에 들어가실 수 있으나 인간들은 성령의 인격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성령 하나님이 인간들 안에 내주하시는 일은 엄밀하게 말해 상호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볼프의 이런 언급은 왜 요한 복음이 '하나 안에 또 하나' 언어를 인간 관계에 적용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만 표현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13.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세상을 향한 아들이 선교의 원천인데 그 목표는 17장 기도의 마지막에 잘 드러난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안에 신자들을 포함시키는 일(요한복음 17:26)은 하나님과 신자들이 '하나 안에 또 하나'의 관계에 들어가는 일로서 이것이 바로 요한복은 구원론의 핵심이다. 결과적으로 신자들의 하나됨은 예수와 아버지의 하나됨을 반영하고 이것은 요한복음 교회론을 여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는 전혀 다른 차원이 있다. 예수는 신자들이 하나가 되어 '세상이 믿게/알게 해 주소서'라고 두 번이나 기도했다. 여기서 '하나' 언어는 정점에 이른다. 서로 사랑하는 신자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장차 올 모든 세상에 증거한다. 이 사상은 예수가 그의 새 계명을 소개하는 13:34-35의 배아 속에서 이미 발생했다. 새 계명의 새로운 점은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 사랑은 요한복음의 용법을 빌자면 서로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공동체에 상응하는 인간 공동체다. 이것의 선교적 측면은 사람들이 예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예수의 제자임을 알리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심오한 차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공동체에 반영되어 그분이 일하고 계심을 세상이 알게하는 것이다. 17장을 끝까지 읽으면 알게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비로서 온전하게 움직이고 그것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내주하여 사랑을 시작하고 그 신령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아들의 선교가 가능해졌으며,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사랑하는 공동체가 창조되어 세상으로 확장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세상을 사랑하라고 직접 명령받지 않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움직임을 따라 함께 움직이므로 그 움직임의 궁극적 목표는 오로지 세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doxa)
2016-11-03 18:53:04
1. '영광'은 신약성서의 어떤 저자보다 요한이 강조하는 용어로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이한 속성을 드러낸다. 그 사랑은 역설적이게도 예수가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운 십자가 형을 받아 비참하게 죽음로 절정에 이르는 사랑이다. 영어 성경이 glory라고 번역하는 영광은 히브리어로는 kabod, 헬라어로는 doxa이다. kabod 에는 세 가지 범주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재산, 힘, 중요함 둘째는 명예, 특권, 명성, 셋째는 가장 중요한 범주로서 '가시적 찬란함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그 영광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상태를 의미한다. 70인역에서 히브리어 kabod는 헬라어 doxa로 번역했는데 그 의미는 바로 '가시적 찬란함'이란 뜻이다.(원래 doxa의 그리스어 본래의 의미는 '의견'이란 뜻인데 70인역에서 doxa의 의미를 명예 또는 명성, 또는 가시적 찬란함이라는 두 가지 범주의 의미로 사용했다.) 요한복음에서 doxa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1:14절인데, 이는 서문의 열쇠로서 말씀이 성육신한 것을 선포하는 부분이다. 이 본문에는 구약성경이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요한복음 서문은 독자들로 하여금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예수 이야기를 읽어내게 하려고 한다. 서문의 첫 다섯 절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도입부분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 다섯 절은 출애굽기의 시내산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요한은 말씀이 육화된 예수 그리스도를 시내산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로서 소개하는데 이는 시내산 언약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는 영광은 질적인 면에서 시내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훨씬 능가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들을 수 있던 말씀이 볼 수 있는 육체로 가시화되었다는 의미다. 이때부터 말씀은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볼 수 있게 된다. 구약에서는 누구도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지만 이제 하나님이 사람의 육체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예수를 본 자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이 구름에 가려있었지만 이제는 가시회된 육체로 드러난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예언하여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사40:5)고 하였다.
