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1부 1,2,3장
2016-03-30 13:20:47
1부 1장 기독교 신앙과 세계변혁의 과제
이 책의 집필의도는 후기 현대사회에서 종교적 믿음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후기 현대사회에서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신앙과 세상에서 실제로 실행되는 기독교 간의 엄청난 차이를 발견하는데, 그 차이속에는 역설과 비극의 요소와 함께 확신과 가능성의 요소도 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의도와 자신의 본성에 의해 세상을 만드는 자이다. 그래서 대체로 세상에 대한 무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에서 매우 드물다. 세상에 관여하고 그것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려는 열정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지속적인 징표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개별적, 집단적, 사적, 공적인 모든 생명을 회복하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추구하면서 세상에 관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명령이다. 확실히 모든 전통의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에 참여하여 그것을 개선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각 교파와 기관들의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창조명령을 완수하겠다는 그들의 노력은 가상하고 의도도 훌륭하다. 나는 이 책에서 종교 및 문화운동 내에서 작동하는 내적 이론과 외적 실천을 검토하면서, 그 다양성 안에서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창조명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 책의 주제는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의 배경인 사회적 상상력에 관한 것이다. 나는 문화와 문화적 변혁에 대한 그들의 지배적 방식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허울좋은 사회과학과 실용신학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독교 신앙과 그것이 세상에 관여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위한 진입점이 될 것이다.
1부 2장 문화에 대한 공통된 견해
세상을 바꾸는 법을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우리가 문화의 본질을 떻게 이해하는지가 중요하다. 오늘날 문화에 대한 대중적 상상력을 지배하는 견해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문화의 핵심은 개인의 마음과 정신 안에서 곧 일반적으로 도덕적 선호인 가치라고 불리는 것에서 발견된다. 문화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 우리가 내리는 실제 결정을 이 가치들이 유도하는 방식 속에서 드러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문화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유하는 가치와 이 가치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선택의 집적으로 구성된다. 이것은 만약 한 문화가 훌륭하다면 그 이유는 개인들이 받아들인 훌륭한 가치들이 훌륭한 선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챨스 콜슨의 주장처럼 건전한 사회는 오직 건전한 사람들에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개인의 양심이 그들의 행동을 지키고 그들을 책임있는 사람들로 만든다. 문화적 변혁의 진정한 지렛대는 보통 사람들의 습관과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에서 나온다. 이런 견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또 미국 여론 속에 널리 퍼져 있다. 복음주의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차적인 방법으로 전도에 집중한 것은 바로 문화에 대한 이런 암묵적 견해에 근거하고 있다. 그들에게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개인을 변화시키고 문화를 우회적으로 변혁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이 바뀌면 그들은 올바른 가치와 선택을 갖게되고 결국 문화 바뀌게 될 것이다. 복음주의자들이 영적 갱신을 문화변혁의 중심축으로 수용하는 유일한 사람들은 아니다. 역사적 기독교 내의 상이한 전통들도로 동일한 사상을 다른 방식으로 제공한다.
흥미롭게도 가치, 선택, 영적 갱신에 대한 강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중심 수단으로 정치에 집중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잘못된 법이 개개의 정치가, 법관, 정책 입안자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기독교인들이 바른 가치와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뽑아 공직에 진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를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에는 예외가 없다. 다양한 전통의 기독교인들, 정치적을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성향의 기독교인들 모두가 변화를 위한 정치적 전략 논리를 수용한다. 그들은 정치가 기독교인들의 합법적인 활동영역이라는데 흔쾌히 동의한다. 물론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전술을 지지하면서도 이런 전술의 한계를 인식하고 주의를 기울인다. 그들은 정치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데 동의하며 나아가 신학적 원칙으로서 모든 세속 권세를 불신한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바꾸는데 현실적으로 선택 가능한 전술이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주류 개신교 전통에 속한 기독교인들에게도 해당되지만 복음주의자들의 경우에는 특히 그렇다. 1980년대 이후 미국에서 교회의 지배적인 공적 증거는 정치적 증거였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치외에 또 다른 문화 변혁 전술은 시민사회의 갱신을 통한 것이다. 정치의 한계에 대한 해법은 시민사회에서 개인을 회복시키고 민주주의의 영적 도덕적 차원들을 부활시키며 광범위한 토대를 갖춘 도덕적, 시민적 민주적 갱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설 단체들과 도덕개혁운동은 종종 이런 일들이 정부를 통해 이루어질 수없는 상황에서 발전의 동력이 되었다. 따라서 이 전술은 사회의 핵심 영역에 침투해 있는 시민과 공동체 지도자들이 주도하는 광범위한 토대를 갖춘 자발적 개혁운동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영적, 정치적, 사회전 전술들은 상호 배타적이 아니고 양립할 수 있는데 이것들이 양립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비록 그것들이 달라 보이지만 "사람들이 변하면 문화도 변한다"는 근본적 전제들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찰스 콜슨이 주장했듯이 변화된 사람들이 문화를 변화시킨다.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는 오직 사람들이 의지하여 살아가는 가치와 사상을 통해 개인의 마음과 정신에 변화가 생길 때 발생한다. 결국 메시지는 분명하다. 만일 당신이 기있고 올바른 가치를 고수한다면 그리고 적절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지고 생각한다면 당신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런 주장이 거의 전적으로 남용되고 있다.
1부 3장 공통된 견해의 실패
내 관심은 복음전도, 정치, 혹은 사회개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전략들을 지탱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차적인 방법으로 그런 전략들을 승인하는 기초 이론에 집중되어 있다. 내가 보기에는 구체적 전략들을 통해 실제로 성취되는 모든 유익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근거하는 문화와 문화적 변혁에 대한 기초이론에는 근본적인 약점이 있다. 문화가 단지 마음과 생각의 문제라면 다양한 소수자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미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많은 예에서 우리는 문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현상이란 증거를 발견한다. 실로 문화는 종종 다수의 의견과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문화변혁의 지배적 전략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문화형성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가 그들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고 결정적으 행동하지 않으며 충분히 기독교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란 사실에 대체로 동의한다. 책임,행동의 짐은 개개의 기독교인에게 부과되어 있고 세상을 더 좋게 더 많이 변화시키는 것도 그들에게 달려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인가?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역사의 방향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가?
그러나 문화변혁을 위한 전략들의 기초이론에 내재한 진짜 문제는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사상의 한 전통인 관념론이다. 관념론은 관념적 혹은 비물질적인 것이 일차적인 실재라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의 한 전통이자 원리다. 그것은 물질이나 자연보다 존재론적으로 중요하고 선행하는 것이 관념, 즉 정신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관념이다. 이러한 관념론에 미국적이고 개신교적인 색체를 부여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개인주의와 경건주의다. 개인주의는 자율적이고 리적인 개인이 사회변화의 주인공이라는 견해다. 개인주의 전통은 개신교 종교개혁부터 현대적인 세속적 현상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대단히 넓다. 경건주의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존재로 서는 것인데 경건주의는 관념론을 실재에 대한 종교적, 영적, 초자연적 개념으로 확장하면서 관념론에 동조한다. 결국 문화 및 문화변혁에 대한 지배적 견해가 갖고 있는 커다란 문제의 원천은 관념론이다.
사실 관념론은 역사 및 역사적 힘의 중요성, 그리고 자기 존재와 경험의 배경이 되는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소극적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더욱이 관념론은 문화가 발생되고, 조정되고, 조직되는 방식을 무시함으로 문화 속으로 침투하여 그것의 반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그래서 관념론은 사람들이 적절히 관심일 기울이고 더 잘 배우고 보다 일관성이 있다면 새상의 도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올바른 가치를 소유하고 믿음을 가지며 올바른 세계관을 수용하고 현명한 선택으로 단호하게 행동한다면 세상의 도전을 극복하고 세상도 바꿀 수 있다는 메시지를 유포한다. 기독교세계관은 이원론을 거부하지만 그 세계관에 내포된 관념론은 바로 그들이 거부하는 이원론의 한 표현이다. 관념론은 문화의 제도적 본성을 무시하고 문화가 권력구조 안에서 구체화되는 방식을 간과함으로써 그런 이원론을 강화한다.
관념론은 문화의 본질과 그것의 동력에 대해 순진한 이해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문화와 문화변혁에 대한 이런 기초이론을 토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모든 전술과 전략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관념론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앤디 크라우치는 문화의 물질성을 강조했다. 크라문화는 실제적, 구체적 소재로 구성되므로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려면 구체적, 문화적 생산물로 시작하고 나는 것이 언제나 최상이라고 말한다. 크라우치가 문화의 물질성을 우선하는 것은 사람들이 세상을 상상하고 경함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인공물의 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크라우치는 문화변혁의 지배적 견해인 관념론을 수정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런 견해에는 여전히 근본적인 약점이 있으며 그런 약점때문에 이 견해는 세상의 복잡함, 그리고 세상과 기독교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부적절하다. 문화의 물질적 특성과 문화적 생산물의 구체적 특성에 주목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거의 배타적으로 문화의 외적, 가시적, 명시적 그리고 의식적 측면에만 집중하는 것은 문화의 내적, 비가시적, 선의식적, 유전적 측면을 축소시키고 문화의 보다 포괄적인 본질을 놓치게 된다.또한 이런 관점은 문화와 세상에서 작동하는 힘의 동력 및 구조와의 관계를 인식하고 다루는데 실패한다. 그래서 크라우치의 모델은 어떤 문화상품과 문화적 물품들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더 문제는 크라우치의 견해가 문화상품의 사회적, 공동체적 본질을 인정하지만 문화의 강력한 사회적 본질과 동력을 적절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화변혁 모델은 일종의 시장영합주의의 틀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한다. 문화에 대한 이런 접근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화상품을 만들어서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 이런 시장영합주의 모델의 논의에서 교회는 배제되어 있다.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많지만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별로 없다. 결국 문화와 문화변혁에 대한 이런 시각은 관념론이 갖고 있는 동일한 전제,즉 문화가 집합된 개인들의 행동으로 형성되고 변화된다는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1부 4장
2016-03-30 17:23:18
1부 4장 문화와 문화변혁에 대한 대안적 견해: 11개의 명제
문화 자체에 대한 7 명제들
명제1 : 문화는 일종의 진리 주장과 도덕적 의무 체계다.
무엇보다 문화는 우리가 타자와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규범적 질서이며, 또한 우리가 개인적 집단적으로 자기경혐에 질서를 부여하는 규범적 질서다. 문화의 핵심에는 복잡한 규범 체계가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문화는 일종의 진리 주장과 도덕적 의무의 체계다. 대단히 축약된 의미로서 문화는 일종의 세계관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삶을 이끌어가는 의미 틀인 세계관은 인식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것은 옳고 그름이나 진리와 거짓에 대한 우리의 견해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시공간,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초래된 것은 지식과 이해의 틀이 대체로 언어와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쉽게 세계관을 바꾸거나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리를 형성하고 방향을 조정하는 정말 중요한 대부분을 우리는 잘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밑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명제2: 문화는 역사의 산물이다.
문화가 인간 의식과 사회관행에 깊숙히 침투하는 한 가지 이유가 언어라면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역사이다. 문화는 사회 안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천천히 의미가 축적되며 형태를 갖춘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의지의 발명품이라기 보다는 역사의 느린 생산물이다. 이런 때문에 문화는 회복력이 강하고 세월이 흘러도 오래 지속된다.이것은 문화가 폐쇄된 체계이거나 영향과 변화를 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분명히 문화는 개방적,가변적이며 항상 수정,적응,개정에 노출되어 있다. 단지 문화는 쉽게 혹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 쁜이다.
명제3: 문화는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다.
우리는 문화를 상징 속에 반영된 일종의 규범적 질서로서 뿐만 아니라 그런 상징의 생산,분배,조작, 행정을 둘러싼 인간활동의 조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는 본질적으로 변증법적이다. 문화는 사상과 제도 사이에서, 상징적 환경과 사회적 물리적 환경 사이에서 발생했고 존재한다. 문화 형성에 사상이 중요하지만 그 사상이 탄생되고 통제되는 제도의 본질,운영, 권력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절반은 이해할 수 없게된다. 문화는 고독한 개인들이 아니라 제도와 그것을 이끄는 엘리트들에 의해 생산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개인과 제도 간의 관계도 문화가 변증법적임을 잘 보여준다. 제도는 그것을 작동시키는 개인없이 존재할 수 없지만 개인도 그들을 형성하고 그들의 모든 활동에 틀을 부여하는 제도 밖에서 이해될 수 없다.
명제4: 문화는 자원이며 그 자체로 권력이다.
제도적, 조직적 측면에서 문화를 생각한다면 싱징을 문화적 자원으로 볼 수 있다. 상징은 사상, 상상력, 뉴스, 지혜 등 실로 모든 종류의 지식형태를 취하여, 또한 이것들은 선언, 연설, 칙령, 소책자, 에세이, 책, 영화, 미술, 법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지식, 기술적 노하우, 경력, 문화적 성취 형태로 나타나는 상징은 자본의 상징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그것들에 부여된 문화적 의미 면에서 문화는 상징자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문화가 권력과의 관계에서 중립적이지 않고 일종의 권력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축적된 상징자본은 돈처럼 권력과 영향력으로 전환된다.
명제5: 문화적 산물과 상징 자본은 중심과 주변이라는 엄격한 구조 속에 계층화되어 있다.
이 명제는 명제4의 연장이다. 경제적 자본에서 양이 중요하다면 문화자본의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그것은 문화자본은 문화적 신용과 성취의 지위이며 그 지위는 중앙과 주변 사이의 한 구조 속에 조직되어 있다. 특정 문화상품과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개인, 네트워크, 제도는 주변이 아니라 중심에서 작동한다.
명제6: 문화는 네트워크 내에서 생성된다.
토마스 칼라일에 의해 대중화된 지도력과 역사에 대한 헤겔적 사상에 의하면 세계사는 단지 위인들의 전기에 불과하다. 그의 관점에서는 영웅들이 그들의 비전, 지성, 미학, 그리고 천상의 영감을 통해 역사를 형성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런 관점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나는 역사의 주인공은 개인의 천재성이 아니라 네트워크이며 그 네트워크로부터 만들어진 새로운 제도라고 주장한다. 내 요점은 개인적 카리스마와 천재성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문화적 결과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비슷한 성격의 제도들의 네트워크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명제7: 문화는 자율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일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문화를 삶의 자율저깅고 일관된 영역, 독립적이고 응집력이 있고 자기 결정적인 활동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상과 제도로서 문화는 대단히 복잡한 방식으로 다른 모든 제도. 특히 우리 시대에는 시장경제와 국가제도와 섞여 있다. 이 제도들은 자신만의 중심과 주변 그리고 논리, 동력, 방향을 가진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문화는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 또한 문화는 수많은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영역들은 서로 중첩되거나 경쟁적 관계를 가지고 비교적 독특한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이런 이유로 특별히 근대세계에서 문화는 결코 충분히 일관적일 수 없다.
문화적 변혁에 대한 4 명제들
위에서 언급한 문화 자체에 대한 명제들이 옳다면 보통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바꿔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점점 더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화는 오래 지속되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문화는 어떻게 바뀌는가? 생각이 결과를 낳는다는 데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모든 생각이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며 결과를 낳더라도 그 차이는 서로 다르다. 특정한 조건과 환경에서 생각은 결과를 낳는다. 이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사상은 위대함, 창조성, 희생, 인간적 번영을 촉발시킬 수 있다. 반대로 동일한 조건에서 다른 사상들이 터무니 없는 어리석음과 파괴로 이어질 수도 있다.
명제8: 문화는 가끔 아래에서 위로 변할 때로 있지만, 대체로 위에서 아래로 변한다.
가장 심오하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는 형태의 문화적 변화는 대개의 경우 위에서 아래로 발생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을 만들고 변화시키는 것은 대체로 엘리트들의 몫이다. 그들은 사회의 여러 영역들에서 창조적 지도와 경영을 제공하는 문지기들이다. 심지어 대중적 소요를 통해 변화의 동력을 획득하는 곳에서 조차 엘리트들이 수용하고 선전하기 전까지는 견인력을 얻지 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화는 사회가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이런 능력이 사회에서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고 문화적 생산수단에 접근할 수 있는 특권을 지진 특정조직과 지도자 그룹에 집중되어 있다. 문화변화가 우리의 상상력, 구조와 지식, 토론의 틀 속으로 침투할 때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다. 대중동원이 문화변혁의 한 표현이 될 수는 있지만 이 본질의 변화는 오직 위에서 아래로 일어난다.
명제9: 문화변혁은 대개 명성 밖에 있는 엘리트에게서 시작된다.
