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개념으로서의 현대성- 브루스 L. 맥코믹
2016-10-25 18:09:07
1. 현대 신학은 신학자들이 과거로부터 계승한 정통주의적 교리들을 변호하는 시도를 멈추었던 지점에서 등장했다. 이 시점은 정통주의적 교리들에 내재된 신학적 가치들을 어떻게 전적으로 새로운 표현으로 제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에 성찰을 위한 새로운 범주들의 옷을 입힐 수 있을가라는 질문이 보다 근본적이고 도전적으로 제기되던 때였다. 이 시점은 교회의 영역을 떠받치는 토대가 적응이라는 전략으로부터 중재라는 과제로 전화된 때를 의미한다. 또한 이 시기는 신학적 과제와 관련된 철학이 우주론에 기초를 둔 신적 형이상학에서 인간학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으로 변화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장구한 신학의 역사 속에서 각 시대들은 각각의 신학적 질문과 관심사를 갖고 있었다. 초기 교회는 삼위일체와 기독론에 관심을 가졌다면 중세 초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론에 영향을 받아 구원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중세 중기는 성례전 신학이 발전하였다. 이어서 종교개혁 시대가 중심으로 삼은 것은 칭의론이었다. 이제 현대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하나님의 본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현대의 핵심적인 신학적 질문은 창조, 하나님의 존재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 그리고 계시의 영역에서 기본적인 결정을 초래했으며, 이 기본적인 결정이 신학의 현대성을 특징짓는 계기가 되었다.
2. 코페르니쿠스(1473-1543)이후 교회의 신학과 자유로운 과학탐구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안드레아스 오시안더(1498-1552)는 양자의 평화로운 공존을 가능하게 할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그는 천문학자들의 작업이 단지 가설적이며 사물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과학자들의 발견은 존재의 질서가 아니라 인식의 질서일 뿐이라는 주장) 함으로써 과학자들이 교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했다. 그러나 후대의 천문학자인 케플러(1571-1630)는 자신들의 가설이 사실이며 어떤 기술적인 구성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즉 인식질서가 존재의 질서와 일치한다는 믿음) 그래서 케플러는 교회와 자연과학 사이에 합의된 평화에 대해 오시안더와는 다른 기초를 제시했다. 그는 성서는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인간적인 방식으로 말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일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고차원적이고 신적인 계시를 그 시대에 파악될 수 있는 수준으로 맞추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케플러는 성령이 여호수아에게 '태양아 멈추어라'라고 명령하라는 영감을 주신 것은 그분이 공간 안에서 운동하는 천체들의 실상을 여호수아에게 가르치려고 의도하신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령께서 비난을 받으실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케플러의 이런 설명은 분명히 적응의 개념(유한이 무한을 인식할 수 없으므로 무한이 유한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고 적응한다는 의미,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뱅은 모두 창세기의 6일 창조 기사를 이 적응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에 해당했다. 케플러의 의도는 성경의 권위를 유지하면서도 과학적 탐구에 필요한 공간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이 성경 주해를 다소간 통제하고 있음을 의미했으며 마침내 현대신학을 태동하는 지적인 조건을 마련했던 의미 심장한 양보였다.