2. 그런데 육신이 되신 말씀은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이 구절은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 백성의 삶 가운데 현존하시던 하나님의 은혜를 메아리치게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로 가시화된 하나님의 영광은 그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장막(성막)이다. 요한은 우리가 그 영광을 보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육안으로 예수의 육신을 목격한 증인들로서의 제자들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점이다. 엄밀하게 중요한 것은 바로 육체를 통해 나타난 그 영광의 가시성이다. 그런데 그들이 본 그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이 구절은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얼핏 보았을 때 선포된 그 유명한 신적 속성에 대한 묘사를 반영한다. "주로다, 주로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신실한 사랑과 신실함이 충만한 하나님이로라(출34:6)" 요한 복음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표현은 "신실한 사랑과 신실함이 충만하다"는 히브리어 성경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그리스어 표현이다. 이어서 요한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율법을 은혜와 진리와 대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율법을 통해 나타났던 그 은혜와 진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는 의미다. 구약에서 율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와 진리가 예수를 통하여 활성화되고 예수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말씀들을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상연하기도 한다. 서문의 결론은 이렇게 끝난다. "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구약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했으며 아무도 하나님이 그 얼굴의 거룩한 찬란함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다. 오로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 가까이 있었고 오직 그만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을 드러내는 그 얼굴을 바라보고 오로지 그만이 하나님을 주석해낸 것이다. 여기서 요한은 오로지 완전하고 유일하신 한 분만이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하나님을 묘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인데, 여기서 말하는 묘사란 다름 아닌 예수의 사랑과 죽음이다.
3. 요한은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12:41)고 말한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은 요한복음 12:40(사6:10 인용)과 12:38(사53:1 인용) 모두를 가리킨다. 여기서 요한은 이사야 6장의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에 대한 환상과 52-53장의 고난받고 높임받는 그 종에 대한 예언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다. 70인역은 이 두 본문을 각각 주의 "영광"과 그 종이 "영광받게" 되리라고 번역한다. 요한은 예수의 굴욕적 죽음과 이어지는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예수의 "높이 들림(영광)"을 묘사한다. 이런 방식이야말로 놀랍고도 독특한 요한의 주석 기법이다. 가장 비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예수의 치욕은 역설적으로 예수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의 사역에서 계시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기적들이며, 그래서 요한은 이 기적들을 (영광을 드러내는 기적들)이란 의미로 "표적들"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 모든 표적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자신의 영광, 곧 예수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틀림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계시라는 것이 그 자체로는 분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표적들이 중요하다. 각 표적들은 예수에 대하여 그리고 예수가 주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한다. 그 모든 기적들은 예수가 나중에 실제로 주게될 영원한 생명에 관한 표적들이다. 그러므로 표적들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뜻한다. 표적들은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가시적 사건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현존함을 암시한다. 요한복음에는 영광을 받고, 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곳이 몇 군데 나타나는데(5:41; 5:44; 7:18; 8:50; 8:54; 12:43) 여기서 영광은 명예 또는 칭찬을 뜻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본문들에서 유대 지도자들은 오직 자신들의 영광(명성)에만 관심이 있지만 예수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명예)를 드높이려 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자신의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했고, 이것은 사람들에게는 불명예스럽고 비천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일은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한 자기 비하의 길이었다.