문화 생활의 여러 영역은 명성의 상대적 정도에 따라 폭넓게 분화되어 있는데 이것을 우리는 중심과 주변 사이의 분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중심과 주변은 절대적이라기 보다는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명성은 중앙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변화는 흔히 중심 밖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이런 구분이 중요하다. 혁신이 시작되는 곳마다 그것은 최고 수준의 상징자본을 소유한 엘리트들의 지배적 사상과 도덕체계에 대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혁신은 보통 엘리트들과 그들이 주도하는 제도들로부터 일반 대중들을 향해 이동한다. 혁신을 주도하는 엘리트들이 대표하고 제공하는 새로움은 문화를 주도하는 문지기들의 사상과 관행의 정당성,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에게 혁신의 목적은 중심으로 침투하는 것이며 중심의 주도적 사상과 관행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명제10: 세계 변혁의 집중력은 엘라트들의 네트워크와 그들이 주도하는 제도들이 중첩될 때 극대화된다.
다양한 형태의 문화적,사회적,경제적,정치적 자원들이 중첩되는 곳에서 세상을 만들고 변화시키려는 자극, 에너지, 방향이 극대화된다. 문화가 중첩되는 분야와 사회생활이 중첩되는 영역에서 엘리트들의 네트워크가 다양한 자원과 하나되어 공통된 목적을 위해 행동할 때 문화는 정말 변한다.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이 사회자본 및 경제자본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정치자본과 중첩될 때, 그리고 이런 다양한 자원들이 공유된 목적을 지향할 때 세상은 정말 변한다.
명제11: 문화는 변한다. 하지만 투쟁없이 이루어지는 문화변혁은 없다.
문화 자체는 그 안에서 범주들이 경쟁하고 사상과 이해 그리고 권력이 투쟁하는 영역을 대표한다. 본질상 문화는 그 안에서 제도와 그 대행자들이 세상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보호하려 애쓰는 영역이다. 물론 투쟁이 문화의 유일한 동력은 아니다. 변화는 빈번하게 통합과 동화, 일치를 통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투쟁은 문화변혁의 영구한 구성물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문화 변화는 투쟁과 경쟁의 상이한 현현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현상유지에 도전할 때 그 도전은 사회적 배경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사회의 대안적 비전이 사람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사회환경과 밀접한 공명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현실적이고 부적절하게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 도전이 그것을 야기한 사회 환경과 너무 긴밀한 공명을 이룬다면 그 대안은 애초에 도전하고 바꾸려던 것에 흡수될 가능성도 많다.
요약
사상이 역사 안에서 결과를 갖는 것은 그 사상이 진실하거나 명백하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강력한 제도와 네트워크 상징 속에 담겨지는 방식 때문에 그렇다. 사상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관념론에 맞서 나는 사상이 사회 상황과 환경속에 근거하고 있음을 주장했다. 또한 합리적 자율적 개인을 사회변화의 주인공으로 간주하는 개인주의에 맞서 나는 네트워크의 힘, 그것이 만드는 제도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공동체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마음과 정신을 문화의 일차적 원천과 창고로 이해하는 기독교 경건주의에 맞서 나는 개인의 마음과 정신은 문화운동과 매우 미약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문화는 훨씬 더 복잡하고 개인의 정신, 감정, 의지와 독립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개인의 마음과 정신이 화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마음과 정신을 성하고 개인의 삶을 지도하는 것이다.
이런 개관은 문화가 의도적 변화에 강력히 저항한다고 가르쳐 준다. 문화는 보통 사람들이나 그들의 잘 조직된운동에 저항한다. 정치 체제와 경제 상황 내의 변화는 비교적 여러 세대에 걸쳐 발생하지만 문화 속의 가장 김오한 변화는 대체로 여러 세대에 걸쳐 발생하며 그것은 사회질서의 언어적, 신화적 구조 속으로 침투될 때 최초로 감지된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진정한 제3차 대각성 운동이 발생하여 인구 절반이 심오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다고 할지라도 이 각성운동이 문화적 문지기들을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지 못한다면 공적, 사적 문화 속에 생산되고 창궐하는 상징의 특성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문화 형성 및 전달제도들(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시장과 정부가 후원하는 문화조직, 교육, 광고, 오락, 출판, 언론)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부흥은 문화 재구성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금주운동이나 동성애 낙태 포르노의 성장과 합법화를 저지하려던 기독교 우파의 시도가 실패한 이율를 설명해준다. 그 모든 운동에 의해 발생된 열정과 결심은 사람들을 꿀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 속의 보다 커다란 구조적 변화와 연결되지 않는다면 문화 전체의 형성 방향과 과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에서 확인해야 할 중요한 유보사항은 심지어 변화가 성공했을 때 조차 사람들이 제안한 방향이나 소망하는 결과로의 변화가 항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거시적 차원에서 인간 행동에는 항상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이 뒤따르며, 대단히 빈번하게 이것들은 비극적이다. 문화는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며 그것을 바꾸려는 우리의 열정에 맹렬히 저항한다. 우리의 노력과 의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말이다. 더구나 여기서 언급된 요인들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인들은 문화를 바꿀 희망은 고사하고 효과적으로 문화에 참여하지도 못할 것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1부 5장
2016-04-02 21:55:31
1부 5장 역사의 증거
기독교의 성장
기독교는 3세기 동안 모호한 분파에서 박해와 철학적 반박을 초래할 만큼 위험한 존재로 그리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성장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중교적 문화적 영향의 주변에서 중앙으로 이동했고 그때 발생한 동력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기독교의 이런 변화에서 로마제국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생태의 여러 측면이 담당한 중요한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기독교의 초기 성장은 그리스 로마제국의 상호 연결된 도시들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 팽창의 제도적 장치는 유대교 디아스포라 회당들의 네트웨크였다. 이 시대의 모든 분화적 발전들은 가족, 민족, 지리적 기원 그리고 분파적 이해와 연결된 중첩된 사회적 네트워크에 의존했고 이는 기독교도 다르지 않았다. 또 다른 동력은 로마세계가 그리스의 언어와 문화로 통일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울 시대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안팎에서 한 세대이상 헬라화가 진행된 상태였고 기독교 선교의 일차 대상은 이렇게 유대교내에서 헬라화된 분파였다.
지중해의 중심도시들이 당시 성장하던 교회의 문화적 생산의 초점이었다. 이 모든 도시들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부,권력, 문화의 엘리트 집단 속으로 침투했다는 분명한 증거들이 있다. 각 도시에는 후원자로 활동하는 부유한 기도교인들이 있었고 교회는 그들에게 의존했다. 대부분의 기독교 교부들이 고등교육을 받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집안 출신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교육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영적 문화적 창조성의 대부분이 그 시대 학교들의 설립과 변형 속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2세기 밀까지 지중해 주요 도시에 설립된 학교들 대부분이 그곳에 거주했던 부유한 기독교 지성인들이었다. 그후 기독교 지성인들은 신학적 성경적 전통을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선도적 학문들에 대한 지식도 갖추게 되었고 여려 세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인들은 생생한 지적 전통을 발전시켰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만의 지적 전통을 형성하던 바로 그때에 기독교가 당대 최고의 철학적 지성들의 비판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사상을 건전한 과정에 진입시키는 강력한 요인이었다.
로마제국의 교육제도는 파이데이아(paideia)였는데 이것은 젊은이들을 온전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세심한 과정이었다. 파이데이아의 사회적 기능은 제국의 귀족 및 제국 문화속에 엘리트들을 사회화하기 위한 하나의 구조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제국의 엘리트 네트워크 뿐만 아니라 사회권력의 상층부가 유지되었다. 이것이 로마사회의 지배적인 사화구조요 그것을 유지했던 교육체계였는데 이런 사회적 배경 속에 가독교가 출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의 경우 교회의 주교들은 좋은 집안 출신으로서 파이데이아를 경험했고 점차 철학자로서 정치적 자율권을 부여받았다. 고대 후기에 이르러 기독교는 파이데이아를 기독교 교리 교수법으로 흡수했고 이런 식으로 파이데이아는 기독교적 특성을 가진 일종의 예비학교가 되었다. 동시에 교회는 제국의 위계질서와 권력관계를 마음대로 주물렀다. 도시의 유력한 계급출신들로서 대단히 교양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상층부를 차지했다. 5세기에 이르러 교회는 제국권력의 실세로 자리매김했다.
야만족 유럽의 개종
일개 유대교 분파로서 초기 기독교는 지중해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교의 뒤를 따랐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기독교는 팍스 로마나의 행정조직을 구성하는 중심도시들의 네트워크를 따라 확산되었다. 그래서 로마제국 안에서 교회와 시의 행정조직이 동일했다. 교회의 영향력은 교회가 사회생활의 더 높은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커졌고 교육제도 속으로 침투하여 그것과 협력함으로서 성취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들이 뒤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사회적 비전은 혁명적이었다.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접근한 방식이 특히 그랬다. 고대 말에 이르러 이런 대중주의적 경향을 강화한 것이 새로운 유형의 리더십인 수도사와 새로운 사회제도인 수도원이었다. 수도승들은 경건한 사람으로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들의 영적 지위는 파이데이아와 그것을 섬기던 권력구조에 대한 직접적 도전이었다.
5세기에 야만족들이 제국을 침략하여 로마제국을 군사적 정체적으로 패배시켰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고전적 기독교 문화의 상당부분은 계속 살아남았으며 라틴어도 인문교양의 핵심으로 남아있었다. 교회는 그것의 주된 후원자요 보호자가 되었다. 교회의 조직과 사회는 잘 조직되고 통제되었으며 교회의 권위도 계속 강력하게 유지되었다. 교회는 로마의 정치적 권위가 붕괴된 자리를 대체했는데 특히 히스파니아, 갈리아 브리타니아 같은 제국의 외곽지역에서 그랬다. 이것은 로마가 몰락한 후 일종의 역전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그리스 로마 문명의 유산들이 주로 수도원과 그것을 창설한 수사들의 작업을 통해 기독교의 길을 따르게 된 것이다. 수사들은 일종의 문화적 선봉대로서 수도원은 강력한 제도였고 켈트, 게르만, 슬라브, 프랑크의 이교주의와 문화 속에 존재했던 어떤 것보다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다.
6-7세기에 수도원 운동은 전성기에 달했으며 몇 세기 동안 계속 번영을 누렸다. 수도원의 학문의 중심지였으며 또한 복음화의 전진기지였다. 수사들은 평민보다 지방, 지역 귀족들에게 더 집중하여 전도했다. 교회와 지주 귀족들 간의 관계는 서로에게 유익했다. 선교사들은 권세있는 부자들의 물질적 후원에 의존했다. 개종한 야만족 귀족들도 기독교 국가들 안에서 보다 발달된 문명을 경험했고 종교적 영감만큼이나 탐욕과 현실정치 때문에도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 세기에 교회는 귀족을 중심으로 한 교회였지만 귀족들은 엄청난 재원을 교회에 희사했고 교회 네트워크와 귀족 네트워크가 중첩되어 많은 경우 그것이 같은 네트워크로 발전했다. 야만족 유럽의 개종은 수 세기에 걸쳐 이루어졌고 변화의 움직임은 사회질서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혼란스럽고 불행한 역사로서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 결과가 복잡하게 뒤얽혀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교회가 지적, 문화적 생산의 지도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중첩되는 엘리트들의 자원이 없었다면 야만족들의 대대적인 개종은 결코 발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카롤링 르네상스
일반적으로 이 시기를 암흑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5-11세기 사이에 문화적 성취의 후퇴와 문화적 정체를 일컫는 경멸적 표현이다. 비록 이것이 서유럽의 경우에는 사실이었지만 다른 곳에서는 문화적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었다. 이 시기에 수도원들은 번성했고 기독교 및 로마문명의 범주를 크게 확장시킨 문화적 작업과 성취가 이루어졌고 특히 8세기 후반부터 9세기에는 카롤링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고등문화가 생산되었다. 이 시기에 교육,문학, 법, 신학, 건축, 미술, 음악 모두가 번성했다. 이 시대 개혁의 핵심은 교회 고위층의 지도력 하에 프랑크 귀족들을 성공적으로 동원한 것이다. 이런 중첩된 네트워크 중 상징적은 것을 사를마뉴와 베네딕트회 영국인 수사 엘퀸 간의 관계였다. 사를마뉴와 엘퀸은 공동으로 학문과 교육에 탁월한 개혁을 이루어냈고, 그 개혁들은 사제와 수사와 같은 낮은 계급의 성직자들 그리고 보통 사람들 속을 침투해 들어갔다. 일련의 왕실 칙령을 통해 모든 성직자는 읽고 쓰는 법을 배워야 했고 종교적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기초지식을 소유해야 했다. 카롤링 사회에서 기록된 문자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은 없었다. 공통된 기록언어와 문자 해독력이 공통된 문화를 만들었다.
카롤링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징은 기독교 사회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노력이었다. 그 사회는 교회처럼 평형 속에 함께 작동하는 여러부분들로 구성되었으며 피핀 이후에는 교회법에 근거한 기독교와 사회의 질서있고 정당한 관계에 대한 정치이론이 출현했다. 그의 행정은 기독교적 이상에 따라 적절하고 조화로운 사회기능을 강화시켰다. 카롤링 르네상스의 핵심은 고대후기에 로마 기독교 문화를 부활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카롤링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새로운 방식으로 로마 기독교문화의 전통을 갱신하고 개혁함으로써, 3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르네상스 및 16세기 이후의 라틴 기독교 국가를 위해 토대를 마련한것이었다. 이 시대의 위대한 업적은 어떤 사상적, 예술적 천재에 의해 이루어진 것도, 탁월한 행정적 조치의 결과도, 귀족들의 엄청난 부와 후원의 결과물도 아니고 이 세가지 모두가 하나로 합쳐진 결과다.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의 성공은 본질적으로 신학적이거나 영적이지 않은 요인들 때문에 가능했다. 이 운동의 성공과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측면들은 간과될 수 없다. 당시에 신성로마제국은 정치적 행정적으로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았고 전 지역이 비교적 자치적인 공국, 주교구, 제국도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 지역이 정치적 경쟁과 왕조적, 사회적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이런 내부 갈등괴 더불어 신성로마제국은 동쪽의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받았고 프랑스 및 영국과의 관계도 부실했다. 이처럼 제국의 권력은 많은 방해에 직면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개혁자들의 도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또한 중세말기에는 국제교역이 극적으로 팽창하면서 토지를 소유한 귀족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상이 줄어들고 마을과 도시들리 번창하면서 새로운 상업 엘리트들이 출현했다. 이들은 교회와 그 수호자들의 권력에서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점증하는 정치적, 종교적 자율권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 했다. 도시와 마을의 경제적 정치적 자율권은 그들의 증가하는 부와 결합하여 종교개혁의 중요한 실천적 요소가 되었다.
