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자들- 로널드 넘버스
2016-07-29 21:59:23
이 책은 무엇을 다루나?
창조-진화 논쟁은 다윈의 진화론 이후에 바로 시작되었고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이 모두 진화론의 우산 아래 있다고 흔히들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18,19세기 지질학과 천문학이 발전하면서 하나님의 창조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관점이 당시에 이미 주류의 관점이 되었다. 넘버스는 19세기 말에 이르면 가장 보수적인 기독교 변증가들도 오래된 지구와 오래된 생물의 역사를 인정했다고 말한다. 날-시대 이론이나 간격이론과 같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창세기1장에 대한 정통적인 해석은 당대의 지질학적 성과들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넘버스는 당시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지구가 최근에 창조되었고 아담의 타락 이전에는 생물의 죽음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젊은지구론은 극단적인 관점으로 여겨졌을 거라고 말한다. 1920년대 안식교인인 맥크리드 프라이스는 젊은 지구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홍수지질학을 주장했지만 안식교 밖에서는 홍수지질학을 지지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심지어 당시에는 근본주의자들도 오랜지구론과 일부 생물진화론을 수용하는 입장을 가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1980년대가 되면서 젊은지구론으로 대표되는 창조과학이 기독교의 주류가 되는 상황으로 반전한다. 넘버스는 이런 변화의 역사적 이유를 이 책을 통해 탐구한다. 그는 이 작업을 창조과학과 주류과학의 경계선에서 어떤 논쟁이 벌어졌는지를 탐구하는 방식으로 수행한다. 물론 역사학자인 넘버스는 과학적 증거나 논리 자체를 과학적 기준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흐름을 역사적 관점에서 전개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과학과 성경이 명백하게 상충되는 부분들을 조화시키면서 격는 심리적 갈등, 그리고 그들이 과학과 종교의 경계선을 두고 반대자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을 담담하게 다루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책은 창조과학의 지적 기원을 역사학자로서 탐구하고 규명하고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당시 젊은지구론은 기독교의 주류 견해가 아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나온지 채 20년이 안되어 대부분의 동식물 하자들은 진화론을 수용했고 20세게 초에 등장한 다윈에 대한 비판도 진화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다윈이 제시한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제로서 충분한가에 대한, 즉 진화이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놀랍게도 당시에 진화론을 비판하던 창조론자들도 대부분 당대의 지질학 결과들은 수용하고 있었다. 특히 넘버스는 과학계에서 창조과학이 제시한 젊지구론이나 홍수지질학을 지지하는 과학자는 없었으며 진화론을 비판한 기독교인들도 지구나이를 6천년으로 주장한 사람들을 거의 없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모든 생명체가 비교적 최근에 문자적으로 6일만에 출현했다고 주장하고, 화석 기록에서 진화의 흔적을 의심하며, 성경의 홍수에 지질학적 의미를 부여했던 창조론자들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주류 과학계 밖을 살펴보아야 한다. 진화를 거부하는, 성직자 직분을 가진 과학 교수들이 차지하고 있던 변두리 과학계에도 젊은 지구론을 옹호하는 사람은 없었다."( 창조론자들 58쪽) 20세기 들어 근본주의가 강하게 등장하면서 진화에 대한 비판은 거세지지만, 초기의 근본주의자들은 지구의 오랜 역사를 받아들였고 창세기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108쪽) 그렇다면 도대체 20세기 초까지 이랬던 상황이 급변하게 된 이유는 뭔가? 오늘날 젊은지구론을 지지하는 해당분야의 과학자를 찾는 것 매우 어려운데 기독교인들의 경우에 어쩌다가 젊은지구론을 신봉하게 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 책에서 찾아야 한다.
지질학과 창세기에 대한 해석
1950년대까지 창세기 1장에 대핸 주류 해석은 간격이론과 날-시대 이론이다. 간격이론은 파괴-회복이론이라고도 하는데 창세기 1절과 2절 사이에 긴 시간 간격이 있었다는 해석이다. 1절의 태초는 매우 오래 전이고 그때 창조된 천지가 파괴되어 2절처럼 혼돈에 싸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긴 간격동안 여러번의 격변이 있을 수도 있고 그때 화석도 형성되었고 다양한 지질현상도 생겨났다고 이해한다. 그 후 3절부터 등장하는 6일간의 창조가 있었다고 본다. 날-시대 이론은 간격이론처럼 파괴와 회복을 가정하지 않고 3절부터 나오는 창조기사의 하루하루를 하나의 긴 지질연대로 보는 관점이다. 오래된 지구 연대를 인정하는 간격이론과 날-시대 이론은 창조과학이 등장하는 20세기 중반까지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주류 견해였다. 심지어 근본주의자들도 1920년대까지는 젊은지구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창조론 운동자들 간에 진화를 반대한다는 것 이외에는 창세기 해석에 대한 통일된 견해를 볼 수 없다. 특히 20세기 중반까지 창조론 운동의 주요 단체였던 홍수지질학회의 입장은 젊은지구론이었다가 후에는 다양한 견해로 바뀐다.