3. 성서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우주론은 마침내 우주의 현상을 중력이라는 단일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뉴턴(1642-1727)의 주장을 통해 잠재워졌고 이후 한 세기 동안 신학이 자연과학에 관여할 수 있는 어떤 발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학자들은 과학적인 설명 안에서 간격(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 즉 신학으로만 설명되는 부분)을 발견하려고 애썼지만 과학의 발전으로 그 간격은 점차 줄어들었다. 최종적으로 (적응에서 중재로의 이동이라는) 사태를 진척시킨 것은 철학적 인식론의 영역에서 칸트(1724-1804)가 이룬 작업이었다. 그는 인간의 지식에 내용을 제공하는 것은 감각이며 인간의 지성은 형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칸트는 어떤 관찰자도 없었던 때의 일들을 증언하는 창세기 1장의 본문은 학적인 형이상학에 근거한 것이 아닌 안티노미(이율배반)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이 과학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칸트를 극복하기 위하여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창세기 1장이 과학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바른 빛에서 살펴보면 그것은 창조론이라는 신학적 가치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창세기 1장을 과학이라는 특수한 문제의 해석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신학자들이 기독교 교리의 내용 전체를 관통하여 숙고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도구로 해석했다. 그는 이렇게 이해되는 '실질적인 원리'는 그 자체로 기독교인들이 구속의 경험으로 삼는 지성과 심성의 움직임에 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의 좌소를 이성에서 감정으로 이동시켰다. 나아가 그는 계시의 원천을 성서나 교회 전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경험으로 보았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1장은 다른 교리들이 연역되어 나오는 최초의 선험적인(a priori) 원리가 아니라 어떻게 교리가 생겨나고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후험적인(a posteriori) 설명이라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교육적이고 비판적인 규범, 즉 후험적인 원리를 통해 창조신학을 제한하여 자연과학과의 갈등을 피했을뿐만 아니라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길을 발견했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신학의 주요 흐름의 기초가 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실질적 규범의 용도가 교육적 도구와 비판적 원리 모두라는 사실이다. 이 두 원리는 전통적인 교리들을 현대성의 조건 아래서 '중재'하는데 기여했다. 우리가 현대신학의 출현을 포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적응'에서 '중재'로의 움직임이다. 이 움직임이 창조신학의 분야에서 처음 발생한 것은 역사적 우연이었지만 일단 발생하고 나자 그것은(적응에서 중재로의 이동) 이후 현대신학을 건립하는데 근본적인 것이 되었다.
5. 철학적 신학의 영역에서 현대성을 마주하는 일은 칸트의 인식론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부과했던 도전을 전제한다. 칸트는 지식은 오성(understanding)의 범주들을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자료들에 적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적 주체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다만 사물이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일뿐임을 의미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 주체는 사물의 참된 존재인 물자체(things in themselves)를 알지 못하며 그 결과 인간적 인식주체와 실제로 존재하는 인식 대상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인식론적 틈이 존재한다. 칸트는 순수(이론)이성 비판에서 순수이성의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인간이 이성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칸트는 순수이성으로 하나님은 알려질 수 없지만 실천이성은 인간의 도덕적인 삶을 위해 신을 요청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알려질 수 없다면 세계라는 개념은 최종적으로 인간적 상상력의 구성물에 불과하게 된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서 칸트는 우주론적 기반의 형이상학을 인간론적 기반의 형이상학으로 전환시키는데 필요한 조건들을 형성했다.
6. 칸트 이후 독일의 관념론자들은 칸트가 만든 인식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들은 양자(주체와 객체)가 함께 출현하는 무조건적 근거, 즉 동일성(identity)이 발생하는 지점이 존재한다고 설정함으로써 이 분열을 극복하려고 했는데 헤겔(1770-1831)이 그 대표적인 철학자였다.(헤겔은 슐라이어마허와 동연배 인물인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칸트를 나름대로 극복하려는 시도속에서 자신의 철학과 신학을 전개했다.) 헤겔은 세계사를 신적인 자기 지식의 역사로 설명하면서 신은 온전한 자기 지식에 이르기 위해 자신 자신으로부터 밖으로 나와야 하며 자신 안에 자신과 다른 한 존재 양태를 설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신의 이와 같은 자기 설정의 행동은 '소외'를 초래하는데, 화해가 발생하려면 무한한 주체(신)와 유한한 세계가 함께 속하는 존재가 계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신과 인간의 암묵적인 통일성이 명시적으로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신의 자기 계시는 나사렛 예수 안에서 발생하며 그 한 인간 안에서 소외가 화해로 전환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전환 안에서 신과 인간의 시원적인 동일성이 시간 안에서 알려짐으로 인간이 신을 아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와같은 사고 체계의 핵심은 신이 자신에 대한 인간적 지식 안에서 그리고 그 지식을 통해 신 자신에 대한 완전한 지식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이렇게 헤겔에게 신과 인간, 나아가 신과 세계 사이에는 깊숙히 자리잡은 존재적 연결이 있다.
