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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

본회퍼의 신학과 한국교회- 고재길

2016-04-13 21:00:00


  본회퍼 신학의 중심 주제는 교회다. 본회퍼의 교회론적 표현양식은 모두 교회-그리스도-세상을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국교회의 공적 책임에 대한 자각은 교회-그리스도-세상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본회퍼의 관점에서 시작될 수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 중심적 삶을 강조하는 한국교회는 교회와 그리스도가 세상에서의 공적인 책임을 가능하게 하는 신학적 기초임을 깨닫을 필요가 있다. 본회퍼는 기독교 신학의 개념은 사회성과의 관계 하에서 이해할 때, 그 개념들의 사회적 의도가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성에 기초하여 신학의 개념들을 이해하는 본회퍼의 관점은 그의 "성경적 개념들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을 통해 더욱 구체화되고 있다. 한국교회가 본회퍼의 이러헌 사회성의 관점과 비종교적인 해석의 관점에 근거하여 성경과 신학의 기본개념들을 이해한다면 한국교회는 공적인 책임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공론장에 참여할 때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적 언어의 문제다. 이것은 교회가 공적담론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의사소통적 언어와 보다 공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과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의 방법론을 통하여 공공영역에서 보다 현실적합성을 지닌 언어를 사용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본회퍼는 관념론 철학의 주객도식의 구조를 비판하고, 나와 너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관계성의 현실에 근거한 기독교적 인격개념을 강조한다. 본회퍼는 교회공동체를 기본적으로 인격공동체(집단인격)로 이해하면서 개인 사이에 이뤄지는 인격적 관계의 원리가 개별인격과 집단인격(공동체)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집단인격으로 존재하는 교회공동체는 개별인격과 동일하게 타자와의 사회적 만남 속에서 반응하고 결단하며 책임있게 행동하는 윤리적 존재다. 본회퍼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창조된 새로운 인류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계시는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 즉 교회 안에서 경험된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 대리행위는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에게 삶의 원칙이 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적 책임의 신학적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타자와의 인격적 관계속에서 "서로 위하는 삶"과 "서로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스텍하우스는 타자성에 대한 경험과 통찰이 공공신학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고 말한다. 타자와의 관계적인 삶과 공동체적인 삶 가운데 인격이 완성된다고 보는 스텍하우스의 관점은 본회퍼의 인격주의와 유사하다.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한국 교회가 공적인 책임을 이행하려고 할 때, 그리스도의 대리행위와 교회공동체의 인격적 관계성에 기초한 삶, 그리고 타자중심적 인격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세상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투쟁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책임의 장소가 된다고 말한다. 그는 교회의 사회성은 사회적 삶의 구체적인 위임을 통해서 나타나며 그리스도인은 가정, 노동, 정부, 교회라는 각 위임의 자리에서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공적인 책임을 이행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각 위임들은 그리스도 현실의 윤리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영역으로서 상호적 관계성과 상호적 의존성에 근거하여 고유의 책임을 이루어 간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특정 위임이 자기 책임에 실패할 경우 다른 위임에 의한 경고와 비판, 즉 상호견제가 허용된다고 말한다. 히틀러에 대한 본회퍼의 저항은 위임의 이러한 상호견제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이런 상호견제적 특성은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적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공공신학은 경제적 위임(노동)에서 나타나는 실패에 대해 상호견제적인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오늘날 공공신학에서 세계화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주요 과제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대부분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 주목하고 경제적 영역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공공신학은 세계화의 결과로 개별 지역과 개인의 상황 속에 일어나는 인간적 삶의 근본을 흔드는 고통스런 현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신학의 과제는 세계를 해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데 있다는 명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부정적 결과를 과소평가하는 공공신학의 일부 연구자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본회퍼의 종교비판은 기독교와 교회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당시 교회의 자기 중심적인 종교 형태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그 비판은 타자중심적인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교회공동체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본회퍼에게 "타자를 위한 교회"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교회이며 "타자를 위한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교회였다. 본회퍼는 타자를 위한 교회는 기도와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으로써 자기 책임을 이행하는 교회라고 말한다. 한극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본회퍼의 이런 교회론을 배울 때, 세상과  사회를 위한 공적 책임을 보다 적극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회참여의 신학으로서, 시민사회에서 기독교 윤리를 반영하는 공공신학에서 타자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점검이 매우 중요하다. 타자는 단순히 도움을 일방적으로 받는 객체적 존재가 아니다. 타자는 오히려 우리의 공적인 책임을 현실사회 속에서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주체가 된다. 타자의 정체성을 규정할 때, 적어도 그 작업은 이미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타자의 범주를 벗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오늘날 공공신학은 공공정책의 담론 형성과 집행 과정에서 타자의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교회와 공공신학은 공공정책의 시행을 통해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큰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정함으로서의 정의(justice as fairness)를 실현하는데 힘써야 한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신학

