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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기독교의 공공성과 공공신학

기독교의 공공성과 공공신학의 정의- 김승환

2016-04-09 16:49:54


 

공적 영역과 기독교의 관계

 

"공적" 이란 말은 공통, 공동, 공개적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하승우는 공적 영역을 시민사회의 영역이라고 정의하면서 인류 역사는 공화정-제국시대-봉건사회- 근대국가를 거쳐 오늘날의 시민사회로 변화했는데 이런 과정은 전체적으로 공적 영역들이 확대된 과정 이라고 말한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적 영역이란 공론장에서 합의가 가능한 영역으로서 비판적 공개성과 참여 가능성이 보장되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공적여역을 관계적, 사회적 존재인 인간들이 이루는 관계적, 사회적 공간으로 보면서 공적영역이 박탈된 것을 사적영역으로 본다. 교회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에서 자신을 시민사회의 구성원의 하나로 인식하면서 공적 토론의 자리에서(공론장) 대화와 합의를 통해 공공선이 기여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교회가 다루어야 할 공적 영역이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트레이시는 공적 영역을 교회, 학문, 사회의 3가지로 유형화했고 윌리엄 스톨리는 교회, 학문, 사회에 더하여 세계화의 흐름을 고려하여 글로벌이라는 포괄적인 공공 영역 구축을 제안했다. 세바스찬 김은 공공영역을 종교, 시민사회, 국가, 문화, 미디어 시장으로 유형화하고 교회가 종교적 이슈를 넘어  교회 밖의 다양한 공통의 관심사에 참여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결국 공공신학이란 공공성이란 관점을 가지고 신학과 일반학문, 교회와 시민사회 간에 대화와 토론을 통해 구체적인 문제와 상황에 응답하는 신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회는 공론장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

 

기독교의 세속화란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가 그 영향력과 지위를 상실해 가는 현상인데 세속화로 말미암아 신앙은 사적인 영역으로 후퇴하고 말았고  공적 영역에서 신은 죽었다는 "사신신학"이 대두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의 오순절 운동이나  최근의 이슬람 극단주의의 911테러 등은 후기 세속화 시대에 급진적인 종교가 부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공적 영역에 종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다시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2004년 뮌헨에서 이루어진 하버마스와 라칭거의 대화에서 정치 이전의 도덕적 토대의 중요성이 언급되었는데 이는 시민사회의 문제들이 이성이나 법만으로 해결되지 않으며 종교 공동체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시만사회의 공론장에 참여할 것인가?  로마제국의 독교의 공인 이후 기독교는 권력과 결탁하는 크리스텐덤을 추구해왔다. 16세기 종교개혁도 이러한 권력지향적 기독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다원화된 시민사회에서 기독교가 이런 기존의 방식으로는 공론장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하워드 요더의 주장대로 교회는 포스트 리스텐덤(탈 크리스텐덤)의 관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주류에서 소수로, 정착자에서 체류자로, 획일성에서 다원성으로, 지배자에서 증인으로, 현상유지에서 선교로, 제도에서 운동으로 교회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시민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신학과 전통을 통해 시민사회의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아가 공론장에서의 대화와 토론을 위해서는 라인홀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에 기초하여 하나님나라의 근사치를 추구하는 중간공리로서 약자를 우선하는 사회적 정의 개념으로 공공선을 근접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기독교와 타학문간의 대화를 위해서는 이중언어성이 확보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가질 필요가 있다. 스텍하우스는 공공신학의 토대를 성서, 이성, 전통, 경험의 4가지로 제시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공적인 텍스트로서 성서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타학문과의 대화를 위해서는 이성적인 언어가 필요하며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와 사회 간의 관계에 대한 전통, 삶의 현장과 상황으로서의 경험이 공공신학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공신학의 흐름과 특징

 

미국에서 공공신학은 일반적으로 로버트 벨라가 제한한 시민종교에서 기원한다고 본다. 그는 공적 종교로서 기독교는 자유 평등, 정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가진 시민종교로서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시민사회와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마틴 마티는 기독교현실주의를 주장한 라인홀드 니버를 공공신학자라고 명명하면서 1974년 공공신학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는 또한 1981년 공적교회(public church)라는 책에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공적인 공간이었음을 주장했다. 폴 틸리히의 영향을 받은 시카고 학파가 공공신학의 학제간 연구를 중시한다면 바르트의 영향을 받은 예일학파는 기독교 전통의 내러티브에 기반한 특수성을 중시한다. 다른 편으로 프린스턴 출신의 스텍하우스는 창조-타락-구속의 틀속에서 세계화를 긍정하는 방향으로 공공신학을 전개한다.

