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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학 개론- 앤서니 티슬턴

성경해석학 개론- 앤서니 티슬턴

2016-07-25 19:45:44


 

4장 고대 세계에서 시작된 영원한 질문의 유산: 유대교와 고대 그리스

 

1. 기독교적 유산: 랍비 유대교의 해석학

유대교 내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세한 한 가지 해석 방법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 초창기 시절에 유대교는 다양한 해석 방법을 사용했다. 그리스도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랍비 유대교는 역사적인 또는 상당한 수준의 문자적인 접근법을 활용했으며 유대교의 다른 분파는 미드라쉬와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종말론적 주해나 상징적 해석을 이용하기도 했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이런 다양한 해석 접근법을 다 물려받았다. 기독교는 유대교로부터 여러 다양한 해석 방법과 함께 해석학적 문제들도 물려받았으며 이 방법과 문제 대부분은 현재 우리에게도 존속하고 있다. 모든 유대인은 성경 전체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으며 성경은 일관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매개한다고 믿었다. 유대교 최초의 성경해석은 2세기에 등장한 팔레스타인 탈굼일 것인데 여기에는 아람어 번역과 회당의 청중을 위한 텍스트 해석이 함께 등장한다. 탈굼은 번역으로 시작되었고 결국 하나의 해석이 되었다. 칠튼은 현존하는 구약의 아람어 버전인 탈굼들에서 취한 특정한 독해는 신약의 구절들과 놀랍게 유사하다고 말한다. 탈굼이 정형화되면서 여기서 탈무드가 탄생하게 되는데 탈무드는 탈굼보다 훨씬 방대한 양의 세부 사항을 포함하고 있다. 탈무드는 미쉬나보다도 더 분명한 방식으로 성경이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는 믿음을 표현한다. 따라서 탈무드는 성경의 대체물이 아니라 성경의 보충으로서 성경 저자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 대해 성경을 적용시키려고 노력한다. 탈무드는 미쉬나와 같은 제목과 부분으로 구성되기는 했지만 미쉬나를 뛰어넘어 더 멀리 나아간다. 에른스트 폰 돕쉴츠의 말대로 모든 해석학은 필연적으로 텍스트를 보충한다.

 

2.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교 문헌

첫째로 우리는 70인경으로 알려진 히브리어 성경의 그리스도 번역본과 접하게 된다. 70인경 텍스트는 히브리 맛소라 텍스트보다 더 오래된 것이긴 하지만 70인경과 그 유사 판본들은 몇몇 부분에서 맛소라 텍스트를 개작하거나 확장된 히브리어 번역을 포함한다. 마틴 헹엘을 비롯한 학자들은 탈굼과 70인경 사이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헬레니즘 유대교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엠마뉴엘 토브를 비롯한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70인경은 시초에는 단 하나의 원본 텍스트가 존재했지만 여기서부터 다양한 텍스트적 전통이 생겨났고 이 전통이 각각 분리된 학파들에 의해 보존되었다고 설명한다. 어떤 학자들은 정확하고 믿을만한 번역의 지위를 얻기에 70인경은 위험하거나 불성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70인경이 초대교회의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바울은 맛소라 텍스트보다 70인경을 더 자주 인용했고 요한복음과 계시록도 70인경을 주로 활용하고 있으며 히브리서 저자는 오직 70인경만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오리게네스를 위시한 대부분의 교부들도 주로 70인경을 사용했다. 결론적으로 학자들 대다수는 주전2-3세기 유대교의 정신을 밝히는데 있어 70인경이 주된 역할을 한다는데 모두 동의한다, 헤롯(주전43-4) 이후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들인 유대교에서 그리스어로 기록된 유대문헌은 증가해왔고 1세기 당시에 디아스포라 유대교는 수적 영향력 면에서 중요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로마, 알렉산드리아, 시리아의 안디옥 등 그리스어권의 중심 도시에 광범위하게 퍼져 살았다. 이 시기에 등장한 그리스어로 기록된 대표적인 유대교 문서는 마카베오4, 지혜서, 아리스테스 서신 등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이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인데 그는 알레고리적 해석의 고전적인 주창자였다. 필론의 해석이 디아스포라 시대의 헬라화된 유대 사상을 대표하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는 모세를 숭배하는 동시에 위대한 플라톤에 대해서 말했으며 호메로스를 위시한 그리스 작가를 인용했다. 그는 그리스와 유대 세계 양쪽에 속한 사람으로서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에 독보적인 인물이다. 필론의 해석학이 변증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지상과 영적 영역 사이의 플라톤적 대조를 전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텍스트의 본성이나 장르를 근거로 자신의 방법론을 방어하려고 시도했다. 필론에게 성경 해석을 지배하는 중심 개념은 하나님의 초월성이었다. 그는 성경과 유대교에 충실하려고 하는 동시에 플라톤주의, 스토아주의, 신파타고라스주의를 포함한 그리스 철학에 정통했고, 로마의 지식인 계층에게 유대교를 권유했다. 필론의 영향력은 교부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필론 외에 이 시기 대표적인 헬라적 유대인으로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있다. 그는 유대교가 로마에 대항하여 벌린 전쟁에 반대했으며 예루살렘이 포위된 기간에도 유대인들에게 티투스 황제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유대인의 역사를 천지창조로터 다룬 대작 유대 고대사를 저술했지만 성경 해석자로서 요세푸스는 로마에 적대적인 부분을 성경에서 삭제했다는 오점을 남겼다.

 

3.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 묵시문학

이 시기에 등장한 묵시문학 문헌들은 에녹1, 솔로몬시편, 에스라4, 바룩2, 열두 족장의 유언 등인데, 이 문헌들의 일반적인 내용은 이 세계는 너무 악하여 개혁되는 것이 불가능하고 인류는 하나님이 새 창조와 부활을 가져오실 때, 즉 하나님이 역사 속으로 결정적으로 뚫고 들어오실 때를 기다려야 하며, 이 일은 곧 일어난다는 것이다.