2016-11-03 23:03:13


 1. 본회퍼(1906-1945)는 삶을 신학하듯 살았고 신학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신학적 키워드인 제자직, 타자를 위한 교회, 책임윤리, 세속성의 신학, 비종교적 기독교 등은 그의  이러한 신학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본회퍼는 1906년 브레슬라우에서 8남매중 6번째로 출생하여 튀빙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했고 19세인 1925년 '성도의 교제'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했는데 바르트는 이 논문을 신학적 기적이라고 격찬했다. 1928년에는 바르셀로나의 독일인 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으며 1929년에는 교수자격 논문으로 '행위와 존재(Akt und Sein)"을 제출했다. 1930년에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서 1년간 연구했는데 이때 흑인의 인종차별, 평화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3년 나치당이 급부상하면서 히틀러가 총통으로 취임하고 국가사회주의를 표망하는 독일제3공화국이 출현한다. 히틀러는 반 유대주의, 히틀러 독재에 협력, 독일민족의 기독교 건설을 목표로 '독일적 그리스도인들'을 결성했다. 특히 아리안 조항을 신설하여 유대인 피를 가진 사람이나 유대인과 결혼한 사람들은 일체 국가의 공직을 금지하였다. 본회퍼는 이에 반대하여 "유대인을 교회에서 제거하는 것은 그리스도 죽음의 부정이고, 기독교의 부정이다. 유대인과 독일인이 함께 말씀아래 서 있는 곳, 여기에 교회가 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배격하는 것은 보편 교회의 교제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후 본회퍼는 현실에 뛰어드는 행동하는 신학자의 길을 걷는다. 그는 고백교회 투쟁기에서 '히틀러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참된 교회가 아니라"며 독일 국가교회를 비판했다. 본회퍼는 1939년에 독일군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미국으로 망명하는데 한 달후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나치정권 붕괴와 히틀러 암살을 위한 저항운동에 참여한다. 본회퍼는 자신이 어려운 시기를 독일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이겨나가고 그들과 함께 시련을 나누지 않는다면 자신은 전후 독일에서 기독교적 삶을 재건하는데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1943년 본회퍼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베를린 테겔 형무소에 수감되는데 이때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가 나중에 옥중서신으로 발간되었다. 1945년 4월 9일 이른 아침 본회퍼는 플뢰센부르그 비밀경찰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2. 본회퍼의 신학의 3가지 키워드는 그리스도, 교회, 세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신학적 성격은 현실적, 세상적 실천적, 예언적, 공동체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요약될 수 있다. 본회퍼 신학의 형성기는 1927-1933년인데 이 시기에 그의 "교회론적 신학"이 정립되며 이 당시에 저술된 글이 성도의 교제, 행위와 존재이다. 두번째 시기인 1933-1940년의 중심 테마는"제자도의 신학"인데 이때 저술된 책이 신도의 공동생활, 나를 따르라이다. 마지막 세번째 시기인 1940-1945년에 본회퍼는 "세상적 기독교 혹은 세속적 신학"의 정립에 몰두했다. 그는 하나님을 필요로하지 않는 "성인된 세계"에서 어떻게 복음이 선포되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고 그 신학적 대안으로 세상적 기독교 혹은 비종교적 기독교를 제시했다. 이 시기에 기록된 저술이 옥중서신, 윤리학이다.  본회퍼의 사상은 그의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에 양극화된 편차가 나타난다. 초기에 쓰여진 성도의 교제나 그리스도론은 지극히 온건한 신학을 보여준다. 또한 핑겐발데 신학교 시절에 쓰여진 신도의 공동생활, 나를 따르라는 공동체, 예배, 명상, 기도훈련을 강조한다. 여기서 본회퍼는 루터교의 후예로서 교회의 사람이요, 신앙공동체의 목화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후기의 본회퍼는 이 세상성의 긍정과 이웃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말하면서 세상적 기독교 혹은 비종교적 기독교를 탐구한다. 교회에서 세상으로 넘어간 본회퍼의 후기 사상에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한 구속의 주님이 아니라 인간 사회 전체를 위한 연대적인 그리스도로 바뀌었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경험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에서 이웃과의 만남이 되었다.  본회퍼의 후기 사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를 해석하는 신학자들은 본회퍼를 마르크스적으로 혹은 무신론적 혹은 무교회적 신학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회퍼의 신학적 초점이 교회에서 세상으로 이동한 것은 맞지만 그가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부정하거나 교회없는 신학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본회퍼는 기독교 교리를 재해석하고 교회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3. 본회퍼 신학의 중심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다. 본회퍼 신학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그리스도 집중의 신학이다. 그래서 그의 신학적 주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와 대리사상, 그리스도와 십자가 신학, 그리스도와 제자직, 그리스도와 현실, 그리스도와 세계, 그리스도와 타자를 위한 존재였다. J.D. 갓시는 기독론은 본회퍼의 전기와 후기 사상을 관통하는 신학적 중심이라고 말하면서 그의 신학적 주제인 교회, 제자직, 세상은 모두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설명한다. 본회퍼는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를 묻는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는 인간 존재와 역사의 중심(Mitte)이며 하나님과 자연 사이의 중보자(Mittler)다.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한 집합적 인간(집단인격; collective person)이며, 대리자이며, 대표자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담의 인간성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으로 변형되었고 그의 삶,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성도의 공동체가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본회퍼에게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은 서로 일치를 이룬다.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현존이듯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그러므로 그러므로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다. 이것은 본회퍼에게 교회는 그리스도 사건이며, 그리스도의 육화된 현재이며, 그리스도의 가시적 형태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본회퍼는 교회는 그리스도처럼 존재하고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말한다.   본회퍼의 초기 사상에서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로서 현존하신다면 후기 사상에서는 그리스도는 타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된다. 그래서 그는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1라고 말한다. 여기서 본회퍼의 형성의 윤리가 등장한다.

 

 4. 본회퍼의 제자도 신학 역시 그의 기독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본회퍼의 저술 "나를 따르라"는 본회퍼 자신의 삶에서 성취된 그리스도 모방의 사상을 보여준다. 그동안 그리스도 모방(imitatio Christi)은 주로 개인 영성과 경건훈련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그것은 인간성, 세속성, 현세성의 부정이여 세상과의 결별이었다. 그러나 본회퍼의 "나를 따르라"는 금욕주의, 현세 부정의 제자도가 아니라 오히려 삶과 고난에의 참여없이 싸구려 은총의 자기구원의 만족에 빠진 부르조아 기독교에 대항하는 급진적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이다.  본회퍼는 믿는 자만이 순종하며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고 말하며 신앙과 순종은 시간적인 분리가 아니라  단지 논리적인 분리일뿐이라고 강조한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 따름(following Christ)은 그리스도를 향한 따름과 세상을 향한 따름이었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 따름은 염세주의적, 수도원적 제자도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존재로서 세상의 고난에 참여하는 사회적 제자도, 세계참여적 제자도였다.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교회와 세상과의 대결적 긴장, 그리고 공동체적 결속안에서 세상과 구별된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강조했지만 후기 "옥중서신"에서 제자의 길은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아간다. 옥중서신에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이제 세상적인 인간이 되었으며 세상 속에 육화되었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과 그리스도적인 것 사이의 차이는 무너졌다. 이제 세계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 본회퍼는 세상적 혹은 세속화된 기독교, 비종교적 기독교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본회퍼에게 세상성의 긍정은 내세없는 현세, 초월이 부정된 내재, 종교적 관행이 배제된 기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섬기며 사는 삶과 그리스도의 세상에서 대리자의 역할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독교를 말한다.  본회퍼가 말하는 세상적 기독교는 케리그마(선포)와 코이노니아(친교)가 없어지고 오직 디아코니아(봉사)만의 기독교가 아니다.

