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 최주훈
2016-07-31 20:01:50
예배?(1)
신학교 시절이었다. 목사인 아버지가 대뜸 물으셨다. “예배는 드리는거냐, 아니면 보는거냐?” 난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예배 드리는 거죠!”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넌 국어공부 좀 더 해야겠다. 시장 보러가서 물건 눈으로 보고만 오냐?” 그러고 보니 ‘장 보러간다’는 말 속엔 눈으로 보는 것 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고파는 거래 행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따져보니 ‘예배 보러 간다’는 말도 그리 경박한 말이 아니겠구나라는 어렴풋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을 다시 ‘예배’에 적용시켜보니 뭔지 모르겠지만 2% 부족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다.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지난 번 포스팅에서 예배에 관해 생각거리를 남겨 놓은 적이 있다. 보는 것일까? 아니면 드리는 것일까? 이도저도 아니라면 어떤 서술어를 붙이는 것이 옳을까? 페친들이 댓글로 남겨놓은 제안들을 살펴보면, ‘참여하다’, 또는 ‘하다’가 가장 많았고, 간혹 ‘드리다’, 또는 ‘보다’라는 견해를 남긴 분들도 있었다. 특이하게 ‘때우다’도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댓글을 종합하자면, 그 어떤 서술어도 지배적인 용어도 찾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똑 부러지게 들어맞는 서술어가 없는 것일까? 여기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예배’라는 한자어, 신약성서에 번역된 ‘예배’, 주일 교회 공동체 모임에서 행해지는 말씀 중심의 ‘예식’(마땅한 용어를 찾지 못해 임시적으로 사용했으니 양해바랍니다), 이 세 가지가 엇비슷하기는 해도 정확히 동일한 곳을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술어를 한 가지만 제한하자니 이래저래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
단적으로 몇 가지 용례만 들어보자.
한자어 예배(禮拜)는 ‘예를 갖춰 절하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배’보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절한다’는 뜻의 ‘경배’라는 용어에 더욱 어울린다. 경배가 예배는 아니다. 일부일 뿐이지. 신약성서에서 번역된 용어는 어떨까? 가장 흔하고 대표적인 구절은 누가 뭐래도 요4:24에 나오는 경구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교회 주보나 현수막에 자주 등장하기도 하고, ‘제발 딴 짓 하지 말고 예배에 집중 좀 하라’는 목사님의 설교에 애용되는 18번 구절이다. 그런데 여기 예배라고 번역된 단어 ‘프로스쿠네인'(προσκυνειν)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예배'가 아니라 ‘기도’를 뜻한다. 그래서 요4:24절의 적절한 번역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의역하자면, '온 힘을 다해', 또는 '진심으로'도 가능하다) 기도해야 한다’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 이 구절로 설교시간에 졸지 말라는 식의 목사훈시는 하시지 말길 바란다.
성경에서 예배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들은 한 단어에 국한된 1:1 번역이 아니다. 이것은 예배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상식에 속한다.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 투시아, 프로스쿠네인, 트레스케이아, 유카리스티아, 수타키스 등등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교회라고 번역되는 에클레시아까지)
이 중에서도 우리가 ‘예배’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헬라어가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이다. 예배학자들도 이 용어를 가장 대표용어로 사용한다.(사실 이 부분도 난 미심쩍다) 이 단어는 ‘레이토스’(민중, 평민)+‘에르곤’(행동, 섬김)의 합성어다. 학자들은 이 단어를 가장 대표적인 용어로 사용하면서 ‘하나님 앞에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행동’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좀 멀리 간 것 같다. 원래 이 용어는 로마시대에 ‘로마시민의 의무’를 규정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시민전체 모임이나 종교행사 참여에 관한 시민법뿐만 아니라 국가 행사 참여규정도 여기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법적 용어를 기독교적 의미에 그대로 접목 시킨다는 게 나에겐 그리 적절치 않게 보인다. 헬라어 용어와 용법에 관한 것은 각자 예배학 사전이나 용례를 찾아보면 쉽게 찾을 수 있기에 여기서 줄여야겠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디 있을까?