 

4. 해석의 그리스적 뿌리 : 스토아 학파

주전 6-7세기 그리스에서 등장한 쟁점은 알레고리적 해석 방법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텍스트를 알레고리적으로 읽는 것이 정당한가를 놓고 논쟁했다. 알레고리적 해석이란 텍스트의 정상적인 일상의 사전적 의미로부터 다른 의미를 전제할 수 있다고 믿는 해석학적 절차를 의미한다. 그러나 알레고리적 해석은 독자나 해석자가 텍스트의 기저를 이룬다는 입장은 아니다., 주전 6세기의 테아게네스는 호메로스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인물이었고 주전 5세기의 메트로도루스도 호메로스의 신들의 이야기를 인간 신체의 일부를 지시하는 알레고리로 이해했다. 이런 전통을 따라서 스토아 학파의 창시자인 제논도 알레고리적으로 헤시오도스를 읽어냈다.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과 수사학자들도 알레고리적 해석을 활용했다. 그러나 플라톤은 알레고리적 해석에 엄격한 제한을 두었는데, 그는 알레고리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텍스트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그 자체로 알레고리적인 텍스트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플라톤과 동시대 저술가들은 알레고리보다는 휘포노니아(숨겨진 의미, 또는 심층적 의미)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그리스 사상가들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저술에 알레고리적 해석을 적용한 반면에 유대 사상가들은 히브리어 성경 자체가 가진 알레고리적 해석에 주목했다. 사실 구약의 몇몇 구절은(예를 들면 에스겔 17:1-10) 그 자체로 이미 알레고리적 텍스트다. 그런데 성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촉발한 것은 텍스트가 속한 장르에 대한 관심보다는 신적 초월과 신인동형론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점과 관련하여, 필론은 텍스트의 초점을 특수하고 시간에 매인 상황으로부터 일반적이고 철학적인 원리의 차원으로 확대시키기 위해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활용했다고 통찰력 있게 지적한다. 하지만 에코는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의 알레고리는 텍스트의 초점이 기독교적 적용에 있어 협소해지는 역효과를 낳았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의 알레고리적 해석에서는 종교적인 의미가 철학적이고 세속적인 의미로 대체되었지만,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알레고리 해석에서는 종교적 의미가 세속적이고 평범한 의미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임을 암시한다.

 

 

5장 신약과 2세기

 

신약은 해석에 대해 다음 3가지 쟁점을 제시한다. 첫째 신약의 몇몇 성경 구절들은 예수와 구약을 하나님이 세상을 다루시는 방식에 대한 준거체계로 간주한다,. 둘째, 신약의 어떤 텍스트들은 특정 견해를 나타내기 위해 예표론적이거나 알레고리적 해석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신약의 다른 구절들은(예를 들면 마태복음 1-3) 나사렛 예수를 구약의 저자들이 오랫동안 예언해온 바로 그 존재와 동일시한다,

 

1. 준거 체계 혹은 선이해로서의 구약: 바울과 복음서들

우리는 신약은 구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해석하기 위한 준거체계 혹은 선이해를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견해를 검토해야 한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사,”(고전15:3)라는 구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이해하는 열쇠가 구약에 있음을 말해준다. 울리히 루츠는 바울에게 구약은 일차적으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구약 자체가 그에게 이해를 창조해 낸다.” 고 말한다. 앤더스 에릭슨은 바울의 논증과 교회에게 바울 이전에 존재했고 공유되었던 사도적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한 바 있다. 구약의 역사적 지평은 때가 충분히 찼을 때”(4:4)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실 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복음서 저자들과 바울에게 제공했다. 이런 사실은 해석학에 대한 현대적 논쟁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2세기 마르키온 이래 수많은 사람들은 실제적으로 구약을 한편에 제쳐놓았다. 구약이야말로 예수와 신약 시대 교회의 경전을 구성하는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신약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여정으로 가는 적절한 선이해는 구약에 의해 형성된다. 만약 슐라이어마허가 신약, 칸트, 계몽주의, 당대의 독일문학에 심취한만큼 구약에도 정통했다면 그는 아주 다른 신학을 집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불트만 역시 이런 점에서 슐라이어마허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롱게네커를 비롯한 이 분야 전문가들은 히브리 성경이 그리스도의 오심, 그의 사역, 복음서들을 해석하는데 선이해 혹은 준거체계를 제공한다고 간주했다. 톰 홀랜드는 자신의 최근 연구에서 바울의 사상이 구약에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바 있다.

 

2. 히브리서 베드로전서, 요한계시록: 선이해로서의 구약

히브리서 전체의 중심은 중보자 혹은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의 개념이다. 바울의 이신칭의나 화해론, 요한의 새 생명 의미와는 다르게 히브리서의 주제는 예전적 방법론의 모델을 기반으로 한 하나님 개념에의 접근이다. 믿음을 이야기하는 히브리서 11장은 구약으로부터 뽑은 사례 연구로 가득 차 있다. 베드로 전서의 경우 그 독자들은 새로 개종한 이들이었고 저자는 이들에게 복음을 이해하는 준거 체계로서 구약을 가르칠 목적으로 이 서신을 집필했다. 베드로 전서 2장은 신약의 신자들이 그 자체로 구약의 거룩한 제사장이자 영적인 성전이며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말하는데 구약의 준거 없이는 독자들은 결코 이 텍스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요한계시록의 경우, 이 책에 나타난 상징체계는 구약의 다양한 상징의 배경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당혹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복잡하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구약에 나타난 신적 계시와 그리스도와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구약을 상징을 담은 풍부한 레퍼토리로 취급한다. 핸슨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성경 활용은 소위 페쉐르(종말론적 해석) 주해보다는 예표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구약의 언어를 집어넣어 자신의 비전을 펼치고 있는데, 이때 구약의 언어는 기독교 시대와 구약 시대 그리고 자신의 비전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설명하는 해석 체계가 된다. 케어드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의 상징체계는 구약으로부터 도출된 것이지만 철저하게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변형되었다고 말한다.

 

3. 신약은 알레고리적 해석이나 예표론을 활용하는가?