물론 종교개혁의 핵심은 독일에서 기원한 일종의 지적, 도덕적 혁명이었고 그 혁명은 중세후기의 신학 및 종교 관행에 도전하여 성경적 대안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혁명의 주도 세력이 일급의 학자들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들은 성경 외에도 사상, 논리, 언어, 고전사상과 중세 스콜라주의 대가들이었다. 또한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지도자들이 당시에 이미 확고한 틀을 형성한 인문주의 운동과 전략적 동맹을 맺은 것이 종교개혁의 지적 성공에 근간이 되었다.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주장했듯이 인문주의가 없었다면 종교개혁도 없었을 것이다. 그 운동은 대학 및 아카데미를 통해 작동하던 신학자들, 교수들, 학생들의 더 넓은 네트워크 속에 뿌리를 두었고 그것에 의해 영속될 수 있었다. 루터도 자기 수도원 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사람들의 네트워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 네트워크는 한 세대 후에 칼뱅주의 내애서 훨씬 더 확대되었다. 이런 대학들과 아카데미들은 국제 활동과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런 활동과 네트워크를 통해 개혁주의 사상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대학들이 상인과 무역업자들이 만든 상업용 도로를 따라 세워지고 또 당시에 성장하던 도시 지역에 위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장하던 유럽 경제가 이 길과 강들을 따라 도시에세 도시로 확대되었고 대학교수, 학생, 신학자들, 목사들, 교회의 네트워크들이 이 도시와 마을의 그물망을 통해 형성되었다. 상업도시들에 근거를 둔 개신교 상인들의 국제적 네트워크가 이런 인프라의 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고 그들의 재정적 후원은 전략적이었다. 그 시대의 개혁주의 공동체를 지배한 것은 목회자들과 경건한 상인들이었다. 새로운 인쇄기술은 이런 상인들 사이에서 이런 도시들에서 발달했고 그 결과 한때 교회와 귀족의 연합으로 통제되었던 활동이 더 이상 그들에게만 독점되지 않았다. 이뿐 아니라 종교개혁 운동은 신흥 상업 엘리트들의 지원 뿐만 아니라 지역 귀족들의 보호를 받았다. 당시에 귀족들은 개신교도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개혁운동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은 영적 신학적 열망에 뿌리를 두었지만 이외의 역사적 우연을 포함한 다른 요소에도 크게 의존했다. 카톨릭 네트워크에 강하게 묶이지 않으면서 다른 지도자들의 네트워크와 중복되고 공통의 목적을 위해 다영한 지원을 사용하여 대안적 엘리트 그룹이 형성된 것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종교개혁 이후의 운동들: 대각성 운동, 반노예 운동, 부흥운동들
사상과 제도 면에서 종교개혁은 서구문명의 본질과 방향에 도전하고 그것을 변형시켰던 진정한 혁명이었다. 그 후에 일련의 운동들이 계속하여 이어졌는데 그것들은 새로운 방향이라기 보다는 종교개혁과 동일한 문화적 논리를 다듬거나 적용한 것이었다. 이 운동들의 의도는 보다 커다란 공적 영역으로 종교개혁 기독교의 신학적 영적 이상들을 밀어넣거나 확장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사회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보다 대중적 갱신이나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에 그 성공은 지엽적이거나 단명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에서 작용된 동력과 유사한 것이 이런 운동들에도 많이 작동하고 있다. 1730년대와 1740년대의 대각성 운동에서 그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갱신에 헌신된 사람들이 역동적인 환대서양 인맥을 이루었다. 영국과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에서 이런 노력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운동의 탁월한 지도자들은 대체로 상인과 전문계급 출신들이었고 주로 명문대학에서 대단히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런 복음주의 목회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고 또 다른 사람들의 활동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또 하나의 중요한 운동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일어난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위한 영적, 도덕적, 인도주의적 에너지의 원천은 복음주의 신앙이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대영제국에서 노예무역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킨 영웅적 인물로 항상 간주된다. 하지만 영국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훨씬 더 복잡하고 잘 알려진 동력을 따라 전개된다. 18세기 후반의 문화적 배경은 프랑스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진보적 사상으로 정의되는데, 거기서 나오는 자유,행복, 보편적사랑의 개념들은 노예제의 이상과 제도들에 대해 암묵적으로 비판적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노예제 폐지의 지적인 틀은 이미 훌륭하게 확립된 상태였다. 자유를 위한 조건은 지성인들 사이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고 이제 남은 문제는 정치적 해결이었다. 윌버포스가 소외된 배우가 아니라 클레팜 공동체로 불리는, 친구, 지인, 동조자들로 구성된 유력한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이 네트워크 안에서 수많은 자원조직을 만들었고 전략적 동맹을 형성했으며 그 시대의 대중매체를 최대한 활용했다.
결론
문화변혁의 대안적 모델에서 강조되는 사회적, 제도적, 경제적, 문화적 동력은 세속적 문화변형의 중요한 순간에 보다 분명하게 작동한다. 계몽주의를 생각해보면, 국가가 지적, 예술적 혁신을 위해 자유뿐만 아니라 광대한 경제적, 행정적 자원을 제공한 곳(프랑스, 잉글랜드, 프러시아, 스코틀랜드)에서는 계몽주의가 번성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네델란드, 스웨덴, 오스트리아, 스페인, 러시아)에서는 계몽주의가 약화되었다. 계몽주의 등장 이전에 기독교 세계의 권위와 제도는 난공볼락이었다. 하지만 1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전통적 기독교의 권위와 그것이 유지하던 정권이 모두 전복되거나 영구적으로 약화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세계사에서 중요한 문화적 변형을 목격하게 된다. 계몽주의는 단순히 사상사의 진화가 아니라 리더들의 대안적 네트워크에 의해 발생한 일종의 혁명이었다. 계몽주의는 대안적 문화비전의 발전을 지향하고 엘리트적 문화형성 센터에서 작동하는 대안적 제도를 통해 대안적 자원을 제공했다. 계몽주의를 계승하여 일어난 운동인 1864-1914년 사이의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도 이런 동력이 작용한다. 유럽 사회주의 운동은 단순히 사회변두리에 있는 노등계급의 권력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과학의 덕목, 합법화의 동기로서 역사의식,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민감성, 종교 교리에 대한 냉소주의, 진보에 대한 신앙에 의존하는 계몽주의를 계승한 운동이다. 또한 유럽사회주의 운동은 대중이론 이긴 하지만 사회질서의 고위층에 있던 사람들 그러나 불만에 찬 지성인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다음어지고 주창되었다. 마르크스는 역사는 불가피하게 사회주의를 향해 전개되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 운동의 실현은 강력한 문화적 지식인들에 의해 위에서부터 아래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상뿐만 아니라 엘리트, 네트워크, 기술, 새로운 제도에 역할을 부여하는 문화변혁의 대안적 견해는 이렇게 문화적 발전의 가능성과 동인에 대해 훨씬 더 훌륭한 설명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근대 서구에서 이뤄진 다른 중요한 문화적 발전들, 특히 19세기 다윈주의, 20세기 니체, 문학적 근대주의, 근대 미술, 네오 마르크스 주의 그리고 교육과 법에서 일반적인 에토스의 승리에 대해 보다 설득력있는 설명을 제공한다. 분명한 것은 문화변혁에 대한 순진한 일반적 견해는 우리가 여기서 검토한 주된 문화변혁의 어떤 것도 효과적으로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정 문화나 문명에서 변화는 단지 일반인들의 마음과 생각에서 믿음과 가치가 변화될 때 혹은 단순히 문화적 물건을 발명할 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일반인의 신앙과 가치가 변화와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언급된 어떤 사례도 대중적 호소와 대안 문화의 수용에 의지하지 않았다. 일반인의 신앙과 가치는 문화변화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이 맡은 위치가 있지만 그것이 변화의 선동과 방향 자체에서 중심적이거나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결정적인가? 비록 각각의 문화변혁의 사례에서 문맥, 형태, 상관관계가 다르지만 도전과 변화의 모든 시점에서 우리는 농도짙은 네트워크로 대안문화를 상상하고 이론화하고 전파하는 지성인들 교육가들을 위해 자원을 제공했던 풍부한 후원의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지도자들과 자원들의 중첩되는 네트워크들이 강렬한 문화경제를 형성한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적 환경에 도전하면서도 여전히 공명을 이루는 방식으로 대안문화의 이상과 실천, 상품에 다양한 형태로 임계질량을 제공한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1부 6,7장
2016-04-03 00:48:00
1부 6장 미국 기독교의 문화경제
미국에서 기독교는 한 때 강성했으며 지금도 그 영향은 남아서 미국 사회의 윤곽과 특징을 계속해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기독교가 오늘날 더 큰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자신을 재생할 능력이 있는가? 역사적 기독교 운동이 문화적 변화에 미친 영향과 기여하는 상황을 조성했던 요인들을 현대 미국에서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분명한 점은 미국 기독교가 오늘날 더 넓은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주도적인 방법은 정치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비록 최근에는 기독교 진보주의자들도 그렇지만 특별히 기독교 보수주의자들 안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정치 영역에서 내는 성과는 기독교 엘리트들의 정책 지향적인 지적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최근의 가장 강력한 힘과 에너지는 신앙에 기초한 압력단체들과 그들의 지도자들로부터 나왔다. 경제적 영역에서 상황은 매우 다르다. 제2차 대전 이후에 소위 WASP 체제의 붕괴는 미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경제생활에서 개신교적 지배가 와해되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기업세계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영향력을 유지하지만, 그것은 자의식적인 경건주의적 방식에 그칠 뿐이다. 사업과 상업 모든 영역에 기독교 신자들이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지만 그것의 경제적 영향은 미국 자본주의의 최정상이 아니라 중산층에서 미약하게 감지될 뿐이다.
그렇다면 문화영역에서는 어떤가? 미국 기독교의 문화적 영향력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출발점은 신앙에 기초한 후원의 규모와 방향을 관찰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람들이 문화 경제의 주된 자원들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표면상으로는 신앙에 기초한 자선사업은 매우 인상적이지만 종교적 기부의 80% 이상이 재단이나 기업 후원보다 개인후원이다. 그리고 이런 개인후원의 대다수는 다양한 사역과 목적을 위한 소액의 후원들이다.카톨릭 재단 중 대부분은 교회와 교구, 종단, 그리고 신학교와 중고등학교, 수도원 등의 가톨릭 교육에 많은 기부금을 낸다. 또한 사회봉사단체에 전달되는 기부금도 상당하다. 복음주의 재단들의 경우 기부는 주로 선교사역과 복음전도, 복음주의 대학과 신학교, 구제, 개발, 그리고 사화사업 관련 복지기관에 집중되어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기독교 재단들이 총2억달러 이상을 예술과 문화에 기부한 반면에 카톨릭과 복음주의 재단은 겨우 천만달러를 예술과 문화에 기부한 것이다. 특히 기독교 재단들이 뛰어난 지성인, 예술과, 사회혁신가를 지원하는 장학제도는 전혀 없다. 이런 검토가 체계적이거나 포괄적이지는 않지만 기독교 공동체 내의 문화 생산 중심지에서 문화자본을 개발하려는 자원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국의 식민지 시대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WASP체제 하에서 주도적인 문화생산 기관들은 역사적 기독교의 특정한 전제와 이해를 반영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의 문화 생산 기관들에서 지배적이진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문화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교회는 물론이고 대학 및 사립 및 공립학교 모두 자의식적이고 분명한 개신교적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문화생산 기관들에서 WASP의 지배력이 쇠퇴해왔다. 여기에는 복잡하고 다중적인 이유들이 있지만 아마도 가장 명확한 설명은 뉴스미디어, 영화, 텔레비전, 대중음악, 인터넷 등을 포함한 문화 산업 일반의 기하급수적 성장과 복수화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주류 개신교 정체성의 독특성은 1960년대 이후 해체되었다. 현재 주류전통의 문화 생산은 교단과 초교단적 기구들 내에 존재하며 자신의 내적 필요와 이해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한때 중요하고 왕성했던 공적 목소리는 이제 너무 왜소해져서 자신의 구성원들 밖에서는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카톨릭교회 내의 문화 생산은 배타적이진 않지만 주로 자신의 평신도 구성원들을 대상하는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하지만 카톨릭은 자신의 영역밖의 더 넓은 세상과 더 높은 지적, 문화적 생산 영역에서 다른 기독교 전통보다 더 성공적이었고 더 훌륭하게 통합되어 있다.
현대 복음주의 세계의 많은 부분이 19세기 중후반 주류 개신교 기관들의 세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했는데 특히 유명한 복음주의 대학들이 그렇다. 학교들은 거의 절대적인 재정적 후원을 복음주의 공동체로부터 끌어오고 있다. 하지만 학문적 기관으로서 학생들과 교수들은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 그들은 세속의 학문적 전통에 의해 형성된 학문과 경력 이동의 기준과 자신이 속한 신앙공동체에 대한 헌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들이 이중으로 주변화되었음을 발견한다. 특히 그들이 학문에서 기독교적 독특성을 추구하는 한 그들은 보다 커다란 지적문화로 부터 주변화된다. 또한 그들은 그 공동체 내의 오래된 반지성주의적 전통 때문에 복음주의내에도 주변화된다. 문화 생산의 일반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에너지 대부분을 비슷한 제도들의 구조를 형성하는데 투자해왔다. 그들은 책과 잡지와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수억 달러를 생산해 내면서 대단히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 생산물들은 거의 배타적으로 신자들의 내적 필요에 맞춰져 있다.이런 폐쇄성은 매우 심각해서 복음주의 세계는 외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그 안으로 침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복음주의자들은 신앙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에 배타적이지 않으면서 공유된 삶의 일반적 언어로 제공해줄 문화가 별로 없다. 또한 그들의 문화적 생산은 문화 생산의 더 넓은 영역의 중심보다는 주변에 더 가깝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 세계에서 문화생산은 압도적으로 대중을 지향한다. 대체로 복음주의 문화생산의 대중적 성향은 상업주의의 가장 천박한 표현과 시장도구주의의 가장 조잡한 형태를 반영한다.
중요한 것은 제도이다. 1960년대 이후 현대 기독교의 어떤 운동도 탁월한 방식으로 예술과 인문학 학문 등을 창조하거나 공헌하여 조직해내지 못했다. 곧 그들은 그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 전통을 명확하게 표현하거나 전통의 전제와 암묵적으로 양립하거나 반영하는 구조들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리고 가장 역동적인 문화경제를 소유해온 복음주의 운동이 그런 노력에 대한 관심이 가장 적었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과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미국에서 기독교의 현존은 중산층이 중심이 된 현존이었다. 기독교의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대의에 힘을 불어넣는 자본은 일차적으로 일반 신자들의 십일조 헌금을 통해 형성된다. 미국 기독교가 축적한 엄청난 양의 정치자금은 일차적으로 기독교 압력단체 속에 그리고 그 집단이 서민과 중산층, 교회 유권자들을 동원하는 능력속에 존재한다. 오늘날 미국에서 기독교 문화자본의 활력은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보다 회중석의 보통 사람들 속에, 문화생산의 중심부보다 주변에, 특별한 것보다 대중적 취향 속에, 지성인보다 중급지식인들 속에 그리고 이론적 상상적인 것 보다 실천적인 것을 지향하는 속에 존재한다.
문화경제란 측면에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문화생산의 하위 및 주변 영역에서 제도적 힘과 활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문화 속에서 별 역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충분히 믿지 않거나 충분히 노력하지 않거나 혹은 충분히 기독교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문화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독교의 문화생산 기관들은미국의 문화형성 경제 속에서 대체로 소외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의 문화자본은 최고에 달하지만 커다란 문화 속에서 힘이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서 강력한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일하거나 공통된 의제를 가지고 긴밀하게 협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단히 높은 수준의 사회적, 경제적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이 높은 수준의 문화자본과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중요한 문화적, 사회적 방식으로 문화생산의 중심기관들 속에 존재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 결과 미국 기독교가 축적해온 문화자본이 가장 중요한 곳에서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앞에서 나는 문화의 중첩된 분야와 사회생활의 중첩된 영역에서 활동하는 엘리트들의 네트워크가 공통된 목적으로 다양한 자원과 행동을 결집할 때, 세상을 바꿀 잠재력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국 기독교 안에서 공통된 목적을 찾는 것이 가능한가? 정치는 기독교 공동체의 어떤 부분에서 방어적 일치를 만들어낸 영역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역의 정치를 제외하면 파편화가 훨씬 더 지배적인 경향을 보인다. 분명히 그런 분열은 기독교 역사에서 더 지배적인 경향처럼 보여서 기독교 역사는 분열의 역사라고 할 정도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시간이 흘러도 연속성을 유지하기 원한다면 분열은 도전의 대상이다. 두 번째 문제는 오늘날 미국 기독교인들이 많은 부분에서 시대 정신에 붙잡혀 있다는 것이다. 소비주의, 개인주의,. 그리고 치료적, 경영적 이념들의 영향이 과도하여 기독교 운동의 권위와 전통을 붕괴시키고 있다. 미국의 기독교는 근대 세속문화의 거대한 제도들에 저항할 수 있는 자원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는 하나의 문화로 강등되었을 뿐 아니라 대단히 허약한 문화가 되어버렸다.그래서 미국 기독교가 건강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더 큰 문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당분간 미심쩍어 보인다.
1부 7장 창조 명령에 대한 찬성과 반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와 관련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창조명령이다. 실로 이 명령을 완수할 때에야 신자들은 하나님이 본래 의도하셨던 모습과 더욱 닮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명령이 특정한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향한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 모두가 참여자이며 모두가 하나님 말씀에 따라 세계를 형성하고 재형성하는 창조적, 갱신적 작업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세상의 창조와 재창조속에서 하나님과 함게 사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외모, 재능, 업적, 재산, 권력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향해 갖는 복음의 호소력이 복음을 그토록 급진적으로 만든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인 섬김의 윤리와 관계가 깊다. 이 윤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가난한 자, 과부, 고아, 약자, 강탈당한 자의 필요를 섬기라고 명령한다., 이 윤리는 신분과 재산, 권력이라는 거짓 우상들을 피하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여기는 일체의 생각을 멸시하라는 권면을 담고 있다. 것이 없다면 기독교는 혐오스러운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엘리트주의가 기독교와 그토록 상반된 이유다. 엘리트주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존엄 면에서 평등하지 않다는 암묵적 견해속에 내포된 배타성을 토대로 한다. 동시에 기독교적 증거와 일치하는 포퓰리즘은 흔히 높고 낮음,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않는 억압적 평등주의로 변질될 수 있다. 더 심각한 경우 그것은 가치와 질, 의미의 권위나 위계를 인정하지 않는 다수의 독재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포퓰리즘이 일종의 문화적 평등주의가 될 때 탁월해야 할 아무런 동기나 자극도 없어진다. 이것이 우리를 핵심적인 딜레마로 이끈다. 포풀리즘은 미국 기독교와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표퓰리즘은 세상의 변혁을 위한 중요한 동력과 부조화를 이룬다. 탁월함을 추구하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엘리트주의와 포풀리즘 사이에 불가피한 긴장이 생기는 것이다.
