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교회의 기독론
2016-09-07 20:43:55
1. 조직신학의 기독론이 이미 다 발전되고 완성된 교리로서의 기독론에 집중한다면 초기 기독론은 기독론이 언제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발생되었고 발전했는지를 탐구한다. 다시 말하면 초기 기독론은 기독론에 대한 역사적 탐구다. 기독론에 대한 이런 역사적 탐구가 필요한 이유는 기독교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라 역사를 통해서 역사 가운데 형성된 역사적 종교이기 때문이다.
2. 요한복음 1장1절에 명시적으로 나타나듯이 신약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신적, 선재적 존재로 믿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초기교회는 언제 어떻게 예수가 신적, 선재적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공관복음에 나타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그 시점이라고 이해하지만 그 고백 시점에 기독론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그러나 그 고백이 기록된 시점에는 당연히 기독론이 형성되었을 것이고 그러므로 그 고백은 단순히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 아니라 신적, 선재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에서 예수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와 복음서 저자들의 삶의 자리를 구별해야 할 필요를 발견한다.
3. 일반적으로 초기 기독론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은 첫째로 구약의 메시아 사상에 대한 이해다. 정경적 관점에서 구약에는 메시아 사상이 분명히 나타나 있지만, 그 메시아 사상이 처움부터 모든 사람들이 인정한 정도로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메시아 사상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시대착오적 사고를 조심해야 한다. 두번째 걸림돌은 복음서 기사를 읽을 때 우리가 예수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 Jesu)와 복음서 저자의 정황(Sitz im Evangelium)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구별은 복음서 기사들의 역사성을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시건이 실제로 일어닌 시점의 이해와 그 시건을 기록한 저자의 이해 간에 차이가 존재함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4. 초기 기독론과 유대교 유일신 사상과의 관련성 여부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다양한 의견들이 있는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기독교 이전에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유일신 사상이 약화되어 유일신 사상이 초기 기독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주장이고 둘째는 제2성전기 유대교에 유일신 사상은 약화되지 않고 견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론이 형성되었다는 주장이다. 후자의 경우에는 제임스 던이나 모리스 케이시와 같이 유대교 유일신 사상이 견고했기 때문에 초기 교회에서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보는 견해와 래리 허타도나 리차드 보컴과 같이 유일신 사상이 견고했지만, 매우 이른 시기에 빅뱅과 같이 예수의 신성이 받아들여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5. 제임스 던은 초기 교회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때문에 에수를 신적, 선재적 존재로 믿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요한복음이 기록될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예수를 신적,선재적 존재로 믿고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 주장에 의하면 공관복음서 기자나 사도 바울도 모두 예수를 신적, 선재적 존재로 믿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모리스 케이시는 예수의 지위와 기능은 1세기 동안 꾸준히 격상되었지만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케이시는 요한공동체가 유대교 회당으로부터 축출되어 이방인 공동체의 정체서을 갖게 된 후에야 비로서 유일신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예수의 신성과 성육신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케이시의 결론은 유대교의 한 선지자였던 예수가 이방인의 하나님이 되었다는 것이다.
6. 허타도는 초기 교회가 종교적 체험을 통해 예수를 신적 존재로 믿게 되었고 그를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초기 기독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유대교의 신적 대리인 전승(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이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보컴은 신적 대리인 전승이 초기 기독론에 미친 영향에 반대하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이해할 때 신적본질을(what is divinity?) 묻지 않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who is God?)에 초점을 맞춘 신적 정체성을 통해 이해했기 때문에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초기 기독론 형성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
2016-09-07 22:00:20
구약의 메시아 사상(Messianism of OT)
1. 포괄적인 의미로는 메시아라는 단어보다 메시아의 기능과 역할이 더 중요했다. 그래서 주후70년 이전에는 the Messiah 라는 단일한 개념보다 Messiah of Israel, Messiah of Aron, Messiah of Lord, his Messiah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칭호도 메시아뿐만 아니라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 그 선지자, 선택받은 자, 왕자, 가지, 뿌리 등으로 다양했다.
2. 정경적 관점에서는 구약 성경에 메시아 사상이 분명하게 나타난 것이 사실이지만 그 메시아 사상이 처음부터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는 메시아 사상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시대착오적 사고를 조심해야 한다. 구약에서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단어는 왕, 제사장, 선지자의 세 가지 주요직분과 관련되지만 메시아 라는 단어가 종말론적 인물에게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주전 200년에서 주후100년 사이의 유대 문헌에서도 창차 나타날 구원자와 관련해 메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된 용례는 드물다. 이 기름부음 받은 자들 중 누구도 종말론적 구원자인 메시아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메시아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인가?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Jewish Messianism)
1. 주전 2-3세기부터 의로운 왕, 제사장의 출현을 기대하는 사상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리스와 로마의 지배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고 하스모니안 왕조에 의해 대제사장직이 강탈당하고 이후 이스라엘의 왕좌도 헤롯가문에 의해 강탈당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이후의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은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로 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군사적 인물로 발전했다. 유대인들은 장체 이스라엘을 구원할 인물이 출현할 것으로 믿었고 그 인물은 인류역사의 마지막에 등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 사상에 대한 증거본문들을 구약에서 찾아내었는데 특별히 3개의 본문이 유대교 메시아 사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세 가지 본문들은 창세기 49:10(야곱이 아들 유다에 대해 한 유언의 말), 민수기 24:17(발람의 네번째 신탁), 이사야 11:1-6(평화로운 왕국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다.
2. 창세기 49: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을 쿰란문서(4Q252, 5:1-7)은 이렇게 해설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지배권을 가질 때, 한 통치자는 유다 지파로부터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윗의 보좌에 않은 자는 결코 끊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통치자의 지팡이는 왕국의 언약이며 이스라엘의 수많은 자들은 의로운 메시아, 다윗의 가지가 올 때까지 "발"이기 때문이다. " 이렇게 쿰란 문서는 창세기 49"10을 메시아적 의미로 이해하여 유다에 대한 예언이 다윗 계통의 메시아를 통해 성취될 것으로 해석했다. 구약성경의 아람어 의역본인 탈굼(Targum)도 창세기 49:10,11,12에서 왕 메시아를 언급한다. 신약성경의 계시록 19:11-16과 히브리서 7:14도 이 구절을 암시한다., 이렇게 주후2세기에 이르러서 창세기 49:10에 대한 메시아적 해석은 아주 보편화된다.
