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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종말론의 역사 -리처드 미들턴

종말론의 역사 -리처드 미들턴

2016-08-06 22:02:11


  1. 교회의 초반 수세기 동안에는 거의 모든 기독교 저술가가 몸의 부활을 주장했으며 부활한 몸의 물질성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에 반대했다그러나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게네스는 부활한 몸을 하늘에 거할 수 있는 영적인 몸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주류에서 벗어난 인물이었다육체의 부활의 중요성은 교회의 초기 수세기 동안 소망의 한 요소로서 거의 의심받지 않았다그런데 부활한 몸의 비물질성을 주장한 오리게네스의 견해가 대체로 거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한 몸의 이상적인 처소가 하늘이라는 그의 견해는 표준적인 견해가 되었다부활보다 더 격한 논쟁거리는 요한계시록 20단 한군데서만 등장하는 천년왕국에 대한 것이었다. 2-3세기 몇몇 기독교 저술가들은 천년왕국을 주장하고 종말론에 있어 천년왕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하지만 오리게네스는 이를 유대적이고 지나치게 문자적인 해석으로 간주했으며 에우세비오스도 이를 물질주의적 해석으로 경멸하며 거부했다오리게네스가 하나님나라를 신자의 영혼 안에 점진적으로 세워지는 것으로 보고 천년왕국의 현세적이고 물리주의적 요소를 거부했다면 에우세비오스는 하나님나라를 종말론적인 미래의 우주적 사건이 아니라 로마제국 콘스탄티누스 치하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성장으로 보고 천년왕국을 거부했다그러나 천년왕국을 주장한 저술가들에게도 내세적 열망이라는 플라톤주의 배경이 현세의 천년왕국에 대한 믿음과 결합됨으로써 우주 구속에 대한 성경의 모든 약속과 묘사는 그리스도의 천년 통치로 집약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종말의 최종 상태는 대체로 하늘로 재해석되었다. 2-3세기에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천년왕국을 단언한 기독교 저술가들이 종말의 최종상태를 현세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했는지 아니면 초월적이고 비우주적인 것으로 이해했는지 구분하기 매우 어렵다초기 기독교 교부들에게서 우주의 최종 구속에 대한 분명한 진술을 발견하기는 어렵지만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개념은 많이 나타난다교회의 초기 몇 세기동안 천년왕국 개념의 유대주의적 혹은 물질주의적 성격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계속 존속한 것을 볼 때내세에 대한 플라톤적 관점에 동화되기 시작한 이들 가운데도 현세적 구속에 대한 성경적 관점이 지속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5세기에 이르러서는 부활을 제외하고 천년왕국설과 우주의 영속적 쇄신의 개념은 기독교 종말론에서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2. 우주의 영속적 쇄신에 대한 비전은 4-5세기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 있는 종합작업으로 인해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천년왕국을 교회 전체 역사와 동일한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에우세비오스의 관점을 확대했다. 그는 미래에 있을 그리스도의 지상통치에 관한 천년왕국설과 결별하고 교회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하늘나라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는 본향이 아닌 이 세상을 통과하는 순례 여행 중이며 역사 내내 세상과 상당한 갈등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신플라톤주의에 깊이 동화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든 저작에는 신플라톤주의적인 신학적 틀이 만연해 있는데, 이것은 배타적인 두 가지 사랑(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과 일시적인 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영혼에 대비되는 몸에 대한 평가절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는 초월적이고 고상한 영역과 현세적이고 하등한 영역을 구분하는 신플라톤주의적 틀이 내재되어 있다.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와 성도들의 통치로 본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는 교회사에서 무천년설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런데 무천년설로 표현되는 역사 과정에 대한 그의 긍정적 평가는 지상역사의 궁극적인 목표가 역사를 초월한 천상의 영역이라는 그의 견해와 상당히 불일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최종 구원은 근본적으로 비우주적이고 비시간적인 것이었다.

 

  3. 사실 우주 구속의 관점은 중세 시대에 완전히 사라진다. 캐롤라인 워커 바이넘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초기 몇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소망한 몸의 부활은 재구성된 우주(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5세기 이후에 이르러는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는 사라져가고 종말론적인 열망은 점점 영혼이 가는 궁극적 처소인 하늘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회복된 지상 낙원에서 몸이 부활할 것을 기대했고 그 낙원의 도래는 임박한 것이었다. 반면에 대부분의 중세 기독교인들은 부활과 하나님나라의 도래가 지상과 멀리 떨어진 또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비물질적 영역)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몸의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세상의 멸망이 아닌 종말론적 갱신을 옹호했지만, 그도 역시 부활한 성도들이 영원을 보내게 될 새로워진 세상을 무시간적 실재이자 동물이나 식물이 없는 세상으로 이해했다. 대체로 중세 시대 신학과 주류의 종교개혁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시작된 무천년설을 신봉했다.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존재하게 될, 그 날에 새로운 존재로 일으킴을 받는다고 말했지만 그는 여전히 인간의 종말론적 구속의 최종 상태를 하늘이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우주적 회복의 중요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숙고한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냈다. 칼빈도 베드로후서 주석에서 하늘과 땅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기에 알맞도록 불로 깨끗해질 것이라고 말했고 로마서 주석에서는 하나님은 현재의 타락한 세상을 완벽한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했지만, 그도 여전히 기독교 강요에서는 하늘에 있는 영적인 그리스도의 나라와 이 땅의 일시적인 하나님나라를 구별한다. 지상에서 교회를 하늘의 본향으로 가는 순례자로 보는 칼빈의 신학에는 사회질서나 물리적 우주의 구속이 들어설 자리가 없어 보인다.