창조명령은 필연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문화에 변혁적으로 관여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이런 관여는 본질상 중립적일 수 없고 권력의 문제 및 작동을 내포한다. 권력문제는 피할 수 없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권력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내가 문화변혁과 관련해 제시한 분석을 보고 어떤 이들은 신앙에 기초한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해 정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대안적 방식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러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완전히 잘못될 수도 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창조명령에 대한 철저한 왜곡이며 기독교인들은 창조명령에 대한 이런 해석을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 권력과 정치에 대한 현대 기독교적 이해들은 오늘날 미국에서 기독교를 끔찍하고 부적절하며 비효율적으로 만드는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건강한 대안이 아니라 후기 근대문화의 최악의 요소들이다. 나는 창조명령에 대한 최고의 이해는 세상 자체를 바꾸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서구문명 구하기 혹은 미국 구하기, 혹은 문화전쟁에서 승리하기, 이런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세상 변혁과 관련된 이런 종류의 논의는 대부분 역사를 통제하겠다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그 사상은 사람들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사람들이 인간적 사건들 속에서 그런 계획들을 실현시킬 만한 힘을 갖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우리 문화에서 항상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앞에서 다룬 문화 지형은 보다 커다란 문화속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문화의 주요 영역에서 그런 영향력의 부재를, 그리고 영향력과 별도로 신실한 현존이란 소명의 포기를 보여준 것이다. 권력장악에 대한 새로운 방식의 해독제는 신실한 현존(faithful presence)에 대한 더 나은 이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신학이 사회이론과 정반대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교회의 소명이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증인과 구체적 증거가 됨을 인식하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하는 새 창조(갈6:15)는 우리 안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작동하는 하나님나라이며, 세상과 다른 백성과 세상에 대한 문화가 현재의 문화 안에서 통합되는 것이다. 철저하게 대안적인 문화는 삶의 전 영역에서 신실한 현존 없이는 결코 출현할 수 없다.신실한 현존은 문화생산과 사회생활의 상층부에서 활동하는 대항적 지도자들의 네트워트(공동체)를 포함한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접근하기 어려운 활동영역이지만 교회의 갱신과 문화 참여를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부 1,2장
2016-04-16 20:12:23
2부 1장 권력의 문제
창조 명령은 기독교 공동체에게 영광과 수치의 원천이다. 그것은 신자들이 창조명령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영광의 원천이다. 심지어 타락한 상태에서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적 본성을 반영하고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섬길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다. 그러나 그 잠재력을 착취와 파괴로 남용하게 될 때 창조명령은 수치의 원천이 되어버린다. 창조명령이 수치의 원천이 되는 결정적 요인은 기독교인들이 창조명령을 이루기 위해 권력을 사용하여 세상에 관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선한 목적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열망하는 것을 성취할 수 없는 전략을 붙들고 살아왔다. 우리는 변화시키고 싶은 세상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또 그것이 실제로 어떻게 변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설령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미국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리에 전혀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할 수 있는 전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이것은 최악의 결론이다. 그런 결론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며 또한 그런 결론은 후기 근대세계의 더 크고 지배적인 문화에서 가져온 권력 이해를 토대로 작동하기 때문에도 틀렸다. 기독교인들은 권력에 대한 보다 명료하고 나은 이해에 도달해야 한다.
2부 2장 미국 문화에서의 권력과 정치
사회괴학의 오랜 질문 중 하나는 사회들이 어떻게 공존하는가이다. 이 질문의 중요성이 미국에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미국에는 감수성, 성향, 태도에 관한 최소한의 합의도 힘들고 공통된 신앙, 이상, 헌신도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적이고 의미있는 전통이나 공적 제의도 없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를 결집시키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 대답은 바로 권력, 즉 강제력의 행사다. 정치화는 공적 문제의 해법을 찾기 위해 법과 정치에 주목하는 것이다. 정치가 우리 시대에 너무 중요해져 지금은 기관과 집단의 이슈가 국가와 법, 절차와 관련해 정의되고 있다. 이슈도 법과 공공정책의 인정을 받을 때에만 합법성을 획득한다. 간단히 말해 국가는 점차로 공적 행복의 화신이 되었고 국가의 법과 정책, 절차가 집단생활의 이슈를 이해하는 지배적 틀이 되었다. 이것이 정치화의 핵심이며 그것의 영향은 너무 낙대하여 우리 언어와 상상력, 기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정치의 언어가 우리의 공통 생활, 공적 목적,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이해의 더 많은 부분을 구성하게 되었다.
정치화는 이념이 공적 삶에서 기능하는 역할 속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더 큰 문화 안에서 중요한 신앙과 기질의 얄팍한 합의에 대한 반응으로 사회적 유대를 위한 토대와 구조로서 정치를 향한 방향전환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화는 기대와 행동의 틀은 제공하지만 핵심적 내용을 재공하지는 못했다. 다양한 사회에서 이념적 양극화는 그 내용을 제공하려는 경쟁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사회의 모든 분파는 선에 대한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사회 전체에 부여하는 수단으로서 국가 권력의 후원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시민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이 어느정도 정치화되고 또 이념적 갈등에 의해 유지되는 부분적 이유다. 이런 식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공적문제나 이슈를 비정치적인 방식으로 다룰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가 공적인 것을 그렇게 가정하기 때문에 정치와 공적인 것이 융합되어 버렸다. 그래서 정치영역이 공적생활의 일부로 간주되는 대신, 모든 공적 생활이 정치적인 것으로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공적인 행위에 주어지는 일차적 의미는 정치적 의미의 중요성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정치와 정치과정에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기대를 부여해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정치를 우리의 공통문제를 다루는 주된 도구로 간주하며 정치가 실제로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기대한다. 모든 것을 정치화하려는 최근 십여년간의 역사적 경향은 공적생활의 복잡성과 풍부함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공통된 문제와 이슈를 다루는 대안적 방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축소시켰다.
민주주의적 이상과 원칙, 논리는 공공생황의 정치와 현상을 이해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준다. 하지만 여기서 벌어지는 정치화는 대부분의 사회생활에서 최종적 중재자가 국가의 강제력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에 치장을 해도 사회생활의 모든 측면은 언제나 지배와 권력으로 귀결된다. 모든 것의 정치화는 공공문화의 경쟁자들 사이에 자기 식으로 타자를 지배혀려는 경쟁의 간접적 잣대이다. 우리 시대는 법률적, 정치적 수단을 통해 타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고 그들과 타협을 추구하거나 설득하기보다 위협하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삶에 비애감을 더하는 것은 니체가 르상티망(resentiment)라고 불렀던 것의 현존이다. 르상티망은 상처 혹은 감지된 상처 이야기, 즉 자신이 부당한 일을 당해왔거나 당하고 있다는 강한 믿음에 근거한다. 이것의 뿌리는 한 집단이 지니고 있는 권리의식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그 상처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고소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심지어 보복하려 한다. 그런 후에 르상티망은 부정의 담론으로 표현되어 적들을 비난하고 모욕하며 그들을 정복하고 지배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타자를 이해하기 위환 틀로서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며 자기 입증과 자기 이해의 틀로서 정치를 바라본다. 미국 민주주의는 점증적으로 하나의 정치문화, 즉 지배의지를 인정하는 의미의 틀 안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역으로 이것은 담지된 오류들에 대한 공포와 분노, 부정 복수의 정치 심리학에 의해 가열된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시만으로서 정치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지닌 모든 법적 권리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의심의 여지 없이 그들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 권리를 활용한다. 분명히 기독교인들은 미국역사에서 미국 정치생활의 많은 부분을 형성해 왔고 그것은 미국인들의 자랑스러워하는 유산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 정치 문화의 현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바라보고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입장을 정치적으로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신앙은 너무도 정치화되었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의 대표적 입장은 보수적, 진보적 그리고 신재세례파적 입장은 결과적으로 정치신학적이고 그들이 대표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이상 및 공적 정체성에 발언권을 부여하는 강력한 신화들로 포장되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입장들이 가진 특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공적 생활을 향한 그것의 성향이다. 우리의 일차적 관심은 어떻게 다른 관점의 기독교인들이 더 큰 공적 문화와 관련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부 3장
2016-04-16 23:44:32
2부 3장 기독교 우파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그들 자신들의 모습을 반영하기를 원한다. 그들이 상상하고 원하는 사회생활의 표상은 그들이 사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개별적, 집단적 열정과 이해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원칙들로 표현된 이상이다. 그것은 그들이 독특한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 인간적 번영의 비전이다. 현재의 세계 질서에서 그들이 존중하는 많은 원칙들이 도전을 받고 있다. 대체로 보수주의자들은 사회의 바른 질서에 관심을 갖는 신화적 이상에 영향을 받는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논리와 철학 전통에서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가져온다. 미국 건국의 시조들은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거나 기독교 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건국의 정치적 문서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반영한다. 이렇게 믿는 많은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직설적 표현을 피하면서도 기독교 신앙이 미국 역사의 공적영역에서 활발하게 존재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런 관점에서 공적 영역에서 종교의 활발한 역할을 찬미하는 유산이 노예제 폐지운동, 금주 운동,시민권 운동을 통해 근대로 확장되었고 낙태, 동성애 등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현재 이어지고 있다. 과거처럼 지금도 성경적 명령과 공공정책의 추진 사이에는 직접적인 논리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신앙이 미국의 위대함에 영적 도덕적 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보기에 미국은 분명히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보기에 이런 도덕적 쇠퇴의 이유는 종교적인 모든 것에 대한 점증하는 적대감, 미국의 세속화다. 한 기독교 활동가가 말했듯이 미국의 수도 깊은 곳에서 미국 문화는 종교적 자유부터 생명권까지 사회를 재정의하기로 결심한 세속적 운동에 모두 납치당했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이 받은 상처는 더 이상 무시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이제는 노골적인 차별로 나타나고 있다. 종교와 전통적 가치들에 대한 공적 표현과 인정이 금지되었고 기독교적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기독교적 투표를 억누르려고 한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직면한 위기를 담아내기 위한 이야기에 주목한다. 이야기를 항상 사람들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가장 감동적인 방법이다. 국가와 문화 신앙에 대한 그들의 피해의식은 대단하다. 그들이 보기에 상황은 점점 더 불공평해지고 있으며 두려움은 모든 전선에서 발견된다. 그들에게는 오직 두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사회적 해체의 길을 선택하느냐이다. 상황의 심각성은 결정을 요구한다. 이때 행동은 비도덕성과 부모의 무책임이 범람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과법을 바꾸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와 신앙 신념을 위해 투표하려고 한다. 릭 스카보로는 기독교인들이 투표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한다. 기독교 우파 안에 수많은 다양한 정치조직들도 등장했다. 일반적으로 이 기관들은 공적 생활, 전통적인 핵가족, 전통적인 도덕성에서 종교의 중요한 역할을 옹호한다. 그들은 효과적인 정치적 행동을 위해 기독교인들을 교육하고 동원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들의 야망은 이전 보다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행정 공무원이 되고 의회와 행정부에서 더 맣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들의 열망은 다시 한번 권력을 차지하고 그곳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하는 문제들의 처리 수단으로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이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특징은 대단히 친공화당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표면적으로 비당파성을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비당파성을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대단히 당파적이다. 두번째 특징은 그들이 미국 정치와 문화를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명백한 열망과 야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우파 집단의 모든 소원은 공공생활을 그들의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의도는 미국의 가치를 탈환하는 것이며 새로운 남북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정치와 문화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겠다는 열망과 야망은 때때로 요구와 위협으로 확대된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정치에 거는 희망은 정말 놀랍다. 그들은 정치적 행동을 통해 미국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로 만든 유대-기독교 가치를 보존하고 방어하며 미국 문화를 갱신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이 모든 일은 기독교인들의 투표로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들이 놓칠 수 없는 것은 회복된 미국에 대한 열망인데 여기서 회복은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으로 회귀를 뜻한다.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과 미국의 신화적 관계를 다양하게 이해하지만 그 관계 자체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운명은 미국의 운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특이한 동맹은 양자간의 이해가 중첩되는 정당 의제에 힘을 실어주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공화당 정치가들ㄷ과 보수적 기독교 지도자들이 서로의 힘을 공동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최근들어 기독교 우파 안에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과거의 지도자들이 물러나고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았던 다른 지도자들이(릭 웨렌, 빌 하이벨스) 주요 인물로 등장한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 대중들 사이에 종교의 정치참여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기독교 우파의 정치적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2004년 대선의 승리, 바로 그때 이 운동은 미국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심각한 적대감을 초래했다. 보수주의자들의 정치 운동은 대중들에게 강력한 반성직주의를, 보수적인 젊은 신자들에게는 심각한 반감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젊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정치적 좌경화 현상이 일어났고 그들은 2008년 선거에서 버락 오바바를 열정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우파가 심각한 위기와 변화의 기로에 섰음을 의미한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성직자들 가운데 정치 자체로 부터 거리를 두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정치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더 큰 문제는 문화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우파 안에서 문화라는 보다 넓은 의제를 가진 다양하고 새로운 그룹들이 많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그룹들과 이미 입지를 굳힌 기독교 우파들 사이에는 지도자와 논리 면에서 분명한 연속성이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기획에서 보다 야심찬 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관심이 있는 기독교 단체들의 동맹이다. 그 동맹은 하나님나라와 그 복음의 소망을 교회와 공적 광장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전략을 수립했다. 그 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교회부흥, 문화갱신, 사회의 새로운 대각성운동을 포함하여 역사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한 촉매가 되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운동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선한 의도를 발견한다. 그 전술들은 기독교세계관과 문화를 보다 폭넓게 아우를 정도로 확대되었지만 정치 권력을 사용하려는 현실적 논리는 확립된 기독교 우파의 오랜 접근법과 동일하다. 그런 운동의 지배적 도구는 여전히 부정의 방법이다. 이것은 그들의 정체성, 목적, 행동전략을 정의하는 결정적 신화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 신화가 계속하여 문화참여를 위한 논리, 언어, 대본을 형성한다. 기독교적 사회 참여의 이상을 승인하는 신화가 바뀌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부 4장
2016-04-17 16:07:10
2부 4장 기독교 좌파
기독교 우파처럼 기독교 좌파도 신화와 역사를 읽음으로써 작동되고 정의된다. 보수주의자들이 올바른 질서에 대한 신화적 이상에서 영감을 얻고 근대사를 질서에서 무질서로의 퇴행으로 이해한다면 진보주의자들은 평등과 공동체란 신화에서 영감을 얻고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 투쟁으로 역사를 이해한다. 현대적 표현 안에서 진보정치는 계몽주의의 특별한 유산과의 관계 속에서 형태를 갖추고 진화했다. 그것은 프랑스 대혁명의 함성, 즉 자유, 평등, 박애라는 삼중적 이상 속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진보적 사전에서 핵심어이자 최고 덕목은 정의다. 종교적 성향의 진보주의자들에게 자유는 대체로 해방으로 이해되며 매우 자주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가 부자들의 경제적 지배와 착취로부터의 자유를 얻는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 진보주의자들이 호소하는 성경적 전통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 소외된 자를 멸시한 것을 정죄한 예언자적 전통인데, 이런 전통은 신약성경까지 확장된다. 그들에게 영감을 제공하는 것은 단지 예언자적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의 종말도 그러하다. 기독교 진보주의자들에게 에스카톤(종말)의 비전은 그 자체가 불변의 이상이다. 그들이 열심히 실현하려는 것이 에스카톤의 비전이다. 그들에게 에스카톤은 정의, 평화, 평등, 공동체가 궁극적인 완전의 상태로 존재하는 천국의 실현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그들 신화의 지배적 개념에 따라 선택적으로 말하듯이 진보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의 기독교 좌파의 가장 강력한 현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해방신학과 그 영향을 받은 다양한 형태의 해방운동으로 나타났다. 해방신학은 기독교 신앙을 가난한 자들의 고통과 투쟁을 통해, 억압받는 자들의 해방자 예수의 인격을 통해 해석한다. 그것은 정통 혹은 바른 신앙보다 복음에 대한 정치적 해석에 기초한 정행 혹은 바른 실천을 강조한다. 이런 식으로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와 긴밀하게 연계되었고 심지어 제3세계의 억압적인 정권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호소하던 공산주의 운동들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해방신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절정에 이른 후 인기와 권위가 쇠퇴했으며 미국 주류 개신교의 행동주의도 가시성과 영향력 면에서 약화되었다. 그러나 21세기 초반에 기독교 좌파가 다시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런 부활은 주류 진보기구들이 아니라 진보주의적 복음주의자들의 정치적 행동주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운동의 가장 주목할만한 인물은 짐 월리스였다. 복음주의 좌파는 오랫동안 분투해왔던 정치적 기반을 마침내 확보했다. 기독교 우파와 비교할 때 기독교 좌파의 조직적 자원은 미약한 수준이지만 그들은 수십년간 갖지 못했던 발판을 마련했다.