7. 헤겔이 오늘날까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지니는 매력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헤겔은 칸트의 불가지론을 극복하여 신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려질 수 있다고 보았다. 헤겔은 슐리이어머허가 종교의 뿌리를 감정에 둠으로써 확보하고자 했던 종교의 독립성을 비합리성을 향한 걸음으로 보았다. 둘째, 헤겔은 존재의 궁극적 근거(신을 의미)를 자연과 역사에 둠으로써 자연과학을 철학에 복속시키는 방법을 발견했다. 실재의 궁극적 근거에 대한 지식은 오직 그 실재 자체 안에서만, 그 실재의 자기 수여(self-giving)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이 세계 내에서 인식했다고 생각하는 질서로부터 제1원인까지 소급하여 추론할 수 없으며 그 추론은 반드시 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함을 의미한다. 셋째, 헤결의 철학은 강한 신정론을 위한 기초를 제공한다. 유한의 무한으로의 止揚(Aufhebung)이라는 헤겔의 개념은 신이 유한의 가장 극단적인 한계(죽음)를 자신의 존재로 취하고 그곳에서 죽음을 정복하는 행동에서 목표에 도달한다. 이것은 악의 문제에 대한 강력한 해결책을 제공한다. 이것은 하나님은 단지 인간과 공감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 인간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위협을 직접 자신이 취하시고 그것을 자신 안에서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헤결에게 신은 멀리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의 상황 안으로 들어오시며 그것을 내부로 부터 변화시킨다. 슐라이어머허는 고전적 유신론을 따라 하나님의 고난당할 수 없음과 하나님 안의 완전한 단순성을 확신했지만 헤결은 그렇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헤겔의 신 개념은 한가지 결정적인 점에서 슐리이어마허를 넘어서는 커다란 발걸음을 내디뎠다. 헤겔이후 현대신학자들은 대체로 고전적인 유신론에 작별을 고했다.
8.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1928-2014)는 현대 신학의 여명기에 계시 개념에 두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첫째 변화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한 하나님의 현시에 기초한 외적 계시(객관적인 것)와 성서의 증인들이 그 사건들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결과로서의 영감(주관적인 것) 사이를 구분한 것이다.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사이의 이런 구별은 역사비평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냈고 결국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1808-1874)와 같은 성서비평 학자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다. 둘째 변화는 영감과 구별되는 역사적인 계시를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가 되실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계시의 배타적 내용과 주제도 되신다는 개념과 연결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역사적 계시를 통해 단순히 정보를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의 주체인 동시에 계시의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 안에서 행동하는 동시에 그분 자신이 바로 그 행동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존재는 계시의 행동 가운데 있는 존재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존재가 '자기 구별과 화해'의 역사적 과정 안에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다(constituted)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헤겔은 신이 시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발생하는 신의 생성(becoming)이 신 자신에게 필수적이라고 이해했다. 현대신학에서 이렇게 계시를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이해하는 것은 성서를 계시에 대한 증언, 즉 부차적이고 파생적 의미의 계시로 이해하는 것이다. 또한 현대 신학에서는 성서 저자들이 단순히 신적인 도구였다는 생각도 부정되었다. 이 두번째 변화의 최종적 결과는 첫번째 변화의 결과와 동일하게 성서 연구에 대한 비평적인 접근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이 두가지 변화는 장기적으로(하나님의 자기계시로서의) 기독론에 큰 관심을 갖게 만들어 기독론이 현대 신학의 기초적인 결정 영역이 되도록 만들었다. 특히 칼 바르트(1886-1968)의 '기독론적 집중'은 20세기 후반의 현대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로마카톨릭의 공식적인 신학에도 반향을 일으켰다.