보통 ‘예배’라고 정의되는 본질을 짚어보자. 우리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말씀이 선포되고 떡을 떼어 나누던 초대교회 공동체 모임’에서 유래했다. 이 모습은 구약에선 볼 수 없는 전혀 새로운 형태였다. 구약에서는 ‘제사’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그만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이후 태동한 기독교에서는 더 이상 '제사'라는 개념으로 제한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신약성서에서도 당시 모임을 우리가 하듯 ‘예배’라는 한 단어에 고정시키지 않고 다양한 용어로 표현했다. 전에 없던 것이니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후로 교회는 이 모임의 성격(말씀선포+떡을 뗌)을 규정하는 용어가 필요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와 정교회는 일반적으로 ‘유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감사)를 사용했고, 때로는 ‘유로기아’(ευλογια축복)도 사용했다. 라틴어권 교회(로마-가톨릭)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미사’(missa: 원래는 예배 의식문 마지막에 나오는 ‘가라’는 파송명령이지만 중세교회에서는 성체성사에 사용했다)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시대와 교파에 따라 다양한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전에 없던 용어이기 때문에 생겨난 용어의 다양성이 뜻하는 바가 있다. 공통점과 특수성을 함께 의미하는데, 공통성(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말씀과 성례전’이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모두가 수용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시대와 교파를 넘어 모두가 인정하는 공통분모다. 특수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각 시대와 교파별로 강조점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용어만 무조건 옳고 다른 용어는 무조건 틀리다는 식의 흑백논리는 여기서 아무 의미도 없다. 단지 신학적 강조점의 차이일 뿐이다.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보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 ‘예배’는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며 말씀이 선포되던 공동체 모임’을 뜻한다. 이 모임을 정의하는 용어는 시대와 교파에 따라 다양하다.
계속 헬라어나 라틴어가 나와서 머리에 쥐가 나는가? 그렇다면 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초간단 영어단어 하나 던져 놓고 오늘은 여기서 사라져야겠다. 독수리 타법으로 자판 두들기다보니 손가락도 아프고 팔뚝도 아프니까.....
질문:
영어로 예배를 번역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마도 ‘경배와 찬양’ 덕택에 워십(worship) 일 것이다. 이것만큼 일반적인 단어가 하나 더 있다. 서비스(service)다.
이 두 용어의 차이가 무엇일까?
이 두 가지 용어의 차이를 바로 알면 루터로 시작된 개신교 예배론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음 포스팅에서 계속.......
예배?(2)
I.
“.... 이 죄인 아무 공로 없사오나 예수그리스도 의지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우리교회 머리 하얀 권사님들 기도 관용구다. 예전엔 이 기도에 숨겨진 가치가 무엇이지 잘 몰랐다. 그저 의례껏 하는 기도 끝말잇기 정도로 알았다. 그런데 신학을 깊이 공부하면서 이 짧은 말에 개신교 신학의 정수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은총만으로(SOLA GRATIA),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말씀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 이 네 가지 SOLA는 종교개혁신학의 핵심가치다.
이 말을 풀어 살을 붙여보자. ‘나는 구원받을 가치(공로) 없는 자(죄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를 구원받기에 합당하다고(의롭다고) 선언해주셨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칭의론이고 종교개혁의 핵심주제였던 루터의 칭의론이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그저 신학생들의 조직신학개론서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개신교인의 모든 삶의 영역까지 아우른다. 그러고 보니 우리교회 권사님들은 신학을 모른다고 손사래치시지만 알고 봤더니 고수들이었다.
복잡한 신학 용어와 설교체 수식문장을 모두 접어놓고 개신교 신학에 ‘옥캄의 면도날’을 사용해보자. 그러면 이 문장만 남는다. “주체는 하나님이다.” 은총의 주체도 하나님, 믿음의 주체도 하나님, 말씀의 주체도 하나님이다.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간명한 문장이 개신교 신학의 핵심가치다.
방향으로 따져보면 ‘하늘에서 땅으로’,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이 은총, 믿음, 말씀, 그리스도다. 이 문장에 여러 살이 붙어서 소위 ‘신학’이라고 부르는 여러 단층들이 등장한다.(예: 신론, 기독론, 성령론, 창조론, 예배론, 조직신학, 기독교윤리 등등)
II.