4. 요한복음 전체 이야기는 소위 '예수의 사건들"(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 그리고 승귀)을 향하여 치닫는다. 특별히 십자가는 하나님이 예수에게 명하신 일의 정점이요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예수의 삶의 정점이다. 그 시간은 예수의 육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조로 계시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바로 정점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요한은 동사 doxazo(영광스럽게 하다)를 활용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죽음심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일을 완수함으로써 아버지의 영광을 드높인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를 죽음 너머 하늘로 드높여 아들의 정당성을 인정하신다. 아들이 아버지와 영원히 공유하는 하늘의 영광은 베일에 가려진 채 지상에서 살아있는 예수로 나타났으므로, 수난 이야기에서 그 영광은 십자가에 가려진 모양으로 보였으나, 그 이후에는 예수가 다시 하나님의 현존으로 돌아감으로써 가려지지 않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공유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다시금 요한 신학에서 예수의 육체와 그것의 가시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요한은 당시의 십자가 형의 참혹함과 고통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요한은 예수의 죽음을 그의 승귀와 영화로 재해석한다. 예수의 부활 사건은 요한복음의 일곱가지 표적들 가운데 마지막 일곱번 째 표적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표적들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표적도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한다. 그러나 그 마지막 표적은 최후의 정점을 찍는 표적으로서 이전의 여섯 가지 표적들이 지향하고 있던 바로 그 표적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서 육신을 입은 상태로 할 수 있는 극한치의 계시로 드러나기 위해 부활이 꼭 필요했던 것처럼 십자가 역사 그러하다. 부활의 빛으로 바라보는 예수의 수모와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의 극한까지 계시한다. 그 사건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hesed)을 극한까지 표현한다. 그 사랑(hesed)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귀로 들었으나 이제 골고다에서 드어난 육체로 표현된 하나님의 속성이다. 십자가의 역설은 모욕을 당함으로써 드러나는 영광(명예)이요 찢겨 상함과 죽음을 통해 볼 수 있게 드러나는 영광(찬란함)이다. 십자가의 역설은 그 역설을 가능하게 한 하나님의 그 사랑의 신비를 우리로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의 이원론
2016-11-24 17:34:30
1. 불트만은 신약성경 중에서 요한복음이 그리스도가 전한 소식의 본질적 핵심과 특징인 초기 기독교 운동의 케리그마를 가장 명확하게 파악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요한복음 저자는 케리그마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탈신화화"를 이미 상당부분 수행했다는 것이다. 불트만은 계시자(Revealer)에 대한 영지주의 신화가 요한복음 배후에 있다고 보면서, 그것이 요한 문헌이 초기 기독교의다른 주요 신학적 경향들과 다른 이유라고 주장한다. 또한 불트만은 요한복음을 실존주의 철학의 틀로 해석하여 요한복음의 케리그마를 신화나 교리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대한 언명으로 이해했다. 불트만은 요한복음 저자가 영지주의 신화를 틀로 삼아 기독교 케리그마를 인간의 새로운 실존 가능성을 알리는 본질적이고 급진적인 도전으로 제시했다고 본 것이다. 불트만은 요한 복음에 인간의 두 범주들이 외적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소들이 많은 이유는 요한복음이 영지주의 신화에서 그 언어를 가자왔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요한복음이 사용한 영지주의 언어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이 아니라 실존주의적인 "결단의 이원론" 이라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트만은 요한복음의 케리그마를 헬레니즘 종교세계에서 끌어내지 않고도 요한복음의 구원에 관한 다양한 표현들을 설명했다.
2. 불트만의 요한해석은 많은 인정을 받았고 특별히 요한의 이원론이 기능하는 방식을 "결단의 이원론"으로 설명한 것은 중요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요한 복음이 영지주의 신화에 의존한다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 거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쿰란 문서들의 등장으로 인해 오늘날 학자들은 영지주의에 영향을 받지 않은 유대교 형태들이 요한복음의 유일한 배경으로 널리 인정하고 있다. 또한 불트만이 다른 초기 기독교 사상들과 요한복음 신학의 차이를 지니치게 과장했다고 비핀하는 학자들도 많다. 특히 불트만이 실존주의적 해석틀을 사용해 요한복음의 케리그마를 인간들에게 주도면밀하게 신앙을 촉구하는 신의 말씀에 배타적으로 집중한 것은 환원주의적이며 신학을 실존론적 자각으로 축소시킨 것이라고 비난받는다. 오늘날 대다수 요한 학자들은 쿰란 문서야말로 불트만이 상상한 요한복음의 영지주의적 배경을 대체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요한 문서의 배경들을 1세기 유대교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쿰란 자료들을 직접 사용했다기 보다는 성경이나 제2성전기 후기 문헌에서 온 다른 자료들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요한이 두드러지게 사용하는 빛/어두움의 형상화에 대한 더 적절한 선례가 큼란 문서들이 아닌 다른 유대문헌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쿰란의 이원론에는 기독론적이고 구원론적 요소가 전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불트만이 상정했던 영지주의적 배경의 자리를 쿰란 문서가 메꿀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3. 요한복음 해석에서 이원론이란 용어는 유대교 및 기독교 문헌에 나타나는 "선과 악의 양극화"에 대한 다양한 유형들로서 서로 반대되는 두 범주가 아니라 서로 대조적인 두 범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유대교와 기독교 일신론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이 악에 의해 어느정도 타락했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이원론(하나님과 악)과 이중성(하나님과 피조물)을 관련지으면서도 구별한다. 피조물과 악이 동일시된다면 구원이란 말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서 이원론과 이중성은 조심스럽게 구별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서 하늘과 땅, 위와 아래라는 공간적 대조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대조를 반영한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은 육체(살)와 성령, 죽을 목숨과 영원한 생명의 대조를 위한 토대인데 이런 대조야말로 요한복음의 구원론에 필수적이다. 이런 대조는 구세주를 받아들이는냐 마느냐에 따라 초래되는 구원론적 이원론 및 선악 사이의 윤리적 이원론과 연관이 된다. 죽음은 창조된 생명의 자연적 운명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가져오는 구세주를 거부한 자들이 맞이하는 운명으로 묘사된다. 그러므로 요한이 주로 사용하는 "세상"은 윤리적 이원론과 구원론적 이원론을 표현하는 주요 용어로서, 예수를 거부한 자들은 "세상에서 난" 사람들인 반면에 그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선택된" 사람들로 묘사된다. 예수가 구원하러 온 세상은 하나님의 선한 피조물일 뿐만 아니라 악에 굴복한 피조물로서 구원이 필요한 대상이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구원론을 이해하려면 이원론과 이중성이란 두 범주가 합해지면서도 구분되어야 한다.