많은 학자들은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가능한 반론 중 하나는 신약 저자들은 알레고리가 아니라 예표론을 사용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넓게 보아서 필론의 시대는 바울이 초기 서신을 집필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렇다면 필론과 마찬가지로 바울과 신약저자들은 구약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했던 것일까?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에서 창세기에서 발견되는 하갈과 사라 사이의 대조를 논의하고 있다. 브루스는 자신의 갈라디아 주석에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필론이 사용했던 의미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통상적으로 예표론이라 불리는 형태의 알레고리였다고 정확히 지적한다. 반면에 앤드류 라우스는 알레고리와 예표론 사이의 엄밀한 구분을 거부하면서 바울이 사용한 것은 알레고리라고 주장한다. 사실 필론이 사용한 알레고리와 예표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알레고리는 두 개의 세트를 이룬 개념들 사이의 평행, 일치, 공명을 상정하는 반면에 예표론은 두 개의 세트를 이룬 사건들 또는 사람들 사이의 평행이나 일치를 상정한다. 제임스 스마트는 알레고리와 예표론의 차이를 신학적 용어로 이렇게 표현했다. “예표론은 사건의 역사적 실재성과 단단히 결합되어 있지만 알레고리는 역사적 실재를 중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역사로부터 원래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현재적 의미를 도출하고자 한다.” 핸슨도 바울은 (필론과는 달리) 시간을 초월한 도덕이나 철학적 진리로 이해하기 위해 구약 구절의 의미를 역사적 컨텍스트로부터 해방시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고펠트도 같은 지점을 지적하면서 필론에게 알레고리는 가시적 세계로부터 더 상층의 개념의 세계로 진보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램프와 울콤브는 알레고리와 달리 예표론은 구약의 특정한 사건, 인물, 사물과 신약의 사건, 인물, 사물 사이에 역사적 연결을 정립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랜트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신약 저자들이 알렉산드리아 스타일로 알레고리적 해석을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런 판단은 극단적으로 조심스러운 판단이다. C.H. 도드는 신약저자들은 구약의 첫 번째 역사적 의도로부터 시작되는 가이드라인을 따라 구약을 해석했으며 이 가이드라인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했다. 즉 그들이 고려한 것은 전체적인 컨텍스트였으며 역사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도드의 결론은 신약저자들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구약저자들의 의도와 일치했다는 것이다.

 

4. 바울의 난해 본문: 70인경인가 히브리 성경인가?

힐렐에서 아퀼라에 이르는 유대 랍비들은 70인경의 번역본들이 히브리 성경의 부정확한 번역이라고 비판했지만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그리스어 번역본을 자주 활용했다. 크리스토퍼 스탠리는 바울 서신을 연구하면서 구약의 인용구들이 히브리 성경에서 온 것인지 70인경에서 온 것인지 조사하여 바울의 구약 인용과 70인경은 각각 히브리 텍스트에 대한 독립적 버전임을 논증했다. 리처드 헤이스, 고든 피, 티슬턴은 바울의 구약 인용의 방법론은 인용 본문이 위치한 더 넓은 컨텍스트를 관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드는 바울과 다른 신약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하면서 자신들 고유의 컨텍스트로 옮겨와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5. 복음서, 베드로전서, 히브리서의 구약 인용

많은 학자들은 마태복음의 구약 사용이 특이하다고 언급한다. 마태복음에는 60개 이상의 명시적 구약 인용이 있으며 구약을 암시하는 부분도 많다. 특히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구약의 성취와 연관시킨다. 크리스터 스탠달은 구약의 성취라는 양상은 마태 학파의 생산물일 뿐 아니라 유대교의 페쉐르 주해(이것은 저것이라는 식)를 표상한다고 지적한다. 일부 급진적 학자들은 마태가 구약 예언과 맞아 떨어지도록 만들기 위해 사건을 재구성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상대적으로 마가는 마태만큼 구약에 대한 관심과 전문적 지식이 없는 듯 보이지만 마가 역시 구약을 예수와 복음에 대한 준거 체계로 이용한다. 복음서 기자 가운데 유일하게 누가는 이사야 53 12(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으니)을 예수의 수난 내러티브와 연관시키는데 이 인용구는 70인경과 대체로 일치한다. 누가의 독자들이 이방 출신 그리스도인들이었음은 명백하지만 누가 역시 마태, 마가와 마찬가지로 구약을 복음 선포에 대한 준거 체계로 간주했으며 구약을 자주 인용하거나 암시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핸슨이 지적하듯이 요한복음은 성경에서 유래하는 전통적 인용구를 사용하며 때로는 구약이 도입부 정형구와 함께 인용된다. 또한 요한복음에는 구약의 명시적 인용과 암시적 인용이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요한의 암시적 구약 인용은 오늘날의 표현으로 상호 텍스트적 공명 속에서 볼 때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베드로전서는 구약 선지자들을 성령의 영감을 받은 자들로 이해하며 이사야서의 네 번째 종의 노래를 인용하며 예수를 귀한 피를 흘린 어린 양으로 표현한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뛰어난 기술을 사용하여 구약을 활용한다. 히브리서에서 구약 인용은 논증을 이끌어가는 주축이라 할 수 있다.

 

6. 2세기의 해석과 해석학

신약의 구약 인용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마르키온과 관련된 최초의 해석학적 투쟁이 구약의 지위에 관한 문제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논쟁에 직접 참여한 사람은 기독교적 견해를 수호했던 이레나이우스와 마르키온을 비롯한 몇몇 영지주의자들이었다. 주후 85년에 소아시아의 폰투스에서 태어나 140년경 로마에 온 마르키온은 영지주의 교사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 영지주의 교사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대조되는 유대교의 하나님이 유대인의 성경인 구약을 영감했다고 믿었다. 마르키온은 문자적 의미를 주장하면서 알레고리적 해석을 따라 성경을 재해석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구약은 오직 유대교를 위한 경전이므로 그리스도인과는 상관없는 텍스트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다시 정경을 확립했는데, 그가 세운 정경에는 누가복음을 제외한 복음서가 모두 배제되었고 그나마 누가복음도 많은 부분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는 목회서신을 배제하고 바울의 10개의 편지는 유대교의 영향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편집하여 남겨 놓았다. 이레나이우스에 의하면 마르키온은 구약이 선포하는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가르쳤다고 비판했으며, 테르툴리아누스는 폰투스의 이단이 두 명의 하나님을 만들어냈다고 비판했다. 영지주의 저술가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신약의 언어를 사용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영지주의가 2세기의 가장 강력한 사상 운동이었고 이후에도 영향력을 미쳤다고 말한다. 영지주의 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분파는 발렌티누스파였고 마니교도들은 아우구스티누스 시대까지 존속했다. 일반적으로 영지주의자들은 반유대주의자였으며 그들은 구약의 많은 특성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영지주의가 신약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주창한 새뮤얼 라오이클리는 발렌티누스파를 바롯한 영지주의 텍스트에 신약의 용어가 가득함을 증명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한 신약 용어들이 대부분 바울 서신이나 공관복음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원래의 프레임 속에 있던 의미, 즉 성경 속에 있던 의미와 그것이 삽입된 프레임 속의 의미 사이에는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지주의자들이 사용한 신약의 용어는 같은 단어지만 다른 함축을 가지며 문장들도 전혀 다른 빛에 비추어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처럼 한 단어의 사용이 그 단어의 표면상의 양상과 항상 대응하는 것은 아님을 잘 보여준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자들이 원자론적이고 비일관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사용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체계를 뒷받침하려고 성경을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레나이우스는 성경 해석에서 성경의 컨텍스트 및 장르에 주의를 기울일 것과 동시에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도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만의 합리성을 주장하며 모든 것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한 교부들을 반박했다. 초기 교회의 변증가였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이성의 보편적 로고스를 주장했다. 영지주의와 이단 사이의 관계에 있어 유스티누스가 언급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로고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고 참된 표현에 도달한 로고스에 대한 주장이다. 그에 의하면 신적 계시는 로고스인 그리스도와 기록된 텍스트로서의 성경, 이 두 가지 형식을 취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구약의 여러 인물과 사건을 인정하면서 명시적으로 예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알레고리라고 기술했다. 유스타누스가 문자적 해석을 자주 활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인데 그가 자주 사용한 것이 알레고리인지 예표론적 해석인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아무튼 구약 성경이 유스티누스의 논증에 준거 체계를 제공했으며 그가 구약의 개별 구절들을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행적을 예표하는 것으로 본 것은 사실이다. 유스티누스와 대조적으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는 알레고리도 예표론도 사용하지 않았다. 성경의 컨텍스트와 장르에 대해 강조한 이레나이우스와는 대조적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비밀스런 유사 영지주의적 전통을 믿었다. 핸슨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더불어 알레고리는 알렉산드리아뿐 아니라 필론 계열의 작가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클레멘스의 성경 해석은 유스티누스, 특히 이레나이우스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클레멘스는 오리게네스와 그 계승자들을 위한 길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양상은 대부분 신약 저자들과 다르다.