기독교 좌파가 가장 우려하고 가장 제거하고 싶은 해악은 우리 사회와 세계가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끼치는 해악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복음주의적 진보주의자들을 자극해온 것은 넓은 범위의 빈곤이다. 비록 가난한 자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정치적 이슈를 지배하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은 환경문제, 전쟁, 에이즈, 이민 문제까지 확장된다. 짐 월리스는 모든 프로젝트, 정책, 계획은 그것들이 힘없는 자에게 힘을 부여하고 지구를 보호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육성하는지 여부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 좌파들 안에서 다양성이 있지만 지난 세월동안 그들의 연대를 가능케 했던 핵심적 촉매는 기독교 우파의 지도자, 조직, 이념, 이슈에 대한 적대감이었다. 이 적대감의 강도는 기독교 우파의 팽창과 수축에 따라 부침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좌파의 눈에는 기독교 우파가 기독교를 제대로 대표하지 못하며 오히려 신앙에 해를 끼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보기에 복음주의 신앙은 기독교 우파에 납치당했고 수준이 떨어졌으며 그 결과 신앙과 예수의 가르침은 왜곡되었다. 기독교 좌파 내에는 이런 상황에 대해 깊은 분노와 적대감이 존재한다. 그들은 미국에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지만 기독교 우파는 이런 권력과 불평들을 합법화했다고 말한다.
기독교 좌파가 볼 때, 문제는 종교와 정치권력 사이의 위험한 관계가 아니라 자신들이 정치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에 대한 것이다.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파가 국가와 기독교 신앙에 미친 해악을 고려할 때 분명한 해법은 우파의 손에서 권력을 빼앗아 오는 것이다. 가장 우선순위는 기독교를 왜곡하는 사람들로 부터 기독교를 되찾아 오는 것이다. 그들은 궁극적 목적은 정치를 통해서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소저너스 공동체는 투표라는 단순한 행위가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가장 강력한 행동중 하나라고 조언한다. 그 전제는 신앙인들이 사회변화의 중요한 통로인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동기의 진실함과 그 주장의 고결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신앙과 국가를 되찾아야 한다는 그들의 소명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 우파에서 발견되는 기본적 권력의지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제가 비당파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당파적 의제인 것이 사실이다. 물론 그들이 제공하는 관점은 세속적 좌파 이념의 대안은 아니지만 그런 세속적 좌파의 담론을 신앙에 근거해 확장하고 있다. 그들의 이상은 저항할 수 없는 바람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운동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야기하는 틀이 국가며 정의와 평화의 목적을 성취하는 지배적 도구는 정치다.
짐 월리스는 기독교 우파가 성경적 기독교보다 시민종교를 확신시키는데 관여하고 있다고 불평했는데 이것은 정당한 지적이다. 시민종교는 국가의 시민적 신조와 통합된 종교적 가치의 혼합물이며 그 안에서 교회의 생명과 사명은 국가의 그것과 일치된다. 하지만 복음주의 좌파 역시 자신들이 기독교 우파를 공격했던 바로 그런 정치에 관여하고 있다. 짐 월리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정치"에서 구약성경의 예언적 진술들을 주장하며 그것을 국가 정책에서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짐 월리스의 주장은 미국과 고대 이스라엘을 혼동하는 것이며 근대 미국 민주주의의 정치적 동력과 고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신법을 혼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지혜가 정치적 가치 형성에 부적절하다는 말이 아니라 월리스의 이런 정치적 판단은 진보종교를 좌파의 시민종교로 변화시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이 기독교 우파가 국가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제를 실행하려 비난할 때 그들도 똑같은 기준에 의해 비판받을 것이다. 정치와 사화운동을 통해서 사회변화를 추구하는 것에서,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혼합하는 것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것에서, 신학과 국가적 이해의 정체성을 혼동하는 것에서, 복음주의 좌파는 기독교 우파를 흉내낸다. 물론 그들의 메시지는 분명히 다르고 조직 규모와 대중적 호소력, 매체에 접근하는 방식도 다르지만 참여하는 틀, 방법, 스타일은 매우 비슷하다. 보수적 기독교가 한동안 공화당에 이용당했듯이 진보적 기독교도 민주당의 권력추구 과정에서 이용 당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부 5장
2016-04-17 21:59:46
2부 5장 신재세례파
기독교 좌파와 신재세례파는 공통점이 많다. 그들은 규제되지 않는 시장경제의 인간적, 환경적 결과들에 대해 적대감을 공유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논리, 조직구조, 내재된 도덕적 특성에 대한 적대감이다. 또한 그들은 중산층으로서 문화양식을 공유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담론은 기독교 우파에 대한 동일한 경멸을 반영한다. 신재세례파가 제시하는 정치신학은 기독교 우파와 좌파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기독교 우파의 설명이 위험하지는 않지만 역겹다고 생각하거나 기독교 좌파의 이야기가 별로 설득력이 없고 부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기독교 좌파와 신재세례파의 주된 차이점은 그들의 국가관이다. 기독교 좌파는 강력한 국가를 원하고 국가에 압력을 가해 법과 정책 분야에서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고 한다면 신재세례파는 국가의 구조, 행동, 권력 사용을 기본적으로 불신하면서 국가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신재세례파를 고무시키는 신화는 참되고 진정한 신약 기독교와 초대교회의 이상이다.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기원한 재세례파 운동의 핵심이었다. 1세기 기독교가 국가와 무관했던 방식 그리고 신앙에 적대적인 정치 환경에서 형태를 갖추었던 전통이 재세례파의 등장과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신화가 재세례파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과의 사회적 정치적 관여에 대한 비전에 대단히 중요했고 지금도 그렇다. 신제세례파 비전의 발전과 그것을 지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메노파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다. 비록 근본적으로 기독교 좌파나 우파와는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세계변혁에 대한 신재세례파의 헌신은 기독교 좌우파 만큼 강하다. 그러나 신재세례파에게 세계변혁의 본질과 범위,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참여를 정의하기 위한 중요한 참조점은 예수의 생애와 그의 승천 이후에 출현한 교회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은 현재의 세계질서가 뒤집어질 것이란 선언이었다.
신재세례파에게 콘스탄티누스주의는 교회사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양한 얼굴의 이단이다. 그들은 고대 후기의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의 우호적 지위에서 테오도시우스 치하의 제국종교로 이동했다고 말한다. 또한 콘스탄타누스주의는 16세기 종교개혁에서 재발명되어 지역적 수준에서 존재하면서 다양한 기독교 국가들간에 벌어진 전쟁의 토대가 되었다. 심지어 콘스탄타누스주의의 오류는 교회와 국가의 일치가 형식적으로 해체된 민족주의 시대에도 또 다시 등장했다. 여전히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증거와 국가 권력의 결합을 시도할 정도로 고대 콘스탄타누스주의 이단을 재구성하고 영속화하려고 한다. 그들이 보기에 교회가 정치적 기성 체제와 형식적 동맹을 기피할지라도 여전히 시민사회 내에서 활동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콘수탄티누스적 동맹에 관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민사회는 국가의 강제적, 타협적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는 국가를 초월하여 근대 후기의 모든 지배적 제도들(가장 중요하게는 세계적 자본주의를 아우르는 제도들)의 복잡한 혼합체와 동맹을 맺는 방식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권력은 시장에 비해 쇠퇴하는 반면에 국제자본주의와 이것을 주도하는 기술혁신이 국가보다 우리를 강력하게 지배하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는 미국 기독교가 자본주의 논리와 관행을 자신이 섬기려는 세상에 해를 끼칠 정도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데서 잘 드러난다. 신재세례파는 주류의 교회가 끼친 해악을 콘스탄티누스적 오류라는 논리 속에서 이해한다. 그들이 보기에 오늘날 문제는 미국 기독교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민주주의와 소비자본주의의 정치 경제학 모두에게 이중적 충성을 바치는 것이다. 가장 터무니 없는 해악은 콘스탄티누스적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카톨릭과 개신교의 보수 신학자들에 의해 자행된다.
신재세례파적 관점에서 교회가 세상에 적절히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백성 간에 사회관계를 재구성할 새로운 도덕적, 영적, 정치적 질서의 서막이었다. 그것은 삶의 새로운 길을 인도하는 새로운 형태의 인간 공동체를 향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세상에 관여하기 위한 그분의 적절성과 과제수행을 위한 예수의 중심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 즉음, 부활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위한 설명일 뿐 아니라 교회의 존재를 정의하고 교회의 행동을 위한 최종 기준이다. 요더가 말했듯이 예수는 주님이시라는 진술은 내적 경건이나 지성 혹은 사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우주의 본질과 구조에 대한 것이다. 특히 예수는 당대의 통치권력과 대안적 관계를 형성했고 보다 중요하게 권세와 정사들에 도전하고 극복했다. 정사와 권세라는 개념은 신재세례파 전통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것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생각, 행동, 관계의 제도적, 체계적 패턴들과 그것들에 생기를 부여하는 영적 영역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권세들을 극복했다면 교회의 과제는 그것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일차적으로 하나의 대안적 공동체로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교회론은 세상과의 관계가 일어나는 형식이다. 교회가 진실로 그리스도를 닮을 때, 그들의 행동은 물론이고 그들의 존재 자체가 지배 세력에게는 위협적일 것이다. 교회가 교회일 때, 교회는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불순응 때문에 세상의 비난과 공격을 당할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질 때 신앙 공동체는 그것을 견뎌야 한다. 이것은 비폭력에 대한 헌신을 내포하고 있다. 신재세례파에게 평화주의는 기독교적 제자도의 근본적 징표이자 복음의 핵심적인 윤리이다.
신재세례파에게 국가는 자기 합리적 폭력의 자리이며 국가의 존재 자체가 강제력의 행사로 정의된다. 평화주의는 정사와 권세를 향한 일반적 경향 속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비폭력에 대한 헌신과 윤리적 명령은 일체의 강제에 늘 저항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세례파 전통이 근본적으로 자유교회 모델의 자발적 연합을 추구하는 이유다. 어떤 정부나 기업에서 지도력의 위험은 권세와 폭력에 공모할 수 있다는데 있다. 요더는 하나님이 세상에 전해주신 정치적 혁신은 지배하기 보다 섬기는 사람들, 고통을 안겨주기 보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사회적 차이를 강화하기 보다 그것을 극복하며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신재세례파 신학과 사회비평 속에는 기독교적 계시와 세상의 지혜 사이에, 그리고 교회와 지배 문화 사이에 강력한 대립이 내재해 있다. 이런 윤리적 방향에 정보와 맥락을 제공하는 신학적 신념은 교회와 세상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관점이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세상도 종말론적으로 이해된다. 이 시대 혹은 세상은 죄로 가득하고 인간중심적인 반면, 다가오는 시대는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 방식으로 역사 속에 진입한 실재다. 교회는 이 다가오는 시대를 미리 맛보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는 본래적 목적에 의해서 나그네, 하나님의 식민지, 영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신재세례파는 신앙 공동체가 자신만의 폴리스라는 사실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강조한다. 교회에 대한 이런 강력한 입장은 타락한 세상에 대한 강력한 입장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립은 16세기 재세례파의 경우처럼 신재세례파의 구속적 역사관의 핵심이다.
이랗게 날카로운 이원론에 영감을 불어넣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게 원하시는 모든 것이 되고 싶은 열망 그리고 교회가 세속성에 오염될 수 있는 공포다. 여기에는 분리주의적 충동이 작용한다. 그러나 신재세례파들은 이 문제를 접할 때 마다 내면(교회)에 대한 집중이 외적 결과(세상의 변혁)을 낳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참으로 교회는 사회적 변화의 도구로 작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단지 간접적으로만 그렇다. 그들은 교회의 최고의 과제는 교회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효용성, 영향, 변화는 교회의 사회참여를 정의하는 목적이 아니다. 교회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위해 자기 효용성과 지능을 포기하는 자리에서 가장 효과적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는 세상을 섬기기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복음이 다른 구조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우선적인 사회구조다.
역설적이게도 교회가 세상에 어떻게 관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신재세례파의적 견해의 지배적 언어와 일차적 참조틀은 기독교 좌파 및 우파와 비슷하다. 그 언어와 틀은 정치다. 그들에게 기독교 윤리는 예수의 정치학으로 전화되며 예수 자신이 정치적 인물이자 급진적 정치 행동의 모델이었다. 그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는 하나의 정치적 실체이고 기독교는 대체로 정치의 문제이다. 기독교 좌우파의 경우처럼 신재세례파는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요더는 한 발 더 나아가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사회를 지배하는 권세와의 도덕적 충돌의 예상된 결과였다. 기독교 좌우파는 십자가를 정치화하긴 하지만 사회적 불순응에 수반되는 고통을 기독교인들이 의미있게 고통당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삼지 않는다. 이 점에서 신재세례파들은 근본적으로 정치와 정치적 행동의 본질을 재정의하고 있다. 문제는 정치라는 언어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고 그 언어의 사용이 순수하지 않다는데 있다. 비록 교회에서 정치와 정치적 행동의 본질이 현 시대 지배세력의 전복이지만 정치 언어는 교회의 공적 증언에 여전히 의미를 제공한다. 또한 정치 언어는 교회의 공적 증언을 위한 구조를 제공한다. 권세에 대한 적극적 반대는 궁극적으로 정치, 군사, 경제 정책들의 변화를 지향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려는 열망 조차도 그 작동의 틀은 여전히 이 세상의 정치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권세에 대한 반대를 종말론적 용어로 형성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세계 참여를 더 심하게 정치화하게 된다. 국가나 시장같은 권세들을 말 그대로 악마화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여기에서 자기 정체성과 목적의 상당부분을 자신들과 그 권세들과의 우주적 투쟁으로 묘사한다는 뜻이다. 기독교 우파의 정체성이 대체로 세속주의에 대한 반대를 통해 형성되고 기독교 좌파의 정체성이 우파에 대한 반대로 부터 기원한다면 신재세례파의 집단적 정체성은 국가 그리고 후기 현대사회의 경제와 문화에 대한 반대를 통해 형성된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성은 국가와 다른 권세들의 타락에 의존하며 그것들이 더욱 확실히 부패할 수록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에 대한 그들의 비판과 왜 그토록 혹독한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들이 볼 때 세상에는 찬양할 만한 선이나 감상을 자극하는 아름다움이 없다. 대다수의 미국 교회들은 대체로 신콘스탄티누스주의, 세계적 자본주의와 생각없이 화해함으로써 부패했다. 신재세례파들은 자신들의 메시지가 예언자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의 총체적 결과는 압도적으로 분노, 비난, 부정의 메시지다. 신재세례파 전통에서 경건주의적 완전주의적 경향은 대체로 분리주의적 경향의 원천이다. 기독교현실주의를 주장했던 리처드 니버는 요더와 신재세례파들이 세상으로부터의 철수, 부족주의, 정치적 부적합성의 전략을 발전시켰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신재세례파들은 "분파적"이란 단어가 지배문화 기준의 수용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교회는 단지 세상이 이해하는 책임으로부터 철수하여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대안적 인류로 존재함으로써 세상의 방식에 근본적으로 도전을 감행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실천적 선언은 세상으로부터의 철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의 일차적이고 가장 효과적인 형태라고 주장한다. 신재세례파는 역사적 재세례파와 연속적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이 정치 언어를 사용하는 특이한 방식, 후기 현대사회에서 특정한 세속운동과의 친화성, 하나님과 이상적 교회와 상관없는 일체의 것에 대한 철저한 적대감은 신재세례파의 새로운 측면이다. 그것은 후기 현대사회의 정치 문화에 과도하게 편재해 있는 부정의 담론을 거부하기 보다 오히려 강화하는 정치신학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부 6장
2016-04-27 23:50:54
2부 6장 환상, 아이러니 그리고 비극
기독교 우파, 좌파, 그리고 신재세례파는 모두 자신들의 관심사를 정치화했고, 이것은 그들의 집단적, 공적 참여를 위한 선택의 핵심 전략이 되었다. 정치적 풍경은 늘 변하지만 특정한 기독교 조직들과 지도자들이 세상에 대한 자신들의 참여를 정치화하는 경향은 쉽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찰스 테일러의 유용한 개념을 사용한다면 그들에게 정치는 이해의 지평과 행동의 변수를 정의하는 사회적 표상(social imagery)이 되었다. 신화와 역사가 그들에게 서사적 맥락을 제공하지만 그들의 문화 참여에 대한 지배적 관점은 정치이며 그것이 기독교인들이 문제의 해법에 대해 고민하는 틀을 제공하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 우파와 좌파에게는 더욱 사실이며, 신재세례파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물론 신재세례파의 강력하고 특이한 접근법은 기독교 우파와 좌파들이 수용한 모델을 뒤집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정치는 언제나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다. 미국의 지배적 정치 문화는 분노, 부정의 담론으로 특징지워지는데 이것은 기독교의 모든 분파들 안에 존재한다. 우파와 좌파 모두 자신의 입장을 성경적 권위에 근거하고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적 이상과 관행에 호소하지만 그들의 작동방식을 특징짓는 분노는 그들을 자극하는 것이 지배의지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물론 신재세례파도 부정의 담론에 깊이 참여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지배의지는 아니다. 오늘날 교회의 공적 증언이 정치적 증언이 되었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과장이 아니다. 교회의 공적 정체성은 곧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이 되어 버렸으며 기독교 우파와 좌파 그리고 신재세례파는 모두 정치라는 프리즘을 통해 좋은 사회를 이해하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적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국가가 민주주의에 포함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지난 세기 동안 통찰력있는 정치 및 사회 이론가들은 양자 간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국가와 민주주의는 중요한 방식으로 분리되어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양자의 관계가 상호대립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론의 일반적 관점은 근대세계에서 민주주의와 국가는 서로 두 개의 상이한 실체로서 몇가지 방식은 서로 중첩되지만 종국에는 각자의 독자적 명령에 따라 작동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합법성을 추구하는 대중적 의지의 제의적 행동에 의해 작동한다면 국가는 행정적 효율성에 의해 작동하는데, 이것에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가 있다. 첫번째 함의는 국가가 유권자들의 뜻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가들이나 시민들의 정치참여가 국가에 대한 그들의 주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뜻을 다양한 정치 전문가들과 기술자들에게 굴복시키는 것임을 의미한다. 결국 대중적 주권은 우리의 기대보다 더 무력하다. 이런 관점에서 민주주의는 국가를 이끌고 지도하는 대신 국가의 관료적 필요성에 끌려간다. 두번째 함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걱정하는 문제에 정치적 해법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국가의 역할은 부분적이고 제한적일 뿐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가진 기대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다. 법이 중립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며, 법은 가치를 반영한다. 그러나 법은 가치를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가치를 주입하지도 못하며 가치에 대한 싸움을 종식시키지도 못한다. 정치는 불가피하게 권력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정치가 권력이상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정치영역에서 독립해 있는 한 영역에 의존해야 한다 그것은 정치영역으로 부터 자유로우면서도,사회질서 속에서 제도화되고 실행되는 도적적 영역이다. 문제는 정치화의 충동이 가치의 정치화로 확대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보다 고상한 정치적 실천을 위해 필요한 도덕기준의 자율성이 점차 상실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공적으로 논의되는 이상과 가치는 대부분 정치적 내용과 함의를 가지고 있다. 평등, 자유, 정의라는 가치들은 정치 영역 밖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게 되었으며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도구로 축소되었다. 아이러니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사회의 어떤 집단보다 기독교 우파와 좌파는 가치를 정치화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더 심각한 아이러니는 기독교 신앙 안에 비교적 자율적인 제도와 관행이 존재하며, 이것은 정치를 권력추구 이상의 것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이상과 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기독교의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인해 기독교 신앙은 일종의 정치이념으로 변질되었고 기독교 집단은 특수이익집단으로 축소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아이러니는, 기독교인들은 시민적 의무와 공적 책임을 표현하기 위해 투표하고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정치적 책임 사상과 관련된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교회가 아니라 국가 제도들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방편이 되고 있다. 진정한 책임은 단드시 댓가를 치뤄야 하는데, 정치 참여는 그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 수 있고, 실제로 자주 그렇게 한다.