3. 민수기 24:17(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멸하리로다)을 탈굼은 "한 왕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며 이스라엘에게서 메시아가 기름부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했고 마태복음2:2도 별을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암시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사야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는 탈굼에서 " 한 왕이 이새의 아들들에게서 나올 것이며, 메시아가 그의 자손의 자손들로부터 높임을 받을 것이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4. 결론적으로 유대교 메시아 사상에서 메시아는 신적, 선재적 존재가 아니었으며 메시아가 그의 백성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거나 죽임을 당한다거나 부활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본문(이사아 53장)이나 메시아의 부활에 대한 본문(시11편)은 모두 초기 기독교에서 찾아낸 메시아 본문이지 유대인들이 메시아 본문으로 이해하지 않았던 것이다. 구약의 메시아 본문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인정하던 것보다 초기 기독교회에서 새롭게 찾아낸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과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은 다르며. 구약의 메시아 사상이 구약의 기독론이란 말은 정경적으로는 맞지만 연대기적으로는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말이다. 복음서에서 언급되는 메시아 본문들 대부분은 예수에 대한 초기 교회의 믿음을 따라 구약에서 새롭게 찾아낸 것들이다.
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
2016-09-19 23:59:14
2장 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
논의의 초점
1. 초기 유대교 전승에 나타난 “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들”이 제2성전기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의 예수에 대한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일까? 여기서 논의의 초점은 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들(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이름)이 과연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를 하나님과 대등한 신적 존재이며 선재적인 존재로 믿게 된 것에 대한 실질적인 선례가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2. 우리의 논의를 위해서 신의 위격과 의인화된 신의 속성 간에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의인화된 신의 속성이나 신의 위격은 모두 신의 품격, 별칭, 속성 또는 현현과 관련된 것이다. 전자가 문학적 의인화를 통해 그 자체로 별개의 신적 존재인 것처럼 나타난 것이라면 후자는 의인화나 구체화 또는 차별화를 통해 그 자체로 별개의 신적 존재가 된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전자가 아직 문학적 영역에 머물러 있다면 후자는 문학적 범주를 벗어나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신적 존재의 모습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3. 문제는 많은 학자들이 의인화된 신의 속성을 지칭하는 곳에 신의 위격이란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용어 사용의 오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을 문학적 의인화나 상징적 언어로 생생하게 표현하는 고대 유대 자료들의 언어학적 현상에 대한 오해이기도 하다.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사용한 특별한 문학적 장치인 의인화된 신의 속성을 신의 위격이란 용어로 설명하는 모든 시도는 고대 유대인들이 사용한 종교언어의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나님의 지혜(Wisdom of God)
1. 구약과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 나타나는 지혜라는 존재가 초기 기독론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학계에서 폭넓게 인식되어 왔다. 지혜에 대한 언어는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알려진 신약본문들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이 신비적인 존재의 실체 또는 정체성에 대해 학자들 간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 지혜를 신적 속성의 의인화로 보는 학자도 있고 혹은 신의 위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전자는 유대교의 지혜 사변을 상징적 언어로 받아들인 것이고 후자는 상당히 문자적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구약과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 하나님의 속성의 의인화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널리 사용된 하나의 문학적 장치였다. 그런데 지혜의 경우에는 그 문학적 의인화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과연 의인화라는 용어 자체가 적합한지에 대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제2성전기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라는 존재를 과연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기 위해 지혜의 의인화가 나타난 본문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나아가 이런 유형의 언어를 더 넓은 히브리 사상의 정황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욥기 28장은 지혜에 대한 하나의 독립된 시로서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잠언에서처럼 지혜를 명철과 동의적 평행법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저자가 이 용어들을 정확하게 구분하거나 정의하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여기서 지혜는 의인화되지 않고 피조물에 대해 숨겨진(21절) 그리고 하나님만이 아는(23절) 어떤 것을 지칭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신의 속성으로서의 지혜가 아닌 이 세상에 현존하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욥기 28장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속성의 의인화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3. 잠언 1-9장에는 지혜가 의인화된 모습으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특히 지혜의 가장 극명한 의인화는 잠언 8장 22-31절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지혜는 자신을 천지창조 때 하나님의 동반자로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고 소개한다. 링그렌(Ringgren)은 이 구절이 잠언에 나타난 지혜의 신적 위격화에 대한 가장 명확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기센(Gieschen)도 여기서 묘사된 지혜는 일종의 독립된 인격체를 지닌 하나님의 일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퍼듀(Perdue)는 이 구절에서 지혜가 다양한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의인화된 것이라 말한다. 잠언 1-9장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잠언8장 22-31절에 묘사된 지혜는 신적 속성에 대한 다각적인 의인화로 보는 것이 옳다. 지혜가 아무리 높임을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신의 위격으로 보는 것은 그 당시 고대 유대인들의 종교언어의 특성뿐만 아니라 잠언의 저자나 편집자의 은유적 언어사용을 무시한 것이다.
4. 집회서에는 지혜에 관한 시가 다섯 편 있는데 그 핵심 논지는 잠언과 일치한다. 집회서 24장에 나타난 지혜에 대한 묘사도 잠언보다 더 극명하고 명시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잠언의 지혜라는 존재를 연상시킬 뿐이다. 집회서는 잠언의 전통을 이어받아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의인화라는 동일한 문학적 장치를 사용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잠언과 마찬가지로 집회서도 지혜를 하나님과 대등한 신적 위격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위해 율법의 신적 기원과 그 중요성을 강조한 것임이 분명하다. 집회서의 지혜는 단순히 하나님의 뜻을 시적으로 의인화하여 야훼를 경외함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말하려는 문학적 장치로 보아야 한다.
5. 솔로몬의 지혜서 본문(7:22-8:1)은 지혜를 신적 위격으로 보는 학자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지혜는 대체로 그리스 철학에서 빌려 온 21개의 별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저자가 그리스 철학에 친숙했음을 보여준다. 윈스턴은(Winston)은 지혜서 저자의 철학적 성향이 중기 플라톤주의임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점이 반드시 그의 근본적 사상이 그리스 철학에 뿌리박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혜서 저자가 지혜를 이해한 방식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조상들로부터 그가 물려받은 엄격한 유대교 유산을 고려해야 한다. 비록 지혜서가 집회서서와는 달리 율법과 지혜를 명시적으로 동일시하지는 않지만, 지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유대교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가장 명시적으로 연관된다. 따라서 저자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지혜의 특성을 다양한 메타포로 묘사한 것은 지혜가 하나님과 구별된 하나의 신적 위격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계시임을 시사한다.