4.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다양한 이원론들과 이중성들을 함께 이어주는 것은 바로 구원론이다. 요한복음은 무언가 두드러지는 것을 항상 구분만 하려고 하나의 실제 세상을 다른 세상과 대립시키지 않는다. 요한복음 이원론의 두드러지는 특성은 그것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역동적 이원론이라는 점이다. 요한에게 이런 이원론이야 말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사멸하는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을 구원하는지를 본질적으로 그려내는 틀이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이원론적 표현 방식이 빛과 어둠의 대립, 그리고 예수와 세상의 대립이다. 요한 복음에서 빛과 어둠의 심상은 영원한 갈등 관계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빛에 의해 영감을 받아 혁신적인 종말론적 모습을 띠게 된다. 그것은 어둠에 있는 세상에 빛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어둠이 잠식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빛으로 나올 것인지 어둠에 머무를 것인지 선택하도록 촉구한다. 이것이 바로 불트만이 "결단의 이원론"이라고 표현한 실존론적 통찰이다. 반면에 "세상" 이란 용어로 나타나는 이원론적 묘사들은 빛과 어둠의 심상을 사용하는 표현들과는 다르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비록 죄를 지었고 구원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은 예수와 완전한 대립 관계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요한은 세상이 예수를 대적하는 것은 세상의 통치자가 예수가 수행하는 구원사역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여기서 다시 "역동적인 이원론"이 확인된다. 요한에서 이원론은 영원히 고정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신의 종말론적 개입으로 발생하여 그것과 더불어 변화한다. 그래서 요한 복음 서문에서 세상과 예수의 대립은 희미하게 묘사(1:10)되다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점차로 뚜렷하게 드러나다가 12장 이후에는 사라진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14-16장)이나 예수의 기도 장면(17장)에서 빛/어둠의 이원론은 사라지면서 예수/세상의 이원론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옴으로써 세상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위로부터 태어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오신 분을 거부함으로써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세상이다. 이렇게 요한 복음에 나타난 빛/어둠이란 심상과 예수/세상이라는 두 가지 이원론적 심상들은 이율반적으로 서로 다르게 기능한다. 전자가 "결단의 이원론"으로서 세상에 도래한 빛 안에서 살라고 사람들을 초대한다면 후자는 "대립의 이원론"으로서 예수를 거부한 사람들과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그려낸다. 전자는 1-12장에서 지배적이고 후자는 14-18장에서 지배적으로 등장한다. "대립의 이원론"은 아들의 구원 사역의 결과이기도 하며 "결단의 이원론"의 결과이기도 하다.