 

  5. 본회퍼는 예수의 타인을 위한 현존은 초월의 체험을 뜻한다고 말한다. 그는 초월이란 우리가 범접할 수 없고 우리 힘으로 미칠 수 없는 과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손 내밀면 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당신(Thou)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너'로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하나님의 '너'가 비로서 인간으로서의 '너'를 창조한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너'는  하나님의 '너'와 마찬가지로 참되고 절대적이며 거룩한 '너'가 된다. 나와 너의 관계는 아무런 현실적인 근거없이 공중에 떠있는 관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너'는 하나님의 '너' 를 나타내는 형상이다. 본회퍼는 그 자체로서 인간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타인과 더불어 또 타인에게 대해 갖는 만남의 사건에 있어서 인간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인간 속으로 들어오신 이 사실에서 인간은 이웃에 대하여 한 그리스도가 되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대신 희생당하며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사실을 비로서 구체화한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인간의 인격은 사회적인 관계속에서만 이해딯 수 있다고 말한다. 인격관계는 서로에게 의존하며 밀접한 관계성안에 잇는 그런 존재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함께 결합하여 지으신 것은 하나님이 고립된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공동체의 역사를 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본회퍼는 죄의 개인성과 사회성은 밀접하게 연관되며, 개인의 죄나 회개는 집단인격으로서의 대러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한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존재'이며 하나의 집단인격을 의미한다.  새로운 인간성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대리행위(죽음, 십자가)에 의하여 그리스도 안에 이미 완성되어 있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는 교회안에 멈추기 않고 사회적 연대성을 포괄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는 '타인을 위한 현실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는 그리스도인 각자가  짊어져야 할 책임적인 삶의 구조로 편입된다. 여기서 본회퍼의 대리개념은 책임윤리의 근간이 된다. 본회퍼는' 행위와 존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또 말해서도 안되며, 다만 인간과 더불어 계약관계에 계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를 고려할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자기 존재를 계시하는 분이라면 우리는 오직 관계의 유비로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본회퍼에게 '관계'란 인간 존재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이 성취하신 수동적인 의를 의미한다. 바르트는 관계유비를 본회퍼에게서 채택하였고 그것을 삼위일체적으로 전개시켰다.

 

 

각주 1

오늘날 교회론의 대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이다. 그는 교회의 배타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도나투스에 반대하여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교회론울 주창했는데 그의 교회론에는 당시의 로마제국의 질서가 투영되어 있다. 재세례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을 혼합주의적 교회론으로 간주하고 배격한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일치시키는 본회퍼의 교회론은 재세례파의 교회론과 일맥상통한..

  1. 오늘날 교회론의 대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이다. 그는 교회의 배타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도나투스에 반대하여 보편적이고 포용적인 교회론울 주창했는데 그의 교회론에는 당시의 로마제국의 질서가 투영되어 있다. 재세례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론을 혼합주의적 교회론으로 간주하고 배격한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일치시키는 본회퍼의 교회론은 재세례파의 교회론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2016-11-09 18:17:53


값 비싼 은혜

 

  오늘날 우리의 투쟁은 값비싼 은총을 얻기 위한 것이다. 값싼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은 죄를 뉘우치거나 죄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값싼 은혜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성육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값싼 은혜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통해 세상과 구별되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하며, 이러한 값싼 은혜에 대한 세상의 믿음을 파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말고, 은혜로 위로를 받으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회개한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보다는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는 값싼 은혜다. 값싼 은혜란 우리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은혜다. 값싼 은혜란 참회가 없는 사죄요, 교회의 치리가 없는 세례요, 죄의 고백이 없는 성만찬이요, 개인적인 참회가 없는 사죄다. 값싼 은혜란 뒤따름이 없는 은혜요, 십자가 없는 은혜요, 인간이 되시고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은혜다.

 

  값비싼 은혜란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 값비싼 보석과 같다. 그리스도의 통치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이다. 언제나 다시 추구해야 할 복음이요, 언제나 다시 간구해야 할 은사요, 언제나 다시 두드려야 할 문이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기 때문이요,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죄를 나무라고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은혜가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아들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셨기 때문이요, 하나님에게 값비싼 것이 우리에게는 값싼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귀하게 간직해 두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주셨기 때문이다. 값비싼 은혜란 하나님의 성물로 이해되는 은혜다.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되는 은혜요, 기뻐하시는 대로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되는 은혜다. 우리에게 예수를 따르기를 촉구하는 은혜요, 괴로운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에 다가오는 사죄의 말씀이다. 그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멍에를 지우기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예수가 나의 멍에는 부드럽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결정적인 잘못은 엄격한 제자직의 은혜로운 길을 따른 것에 있지 않았고 자신의 길을 몇몇 사람들의 자유로운 특별한 업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자가 되기 위해 특별한 공로를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종교개혁 시대에 자신의 종 마르틴 루터를 통해 순수하고 값비싼 은혜의 복음을 다시금 일깨우셨을 때, 루터로 하여금 수도원을 거쳐 가게 하셨다. 그는 순종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생명을 걸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서를 통하여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이 인간의 특별한 공로가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명임을 보여 주셨다. 수도원에서는 뒤따름의 자기 부정이 경건한 자들의 최종적·영적인 자기주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수도사의 세상도피는 가장 정교한 세상 사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경건 생활의 마지막 가능성이 좌절된 가운데서 루터는 은혜를 붙잡았다. 그는 자신의 경건한 자아마저 버리고 자기의 공로를 바라보면서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따랐다. 예수의 제자직은 세상 한복판에서 실천되어야 했다. 예수의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은 일상적인 직업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했다. 그리스도인은 몸으로 세상과 부딪치게 되었다.

 

  루터가 순수한 은혜의 복음을 발견함으로써 세상 안에서 예수의 계명에 순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선포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오해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세상 직업은 오직 세상에 맞서 치열한 저항을 선언함으로써만 정당성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세상 직업은 오직 그리스도의 제자직 안에서 수행될 때에만 복음으로부터 새로운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 루터가 수도원을 뛰쳐나왔던 것은 죄를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해서였다. 루터에게 값비싼 은혜가 선사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은혜인 까닭은 그것이 마른 땅 위의 물이 되었고, 불안에 대한 위로가 되었고, 스스로 택한 노예 생활을 벗어나게 하며, 모든 죄를 용서하기 때문이다. 그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그것이 행위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직으로의 부름을 무한히 강조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은혜는 값비싼 것이었다. 바로 이점에서 제자의 길은 은혜였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복음의 비밀이었으며, 죄인을 의롭게 하는 비밀이었다. 루터가 깨달았던 것은 인간이 아무리 경건한 길을 가고 선한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언제나 자신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러한 곤궁 속에서 신앙을 통해 값없이, 아무 조건 없이 모든 죄를 용서하는 사죄의 은혜를 붙잡았다. 이러한 은혜를 붙잡기 위해 루터는 자신의 생명을 걸었고, 날마다 생명을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는 참으로 은혜를 통해 제자가 되는 것을 면제받았던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제자가 되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은혜를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순종할 수 있었다.

 

  비록 최선의 삶을 살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무익하다. 은혜를 깨닫는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의 삶의 죄로부터 최종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결별한다는 것이었고, 결코 이를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제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가장 진지한 부름이었다. 그 무엇을 전제하는 은혜란 가장 값싼 은혜다. 그 무엇으로부터 귀결되는 은혜란 값비싼 은혜다. 무엇이 본질적인지, 그리고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표현되고 사용되는지를 아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것은 오직 은혜호만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바로 그 말씀이다

오직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뒤따르는 자만이 오직 은혜로만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있다. 그는 나를 따르라는 부름 그 자체를 은혜로 인식하며, 은혜를 이러한 부름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를 통해 제자가 되지 않으려는 자는 자기 자신울 기만하는 자다.