6. 탈버트(Talbert)는 에녹1서에서 지혜가 천사와 동일시되었다고 주장하며 여기 나타난 지혜를 신적 위격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 지혜가 천사로 묘사되긴 했지만, 지혜는 천사가 아니라 죄악과 마찬가지로 천사로 의인화된 것뿐이다. 필론의 글에서도 지혜는 다양한 은유적 명칭으로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가 말하는 지혜가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필론의 글에서 지혜는 흔히 로고스와 동일시되는데, 이것은 그가 성경이 로고스에 부여한 속성들과 기능들을 지혜에도 동일하게 부여한다고 이해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필론이 지혜를 어떤 신적 존재나 신의 위격으로 간주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으며, 또한 이러한 지혜 사변으로 인해 그의 유일신 사상이 도전받았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
1.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기독교 출현 이전에 신의 위격으로 간주되기 시작했을까? 일부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은 발설된 말이 자율적인 능력을 가지며 심지어 유사-물질적 정체성을 가진다고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티슬턴은 이런 견해는 신학적 근거가 없으며 말이 사물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설명한 특정 관점에 근거를 두고 있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신이 발설한 말이기 때문에 그 말이 능력이 있는 것이지 그 말 자체에 어떤 능력이 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비판한다.
2.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야웨)에 대한 대부분의 언급은 예언의 말씀과 관련된 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 다바르 야웨는 특정 상황에서 예언자에 의해 선포되는 신적 의사소통과 계시를 의미하는 하나의 전문 용어였다. 야웨의 말씀이 예언자에게서 온다는 것은 예언자의 생각과는 다른 출처로부터 와서 예언자의 삶 속에 하나의 활동적 실체가 된 말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구약의 이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뜻을 예언자적 영감과 환상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계시하셨다는 신념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3.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른 언급들은 마치 그것이 하나님과 따로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일부학자들은 이 본문들에서 신의 위격화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 본문들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이 본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과 독립된 어떤 존재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사용된 언어의 특성을 고려할 때 이것은 하나님 말씀의 物化(reification) 혹은 擬人化(personification)이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결국 그들의 이런 언어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유일성을 약화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4. 솔로몬의 지혜서에 나오는 로고스 묘사를 하나님의 말씀이 신적 위격으로 이해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여기서 로고스가 천사와 비슷하게 묘사되었다고 해서 로고스를 하나님과 구분된 특정 천사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설사 로고스가 천사와 동일시되었다고 하더라도 지혜서 저자가 로고스를 신의 위격으로 보았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지혜서에서 로고스는 하나님과 따로 구분된 존재가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문학적으로 의인화된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보아야 한다.
5. 필론 역사 로고스를 하나님과 구분된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암시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필론은 로고스를 천사, 하나님의 아들, 만물의 지배자, 심지어 하나님 혹은 두 번째 하나님이라고 지칭한다. 과연 필론은 로고스를 하나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단지 철학적 묘사에 불과한 실체가 없는 추상적 개념인가? 필론이 당대의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유대인으로서 율법과 유대 전통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비록 필론이 로고스와 신적 능력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몇몇 영웅적 인물들을 매우 고양된 언어로 묘사하지만, 그는 다신론을 엄격하게 거부하며 유일신 사상을 수호한다. 그렇다면 필론에게 로고스 개념은 무엇이며 로고스와 하나님은 어떤 관계인가? 이런 이슈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둘로 나뉘는데, 필론에게 로고스는 신의 위격이란 견해와 단순히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견해가 있다. 제임스 던은 필론에게 로고스는 신의 위격이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필론에게 로고스 개념은 신적 위격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하고 경험한 범위내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추상적 개념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이름(Name of God)
1. 구약본문들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 본문들은 대부분 여호와와 여호와의 이름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열왕기상 8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은 주로 말의 발설과 관련된 동사 및 여러 행동과 관련된 동사들과 결합되는데, 이것은 두 가지 용례 모두 하나님의 이름 자체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용례는 하나님 이름의 위격화가 아니라 아직 문학적 의인화의 영역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
2. 구약학자들은 신명기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강조를 하나님의 現存을 비신화화(demythologizing)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폰 라트는 신명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지속적이며 거의 물질적인 존재로 격상되었으며 그 개념은 위격에 가까운 개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맥콘빌은 예언서 전승의 영광 신학보다 신명기의 이름신학을 지나치게 강조한 폰 라트의 견해를 비판했다. 맥콘빌은 우주적이며 극적이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모습이 묘사되는 문맥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 문맥에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와 언약관계가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이처럼 신명기의 이름신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는 신명기의 이름신학의 존재에 대해 심각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결론
1.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유대교의 사변을 자세히 검토한 결과 우리는 이러한 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들은 하나님과 구분된 별도의 신적 위격으로 격상되어 발전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2.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한 이런 극명한 묘사는 그것이 지혜나 말씀이나 이름이나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님의 초월성과 유일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現存과 顯現 그리고 그의 사역을 의미심장하고도 강력하게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종교 언어를 제2성전기 유대인들이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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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인화된 하나님의 속성이란 하나님의 지혜, 말씀, 이름, 영광, 능력, 영, 얼굴 등 하나님의 속성들을 사람에 비기어 표현한 것을 말한다. 여기서 쟁점은 이런 하나님의 속성들의 의인회된 묘사가 문학적 의인화인가 아니면 신적 위격을 나타낸 것인가이다. 이 논의를 위해 우리는 고대 및 제2성전기 유대인들이 다양한 신의 속성에 대해 사용한 생생한 묘사가 과연 문학적 영역에 머무른 것인지 아니면 그 영역을 벗어나 신적 존재로 발전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2. 지금까지 초기 고기독론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은 바울의 지혜기독론이었다. 예수에 대한 바울의 묘사(고전1-3장 하나님의 지혜; 고전10:4 신령한 반석; 골1:15-20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엡1:19-21 교회의 머리; 롬10:6-9 가까이에 있는 의의 말씀) 배후에는 유대교의 지혜전승(잠언8장; 집회서24장; 지혜서 9장)의 영향이 있다는 주장은 성서학계의 정론에 가깝다. 하나님의 지혜가 의인화된 모습으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곳이 잠언 1-9장이다. 이 본문에서 지혜를 이렇게 다각적으로 의인화한 것은 지혜의 신적 기원, 지혜의 비교불가능한 가치를 극명한 시적 표현으로 강조한 것이지 지혜를 신적 위격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이 지혜를 신적 위격으로 보는 것은 당시 고대 유대인들의 종교 언어의 특성과 잠언의 저자가 사용한 은유적 언어를 무시하는 것이다.