자, 이제 이 내용 - “주체는 하나님이다.” - 을 지난 번 포스팅과 잇대어 엮어보자. <예배1>의 내용을 간추리면, 우리(기독교)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의 모형은 ‘말씀이 선포되고 떡을 뗌’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 권사님들 기도 정형구대로 “아무 공로 없사오나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은총의 사건이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주는 은총이다. 이 방향성이 중요하다.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을 “성례전적 요소”(sacramentum: 솔직히 이 용어의 번역도 못마땅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다)라하고, 아래서 위로 올리는 것을 “제사적 요소”(sacrificium)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제사는 아래서 위로 올리는 것이고, 신약에서 나온 말씀과 떡은 위에서 아래로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개신교 신학에선 언제나 이 방향성이 매우 중요하다.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것을 ‘은총’(혜)이라 부르고, 아래서 위로 가는 것을 ‘공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항상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을 중시한다. 그래서 ‘아무 공로 없사오나 그리스도 의지하여 기도한다’는 머리 하얀 우리 권사님의 기도는 가장 개신교적인 훌륭한 기도다.
이것은 개신교 예배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이미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했다시피, 시대와 교파에 따라 예배의 용어는 강조점을 달리했다. 그러나 공통분모는 언제나 ‘말씀선포와 떡을 뗌(성만찬)’이라는 두 기둥을 유지했다.
이 대목에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중세 말기 상황을 짚어보자. 이 때 로마교회는 예배를 ‘미사’라고 부르면서, 말씀 강론보다 희생제사의 성격을 강조하는 미사(성체성사)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중세 신학에서 성찬은 곧 예수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행위로 이해되고 있었다.(로마교회, 루터, 쯔빙글리, 칼뱅 성찬이해 비교는 이전 7.16-17 포스팅을 참조하라)
(여담이지만 개신교에서는 소위 ‘강대권’(?)이라고 하여 주일 '대예배'(? '대'자가 꼭 들어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때 담임 목사 외에 다른 사람이 설교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그런데 로마-가톨릭에선 미사 때 설교를 개신교 목사에게도 아주 쉽게 맡길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런 경우를 몇번 보았다. 그러나 성찬집례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
이것을 방향성으로 따져보면, ‘아래서 위로’ 향한다. 아래서 위로 향하는 것은 이 뿐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상징인 ‘면죄(벌)부’(가톨릭에선 ‘대사’라고 부른다) 역시 ‘아래서 위로’ 올리는 제사적 기능을 스행한다. 소위 ‘공로’로 부르는 모든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 중세 신학은 이런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루터는 이 방향을 역전시킨다. 이것이 종교개혁이고 개신교 신학이다.
그럼 어떻게? 오늘 이야기는 ‘예배’이니, 여기에만 초점을 두고 말해보자.
III.
루터는 라틴어 ‘미사’를 독일어 ‘고테스딘스트’(Gottesdienst: 영어로 바꾸면 Divine Service다)로 바꾸어 놓았다.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여기엔 매우 심오한 뜻을 담았다. 이는 두 단어의 합성어(Gott+Dienst)인데, Gott은 ‘하나님’(God), Dienst는 '봉사, 섬김, 일하다, 행동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합쳐 놓으면 ‘하나님이 일하신다, 섬기신다. 봉사하신다’라는 뜻이 된다. 누구를 위한 행동이고 일일까? 바로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고 일이다. 이게 종교개혁신학이 담고 있는 예배다.
물론 독일어 특성상 다른 번역도 가능하다. 주격인 하나님을 목적격으로 바꾸어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께 봉사한다”라는 뜻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루터가 분명히 강조하는 있는 것은 미사와 대립된 성격의 의미다. ‘아래(인간)서 위(하나님)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의 신학적 의미다.
다시 말해 루터에게 예배(Gottesdienst)란 인간의 행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행동’에 방점이 있다. 다시 말해 ‘아무 공로 없는 죄인을 위해 일하시는 은총의 사건’이 개신교 예배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하나님은 일하실까? 바로 말씀과 성례전(성만찬)이다. 루터는 이것을 회복시킨 것이다. ‘말씀 선포와 떡을 뗌’
그래서 루터에게 예배는 곧 죄인을 불러, 은총(말씀과 성찬)으로 위로하고, 먹이고, 힘을 주어 다시 세상으로 파송하는 복음의 사건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경배와 찬양’ 과 질적으로 다르다. 콘티 만들고, 기도로 준비하고, 땀과 물질로 제단 앞에 희생하는 것들은 사람의 일이다. 그러나 예배는 자격이 없는 자들, 힘없고 연약하며, 울 수밖에 없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이 초대하여 기쁜 소식으로 누리게 하는 것이 개신교 예배다. 그러나 '예배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힘 빼며 서로 맘 상하지 말고 외려 주님이 주실 은총이 무엇인지 기대하는게 어떨까?