홍수지질학
안식교인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가 만든 홍수지질학은 노아홍수가 전지구적이었고 그 격변에 의해 지질현상들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화석의 기록과 지층의 순서를 지구의 긴 연대의 증거로 설명하는 지질학자들에 반대하여 프라이스는 대홍수에 의해 동식물이 죽어서 화석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홍수지질학을 통해 날-시대 이론이나 간격이론을 무너뜨리는 한편, 지질현상을 노아홍수로 설명함으로써 지구 연대가 6천년이라는 젊은 지구론을 퍼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프라이스의 아마추어 지질학은 전문가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흥미로운 점은 프라이스를 지지하던 근본주의 지도자들은 그가 주장하는 홍수지질학이 창세기1장의 전통적인 해석인 날-시대 이론이나 간격이론을 반대한다는 걸 잘 몰랐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근본주의 지도자들은 홍수지질학을 지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주장하지 않는 젊은지구론에 힘을 실어주게 된 셈이었다. 홍수지질학은 오해로 뒤덮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 지도자들의 지지로 인해 프라이스는 점점 더 유명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프라이스가 대중적으로는 유명해졌을지 몰라도 그의 홍수지질학은 과학적 뒷받침이 형편없었고 창세기의 전통적 해석도 거스리는 젊은지구론이었기 때문에 별로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그가 1938년도에 만든 홍수지질학회는 문자 그대로 6일창조를 믿는 젊은지구론자들과 안식교인들이 다수를 차지했고 이 모임은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그후 홍수지질학의 내용이 수정되면서 그들 내부에서도 생명체는 에덴동산 이후에 생겼다는 독트린만 인정한다면 오랜지구론과 젊은지구론 사이에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렇게 미약했던 홍수지질학은 프라이스보다 더 근본주의적으로 만든 운동이 모리스와 휘트컴이 주도한 창조과학이다. 1961년에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 "창세기의 홍수"라는 책이 등장하는데 이 책은 젊은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의 출발점이 된다. 문제는 프라이스 시대와는 다르게 1980년대에는 젊은지구론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면서 미 남부 바이블벨트에 확산된다는 점이다.
창조론자들 8장 - 영국의 복음주의자들과 진화
영국의 소수의 창조론자들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진화반대운동(EPM)이라는 단체를 조직할만한 에너지를 모을 수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의 등장에 자극을 받아 1865년에 설립된 영국의 빅토리아 연구소의 공식적인 목표는 성경에 계시된 위대한 진리들을 소위 과학이라는 것의 반대 입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 연구소는 다윈주의에 회의적인 다수의 과학자들을 끌어들였지만 진화에 공식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홍수지질학의 저자인 프라이스는 동 연구소에서 자신의 새로운 격변설을 강의하며 그것이 진화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최종적 해결책을 제공해줄 것이라 설득했지만 연구소의 대다수 멤버들은 거기에 설득되지 않았다. 영국에 머물렀던 4년 동안 프라이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상적인 대접을 받지 못했으며, 영국의 기독교인들이 진화의 문제에 대해 철저히 무기력한데 실망했다. 버밍햄의 자유주의적 감독이었던 반즈는 영국의 평범한 기독교인들은 진화의 과정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고 여기며 널리 알려진 신학자와 성직자들은 모두 그 견해를 수용한다고 말했다. 사실 프라이스가 영국에서 진화에 맞서 적극적으로 투쟁을 벌이는 이로 알았던 성직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인 1920년대 말에 프라이스는 영국의 창조론자들의 노력을 하나로 묶을 통합체를 만들 것을 요청했고 1930년대 초에 암브로스, 애크워스, 디워 등을 중심으로 하여 영국 최초의 창조론자 모임인 진화반대운동(Evolution Ptotest Movement: EPM)이 결성되었다. 아마추어 조류학자였던 디워는 1931년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성경이 틀린 진술을 포함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만일 그 진술들이 지질학자들의 견해와 분명하게 갈등을 일으킨다면 후자가 틀린 것이다.”고 말했다. 프라이스는 디워가 자신의 홍수지질학에 관심을 갖게 하려고 애썼지만 홍수지질학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창조론자이면서 지질학자이자 고생물학자였던 루이스 데이비스는 프라이스를 동료 창조론자로 그리고 성경의 예언을 연구하는 이로 인정했지만 모든 지질학적 현상을 단 한 번의 짧은 대홍수의 효과로 설명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프라이스가 연속적 창조를 암시하는 성경의 증언들을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데이비스는 창세기1장 1절과 2절 사이의 분명히 규정되지 않은 간격은 광대한 시간이며 에덴 이전에 최소한 한 번의 창조 혹은 여러 번의 창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빅토리아 연구소를 주도하던 자유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은 진화에 반대하는 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거절했고 이런 상황에서 창조론자들은 분명 그들의 조직이 필요했다. 1932년에 애크워스는 반진화론 단체를 결성할 것을 제안하면서 이 단체는 가능한 철학이나 종교적인 분야보다는 과학적인 분야에 스스로를 제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단체(EPM)를 결성하면서 애크워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진화의 목적은 심리분석을 통한 도덕적 타락이다. 진화는 조직적인 대량의 출생 제한과 불임을 통해 멸종을 목표로 한다. 또 그것은 공산주의의 사회적 신조를 통해 혁명을 목표로 한다. 그는 영국은 오직 진화론을 집어 던질 때만 다시 한 번 부강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EPM은 진화론이 아직 과학적 진리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에 근거해, 학교는 물론 설교 강단과 심지어 영국이 통치하는 다른 곳에서도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반대했다. 