3.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언급은 무려 400회에 이르는데 그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예언과 관련된 야훼의 말씀(디바르 야웨)다. 즉 구약에서 디바르 야웨는 특정 상황에서 예언자가 선포하는 신적 소통과 곅시를 의미하는 하나의 전문용어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주어는 하나님 자신이며 하나님의 뜻이 강조된다. 성경저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시33:6), 구원사역(시107:20), 섭리사역(시147:15, 18) 심판사역(사9:8), 사역의 전능성*(사55:10ㅔ-11)을 강조하기 위헤 극명한 시적언어를 사용한 것이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물화(reification) 혹은 의인화(personification)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
4. 결론적으로 유대교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들의 의인화는 신적 위격(divine hypostasis)으로 발전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런 사변은 예수를 하나님과 대등한 신적, 선재적 존재로 인식시킬만큼 초기 기독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이런 사변에도 불구하고 제2성전기 유대교의 강력한 유일신 사상은 변질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런 사변들은 유대교 하나님의 초월성과 유일성을 약화하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유용한 언어를 제2성전기 유대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역사적 예수의 기독론
2016-09-28 18:29:44
1. 신약성서에서 예수에게 적용된 기독론적 칭호 중에서 예수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 이란 칭호다. 오늘날 신약학계는 일반적으로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적용된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였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자의식(Jesus' self-consciousness of his divine sonship)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은 원래 하나님과 왕적 메시아 간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였는데 초기교회가 예수의 부활 이후에 그 칭호를 예수에게 적용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 이후 초기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지위를 점차 예수의 변형사건, 수세사건, 동정녀 탄생, 선재성으로 소급하여 적용했다고 본다.
2. 그러나 저자는 수가 아버지 하나님과의 독특한 인격적 관계(a unique personal relationship to God as his Father)를 지닌 자라는 의미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으며 그런 자기 이해를 제자들에게 나타냈다면 학계의 이런 일반적 견해는 설득력을 잃게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의식이 초기 교회의 예수 이해가 발전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런 이해는 매주 중요한 두 편의 메시아 시편(시110:1 ; 시2:7)에 대한 주해를 통해 가속화되었다고 설명한다. 부언하면 초기교회의 기독론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 자의식에 비추어 두 메시아 시편을 주해함으로써 구체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선재성에 대한 초기 교회의 확신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 자의식을 토대로 이 예수가 문자적으로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즉위한 선재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온전한 이해로 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3. 그렇다면 먼저 역사적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렀으며, 또한 자신을 그의 아들로 이해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독일의 예레미아스는 예수가 기도 중에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의 핵심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매우 독특한 호칭이라고 제안했다. 바아는 아바가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아빠를 의미히지 않는다고 지적했지만 아바는 어른이든 어린아이든 친밀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는 용어임에 틀림없으며 하나님을 단순히 하나님 혹은 주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격식을 덜 갖춘(less formal) 호칭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불렀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신약 전체에서 아바가 사용된 예는 오직 세 번)막14:36; 롬8:15; 갈4:6)에 불과하며 복음서에는 마가복음에서 단 한번만 사용되기 때문이다. 단젤로는 복움서는 예수가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했다는 복음서의 기록은 신약저자들의 관심사를 반영하는 것이지 예수의 자의식이나 가르침과느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나님을 직접 부를 때 언제나 아버지로 불렀으며 자기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친 증거는 분명해 보인다. 동시에 예수는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아버지와 제자들의 관계와 명확히 구분했다.
4. 톰슨은 신약에 나타난 아버지 언어는 기본적으로 구약과 초기 유대교의 용례,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언급된 본문들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예수는 먼저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로 이해했으며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도 그 이해의 틀 속에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톰슨의 주장은 예수의 사명과 지상사역의 급진성(radicality)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예수의 사명은 단순히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예수는 파멸에 처해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속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눅19:10; 막2:17) 위더링턴과 아이스는 예수의 사역과 사명의 급진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예수는 이스라엘이 진정 아바와 독특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아바로 부를 수 있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올 것을 촉구했다. 아버지는 복음서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유일한 호칭이며 이는 구약과 초기 유대교의 매우 이례적인 아버지 언어 용례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은 예수 자신의 신념과 삶이라는 측면과 초기교회의 기독론적인 신념과 삶의 측면이 동시에 이해되는 기독론적 설명이다." (요약자 주: 톰슨의 주장은 나름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아버지 언어가 구약과 초기 유대교의 용례에서 없었다면 예수 당시에 그런 언어가 사용되거나 청중들에게 이해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복음서의 아버지 언어의 독특성을 구약이나 유대교의 용례에 제한시키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5. 복음서에는 예수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반영하는 아바 또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해 하나님을 불렀다는 압도적인 증거가 있으며 이 호칭은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됨을 뒷받침해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약에 나타난 아버지 언어의 본질과 빈도는 예수가 하나님에게 사용한 아버지 언어, 예수가 가졌던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해 가르친 교훈의 영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관점과 예수가 지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구약과 초기 유대교의 틀 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예수가 하나님을 먼저 이스라엘 백성의 아버지로 이해했고 바로 그 틀 안에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견해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기록된 말씀들은 진정성이 있으며 이 어록들은 각각 예수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으로 소급될 개연성이 높다. 지금까지 학계의 정론은 예수의 수세 기사는 단지 (초기 교회의) 예수에 대한 메시아적 이해만을 반영해 줄 뿐이며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그의 메시아적 의식으로 인해 주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가복음 1:11에 나타난 시편2:7의 사용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메시아이지 메시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시편2:7에서 아들이란 칭호는 단순히 메시아적 왕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승리의 약속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의 특별하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수가 갖고 있던 하나님 아들 자의식이 예수를 선재한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 초기 고기독론 형성의 기반이 되었으며 초기 기독론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6. 또한 예수는 비유를 통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의 유일한 아들임을 암시했다.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고 진술할 때, 그는 과연 자신의 신적 또는 초월적인 기원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을까? 여기서 "내가 왔다" 혹은 "내가 보내심을 받았다" 라는 예수의 말씀을 논의할 때, 이런 어휘들이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지역적 의미인지 아니면 신학적 의미인지 그리고 신학적 의미인 경우 예언자와 같이 특별한 사명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경우(내재적 의미)인지 혹은 천사와 같이 선재한 존재가 보냄을 받은 경우(초월적 의미)인지 구별해야 한다. " 내가 왔다(엘톤)"는 예수의 말씀들은 단순히 의도나 목적을 나타내는 관용어이거나 예수의 초월적 기원을 보여주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의 신적 사명에 강조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의 오심은 하늘로부터 그의 강림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그의 신적 사명의 동의어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악한 소작농부들의 비유에서는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묘사한다. 이 두 요소의 결합은 기독론에서 더욱 심오한 함의(stronger implications)를 지닌다. 왜냐하면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7. 그렇다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전반적인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역사적 예수가 지녔던 자의식이 어떤 기독론적 함의들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예수의 하나님 아들 자의식과 그의 신적 사명 자의식이 그의 선재성에 대한 자의식을 함의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이런 자기 이해 자체가 예수의 지상 사역 기간에 그를 선재한 존재로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만약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 사건 및 그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전반적인 정황에 비추어 다시 회상하고 숙고했다면, 그들의 예수의 이런 자기 이해를 그의 선재성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자기 이해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회고적으로 재해석되었다면 이런 해석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 개연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초기 기독교의 시편110:1 및 2:7의 주해가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된다. 만약 예수의 자기 이해가 그의 부활 이후에 회고적으로 재검토되었다면 그의 자기 이해는 그의 신적이며 선재적인 자의식과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의 아바 사용 밒 하나니의 아들됨과 신적 사명에 대한 말씀들이 전반적으로 그의 선재성을 함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선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견고한 근거는 결국 예수 안에 존재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피상적으로 보면 예수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한 것(예수의 기독론)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에 대해 믿게 된 것(초기교회의 기독론)사이에 상당히 큰 간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런 간격은 많은 학자들이 초기 기독론과 예수의 선재성의 기원을 예수 자신이 아닌 제2성전기 유대전승에서 찾게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간격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 이후 시편 110:1 및 2:7을 메시아적-기독론적으로 주해하는 과정을 통해 메워졌다. 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예수의 자기 계시 진술들에 내포된 그의 선재성에 대한 함의를 유추해냈던 것이다.