이제 지난 번 포스팅 말미에서 고민거리로 던진 것을 이쯤에서 풀어도 될 것 같다. SERVICE와 WORSHIP의 차이 문제였다.
절대로 엉뚱하지 않은 질문 하나, 다시 투척한다. 당신이 신발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 그렇다면 누가 서비스의 주체고 누가 대상일까? 물어보나마나 서비스의 주체는 백화점이고, 대상은 물건 사러 간 당신이다. 영어로 예배를 서비스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서비스의 주체를 하나님이고 서비스 받는 대상을 사람이라고 하면 무리일까? 앞서 루터가 예배를 고테스딘스트라고 번역했다고 언급하면서, 나는 ‘매우 친절하게’(실제로 난 매우 친절하다) divine service라는 영어 번역도 곁들여 놓았다. 하나님의 서비스라는 뜻이다. 조금 감이 잡히시는지?
개신교 예배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불러 은총으로 일하신다. 방향으로 따지면 ‘위에서 아래로’, 신학용어로는 ‘은총’의 사건이 예배다.
그럼 Worship과 차이가 있을까? 있다! 그것도 하늘만큼 땅 만큼!
WORSHIP의 원형적 단어는 weorthscip-worthship-worship이다. 풀어 설명하면, ‘가치를 위로 올려드린다’는 의미가 강하다. 아래서 위로 올리는 제사적 의미다. 냉정히 따져보면 Divine Service와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worship이라는 용어에 담긴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 worshipservice라는 말도 생겼다. 자동차에 부동액 보충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뭐,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예배에서 은총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행동을 인식하고 강조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다.
IV.
“예배는 하나님의 행동이다!” 이렇게 해 놓고도 뭔가 2% 부족하게 느껴지는 게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예배의 형식에는 기도도 있고, 찬송도 있고, 봉헌도 있는데, 하나님이 노래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헌금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기도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럼 이것은 무엇인가?
루터의 말로 풀어보자. 루터가 자신의 종교개혁신학을 머리에 담아 스스로 설계해서 세운 교회가 있다. Torgau교회인데, 1544년 교회를 다 지은 다음 입당 예배 때 이런 설교를 하게 된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시고, 우리는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말한다”(Gott redet mit uns durch sein Wort, und wir reden mit ihm durch Gebet und Lob)
간단한 문장이지만 여기에 개신교 예배의 핵심이 담겨 있다. 우선 순서를 보자. 우선순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선포된 말씀인 설교’와 ‘보이는 말씀인 성례전’이다. 이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고 채우신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은총의 사건에 반응한다. 무엇으로? 기도와 찬양, 감사, 봉헌 등이다.
다시 말해 예배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거룩한 소통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은총으로 죄인을 불러 힘을 주신다. 그리고 인간은 그에 감사함으로 반응한다. 여기서 순서가 바뀌면 곤란하다. 예배는 첫째로 하나님의 일이고, 두번째로 인간의 반응이다. 이 둘은 예배 시간에 끊임없이 교차하며 소통한다.
개신교인이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은총의 사건이다. 이게 흔들리면 곤란하다.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다. 은총을 주시는 분(구원의 주체)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루터)
V.
종교개혁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감초처럼 등장하는 독일 Augsburg교회 본당 대문 위에 이런 명패가 달려 있다. ‘Bedenke, wem du vor stehst!’ 번역해보면 이렇다. ‘잘 고민해봐라, 너는 누구 앞에 서 있는가?’
나는 어떤 교회라도 본당에 들어갈 때 문앞에서 이 문구를 항상 생각한다. 그리고 본당 문을 열며 하나님 앞에 선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다. 왜냐하면 ‘아무 공로 없지만 나를 불러 말씀과 성찬으로 위로하고, 소망을 주고,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시는 은총의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오라! 돈 없는 자도 나오고, 병든 자도 나오고, 슬픈 자도 다 오라. 주님이 모두 마시게 하고, 위로하며, 고치실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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