비록 설립자들은 과학적 관심사를 강조했지만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사람들을 성경으로 되돌아오게 하고 조상들의 전통적인 믿음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교실을 통제하기 위해 수십 년간 싸워온 북미의 창조론자들과 달리 교회와 국가의 연합에 대한 헌법의 금지로부터 자유로운 영국의 창조론자들은 그들의 가장 큰 노력을 진화론자들이 방송을 독점하는 일을 저지하는데 쏟아 부었다. 그러나 EPM의 지도자들은 홍수지질학을 수용하라는 미국 창조론자들의 요청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의견을 달리했다. 디워는 휘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과학적 지식의 현재 상황은 창세기의 처음 두 장에 대한 수많은 다른 해석들 중 어느 것이 맞는지를 결정하기에 전적으로 부적절합니다.” 그는 창조의 기원을 판단하기엔 과학적 지식이 충분하지 않기에 전략적 관점에서 진화론의 오류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EPM은 회원들에게 진화가 과학적으로 그리고 성경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는 명제에 대한 일반적 동의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창조론자들 9장- 북미의 복음주의자들과 진화
1941년에 과학과 종교에 대한 기독교적 증언의 질에 대해 걱정하는 복음주의 과학자들은 미국과학자연맹(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 ASA)을 설립했다. ASA의 지도자들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진화에 반대하기 보다는 그것을 평가하고 감정하는데 몰두하며 진화론자들과의 직접적인 대립을 피하려고 했다. 휘튼대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던 핵심 멤버들의 영향 아래서, ASA의 주된 관심은 엄격한 창조론으로부터 점진적 창조론으로, 더 나아가 유신론적 진화론으로 옮겨갔고 이것은 1960년대 보수적 창조론자들의 반격을 촉발시켰다. ASA가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아 직면한 일은 홍수지질학회(DSG)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ASA는 DSG와 긴밀하게 얽히는 것을 우려했는데 그것은 아마도 DSG가 제7일안식교의 근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ASA는 1940년 말에 이르도록 홍수지질학이라는 큰 걱정거리와 계속 씨름해야 했다. 마침내 그 걱정거리를 몰아낸 사람은 1945년에 ASA에 가입한 지구화학자 로렌스 컬프였다. 컬프는 한 때 림머와 프라이스의 호교론적 저술에 매료되었으나 1940년 중반에 이르러 그런 사이비 과학은 정통 기독교를 조롱거리로 만들 뿐이라고 판단했다. 이 무렵 컬프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지구 역사에 대한 세부적인 기록이 아니라 창조자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려는 일련의 인상주의적 유화에 유사하다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ASA의 제3차 연례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인류화석의 고대성이라는 논문에서 상당한 양의 과학적 증거들이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이 지구상에서 최소한 존재해왔다고 주장했다. 컬프의 논문은 즉각 논쟁을 일으켰고 젊은지구론을 선호하는 칼빈대학의 식물학자인 에드윈 몬스마는 인류의 고대적 기원과 성경의 문자적 이해는 조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수용하는 복음주의자들에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에 죽음과 멸망이 있었다는 개념이 오랜 지질 시대와 특별히 인간 화석의 고대성이란 이론을 받아들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결정적 장애물이라고 비판했다.
1948년 즈음에 ASA내의 상당수 복음주의적 과학자들은 과거의 진부한 근본주의적 호교론을 던져버리고 컬프의 뒤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특별히 그들은 과학적 정직성이 그것의 수용을 요구하며, 그런 수용이 성경의 영감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다. 컬프는 홍수지질학이 부풀려져 미국 근본주의 기독교 안에 크게 잠입한 이유는 정식 교육을 받은 기독교 지질학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컬프는 홍수지질학의 네 가지 근본 오류를 지적하면서 프라이스가 무지하기도 하고 기만적이라고 비난했다. 컬프는 지질학과 성경의 전적영감설이 양립할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홍수지질학의 비과학적 이론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상당히 해를 주었고 앞으로도 주게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컬프는 일선의 배후에서 일하면서 ASA가 발행하는 책들이 홍수지질학을 돕거나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대체로 컬프의 설득력으로 인해 홍수지질학자들은 ASA 내부에서 점점 더 고립되었다.
프라이스와 림머에게 등을 돌린 후, ASA 지도자들은 진화에 대한 복음주의 진영의 대안적 입장을 마련해야 할 임무에 직면했다. 그 결과 ASA는 빠르게 유신론적 진화 쪽으로 이동했고 일부 멤버들은 그들이 점진적 창조라고 부르는 것에 머물렀다. 당시에 ASA를 반진화론자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이들은 휘튼 출신의 러셀 믹스터와 프랑크 카셀이었다. 그들은 컬프가 지질학에 대해 했던 일을 생물학에 대해 진행하고 있었다. 믹스터는 1930년대 말에 홍수지질학에 잠시 손을 대었다가 점진적 창조 쪽으로 이동했는데 그는 오랜 지구에 대한 지질학적 증거와 유기적 발전에 대한 생물학적 증거를 모두 수용했다. 또 다른 인물인 카셀은 학부 시절에 간격이론이나 날-시대 이론을 배웠지만 과학과 성경의 일치를 강요하는 모든 노력들에 점점 더 회의적이 되면서 진화론적 유신론을 수용했다. 믹스터와 카셀은 복음주의를 현대 생물학과 조화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들은 창조와 種의 고정을 믿는 근본주의자들의 믿음의 뿌리를 파헤치는 논문을 1940년대 말 ASA 연례 학술대회에 제출했다. 그 논문에서 그들은 노아 홍수를 그 어떤 생물학적 결과도 초래하지 않은 사건으로 일축했고 진화를 “科”에 한정시키지 않고 “目”내부에서 일어나는 진화를 옹호했다. 믹스터와 카셀은 이처럼 ASA가 진화를 향해 더욱 더 개방적이 되도록 산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이들이 주도한 비공식적인 회원모임에서 한 논쟁적인 보고서가 제출되었는데, 그것은 믿음을 방어허기 보다는 검증하자는, 그리고 과학적 사실들과 성경의 관계를 연구하기 보다는 오히려 기독교 과학철학을 개발하자는 제안이었다. 이 보고서는 ASA가 반진화론적 단체의 지배적인 특징을 벗어버리고 복음주의 과학자들의 폐쇄적이지 않은 학문적 단체가 되기 위해 원래의 교리적 진술들을 버릴 것을 추천했다. 