부록: 인자(Son of God)
인자는 아람어 "바르나샤"를 번역한 것으로서 사람 혹은 자신을 우회적으로 지칭하는 일상적 용어였다. 그러니 인자라는 용어 자체가 기독론적 표현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을 가르켜 인자라는 칭호는 즐겨 사용한 것은 1세기 대표적인 묵시문학인 다니엘7:13에 나온 대단히 신적인 존재로 표현되고 있는 인자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이 칭호를 통해 자기의 정체성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제자들이 그 의미를 깨닫기 못했겠지만 예수의 부활후 회고적으로 인자라는 칭호가 역사적 예수의 기독론적 표현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고 이것은 역사적 예수 기독론이 가진 계시의 점진성을 보여준다.
초기 교회의 메시아 시편 주해(시편110:1)
2016-10-09 02:06:59
초기 교회의 메시아 시편 (110:1) 주해는 초기 기독론 형성에 어떤 중추적 역할을 했나? 그 당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을 성서로 존중하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구약성서에 의존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고대했던 메시아라고 확신하게 되면서부터 메시아적 관점으로 해석될 수 잇는 구약 본문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에게 시편 110:1은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 우편으로의 고양(exaltation)으로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메시아의 "문자적" 고양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주님이신 자에게 선포하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이런 맥락에서 또한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주장을 기초로 하여 시편 2:7을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에 대한 (예수의 부활을 통해 결정적으로 성취된) 예언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이미 아들이신 자에게 선포하는 말씀으로 해석하였다. 이렇게 시편110:1과 2:7은 예수가 지상사역 기간은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선재하는 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본문이 되었다. 결국 이 두 메시아 시편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주해는 예수의 선재성 사상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초기 기독교의 출현은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역사적 부활을 실재로 믿었다는 사실이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부활을 그의 승천과 함께 하나님 우편으로 고양 또는 즉위한 것으로 이해했다는 충분한 증거들이 존재한다. 그들이 이렇게 이해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대답은 시편 110:1에 나타난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개념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 우편으로의 고양으로 이해하는데 결정적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이 "앉는다"는 개념은 이 시편 외애 구약 성경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초기 기독론의 발전을 탐구하는데 시편 110:1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시편110:1은 신약성서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거나 암시된 구약본문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하나님 우편으로 고양된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진술이 직간접적으로 모두 이 구절에 의존한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에서 시편 110:1은 얼마나 폭넓게 기리고 얼마나 일찍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구절을 예수에게 적용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그들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생각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언제 예수를 주라고 믿었으며 그렇게 믿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 이전에 이미 예수를 주님으로 믿었을까 아니면 예수의 부활 시점에 주님으로 믿었을까? 다시 말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시편110:1 을 예수가 부활의 시점에 주가 된 것으로 이해했을까 아니면 하나님이 이미 주님이신 자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을까?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먼저 초기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 시편110:1이 각각 어떻게 사용되고 해석되었는지 고찰해보아야 한다. 결론을 미리 말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 구절을 예수의 하나님 우편으로의 고양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했으며 이후 신속하게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의 일부분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직접 이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포함하는 복음서 본문들(막12:35-37; 14:62)은 진정성이 있으며,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편구절을 예수의 하나님 우편으로의 고양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도록 영향을 미쳤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사복음서는 모두 예수가 이 시편을 통해 자신을 다윗의 주이며 최후심판을 위해 다시 올 하나님 우편에 앉은 인자로 이해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복음서의 이러한 증언은 이 시편에 대한 예수의 이해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암시하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주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처음 주장한 학자는 부세(W. Bousset)였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수를 이방 종교에 비추어 이해하기 시작했고 원래는 단순히 선생과 예언자로 존경했던 예수를 점차적으로 이방 종교에서 섬기던 하나의 신으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세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린도 전서 16:22에 아람어로 보존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마라나타"라는 신앙고백적 기도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기도는 아람어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교회에서도 아람어로 사용되었는데, 이 사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초기 교회부터 예수는 장차 오실 주로 간주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한(F. Hahn)은 "마라나타" 같은 문구들을 근거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먼저 재림의 정황에서 예수를 주로 간주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퀴리오스"가 최후심판과 연결되어 사용되는 공관복음 본문들을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한의 논증은 어떻게 주라는 칭호가 장차 올 인자와 주라는 의미로 예수에게 적용되었는지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부세와 한의 논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결과 우리는 예수의 주됨의 기원이 다른 곳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신약성서 저자들은 시편110:1을 예수의 부활이후 그의 고양에 적용했지만, 공관복음은 모두 예수가 이 구절을 이미 자신의 지상사역 기간 중에 사용했다고 주장한다.(막12:35-37; 막14:62)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가 직접 사용한 시편 110:1이 예수의 주되심에 대한 기원을 밝혀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샬(I.H.Marshall)은 마가복음 12:35-37에서 메시아의 주되심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다고 말한다. 그는 여기서 예수는 시편 110:1을 앞으로 성취될 메사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전통적인 메시아관에 대한 도전을 던진다. 예수는 이 질문을 통하여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고양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는지를 공개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암시적, 간접적 방식을 사용하고 는데, 그가 사용한 방식은 자신을 미묘하게 암시함으로써 청중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이런 함의는 예수가 이 본문과 다니엘 7:13을 함께 사용해 자신에게 신적 권위가 부여될 것임을 암시한 마가복음 14:62의 선포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를 주(혹은 선재한 주)로 믿은 초기 교회의 신앙이, 예수가 지상 사역 중에 자신에 대하여 암시한 것을 그의 청중들(특히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이후에 숙고하면서 예수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음을 알게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시 청중들이 미처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예수는 자신의 지상 사역 중에 자신을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고대했던 메사아로뿐만 아니라 선재한 주로 암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예수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대제사장의 심문에 대해 시편110:1편과 다니엘7:13을 암시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의 신적 권위를 암시했다.