 

유럽에서는 영국 에딘버러대학을 중심으로 던컨 포레스트는 스코틀랜드 상황에서 복지차원의 공공신학을 발전시켰며 에딘버러의 윌리엄 스톨라는 각 대학에 공공신학 연구센터 확대에 기여하였다. 던컨 포레스트는 신학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공적논쟁이 중단되면 신학의 빈곤화가 초래된다고 말한다. 독일에서는 공공신학의 전통이 본회퍼-몰트만, 볼프강 후버로 이어지는데 일반영역을 하나님나라로 인정하는 루터의 두 왕국론이 가진 공공신학적 장점을 살리고 있다. 몰트만은 공적연관성이 없이 기독교 정체성도 없으며 반대로 기독교정체성인 없이 공적연관성도 없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남아공, 호주, 뉴질랜드, 홍콩, 싱가포르 대만 등지에 공공신학 센터가 설립되고 연구가 확장되고 있다. 공공신학의 국제적 네트워크도 형성되어 공공신학의 국제저널도 발행되고 온난화, 빈곤, 시민사회, 인권, 인종, 성, 사이버, 미디어, 정치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공공신학은 일반성 보다는 특수성에 기반한다. 공공신학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문제에 집중하는 특징이 있다. 공공신학에서 지역성, 구체성, 상황성은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마탄 마티는 특정한 개방성을 공공신학의 특징으로 제시하면서 개인주의에 빠진 복음주의나 콘스탄티누스주의에 빠진 개신교를 비판하면서 가톨릭의 사회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스텍하우스는 성경의 만인제사장과 만인예언자직에 근거 한 책임적 청지기성을 공공신학의 특징으로 제시한다. 세바스찬 김은 공공선을, 슈틀림은 이중언어성을 공공신학의 특징으로 언급한다.

 

공공신학의 신학적 토대는 창조신학과 하나님나라 사상에 기반한다.카이퍼의 영역주권 사상이나 일반은총론, 본회퍼나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나라 사상 그리고 중세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자연법 사상과 공공선 개념은 모두 공공신학의 신학적 토대를 이루고 있다.  이제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각 분과인 신론, 구원론, 기독론, 교회론도 공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기독교적 특수성을 견지하면서도 공적영역에 적극적인 개입을 실천했던 본회퍼의 신학은 공공신학에서 사시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해방신학과 공공신학의 비교

 

라틴 아메리카에서 등장한 해방신학의 대표적 학자들은 구스타보 구띠에레즈, 레오나르도 보프, 루이스 세군도, 호세 미구에 보니노 등이다. 해방신학의 중심 이슈는 가난과 부정의한 사회였고 그들의 신학적 주제는 가난한 자들의 해방으로서의 출애굽이었는데 그들은 의심의 해석학과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텍스트와 컨텍스트간의 실천에 우선성을 두었다. 그들의 목표는 약자와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을 통한 정의로운 사회구현이었다. 그러나 해방신학자들은 정작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제시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해방신학과 달리 공공신학은 주로 북미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와 호주에서 등장했는데 대표적 학자들은 라인홀드 니버, 데이비드 트레이시, 던컨 포레스트, 존 머레이, 엠엠 토마스 등이다. 그들의 주된 이슈는 불평등, 종교의 사사화, 국가, 미디어, 시장의 독점화, 세계화,  시민사회이다. 그들은 교회, 학문 사회라는 공적 영역에서

신학의 공공성을 드러내는 것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공론장에서 학제간 대화, 토론과 합의를 통한 공공선을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공공신학은 정책과 제도의 변화는 매우 중시한다. 그러나 공공신학은 공적 영역의 범위를 설정하는 어려움, 대화와 합의 중심의 방법론적 한계, 전문가의 부족 등의 문제점을 안고있다. 해방신학이 약자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공공신학은 공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공공신학은 교회중심에서 공공성 중심으로 신학적 패러다임을 전환하려고 한다. 성경도 공공성의 관점으로 해석하며 공공성의 관점에서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교회중심이 아니라 공공성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교회가 지역사회에서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다.  한마디로 공공신학은 공적인 관점에서 신학을 하려는 것이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신학- 강영롱