 

  4. 종교개혁 이후 이 세상의 구속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에 가장 근접한 것은 18세기와 19세기 대부흥 시대에 대두된 후천년설이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 현대적 해석은 문자적 천 년의 기간에 지상에서의 사회조건의 향상과 그 기간 끝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했다. 이런 관점은 조나단 에드워즈,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 찰스 피니의 저작에서 발견된다. 대부분의 후천년설 신봉자들은 사회변혁이 사회정책을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개인의 회심에서 비롯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후천년설은 보다 넓은 문화에 속한 사회적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신학적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실제로 18세기 윌리엄 캐리에서 비롯된 현대 선교운동의 동기를 부여한 것은 복음 전도를 통해 이루어질 후천년설의 비전이었다. 그러나 후천년설의 신봉자들이 기대한 이 땅의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의 일시적인 기간일 뿐이었고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의 최종적인 상태는 주로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존 웨슬리는 후천년설 신봉자들 가운데 종말의 최종상태에 대해 예외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는 지상 창조세계의 가치와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이 지상의 역할을 점점 더 많이 인식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로마서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 창조세계 자체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파괴되거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전혀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웨슬리는 새 창조와 같은 이후의 몇몇 설교에서 동물을 포함한 우주전체의 궁극적 구속을 명백하고 일관되게 강조한다. 웨슬리 이후 19세기에 최소한 두 가지 운동이 종말을 현세적인 상태로 상상했다. 이 두 운동은 천상을 종말의 최종적 형태로 본 전형적인 기독교적 기대에 대한 예외로 존재하는데, 그것은 제7일 안식일 재림교회와 스톤-캠벨 운동이다. 안식교의 핵심 인물인 알렌.G화이트는 역사의 절정에 이 땅에 모든 악이 제거되고 새로워지며 회복된다고 주장했다. 안식교가 처음부터 땅의 구속이 총체적 삶에 대해 갖는 의미를 규명하려 했고 보다 최근에는 윤리적 소명의 일부로서 믿음과 배움의 통합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회복주의자들로 알려진 스톤-캠벨 운동의 창시자들인 데이비스 립스컴이나 제임스 하딩도 종말에 이루어질 하늘과 땅의 항구적인 구속을 가르쳤다.

 