(머가 14:62) 그런데 학자들은 이 구절의 진정성을 의심하며 이 재판 장면이 예수의 삶의 정황으로 소급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성전 모독에 관한 이슈에서 기록론적 이슈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은 본문의 재판 정황이 마가의 창작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크는 형식적 근거와 개념적 근거를 바탕으로 기독론적 칭호의 집중적 사용이 그 진정성을 훼손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예수의 대답에 시편110:1편과 다니엘7:13이 서로 엵혀 있는 것을 보면 메시아 주장으로 시작된 심문이 그 이상의 것으로 마무리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가 이 두 본문을 병치한 것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너무 도발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종교적 범죄 중에서 가장 엄중한 신성모독죄로 처벌당할 수 밖에 없었다. 유대 지도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의 답변은 자신을 하나님과 지나치게 가까운 존재로 간주하였으며 또한 자신이 종교 지도자들을 심판한 재판장으로 올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처벌할 만큼 그의 답변이 심각한 위협을 여기했을 개연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시편 110:1은 신약에서 한결같이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으로 고양되었다는 의미로 그의 부활에 적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기독교의 출현은 예수의 부활을 그의 하나님 우편으로의 고양으로 이해하지 않고는 결코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시편8:6과 시편110:1편이 일찍이 연관되어 인용되는 사실은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Cosmic Lord)되심을 매우 초기에 깨달았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 나아가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시편110:1을 하나님 우편으로의 고양에 대한 예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관점에서 이미 선재하는 주인 자를 향해 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결론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신분(status)의 부여라기 보다는 이미 소유한 신분의 확증으로 이해했다. 나아가 예수를 주로 믿는 초기 교회의 신앙은 예수가 시편110:1을 장차 성취될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암시한 것(마가복음 12:35-37) 그리고 이 신탁을 자신이 하나님 우편으로 고양할 것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마가 복음 12:35-37의 증거는 예수가 자신에 대한 미묘한 암시를 통해 자신이 다윗보다 먼저 계신 다윗의 주님일 가능성을 열어 놓음으로써 자신의 선재성과 양립하는 자의식을 보여준다. 마가 복음 14:62 역시 이러한 논증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시편110:1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주해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독론적 함의는 그들이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 우편으로의 고양으로 이해했으며 또한 선재한 주님으로서의 예수의 신분의 확증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초기교회의 기독론
2016-10-12 18:39:12
예수를 선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데 가장 큰 장애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1세기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투철했다는 입장과 그 반대로 유연했다는 입장이 있다. 후자의 입장은 하나님의 지혜나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하나님의 속성의 의인화를 제2의 신적 위격으로 해석하면서 유대교에서 하나님외에 중간적인 신적 존재를 인정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전자의 입장은 유대교의 중간적 존재가 유일신 사상을 약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중간적 존재는 하나님의 속성을 의인화한 언어적 영역에 머무를 뿐이며 신적위격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군사적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인간이지 메시아를 선재적, 신적인 존재로 본 사례는 전무하다. 일반적으로 많은 학자들은 초기기독론의 기원을 바울의 지혜기독론에서 찾는데, 그들은 바울이 유대교의 의인화된 지혜전승에 빗대어 예수를 이해함으로써 예수를 신적 존재로 보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임스 던은 유대교에서 지혜가 의인화된 것은 언어적 영역일 뿐이며 지혜가 신의 위격으로 발전된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던은 유대인이었던 바울이 예수를 지혜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그가 지혜를 선재하는 신적 위격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던은 다수설인 지혜기독론에 반대하면서 구약에서 지혜가 의인화였다면 바울에게도 동일하게 의인화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지혜 이야기는 기독론적 진술이라기 보다는 구원론적 진술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약자주: 만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투철했다면 예수를 선재하는 신적 존재로 해석하는 과정에서 유일신 사상을 극복하기 위한 해석적 노력의 흔적들이 보여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잘 설명되지 않는다. 유일신 사상이 투철했다는 입장을 가진 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일신 사상이 약화되는 과정을 거쳐 기독론이 역사적으로 발전했다고 설명을 하지만 기독론이 초기에 빅뱅처럼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경우에는 이 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 대한 신적 정체성 이론을 제시한 보컴의 주장은 주목할만한다. 보컴에 의하면 유일신 사상은 초기 기독교가 예수를 선재하는 하나님 아들로 믿는데 장애가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거부한다. 결론적으로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신적 속성들의 의인화를 신적 위격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만, 초기 기독교가 예수를 신적 위격을 가진 메시아로 해석하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초기교회의 메시아 시편(시2:7) 주해
2016-10-12 18:55:58
신약 성서에서 메시아 본문으로 활용된 시편2:7은 시110:1과 함께 초기 교회가 예수의 인격(person of Jesus)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부분의 신약학자들은 시편2:7이 예수의 부활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사용되었으며 그 시점에서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되었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이것이 소위 말하는 '양자 기독론'이다.) 즉 그들은 예수가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죽음에서 부활함으로써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의 근거 본문은 사도행전 13:33인데 여기서 '일으키사'를 그들은 부활 사건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런 관점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예수의 수세 장면에서 나타난 신의 현현에 대한 복음서 기록의 진정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들은 수세 사건, 동정녀 탄생 같은 복음서의 기록들은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창작물이지 결코 역사적으로 신뢰할만한 기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우리가 물어야 할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초기교회가 시편2:7을 예수의 부활에 적용했을 때, 그들은 시2:7을 예수가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성경적 근거로 이해했는가? 아니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예언이 부활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이해했는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아들됨은 부활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수에게 부여된 것인가 아니면 예수는 지상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는가?