2016-04-09 16:50:26


후기 세속사회에서 교회가 공적인 실천을 한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를 가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공론장의 소환에 응해 의사소통의 장에서 가치관과 신념이 다른 집단들과 대화를 나누고 격렬한 토론에 참여하는 것이며(이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이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고유한 활동이 그 자체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이것은 챨스 테일러의 논거이다.) 두 번째의 경우는 교회가 사회통합이나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아도 자율적인 활동을 통해서 사회 갱신에 기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사회의 요구에 부응해 자신의 활동반경을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정체성에 입각한 독특한 활동에 국한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교회는 공론장에서 사회적 선을 위해 의견을 개진하는데 주력할 것인가 아니면 성서와 교회전통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의 성품을 개발하는데 집중해야 할 것인가? (후자를 강조하는 사람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이다) 이 질문에 대해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에 집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칼바르트는 교회의 제일되는 과업으로 교회됨을 제안했고 그것은 옳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에 관한 것일 때, 교회는 진실로 그 자신이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신학이 정치신학 혹은 공공신학으로 분화된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양자는 서로를 반대하지 않는다. 공공신학은 신학의 기초로서 교회의 신학을 필요로 한다. 공공신학은 교회의 신학을 전제하며, 교회의 신학은 공공신학으로 확장된다. "  볼프는 이렇게 교회의 신학과 공공신학 사이에 가교를 놓는다.

 

 볼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신학에서 이끌에낸 포용과 화해의 원리를 그의 신학의 중심으로 삼는다. 볼프에게 포용은 신앙의 내용이자 신앙이 지시하는 삶의 방식이고 태도이며 교회의 실천원리다. 그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을 포용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 신앙에 입각해 타인을 포용한다는 것은 타인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을 포기하고 사랑안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며 거짓과 기만적인 언행 대신에 진실한 삶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폭력적인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가실 평화를 고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볼프에게 포용이란 사람과 사람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포용이란 진실과 정의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며 무조건적인 관용도 아니다. 그는 포용의 범위를 기독교 세계 밖의 타종교와 다원주의 사회까지 넓힌다. 그는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도 공통의 주제에 대해 토의하고 상대의 지혜를 배우는데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생산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개방과 배움이 그리스도 신앙을 지탱하는 핵심가치를 포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신앙이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삶의 방식이며 동시에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포용하는 것이기에 그리스 도인과 교회는 공적인 광장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볼프는 신앙과 신학을 실천의 내적 역학으로 본다. 그는 신학이 실천을 견인하며 실천은 신학을 삶의 현장에 안착시킨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가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볼프 신학의 3가지 핵심은 십자가론, 삼위일체론 그리고 종말론이다. 그의 신학의 첫번째 중심성으로서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내어줌을 의미한다. 그는 십자가의 성취(속죄)에 집중하기 전에 십자가가 제안하는 삶의 방식으로서의 자기 내어줌에 주목한다. 볼프의 두번째 신학적 중심성은 삼위일체론인데 그에게 삼위일체론은 사회적 관계와 비전을 제시하는 신학적 틀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에서 관계성과 독립성 그리고 개방성과 정체성이라는 변증법적 차원에 주목한다.세번째 신학적 중심성은 종말론인데, 여기서 볼프는 미리 맛보고 미리 성취한다는 의미의 선취 개념을 중시하면서 미래의 "종말론적 최대치"를 현재의 "역사적 최소치"로 선취하는 것이 기독교적 종말론이라고 말한다.

 