 

 

6 3세기에서 13세기까지

 

1. 로마 전통:히폴리투스, 테르툴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 히에로니무스

3세기 초에 활동한 서방 라틴 신학의 주요한 성경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히폴리투스는 기독론적 해석에 초점을 맞춘 유스티누스와 이레나이우스를 추종했는데, 특히 사도신경의 전통과 신앙규범을 강조한 이레나이우스의 모범을 따랐다. 또한 그는 구약의 지위에 대해서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의 저술, [이단에 반대하는 규정]  [마르키온을 반박하며]에서 영지주의자들과 마르키온을 공격했으며 이들의 성경 오용으로부터 성경을 수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구약에 대한 마르키온의 공격을 대항하여 열성적으로 구약 사용을 옹호했으며 성경은 교회에 속한 것이며 호기심의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교리와 성경 해설을 씨실과 날실처럼 엮으며 글을 썻다. 4세기 상황을 대표하는 인물은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다. 그는 본질적으로 목회자이자 가르치는 역할을 수행한 주교였기에 그의 성경 주석의 주된 목적은 설교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거나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다양한 텍스트를 신중하고 책임감있게 활용하였는데 이런 그의 작업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목적과 동시에 도덕적 가르침과 영적이고 헌신적인 목적을 가진다. 4세기를 특징짓는 암브로시아스터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한 섬세한 주석가였으며 개별적 성경구절이 담고 있는 역사적, 언어학적 컨텍스트를 면밀하게 관찰했다. 히에로니무스는 4세기와 5세기를 연결하는 인물로서 뛰어난 번역가이자 본문 비평학자였다. 그는 필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안디옥 학파와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와 유대적 해석 방법에 정통한 당대에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로서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로 텍스트를 정립하는 어려운 작업을 했으며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에 대한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 성경을 만들었다. 그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성경 텍스트의 영적 의미를 찾아가는 알렉산드리아식 방법론을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역사적 컨텍스트 안에서 발견되는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해석의 시작점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단어가 아니라 의미를 번역한다고 말함으로써 문자적 의미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제한하였으며 이후에 자주 오리게네스에게서 끌어낸 영적인 해석으로 이행하기도 했다.

 

2. 알렉산드리아 전통: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디디무스, 키릴루스

경이로운 생산력을 지닌 창의적이며 다재다능한 학자로 알려진 오리게네스는 변증가이자 설교자, 철학적 신학자이며 본문 비평가 및 성경 주석가였다. 하지만 그의 사변은 정통 교리로부터 실질적으로 또는 잠정적으로 일탈해갔으며 그 결과 553년 제5차 공의회에서 이단 선고를 받음으로 그의 수많은 저술은 금지되거나 소실된다. 오리게네스의 핵심 관심사는 성경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이며 성경이 어떻게 이해되어왔는가 하는 문제다. 그는 사도적 전통이나 신앙규범이 중요하다는 것과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쓰인 것이라고 믿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성경 전권에 대한 주석을 썼다고 전해진다. 그는 성경의 모든 단어가 심오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했는데 그에게 모든 역사적 구절은 육체에 비교되는 문자적 의미, 영혼에 비교되는 도덕적 의미, 정신에 비교되는 영적 의미를 가졌다. 이런 그의 주해방법은 주로 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문자적 차원에서 성경은 모순을 포함할지 모르지만 영적 차원에서는 언제나 참이라고 말하면서 자주 알레고리적 의미를 변증의 도구로 활용했다. 그의 사상은 때로는 필론과 때로는 클레멘스와 유사하게 들린다. 우리는 오리게네스가 성경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문자적 의미를 느슨하게 놓아버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이런 관점에서 그에 대한 안디옥 학파의 반박을 공감할 수 있지만 그가 영적 의미를 추구한 것은 부분적으로 독자들을 위한 목회적 관심 때문이었다. 크리소스토무스를 위시한 안디옥 학파가 일차적으로 성경의 저자나 기록자의 목적과 의도에 관심을 집중한 반면, 오리게네스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주로 독자와 독자에게 미치는 텍스트의 효과에 집중했다. 오리게네스는 영지주의에 대항해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기 위해서 구약의 합리성을 구출하는 방법론으로 필론과 클레멘스의 길을 따라갔다고 보인다. 4세기에 가장 중요한 신학자중 한 사람인 아타나시우스는 주로 변증적이고 신학적인 목적을 위해 성경을 사용했는데, 그는 개별적 구절들이 성경 전체의 조망과 함께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성경의 구절들은 신앙 규범과 일치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아타나시우스도 구약을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한 텍스트로 이해하기는 했지만 그는 오리게네스보다는 성경의 육체적 의미를 존중한 것 같다.