이 보고서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은 예상하던 대로 부정적이었다. 커스탠스는 “컬프의 무리들”이 과학에 대한 존경을 종교적 헌신보다 우선시했고, 많은 경우에 과학적 사실들이 아니라 신학이 문제를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ASA 안에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ASA가 진화 쪽으로 표류한 것은 지적 정직성이 아니라 마귀의 악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비난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동료 창조론자들의 반진화론적 수사들에 반대하면서 그들의 엄격한 창조론을 사이비 과학으로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ASA 안의 이런 갈등은 당시에 복음주의 공동체를 신복음주의 진영과 보수주의 진영으로 갈라놓았던 신학적 균열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창조론자들 10장- 휘트컴, 모리스 그리고 창세기의 홍수
ASA 핵심 그룹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복음주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버나드 램은 1954년 그의 창조론 관련 저작인 “과학과 성경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서 독자들을 창조론자들의 편협한 성경숭배로부터 그가 “점진적 창조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인도하려 했다. 점진적 창조론은 젊은 지구, 보편적 홍수 그리고 인류의 최근 등장의 필요성을 폐기하는 이론인데 ASA는 이 책의 출간 25주년 기념일에 이 책이 과학과 종교의 최근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고 칭찬했다. 이 책이 나올 무렵에 램은 신복음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부상 중이었는데, 신복움주의자들은 학문적 책임성을 수용하고 호전적 입장을 피한다는 점에서 예전의 근본주의자들과 구분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하기 보다는 현대문화를 수용하고 사회적 발전에 기여하려고 노력했다. 버나드 램은 성경의 영감을 중시한다는 것은 곧 성경이 과학적 데이터들의 신뢰할만한 원천이라는 것을 암시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전제에 도전했고, 이 견해는 신복음주의의 학문적 모델로 봉사했다. 빌리 그래함도 버나드 램의 저서의 노선을 따르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관점을 요구하고 나섰다. 램은 과학과 종교에 대해 글을 쓰는 복음주의 저자들을 두 종류의 대립되는 진영으로 나눴는데, 한쪽은 근본주의자들의 고상하지 못한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로서, 이들은 과학에 대해 대단히 유해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확립된 더 나은 학문적 전통들 안에서 추론과 논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한쪽은 과학과 성경의 사실들을 조심스럽게 배우려는 고상한 전통을 가진 사람들인데, 램은 이런 고상한 전통을 부활시키려 했다. 램이 보기에 고상하지 못한 전통에 속한 전형적인 사람은 림머와 프라이스였다, 이들은 순진한 기독교인들에게 평판이 안 좋은 간격이론과 홍수이론들을 강요한 사람들이었다. 램이 보기에 성경적 학문성도 과학적 학문성도 그들의 이론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이처럼 지질학의 확고한 증거 전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홍수이론으로 미국 근본주의 진영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그의 생각이 지질학, 창조 그리고 홍수에 대한 대부분의 근본주의적 척추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램은 과학과 성경 모두를 수용하면서 창세기1장의 시간적 하루 이론을 그가 이름붙인 점진적 창조와 결합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성경의 6일 창조가 그림언어로 표현된 것이지 6일로 확인되는 지질시대동안 실행된 것이 아님을 의미했다. 램의 점진적 창조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지질학적 갭을 연결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 개입하시는 것을 허용하며 이 경우 하나님은 새로운 근본적인 종들을 창조하셨고 그것들은 그 이후 오늘날의 종들로 진화되고 파생되었다고 이해한다. 램은 이것을 진화가 아니라 점진적 창조라고 주장한다. 그의 점진적 창조 개념은 대부분 복음주의 과학자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지만 그의 제안은 수많은 정통주의 기독교인들이 창조와
그러나 램이 홍수지질학의 장례식을 집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램이 많은 복음주의자들에게 진화론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은 반대자들을 자극해 젊은지구론을 방어하려는 대규모 캠페인을 발생시켰다. 그 반동은 젊은 성경교사이자 신학생이었던 존 휘트컴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창세기와 지질학의 조화와 관련해 휘트컴은 램의 주장에 당혹했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죽음이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왔다면 어떻게 화석들이 에덴의 창조보다 시대적으로 앞설 수 있는지 의아해 했다. 휘트컴은 헨리 모리스의 “최근의 창조와 보편적 홍수에 대한 성경적 증거”라는 강연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날-시대 이론, 파멸-회복 이론, 그림 같은 날 이론들에 맞서 홍수지질학을 방어하는 내용이었다. 휘트컴은 ASA에 속한 과학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던 램의 책이 복음주의 신학회(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ETS)에서는 호응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램에게 대응하고 프라이스의 입장을 변호하는 박사논문에 헌신하고자 결심을 했다. 1957년에 휘트컴은 “창세기의 홍수”라는 박사논문을 완성했지만 아무도 지질학에 비전문가인 그의 논문을 출간해주려 하지 않았다. 휘트컴에게 호의적 반응을 한 사람은 여러 해 동안 홍수지질학 책을 저술해 온 헨리 모리스 뿐이었다. 휘트컴은 자신이 컬프가 제기한 홍수지질학에 대한 전문적 차원의 반대를 적절하게 다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시인하고 모리스에게 공동 저자로 협력을 제안했고 모리스는 자신도 전문 지질학자가 아니므로 이 요청에 망설였지만 결국 공동작업을 수용했다. 이렇게 해서 장차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휘트컴과 모리스”라는 상투어가 될 협정이 체결되었다.