 연결과 분리의 변증법은 볼프 신학의 핵심이다. 볼프는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하는 정체성이란 나와 타인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타인의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나와 타인은 분리되어 있지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와 타자는 떨어져 있으며 다른 존재로 살아가지만 내 안에 타자성이 있다는 말이다. 볼프는 내 안에 타자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타자성의 현존을 인식함으로써 나는 내가 된다고 말한다. 볼프의 이러한 정체성 인식은 그의  삼위일체 신학의 열매다. 볼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위격의 개별성을 지니면서 상대방 안에 내주하듯이 사회적 행위자는 자기 안에 있는 타자성을 인식함으로써  타자를 위한 공간을 개방해야 한다고 말한다. 볼프의 이러한 연결과 분리의 변증법은 사회적 행위자와 문화의 관계를 설명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자신을 단절하지 않고 자신을 세상에 소속된 존재로 보지만 그렇다고 세상에 포섭되거나 세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도 않는다. 볼프는 문화와의 거리두기를 통해 문화에 동화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자신이 소속된 문화 밖의 타자에게 자기를 개방하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문화와의 분리를 의미하는 거리두기는 자신을 객관화시키며 또한 타자 수용의 공간을 마련함으써 타자와의 연결촉매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볼프가 말하는 그리스도 공동체란 세상에서 떠나 살지 않으면서 다르게 살아가는 공동체다. 여기서 말하는 다른 방식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식이며 십자가의 자기내어줌을 따르는 삶이고 결국 타자 포용과 사랑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입장만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도 바라보는 "이중적 보기"라는 다른 인식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며 상대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위한 공간을 열어놓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불의한 세상으로 나가지만 세상의 권력과 질서를 무조건적으로 승인하지도 않으며 또한  세상을 지배하고 문화를 장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회는 사회적 사안을 평가하고 엄중하게 비판하지만 이중적 보기의 인식론을 작동시킴으로서 의견의 불일치에서 나오는 적대감과 정의감에서 비롯된 분노를 환대와 용서로 바꾸는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안의 타자성을 인식하는 교회는 세상에 거리를 두지만 세상에서 물러나지 않고, 세상으로 나가지만 세상을 점령하려 하지 않는다. 교회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포용하는 "특이한 정치"로서 타인들 앞에서 독특한 실천을 해낸다. 볼프는 이렇게 교회는 세상의 공적인 영역에서  발언하는 동시에 세상의 다른 구성원들 앞에서 교회의 독특한 방식을 실천함으로써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를 따라 사랑과 포용의 길을 가야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볼프가 제안하는 이 길의 현실성과 구체성이다. 볼프의 요점 중의 하나는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단지 정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화해의 은총을 전제하지 않는 정의한 정의를 구현한다는 집단의 명분이 되고 한 개인에게 자기 만족감을 충족시켜줄지는 몰라도 또 다른 폭력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볼프가 제시한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십자가의 자기 내어줌을 먼저 체화하는 은총이 없이는 선택하기 어려운 길이다. 사실 볼프가 말하는 사랑과  포용의 문제는 규범화할 수 없는 관계의 문제다. 그것은 강력하게 권고할 수는 있어도 규범적인 조항으로 명문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랑과 포용은 은총에 대한 자발적 반응이자 사회적 행위자의 의지적 실천이다. 그러기에 볼프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사회적 역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학을 구성하는 사랑의 진원지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사회적 행위자가 근대의 사회적 상상을 뛰어넘어 기존의 사회 구조와 셈법에 예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고 나아가 건강한 사회적 구조를 형성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포용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진리와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문화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볼프 신학의 문제점은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제기될 수 있는데 그것은 볼프의 신학이 증오와 반목을 거듭하는 사회구조적인 모순에 제도적인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에 열려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볼프는 신학이 다뤄야 할 영역을 사회구조까지 넓히기 보다 사회적 행위자로 한정한다. 그는 사회구조의 변환은 신학의 도움을 받은 전문가들이 다뤄야 할 영역이라고 말한다. 그는 교회와 신학은 정신적인 토양이나 방향은 제공할 수 있지만 정치적 결정이나 정책적 해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며 따라서 교회의 역할은 사회구조의 쇄신과 제도개혁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행위자를 기르고 그들에게 정의롭고 진실하며 평화로운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데 일차적인 소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볼프는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거나 이익단체화되어서는 안되고 교회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에토스를 형성하며 정의와 평화에 헌신하는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을 후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본회퍼와 공공신학- 고재길

2016-04-13 17:15:00


본회퍼와 공공신학

 

신학의 공공성과 사회성을 강하게 주장한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신학의 공적 책임의 과제를 다뤘으며, 몰트만에 이어 신학의 공공성을 강조한 독일 신학자, 후버(W. Huber)는 교회와 공공성(Kirche und Offentlichkeit)라는 논문에서 신학의 공적 책임의 이행과 교회의 사회적 책임의 구현에 필요한 두 가지 중요한 행위를 복음에 합당한 공적 봉사와 타자를 위한 디아코니아적 행위로 규정했다. 남아공의 신학자 그러치(John.W. de Gruchy)는 국가 폭력에 근거한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저항이 치열한 사회 속에서 신학이 정치적 영역에서 가지고 있는 공적 책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 명의 신학자들이 모두 본회퍼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된다. 특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Kirche fur andere)" 개념은1 후버의 공공신학 개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러치 역시 본회퍼의 교회론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공공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본회퍼는 교회의 공적 책임이 무너질 때, 악이 빛이나 선행, 진실, 갱신의 모습으로, 또 역사적 필연성이나 사회적 정의의 형태로 가장하여 나타난다고 지적한다.

 

교회: 본회퍼 신학의 중심 주제

 

어떤 연구자들은 본회퍼 신학의 중심 주제를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들은 본회퍼는 신론, 교회론, 기독교윤리 등의 신학적 주제들을 모두 기독론의 기초 위에 세운다고 말한다. 본회퍼 신학은 철저하게 기독론 중심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연구자들은 세상에 대한 참여가 본회퍼 신학의 중심요소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본회퍼 신학의 중심 주제가 교회라고 하는 연구의 흐름도 발견한다. 본회퍼 신학의 정치적 입장에 반대하는 하우어워스도 본회퍼 신학의 중심 주제가 교회론이라고 강조한다. 최근에 본회퍼 신학에 대한 교수자격논문을 쓴 프뢸러 야겐토이펠은 위에서 언급한 각 주제들, 그리스도- 교회- 세상은 세 가지 아치형 나선을 그리면서 본회퍼 신학의 중심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본회퍼 신학에서 그리스도론은 교회론과 윤리론의 토대를 가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교회론은 그리스도론과 윤리론에 기초하고 있고 윤리론 역시 기독론과 교회론에 기초한다는 의미이다.