 

3. 안디옥 학파: 디오도루스, 테오도루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테오레투스

안디옥 학파가 저자보다는 독자의 측면을 중시한 오리게네스의 해석에 반대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안디옥 학파는 오리게네스가 추구하는 성경 텍스트의 영적인 의미가 너무 쉽게 해석자 또는 독자의 관심의 거울로 변해버렸음을 지적했다. 안디옥 학파의 디오도루스는 알레고리적 의미보다 텍스트의 역사적 이해를 선호한다. 그러나 안디옥 학파를 은유나, 비유, 예표론적 독해를 거부한 경직된 문자주의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디오도루스에게 역사적이란 의미는 텍스트의 저자가 삶의 정황 또는 배경에 의해 조건 지워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는 이것을 주해를 위한 지배적 원리로 보았다. 그는 역사적 내러티브가 알레고리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알레고리가 역사적 토대를 제거해 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디오도루스에게 배웠으며 크리소스토무스의 친구이기도 했던 테오도루스는 성경의 거의 모든 책들을 주해했는데 그는 각 책들의 저술 시기와 저자에 대한 연구, 텍스트의 구조와 통일성, 역사적 배경, 정경성, 영감성 등등을 검토했다. 성경의 각 책에 대한 그의 결론은 대부분 근대의 역사비평과 일치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네스토리우스와 연관되는 바람에 그의 주석 가운데 아주 일부만이 보존되어 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견해를 당대의 교회와 공유했기에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거나 인간에게 무가치한 것이란 성경에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필론과 오리게네스의 알레고리를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알레고리가 성경 전체를 지배하거나 역사적 현실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테오도루스와 함께 디오도루스에게 수학했던 크리소스토무스는 알레고리적 해석에 반대하면서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을 비난했다. 그는 테오도루스처럼 교회의 구약인 70인경에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성경을 주해했는데, 우리는 간결하면서도 진지한 주해, 역사적 배경과 동시에 장르와 언어에 주목하는 주해의 모델을 발견하게 된다. 크리소스토무스는 성경 저자의 의도를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그 의도의 적용을 허용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크리소스토무스를 안디옥 학파에 속하지만 주해와 해석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유력한 중재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4. 중세로 가는 다리: 아우구스티누스, 대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주석가는 문자적 진술과 비유적 진술을 구별해야 하며 혼동이 된다면 신앙 규범을 참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한 전통주의자는 아니지만 신앙 규범의 권위를 존중했다. 그는 테오도루스와 마찬가지로 간결하고 진지한 역사적 주해를 제시하지만 그렇다고 주해의 적용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크리소스토무스와 여러 지점에서 유사한 점은 그가 신앙 규범을 존중했으며 죄와 은혜의 개념을 강하게 강조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종교개혁자들이 아우구스티누스를 높이 평가한 부분도 이런 지점이었다. 로버트 마커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대 그레고리를 비교하면서, 이 두 신학자는 모두 기호를 연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졌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사상과 기독교 간의 폭넓은 혼합 전통의 계승자로 남아있다고 말한다. 중세를 강력하게 지배하던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영향, 특히 그중에서도 오리게네스의 사상이었고, 이 신학자의 사상은 루피누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파되었다. 대 그레고리우스는 오리게네스가 말한 해석의 세 가지 차원(역사적, 도덕적, 신비적)을 강조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알레고리를 불신하게 만들었던 그런 주저와 고민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부 시대의 성경 해석, 특히 오리게네스의 사상이 중세로 매개될 수 있었던 것은 대 그레고리우스의 작업 때문이었다. 뤼박은 그레고리우스와 오리게네스의 혼합 덕분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서의 영적 이해가 신비 또는 신앙의 규칙과 결합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뤼박의 논의를 계속 따라가자면 대 그레고리우스는 중세의 주해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거장인 동시에 탁월한 설교자이며 성경 해설자였다.

 

5. 중세: 비드로부터 리라의 니콜라우스까지

베네딕트회 수도사인 제로우의 비드(673-736)는 누가복음 주석에서는 히에로니무스의 방법론을 차용하지만 구약 주석에서는 필론과 오리게네스의 방법론을 활용하고 있다. 그는 히에로니무스와 여타 교부들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비드의 목적이 영국교회를 전적으로 교부 전통과 로마교회의 전통과 일치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090-1153)는 자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인 [아가서 설교]에서 오리게네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알레고리 전통을 도입하고 있다. 그는 아가서의 문자적 의미는 솔로몬의 결혼이고 알레고리적 의미는 그리스도와 교회이며, 도덕적 의미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서 유래되는 실제적 삶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페트루스 롬바르두스(1100-1161)는 성경에 접근하는데 12세기의 누구보다 수도사적 전통보다는 스콜라적 측면을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비록 그가 기독론적 의미와 도덕적 의미의 가능성을 반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신학자는 시편을 상이한 유형들로 이해하고 그 유형들을 기준으로 시편을 분류하기도 했다. 롬바르두스의 직접적 목적은 경건 생활이 아니라 교리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을 향하고 있다. 다른 중세의 학자들보다 그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 역사적이고 문자적인 의미를 부여했고,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4장의 여성은 침묵하라는 텍스트나 고린도전서 7장의 독신 선호사상도 우연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한다. 일부 학자들은 롬바르두스가 과학적이고 기술적 접근을 선호하면서 성경에 대한 좀 더 관조적이고 경건한 접근을 단념했다고 비난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그의 특징적 업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캔터베리 대주교였다가 존 왕에 의해 잉글랜드로 추방된 스티븐 랭턴(1150-1228)은 성경의 네 가지 의미 즉 문자적, 알레고리적, 도덕적, 신비적 의미를 가르쳤다. 보나벤투라(1217-1284)의 해석 방법은 휴고 폰 빅토르와 롬바르두스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특히 그의 해석학은 매우 신학적인 것으로서 삼위일체와 성령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율법서, 역사서, 지혜문학, 예언서 등 성경의 다양한 책들이 가진 독특한 기능도 인정했다. 그는 하나님이 하나이자 동시에 셋인 것처럼 성경의 이해방식에도 다수의 방법론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교리와 성경을 함께 다루었으며,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아퀴나스를 훌륭하게 보충해주는 역할을 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는 보나벤투라와 동시대 인물로서 중세 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신학자였으며 성경에 대한 최초의 참된 학문가 혹은 주석가, 해설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라고 믿었으며 성경의 문학적이고 언어적인 다양성에 주의를 기울였다. 아퀴나스는 신학을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신학은 성경을 기반으로 삼는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4원인설이 성경과 성례를 포함해 신학의 모든 주제에 적합한 이론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리게네스의 삼중적 의미에서 처음 유래했으며 전통적으로 그레고리우스에게서 유래한 사중적 의미에 매우 상식적인 접근을 허용했다. 하지만 아퀴나스는 문자적 의미는 모든 것의 토대를 이루는 의미였고 다른 의미들은 교리의 핵심을 논증하기 위한 토대로는 이용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도덕적, 영적, 교훈적, 신비적, 종말론적 의미를 거부한 것은 아니고, 다만 이 의미들이 적절하고 억지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이 담당해야 할 역할을 인정했다. 아퀴나스는 성경 주석에서 교부 문헌을 활용하고 초기 교회의 최고의 주석가 중 한 사람인 크리소스토무스를 주로 인용했다. 마지막으로 프란체스코 수도사였던 리라의 니콜라우스(1270-1349)는 성경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에 주의를 기울였던 신학자였는데, 그는 영적 의미의 전통은 지키고 있지만 신학과 교리의 컨텍스트에서 문자적 또는 역사적 의미에 우위성을 부여했다. 그는 유대 전통에서 내려오는 해석 방법들을 당대의 세계 안으로 전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문자는 사건을 지시하고 알레고리는 믿어야 할 바를 가르치며 도덕은 행해야 할 바를 가르치며 신비적 해석은 목적으로 지향할 바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7장 종교개혁, 계몽주의, 성서비평의 발흥