 

  만약 루터의 명제를 은혜의 신학의 전제로 삼는다면, 이를 통해 값싼 은혜를 불러들인 셈이 된다. 하지만 루터의 명제를 시작으로 이해하지 않고 전적으로 마지막으로, 결과로, 마무리 돌멩이로, 최후의 말로 이해한다면, 그 명제는 올바로 이해될 수 있다.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라는 루터의 명제는 오직 제자의 길을 가면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죄가 무서워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종적인 정보와 권면임이 분명하다.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라는 루터의 말은 불순종하는 자신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다. 이 복음은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한다. 죄를 고백하고 도망치지 말고 이보다 더 담대하게 믿으라.”

 

은혜를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라는 명제를 시련 속에서 주어진 위로와 제자직으로의 부름으로 이해하는 것, 오직 실제로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해방하는 순수한 은혜만이 값비싼 은혜다. 값싼 은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길을 열어 주지 않고 오히려 닫아 버리고, 불순종하는 우리를 완고하게 만들었다. 제자직의 기쁨을 억압한다. 싸구려 상품에 현혹되어 그리스도의 부름을 버리게 한다. 기만을 당하나 연약한 인간은 값싼 은혜를 소유함으로써 드디어 강한 인간이 된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순종과 제자직을 실천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은혜와 제자직을 다시금 올바른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은혜는 값비싸다는 사실을 놀라움 가운데서 이해하는 자는 복되다. 은혜가 값비싼 까닭은 그것이 순수하기 때문이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하게 뒤따르는 가운데서 이러한 은혜에 압도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은혜를 겸손하게 찬양할 수 있는 자들은 복되다. 이 세상 안에서 이 은혜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이 은혜를 인식하면서 살 수 있는 자들은 복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가운데서 하늘 아버지의 나라를 깊이 확신하고,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일에서도 참으로 자유로운 자들은 복되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직을 오직 은혜로부터 주어진 삶으로 이해하고, 은혜를 제자직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복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 곧 자비로운 은혜의 말씀을 받아들인 자들은 복되다.

 

 

제자직으로의 부르심

 

1. 예수는 선생이나 모범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제자직을 요구하신다. 예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을 떠나서 신앙에 이르는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념, 교리체계, 은혜나 사죄에 관한 보편적, 종교적인 인식 따위는 제자직을 필요한 것으로 만들기는커녕 제자직을 배제하고 적대시한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는 반드시 제자직이 없는 기독교로 남게 되며 제자직이 없는 기독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로 남게 된다. 이런 기독교는 이념이요 신화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이 되셨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다. 그렇게 때문에 제자직은 그와의 올바른 관계다. 제자직은 중보자와 결부되어 있다. 오직 중보자, 곧 하나님이며 인간이신 분만이 제자직을 요구할 수 있다.

 

2. 본회퍼는 누가복음 9 57-62의 이야기를 가지고 제자의 3가지 유형을 설명한다. 첫 번째 제자는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지만 부름을 받지 못한 경우다. 제자직은 반드시 부르심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 두 번째 경우는 부름을 받았지만 율법에 발이 묶인 경우다. 예수는 율법에 대항하여 따르기를 요구한다.(?) 세 번째 경우는 부름을 받았지만 제자직을 자신만이 달성할 수 있는 제안으로,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인생의 프로그램으로 잘못 이해한 경우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요구를 제시함으로써 제자직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3. 예수는 인간이 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교리가 아니라 실존의 새로운 창조였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를 부른다면 이것은 곧 예수를 믿을 가능성은 오직 하나, 곧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함께 떠나는 길 외에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는 메시아가 왔고 그가 부른다. 그러므로 이제 믿는다는 것은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제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신앙에 이르는 길은 그리스도의 부름에 대한 순종을 통과해아 한다. 그것은 첫 발걸음을 떼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수의 부름은 헛되게 된다. 예수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예수가 부르는 이런 길을 가지 않는 모든 발걸음은 거짓된 광신이다.

 

4. 오직 그리스도의 부름만이 믿을 수 있는 상황을 결정한다. 제자직은 인간의 제안이 아니다. 오직 부름만이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오직 부름을 통해서만 이 상황은 올바른 것으로 인정된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이 두 명제는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다 같이 진리다. 이제 우리는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는 명제에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명제를 대립시켜야 한다. 만약 순종을 믿음의 결과라고 말한다면 바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순종을 믿음의 전제라고 말해야 한다. 믿음이 값싼 은혜가 되지 않으려면 순종의 첫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로마 가톨릭은 이런 발걸음을 오직 수도사의 특별한 가능성으로 요구했고 다른 신자들의 경우는 교회와 그 계명에 순종하는 태도만으로 만족했다. 개신교회는 이것을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이런 첫 발걸음은 순전히 외형적인 행위일 뿐 언제나 율법의 죽은 행위로 머물게 된다. 믿을 수 있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려는 의도로 첫 걸음을 내딛는다면, 이런 행위는 그 자체로서 그리스도에게 결코 인도되지 못하며 철저히 옛 존재로 머물게 된다. 만약 우리가 첫 걸음을 은혜와 믿음을 위한 전제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 행위를 통해 이미 심판을 받은 셈이며 은혜와 완전히 단절된 셈이다. 우리가 행할 행위가 아니라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첫 발걸음을 내딛을 때, 외적인 행위가 제대로 일어난다. 만약 그대가 믿는다면 첫 발걸음을 내딛어라. 그 첫 발걸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 그대는 순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므로 즉각 행하라 믿음이 가능해지고 믿음이 실제로 존재하게 되는 상황은 바로 그럴 때만 주어진다.

 

5.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는 명제만을 고집하면 값싼 은혜의 저주에 떨어지고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는 명제만을 고집하면 믿는 자는 공로의 저주에 떨어진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고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 목회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순종을, 행동을, 첫 걸음을 촉구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르심의 순간에 모든 것은 첫 걸음에 달려있게 된다.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한다는 명제를 통해 인간은 값싼 은혜에 중독되고 말았다. 그는 여전히 불순종 속에 있고 자신의 스스로 제공하는 사죄로서 위로를 받으며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만다.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그는 순종의 부름을 들어야 한다.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

 

6. 생각할 점:

 # 본회퍼가 말하는 제자직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제자직이 중보자와 결부되어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본회퍼에 의하면 믿음과 순종의 관계는 무엇인가?

