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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시장,정치, 복지 그리고 한국교회- 고세훈

시장,정치, 복지 그리고 한국교회- 고세훈

2016-04-13 17:16:35


고려대학교 공공행정학부 교수 2016년 3월22일 새물결 아카데미 대중강좌

 

모든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갈등이다. 갈등은 불가피하여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갈등없는 시대나 나라는 없었다. 전세계적으로 인종, 언어, 지역, 종교, 갈등이 심각하지만 한국은 갈등이 그다지 심한 나라는 아니다. 정치란 갈등이 폭력적으로 분출하지 않도록  갈등을 평화적으로 조정하고 통합해 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한국 사회는 정치때문에 만들어진 갈등이 많다. 역사적으로 어느 나라에나 나타난 본질적 갈등은 사회경제적 갈등이다.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하고 완화하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정치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조정할 책임이 가장 크다. 오바바가 흑백문제는인종문제이기 전에 계급의 문제고 빈부의 문제라고 지적했듯이 사회경제적 갈등은 가장 본질적 갈등이고 모든 갈등의 배후에 있는 갈등이다. 북아일랜드의 신구교간 종교 갈등도 그 배후에는 빈부격차의 갈등이 있다. 정치의 핵심은 사회경제적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정치가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편들지 않으면 안된다.

 

정당체제도 어떤 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인가라는 사회경제적 갈등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갈등은 해소할 수 없고 다만 완화될 뿐이다. 정치는 이 갈등 완화를 목표로 한다. 갈등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불가피하다. 이 갈등을 조정하고 완화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 역할이다. 그러므로 사회경제적 약자를 편들지 않는 정치는 그 존재 의미가 없어진다. 자본주의 사회는 가만히 놔두면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된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모든 것을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은 자유경쟁 시장이 아니라 불평등하고 권력적이며 위계적인 갈등 공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정치는 형식적으로 평등한 공간이다. 정치는 형식적 평등의 논리로 불평등한 시장이 낳는 수많은 문제들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자본주의가 낳는 사회경제적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그것은 체계적으로 나오는 불평등이며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고 정치에 관심을 안 가질 수 없다. 정치는 많은 사람을 체계적으로 빈곤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에 무관심한 것은 이웃 사랑 계명에 무관심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1980년대 미국 레이건 정부, 독일의 헬무트 수상, 영국의 대처 수상, 이 세 나라의 보수 우익 정치지도자들이 신 자유주의를 주도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냉전시대가 종식을 고하며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서 세계적인 담론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유주의에서  주체는 개인이고 사유재산권 행사가 핵심이다. 가난한 자가 지내기 힘들고 기득권층에게 좋은 세상이 자유주의 사회인데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를 더 극단적으로 밀어부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에서는 국가의 규제를 철폐하고 민영화와 시장과 기업을 중시한다. 신자유주의 체제하에서 사회적 약자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수 밖에 없다. 체제 경쟁을 하던 냉전시대에는 그런대로 자유주의가 긴장했었고 체제경쟁을 하느라고 사회주의 모델을 일부 모방하기도 했고 그렇게 해서 복지 국가가 출현했고 2000년 이후 서유럽 복지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복지국가는 위기에 처하게 되고 전세계적으로 빈곤과 불평등 문제가 심각해졌다. 신 고전주의 경제학은 경제성장에 관심을 가지고 불평등 문제에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이젠 보수 경제언론들도 불평등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고 있다. 한국의 문제는 이런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OECD의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태로 나가면 2020년 한국은 OECD국가 중 가장 불평등한 국가가 될 것이다.