 

본회퍼 신학에서 "사회성"의 개념

 

본회퍼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Sanctorum Communio"에서 교회의 사회성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그 안에서 사회학과 사회철학과의 건설적인 대화를 시도하면서 신학에 있어서의 사회학적 범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의 기본 개념들은 "사회성"의 관점에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으며 그렇게 할 때, 신학적 개념들 속에 내재된 "사회적 의도"를 바르게 파악할 있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논문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신학에서 사회학적 범주의 중요성에 대한 관점을 더 가지면 가질수록 기독교의 기본개념들의 사회적 의도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격, 원상태, 죄, 계시 등의 신학적 개념들은 사회성과 연관될 때에만 완전하게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본회퍼가 말하는 사회성이란 무엇인가?  본회퍼 신학에서 사회성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자리 잡은 자기 중심적인 개인주의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가치관은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읽기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함으로써 기독교적 가치가 추구하는 공동체성을 간과하는우를 범하게 만들고 있다. 본회퍼는 사회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 이러한 이기주의적 개인주의의 부정성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는 몇 가지 중요한 신학적 개념들을 사회성과의 관련하에서 해석함으로써 그 개념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의도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본회퍼는 창조시의 원상태는 인간의 타락 이전에 파괴되지 않은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인간 존재는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과  타자와 함께 누리는 공동체적 삶을 지향한다. 또한 본회퍼는 죄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호적 섬김과 사랑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한다2. 그는 죄의 본질은 끊임없는 자기추구(endless self-seeking)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사랑을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관련시킨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계시도 사회적 관점에서 이해하여, 하나님의 계시자로서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창조된 인류 공동체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의 원형인 동시에 새로운 인류를 의미하며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인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교회의 형태를 통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본회퍼에게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린(C.J.Green)은 신학적 개념들에 내재된 시회적 의도를 발견할 뿐 아니라 그것에 근거하여 사회에 대한 책임성과 실천의 문제를 다루는 본회퍼의 신학을 "사회성의 신학"으로 적절하게 규정하고 있다.

 

"사회성"의 관점에서 본 인격 개념

 

교회의 사회성에 대한 본회퍼의 통찰력은 기독교적 인격개념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본회퍼는 기독교적 인격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먼저 독일 관념론 철학의 인식론적 방법을 비판한다. 칸트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인식의 대상으로서 객체가 아니라 인식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본회퍼는 주체-객체 도식 하에서는 올바른 인격 개념의 형성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식 대상이 되는 객체가 "인식하는 나"의 주체 안으로 흡수됨으로써 인격의 개념을 가능하게 만드는 나와 너의 관계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객체는 단순한 의미에서의 인식 대상이 아니라 주체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보면서 객체를 전제하지 않는 주체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각 개인은 타자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각 개인은 홀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각 개인이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오히려 본질적으로 타자가 존재해야 한다."  이것은 인격 형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나와 너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너의 존재가 나의 인격 형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원으로 만드는 오류가 있는데 본회퍼는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나와 너 사이에 이루어지는 인격적 관계에 개입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또는 성령이 구체적인 너에게로 들어온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만 타자는 나에게 있어 너가 된다... 모든 인간적인 너는 신적인 너의 모상(Abbild)이다." 놀랍게도 본회퍼의 이같은 인격 이해는 사람들 사이에 이뤄지는 인격적 관계성의 범주를 넘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인격적 관계성까지 포함한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구체적인 요구를 하고 거기에 대한 응답과  구체적인 결단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격 개념이 형성되는데 본회퍼는 인격 형성의 이런 과정은 각 개인과 집단 인격으로 존재하는 공동체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본회퍼는 각 개인과 마찬가지로 요구와 응답의 과정 속에 존재하는 집단 인격으로서의 공동체를 윤리적 존재로 이해한다. 본회퍼는 이러한 개별인격과 집단인격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연관성과 상호영향력의 성경적 근거를 이렇게 말한다. "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함께 결합시켜서 지으셨다. 하나님은 고립 상태에 있는 개인의 역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역사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개인을 흡수해 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여러 인간의 공동체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공동체와 인간은 동일한 것이며 서로 내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집단적인 통일성의 구조와 사회적인 통일성의 구조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질적인 것이다. 교회의 개념은 이런 기본관계에 근거하고 있다. " 그러나 본회퍼의 집단인격이 집단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회퍼는 개별인격들간의 상호관계성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별인격(개인)과 집단인격(공동체)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관계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본회퍼에게 집단인격은 단순히 개별인격의 총합이 아니라 각 개인이 집단인격에 참여하는 것이며  오히려 개인적 집단인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집단인격은 개별인격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결코 존재할 없다는 본회퍼의 인식은 철저하게 사회성의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대리행위와 교회의 사회성