휘트컴의 새로운 파트너인 헨리 모리스는 텍사스에서 태어나 남침례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모리스는 1942년 어윈 문의 유명한 “과학으로부터의 설교”를 듣고 과학과 성경을 조화시키는 것의 중요성을 확신했다. 또한 모리스는 무디 계열의 순회설교자들로부터 처음으로 노아 홍수의 지질학적 효과와 홍수 때까지 지구를 감쌌던 수증기 층에 대해 배웠다. 모리스는 만일 성경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어떤 과학적 오류도 담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경은 그것이 과학과 접촉하는 모든 것에서 항상 과학적으로 정확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경은 다른 윤리 책들과 다름없이 단지 인간이 만든 생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모리스는 프라이스가 역사적 지질학의 세계적 대가라고 서술해면서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으로 인해 더 이상 간격 이론이나 오랜지구론을 허용할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무디 출판사가 “성경과 현대과학”이란 그의 책의 확대 개정판을 내자 무려 1만부 이상이나 팔렸다. 1949년 모리스가 ASA에 가입하려고 했을 때는 컬프가 홍수지질학에 대해 최후의 일격을 가했을 때였다. 모리스는 컬프의 주장을 반박하며 홍수지질학이 제7일안식교의 교리에 기원을 두고 있다며 그 이론을 일축하는 컬프의 주장은 편견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홍수 이론의 근거는 성경이 적어도 6일에 걸친 최근 창조 및 그 이후에 파괴적이고 범세계적인 홍수를 상정하는데 있다고 주장했다. 휘트컴과 모리스의 공저 “창세기의 홍수”는 1961년 2월에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성경의 축자적 무오성에 대한 공동의 믿음을 확언하면서 시작되지만 두 사람의 인식에는얼마간 차이가 있었다. 모리스는 하나님이 두 권의 책, 곧 자연과 성경을 주셨다고 믿고 비록 성경에 우위가 주어지지만 자연도 독자적으로 연구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이 두 책 모두의 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이 지으신 세계와 모순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휘트컴은 모리스의 이런 확신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지만 그는 이성과 경험은 신학적 진리를 발견하는데 충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적 특성과 목적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고, 성경의 신뢰성은 외적인 증거에 기초하기보다는 성경 자체의 증거에 기초하여 수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리스는 만일 성경이 보편적 홍수를 가르친다면 그때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두 가지 선택만 남게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수많은 훈련된 지질학자들의 증언을 거부하든지다. 모리스는 성경과 자연 두 가지 모두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 충실한 역사적 지질학의 새로운 도식을 제공했지만 사실상 그 도식의 구성요소들은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을 거의 넘어서지 못했고 1960년대 복음주의자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재포장했을 뿐이었다.
모리스는 창조, 타락, 홍수라는 세 가지 사건이 세상의 초기 역사를 지배했다고 믿었다. 하나님은 문자적인 6일 동안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방법을 사용해 우주 전체를 창조하셨고 지구를 완전히 성장한 식물들, 동물들 그리고 인간들로 충만하게 만드셨다. 특정할 수 없는 기간 동안 아담과 하와는 완벽한 세상에서 죄와 고통으로 인한 손상 없이 살았다. 그러나 타락이 암묵적으로 열역학 제2법칙을 연상하게 하는 부패와 악화의 기간을 초래했다. 그 시간 이전에는 어떤 죽음도 없었기에 한 때 생존했던 생물들의 화석을 품은 지층들의 연대 모두를 아담의 타락이후로 추정해야 한다. 모리스는 “창세기의 홍수”를 절정으로 끌고 가면서 홍수지질학이 창조와 진화 사이의 갈등에 판결을 내리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강조했다.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과 개념적으로 새로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창세기의 홍수는 발간 후 첫 십년 동안 수만 권이 팔렸으며 복음주의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엄격한 창조론자들은 그 책이 성경이 말하는 대격변을 지성적으로 존중하도록 만들었다고 칭찬했고 반면에 진보적 창조론자들과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그것이 기독교의 과학을 중세기 암흑시대로 되돌리는 지질학의 졸렬한 희화화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수십 개의 기독교 잡지들이 ”창세기 홍수“가 홍수에 대한 성경적 설명을 방어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나 휘트컴과 모리스의 논지의 극단적 의미, 즉 홍수지질학에 대한 수용은 곧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간격이론과 날-시대 이론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이루어진 서평은 거의 없었다. 많은 독자들이 홍수이론과 오랜지구론 도식 사이의 양립 불가능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기에 휘트컴은 홍수지질학이 창세기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의 보충이 아니라 그것을 교체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하는 진술을 추가적으로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휘트컴과 모리스는 ASA와 신복음주의 운동의 대변지인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창세기의 홍수“가 발간된 후 무려 3년이 지나서야 ASA 저널은 그것을 언급하면서 두 개의 적대적인 서평만을 실었다. 헌은 서평에서 휘트컴과 모리스가 탄생 시에 이미 성년의 모습을 갖춘 완전히 성숙한 창조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면 왜 그들은 성가시게도 연대 측정기술의 정확성에 도전하는 것이지 어리둥절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울트는 서평에서 프라이스-모리스-휘트컴이 격변지질학이라 부르는 것의 신학적 전제와 과학적 전제 모두를 의문시했다. 