기독교 우파와 좌파는 모두 공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으로 축소시키고 많은 인간적 경험을 정치화함으로써 정치를 세상에 대한 교회의 지배적 증거로 만들었다. 이것은 교회가 시대정신에 적응한 증거이며 기독교가 현대정치 문화의 핵심적 특징을 수용한 결과이다. 현대 정치문화는 분노와 적대감에 근거한 정체성을 가지고 부정의 담론을 부추키고 권력의지를 정당화한다. 기독교인들이 이런 정치문화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이런 종류의 부패한 당파주의의 핵심에 미국의 많은 유명 기독교 지도자들과 단체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정치문화가 가진 부정적 특성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거기에는 강력하고 건설적인 주장들이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생동감있는 문화적 활력들이 존재하지만 그 활력들은 정치 활동가들의 커다란 영향력과 광대한 자원들 때문에 빛이 바랬다. 기독교 우파나 좌파의 선언과 행동속에 이런 문화적 활력들이 인정되고 긍정되고 기념되는 곳이 거의 없다. 이것은 기독교가 자신의 고유한 문화적 특징들로 정의되기 보다 타자를 반대하는 분노의 수사학과 지배의 야망으로 정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는 신재세례파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의 신학은 세상을 혐오하는 신학이다. 신재세례파의 신학자나 운동가 중 사회에서 좋은 점을 긍정하고, 창조의 아름다움이나 교회밖의 진리를 인정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들의 공적담론에서 창조에 대한 기쁨, 환희, 쾌락의 표현도 보기 힘들다. 물론 그들의 목표는 기독교 우파나 좌파와 다르지만 그들의 지배적 증거는 역시 부정의 담론에 근거한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는 기독교 우파만큼 강하고 공격적이며 자신들이 비판하는 세상에 대해 교회 외의 다른 대안을 거의 제공하지 못한다. 분노에 근거한 집단적 정체성이 타자들에 대한 부정의 메시지로 개발되고 육성되었고, 그리하여 미국의 기독교는 교회의 가장 고귀한 소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정체성과 증거를 형성했다. 기독교가 신앙의 내적 쇠퇴와 세상의 부패에 저항한다는 명분아래 자신들이 비방하는 문화적 붕괴의 심각한 측면들을 자신도 모르게 포용한 것은 기독교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2부 7장
2016-05-02 01:07:12
2부 7장 권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신학적 반성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맺는가라는 질문은 최소한 암묵적으로 그들이 어떻게 권력과 관계를 맺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권력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표현일 뿐만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인간 관계는 본질적으로 권력 관계이며, 권력은 모든 사회적 실재에 스며있기 때문에 타인과 그들이 제공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완벽하게 격리되어 살지 않는 한 권력의 복잡한 동력으로부터 자신을 제거할 수 없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고 상호작용적이며 역동적으로 공유되고 전염성이 있다. 그리고 권력은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개인들뿐만 아니라 사회집단, 제도, 그리고 지역적, 전국적 공동체들 안에서 작동한다. 권력이란 실체나 자신이 아니라 자연세계 및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휘되는 재능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최소한 어느정도 권력을 소유하며 또 다양하게 표현된 권력분배에 참여한다. 권력은 사회적 존재의 핵심이나 토대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유일하게 고려할 요소는 아니지만 안간사회에 항상 존재하는 요소다. 대중적 차원에서 신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참된 제자도의 징표는 "힘없음"을 용납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힘없음이 권력에 대한 불완전한 이론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이해를 정치적 혹은 경제적 권력에 한정함으로써 사람들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힘없게 됨을 상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살거나 세상의 자원으로부터 독립되어 살지 않는 한, 교회와 신자들은 거의 모든 방법으로 권력의 행사, 교환 ,경쟁에 연루된다. 교회는 분명히 공동체, 교제, 모임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도는 본질상 권력을 소유하고 행사한다. 교회는 자신의 조직내에서 상징적이고 실제적이며 관념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힘없음을 강조하는 신학자들과 목화자들은 그들에게 파격적인 물질적 언어적 권력을 제공하는 상징 자본을 가지고 자신들의 지위를 통해 자신의 권력의 비대칭을 영속화한다. 신재세례파 전통이나 다른 경건주의적 전통의 교회가 가진 완전주의적 충동은 근본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그으려는 그들의 모든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경건주의 전통의 사람들이 소망하고 믿는 것과 달리, 권력 문제의 경우 세상과 교회 사이의 경계선은 훨씬 더 불분명하다. 교회가 사람들로 구성되는 한 교회와 세상사이에는 공유하는 힘이 많다. 많은 신재세례파들이 주장하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지나치게 과장되고 기만적이다. 권력문제와 관련해서 힘없음은 일종의 허구이며 심지어 정치적, 경제적 영역에서 힘없음도 상대적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피조물 안에서 일하며 그것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과업을 부여받았다는 것은 권력을 갖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창조명령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뜻을 반영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하라는 명령이었다. 하지만 타락때문에 인간 권력의 거룩한 본질과 잠재력이 손상되었다. 이것은 신실한 기독교적 증거가 역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이에, 인간 존재에 압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현실과 복음의 영적 윤리적 요구사이에 ,기독교 신자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사에서 신앙공동체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던 긴장이다. 우리 시대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계시와 세상 질서 사이의 대립을 부정함으로써 그 긴장을 축소하려고 했다. 신학적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모두가 사회질서에 대한 서로 다른 이상들을 기독교화함으로써 그런 일을 했다. 보수주의자가 전통적인 사회적 관행과 계시를 무비판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그렇게 했다면, 진보주의자는 자유주의-근대주의의 사회적 관행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계시를 상대화함으로써 그렇게 했다. 신재세례파와 경건주의자들은 그런 긴장을 인정했지만, 자신들을 사회적 관행으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그 긴장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세 가지 다른 입장은 서로를 참된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부름은 현 세상의 무질서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충실하 거하라는 부름이다. 그리고 그 충실함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런 긴장을 인정하고 그 긴장 속에 거하는 것이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예배 공동체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삶이 이루어지는 대안적 도시(altera civitas)이긴하지만 교회는 세상의 다른 곳과 그렇게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도 인간적 제도이고 구성원들의 관계가 중첩되기 때문이며, 또한 개인적, 집단적, 대칭적, 구조적 영역으로 세상에서 권력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에 대한 질문은 권력과 권력없음 사이에서 선택이 아니라 교회와 그 회원들이 소유한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곧 어떻게 교회가 자기 주변과 자신이 속한 세상에 관여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기독교적 실천과 세상 권력간의 내재적이고 복잡한 결합을 인정하는 것, 세상에서 충실하게 활동하는 교회 속의 불가피한 긴장을 인정하는 것, 하나님나라 복음에 순종하고 증거하려는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도 실패는 불가피하다고 인정하는 것, 이런 것들이 곧 기독교인들이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다는 뜻은 아니며 종교적 우파나 좌파가 권력과 적절한 관계를 맺는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자들이 권력 및 권세와 더 나은 관계를 발견하기 위해 계속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기독교적 실천과 권력 사이의 건설적 관계를 논하기 전에 두 가지 핵심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은 그 과제들이 기독교의 탈정치적(postpolitical) 증언을 위한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첫째 과제는 교회의 삶과 정체성을 미국 사회의 삶과 정체성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신재세례파는 양자의 밀접한 관계에 수반된 문제들을 정확히 파악하고 비판했지만 그들의 비판은 충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회의 도덕적 삶과 사회적 실천은 미국문화의 지배적 전제들과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 기독교는 지배적 정치이념을 과도하게 합법화하고 우리 시대의 우세한 경제구조와 관행을 맹목적으로 정당화했다. 기독교 안에 정치에 대한 비판적 거리 유지와 반성이 부족한 것은 기독교인들도 자신들이 관련된 세계의 다른 영역에 대한 비판적 반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모든 전선에서 신앙과 정치, 신앙과 문화의 통합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제는 분리할 때다. 두번째 과제는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이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정치는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정치화의 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와 기독교 신자들이 세상에 관여하는 것에 대한 상상의 지평과 그들이 행동하는 가능성의 범주를 제한한다는 점이다. 정치는 세상이 관여하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지 그것이 가장 고귀하고 효과적이며 인간적인 방법은 아니다. 정치가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정치를 비신화화하고 그것에 비현실적 기대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은 국가, 법, 혹은 정당을 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교회가 세상에 관여하고 세상 문제를 다룰 수 있는 대안을 제공해줄 것이다. 공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는 먼저 상상력의 도전이고 이어서 실천의 도전이다. 만약 이런 과제가 성공한다면 교회는 국가가 휘두르는 강제력을 소외시키고 다른 선택의 길을 열며 다른 유형의 권력에 대해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론은 교회와 교회의 세계참여에 관해 생각하기 위한 핵심적 방법이다. 출발점은 새 창조의 첫 생명이자 새 천국의 살아있는 실체인 예수그리스도다. 나는 지금까지 검토한 포괄적, 탈정치적 정치 이해를 토대로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사회권력이나 관계적 권력에 대한 예수의 핵심적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한다.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세상 권력을 움직이는 영은 자연스럽게 조작,지배, 통제를 지행하며 오도된 욕망에 근거하여 사람을 착취하고 종속시키며 노예로 삼는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류 안에서 모든 권력은 과도한 지배욕으로 부패하고 오염되며 본질적으로 남용의 가능성을 지닌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모든 것을 바꿨다. 그의 오심은 기존의 권력구조를 해체하고 인류를 위해 새로운 현실을 시작한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그의 삶을 통해 권력의 실체가 폭로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모든 형태의 세상 권력을 무장해제시켯고 부활에서 그 권력에 대항해 승리했다. 그 결과 신자들은 그 권력에서 해방되고 하나님나라 현실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회적 권력을 구체화하고 사용함으로써 권력에 대해 승리했다, 그가 사용한 사회적 권력의 특징은 최소한 네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그의 권력은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친밀감과 복종에서 기원했다. 둘째 그의 사회적 권력의 특징은 지위와 명성, 그것들에 수반된 특권을 거절한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류와 피조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의도적으로 신분의 강등을 감수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나라 권력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의된다. 그것이 그의 권력의 원천이고 수단이며 목적이다. 그리스도가 사용했던 사회권력의 네번째 특징은 신앙 공동체 밖의 사람들을 다룬 비강제적 방법이다. 힘과 강제력은 하나님나라의 일부가 아니며 그것을 동원해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도 없다. 권력에 대한 토론을 정치적 용어로 구성할 때, 일상생활에서 작동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간과하게 된다. 새로운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가 세우는 새로운 왕국의 실제적 현존이자 전조였다. 그의 삶, 가르침, 죽음은 다른 종류의 권력을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영적 영역과 지배적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일상에서 경험하는 펑범한 사회적 힘속에서도 나타나는 새로운 권력이다. 그 권력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현신 속에서 작동했으며 그것은 엘리트주의의 상징적 장식들을 제거했다. 그 권력은 소명과 사명에 근거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으며 신앙 공동체만의 선이 아니라 만인의 선을 추구했다. 그 권력은 축복하고, 짐을 대신 져주고, 치유하고, 수리하고, 회복하고, 해방하는 권력이다. 이것은 선을 위해 세상에 참여하고 싶은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그동안 기독교인들은 진짜 목적을 성취하기에는 부족한 전략을 수용해왔을 뿐 아니라 대단히 문제많고 근시안 적이며 때때로 부패한 전략을 받아들였다. 기독교 신앙과 그 문화의 번성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에서 기원한 권력모델에 달려있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3부 1장
2016-05-06 19:22:19
3부 1장 신실함에 대한 도전
차이와 해체
기독교 신자들에게 신실함에 대한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및 증거와 교제하며 성실하게 살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신실함은 일상의 다양하고 타협적인 현실 위에 떠다니는 추상적 경건이 아니라 복잡한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세력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신실함에 대한 우리 시대의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은 이 시대의 독특하고 변화하는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시대에는 신실함에 대한 맥락이 변했으며 이것은 신실함에 대한 도전들도 변했음을 의미한다. 근대세계에서 신학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제기된 주된 도전은 세속성이었으며 그들의 해법은 하나님을 사회활동의 모든 영역으로 다시 모셔오는 것이었다. 신학적 진보주의자들에게 일차적 도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었으며, 그들에게 해법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부와 권력의 재분배였다. 신재세례파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전은 자유민주주의와 세계자본주의의 일부가 된 폭력과 강제였으며, 그들의 해법은 신앙공동체의 평화를 사랑하는 코이노니아였다. 이런 모든 신학적, 정치적 공동체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현대세계의 문제들을 이해하고 해법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들의 실수는 자신들이 목격한 도전을 유일한 도전이라고 전제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현대 세계에 온전하게 참여하려면 기독교 신학은 현대세계에 대한 철저한 비판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과제지만 이 과제에 즉각적인 관심이 필요한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차이와 해체의 도전이라는 문제들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차이의 도전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공동체밖 세상과 어떻게 관계할 것인지의 문제이고 해체의 도전은 기독교적 증거 자체에 대한 문제다. 서로 관련되어 있고 서로를 강화하는 이 두 요소들은 기독교인들이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도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역학, 그리고 해결하지 못한 내적 문제를 대표한다.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독교인들에게 당면한 문제의 핵심이다.