리라의 니콜라우스와 존 위클리프는 성경 해석을 오리게네스의 알레고리화로부터 멀리 떼어놓긴 했지만 그렇다고 알레고리를 전적으로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가장 철저한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신학만으로 모든 해석학적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역사와 언어, 성경 저자에 대한 질문들을 미리 규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믈러 같은 학자들은 성경 주해를 신학으로부터 분리시키기를 너무 열망한 나머지 성경의 권위와 신적 영감을 오직 이론적인 차원에서만 용인하는 것으로 축소시켰다. 성경 해석에 진짜 큰 딜레마를 던져 준 것은 계몽주의였다. 제믈러 이후 많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성경을 세속적 문학 작품 또는 순전한 인간의 저술로 간주하면서 접근하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1. 종교개혁: 위클리프, 루터, 멜란히톤

존 위클리프(1328-1384)는 성경의 권위를 종교개혁의 근거로 삼았으며 성경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최고의 권위라고 주장했다. 위클리프의 후기 저술에는 교황제 폐지 및 화체설 교리에 대한 반대가 암시되어 있는데, 그는 이런 개혁이 성경의 진리와 일치하며 초기 교회, 특히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 안셀무스와 노선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개혁적 노선으로 인해 그는 1382년 켄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고발당하고 이단 판정을 받았다. 그는 성경의 문자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했지만 성경에 은유도 포함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또한 알레고리적일 수 있는 도덕적 의미를 허용하고 성경 텍스트의 다양한 유형과 기능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진리, 영감, 권위를 한결같이 강조하며 설교에서 성경 사용에 깊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종교개혁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했다. 루터의 에르푸르트 대학 시절 신학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을 받은 근원은 리라의 니콜라우스였다. 루터는 초기 시편 강의에서 리라의 니콜라우스와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방법을 따랐으며 당시 널리 보급되어 있던 중세의 네 가지 의미를 활용했다. 루터는 문자적 의미는 역사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사역을 전해주며 문자적 의미 외의 다른 의미들 속에는 신자들의 공동체에 의한 전유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1521년 이후로 루터는 신명기, 소선지서, 전도서, 요한일서, 디도서, 이사야서, 아가서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성경의 알레고리적 또는 영적 의미와 다층적 주해를 거부했다. 루터는 로마와의 기나긴 투쟁이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성경 해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루터는 한편으로 로마와 투쟁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종교개혁자들 혹은 카를슈타트, 뮌처같은 열광주의자들과도 투쟁했다. 루터가 성경의 명징성을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성경 주석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루터의 의도는 성경이 너무도 복잡하고 그 논증도 너무도 다층적이기 때문에 성경을 탐사하는 것이상은 할 수 없다는 에라스무스의 견해를 일종의 회의주의로 간주하고 성경은 행함을 위한 충분한 기반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루터보다 14년 후에 태어난 멜란히톤은 루터의 친구, 지지자, 조력자로 유명하다. 루터가 주로 주석 작업에 집중한 반면에 멜란히톤은 조직신학을 정립했다. 아마도 그의 작업은 성경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개신교 조직신학일 것이다. 그는 때때로 알레고리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성경 텍스트의 문자적 의미에 천착했다.

 

2. 계속되는 종교개혁: 윌리엄 틴데일, 존 칼빈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윌리엄 틴데일은 주로 루터의 신학을 발전시키고 전파했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성경 텍스트의 언술 행위, 수행적 혹은 의미수반 발화라고 부르는 것들을 선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불가타 성경과 루터의 독일어 성경과 함께 에라스무스가 편집한 그리스어 성경을 많이 참조했다. 존 칼빈은 프랑스의 북부 피카르디에서 태어나서 파리에서 교육받은 후 1528년부터는 오를레앙에서 법률을 공부했는데, 그는 이내 종교개혁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프랑스에서 추방되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라는 대작을 저술했는데 그의 저술 의도는 성경주석과 구별된 신학을 제시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최초의 근대적 성경주석가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그의 주해들은 다른 누구의 주해 작업보다 더 큰 영향력을 미쳤다. 칼빈은 주석가의 주요 덕목으로 명료한 간결성과 설명의 대상이 되는 저자의 정신을 펼쳐 보여주는 능력을 꼽는다. 그는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중시해야 하며 이와 같이 설정된 한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법학도인 칼빈은 법률에 관계된 실제적 적용뿐만 아니라 그 법이 생성된 역사적 상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자신의 주석 작업에 적용했다. 칼빈은 성경과 성경해석의 초점을 하나님에 대한 비전에 집중시키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에서 유래하며 동시에 성경의 신뢰성은 이성으로도 충분히 자명한 것으로 입증된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관점은 이레나이우스에 가깝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을 따라서 텍스트의 자연적 의미 혹은 문자적 의미를 강조했다. 칼빈은 알레고리는 인문주의적 해석의 정신에 대립하며 저자의 정신을 정확히 포착하려는 열망인 문자주의가 인문주의 해석의 본질이라고 선포했다. 파커는 알레고리에 대한 칼빈의 거부는 알레고리적 의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확장된 은유라는 과도하게 발전된 알레고리 사용에 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참된 예표론이 사건과 인물들 안에 펼쳐진 하나님의 섭리적 질서를 보여줌을 인정했지만 예표론에 대해서 경계하는 입장을 취했다. 칼빈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성경의 역사를 건전한 방식으로 존중했는데, 이런 존중은 신적 섭리와 두 언약 사이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방식에서 드러난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주해를 근대로 진입하게 만든 인물이다.