울트는 ”창세기의 홍수“가 세속 과학자들에게는 인정되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 분명하지만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사고에는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휘트컴과 모리스는 자신들을 폄하하는 사람들과 자신들과의 차이점은 가정들과 전제들의 문제이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계시된 틀을 전제로 삼고 그 다음에 모든 적절한 데이터들이 그 틀의 맥락 안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려고 애쓴다면 반대자들은 동일과정설, 즉 진화를 전제하고 그 다음에 모든 데이터를 그 맥락 안에 맞춰 넣기 위해 그것들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휘트컴과 모리스는 자신들이나 반대자나 모두 처음의 전제나 가정에 대한 선택을 결정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주장했다. 휘트컴과 모리스는 자신들과 반대자들 사이의 갈등의 원인을 서로 경쟁하는 우주론의 탓으로 돌렸다. ”창세기의 홍수“에 대한 논쟁은 이후 10년 동안 ASA 저널에서 계속 진행되었고 1969년 화란개혁주의 지질학자인 반 드 플리어트가 그 책을 황폐화시키는 서평을 발표했을 때 절정에 도달했다. 20년전 컬프가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에 대해 그랬듯이, 플리어트는 사실상 휘트컴과 모리스를 사이비 과학자로 일축해 버렸다. 모리스는 플리어트를 반박하면서 플리어트는 지질학적 논쟁에서 추정된 결함들을 취하면서 노아시대의 대격변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무시했다고 말했다. 결국 모리스에게 문제의 핵심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 였다. 발간 후 25년동안 29쇄를 거치면서 20만부가 팔린 “창세기의 홍수”는 휘트컴과 모리스를 유명인사로 만들었고 근본주의자들 가운데 그들은 진화라는 골리앗에 물맷돌을 던진 다윗으로 통했다. 그러나 보수 진영 밖에서 휘트컴과 모리스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랠프 엘리어트는 자신의 책 “창세기의 메시지”에서 창세기의 첫 장이 신학적 사실을 다루는 것이지 물리적 역사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은 지구 역사에 대한 진화론의 모델과 창조론의 모델이 똑같이 비과학적인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모리스의 주장에 격렬하게 도전했다.
창조론자들 11장 - 창조연구회
창조론자이자 유전학자인 월터 램머츠는 휘트컴에게 창세기의 홍수의 영향에 대한 실제적인 연구를 위한 비공식적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루터교회 출신인 렘머츠는 프라이스의 홍수지질학에 영향을 받고 프라이스의 도식 안에서 자신의 문자적인 루터교의 믿음과 지층 화석들의 증언을 화해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평생 동안 프라이스의 제자로 남았고 1930년에 생물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엄격한 창조론자가 되었다. 그는 비록 자신이 지질학 분야에서는 초보자임을 인정했지만 유전학 분야에서 자신의 오랜 경험이 “실제로 봐야 할 가치가 있는 자연의 증거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자신에게 부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진화에 대한 램머츠의 관점은 창조론의 관점에서 보아도 극단적이었다. 가장 엄격한 창조론자들마저 소진화와 몇몇 種들의 자연적인 발전을 허용할 때조차 그는 계속해서 種들의 절대적인 고정성을 주장했다. 그의 독특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램머츠는 1960년대에 모리스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두 명의 과학적 창조론자들 중 하나로 등장했다.
램머츠와 팅클이 창조론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을 때, 그 두 사람 사이에는 진화를 반대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었다. 팅클은 진화에 반감을 가졌고 프라이스를 칭찬했지만 홍수지질학을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았다. 지구 역사에 관한 팅클의 견해는 프라이스의 대격변설로부터 왔다기보다는 프랑스의 지연주의자인 조르주 퀴비에의 옛 격변설로부터 왔다. 팅클은 퀴비에와 마찬가지로 지구가 단 한 번이 아니라 일련의 중요한 지질학적 대격변을 겪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1961년 팅클과 램머츠는 그들이 제안했던 그룹에 관련해 가장 모호한 의제만 가지고 있었다. 팅클은 대다수 과학자들을 진화에 반대하는 쪽으로 전향시키는 것을 희망한 반면에 현실주의자였던 램머츠의 목표는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문자적 창조를 거부하지 않도록 하며 또한 세상에 창조론 과학자들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었다. 1961년 가을에 램머츠와 팅클은 8명의 알려진 창조론자들에게 ASA 내부에 반진화를 위한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그런데 홍수지질학을 믿는 지질학자를 그 모임에 안착시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과제였다. 결국 한 때 대학원에서 지질학을 전공했으나 어떤 종류의 박사 학위도 갖고 있지 않은 루쉬가 10명의 위원회 멤버들 중에서 홍수지질학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었다. 10명의 설립 멤버들 중 5명은 생물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었고 6번째 멤버인 기쉬는 생화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7번째 멤버인 루쉬는 생물학 석사 학위를 갖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진화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제 지능이나 교육의 부족 때문은 아닌 것이 되었다. 그들의 우선적인 목적은 창조론 과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고 또한 모든 과학자가 진화를 수용한다는 신화를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1년 ASA 안에 형성된 창조연구 자문위원회(Creation Research Advisory Committee)는 1963년 6월에는 마침내 창조연구회(The Creation Research Society)로 공식적으로 발족되었다. 이들은 램머츠의 지도를 따르면서 유신론적 창조 개념에 기초한 창조론 교과서를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램머츠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창조연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수용할 수 있는 신앙진술서 초안을 작성하는 일이었다. 모든 사람이 진화론자들을 배척할 필요성에는 동의했지만 그 이상의 의견일치는 이루지 못했다. 모리스는 창조연구회가 성경의 무조건적 영감설과 홍수지질학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 두 가지가 분명하게 표기되지 못하면, 창조연구회는 결국 진화론과 타협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홍수이론에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다른 멤버들은 모든 지리학적,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문제들을 홍수로 풀려고 한다면 창조연구회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결국 모든 회원에서 적용되는 최종적인 신앙진술서는 홍수지질학과 우주의 최근 창조를 반드시 수용할 것을 요구하는데 실패했다.