십자가,부활, 昇貴
성경신학/복음서
2016-11-10 14:49:29
요한 신학 전체는 예수의 죽음-부할-승귀라는 주제에 온통 집중한다. 그래서 요한의 서사는 "예수의 때"를 향해 멈추지 않고 진행한다. 요한이 예수의 죽음-부활- 승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자료들은 예수의 체포, 재판들, 십자가형, 매장, 부활 현현 등의 내용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다양하게 암시되고 있다.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과 달리 예수의 이야기를 죽음-부활-승귀의 순서로 나열하지 않고, 죽음-부활 내지는 죽음-승귀 식으로 둘씩만 다른다. 이런 이중 구조에서 부활은 예수가 다시 생명을 얻고 다시 그 제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고 승귀는 예수가 아버지께 "돌아가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주제는 예수가 제자들을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그가 사랑한 사람들을 위하여 치를 수 있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룬 사랑의 행위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새 계명은 바로 예수의 이 사랑의 행위의 골자를 이룬다. 이 새 계명은 타인에 대한 모든 의무를 요약한 것이고 공관복음이 요약한 계명들과 달리 예수의 죽음으로 선명하게 채색되어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제자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실천한다는 내용은 10장에서 처음 암시된다. 10장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이야기(11장)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고난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필요한 배경을 제공한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10:11),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0:17) 10장의 이 두 구절은 예수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어 놓는다는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예수의 이런 의도는 11장에서 나사로를 일으키는 이야기에서 실제로 시작된다. 나사로 사건은 예수의 죽음을 초래하는 직접적 원인으로서 이 사건때문에 예수가 명성을 얻게 되자, 대제사장과 공회는 가능한 신속하게 예수를 죽이기로 결안하게 된다.(11:45-53) 예수는 자신이 나사로를 살리는 그 사랑의 행위가 자신의 죽음까지 초래할 것을 알고 있었다. 요한은 나사로 이야기를 통해 예수가 자신의 친구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가도록 줄거리를 이끌어 간다. 예수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친구들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비로소 얻게될 영생을 예시하는 하나의 표적이다. 나사로 이야기는 요한 복음 서사의 전환점으로서 이 때를 기점으로 예수의 사역의 대상이 일반사람들에서 "자기사람들"로 바뀐다.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eis telos) 사랑하시니라"(13:1)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이 묘사하는 최후의 만찬에 성찬식 거행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수수께끼다. 요한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보인 상징적 행위를 공관복음과 다르게 기술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두른 사건으로 예견한다. 그것은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 사건인데, 이것은 예수가 사랑하는 친구들을 위하여 종이나 버림받은 자처럼 가장 비천하게 죽게 된다는 사실을 예견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요한은 에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말을 여러번 반복한다.(2:22; 12:16; 20:9) 요한은 친구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 이야기를 창세 전 영원부터(1:1) 장차 예수가 돌아와 창조를 완전하게 성취할 때까지(12:22-23) 이어지는 위대한 서사의 한 가운데 배치한다. 그것은 "창세전부터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의 이야기이며(17:24), 세상을 사랑한 하나님의 이야기로서 그 사랑이 너무 커서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그 아들을 주시고(3:16), 그 아들은 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준 이야기다(6:51) 이런 식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우리가 만나는 예수는 그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을 살아내고, 세상을 향한 신의 계획을 완수하는 분에 불과한 예수일 수는 없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 사람의 육체로 오신 예수가 육체를 가진 특정인들을 가까이서 사랑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님의 사랑은 친구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을 통하여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형태로 표현됨으로써 온 세상을 껴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점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으로 육화한 분으로 예수를 소개하는 요한복음 서사에서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이런 면을 요한복음의 예수를 인간으로보다는 하나님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부분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람은 친구들을 향한 전적으로 인간적인 예수의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의 모양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말씀이 육체가 되어... 은헤가 충만하게 된 것이다."(1:4)
