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신학과 조직신학- 송영재
2016-03-27 22:11:31
언약신학과 조직신학
송영재 교수(개혁신학연구원)
언약신학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하부구조를 형성한다. 언약신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관계 맺기 위해서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고, 죄는 관계의 상실이며, 속죄는 관계의 회복이며, 성화는 관계의 성장이며, 영광과 종말은 관계의 완성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자녀로써의 관계, 부부로서의 관계, 백성으로써의 관계 모티프(motif)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학이 개혁주의 조직신학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의 언약적(covenantal) 관계라는 핵심사상은 개혁주의 조직신학 전반에 걸쳐 지배적인 해석학적 무게(hermeneutical gravity)가 되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언약신학에서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1. 구원론과 조직신학
성경은 구원에 대한 책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가장 큰 주제와 관심사는 역시 구원론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조직신학에 대한 총론을 언약적 관점에서 구원론과 연관시켜 기술해 보려고 한다.
성경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이 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은 쉽게 말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말해도 좋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창조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종말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세계에 대한 안목, 즉 "세계관"을 배운다는 말과 다름없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영적, 정신적, 심리적, 인식론적, 인격적인 변화를 통해서 이제까지의 관점을 버리고 성경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이것이 곧 세계관의 변화이다. 그래서 죄인이 거듭난다는 것은 곧 그의 세계관이 새롭게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조직신학은 곧 성경적 세계관이고 따라서 조직신학이 다르면 세계관이 달라진다. 세계관이 달라지면 당연히 구원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하였듯이 구원은 곧 세계관의 전환이요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신학을 배웠느냐에 따라 구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이에 따라 세상을 보는 시각이 결정되며 경건의 유형과 삶의 방식도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신학이 다르면 사는 방식도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은 자기가 보는 시각대로 세상을 살게 되어있다.
따라서 믿음은 단순한 체험이 아니다. 믿음은 체험을 포함하고 수반하는 것이지만 먼저 세계관의 전향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시각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연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하나의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국 내 믿음과 경건과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가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신학이 다르면 세계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면 구원관이 다르고 구원관이 다르면 그에 따른 신앙의 스타일과 삶의 성향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연쇄적인 상관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모두가 구원을 말한다고 해서 다 똑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그 사람의 신학과 세계관이 무엇인지 알아야 그가 말하고 있는 구원의 의미를 바로 알 수 있게 된다.
2. 구원론과 조직신학 서론
조직신학 서론에서는 어떤 특정 신학의 바탕에 깔린 전제가 무엇이며 그 전제가 성경적으로 정당한 것인지를 판가름하게 된다. 전제가 비 성경적이면 세부적인 교리들은 연이어서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학의 전제는 곧 계시론에서 판가름난다. 신학은 복잡한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렇지 않다. 신학의 다양성을 초월해서 기독교 신학의 최종적인 관건은 역시 하나님의 계시이다.
인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 즉, 계시라는 것이 있다면 인간이 그 뜻을 어떻게 인식하여 신학적 명제와 구체적인 신앙의 규범으로 전환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걸려있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의 계시는 구원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
1). 따라서 계시관은 신학의 분수령이고 거기에서 방향이 엇갈리면 결과적으로 신학은 달라지게 되어있다. 그것은 이렇다. 개별적인 교리들은 계시에서 유추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시를 인식하는 방법과 계시를 진술하는 방법에 따라 교리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특정 신학의 신론, 창조론, 인간론, 구원론, 기독론, 성령론, 성화론, 교회론, 종말론 등은 계시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든 결정된(해결된) 것으로 전제하고 형성된 교리들이다. 그러나 조직신학 서론에서는 특정 신학의 그러한 개별적인 교리들이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해서 인식되고 신학적인 명제로 전환되었는지에 대한 원칙적인 의문을 제시한다. 왜냐 하면 그 신학에서 가르치는 개별적인 교리들의 진위 여부는 그 교리들의 근거가 된 계시론, 즉 계시 인식의 방법과 계시진술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연 이성의 권위를 계시의 권위보다 위에 두는 신학과 그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신학은 이미 계시인식과 진술방법에 있어서 원칙적으로 다른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개별적인 교리를 기술하는 데 있어서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계시를 변증법적(non-propositional)으로 이해하는 신정통 신학과 계시를 언어적이고 명제적으로(propositional) 이해하는 개혁신학이 신학적으로 같은 배를 탈 수 없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신앙과 이성의 타협적인 협력을 주장했던 중세 스콜라 신앙과 이성의 주종관계를 주장했던 개혁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저들이 자유의지나 하나님의 전적은혜의 교리 등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는 사실은 시작부터 예견 된 바이다.