# 본회퍼가 강조하는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중요한가?

 

본회퍼의 비종교적 해석

2016-11-10 20:24:04


   1. 본회퍼가 기독교를 비종교적으로 해석한 것은 종교비판의 사유체계와 성서해석에서 나온 개념이다본회퍼의 "성숙한 세계개념은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계몽"이라고 말한 칸트로 부터 기원한다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은 본회퍼 신학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인데이것은 1960년대 등장한 死神 신학에서 말하는 종교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틈새를 메우는 신을 비판한 일종의 종교비판이었다본회퍼는 세계가 어떻게 신이라는 미봉책을 뿌리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자신의 자율성을 발견했는지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교회는 세계가 이렇게 계몽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타락으로 간주했다고 말한다그러나 그는 교회에 반대하여 생겨난 무종교성과 자율성을 이 세계의 성숙성이라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성숙한 세계에 대한 기독교 변증론의 공격이 무의미하고 비열하며 비기독교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제는 이 성숙한 세계와 성숙한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본회퍼는 "종교적 해석"이란 형이상학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종교해석이며이 두 가지 모두 성경의 복음과 오늘의 인간에게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는 이런 종교적 해석은 복음을 철학적인 언어로 만들어낸 교리체계와 동일시하는 것이며 복음을 변조시켜 교회를 권력자들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비판한다본회퍼는 "비종교적 해석으로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으며 비종교적 해석이야말로 교회의 자기비판이며 참회라고 말한다그는 완전히 비종교적인 새 언어는 예수의 언어처럼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는 언어이며 이런 비종교적인 새 언어만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선포하고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할 수 있다고 말한다.  

   2. 본회퍼는 종교와 신앙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바르트와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초월을 강조하는 바르트와 달리 본회퍼는 하나님의 내재를 강조한다. 본회퍼는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런 사상은 영광의 신학을 배제하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이에 대해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 라는 대답을 제시한다. 따라서 본회퍼에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예수가 오직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인간의 전 존재가 변화되는 경험이다. 그는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야 말로 초월 경험이며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일에서 비로소 전지, 전능이 비롯되며 신앙은 바로 그런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관계는 대단히 위대하고 전능한 존재와 종교적으로 맺는 관계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 존재하고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다는 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정직해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없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로 내어쫒기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무력하고 연약하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만(무력함과 연약함으로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우신다고 말한다. 그는 마태복음 817절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전능이 아닌 자신의 약함과 고난으로 우리를 도우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전한다고 말한다. 그는 바로 여기에 모든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종교성은 이 세상에서 곤경에 처할 때 하나님의 능력에 호소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기계를 타고 내려오는 신에 지나지 않으며, 오히려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의 전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과 고난에 호소하라고 지시한다고 말한다. 그는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으므로, 성숙한 세계로의 발전은 그릇된 하나님을 일소하고, 이 세상에서 무능을 통해 능력과 공간을 획득하는 성경의 하나님을 보도록 눈을 활짝 열어준다고 말한다. 그는 바로 여기서 종교의 "세속적인 해석"이 시작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고난과 하나님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고 강조하면서 하나님이 고난당하신다는 사상이야 말로 기독교 교리 가운데 가장 설득력 있는 교리라고 말한다.

   

   3.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은 종교적인 인간이 하나님에게 기대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경험한다고 말하면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세속적으로 살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릇된 종교적 속박과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지 특정한 방법으로 종교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다움은 종교적 행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이뤄진다고 말한다. 그는 회개는 자신의 곤궁과 문제와 죄와 불안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로 들어서는 것, 말하자면 메시아 사건 속으로 들어가서 이사야서 52장이 성취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종교적 행위는 언제나 부분적인 것이고 신앙은 전체, 곧 삶의 행위라고 말하며 예수는 우리를 새로운 종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은 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무능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성경의 하나님은 전능한 신에게 의탁하는 신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고난당하면서 자신을 인간에게 의탁하신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종교가 말하는 전능한 신은 기계를 타고 내려오는 신에 불과하며 연장된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종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다음은 본회퍼의 옥중 서신의 일부다.

[ 기독교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내 마음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네. 이제는 말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종교 일반의 시대는 지나갔으며 이제 우리는 완전히 종교없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네. 서구 기독교의 모습을 완전한 종교상실의 전 단계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면 어찌해야 기독교는 종교없는 사람들의 주님도 되실까?  종교라는 옷을 벗어던진 기독교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종교 없는 세상에서 교회, 교구, 설교, 예전, 기독교적인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형이상학이나 내면성 등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말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나님에 대하여 세속적으로 말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가 종교없는 그리스도인,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우리가 종교적 특권을 가진 자가 아니라 완전히 세상에 속한 자, 곧 부름받은 자가 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여기에 대답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는 더 이상 종교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전혀 다른 무엇, 곧   세상의 주님이 되실 것이네.  인간의 약점을 이용하여 등장하거나 인간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등장시키는 전능한 신은 기계를 타고 내려오는 신(deus ex machina)에 지나지 않네. 나는 삶의 끝에서가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약할 때가 아니라 힘이 있을 때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나는 죽을 때나 죄를 지었을 때가 아니라 삶과 인간의 선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싶네. 부활 신앙이 곧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네,. 하나님의 내세가 우리네 인식 능력의 내세인 것은 아니네. 인식론적 초뤌성은 하나님의 초월성과는 아무 관계가 없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한 복판 가운데 피안으로 계시네.]

 