 

3. 개신교 정통주의, 경건주의, 계몽주의

이제 막 발흥한 종교개혁의 직접적 영향 속에서 16세기와 17세기에는 개신교 정통주의가 만개한다. 이어지는 18세기는 계몽주의와 세속적 사상들이 가져온 전면적 충격과 그것에 대한 반발이라 할 수 있는 경건주의 및 덜 합리적인 기독교적 헌신의 물결이 공존했다. 그리고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는 성서비평의 초기 단계와 초기 낭만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일리리쿠스(1520-1575)는 루터와 멜란히톤을 추종했으며 로마 카톨릭에 대항하여 개신교 정통주의를 수호하는 글을 썼다. 그는 [성경의 열쇠]라는 자신의 해석학 책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오리게네스부터 당대에 이르는 주해들을 활용했으며, 성경 전체의 열쇠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서 예표론적 주해를 활용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안 볼프(1679-1754)는 성서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는데 그는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에 친밀하게 접했다. 그는 저자의 의도의 다원성 개념을 해석학에 도입했는데 이 개념에 의하면 같은 저자는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다양한 종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클라데니우스(1710-1759)가 해석학에 기여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저자의 입장에서 관점을 이해한 것인데, 이것은 역사적 이해에 대한 최초의 인정이라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해석자는 역사적 저자와 역사적 해석자의 관점에서부터 텍스트를 해석하는데 역사적 저자와 역사적 해석자는 둘 다 역사 속의 자신의 위치에 의해 제한되고 조건화되는 존재다. 이 시대에 등장한 경건주의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가졌던 지적 관심과 엄밀함이 결여된 경향을 보였다. 아우구스트 프랑케는 성경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갱신과 회심,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프랑케는 성경 텍스트의 역사적 의미는 겉껍질에 불과하며 말씀 또는 씨앗이 실제적이고 영적이라고 주장했으며 또한 성경은 공동체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건주의자들은 계몽주의 및 발흥하는 성서비평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그럼에도 둘 중 어느 조류와도 심정적으로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성보다는 실천적 삶에 관심을 가졌고 성경 이해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일어난다고 믿었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사상의 대부분을 특징짓는 개념이었는데, 칸트는 권위의 보호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자율성과 자유를 가진 근대인의 계몽에 대해 말하며 새 시대의 도래를 선언했다. 영국에서 계몽주의 운동은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뉴턴을 위시한 이신론자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대륙에서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이런 철학자들 외에 성경연구 분야에서 제믈러와 에르네스티도 중요한 인물이다.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신론과 합리주의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확장되며 그 진정한 절정은 1776년 미국혁명이거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일 것이다. 1784년에 칸트가 제공한 정의에 의하면 계몽주의란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타인의 감독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으로부터 탈출하는 해방이다. 이런 지적 분위기는 당연히 성경 해석에 가혹한 결과를 초래했고 다수의 사람들이 자유와 객관성을 성경 연구의 핵심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마크 보왈드의 논증에 의하면 이런 경향은 성경 저자로서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배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이 시대의 기독교 전체가 계몽주의라는 경향으로 요약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윌리엄 로우,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인물들을 통해 경건주의 전통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대체로 이들을 소수였으며 다수는 반대 방향으로 나간 것이 사실이다. 이후로 해석학의 중요한 도약이 19세기 헤겔과 슐라이어마허로부터 일어난다.

 