시편110:1과 시2:7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주해는 예수의 선재성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형성되는데 매우 중요한 기독론적 함의를 제공했다. 제임스 던은 그의 저서 생성기의 기독론(Christology in the Making)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선재했다는 믿음 없이도 그의 고양을 믿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1세기 사고의 맥락에서 선재성 개념의 발전이 단순히 그리스도의 부활과 고양에 대한 초기 믿음에 내재했던 논리적 결과라고 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자의식에 비추어 시편 110:1과 시2:7을 해석했다면, 그들은 이 시편들이 단순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에게 명예와 권위를 부여하는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가 '문자적으로' 하나님 우편으로 고양되고 즉위된 것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메시아 시편들과 부활한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선재한 주와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러한 결론은 허타도가 초기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 나타난 혁신적 변화로 간주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예수 숭배(예수 찬양, 기도행위들, 그리스도의 이름 사용, 성만찬, 예수에 대한 믿음 고백)와도 일맥상통한다.
또한 바울과 히브리서 저자 그리고 요한이 예수의 선재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정체성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보편적 전제로서 '퀴리오스' 칭호의 사용 및 예수에게 신적 기능을 부여하는 표현듷과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초기교회에서 예수의 선재성이 폭넒게 인식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가-행전의 경우 비록 예수의 선재성에 대한 사상이 사도행전 13:33-37을 비롯한 사도행전 전체에 명시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누구가 그것을 알지 못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오히려 성령 수태와 함께 예수의 출생기사는 예수의 선재성을 분명하게 암시한다.
요약하면 시편2:7은 부활을 통해 성취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됨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되었으며 매우 초기부터(참조 로마서 1:3-4; 히브리서 1:5, 5:5)) 신속히 초기교회 신앙고백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니까 초기교회는 예수의 부활을 새로운 신분의 부여가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던 신분의 확증으로 보았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예수가 수세시에 경험한 신적 현현도 시편2:7을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초기교회는 시편2:7을 연상시키는 하늘로부터의 신적 선포를 기록한 수세 사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의식이 획증된 사건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우리는 시편 2:7에 대한 초기 교회의 메시아적 주해가 갖는 매우 중요한 기독론적 함의는 "지상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도 예수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초기기독론에 대한 요약과 평가
2016-10-15 18:26:27
래리 허타도
1. 유대교에는 중간적 존재들에 대한 전승이 있었지만 이로 인해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약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전승의 영향으로 유일신 사상을 재정의하였고 이것이 예수를 신적. 선재적 존재로 이해하는 길을 열었다.
2. 예수에 대한 숭배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종교혼합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바울 이전에 일어난 획기적인 혁신이었는데 그 궁극적 계기는 종교적 체험을 통한 예수 숭배였다.
★중간적 존재에 대한 사변이 유대교 유일신 사상을 약화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전승의 영향으로 유일신 사상을 재정의할 수 있었을까?
이형일
1. 유대교의 중간적 존재에 대한 사변은 문학적 범주에 머무른 것이지 신적 위격 개념으로 발전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대교의 중간 존재에 대한 전승이 신약의 기독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수없다.
2. 신약의 고기독론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신적 자의식에 대한 이해와 메시아 시편에대한 새로운 주해라는 두가지 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바울 이전 시기에 혁신적으로 형성되었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투철했다면 어떻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극복했는지에 대한 논증이 없다.
리처드 보컴
1. 유대교의 중간적 존재들에 대한 전승의 영향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유일신 사상을 재정의하게 된 것이 아니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신적 본질이나 특성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촛점을 맞춘 신적 정체성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일신 사상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신적 선재적 존재로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지 않았다.
2. 초기 기독교는 시편110:1과 이사야40-5장 등의 구약본문을 창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예수가 하나님의 고유한 신적정체성 안에 포함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바울 이전 시기에 혁신적으로 일어났다.
모리스 케이시
1. 예수의 지위는 1세기동안 꾸준히 신적 수준으로 격상되어 왔지만 유대교 유일신 사상의 제약을 받아왔다.
2. 요한 공동체가 회당에서 축출되고 이방인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갖게되자 초기 기독교는 유일신 사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로서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케이시는 고기독론은 유대교의 한 예언자였던 예수가 이방의 신으로 꾸준히 격상된 결과로 보는 구종교사학파의 주장을 되풀이 하고있다.
제임스 던
1. 유대교의 중간적 존재에 관한 전승의 영향으로 유일신 사상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하나님의 지혜의 완전한 체현으로 표현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일신 사상에 충실한 유대인인 바울의 신학적 사고가 유대교의 은유적 표현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볼 수없다.
2.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바울 시대에 약화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유일신 사상은 본격적인 고기독론 형성에 장애가 되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이르러서야 초기 기독교의 지혜사변이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수의 선재 및 성육신 기독론을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은 요한복음의 저자이다.
★ 유일신 사상에 제약을 받아오던 교회가 어떻게 요한복음에 이르러 그 제약을 벗어나 본격적인 고기독론을 형성하게 되었는가?
* 평가
1. 초기 기독론 형성에 대한 이론들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전개되는데 그 공통된 전제는 유일신 사상이 초기 기독론 형성에 장애가 되었다는 것이다. 리처드 보컴은 이런 전제에 유일한 예외다.
2. 기독교의 기원과 배경을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찾으려는 새 종교사학파는 기독교 이전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이미 유일신 사상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초기 기독론 형성에 유일신 사상이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본다.
3. 그러나 제2성전기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약화되지 않고 견고했으며 따라서 유일신 사상이 초기 기독론 형성에 장애가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이 던,케이시,보컴,허타도,이형일 등이다.
4. 던과 케이시는 유대교의 견고한 유일신 사 상때문에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그래서 주후 90년경 요한복음이 기록될 때 이르러서야 초기 기독론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본다. 케이시는 시간이 흐르면서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초기 기독교가 유일신 사상의 제약을 벗어버렸다고 구종교사학파식으로설명하지만 제임스 던은 이점에 대한 설명은 불분명하다.
5. 허타도,보컴,이형일은 모두 예수의 부활 후 매우 이른 시기에 적어도 바울 이전 시기에 빅뱅과 같이 예수의 신성이 받아들여졌다고 주장한다.
6. 허타도는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중간적 존재에 대한 전승과 종교적 체험을 통해 유대교의 견고한 유일신 사상을 재정의하고 예수의 신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 중간적 존재에 대한 사변이 어떻게 초기 기독교에 영향을 주어 유일신 사상을 재정의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논증이 불분명하다.