바르트와 본회퍼

2016-11-17 17:17:58


    베트게는 본회퍼 신학의 핵심이  "계시의 구체성"아라고 말한다. 본회퍼에게 " 계시의 구체성"이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가 오늘(today), 여기에(here) 현존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는 바르트에게 많이 배웠고 그를 존경했지만 바르트의 초월주의적 사고에 한계를 느꼈다. 본회퍼에게 계시는 바르트 처럼 초월적이고 인간에 대한 부정(nein)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이 세계 안에 있는 실체이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철저히 초월적이고 비역사적이어서 현실 속에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하지만 본회퍼는 계시의 초월성을 긍정하면서도 계시의 역사적, 사회적 구체성을 말한다. '행위와 존재'에서 본회퍼는 "계시의 구체성"을 다루었는데 거기서 그는 하나님은 영원한 고립과  자존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말씀을 계신다고 말한다. 따라서 본회퍼에서 성육신은 현실 안에서 구체화된 하나남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육신은 하나님의 세상성이 실재로 구체화되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 현실은  이제 성육신을 통해 하나가 되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본회퍼에게 제자도는 구체적인 순종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도피나 내적 경건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본회퍼의 '형성으로서의 윤리"도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서 구체화되어야 하는 윤리다.  본회퍼에게 이제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 현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개의 현실이 아니라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 그래서 본회퍼는 예수는 인간을 종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신다고 말한다. 본회퍼에게 "계시의 구체성"은 "성육신한 그리스도 낮아지신 그리스도"다.  본회퍼는 그의 초기 사상을 보여주는 '성도의 교제'에서 그리스도는 교회 공동체로서 현존하신다고 보았는데 후기 사상이 나타난 '옥중서신'에서는 그리스도를 타자를 위해 존재하고 현존하시는 분으로 보았다. 그래서 본회퍼는 타자를 위해 인간이 되신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의 영역은 세상의 한 가운데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초기에는(성도의 교제)   그리스도가 교회안에 사회적 형태로 구체화한다고 말했다면 후기에는(옥중서신) 그리스도가 타자를 위해 이 세상의 한 가운데, 일상을 긍정하는 세속화 가운데 구체화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말하는 바르트는 "하나님은 자기 외부에 있는 사건과 행위, 그리고인간 삶이 맺고 있는 그분의 관계에 대한 의존 없이 , 하나님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사건이며, 자유로운 행위이자 자유로운 삶" 이라고 말했는데, 본회퍼는 이를 두고 역사적 인간의 연속성을 방해하는 신학적 정신분열증이라고 비판한다.  본회퍼는 계시를 불연속적인 하나님의 행위, 즉 하나님이 인간의 존재를 건드리시는 계시의 순간들의 연속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본회퍼는 바르트에게 은총과 자유에 대한  사상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방향의 신학이 구축되기 어렵다고 판단했으며, 바르트의 변증법적 계시 개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축소시키며 그 결과 자아와 공동체의 신적 만남을 순간 속으로 분열시킨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바르트의 계시관은 계시의 주도권이 인간의 경험과 이해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하는 장점이 있지만, 그의 계시관은 칸트적이라고 평가한다.  본회퍼는 '행위와 존재'에서 이렇게 말한다. " 계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유, 그의 영원한 고립과 자존이 아니라, 역사적 인성 안에 스스로를 자유럽게 제한함으로써 자지 자신으로 부터 나와 제한된 말씀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의 자유이다."  결국 본회퍼에게 문제는 자신의 계시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이 영원히 자신과 함께 머물러 계심, 그의 자존성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을 박차고 나오심, 그가 주신 말씀, 그의 계약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자유로우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자유로우시며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자유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지금 여기 계시다고 말한다. 본회퍼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비객관성 속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교회 속에 있는 그의 말씀 속에 '소유'할 수 있고 '파악' 할 수 있는 분으로 계신다.

 

본회퍼의 세상적 기독교(Worldly Christianity)

2016-11-17 18:25:06


  본회퍼의 옥중서신에 나타난 "세상성의 발견"은 그의 신학의 결정적 전환점을 보여준다. 그는 옥중서신에서 이렇게 말한다. " 나는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에 의해 신앙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를 따르라'는 이런 면에서 쓴 것이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 나는 이 책의 위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는 것( 이 세상을 도피하지 말고 세상의 한 가운데서 사는 것)에 의해서라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이 세상성"이다. 그것은 모든 자신의 의무, 문제, 성공, 실패를 가진 삶을 당당히 사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두 팔 안에 맡기고 진지하게 사는 것, 우리가 세상 속에서의 하나님의 고난을 진지하게 취하는 것, 우리가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와 같이 깨어있는 것은 이러한 삶 속에서다. 나는 이것이 신앙이며 이것이 회개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러한 방식에 의해서라고 생각한다."  본회퍼는 후기 사상에서 인간성을 긍정하면서 지상적인 삶, 인간다운 삶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가진 자연적 성향으로서 인간의 본성을 긍정했다. 본회퍼는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이 인간성과 세상성을 긍정한 사건으로 해석했다.   갓시(Godsey)는 본회퍼가 "세상성"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하틀러 저항운동에 참여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접촉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 자체의 생존에 급급하면서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결핍한 고백교회에 대한 실망 그리고 옥중에서 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세상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특히 본회퍼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인간 삶의 모든 면에서 임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후기 본회퍼 신학의 특징은 이와 같이 세계에 대한 열린 사고다. 그는 전기의 교회론과 제자도에서 후기에는 세상 속으로 집입하여 세속현실과 치열한 대화를 추구하는 신학적 전환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본회퍼의 "세상성의 신학"은 이 세상성의 긍정, 그리스도 중심적 현실 이해, 계시의 구체성, 현세긍정의 구약적 이해 등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신학적 착안점을 토대로 하여 "성인된 세계",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으로 발전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세상성 긍정으로 보는 본회퍼는 하나님과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를 배격한다. 그는 세속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속된 것과 신성한 것이 상반된  두 영역이 아니라, 이 세상 전체가 그리스도께 속한 현실이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기독교는 하나님과 세상을 분리시켜 하나님을 오직 내면세계와 관계된 분으로 제한하였으며, 그 결과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되었으며 신앙은 '종교'라는 골방에 갇히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본회퍼 신학은 '삶의 신학' (Theology of Life)이다. 그에게 기독교는 내세, 초월, 구원, 기도, 묵상, 예배에 갇혀있어야 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는 기독교는 삶의 전체성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종교로 부루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기독교 신앙이 '종교'에 머물러 있으며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본회퍼는 '성인된 세계'1 즉 종교없는 세상에서 교회가 설 자리가 남아있는가 질문하면서 종교너머의 세상과 삶을 향해 개방된 기독교를 모색했다. 따라서 본회퍼는 기독교의 본질을 "종교 없는 것" 혹은  "비종교적인 것"으로, 즉 삶의 현실과 만나도록 해석하려 했다. 그는 하나님이 성숙해 세상에서 우리들의 지식과 삶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으며 칸트 이래로 하나님은 경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세상의 저 위로 추방당해 버렸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는 인간의 삶의 언저리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중심, 그리고 삶 전체에 계시는 분이며 교회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강조한다.  본회퍼가 저 세상, 영원, 형이상학적 세계로의 도피를 부정하고 이 세상성을 긍정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실에 대한 긍정이었다. 그것은 육화된 그리스도가 현실 그대로 인간적인 것 그대로 이 세상 속에 현실화하심에 대한 긍정,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긍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과 동화됨없이 동일화됨(Identification without identity) 속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에 대한 긍정을 의미했다.