 

본회퍼는 교회를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담지하고 있는 계시공동체로  이해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로 보고 교회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한다3. 그는 계시공동체로서 교회는 사회의 다른 공동체들과 구별되는 독특성을 갖지만 사회적공동체로서 교회는 일반적인 사회적 공동체가 갖고 있는 기본속성을 공유하게 된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전자를 통해 트뢸취를 따르는 베를린 학파의 역사상대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후자를 통해 하나님의 계시의 전적 타자성을 강조하는 초기 바르트 신학의 관점을 반대한다. 본회퍼의 교회론은 초월적 계시성과 아울러 사회적 공동체성을 모두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이 세상에서 사회적 공동체의 구체적인 형태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본회퍼는 자신의 유명한 교회론적인 표현양식-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Christus als Gemeide existierend)"-으로 정식화한다.4  이러한 표현양식으로 본회퍼는 교회를 사회성의 관점에서 파악하며 교회를 집단인격으로 존재하는 시회적 공동체로 이해한다. 본회퍼는 집단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바울신학의 아담-그리스도 유형론을 가지고 설명한다. 집단인격으로서의 아담은 죄된 인간 공동체 즉 죄의 인류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각 개인의 죄의 행위 속에서 나타나는 아담이다. 그러므로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동시에 아담을 가리키는데 이렇게 집단인격은 이중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런데 아담이라는 죄의 공동체는 집단인격으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공동체, 즉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극복된다. 이런 방식으로 본회퍼는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의 특성을 대리행위(Stellverretung)로 규정하고 그 둘의 차이를 구별한다. 아담의 자기중심성에 기초한 대리행위와는 전적으로 다른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타자중심적인 대리행위는 "새로운 인류의 삶의 원칙"이 된다. 그래서 본회퍼는 교회공동체의 개별인격은 타자에 대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며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에서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본회퍼의 표현양식은 교회가 계시공동체인 동시에 사회적 공동체라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교회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 표현은 교회는 인격공동체이며 교회의 삶의 방식은 타자중심성에 기초한 대리행위의 형태로 나타나야 함을 가르쳐준다.

 

교회의 사회성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공적)책임: 그리스도 현실의 윤리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본회퍼는 기독교 윤리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궁극적인 현실"에 대한 질문이며, 그 중심과제는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 속에서 찾아서 바르게 실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궁극적인 현실을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는가?  본회퍼는 이런 질문의 답을 "하나의 그리스도 현실(eine Christuswirklichkeit) " 에서 찾는다. 5 그는 그리스도의 현실은 인간의 타락 후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을 화해시킨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현실이란 관점을 가지고 당시의 신루터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두 영역의 사고방식"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두 영역의 사고방식속에서는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철저하게 대립한다. 본회퍼는 두 영역의 사고방식의 치명적인 한계는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결코  "전체로서의 현살"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화해를 이룬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강조한다. " 이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고 인식하지 않으면서 기독교적으로 되려고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두개의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의 현실이 하나로 통일되는 오직 그리스도의 현실화의 영역이 존재할 뿐이다. "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적인 대리행위를 통해 적대적 관계에 있던 하나님과 세상은 파괴된 관계성을 다시 회복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현실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인 삶과 사회적인 책임을 수행하는 기초로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현실 안에서 세상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현실과 대적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투쟁해야 하는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책임의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그리스도 현실의 윤리는 그리스도인이 사회적 책임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하는 윤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현실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등장하는 것이 본회퍼의 위임론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위임(Mandat) 형성의 근원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다.  본회퍼는 하나님은 자신의 전적인 권위로부터 나오는 위임을 통해 자신의 뜻을 이 세상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킨다고 말한다.  본회퍼는 결혼(가정), 노동(문화), 관헌(정부), 교회를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위임의 구체적인 영역들로 제시하면서  이 영역들에서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각 위임 영역들은 상호의존의 관계 하에서 각 위임 영역이 갖고 있는 고유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이다. 본회퍼는 각각의 위임들이 갖고 있는 상호관계성 안에서 각 위임들은 상호간에 제한을 받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각 위임들이 하나님이 부여하신 위임의 책임을 잘 수행하도록 서로 견제하는 것이 필요성을 의미한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 이런 제한은 서로 함께함과 서로 위함의 상황 속에서 각 위임은 서로 견제함(Gegeneinander: Against each other)으로써 반드시 경험되는 것이다. 서로 견제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하나님의 위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6