7. 이형일은 초기 교회가 예수의 신적 자의식에 대한 이해 및 메시아 시편의 새로운 주해가 상호 용함으로써 초기 기독론이 형성되었다고 논증하는데 여기서 그들이 어떻게 유대교의 견고한 유일신 사상을 극복했는지에 대한 논증이 불분명하다.
8. 보컴은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초기 기독론 형성에 장애로 작용했다는 학자들의 공통된 전제를 반대하는 유일한 학자다. 그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은 하나님을 신적 본질이나 특성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하는 신적 정체성으로 이해하는 신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초기 기독론 형성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고 본다. 그래서 보컴은 초기 기독교는 매우 이른 시기에 창의적인 구약해석을 통해 매우 초기부터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을 고백했다고 말한다.
바울의 기독론
2016-10-19 00:14:20
1. 지금까지 초기 고기독론을 설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은 바울의 지혜기독론이었다. 바울의 기독론이 유대교의 지혜 전승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은 성서학계의 정론에 가깝다. 바울의 기독론과 유대 지혜 전승 사이의 연계성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는 독일의 빈디쉬(H. Windisch)인데 그는 유대 지혜 전승에서 이미 메시아 개념과 지혜 개념이 융합되었고 바울은 선재적 그리스도를 하나니의 지혜와 동일시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구약과 제2성전기 유대 지혜 언어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유일무이성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사역을 문학적으로 의인화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의인화된 지헤는 예수를 선재한 존재로 이해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채탁할만한 기존 범주가 결코 아니었다.
2. 일부 학자들은 고린도 전서 1:24 ; 30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지혜 및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와 명확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이 구절의 배후에 지혜 기독론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 나오는 진술은 가독론적 진술이라기 보다는 구원론적 진술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모든 믿은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기 때문에 그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는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30절에서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선재한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만이 인간을 구원한 능력이 있다는 구원론적 진술을 하고 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24; 30 배후에 지혜 기독론이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3. 어떤 학자들은 고린도전서 8:6에서 유대지헤전승의 배경을 발견한다고 주장한다. 워더링턴(B.Withehrington)은 바울이 이 본문에서 후기 지혜 시변의 렌즈를 통해 쉐마를 읽음으로써, 이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지혜에 대해 말하던 것을 이제 동일하게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적용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본문은 지혜기독론 보다는 선재한 아들 기독론을 더 반영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한 하나님과 한 주라는 문구들이 각각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구와 평행을 이룸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암시되고 있으며 또한 바울은 구약에서 한 하나님에게만 부여하였던 주(Lord)라는 칭호는 아들에게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많은 주석가들은 반석과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고린도전서 10:4에서 필론과 지혜서로 대표되는 헬레니즘 유대교의 영향을 발견한다 그들은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인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육체적인 양식과 영젹 양식을 공급해주었음을 말한다고 주장하다. 그러나 순수한 알레고리를 사용하는 필론과 달리 여기서 바울은 한 역사적 사건에 대해 실제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고라나 고든 피가 주장하듯이 여기서 바울은 호렙산 반석의 임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반석을 동일시하는 신명기 32장 모세의 노래로 단순히 전환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그리스도의 선재성 개념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가? 제임스 던은 바울이 여기서 그리스도의 선재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였다는 진술에서 과거 시제 동사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의미를 더해준다. 바울이 여기서 과거 동사를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단순히 상징적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구약의 사건들에 나타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실체를 가리키려고 했을 개연성이 더 높음을 보여준다.
5. 로마서 11:33-36에 나타나는 찬가(hymn)는 하나님의 제혜에 대한 찬가인가 아니면 지혜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찬가인가? 일부학자들은 이 본문이 하나님의 지혜보다는 하나님의 지혜로서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찬가라고 주장한다. 핸슨(A.T.Hanson)은 이 본문에서 이사야40:13과 욥41:3이 결합되어 인용된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선재한 지혜로 언급하는 기독론적 증거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찬가에는 기독론적 언급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본문은 바울의 지혜 기독론에 대한 근거라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찬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류역사와 구속 사역을 지혜롭게 경영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가로 보아야 한다.
6. 슈바이처(엘버트 슈바이처가 아님)는 지혜서9:10-17와 갈라디아서 4:4-7 사이의 유사성을 언급하면서 이 본문이 지혜기독론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임스 던은 지혜서와 갈라디아서 본문의 유사성 및 바울 이전의 보냄 고정문구의 존재를 부인하고 오히려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맏은 자라고 말한 더 구체적인 기독교 전승(막9:37; 12:6; 마15:24; 눅4:18; 눅10:16)에서 이 진술의 배경을 발견한다. 그러나 제임스 던은 이 본문에 지혜기독론보다는 아담 기독론-구원론이 나타난다는 이유로 이 문구가 아들의 선재성을 내포한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던의 주장에 따르면 바울과 그의 독자들은 예수룰 성육신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자로 생각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던은 초기 기독교와 바울 사상을 논할 때 아담의 위체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갈라디아서 4:4-5, 로마서 8:3 그리고 고후8:9을 단순히 예수가 인류와 하나됨으로써 인류를 속박과 죄에서 구원하고 자신의 아들됨을 그들에게도 부여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특히 던은 빌립보 2:6-11의 그리스도 찬가를 아담기독론의 가장 강력한 증거본문으로 제시한다. 그는 이 찬가를 선재한 그리스도 혹은 그의 성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인간 예수와 그의 겸손한 삶 그리고 이 땅에서 영광스러운 위치로의 고양에 관한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창세기 1-3장과 빌립보 2장을 검토해보면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 및 대조가 바울의 진정한 의도였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본체(모르페)와 형상(에이콘)은 칠십인역이나 신약에서 호환적으로 사용된 적이 없으며 나아가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는 7절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라는 구절의 의미를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바울 서신에는 지혜기독론 보다는 선재하는 하나님아들 기독론이 더욱 우세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7. 오늘날 신약학계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런 칭호가 예수에게 적용된 것은 그의 하나님아들 자의식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하나님의 아들은 원래 유대교에서 하나님과 왕적 메시아 간의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였는데 초기 교회가 예수의 부활을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시점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그 칭호를 예수에게 적용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이후에 초기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점차적으로 예수의 변형사건, 수세사건, 동정녀 탄생 나아가 창제전의 선재성으로 소급하여 발전적으로 적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대표적인 학자가 제임스 던이다. 시편2:7에 대한 메시아적 주해의 가장 심오한 기독론적 함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예수는 지성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도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니었는데) 부활을 통해 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존의 지위와 신분을 확증하는 고양으로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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