 

  본회퍼는 구약을 제대로 읽으면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구약에는 세상 가운데, 현실 속에 현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있다. 구약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은 다만 인간 삶의 여기(here) 그리고 지금(now)에서만 알려지게 된다. 본회퍼는 구약에서 저 세상, 죽은 자들의 거처, 내적 감정, 영혼의 세계에 대한 어떠한 사변도 없으며 이것이 이스라엘 신앙과 타종교들의 구별점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 세계현실에서만 만날 수 있으며 그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요, 세상 저쪽에 계신 분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계신 분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구약에는 개인주의적 구원론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구약이 말하는 구원은 타계적 구원이 아니라 창조되고 보존되며 구속받아 새롭게 된 세상으로서 창조-성육신-십자가- 부활은 모두 이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구약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구원이 아니라 역사적 구원,  죽음 이쪽에서의 구원을 말하며 따라서 건강, 물질 등 땅위의 삶 전체를 포함하는 축복에 대해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본회퍼가 말하는 "세상성"은 스스로를 신격화하려는 "하나님 없는 세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 안으로 들어오게 된 "하나님 앞에서의 세상"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숙한 세상을 의미한다. 본회퍼 신학에서 " 현실" (reality ; Wirklichkeit) 개념은 핵심적인 개념인데 이 현실 개념의 열쇠는 그리스도다. 본회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은 이 세계의 현실로 들어왔으며, 이제 세계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이 동시에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장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에 있다" 고 말한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세계의 현실은 연결되며 세게 현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되고 받아들여진 현실이며 그것은 곧 세상 긍정으로 연결된다.  바르트와 달리 본회퍼는 초월하신 하나님과 이 세상의 인간 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를 말하기 보다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세계를 결합한다. 그는 하나님과 세계가 분리되거나(초월주의) 혼합되거나(내재주의)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본회퍼는 루터적 분리(두왕국론)을 비판하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세계 현실을 받아들였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보편주의적 사고는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의 변증법적 발전과정을 통한 자기 실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이 성육신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었다는 본회퍼의 주장은 개혁파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설에 근거한 세계개방성도 아니다. 본회퍼의 신학은  바르트처럼 왕적, 군주적 통치 구조가 아니라 육화된 그리스도, 낮아지신 그리스도, 고난받는 그리스도론에 근거한다.2 그래서 본회퍼의 성육신론은 십자가 신학과 연결된다. 본회퍼에게 하나님과 세상은 더 이상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현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은 서로 갈등하는 두 현실(루터처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하나의 현실속에 있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의 현실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 참여는 세계의 현실이 없이는 하나님의 현실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현실없이는 세계 현실을 경험하지 못하는 그러한 것이 아니면 안된다고 말한다.  루터교 신학자로서 본회퍼는 루터적인 두왕국적 분리를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궁극적으로 본회퍼 신학은 성인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학의 재해석을 통한 교회의 회복이며 나아가 기독교 패러다임의 전이를 보여준다.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 원리에 기초하여, 교회론에서 제자도 신학, 그리고 세상적 삶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 뒤따름의 신학,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교회속에 형태화하고, 나아가 세상속에 형성하는 신학이다.

 

각주 1

근대 이후 계몽기를 거쳐 이제 인간은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해결사 하나님이나 작업가설의 하나님, 후견인으로서의 하나님 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인간 스스로 책임지는 세계가 되었다. 본회퍼는 이런 성인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는 성인된 세계에서 기독교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

각주 2

본회퍼는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력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며 참된 하나님의 본질은 영광의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하나님에게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타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하나님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대리행위, 즉 타자를 위한 책임윤리로 발전된다.

  1. 근대 이후 계몽기를 거쳐 이제 인간은 미숙한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해결사 하나님이나 작업가설의 하나님, 후견인으로서의 하나님 관념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모든 문제를 인간 스스로 책임지는 세계가 되었다. 본회퍼는 이런 성인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질문한다. 그는 성인된 세계에서 기독교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비종교적 기독교로 제시한다. [본문으로]
  2. 본회퍼는 고난당하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무력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며 참된 하나님의 본질은 영광의 하나님에게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하나님에게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타자의 고난에 참여하는 하나님 사상은 그리스도인의 대리행위, 즉 타자를 위한 책임윤리로 발전된다. [본문으로]

 

본회퍼의 기독교 윤리

2016-11-17 20:00:31


 후기 본회퍼 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에서 '세상을 위한 신학'으로 전환된다. 그의 신학적 초점은 '교회적 기독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세상적 기독교'로 넘어간다. 그는 이제 '성인된 세계'에서 필요한  새로운 기독교의 형태인 '비종교적 기독교'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 땅, 이 현실, 이 세상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이다. 본회퍼 신학을 그리스도 중심주의라고 볼 때, 그의 신학은 교회-그리스도-세상이란 구도로 구성되어있다. 초기에 본회퍼가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를 물으면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면 이제 후기신학에서는 '오늘(today) 우리에게(for us)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라고 물으면서 그 대답을 '세상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형성으로서의 윤리'를 말하면서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세계형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제 그리스도는 교회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형태를 취하신 그리스도'다. 성육신 사건에서 그리스도는 세상적 형태로 계시되었고, 그것은 타계적 초월이 아니라 이 세상적 초월로서 계시된 형태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신적 계시가 세상적 형태를 띤 것이다. 그리스도의 육화하심으로 세계 현실은 하나님의 현실과 분리되지 않고 결합하게 되었다. 따라서 세계 현실 전영역은 더이상 그리스도 없는 세계도 아니며, 그리스도 자신도 세계없는 그리스도가 아니게 되었다. 본회퍼에게 '세계현실의 그리스도'는 위로부터 세계를 다르시는 그리스도의 왕적통치론(승리자 그리스도)도 아니고 단순히 그리스도가 전세계 현실 안에 존재한다는 그리스도의 편재론(보편적 그리스도)도 아니다. 그에게 '세계현실의 그리스도'는 육화된 그리스도가 세계안으로 들어오심으로 그 자신이 세상적 형체가 되셨다는 그리스도의 세계형성론 즉 세계형성적 그리스도론(world formative Christology)이다.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 현실이 그리스도 현실 안에서 통일되었다는 본회퍼의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되지 않은 세상 현실은 없다는 그의 그리스도 보편주의에 근거한다. 또한 이 진술에는 성육신 사건을 신적 현실이 인간현실로 침투함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거나 혼합되지 않고 한 위격안에서 통일되었다고 보는  기독론적 페리코레시스 사고가 담겨있다.  그래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현실이 세계의 현실로 들어가는 것처럼 기독교적인 것은 세상적인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초자연적인 것은 오직 자연적인 것에, 성스러운 것은 오직 속된 것에, 계시적인 것은 오직 이성적인 것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가 세상이 된다거나, 기독교적인 것이 세상적인 것과 동일하다거나, 장녀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이, 계시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이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이 양자 사이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현실 속에서 일치를 이룬다는 의미다. 이렇게 본회퍼에게 하나님의 초월과 내주라는 범주는 통일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 한 가운데 계시지만 세상의 한 현상으로 존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세계를 형성하심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 경험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도록 하셨다.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세계형성은 그리스도를 세계 자체와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세계속에 형체화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본회퍼에게 성육신은 계시의 인간성과 세속성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 사건은 이웃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초월경험이 된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의 세상적 형체화만이 아니라 인간적 형체화를 의미한다. 본회퍼에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현실과 세계현실의 하나됨만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나님, 즉 인간적 풍모의 하나님, 현실 그대로의 인간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고를 가져온다. 그리스도는 인간현실을 자신 안에서 형성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자기 형성을 완전한 인간에서 찾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의 본질을 취함으로 실현하신다. 그런 점에서 본회퍼은 예수 그리스도를 현실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긍정으로 본다.

