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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속성- 스티븐.R. 홈즈

하나님의 속성- 스티븐.R. 홈즈

2016-10-31 14:31:08


 

1.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 질문은 신적 속성에 관한 많은 설명을 불러일으켰다.1 고전적인 신적 속성의 목록은 선하심, 사랑, 전능, 영원 등 많은 용어를 포함한다. 하나님의 속성론은 그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유명론과 실재론 논쟁이2 바로 이 교리에 대한 것이었다. 종교개혁과 이어진 종교전쟁 와중에 이 논쟁은 옆으로 밀렸지만 이 논쟁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로마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신학자들의 정통주의적-스콜라적인 체계 안에서는 대체로 신적 속성의 진술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는 이전 전통에서 이미 제시된 해결책 즉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과 동일하다는 하나님의 단순성(simplicity)의 교리로 문서화된 토마스주의적 주장이었다. 이렇게 합의된 신적 속성의 교리의 핵심은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존재/생명에 본질적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고전적 종합에 가해진 첫 번째 일격은 18세기의 심오한 인식론적 질문은 칸트(1724-1804)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우리가 사물을 아는 것은 우리의 감각과 정신적 범주들을 통해 걸러진 것이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지식은 현상의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물자체의 세계는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불투명하며 우리는 어떤 외적 형태만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 이후 진지한 지성적 형식을 갖춘 현대 교의학은 형이상학적 영역에서 지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명확한 사실 앞에서 신학이 어떻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왔다. 이에 따라 신적 속성론의 교리는 지난 2세기 동안 심각하게 의문시되고 논쟁적이 되었다.

 

2. 이런 질문에 대한 혁신적 대답을 한 사람은 슐라이어마허(1768-1834)였는데. 그는 신학을 종교적 경험의 분석을 통해 재정립함으로써 이 질문에 대답을 시도했다. 그는 신적 속성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어떤 특별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감정이 그분에게 관계되는 방식에 속하는 어떤 특별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신적 속성론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신성(the divine)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설명한 것이었다. 이것은 속성론의 지시점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경륜적 삶으로 이동한 것을 의미했고 이 이동은 현대신학의 고유한 특성이 되었다. 에밀 부룬너(1889-1966)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는 전능하거나 전지하거나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의 관계 안에서 그러하다고 했다. 존 웹스터는 하나님의 거룩성은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는 인격적, 도덕적 관계라고 말했다. 이자크 도르너는 이런 논의의 핵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만일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든 하나님의 본질을 지시하지 않는다면 그때 하나님은 그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드러내어 그것을 하나님 자신과 대체하는 셈이 될 것이다.” 물론 도르너의 이런 지적이 슐라이어마허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슐라이어마허가 제시한 바, 하나님의 속성을 경륜에만 귀속시키고 하나님의 본질을 지시하지 않는 것은 논쟁의 여지를 남겼다.

 

3. 포사이스(1848-1921)는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신적 속성은 신적 인격의 불변성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은 선과 같은 자신의 도덕적 속성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전능과 같은 형이상학적 속성들을 내려놓으실 수는 있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 그리고 궁극적 실재는 형이상학적으로보다는 도덕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도르너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절대적 실체로 보는 것으로부터 절대적 인격성으로 보는 것으로의 전환이다. 이것은 도르너와 포사이스가 칸트 이후의 일반철학의 맥락을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의를 싫어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적 감수성을 고려할 때, 신론을 형이상학적 연구로부터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동시키려는 열망이 출현했다는 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20세기에 일어난 이런 변화는 19세기에 일어난 또 다른 한 주장과 관련이 되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초기 형성기에 그리스 사상에 감염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은 그리스적 영향이 형이상학적 사변과 복합적 제의 체계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예수의 본래적이고 단순하고 윤리적인 종교에 해를 끼쳤던 부착물로 간주했다. 성서적 종교의 그리스적 감염이라는 말은 널리 퍼져서 신적 속성에서 단순성, 자존성, 고난당할 수 없음, 불변성, 영원성 등 일단의 전통적, 형이상학적인 하나님의 속성들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형이상학적 하나님 이해에서 인격적인 하나님 이해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이런 주장은 잠재적으로 하나님의 속성론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속성들은 적절하지 못하게 추론된 것이라는 심각한 의심을 받았고 하나님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도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콜린 건튼은 그리스 철학의 전통으로부터 오는 비인격적인 속성들은 성서로부터 오는 인격적인 속성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런 동일한 논점은 몰트만이나 판넨베르크 그리고 바르트에게서도 발견된다.