9. 현대 신학을 탄생시킨 이상의 결정적 계기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현대 신학이 가진 성격을 잠정적이나마 다음 세 가지로 요악할 수 있다. 첫째 현대신학자들은 모두 '중재' 또는' 사변'에 기꺼이 참여한다. 만일 자연과학이 기독교 신학에 제기하는 문제들을 모두 폐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그들은 그렇게 해야만 했다. 둘째, 현대신학자들은 고전적인 유신론을 뒷전으로 밀어버린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구체화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를 하나님의 자기 결정의 결과로 본다. 셋째, 현대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자기계시를 "계시" 자체로 이해한다. 이때 성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의 사건을 증언하는 범주로 이해된다. 따라서 현대신학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서비평학의 작업을 원칙적으로 승인한다.
신학적 개념으로서의 현대성- 김진혁
2016-09-22 17:30:58
신학적 개념으로서의 현대성
브루스 맥코믹이 그린 신학의 지형도를 중심으로
1. 현대라는 용어
a .현대(modernus)라는 용어는 5세기 이교도의 과거와 구별과는 로마의 새로운 시대를 지칭하고자 사용됨
b. 14세기 기존의 존재론에 도전하는 유명론을 윌리엄 오캄은 via moderna 라고 표현
c.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18-19세기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의 새 시대적 정서를 das eigentiumilche Moderne 라고 지칭함
d. 따라서 modern을 근대적 혹은 현대적으로 번역하는냐는 단순히 시대 구분 이상의 중요성을 갖는다.
2. '분열의 틈' 사이에서 ; 현대성이 기독교 신학에 가져온 긴장
a. 과학과 지리학의 발전은 이중 진리(동일한 진리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진술한다는 것)의 문제에 도전-성서 비평의 길을 열다.
b. 데카르트적 인식 주체; 권위와 이성 사이의 간격, 명석판명한 지식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의심
c. 경험주의의 도전; 실체/본질과 감각/경험 사이의 간격- 종교는 진리가 아닌 신념 문제가 됨
d. 하버마스는 칸트의 구분과 헤겔의 화해가 현대성을 이해하고 규정하는 두 기둥이라고 말함
3. 부르스 맥코믹이 이해한 신학적 현대성; 초월성/내재성의 값싼 신화로부터 탈피
맥코믹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적 개념으로서 현대성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독일 지성사의 궤적 속에서 현대 신학에 영향을 미친 3가지 결정적 계기로 현대성을 이해함
a. 슐리이어마허 ; 적응에서 중재로; 슐라이어마허는 교육적(결론이 있는게 아니라 찾아가는 과정으로)이고 비판적 규범으로 창조론을 재해석, 형식적 원리(formal principle)가 아닌 내용적 원리(material principle)를 통해 신학을 재구성(폴 틸리히)
b. 헤겔 ;세계와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존재 ; 칸트를 극복하려는 헤겔에 의해 신-세계의 관계를 재정의; 세계 창조는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다. 신은 자기 실현을 위해 세계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창조에 대한 새로운 목적론으로서 자연/역사와 신의 유기적 관계를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음. 신학의 출발점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세계.
c. 바르트; 정보 전달이 아닌 자기계시로서의 계시 ; 칸트와 헤겔이 던져놓은 도전애 대한 바르트적 답변. 바르트는 성서는 계시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라고 주장. 이것은 성서의 인간성을 허용하고 신학의 인간화를 정당화함.-그 결과 신학/성서/그리스도 사이에 존재론적/인식론적 간격이 유지됨.
4. 결론
a. 맥코믹의 기획은 현대성의 성찰과 그 결과에 따라 현대 신학을 서술한 독보적 시도로 평가됨
그러나 맥코믹의 기획이 현대성의 양 측명인 초월/내재의 치열한 고민을 반영하는지는 의문
b 맥코믹이 말한 현대성의 결정적 계기 3가지는 오히려 폭 좁은 지형도를 형성할 위험도 있다.
왜냐하면 현대신학이 바르트에서 끝난 것처럼 상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신학이 20세기 중반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바르트 이후 신학은 무엇인가?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현대성 고민이 더 바람직하다.
c. 현대신학은 국가적 폭력 문제를 다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바르멘 선언(근대국가의 폭력성을 고발한)이 언급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d. 현대 신학을 논하면서 교리의 언어, 공동체적 해석학을 제시한 비르켄슈타인의 영향도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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