 

  본회퍼에 의하면 '형성윤리'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그리스도가  오늘 여기에서 우리 안에서 그의 모습을 취하는가의 문제이며 어떻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속에 참여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본회퍼에게 그리스도 닮음이나 형체화는 도덕적 이상이나 윤리적 당위의 달성이 아니다. 본회퍼에게 기독교 윤리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와 세상의 일치, 그리스도의 세상적 형성에서 출발한다. 이제 본회퍼는 세상과 대조되는 급진 제자도의 윤리가 아니라 세상 현실을 긍정하고 세상적 모습으로 형성되는 제자도를 강조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현실을 취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적 삶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가 세상적 인간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인 역사 세상적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고매한 도덕적 이상을 향해 세상을 탈출하는 분리적 삶이 아니라 성육신처럼 세상적 삶에 참여하고 그안에서 책임적 삶을 사는 것이다. 본회퍼에게 윤리적 선이란 그리스도가 세계현실에 참여하여 세상적 형태를 위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인 역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현실에 참여하는 것이다.  결국 본회퍼의 '형성으로서의 윤리'는 도덕적 원리에 입각한 결정론적 윤리도 아니고 도덕규범의 자율화를 추구하는 상황윤리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중심적 윤리이며 현실의 윤리다.

 

  그러므로 본회퍼에게 '형성'이란 어떤 프로그램을 통한 세계형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부터의 형성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나 기독교적 원칙들을 이 세계에 적용함으로써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가 그리스도의 모습에 끌려 들어오는 것이며 인간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한 인간의 유일한 모습과 같은 모습이 되는 '형성'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려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형태 자체가 우리에게 역사하여 우리를 형성할 때에만 성취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이념에 따라 세상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기 모습으로 안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헝성이란 우리의 노력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방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취한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여기서 인간은 생소한 모습 혹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본질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회퍼의 '형성의 윤리'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가 우리 자신속에 자기를 형성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순응하여 자신을 형성해야 한다는 윤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형성의 윤리'는 우리의 삶이 인간이 되신 예수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며, 십자가에 죽으심 예수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며, 부활하신 예수에 따라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본회퍼 신학의 여정

2016-11-24 20:05:26


1. "나를 따르라"에 나오는 본회퍼의 산상설교 해설은 결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본회퍼는 단순히 "항상 참된 것"보다는 바로 "오늘 참된 것"을 추구했다. 본회퍼가 산상수훈 해설을 쓸 당시에는 마태복음 5:39을 가지고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막스 베버는 기독교 평화주의에 반대했고 톨스토이는 원칙적 평화주의를 주장했다. 칼 홀과 파울 알트하우스는 새로운 기독교 극단주의가 신상설교의 이름으로 법과 조극과 국가와 병역의무에 대해 양심을 혼란시키도록 내버려두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본회퍼도 산상설교를 단순히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원칙적 평화주의를 반대했다. 1930-31년 본회퍼는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만난 평화주의자인 프랑스인 장 라세르와 우정을 나누면서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36년 핑겐발데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열렬히 반대했던 기독교 평화주의가 갑자기 자명한 진리로 다가왔다고 썻다. 그 당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위협으로 간주되었던 평화주의가 본회퍼에게 갑자기 자명한 진리가 되었던 것이다.

 2. 1937년 1월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한 다음에 나치혁명은 교회마저 정당의 이념과 구조 안으로 통합하려고 했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과 민족의 적으로 선언된 집단을 차별할 것을 요구했다. 1935년 9월, 제국 정부는 "독일 개신교회의 보호를 위한 법률"을 발표했고 교회가 집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리하여 형제단 지도자들과 고백교회의 모든 기관은 불법적인 것으로 선언되었다. 고백교회는 제국교회 당국 및 나치정권과 결별했는데, 그들의 증언은 1934년에 채택된 바르멘 신학 선언 제3항에 이렇게 표명되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믿음과 순종으로써,사신과 직제로써, 죄악의 세상 한 가운데서 은혜를 입은 죄인의 교회로서 자신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며 오직 그의 위로와 가르침에 따라 그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고 있고 또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  "나를 따르라"는 책은 바르멘 신학선언의 제3항을 발전시킨 것이다.  본회퍼는 이 책에서 누구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는지 거의 밝히지 않지만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독일 제3제국에서 "나를 따르라"는 독일 개신교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국민교회를 잠들게 했던 원흉이 유혹적으로 편안한 "은혜론"임을 폭로했다. 성서적-신학적 근거에 기반한 이런  성찰은 교회투쟁의 시기에 빠르게 확산되었고, 투쟁의 길을 인도하는 우렁찬 소리로 울려퍼졌다.

 

 3. 1940년 늦가을부터 본회퍼는 베를린 방첩대에 소속된 암살단에 가담하게 되었다. 1940-41년 겨울에 그는 에탈 수도원에 머물렀는데 여기서 "신도의 공동생활"이나 "나를 따르라" 가 낭독된 갓이 참으로 즐겁다고 썻다. 본회퍼는 에탈 수도원에서 "윤리학"을 집필했는데, 이전의 학문적인 저술과는 달리 상당히 폭넓은 사상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교회는 세상 안에서 공간적으로 보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바르트가 1936년 본회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간이 신앙의 공간으로 물러가는 행위를 경고했듯이 본회퍼도 "윤리학" 원고에서 두 개의 공간을 나누는 사상을 비판했다. 그는 두  왕국 사상은 교회와 세상이라고 하는 두 왕국의 정적인 공존을 암시하는 위험을 갖고 있으며, 이런 사상으로 인해 교회는 사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고 보았다. "윤리학"에서는 제자도라는 말 대신에 이제 신학적인 특징이 분명한 "책임"이란 개념이 등장했다. 1944년 여름, 옥중서신에서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의 서문에서 제기했던 물음, 곧 세상에서 노동하는  인간에게 예수를 따르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고민했고, 제자도는 부분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행위라고 결론을 내렸다.

 

 4.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은 실패로 끝났고, 임박한 생명의 위험 속에서 베트게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본회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전에 나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스스로 노력함으로써 신앙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이런 노력의 결실로서 나를 따르라는 책을 썻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책의 위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지금도 이 위험 앞에 서있다. 이제 내가 이 순간에 깨달은 것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온전히 살아갈 때에만 비로서 믿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스스로 이루려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때, 바로 그 때에 우리는 겟세마네의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있게 된다. 이제 나는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회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의 사람, 하나의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본회퍼는 거룩하게 살려는 것은 궁극이전의 것(das Vorletzte)에서 시도되는 정당한 노력이지만 궁극이전의 것과 궁극적인 것을 혼동할 때, 성화를 위한 노력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 둘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