 

4. 그러나 놀랍게도 신적 속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언어가 도르너 및 포사이스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프린스턴의 보수적인 신학자 챨스 핫지에게서 발견된다. 핫지는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사람이 쓴 것 중에서 아마도 가장 최상의 정의는 하나님은 영이시며 무한하고 영원하고 자신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공의와 선함과 진리에 있어 불변하시다고 말하는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이라고 말했다. 핫지의 이런 주장은 도르너와 포사이스가 대체하려고 애썼던 옛 교의학자들의 (신적 속성에 대한)형이상학적 정의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핫지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개념에 보다 긍정적이고 인격적인 내용을 부여했다. 그는 지성, 자유의지, 애정의 소유가 영적 존재에 본질적이라고 말하며 우리의 영적 경험과 하나님의 존재 사이의 유비를 사용하기 위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교리를 언급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지성과 자유의지가 신적인 생명 안에 있다고 언급하는, 하지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교리를 미묘하게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핫지는 자신이 하나님의 인격성이라고 부른 것을 당대 독일신학에 풍토병처럼 번져있던 범신론에 대한 해독제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범신론을 피하려는 염려가 너무 컸던 나머지 핫지는 모든 전통적인 유비론도 제거해 버렸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한 우리의 앎은 크기에서는 하나님 자신의 앎과는 다르지만 종류에서는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핫지가 이런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한 어떤 존재적 인지적 가능성도 전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한 변증적인 이유였을 것이지만 핫지는 신학적 관점이 이렇게 변화할 때 일어날 전체적인 파문을 인지하지 못한 것 같다.

 

5.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한 고전적인 교리에서 유비론은 다양한 신적 속성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규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 규정의 중심에 하나님의 단순성의 교리가 있는데, 전통적 관점에서 단순성은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도 합성이 되거나 나누어질 수 없다는 중심적인 신적 속성이다. 이 속성은 다른 많은 속성들의 설명을 통제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시고 의로우시고 사랑이시고 전능하시고 영원하시다고 다양하게 진술되는 한편, 신적 단순성의 교리는 하나님이 다만 한 분 하나님이실 뿐이며 우리가 다양하게 인식하는 것은 신적인 완전성을 파악하거나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무능력한 우리의 특징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단순성의 규정 아래서 서로 다른 두 가지 신적 속성의 대립은 항상 오류이어야만 한다. 이렇게 단순성의 교리는 신적 속성에 대해 사용되는 언어의 부분적, 잠정적, 유비적 본성을 주장한다. 이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개념적인 명료성과 적절한 신비의 감상이 즐겁게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탁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 하나님을 묘사할 때 망설임과 유비가 없는 어떤 언어를 발견하려는 갈망은 현대의 분석철학적 전통 밖에도 널리 퍼져있다. 소위 삼위일체론의 부흥과 관련된 많은 신학들은 인격과 관계성의 범주를 신적인 것과 피조된 것 사이의 접촉점으로 보는데 이것은 다분히 인격적인 것에 집중했던 도르너와 포사이스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점은 도르너와 포사이스는 인격의 완전성을 한 분 하나님에게서 발견하는 반면에 최근의 신학자들은 세 가지 위격을 각각 인격으로 부르던 초기교회의 결정을 따르면서 아버지, 아들, 성령에게 개별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의 인격성을 기꺼이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각각의 신적인 위격은 완벽한 인격적 내면성을 소유하고 있고, 그런 인격적인 본질을 사랑 안에서 공유함으로써 신적인 존재가 발생한다고 본다. 이런 도식 아래서 단순성의 교리는 유지되기 어려우며 하나님이 자기 원인이라는 자존성의 이해 역시 어려워진다. 그런데 아들을 아버지와 뚜렷이 구분되는 인격적인 존재로 위치시킬 때 고전적 기독론의 어렵고도 비직관적인 제약은 쉽게 무너지고 예수가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분과 상호작용하는 복음서의 이야기를 삼위일체의 내적인 생명의 역사로 읽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나 고난과 같은 인간의 행동이 인성으로 남아있는 특성이라고 주장했던 칼케돈과 그 이후의 공의회 전통과는 대조된다. 이렇게 나사렛 예수의 인간적 경력을 하나님의 내적인 역사로 본다면 하나님에 대한 많은 전통적인 속성들은 급진적으로 재정의하거나 아니면 폐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불변성이나 영원성도 복음서의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읽힌다면 방어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전통적인 목록들이 전적으로 부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또는 그리스적인 속성들로 구성된다는 사실이다. 지난 2세기 동안의 도전들은 고전적인 하나님의 속성론을 지속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심지어 매우 보수적인 신학자들도 속성론의 교리가 이제는 지나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각주 1

고전적인 신학자들을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s)를 구분하는 헬라적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을 속성들이 그 안에 내재하는 하나의 실체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적인 속성들을 하나님의 존재에 필수불가결하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특성들로 보았다.

각주 2

신학적 실재론자들은 신적 속성들이 개별적으로 실재하며 다양한 신적 속성들은 현실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이런 속성들의 복합체라고 주장했다. 유명론자들은 실재는 그 어떤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보편자가 아니라 오직 개별적인 대상들 속에만 존재한다는 가정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보편자들은 실재하는 실체들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집단이나 부..

  1. 고전적인 신학자들을 실체(substance)와 속성(attributes)를 구분하는 헬라적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을 속성들이 그 안에 내재하는 하나의 실체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적인 속성들을 하나님의 존재에 필수불가결하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특성들로 보았다. [본문으로]
  2. 신학적 실재론자들은 신적 속성들이 개별적으로 실재하며 다양한 신적 속성들은 현실적인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 안에 내재하는 이런 속성들의 복합체라고 주장했다. 유명론자들은 실재는 그 어떤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보편자가 아니라 오직 개별적인 대상들 속에만 존재한다는 가정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보편자들은 실재하는 실체들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들의 집단이나 부류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명칭들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유명론 신학자들에게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열거하는 것은 단지 신적 실체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진술하는 것일 뿐 신적 실체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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