 

불평등의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불평등이 사회의 다른 분야의 문제들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노인빈곤, 저출산, 비정규직, 범죄율, 자살율, 이혼율, 산업재해 모두 한국이 OECD 국가중 1위이다. 한국의 사회경제 문제가 심각하다. 바른 정치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은 복지의 필요성이 남달리 절실한 사회다. 시장에서 밀려난 사회경제적 약자들, 저임금, 고용불안, 실업의 문제가 체계적이고 대규모적으로 발생하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돌볼 주체는 국가밖에 없다. 이런 대규모 재난을 해결하려면 엄청난 재원이 필요한데 오직 국가만이 세금을 통해 재원조달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적 문제에 선택적으로 대응하는 나라가 바로 복지국가다. 한국은 어느나라보다 더욱 복지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은 정말 참담할 정도로 부재하다. 우리는 한 세대 이상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영향력 하에 있다. 탈규제, 민영화, 긴축정책을 핵심슬로건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정치에 대한 조롱과 경멸을 불러일으켰다. 이 시대는 국가, 정부, 공적인 것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시대지만 우리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 편만한 정치는 우리에게 불가피하고 중요하다. 신자유주의는 정치 무관심을 조장하지만 정치에 소홀하면 우리만 손해다., 우리는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복지 선지국들에서 GNP의 50-70%가 국가예산이고 국가예산의 50-70%가 복지 관련 지출이다. 한국의 경우는 GNP의 25% 정도가 국가예산이고 국가예산 중 25%만이 복지 관련 지출이다, 서유럽 국가들 대비 한국의 복지지출은 1/4 수준인 셈이다. 미국은 선진국중 유일하게 복지국가로 분류되지 않은 나라인데 이런 미국도 한국보다는 복지 관련하여 훨씬 많이 지출한다. 그리고 미국은 민간 기부가 매우 왕성하다. 민간 자선의 전통이 강하기 때문이다. 매년 민간 기부총액이 GNP의 2%에 달한다. 미국은 복지 국가는 아니지만 복지사회다.  그러니 민간 기부 전통도 없고 국가의 복지 의지도 없는 한국은 복지 국가도 아니고 복지사회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한국은  복지에 관한 국가 의지도 없고 민간 기부도 없는 굉장히 잔인한 나라다. 성장을 하면 복지는 당연히 이뤄진다는 것이 부자들의 논리다., 그들은 복지보다는 먼저 성장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자 감세를 하면 부자들이 투자하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지만 부자 감세를 해도 부자들은 투자를 안하고 기업들은 사내 유보금만 늘리고 있으며 대기업들의 고용기여율은 15%에 불과하다.

 

문제는 가난한 자들이 성장이 우선이고 기업을 우선하는 정책에 동의한다는 현실이다. 그러나 성장이 된다고 분배가 자동적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미국은 최고의 성장 국가이지만 복지국가가 아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복지국가들은 모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다. 그들은 복지가 성장에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분배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구매력을 높여줌으로써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그들은 반드시 돈을 쓴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써야 물건이 팔리고 물건이 팔려야 기업이 돌아가고 기업이 돌아가야 투자가 이뤄진다. 가난한 사람들은 한계소비성향이 높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의 논리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복지가 정말 필요한 사람들이 성장이 먼저 이뤄져야 하고 부자감세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복지가 어 느나라 보다 더욱 필요한데도 정부의 복지 의지는 말할 수 없이 취약하고 민간 기부전통도 없으며 국민들도 복지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이 복지 요구를 해야 국가도 복지 아젠다를 정책화할텐데 복지요구 자체가 굉장히 미약하다. 가난과 실업을 개인 문제로 돌리고 열등감에 빠지고 자살로 이어진다. 개인의 자살문제는 사실 사회적 타살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개인의 고통을 개인의 잘못으로만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복지 선진국들은 개인의 고통을 사회의 책임으로 인식한다.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는 가장 좋은 기준은 이렇게 본다. 경제적 고통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를 보고 그것이 개인의 책임이라고 보면 보수주의자이고 개인의 책임보다는 사회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더 많다고 보면 진보주의자다. 우리는 개인의 고통의 문제를 사회적 아젠다화하는데 굉장히 약하다. 그러다 보니 정치가 긴징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민주화 공약을 하고도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는 개인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하고 국가에 대해 뭘 요구해 보지도 못했다.