창조연구회(CRS)는 시작부터 복음전도나 정치적 활동보다는 교육과 연구를 강조했다. 연구회는 대중적 강연을 후원하는 대신 자신들의 에너지를 책과 저널들의 출판에 집중시켰다. 그들은 공립학교들이 점점 더 진화를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세우면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초기 몇 해 동안 창조연구회는 지구의 나이 문제로 내부적인 갈등을 겪었다. 연구회 내부에는 오랜지구론자, 지구 나이를 중시하지 않는 사람, 젊은지구론을 옹호하지만 이견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램머츠는 처음에는 진화론자들이 진화의 세부사항에 대해서는 모두 의견이 다른 것처럼 창조론자들의 의견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렘머츠는 창조연구회가 번성하자, 간격이론과 날-시대적인 사고를 버리기를 꺼려하는 멤버들을 축출하고도 연구회가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램버츠는 창조연구회가 창조뿐만 아니라 홍수지질학과 젊은지구론에도 분명하게 헌신하도록 정리함으로써 창조연구회가 미래에 그런 헌신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도록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창조연구회는 오직 헌신된 홍수지질학자들만 받아들임으로써 젊은지구론의 주장에 설득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창조론자들은 점점 위축되었다. 1965년에 캐나다 출신의 간격이론가이자 자칭 근본주의자인 호위트는 창조연구회 지도자들에게 홍수지질학을 회원 가입의 실제적인 조건으로 삼지 말고, 홍수지질학이든 간격이론이든 유신론적 진화든 진리를 찾는 진정한 창조연구회를 만들자고 호소했지만 결국 거부되었다. 그는 오늘날 홍수주의자들은 대단히 교리적으로 되어가는 중이라고 탄식했다.
첫 10년 동안 창조연구회는 자신들의 제한된 자원을 두 가지 프로젝트에 집중시켰는데, 그것은 계간지를 발간하는 것과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미국 생물학 연구소의 일단의 생물학자들은 콜로라도 대학 안에 생물학 커리큘럼 연구소(Biological Science Curriculum Study: BSCS)를 설립했다. BSCS는 그들의 자료들 안에 현대 생물학의 기본적 요소를 구성해 넣고 10학년 교과서를 세 가지 버전으로 발행했고, 결국 미국의 절반의 고등학교가 BSCS가 발행한 교과자료들을 사용하게 되었다. 버나드 램이 홍수지질학을 공격했던 것이 휘트컴과 모리스를 자극해 프라이스의 격변설을 방어하도록 만들었던 것 같이, 이런 논쟁적인 교과서들은 진화론에 대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이 아이들의 목구멍에 억지로 진화를 밀어 넣으려 한다고 비난했고 근본주의자들은 교과서들이 하나님을 불필요하게 만들어 무신론을 옹호한다고 분개했다. 램머츠는 창조론 교과서에 대한 명백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창조연구회의 교과서 위원회를 지명했고 기독교 출판사인 존더반 출판사를 통해 1970년에 “생물학: 복잡성 안에서 질서 찾기”라는 창조론 교과서를 출판했다. 그 책은 초판 1만부가 1년에 팔리고 2쇄 2만 5천부를 찍어내는 성공을 거둔 반면에 공립학교들 중에서 그 책을 교과서로 채택한 학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창조연구회는 그 교과서 판매로 얻어진 인세를 통해 점차 창조과학(Creation Science)이라고 불리게 된 것의 연구를 지원할 수 있게 되었다.