그러나 자기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이란 주제 자체는 왜 그가 그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했는지, 그리하여 그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주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의 죽음은 그가 할 수 밖에 없었던 어떤 것, 그가 해야만 하는 가장 중요한 어떤 것으로서, 그 이전의 사역은 그것을 위한 준비단계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사로 이야기에서 암시되었듯이 요한 복음은 예수가 다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하여 죽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하여 하심이라"(3:16) 이는 예수의 죽음이 생명을 준다는 이상하고 역설적인 말씀이다. 물론 이것은 예수가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복음서들에서 부활 현현 이야기들은 예수가 단순히 죽음의 일반적인 관문을 통과하여 사후불멸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가 죽음을 무효화시켰다고 말한다. 예수가 육체가 되어(1:4) 자기 육체를 죽음에 내어주고 세상을 구원했기 때문에(6:51) 육체를 가진 예수라는 사람이 부활한 것이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예수가 죽고 부활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육체를 가진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요한은 "영원한 생명"( 혹은 생명)이라는 말을 다른 복음서에서 나오는 "하나님나라" 와 같은 의미로 미묘하게 사용한다. 이런 현상은 요한복음 서사의 강조점이 인간사회의 모든 차원을 통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인간생명 갱신이라는 주제에서 좀 더 엄밀한 의미의 영적 주제로 바뀐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은 지상의 행복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그 몸의 실체를 완전하게 유지하는 형태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이 몸이 고양되어 죽음이 닿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생명의 형태를 갖게 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의 순서는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것은 삶 전체를 갱신하여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잘못된 것을 바로잡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생명이 완전하게 구현할 수 없었던 온갖 방식으로 생명을 치유하고 개혁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서 생명은 관계적으로 이해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17:3) 아버지와 아들의 영원한 생명은 사랑을 통한 영원한 교통으로 지속되며, 예수가 주는 영원한 생명은 그 하나님의 교통하심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속성이 볼 수 있게 계시되는 것으로서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보게되었을 바로 그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대신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을 귀로 들었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요한 복음은 예수와 모세가 다르다는 사실을 암암리에 부각시킨다.(1:14-18) 이제는 아버지의 영광을 독점적으로 공유하는 영원한 아들이 인간의 육체로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예수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1:14) 표현은 하나님의 속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모세가 들었던 말이다. 모세가 귀로 들었던 하나님의 속성인 은혜와 진리(출34:6 ; 인자와 진실이 많은)가 이제는 예수 안에서 육체로 가시화되어 나타난 것이다.예수는 표적들을 통해 특히 표적의 절정인 그의 죽음-승귀를 통해 자신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 요한은 이사야 52:13을 읽을 때, 그 종이 고통스럽고 비천한 죽음을 당한 다음에 승귀한다고 읽지 않고 전체 이야기를 하나의 승귀 이야기로 해석한다. 이런 해석학적 기초위에 요한은 "높이 올리다(hypsoo)"라는 동사를 예수의 죽음을 뜻하는 것으로 암시하면서(3:14; 8:28; 12:32), 예수의 몸이 땅에서 십자가 위로 높이 들리는 것과(12:32-33) 그가 하늘로 승귀하여 아버지께로 되돌아가 그의 영광을 함께 누리는 것을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유사하게 요한은 "영광스럽게 하다"라는 단어를 이사야 52:13에서와 같이 사용하여, 단순히 예수의 수난과 죽음 다음에 이어지는 영광보다는 "예수의 때"에 일어나는 사건 전체로서 수난과 하늘로의 승귀 모두를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하늘에서 예수가 드러낼 영광이라는 빛으로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이것이야 말로 요한이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로 특별히 말하고자하는 뜻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외 진리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사건으로서의 십자가는 그분이 누구이신가에 관한 극명한 계시이기도 하다. 모세가 보지못하고 듣기만 했던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의 비참한 고톧과 죽음의 길에서 실제로 보이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거짓과 반대되는 진실을 뜻할 수도 있으나 "임시방편"적인 것과 반대되는 "실제"라는 의미도 있다. 예수는 참(진리)의 빛, 하늘에서 내려온 참 떡, 그리고 참 포도나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부활/승귀에 대한 요한의 이해를 밝혀주는 "진리"의 의미를 알게 되면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성경을 "성취하고자 한" 많은 길들을 알게 된다. 예수는 새 출애굽을 위한 참 유월절 양(1:29; 19:33,36)이며, 생수의 강이 흘러 나오는 메시아 시대의 참 성전(7:38; 19:34; 21:11)이며, 다윗의 시편들이 노래한 참 의의 왕이며(13:18; 19:24, 28, 36) 참 야곱의 사다리로서 하늘까지 닿은 십자가에 오르셨다.(1:51)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성경을 성취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신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진리임을 증명하신다. 요한복음 서문이 "은혜외 진리가 충만한 "분으로서 육화된 분을 소개할 때(1:14), "인자와 진실(emet)"이 많은 분이라고 묘사한 하나님의 속성(출34:6)을 메아리치게 한다. 히브리어 emet은 70인역에서 종종 aletheia(진리)로 변역되는데 이는 신실함, 실제성, 신뢰할만 함, 진리 등을 뜻하고 자주 하나님께 적용된다. 요한복음이 사용하는 aletheia(1:14; 진리)가 "신실하심"이란 뜻을 담고 있다면 이는 요한이 예수를 성경의 성취로 묘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으로서 당신의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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