차이의 도전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 우리와 다른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것이 차이의 도전이다. 차이의 도전은 지속적으로 현존하며 참으로 피할 수 없는 현대 다원주의의 현실에 근거한다. 다원주의는 다중 문화들과 그 문화들 속에 사는 사람들의 동시적 현존이다. 사실 다원주의는 수천년 동안 전 세계에 존재해 왔지만 근대의 탐험이 시작되고 서구의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며, 최근에는 강력한 세계화가 전개되면서 현대세계질서의 결정적인 특징의 하나로 부상했다. 산업화, 도시화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통신기술의 발달이다. 통신기술과 정보의 범람은 문화적 다원성을 더욱 불가피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세계에서 절대다수가 경쟁하는 문화들의 차이와 지속적으로 접촉함으로써 다원주의의 발생 비율이 거대하고 증가했으며 인간 역사에서 그 어느때 보다 빈번하고 강력하게 경험하고 있다. 과거에는 다원주의가 존재하더라도 강력한 지배적 문화의 틀 안에서 작동했지만 오늘날의 다원주의는 단일한 지배문화가 없는 상태에서 존재한다. 그 결과 이제 현대 세계에서 압도적인 신뢰성을 갖고 있거나 도전을 받지 않는 문화는 없으며 특정한 문화가 미래에 지배적인 문화가 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아마 앞으로도 해결불능의 불안정한 다원주의는 현대 사회질서의 근본적이고 영구적인 특징의 하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제시하는 분명한 함의는 상이성의 객관적 현실, 즉 일상적 습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차이다. 이런 차이들은 지난 수세기 동안 사회적, 법적, 정치적 갈등을 초래했고 현대 민주주의는 이런 차이들을 관리하기 위한 법적 정치적 틀을 제공했지만 그 해법은 누구에게도 충분히 만족스럽지 못했다.
이런 차이들은 복잡한 사회적, 심리적, 딜레마를 유발시키는데, 피터 버거(Peter Berger)는 한 사람의 신앙적 신뢰성은 이 신앙을 강화하는 특정한 사회조건, 즉 타당성 구조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한 사람의 신앙을 강조하고 지탱하는 것은 일상생활과 깊이 연결된 언어, 상징, 사회적 관행임을 의미한다. 그는 제도들의 응집력과 신앙, 가치, 세계관의 주관적 응집성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강하고 응집력 있는 신앙을 위해서는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감싸주는 강력한 제도가 필요하며 이런 조건이 신앙을 안정된 확신으로 전환시킨다. 사회상황이 불안하거나 사회생활의 응집력이 와해될 때, 신앙의 일관성과 인지가능성도 붕괴된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다원주의는 세상을 감지하는 방법의 다중성과 함께 그 감지를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타당성 구조의 다중성도 대표한다. 문화체계의 수가 많고 다양하다는 것은 특정한 신앙체계를 지지하는 사회조건이 열악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조건은 사람에게 선택을 강요하며 신실함을 어렵게 만들고 신앙없음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을 더 이상 불가피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사회조건을 조성하는 다원주의 하에게 하나님을 믿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신앙의 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을 돈독하게 만들었던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신앙이 공적영역에서 철수했기 때문에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의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다원주의 사회에서 하나님에 관한 담론은 교회의 틀 안에서는 가능하지만, 종교공동체 밖에서는 거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또한 다원주의는 종교적 신앙에 다른 압력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안에서 경쟁하는 문화들이 서로 영향을 미침으로, 적응하거나 동화되는 혼합주의다. 현대 다원주의에 근거한 이러한 차이의 도전은 여러 차원에서 발생하므로 그것은 신앙전통 자체의 집단적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며 불가피하게 신앙과 실천의 내용을 변화시킨다. 나아가 다원주의는 신앙의 가능성을 붕괴시키며 신앙의 특징을 약화시키며 다원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신앙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해체의 도전
신실함에 대한 두 번째의 강력한 도전은 해체의 도전이다. 해체는 실재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전제들을 파괴한다. 조지 스테이너(George Steiner)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으로 우리 문명과 그것을 구성하는 공동체와 전통들은 무엇보다 단어의 문명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가치와 법뿐 아니라 모든 사회관계로 부터 역사, 하나님, 개인적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언어화로부터, 그리고 담론과 구문론에 긴밀히 엮여 있는 가치기능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단어들과 인간경험을 구성하는 현실들 사이에 일치가 존재한다는 확신이나 전제위에 인간 문명이 기초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근대세계는 본질상 인간적 담론과 세계의 현실을 연결하는 신뢰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이 바로 문제다. 단어들의 객관화되고 공유된 의미가 붕괴될 때, 단어들이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제로 의미한다는 확신을 더 이상 가질 수 없을 때, 단어들에 우리가 원하는 의미를 마음대로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더 문제는 단어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호소할 수 있는 신뢰할만한 권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현 세계에서 모든 것에 질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는 있지만 우리 자신의 변덕과 소유욕 너머의 어떤 것도 긍정할 수 없다. 기의(signified)와 기표(signifier)사이에, 단어와 세계 사이에 계약이 파기된 문화에서 단어의 의미는 비어있다. 해체는 우리를 어떤 것이 실제적이거나, 참되거나,좋은지를 확신할 수 없는 장소로 인도한다. 실로 세계에서 반박할 수 없는 유일한 것, 단어와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남겨진 것은 의지와 권력뿐이다.
부분적으로 해체의 뿌리는 지적인 것이다. 확실성에 대한 계몽주의의 탐구는 새로운 확실성의 발견이 아니라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지고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주의를 초래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는 현대 회의주의 프로젝트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마르크스는 주어진 사회질서와 그것의 불평등 구조에 도전했고, 프로이트는 도덕성, 의식, 개성의 관계 그리고 정신병리학과 정신건강의 본질 및 그것들 사이의 경계에 도전했다. 이러한 도전의 핵심에는 신뢰할 수 있고, 또 지속적인 방식으로 현실과 연결할 수 있는 언어의 신뢰성에 대한 걱정, 의심, 의혹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근대의 모든 회의주의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회의주의가 발전적인 것을 제공하지 못하면서 해체주의적으로 전환이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해체의 도전에 점점 더 직면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현대세계의 사회조건이 이런 분열의 배경이 되는 문화논리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조건 중 하나가 다원주의다. 본질상 다원주의는 단어 혹은 그것의 관점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가진 다양한 문화들을 병치한다. 따라서 단어는 다른 사회적 문화적 맥락에서 다른 것을 의미하고, 단어의 의미에 대한 확신은 붕괴될 수 밖에 없다. 지난 반세기 동안 새로운 통신기술을 통해 형성된 사회조건들은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기술들은 시공을 단축하여 그것의 객관적 특성을 바꿨으며 세계를 구획하고 각 부분을 일관되지 않은 방식으로 조립한다. 또한 이런 미디어들은 상업적 이익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오락이 경험을 대표하는 일차적 형식이 되며 우리와 미디어 매체의 친밀함이란 환상을 조성한다. 이것은 여러면에서 진짜 현실을 능가하는 가상현실이다. 이렇게 우리의 의식은 그 안에서 구체화되는 사회적 현실로부터 결코 독립될 수 없으며 우리의 세계관은 그것을 둘러싼 환경을 결코 초월하지 않는다. 표면적 이미지와 시뮬레이션으로 구성된, 그리고 파편화되고 평평해진 환경은 기독교 신앙이 지시하는 실재를 붕귀시킬 수밖에 없다. 결국 의사소통과 관련해서 이렇게 지속적이고 강력한 혁명은 우리가 발음한 단어가 저 밖의 실재와 믿을만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해체시키는 상황을 만든다. 기독교인들도 이런 역사적 분열의 영향에서 벗어나 있지 않는데, 이떤 이들은 그 힘과 압력, 영향에 통찰력있게 저항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순진하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새로운 영토 속으로
비록 우리가 엄청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며, 과거와 현재 간의 연속선을 추적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대 세계에는 우리를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영토로 이끄는 핵심적인 측면들이 있다. 그것들은 과거의 문화, 사회, 문명에서는 거의 확인할 수 없었던 특징들을 가진 새로운 사회적 풍경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차이의 도전과 해체의 도전은 새로운 것이 아니며 그것들은 모두 현대세계의 오래된 붙박이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도전들의 결과가 일차적으로 눈으로 보고 객관화하고 분석하고 반응할 수 있는 문제들로 나타나지 않고,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여겨서 문제들로 간주하지 않는 일련의 복잡한 가정들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문화는 자명할 때 가장 강력하다., 이런 식으로 문화구조는 우리의 의식구조를 형성하며 선하고, 악하고, 가치있고, 옳고, 틀린 것에 대한 암묵적 이해를 구성한다. 차이와 해체의 딜레마는 이런 방식으로 현대 사회에서 작동한다. 차이와 해체의 가장 큰 도전은 그것들이 허무주의 발전에 이로운 상황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나는 허무주의를 선택의 이념과 실천으로 합법화된 자율적 욕망과 자유로운 의지라고 긍정적으로 정의한다. 문제는 의지의 자유 자체가 아니라 어떤 더 높은 가치로부터의 의지의 자율권이다. 의지는 그것이 절대적이 될 때, 자신보다 높은 어떤 권위에도 복종하지 않을 때, 충동과 욕망이 자신의 도덕적 기준이 될 때, 자신의 작동 외에 어떤 다른 목적에도 영향을 받지 않을 때, 허무주의적이 된다. 다원주의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선택을 요구하며 해체의 동력은 모든 현실, 모든 의미있는 권위, 모든 의미있는 도덕적 목적들을 해체시킨다. 우리는 점점 더 낯선 영토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판명될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지만, 오늘날 신실함이 추구되는 맥락이 우리가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도전의 거대함과 복잡함을 인정하고 그 도전의 결과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3부 2장
2016-05-07 01:19:14
3부 2장 오래된 문화적 포도주 부대
문화참여의 3가지 패러다임
경험의 가장 심오한 수준에서 차이와 해체의 도전을 초래했던 변화들은 자기 신앙을 온전히 실천하려는 기독교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신실함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 질문들을 다루기 위해서 신실함이 개념화되고 추구되어온 지배적 모델들을 재고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2부에서 논의된 세 가지 정치신학들은 방어 패러다임, 적합성 패러다임, 정결 패러다임이라는 보다 복잡한 문화적 참여 패러다임의 공적 단면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세상에서 신실함에 대해 생각하고 추구하는 다른 방법이다. 1. 방어 패러다임은 신학적 정치적 보수주의가 세상에 적대적, 방어적 영토를 만들려는 문화적 참여모델과 연결되어 있다. 이 패러다임 속에서 움직이는 기독교인들의 목적은 항상 넓은 세계 내에서 기독교 정통교리와 정통 실천의 독특함을 보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상을 추구하는 동안,보수적 교회, 교단, 파라처치 지도자들은 배교에 맞서 지지기반을 확보할뿐 아니라 기독교가 특권적 지위를 회복하는 문화를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손은 복음을 전하고 다른 손으로는 싸울 준비를 했다. 방어 패러다임을 수용한 사람들은 대체로 세계의 주된 문제가 세속화라고 믿으며, 하나님이 사회질서 안에서 그분의 자리를 회복하신다면 문화도 곧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 적합성 패러다임은 역사적으로 신학적 자유주의가 수용했는데 최근에는 구도자 교회의 복음주의자들이나 이머징 교회의 진보적 복음주의자들도 수용하고 있다. 이들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우선시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기독교 정통주의와의 연속성을 인정하면서도 당대의 절박한 쟁점들과 자신들과의 관련성을 중시한다. 신학적 자유주의자들은 적합성을 유지하는 비결이 낭만주의적 근대주의의 인식론적,도덕적 전제들을 어느정도 반영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상징화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적합성 패러다임은 중도적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에게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그들은 신앙의 방어보다 당대의 문화와 적합하게 연결되는 것을 강조한다. 3. 정결 패러다임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타락한 세상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교회의 핵심 과제는 세상의 악한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증인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재세례파 신학자들은 이런 패러다임을 가장 분명하게 수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톨릭 공동체나 일부 보수적 복음주의 교단,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도 정결 패러다임에 친화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교회정치제도나 사회계급면에서 신재세례파와 별로 공통점이 없고, 교회와 세상에 대해서는 두 왕국론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 두왕국론의 영향 아래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 안으로 점점 더 깊이 물러나고 그들의 세상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들 모두의 정체성은 우리와 타자들이란 논리에 의존하며, 그 논리는 실용적 목적에도 불구하고 분파주의적이진 않지만 분리주의적이다.
차이의 도전에 대한 반응
1. 방어 패러다임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차이는 항상 위험이나 최소한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된다. 그런 차이를 구체화하는 타자는 이방인이며 잠재적 대적으로 간주된다. 위협적인 다원주의에 직면해서 그들이 만든 정교한 구조와 제도들은 그들이 다원주의 세계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살수 있는 타당성 구조의 네트워크로 기능했다. 이런 패러다임 안에서 작동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 다원주의로 대표되는 차이는 필요악이었으며, 그들은 그 차이의 한계와 표현을 자신들이 규정했던 정도로만 용납할 수 있었다. 2. 적합성 패러다임에서는 기독교의 독특성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의 문제가 아니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과 타자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진정한 타자는 없고 그들과 본질적 차이도 없다. 그들이 용납할 수 없는 유일한 차이는 자신들의 독특한 종교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샆었던 방어 패러다임에 속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차이였다. 그들을 대체로 차이를 무시하고(특히 동성애 문제에 대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축소한다. 3. 정결 패러다임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은 차이를 암흑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유일하게 정당한 전략은 빛의 공동체로서 암흑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독특함을 보존하는 수단으로서 방어 패러다임처럼 기독교 세계 내에 비슷한 제도들을 개발하는 대신 교회 자체를 신앙의 보호를 위한 유일한 합법적 구조로 간주한다. 그리고 교회 내의 활동을 그런 신앙의 핵심적 표현으로 이해한다. 이것이 오늘날 오순절 운동, 신재세례파, 평신도 에큐메니컬 수도원주의 같은 형태의 경건주의가 다시 각광받는 이유일 것이다.
해체의 도전에 대한 반응
기독교 전통의 맥락에서 해체의 도전은 특정한 단어 즉 하나님 말씀 그리고 신조의 고백과 그것에서 기원하는 이해들 간의 관계에서 가장 날카롭게 작동한다. 지난 세기 동안 성경 그리고 역사적 신조, 신앙조항이 신자들의 일상생활만큼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확신을 허물어뜨리는 예외적 압력들이 존재해 왔다. 모든 공동체의 기독교인들이 다른 방식으로 이 압력에 저항하려 했지만 그 결과는 의심스럽거나 패배가 자명했다. 1. 방어 패러다임에서 보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총제성을 붕괴시키려는 세상의 노력을 공격함으로써 기독교 진리 주장의 침식에 저항했다. 기독교 신앙과 증언의 진정성은 오랫동안 성경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긍정과 더불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방어로 정의되어 왔다. 하지만 그들은 현대 세계의 통신기술이 문화적으로 중립적이고 부작용이 없다고 가정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 방어 패러다임이 속한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자신들이 저항하고 샆어하는 바로 그것에 본의 아니게 기여하고 있다. 2. 적합성 패러다임에 속한 신학적 자유주의는 역사적으로 말씀의 의미를 현대의 세속적 환경에 보다 적합한 방식으로 타협함으로써 말씀과 세상의 분리에 저항했다. 그들은 기독교 교리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을지 모르지만 사랑의 윤리는 언제나 적합하며 사회에서 직면하는 문제들에 대항하는 견인차 역할을 할 것이라 믿는다. 오늘날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역사적 신앙에 대한 자유주의의 회의주의적 성향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지구온난화, 아프리카의 기아와 기근, 성노예무역, 이민사회 문제들에 적용하려는 열망을 공유한다. 그들은 역사적 신앙을 부인하지 않지만 신앙의 윤리적 이상을 선호하며 신조적 측면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3. 정결 패러다임에 속하는 기독교인들은 복음과 실천 사이의 연속성을 방해하는 일체의 것에서 철수함으로써 말씀과 세상 사이의 신뢰가 해체되는 것에 저항하려 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이 현실도피적 경향이 있는 경건주의를 통해 진정성을 추구한다면, 신재세례파와 신수도원주의자들은 기독교 생활의 훈련들, 특히 성찬식,예배, 성일준수,성경공부 등의 집단적 훈련들 속에서 진정성을 추구한다. 그들은 일상세계에서 평범한 기독교인들의 직업 안에서 나타나는 성육신의 의미를 무시한다. 이것은 단순히 부주의가 아니라 진정한 기독교적 증언은 일차적으로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예배와 교제를 통해 존재한다는 그들의 확신에 근거한다.