  5. 그러나 우주적 구속을 상상한 이런 운동들은 대단히 예외적이었고 기독교 세계의 대다수 종파에서 종말론에 대한 지배적인 생각은 내세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인간 삶의 향상에 초점을 맞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사회복음운동조차 우주적 구속을 생각할 수 있는 범주가 없었다. 20세기 초 사회복음운동의 중요한 인물인 월터 라우센부쉬는 지상에서 회복된 사회관계로 이뤄진 현세적 하나님나라에 대한 강력한 윤리적 비전을 전파했지만. 그는 이 비전을 모순되게도 내세에 대한 비물질적이고 비육체적인 관점과 결합시켰다. 역사가 리처드 타나스는 중세에 이미 사라지고 있던 교리, 즉 타락과 구속은 인간뿐만 아니라 온 우주와도 관계된다는 초기 기독교의 믿음은 종교개혁 이후에 완전히 사라졌으며 구원의 과정은 오직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만 관련되었다고 지적한다. 19세기에 등장한 세대주의자들은 기독교 종말론에서 우주의 구속 개념을 더욱 하찮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과 하나님이 교회와 맺은 언약을 날카롭게 구별하면서 역사를 하나님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 일곱 개의 구별된 세대로 나누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문자적인 지상의 천년왕국의 막을 열 것이라는 전천년설을 주장했다. 이런 형태의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현 상황에 도전하는 윤리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일반적으로 현세에 대한 비관주의와 결합되었다. 그리고 세대주의자들은 일시적 천년왕국이 끝나면 다시 비물질적인 최종상태인 하늘에 대한 관점으로 돌아가거나, 현 우주가 소멸되고 하늘과 땅이 교체된다는 개념을 주장했다. 특히 넬슨 다비가 대중화시킨 휴거라는 세대주의 교리는 휴거를 믿는 신자들로 하여금 땅의 미래를 하찮은 것으로 다루게 만들었다.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땅의 미래에 대한 이런 무관심은 분명 내세의 천상적 사고방식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북미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소비주의와 탐욕의 자유로운 지배로 귀결되었다. 왜냐하면 휴거지향적인 종말론에서 생태학적 책임내지 사회적 책임을 위한 신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6. 세대주의의 휴거교리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진보적 세대주의자들은 현세적 소망에 대한 성경의 강조와 윤리에 있어 휴거교리의 부정적 함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진보적 세대주의 신학자인 토드 맨검은 세대주의의 휴거교리에서 얻는 유익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이 교리는 윤리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며, 또한 성경이 이 교리를 분명하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럴 보크나 크레이그 블레싱 같은 진보적 세대주의자들은 하나님나라의 현세적 성격을 강조했고, 보크는 역사 가운데 개시된 하나님나라의 성경적 기초를 고찰하면서 우주 전체에서 이뤄질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긍정했다. 맨검, 보크, 블레싱 같은 진보적 세대주의자들의 접근 방식은 신약학자 조지 엘든 래드의 종말론과 상당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래드는 창조 질서의 구속에 대한 일관된 신학을 표명하면서 자신을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로 자처했다. 그는 성경에서 구원의 방향은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는 것이지 땅에서 하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고 일관되게 강조했다. 래드는 최종적 구속은 이 세상에서 또 다른 세상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다른 세상이 내려와 이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래드에게 구속의 최종 상태는 하늘에서 의인들의 영혼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구속된 땅 위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나누는 구속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7. 총체적 종말론을 향한 중요한 움직임은 무천년설을 신봉하는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서도 등장했다. 일부 개혁신학자들은 현세적인 최종상태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무천년설을 벗어난다. 핫지는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물질적 우주에 대변혁을 일으키실 것이라고 했고 후크마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뒤에 하나님이 생겨나게 하실 새 땅에 대해 말한다. 헤르만 바빙크는 하나님의 영예는 그 분이 죄로 인해 부패되고 오염된 바로 그 인간, 바로 그 세상, 바로 그 하늘, 바로 그 땅을 구속하고 새롭게 하신다는 그 사실에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 신학자 베르카우어는 새 땅에 대한 기대가 부정되거나 상대화될 때, 이 땅 위에서의 삶의 의미는 붕괴된다고 경고한다. 신칼빈주의 전통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성경적 가르침의 두 측면, 즉 문화명령과 우주적 구속에 대한 종말론적 비전에 그들의 소명의식의 근거를 두었다. 이런 전통에 입각하여 땅의 최종적 구속을 명시적으로 지지하는 저술가들로는 브라이언 왈시, 실비아 키스마트, 엘 월터스, 보우머 프레디거, 코닐리우스 플랜팅거, 폴 마셜, 마이클 고힌, 크레이그 바돌로뮤 등이 있다. 개혁주의 전통의 전형적인 무천년설과 대조적으로 이 전통에 속한 최근의 한 흐름은 일종의 후천년설을 옹호했다. 20세기 초에 시작된 기독교 재건운동은 이 세상이 기독교화할 것이고 사회가 모세 율법에 따라 운영될 것이라는 승리주의적 형태의 천년왕국 소망을 가르쳤다. 이런 형태의 승리주의는 그리스도를 위해 문화를 장악하라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요청에서 전면에 등장한다.

 

  8. 우주의 구속에 대한 성경적 비전의 회복은 개혁주의 전통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우주의 구속은 감리교 신학 전통에 속한 이들에게도 중요한 신학적 모티프였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새 창조에 대한 웨슬리의 비전으로 다시 돌아가 총체적이고 현세적인 하나님나라 의식을 제안하며 구원은 치유된 창조세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침례교 신학자 러셀 무어는 복음의 핵심은 우리가 죽을 때 하늘로 간다는 것이 아니라 대신 하늘이 내려와 땅과 우주 전체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양한 신학 전통에 속한 많은 성경학자들이 성경이 내세의 하늘이 아닌 새로워진 땅을 가르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기 시작하고 있다. 최근에 창조세계의 구속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을 성공회 신학자인 톰 라이트만큼 널리 알린 성경학자도 다시없을 것이다. 특히 라이트는 이 주제에 대한 전 세계 교회의 최고의 교사로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도 임할 하나님나라에 대한 성경의 비전이 가진 윤리적이고 심지어 정치적인 의미를 유익하게 강조했다. 그는 정통 기독교 교리는 영혼들을 창조질서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 자체에 대한 구원이라고 주장했다. 라이트는 창조자 하나님이 마지막에 온 우주를 재창조하실 것이며, 예수님이 그 새로운 세상의 중심에 계실 것이라는 믿음은 신약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2005년 세계복음화를 위한 로잔위원회에서 발간된 문건은 대중적인 기독교 종말론은 창조세계에 대한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지닌 반면에 성경적 관점은 창조세계에서 죄와 악을 제거하고 총체적 창조를 추구하는 종말론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구조선 신학을 가진 빌리 그레이엄과 깊이 관련된 이 단체가 세상의 구속을 긍정하는 문서를 발간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종말론에 관한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한가운데 있다는 분명한 표지다. 결론적으로 총체적 종말론은 땅의 번영을 위한 하나님의 원래 의도에서 시작하여 이 땅의 삶을 원래 의도대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에서 절정에 이르는 성경 역사 전체에 확고하게 바탕을 두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이런 성경적 종말론이 가진 강력한 윤리적 함의를 붙들고 씨름하며 미래에 대한 종말적 비전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구속적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는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