 

유럽의 중세 봉건제도는 나름대로 장점이 많다. 봉건사회에서 영주와 농노는 신분의 불평등이 있지만 상호책임을 가진 공동체였다. 농노는 노동을 통해 공동체에 봉사하고 영주는 전쟁을 통해 공동체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했다. 봉건사회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인정한 가운데 상층계급이 하층계급에 대한 책임을 졌다. 이것이 노블리제 오블리쥐의 정신이고 서유럽의 복지 국가 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전통이다. 한국은 이런 전통이 없고 중앙관료제와 서민착취의 전통뿐이다. 그래서 한국민은 국가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조선시대가 그랬고 일제 식민지배가 그랬으며 해방이후 정권도 모두 권위주의 체제의 군림하는 권력이었다. 강력한 국가가 권력을 동원해서 위에서 아래로 지배하는 체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에 대해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의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지 국가가 해결해 줄 것이란 기대를 하지 않았고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정책도 나오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도 여당을 찍고 지연을 따라 투표한다. 가난한 사람의 대표가 집권을 하지 못하니 가난한 자를 위한 정책이나 복지 아젠다가 정책화되지 않는다. 한국사회는 국가, 기업, 사회가 약자들은 서로 책임을 미루고  핑퐁하듯이 던지는 모습이다.

 

서유럽에서 보수주의는 기독교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중세 유럽의 봉건전통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비록 타락한 모습을 가지긴 했지만 중세는 대단히 기독교적인  사회였고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막스 베버는 신교가 자본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는데 지금 기독교는 자본주의에 함몰되어 버렸다. 그러나 기독교의 중세 전통을 보면 기독교는 공동체로서 윤리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 그리고 실천을 나름대로 고민했다. 그러나 신교 혁명이 일어나면서 기독교는  구교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적 기독교 윤리를 완전히 상실했고 자본주의라는 엄청난 체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토니 블레어는 이런 기독교를 가리켜 현대 기독교는 생각하기를 멈췄다고 말한다. 한국기독교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 대해 아무런 준비가 없다.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어떤 대안을 내놓은 적이 없다. 신학자들이 정치, 경제, 인문 사회학에 대한 식견이 없다. 기독교가 생각하기를 멈췄다는 토니의 말이 꼭 맞다. 생각하기를 멈추면 가질 수 없고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도 없다. 생각을 멈춘 기독교는 일방적으로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유럽의 보수주의가 가진 공동체 윤리는 유럽 복지국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근대 복지정책을 가장 먼저 도입한 사람이 보수주의자들의 거두 비스마르크다. 서유럽 복지국가들은 중세 기독교 전통에 터잡고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진보세력이다.  노동운동의 강도가 그 나라의 복지수준을 결정한다고 보면된다. 노동운동이 강하다는 것은 노조운동이 강하다는 것과 정치적 노동운동을 하는 노동자 정당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가지가 강할 때 노동운동이 강하다고 말한다. 노조운동이 강하려면 노조조직율이 높아야 한다. 노동자들의 강점은 숫적인 다수인데 그 다수가 조직하고 연대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수는 약점이 되고 이용당하기 쉽다.  숫자의 힘은 연대와 조직에서 나온다. 그렇지 않으면 숫자는 아무 힘이 없다. 노조조직율이 미국이 12-13%, 영국과 독일이 30-40%, 스웨덴이 80%에 비해, 한국의 노조조직율은 10% 미만인데 이마저도 점점 낮아지고 있다. 노조조직율이 복지국가 순위를 정확하게 반영해준다. 한국에서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오는 것은 그들에게 연대와 조직이 없고 그들을 대변한 정당이 없기 때문이다. 노조운동과 노동정당, 복지 국가를 위한 이 양대 토양이 한국에는 전무하다. 지금 한국의 복지는 현재 상황도 심각하지만 더 큰 문제는 미래 전망도 별로 없다는데 있다. 결국 복지는 시혜와 쟁취로 이뤄지는데 우리는 시혜의 전통도 없도 쟁취의 능력도 없다. 여기에 우리의 심각성이 있다. 복지국가의 길은 쉽지 않지만 결코 복잡한 것은 아니다.  가고자 하는 의지가 문제지 몰라서 못가는 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