 

교회의 사회성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공적)책임:  본회퍼의 종교비판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베를린의 테겔 감옥에서 쓴 본회퍼의 편지(1944.4. 30)에는 그의 새로운 신학적 사유가 다음과 같이 나타나있다. "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과연 무엇이며 그리스도는 누구인가하는 문제이다. 그것이 신학적인 말이든 신앙적인 말이든 상관없이 말로 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우리는 완전히 비종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본회퍼는 신의 존재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자율적인 인간들이 종교없이 살아가는 "성숙해진 세상"에 눈을 뜬다. 이런 비종교적인 시대적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여전히 세상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라면 그의 지배는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본회퍼는 이런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리스도는 종교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교회공동체의 영역에서 실현되지만 그것은 교회 안의 내적인 영역으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현실은 사회적 삶의 구체적인 자리, 즉 각각의 위임 영역에서 실현되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에게 종교는 신앙과 대립되는 개념이었으며 그는 종교적 공동체와 신앙공동체의 의미를 철저하게 구별한다. 그러면 본회퍼에게 종교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본회퍼에 의하면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을 "형이상학적으로" 그리고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해는 것을 말한다. 형이상학적인 하나님 이해의 특징은 하나님을 단순히 최선, 전지, 전능, 최고와같은 하나의 관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본회퍼는 이렇게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관념으로 이해할 경우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의 세상 현실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과의 참된 초월적 경험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본회퍼는 전능함이 아니라 십자가의 무력함과 고난을 통해 인간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라고 말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의 무력함과 고난을 통해 나타나신다. 그 다음에 본회퍼는 하나님을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내면성, 부분성, 후견인, 특권의식, 사적인 영역과 관련돤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한 개인의 자기중심적인 내면성과 경건성에 기초하여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인간 삶의 일부분의 영역에 한정시켜 이해하는 것도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본회퍼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인간 삶의 전체와 관련된다. 그 신앙은 개인의 경건성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타자와의 관계까지 포함하는 신앙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사적인 영역만이 아닌 공적 영역에서도 현실적합성을 가지고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종교비판에 근거하여 본회퍼는 "성경적 개념들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 을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그가 처음 주장한 "신학에 있어서의 사회학적 범주의 중요성"을 적용한 결과물이다. 그에게 신학적 개념들을 사회성의 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방식은 성경의 개념들을 비종교적으로 해석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본회퍼는 비종교적 관점에서 예수를 "타자를 위한 인간"으로, 신앙을 "타자를 위한 예수의 존재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런 비종교적인 해석에 근거하여 본회퍼의 유명한 교회론적인 표현 양식인 "타자를 위한 교회(Kirche fur andere)"가 등장한다. 본회퍼는 이런 새로운 교회론적인 비전을 가지고 자기 보전과 안일에만 집중함으로, 나치 치하의 유대인의 고난에 끝까지 동참하지 못한 고백교회를 비판한다. 교회존재의 근거를 철저하게 교회의 사회성에서 찾고 있는 자신의 교회론을 본회퍼는 이렇게 말한다. "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 교회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세상적 과제를 지배함으로써가 아니라 도움을 주고 섬김으로써 관여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무엇이며 타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 고재길 교수는 독일 훔볼트 대학교에서 본회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 장신대에서 기독교 윤리를 가르치고 있다.

각주 1

본회퍼는 타자를 위한 교회일 때만 교회라고 말하면서 교히ㅗ가 공적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각주 2

본회퍼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 세게관을 사회성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공동체의 출현-공동체의 파괴- 공동체의 화복- 공동체의 완성으로 본다.

각주 3

본회퍼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가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계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사회적 공동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본다.