4. 18세기 성서비평의 발흥

성서비평의 아버지로 꼽히는 인물인 제믈러 이전에 리샤르 시몽과 장 아스트뤽은 성서 비평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시몽은 모세 오경 속에 나타난 두 전통이 양립 불가능함을 주장하며 모세오경의 저자가 모세가 아닐 수도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으며 아스트뤽은 성경의 각 책이 필연적으로 문헌적 통일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스피노자의 견해를 수용했다. 루터교 신자이며 할레 대학의 신학교수였던 제믈러는 성서비평을 실제적으로 창시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 텍스트와 정경이 전적으로 역사적 요인과 조건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했으며 신적 영감이나 교리에 대한 논증을 불신했다. 바로 이것이 계몽주의의 직접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정경의 형성에 대한 역사적 요소를 배타적으로 강조했는데, 당연히 네 가지 의미와 알레고리적 해석을 거부했으며 시편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적 언급을 찾는 시도도 반대했다. 이런 그의 입장은 오늘날 종교사적 관점으로 불리는 입장과 유사하다. 또한 제물러는 특정 텍스트를 가차 없이 배제하면서 신약에 대한 본문 비평을 시도했다. 그는 성경영감설의 일정한 형태를 믿기는 했지만 성경의 구체적 단어들이 영감되었다는 이론은 배척했고 다만 성경 속에서 하나님이 고대 인류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적 차원에 적응하셨다는 개념이나 진리의 계시 개념은 받아들였다. 제믈러는 넓은 의미에서 루터교 교리를 유지했지만 루터주의는 성경의 다양성과 독특한 장르, 전통들을 쇠퇴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성경 주해에서 성경 저자의 역사적 상황과 언어에 대한 이해는 그것의 증명 가능한 활용과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렇게 제물러가 신학으로부터 독립된 역사적 의미에 열중했기 때문에 일부 학자는 그가 구약을 기독교 종교의 기반으로서의 신약과 분리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제믈러는 성경주해와 해석에 교의신학을 적용하는 것을 분명하게 반대했으며, 해석학적 접근 방법으로 역사적 요인을 강조하여 결과적으로 역사비평으로 불리는 성서연구 분야에 탁월한 공헌을 했다.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한 후 라이프치히 대학 교수가 된 에르네스티(1707-1781)는 성경에 대한 문법적이고 역사적인 주해를 강조하며 신약 해석에서 비합리적인 요인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언어학적이고 문헌학적 방식으로 주해에 접근했지만 개별적 해석과정에서 성경에 모순이 없다고 믿었으며 텍스트는 단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역설했다. 경건주의 가정에서 태어나 할레 대학에서 공부한 미하엘리스(1717-1791)는 영국의 이신론을 접촉하면서 경건주의를 버리고 네덜란드에서 만난 합리주의적 정통 개신교를 택하게 된다. 그는 오경의 모세저작설이란 전통적 입장은 옹호하지만 신약 성경이 영감되었음과 신약성경의 저자가 사도들이라는 전통적 견해는 거부한다. 종교를 인간이 창안한 도덕으로 묘사한 계몽주의의 선두주자인 레싱(1729-1781)은 역사의 우연적 진리는 절대로 이성의 필연적 진리에 대한 증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성의 진리를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한 반면에, 역사적 진리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레싱은 역사적 진리와 이성적 진리 사이에 넓고도 추한 구렁을 팠으며 기독교의 역사적 주장들을 묵살해 버렸다. 레싱에 의하면 예수는 합리적 진리를 가르친 선생이지만 그의 가르침은 종말론적 기대 때문에 어그러졌고 예수의 단순한 가르침은 얼마가지 않아 교리에 의해 변질된다. 그는 자연종교와 이성에 대한 이신론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며 예수는 전혀 신비를 가르치지도 신앙규정을 제시하지도 않았는데 복음서들이 심각할 정도로 비일관적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에 대해 완전히 오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예수의 생애에는 어떤 기적도 신비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의 죽음도 자연적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나아가 그는 예수의 부활은 엉터리로 조작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은 세상을 속여 그것을 믿도록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예수의 부활사건은 구약의 여러 예언을 적절하게 짜 맞추어 고안한 결과였다. 제믈러는 이런 레싱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성서비평의 다양한 방법론을 증명하는 글을 썼지만 레싱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전파되고 있다. 괴팅겐에서 구약과 신약, 셈어, 문헌사를 가르쳤던 아이히호른(1752-1827)은 새로운 개념의 창안자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성경의 영감과 계시 개념을 수용했지만 실제로 성경해석에서는 명확한 이성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는 창세기 초반부분이 신화론적 성격을 가졌음을 강조했고 창세기의 내러티브를 인류의 유년기에서 유래한 묘사의 형식으로 이해했다. 예나 대학에서 신약과 교회사를 가르쳤던 그리스바흐(1748-1812)는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 아닌 교의신학에 기반한 성경해석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의 개인적 신앙은 정통 기독교에 충실히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 가블러(1753-1826)는 아이히호른과 그리스바흐의 영향을 받았으며 제믈러가 그랬듯이 역사적 장르로서의 성경신학, 하지만 교의신학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성경신학을 정립하려고 했다. 그는 각각의 성경저자는 그들의 시대와 상황과 관련해 이해되어야 하며 레싱이 파놓은 추한 도랑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교리는 시대와 장소와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우연한 것이지만 자신의 시대에 위치한 성경에 대한 신학은 참된 성경신학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그는 시대와 장소에 제한되지 않는 순수한 성경신학은 참된 성경신학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블러는 아마도 계몽주의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신학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보편적이고 순수한 성경신학 개념은 오직 역사적 탐구로부터 도출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또한 특정 성경구절에 대해서 소위 초자연적인 것을 배제하는 경향도 견지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가블러가 성서비평 이전의 방법과 성서비평적 방법을 결합했다고 비판하지만 어쨌든 그는 아이히호른과 함께 새로운 개념의 창안자로 일컬어지며 구약에 대한 신화적 접근을 발전시킨 인물이었다.

 

5. 19세기 성서비평의 대표자들

빌헬름 데 베테(1780-1849) 19세기 성서비평의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이다. 그는 사무엘서와 열왕기서를 섬세하게 구성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역사 및 종교발전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비평적 설명을 제안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역대기를 이차적인 것으로 간주했고 레위기는 바벨론 유대 이후시기에 역투사된 것이라고 논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발전과 역사에 대한 이해를 완전히 다시 정립하려고 했다. 그는 신명기도 주전 621년 요시아 개혁 즈음에 작성되었으며 민수기는 신화적이고 비역사적 텍스트라고 가정했으며 시편의 장르와 배경이 다양함을 강조했다. 그는 바벨론 유대 이후 제사장 제도의 발전이 선지자적 종교의 순수성으로부터 쇠퇴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신약 안에서 갈등하고 있는 세 가지 개별 전통, 즉 초기 유대-기독교 전통, 바울신학, 요한과 히브리서로 대표되는 알렉산드리아 전통을 구별하기 했다. 헤르만 궁켈은 베테의 작업을 양식비평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성서비평이 독일에서 어떤 도전도 받지 않고 전체 논의를 평정한 것은 아니다. 베를린 대학의 성서비평 교수인 헹스텐 베르크(1802-1869)는 슐라이어마허의 신학과 성서비평학자들을 공격했다. 이에 관해서 로저슨은 논평하기를 신비평의 대표자들이 무조건 합리주의의 계승자인 것은 아니며 또한 신앙고백의 정통주의자들이 무조건 초자연주의의 계승자도 아니며, 양 진영은 모두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헤겔의 제자였으며 바우어에게 배운 슈트라우스(1808-1874)는 헤겔 좌파로서 포이어바흐와 같은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복음은 대체로 내러티브 형식으로 제시되는 개념인 신화적인 것이지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기적과 초자연적 요소를 제거했다. 결국 슈트라우스는 기독교를 포기하기에 이르며 슐라이어마허를 최후의 교의신학을 만들어낸 자로 비판한다. 바우어(1792-1860)는 목회서신의 저자가 바울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사도행전 일부의 신뢰성에 대해서도 논박했다. 그는 사도행전은 베드로 전통과 바울 전통 사이의 차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초기 공교회적 시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마르크부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벨하우젠(1844-1918)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끝까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영역에서는 데 베테의 모세오경 비평을 따랐다.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모세오경을 구성한다고 가정되는 원자료들을 JEDP문서로 분류한 작업이다. 오늘날까지 이 작업은 구약 연구에서 상투적 요소로 남아있다. 신약에 대해 벨하우젠은 마가복음이 먼저 작성되었다고 주장하며 주로 데 베테의 영향 하에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영국 학파를 대표하며 케임브리지 삼두정치로 불리는 세 명의 학자는 웨스트코트(1825-1901), 라이트푸트(1828-1889), 그리고 펜톤 호트(1828-1892)이다. 윌리엄 베어드는 이 세 사람은 독일의 위대한 신학자들에 견줄 수 있는 인물들이며 신앙과 삶을 위해 성경 연구의 진보에 헌신했던 교회의 일군들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세 사람은 기독교 신학에서 성경연구의 중요성을 이해했으며 이 두 가지가 분리되는 것에 반대했다. 또한 이들은 마치 신학과 성서연구 중 하나밖에 없다는 듯 성서비평이나 역사비평적 방법을 일반화하는 것을 자제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