언약신학은 하나님의 언어적인 자기계시(self revelation in human language)로부터 시작된다. 팔마 로벗슨의 언약에 대한 정의는 주권에 의한 피로 맺은 약정이다. 이것은 죄인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없었다면 신학은 인간의 말장난 일 뿐이다.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언약행위를 인간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자발적인 비하 (God s voluntary condescension) 라고 정의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인간이 알아듣도록 인간의 수준으로 자기를 비하시키면서까지 구원의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고 본 것이다.
3. 구원론과 신론
신학에서 신관은 다른 모든 교리들을 결정하는 구심점이 된다. 따라서 구원론 역시 신론에 의해서 그 성격이 결정되어 진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성을 부인하는 신학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는 신학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무한하시며(infinite) 동시에 인격적(personal)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초월적이시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분이시다.
모든 범신론적 신학은 하나님의 무한성을 부인하여 신앙을 도덕의 수준으로 격하시키고, 반대로 모든 초월주의적 신학은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여 신앙을 무질서와 비약으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및 주권적 섭리를 부정하여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구속의 역사와 점진적인 성화를 부정하여 초월적이고 신비한 체험으로만 믿음을 지탱해 가는 혼합주의에 빠지게 된다.
<삼위일체는 인식론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다. 성경은 아들을 아는 것이 곧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아들과 아들에 대한 것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다시 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인간이 인식하는 문제에 있어서 세분께서는 상호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세분 중 어느 한 분만 떼어놓고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분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두 분을 필연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다. 더 좋은 방법은 구원론적인 설명이다.
그러나 역시 삼위일체는 구원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이해가 빠르다. 구원에는 영원과 과거와 현재가 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성부께서는 영원 전에 우리를 택하시고, 성자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고 하셨고,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아버지는 택하시고, 아들은 속죄하시고, 성령은 거듭나게 하셔야 구원이 가능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가지만 빠져도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삼위일체는 존재론적으로도 하나님의 필연적인 존재방식 이지만 구원론적으로도 필연적이다. 삼위일체를 부인하면 성경적으로 구원이 성립되지 않는다.
언약적 하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초월적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하나님이시다. 무조건적인 선택과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면서도 인간에게 또한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창세 전에 구원을 작정하셨으면서도 역사에 성육신 하여 들어오셨고 지금도 자녀들 안에 계시면서 영광의 순간까지 보호하시고 성화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하나님은 당신을 자발적으로 비하 시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오셨다. 언약신학은 곧 임마누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동시에 스스로 낮추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4. 구원론과 인간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도덕적인 결함(moral deficiency)인가 아니면 인격적인 죄(personal sin)인가?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인 결함으로 본다면 약간의 추가적인 선행이나 노력과 하나님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함이 아니고 인격적인 또는 관계상의 죄라면 문제는 다르다. 죄는 도덕적인 선행이나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진정한 내적 변화와 관계의 회복으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인의 도덕적인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므로 하나님의 속죄와 은혜로만 해결 될 수 있다.
인간의 문제를 도덕적인 결함으로 보는 것은 성선설에 근거한 인간론이며 인간의 문제를 인격적인 죄로 보는 것은 성경적인 인간론이다.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함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의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것이 된다. 처음부터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는 인간을 만든 하나님께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문제가 죄 이며 그 책임은 바로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결국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함이라면 그것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인(언약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속죄의 필요성이 없게 된다. 도덕적인 결함은 인격적인 문제가 아니고 유전적인 문제이다. 만약 인간의 문제가 인격적인 성격을 갖지 않고 단순히 잘 못된 창조로 인한 유전적인 문제라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 없게 된다. 또 자신의 선행이나 도덕적인 노력으로 결함을 보충하면 되기 때문에 자유의지로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의 노력을 돕는 일종의 "도우미" 정도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인간론이 잘못되면 구원론은 자동적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짐승의 피가 인간 속죄의 피로 불완전한 이유가 어디에 있나? 짐승의 피는 사실 그 자체로써 어떤 도덕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덕적인 결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시적으로(ceremonially) 불완전한 이유는 죄가 도덕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인 것이요, 관계적인 것이요, 언약적인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결함은 원인이 아니고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가출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을 도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가출한 자식을 도덕적으로 부패한 자식으로 보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의 사랑을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간 자식으로 볼 뿐이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리고 나간 자식 일 뿐이다. 이 비유의 핵심은 탕자의 도덕적 부패성이 아니었다. 탕자가 아버지께 돌아와서 화목하고 관계를 다시 회복 할 것이냐 말 것 이냐 그것이었다.