각주 4

본회퍼는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루터 신학자인 본회퍼는 유한이 무한을 포함할 수 없다는 칼빈신학을 따르지 않고 유한이 무한을 포함ㅎ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각주 5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 이전에는 두 개의 현실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현실과 하나님과 무관한 세상의 현실이다. 그리스도 오기 전에 이 두 현실은 서로 적대적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 두 현실은 화해하여 하나의 그리스도 현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현실에서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

각주 6

본회퍼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견제를 예를 들어 다음 3가지로 말한다. 국가의 붋법적인 폭력에 대한 질문,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사람의 치료,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

  1. 본회퍼는 타자를 위한 교회일 때만 교회라고 말하면서 교히ㅗ가 공적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교회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본문으로]
  2. 본회퍼는 창조-타락-구속-완성이라는 전통적인 기독교 세게관을 사회성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공동체의 출현-공동체의 파괴- 공동체의 화복- 공동체의 완성으로 본다. [본문으로]
  3. 본회퍼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가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계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사회적 공동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본다. [본문으로]
  4. 본회퍼는 교회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루터 신학자인 본회퍼는 유한이 무한을 포함할 수 없다는 칼빈신학을 따르지 않고 유한이 무한을 포함ㅎ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문으로]
  5.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 이전에는 두 개의 현실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현실과 하나님과 무관한 세상의 현실이다. 그리스도 오기 전에 이 두 현실은 서로 적대적이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이 두 현실은 화해하여 하나의 그리스도 현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현실에서 이 세상은 그리스도인이 투쟁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의 현실이 되었다. 십자가 안에서 세상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이 화해하여 이제 그리스도 현실이라는 하나의 현실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현실과 세상 현실이 구별되지 않거나 일치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화해는 일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인 것(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것)과 궁극 이전의 것(궁극에도달 이전의 모든 것: 예를 들면 인간의 학문, 문화 등) 이 구별됨을 의미한다. 본회퍼는 화해로 말미암아 궁극 이전의 것들이 그리스도 이전에는 무가치했지만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가치를 발견하고 경험하게 된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6. 본회퍼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견제를 예를 들어 다음 3가지로 말한다. 국가의 붋법적인 폭력에 대한 질문, 국가폭력에 희생당한 사람의 치료,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 [본문으로]

 

한국 기독교와 공공성

2015-05-27 15:45:01


     한국 개신교의 위기는 공공성의 위기이다. 그동안 한국 기독교에 팽배한 사적인 기독교 신앙은 공공성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신앙은 하나님과 개인의 문제로 문제로 제한하는 한국 개신교는 기독교 신앙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통하고 세상과는 소통이 안되는 사적 기독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교회가 성장하고 기도교는 한국 사회에서 지배적 종교, 다수의 종교가 되면서 공공성의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제는 사적인 삶의 영역과 공적 삶의 영역의 경계가 허물어 지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에도 점점 사적인 영역이 없어지고 있다. 문창극 장로의 교회내 강연이 사회적 이슈가 된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이제는 신앙 얘기를 공적으로 담론화해서는안된다는 변명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신앙이 사유화되면 기독교의 진리 주장이 공적인 타당성을 잃게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은 역사와 공간을 넘어 보편적인 진리이며 당연히 공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사유화나 배타성으로 인하여 공공의 영역에서 그 타당성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의 위상 변화로 이제는 공론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과거에 성속이원론을 가졌던 기독교는 80년대를 기점으로 교회가 성장하면서 그 성숙이원론은 자연스럽게 무너지고 교회는 급격히 세속화되었다. 세속화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문제는 세속화에 따라서 한국 교회는 유뮬론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게되었고 그 결과 번영신학, 기복 신앙, 긍정의 힘 등의 등장한 것인데 이것은 부정적으로 한국 기독교를 반공주의와 친자본주의적 신앙으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풍요와 번영을 추구하는 세속적 이데올로기와 기독교 신앙이 영합되어 급진적 제자도의 삶과는 철저히 유리된 신앙으로 변질되었고 이것은 결국 도덕적 해이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 기독교가 봉착한 이러한 공공성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과 고유성을 포기하지 말되 신앙의 배타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교회는 교회밖을 향해서 포용적 태도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다원주의 사회에서 기독교는 똘레랑스적 사고가 필요하다.1 그러나 배타성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비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배타성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포용할 것과 배타할 것을 구분하는 판단력과 유연성이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또한 공적으로 타탕성있고 설득력있는 기독교 신앙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개신교의 위기는 공적인 타당성 구조를 상실함으로 설득력을 잃어버린데 있다. 교회는 공적목표를 더욱 많이 가져야 하고 세상과의 소통에 힘을 써야 한다. 지금 한국 개신교는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있다. 과거의 분리형 기독교인 근본주의가 적응형 기독교인 성장주의, 번영주의 기독교로 전환하였듯이 이제 한국 개신교는 좀더 통전적이고 실천적이며 똘레랑스적인 기독교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전환기는 기독교 신앙의 공공성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계기로 삼는 것이 한국 개신교가 당면한 역사적 과제일 것이다.

각주 1

이런 사고의 전환을 위해서는 일반은총의 신학을 더욱 정교하게 개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1. 이런 사고의 전환을 위해서는 일반은총의 신학을 더욱 정교하게 개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