창조론자들 12장 - 창조과학과 과학적 창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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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연구회 회장인 헨리 모리스는 창조론 교과서 초판 서문에서 그 책이 때때로 과학의 경계선을 넘어서 기원에 관한 철학적 질문에 답변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기원에 관한 철학은 진화론과 특별창조의 교리라는 두 가지 방식을 취하는데, 전자는 생명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서 서서히 발전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고 후자는 모든 생명과 생명체의 주요한 종류들이 특별 창조의 과정들에 의해 본질적으로 순간적인 기원을 갖는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모리스의 이런 언급은 진화로부터 과학적 지위라는 자격을 박탈함으로써 창조를 진화와 동일한 기반에 올려놓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그는 창조라는 성경적 교리에 과학적 지위를 부여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4년 후 존 무어가 새로 쓴 서문은 창조와 진화의 차이를 개념화하는 새로운 방법, 이른바 두 모델 접근법이 등장했다. 무어는 기원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관점에 진화 모델과 창조 모델이 있다며, 이 두 모델 사이의 선택은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를 준거틀인 모델과 상관시키는 유효성의 측면에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무어의 이런 주장은 창조론을 과학의 방향으로 몰고 갔다. 이어서 모리스는 1974년에 고등학교 교사들을 위해 만든 “과학적 창조론”이란 소책자에서 창조론을 감싸고 있는 성경적 외피를 벗겨내고 창조론을 과학으로 재포장하려고 했다. 그는 두 모델 접근법을 사용해 창조론이 성경에 대한 언급 없이도 가르쳐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립학교들에서 창조론의 성경적 기원에 관한 언급을 배제하고 오직 과학적인 창조모델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명시적으로 성경적인 창조론을 가르친다면 오히려 그것은 창세기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셈이 되며 그 결과 비기독교적인 우주생성론들도 창조론 교육에 포함시키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70년대 중반에 모리스나 무어 같은 홍수지질학의 옹호자들은 프라이스의 견해에 창조과학 혹은 과학적 창조론이란 꼬리표를 단단히 부착시켰는데, 이것은 엄격한 6일 창조론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중요한 전략적 이동을 의미했다. 이제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지난 100년 동안 성경적 창조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과학적 자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와 진화 모두에 과학적 지위를 부여하려고 했다. 그들은 과거에 창조론 선배들처럼 진화를 교실 밖으로 추방하려고 하는 대신 오히려 창조를 교실 안으로 들여오기 위해 싸웠다. 그들은 창조론을 위해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론의 과학적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창세기의 이야기를 경시했다. 이렇게 창조론자들이 과학에 호소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교육적, 법적 발전에 대한 대응으로서 발생했다. 시그레이브스와 섬롤은 캘리포니아 주 교육위원회에 진화는 주정부가 승인한 모든 생물학 교과서 안에 하나의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명시되어야 한다는 청원서를 냈다. 그의 청원은 미국 법무장관실과 캘리포니아 공교육 교육감 맥스 레퍼티의 긍정적인 대답을 이끌어냈다. 1966년에 레퍼티는 그들에게 창조론에 대해서도 또 같은 교육시간을 요구하라고 격려했다. 시그레이브스와 섬롤은 교육위원회를 설득해 커리큘럼 안에 창조를 병합시키려는 첫 번째 시도에는 실패했으나 교육위원회는 1970년에 배부된 개정 지침서에서 과학의 견지에서 창조는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믿음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이것은 진화론자들을 격앙시켰고 197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에서 격렬한 교과서 논쟁을 일으켰다. 그 논쟁의 결과 진화론자들은 공립학교 교과서에서 창조를 추방하는데 성공했지만 창조론자들은 진화를 단지 사변적인 이론의 수준으로 강등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창조론이 종교로부터 과학으로 변형된 것은 캘리포니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으로 발생했다. 그 사건들을 통해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이 단지 성경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것을 포기한다면 창조론이 과학 교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모리스는 창조론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데, 이번에는 종교적 믿음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대안적인 과학적 설명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선언했다. “대안적 과학”이라는 이런 꼬리표는 1969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제 모리스는 창조연구회 동료들에게 두 모델 접근법을 소개하면서 잔화와 창조가 똑같이 과학적이며 동시에 똑같이 종교적이므로, 진화와 창조는 모두 서로 경쟁하는 과학적 가설이라고 가르쳤다. 1972년에 열린 창조연구회 이사회 모임에서 멤버들은 “과학적 창조론”이란 용어를 사용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고 그때부터 창조론자들은 이 용어를 “창조과학”이란 용어와 교차적으로 사용했다. 1960년대 이전에 성경적 창조론자들 중 지질학적 대격변에 호소했던 사람은 없었는데, 이제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창세기의 홍수를 진화론적 우주발생론과 창조론적 우주발생론 사이의 갈등의 진정한 핵심이라고 확신했다. 과학적 창조론자들은 비록 창조론을 성경에 의지하지 않고도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성경이 자신들의 사고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창조론자들이 과학적 창조론의 기초적 요소들이나 그 요소들의 종교적 뿌리를 덜 중요하게 취급하는 경향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 홍수지질학자들 중에도 반대자가 있었다. 모리스의 동역자인 휘트컴은 그런 재포장 노력에 유보적 태도를 보이며, 소위 과학적 창조론은 확실성과 기독교성 모두를 희생시킨다고 생각했다. 휘트컴은 성경에 대한 언급을 피함으로써 창조론은 공립학교 수업시간에 진화론과 동일한 시간을 갖게 될 지도 모르지만, 그 대가는 엄청나게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한 그는 성경적 신학은 과학적 창조론에 방해가 되거나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으로 그것의 최종적 권위, 능력, 그리고 승리를 위한 유일한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창조론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과학으로 밀어 올리면서도 진화에 대해서는 유사한 적법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지만 창조론자들은 과학적 호교론 쪽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진화를 비방하기 보다는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자들과 동등한 과학적 위상을 갖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놀랄 것도 없이 미국 과학계는 자신들이 어렵게 얻은 특권과 권력을 과학의 권리를 주장하는 종교적 열심당원들과 공유하기를 거부했다. 1981년 미국과학아카데미는 종교와 과학은 서로 분리되고 상호 배타적인 인간 사고의 영역들이며, 그것들을 같은 맥락에서 제시하는 것은 과학이론과 종교적 믿음 모두에 대한 오해를 초래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창조론에 대해 비판적인 자들은 창조론자들을 과학의 영토로부터 몰아내기 위해 과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로 이뤄진 장벽을 세움으로써 그들이 과학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창조론자들은 교육위원회와 주 입법기관에 두 모델 접근법에 호소함으로써 창조론의 과학적 지위를 옹호했다. 모리스는 창조론자들은 학교에서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가르칠 것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학의 사실들이 창조라는 과학적 모델의 견지에서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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