인격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은 책임일 것이다. 인격적인 관계는 책임을 요구한다. 이 책임은 노예적인 책임이 아니고 곧 축복과 보호(security)를 가져오는 부자간의 책임이요 부부간의 책임이다. 책임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responsible love). 동산에서 금단의 시험을 통해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의 뜻은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은 영생복락을 약속하시고 대신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다. 이것은 노예적인 시험이나 순종이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안전(security)을 위한 시험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이처럼 영생복락의 약속과 순종의 책임을 수반하는 언약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였던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언약에서도 변함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랑이라고 했다. 혼인메타포는 곧 언약메타포를 의미한다.
5. 구원론과 기독론
팔마 로벗슨은 언약은 주권에 의한 피로 맺은 약정이라고 정의했다. 언약에 대한 이 정의는 세 가지 핵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첫째,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비하 (voluntary condescension) 하신 것이 언약이다.
둘째로, 언약은 피로 맺은 것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고 했다. 피흘림은 언약파기에 따라오는 책임이다. 언약파기의 대가는 죽음인 것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하셨다. 히브리어로 언약은 보리트 인데 쪼갠다 는 의미를 갖는다. 살을 쪼개고 피를 흘리는 것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짐승의 쪼갠 살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심으로 피 흘림의 언약을 맺으셨다.
세번째로, 언약은 약정이다. 약속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요 하나님의 구원약정이다. 이 약정을 보증하는 증표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할례를 주셨다. 둘 다 피 흘림을 뜻하는 증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곧 이 피 흘림의 약정이 성취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곧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의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인간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언약적 죽음이요 언약적 속죄이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흠 없는 제물이 될 수 없다. 또 만일 그리스도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는 인간을 대표하는 언약의 머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구원론적인 필요에 의해서 보더라도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셔야만 했다.
죄인이 의롭게 되었다는 칭의(justification)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론에 근거한 것이다. 죄 용서함이 없이는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다.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인간대신 모든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 하셨기 때문에 저를 믿는 자는 더 이상 율법을 완전하게 순종해야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율법의 요구에서 해방되고 행위의 심판에서 면제 된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속죄는 인간의 도덕적인 결핍을 돕는 추가적인 의미로서의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상실에서 시작된 인간의 죄를 완전히 속죄하여 깨어진 관계를 변화시키고 회복하는 은혜이다. 인간의 문제가 도덕적인 결핍이었다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필요조차도 없어지게 된다. 도덕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돕는 은혜로서 충분할 것이다. 약간의 도덕적인 결핍을 돕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피를 흘려야 할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문제가 결핍이나 도덕적인 문제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의한 은혜가 아니고 본래부터 하자 있는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당연히 책임을 느끼고 인간에게 베풀어야 하는 보상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듯 기독론은 인간론 및 구원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리스도의 피를 도덕적인(moral) 것으로 보지 않고 화목을 위한 의식적인(ceremonial) 것으로 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죄는 도덕적인 것 이전에 언약적이고 관계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속죄의 피도 언약적이요 관계적이다. 화목을 위한 속죄의 피 흘림이란 뜻이다. 옳은 행위를 논하기 전에 먼저 옳은 신분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죄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신분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리고 비로소 이차적으로 옳은 신분에서 나온 옳은 행위와 실천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약신학에서는 새로운 신분으로 인한 새로운 관계를 먼저 따진다. 새로운 신분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는 이차적인 문제요 시간의 문제다.
6. 구원론과 성화론: 연속성과 불연속성
복음과 율법의 문제를 다룬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다. 이것은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는 개혁주의 신학의 중요한 모토이다. 특히 루터가 많이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중요하다. 이 자유는 두 가지로 봐야 한다. 첫 번째는 구원론적 자유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이루지 못한 언약을 완성해 주셨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말이 된다. 타락 전에는 아담에게 순종의 언약이 주어졌다. 이것은 다른 말로 행위언약이라고 한다. 이 언약은 율법을 순종함으로 성취되는 언약이다. 그런데 아담은 실패하였고 율법의 정죄함을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이후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새로운 언약의 길을 열어 주셨다. 은혜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에 이 언약은 은혜 언약이라고 부른다. 이 언약의 머리는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둘째 아담으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였고 그 순종은 은혜언약을 충족시키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 은혜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되어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자유 하게 된다. 이 언약은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완성하신 언약이기 때문이다.
구원론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가 은혜언약으로 완성하신 것은 곧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이 이루지 못한 행위 언약을 완성하신 것이다. 아담이 실패한 것을 그리스도께서 완성 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한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로마서이다 (8:1-2).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행위언약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서도 안 된다. 이것이 구원론적 완성이다.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해방되었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의 공공성과 공공신학 (0) | 2023.05.11 |
---|---|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제임스 헌터 (0) | 2023.05.11 |
교회사 속의 성령 (0) | 2023.05.11 |
오늘날의 하나님나라- 스캇 맥나이트 (0) | 2023.05.11 |
예수와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 이형일 (0) | 2023.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