대안의 필요성
이 3가지 패러다임은 모두 교회의 경험과 생활, 정체성 그리고 증언에 중요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세계에 방어적이고, 세계에 적합하고, 세계로부터 정결한 것에 대한 관심은 모두 특정한 방식으로 진정한 성경적 관심들을 반영한다. 그러나 세상에 대해 방어적이려는 욕망은 독특성을 보존하고 싶은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것은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동시에 문화적으로 진부하고 중요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와 반대로 세상에 적합하려는 욕망은 기독교의 독특성을 포기한 대가로 성취된다. 또한 세상으로부터 정결하려는 욕망은 사회생활의 거대한 영역에 활발하게 참여하는 대신 분리 및 철수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세상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싶지만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종속되지 말라는 부름 앞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최소화하며 그런 목적을 추구한다. 이 3가지 패러다임 중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세상에서 신실함을 이해하거나 추구하기에는 충분히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이런 부적절함은 차이와 해체의 도전들이 야기했던 역사적, 사회적 과정에서 특히 명백해진다. 현대의 사회조직 안에서 차이와 해체는 때로는 분리해서 때로는 연합하여,기독교 신앙에 철저하게 도전한다. 이 두 도전은 믿을 수 있는 능력, 즉 일관되게 철저하게 효과적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킨다. 그 과정에서 차이는 신앙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공간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왜곡시키며 신앙의 내용과 특성뿐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에 도전한다. 또한 해체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천력을 약화시킨다. 이렇게 본질적으로 신앙의 신뢰성과 일관성을 약화시키는 환경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기독교적일 수 있을까? 기독교가 여러 문화들 속에 하나의 문화일 뿐인 다원주의 세상에서 무엇이 진정으로 성경적인 존재방법인가? 교회의 유익과 공공선을 위해 그리스도 몸의 다양한 은사들을 온전히 표현하는 신실함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 시대에 신자가 신실하다는 것을 무슨 뜻인가? 후기 현대사회는 대단히 혼란스러우며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진정성, 일관성, 깊이에 굶주려 있지만 이것들이 추구되는 방식은 그런 열망에 충분히 반응하지 못한다. 우리 시대에 좀 더 적합한 대안적 비전이 정말 필요하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3부 3장
2016-05-07 17:39:41
3부 3장 대안적 길을 위한 토대
형성의 비전
교회와 교인들이 그들의 약점 때문에 비판받는 상황에서 한 가지 핵심적인 신학적 진리가 간과되기 쉬운데, 그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성령이 여전히 활동하신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신앙조항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다. 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의 놀라운 봉사와 열정적인 선교활동들은 이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활동들이 그리스도의 사랑, 은총, 자비, 진리를 증거할 수 있는 가능성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대표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개인적, 집단적으로 자신들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표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 시대에 이런 부르심에 대항하는 세상의 도전은 거대하다. 하지만 그동안 교회는 이런 도전을 이해하고 또 이런 때를 위해 교회와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사명에 적절한 형성의 비전(a vision of formation)을 제공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시대의 본질을 잘못 읽고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정치에 집중함으로써 부차적인 문제들과 잘못된 해법들에 관심을 고정시켰다. 이 형성의 비전은 다름 아닌 대위임령의 추구이며 그것은 제자 삼기, 곧 그리스도의 형상에 일치됨의 과제다. 앞에서 언급한 3가지 패러다임 외에 한가지 전진의 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그 길의 출발점이다. 그동안 대위임령은 단순하게 복음전도로 이해되었지만 그것은 제자를 삼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분부를 가르쳐 지키게 하는 형성과 관계가 있다. 형성, 곧 제자삼는 사역은 삶의 총체성 속에서 신실함의 양성을 지향한다. 따라서 형성은 지향성을 요구하며 신자들을 어떤 사명과 그리스도에 대한 섬김에 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의 지혜로 가르치고 훈련하고 경고하는 수고를 필요로 한다. 기독교인들에게 문제는 그들의 믿음이 약하거나 부적절한 것이 아니다. 대체로 그들은 기독교 전통의 핵심적 진리들을 믿고 확고하게 붙잡는다. 문제는 그들이 그 진리들로 형성되어 온 것이 아니라 더 큰 후기기독교문화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이 시대에 신실함의 요구에 반응하여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 위한 모든 지혜로 형성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샬롬
모든 생명의 갱신을 추구하는 형성은 사실 모든 생명의 갱신을 구체화하고 표현하는 문화를 전제한다.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가 모든 삶으로 확장되는 갱신과 회복의 비전을 표현하고 구체화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자삼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형성에 모양과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공동체다. 이것이 열쇠다. 공동체의 씨줄과 날줄 속에 뿌리내린 건강한 문화없이 건강한 형성은 불가능하다. 믿음을 신뢰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는 타당성 구조가 심하게 약화되는 상황에서 문화 공동체는 특히 중요하다. 후기현대의 상황에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고 익숙하지 않으며 아마도 불편한 의도성(intentionality)을 요구할 것이다. 이 공동체의 비전은 샬롬의 비전이다. 그것은 질서와 조화, 풍성함과 풍요로움, 온전함, 아름다움,즐거움, 복지의 비전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이것은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이자 새하늘과 새땅을 위한 하님의 약속이다. 성경 전체의 내러티브들은 하나님이 의도하셨고 언젠가 그분이 회복하실 샬롬을 지향한다. 그 내러티브들 속에서 하나님은 샬롬을 파괴하는 자들을 심판하셨고 그로 인한 희생자들을 보호하신다. 이런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샬롬을 이루는데 자기 백성이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부르신다. 샬롬의 모범을 보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살롬이 되기위해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사건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이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의 샬롬)가 가까이 왔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룩하실 때까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자신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실천하도록 부르신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인들은 타인의 안녕을 위해, 단지 신앙 공동체 안의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살아야 한다.
세상과의 긴장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긴장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그 공동체가 역사와 계시 사이에서, 그리고 특정한 시대의 사회적 조건과 교회의 소명 사이에서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긴장이다. 그런 긴장은 말, 문법, 가정, 성향, 이론, 실천, 사회조직들의 피할 수 없는 혼합 속에 반영되므로, 이 모든 것을 명확하게 선을 긋듯이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상하게도 그것은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섞여 있으며, 구분이 불가능한 알곡과 쭉정이 문화다. 이런 긴장은 불가피하고 해결할 수 없으며 그것은 교회와 교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다. 성경에는 교회가 자신이 속한 사회와 구별되어 살아야 한다는 교훈과, 교회는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현실에 적응하라는 교훈이 모두 존재한다. 즉 존재하는 사회적 현실에 적응하는 것과 다른 삶을 통해 그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말이다. 대체로 기독교 존재의 목적은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다.(벱전2:9) 이런 목적을 위해 기독교인들은 "이방인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 선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벧전2:12) 볼프의 말처럼 기독교적 차이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밖으로부터 낡은 것 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 안의 적절한 공간 속에서 정교하게 새로운 것을 분출시키는 것이다.
긍정과 대립
나는 교회는 긍정과 대립의 변증법 속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도록 부름받았다고 제안함으로써 이 모순을 해명하고자 한다. 변증법에서 첫 번째 시작은 긍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적 주도권과 창조에 대해 긍정을 선언하시면서 삶의 이야기를 시작하시기 때문이다. 긍정은 문화와 문화형성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타락으로 무효화되지 않았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재능, 지식, 지혜 ,창의력이 있으며, 어느정도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진리, 정의, 도덕, 미의 기준을 갖고 있다. 이것들은 신자, 불신자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부어준 일반은총의 선물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서 창조에서 기원하는 자연생명이 있고, 이해되고 개발되고 향유될 수 있는 사물들 속의 자연질서가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신자와 비신자 모두가 공유하는 세상에서, 창조의 선함은 죄로 인하여 근본적으로 그리고 모든 곳에서 손상을 입었지만 그것은 죄에 의해 부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파열되고 불완전하고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선함은 그 안에 계속 남아있다. 세상을 형성하는 작업은 하나님이 창조시에 인류에게 명령하신 작업이므로 그 자체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일반은총의 영역은 결코 중립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 것이며 그것의 목적은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질문은 그것들이 하나님나라 규범에 어느정도 순종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 정의, 평화, 복지를 추구할 때 기독교 공동체와 타자들 사이에는 공통된 명분과 접촉점이 있지만 그런 공통점들에 대한 세심한 분별이 요청된다. 문화 형성 활동이 하나님 앞에서 타당성을 갖지만 엄격히 말해서 그것이 본질상 구속적이거나 구원과 관련된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문화는 하나님나라가 될 수 없다. 문화 속에서 기독교인들의 활동이 하나님나라로 진화하거나 그 나라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영원 속에서 설립하는 것은 오직 거룩한 주권의 행위이며 종말에 이루어질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서 문화사역을 문자적 의미에서 하나님나라 건설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나라를 이런 저런식의 콘스탄타누스적 프로젝트로 인도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것이며 그런 프로젝트의 목적은 결국 기독교인들이 문화를 장악하려는 욕망이다. 이런 전제는 문화가 예수를 주님으로 선언하느냐 아니냐하는 이원론으로 귀결되며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문화를 쟁취하여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거나 문화를 상실함으로 하나님나라를 후퇴시킨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기독교인들의 상대적 성공이니 실패에 따라 승리주의나 절망으로 귀결되는 이유는 문화에 대한 이런 형태의 콘스탄티누스적 접근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신재세례파들과 급진적 정통주의 신학자들이 서구 기독교 안에 콘스탄티누스적 경향을 비판한 것은 정당하다. 다만 그들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의 삶과 사역이 교회 안의 명백한 활동외에 아무런 영적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 것은 옳지 않다. 진실로 기독교인들이 자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할 때, 그들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장차 도래할 샬롬을 선포한다. 그런 일이 하나님나라를 성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며 그 나라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관여하는 것은 그런 참여가 세상을 더 좋게 변화시키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라 모든 선, 아름다움, 진리의 창조주를 영예롭게 하려는 욕망의 표현이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스런 복종의 현현이며,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완수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긍정의 원천이 이 변증법의 두번째 단계, 즉 대립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대립은 타락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모든 인간적 노력은 의도된 잠재력이 부족하고, 모든 인간적 열망은 심판아래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 성취는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기준으로 평가된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권력, 교제, 기쁨, 자유, 권위에 대한 모든 사회제도의 요구를 상대화시키며, 인간적 노력이 결코 최종 결정권을 갖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인들이 세상에서 긍정할 것이 아무리 많아도 교회는 언제나 저항 공동체다. 교회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는 다양한 범주의 소명들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교회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이자 부름받은 소명인 샬롬과 양랍할 수 없는 사회생활의 모든 구조를 창조적으로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세상에 현존해야 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려는 열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서, 교회와 교인들은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하고 인간을 비참하게 하며 피조물을 무시하거나 해롭게 하는 모든 구조에 도전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대립은 부정적이거나 허무적인 것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건설적이어야 한다. 교회는 현대와 현대의 지배적 제도들에게 대립적 태도를 견지하지만 단순한 부정이나 전복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대안적 비전과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대립은 반현대적이거나 전근대적인 태도를 요구하지 않으며 현대세계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다시 형성으로
개신교의 경건주의적 흐름 안에는 형성 혹은 대위임령을 역사에서 하나님 백성을 위한 새롭운 구속사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구속은 창조와 다르며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의 삶, 죽음, 부활이 역사에서 하나의 급진적 파열을 대표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이 파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다. 실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은 창조명령의 취소가 아니라 재긍정을 뜻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자기 죄에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창조 때에 주어진 사명,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의 성품과 영광을 반영하는 세상을 돌보고 가꾸는 사명을 맡도록 구원받는다. 이것은 일, 여가, 기족생활, 시민적 의무를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엄청난 함의를 갖는다.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말씀의 선포 외에도 교회의 중심사역은 형성, 즉 제자삼는 사역이다. 형성은 현재의 세계질서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대안적 현실을 신실하게 살아내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형성은 근본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것과 관련이 되며 신자들이 자신들의 삶 자체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소명에 적합하게 드리도록 교회가 신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격려하는 과업이다. 이런 사명에 근거하여 신앙의 언어와 성경 내러티브의 의미는 우리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에서 새롭게 학습되어야 한다. 월터 부르그만의 말처럼,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지배적 대본을 포기하고 성경에 근거하고 교회전통을 통해 실천된 대안적 대본을 수용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제자 삼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긍정과 대립의 변증법적 긴장을 경험하면서 대안적 대본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특히 우리 시대에 형성의 사명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지혜, 분별, 근면, 그리고 모든 것 안에서 성령의 역동적 인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만물의 갱신에 대한 비전이 교회 안에서 구체화될 때, 만물의 갱신에 대한 비전이 교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집단적 내러티브 속에 표현될 때, 만물의 갱신에 대한 비전이 공통된 관행을 정의하는 제의들 속에서 공유될 때, 만물의 갱신에 대한 비전이 세상의 직업에서 신실함의 모델이 되는 삶을 통해 실천될 때, 그리고 만물의 갱신에 대한 비전이 사람들이 격려와 책임을 발견하는 관계들 속에서 표현될 때, 그때 형성은 교회의 공통된 삶의 자연스런 표현으로 전개될 것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3부 4장
2016-05-14 15:02:08
3부 4장 신실한 현존의 신학을 향해
후기 현대사회에서 언어는 더 이상 우리를 주변 세계와 신뢰할 만하게 연결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더 이상 단어들을 세상에 대답할 수 있는 것으로 완벽히 신뢰하지 않는다. 이것은 물리적 현존과 장소가 중요하지만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정보와 통신영역에서 신기술의 발전은 분명히 이런 문화적 변화의 원인 중 하나다. 현존과 장소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우리가 현실로 간주하는 것이 해체되는 한 가지 방식에 불과하다. 이런 변화를 가져온 기술의 변화는 해방적이고 힘을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대단힌 혼란스럽고 무능하게 만들 수 있다. 말과 세상 간의 신뢰가 깨짐으로써 현존과 장소의 의미가 약화된 것은 믿음의 핵심적 의미에 치명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창조 이야기에서 말씀과 세상 간의 다른 관계에 대해 배운다. 히나님이 말씀하셨고 모든 것이 말씀하신대로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존재하게 된 세상은 서로 신뢰관계를 보여주었다. 여기서 해체는 없었다. 시33편은 이 점을 반복하여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뢰성은 성육신과 더불어 가장 극적으로 역사 속에 드러났다. 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인들에게 성육신은 하나님의 실재와 그들이 그분의 말씀에 대해 가질 수 있었던 신뢰의 표현일 뿐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만물을 새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역사 속에서 가장 파격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은 공허한 추상이나 끝없는 수다를 통해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모든 경우에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의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에서 실현된다. 말과 세계는 단어들이 세계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과 상응하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 말과 세계는 말의 실현을 통해 하나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 이것이 신실한 현존의 신학의 토대이다. 이것이 바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이 된 방법이다. 성육신은 해체의 도전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대응이며, 성육신이 지향하는 목적들은 차이의 도전에 대한 유일하게 적절한 대응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은 온전하고 신실하게 우리에게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임재의 첫번째 속성은 그분께서 우리를 찾으신다는 것이며, 두번째 속성은 그분이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시는 것을, 그리고 세번째 속성은 그분이 자신의 희생적 사랑을 통해 생명을 제공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찾으심, 동일화, 희생적 사랑을 통한 생명의 제공,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한 임재가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이 아니고 적극적이며 우연적이지 않고 의도적이며 계약적이지 않고 언약적인 성질의 헌신이다. 물론 하나님의 활동적이고 헌신된 임재의 요점은 항상 우리와 당신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내포된 의미가 있다. 첫째는 이 드라마에서 우리가 타자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위험이나 암흑으로 간주하지 않으신다. 둘째는 비록 그분이 전능하시지만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자신과 동일시하시며 자기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더 큰 주장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우리가 우리 주변의 세계에 참여하는 신학이다. 그것은 헌신의 신학이자 약속의 신학이다. 이 신학의 개념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그 내적 함의는 교회의 문화참여에 대한 지배적인 패러다임에 도전한다. 근본적으로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실하게 현존하시며 그분에 대한 우리의 소명도 그분에게 신실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교회의 문화참여에 대한 토대이고 논리이고 패러다임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현존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분에게 온전하게 현존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거나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실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도구적 목적을 위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이 아닌 것 처럼 우리도 도구적 목적을 위해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최고의 목적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신 그분을 영원토록 경배하고 기뻐하면서 그분의 현존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온전히 현존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서 온전하게 현존할 수 있다. 이것은 다음 세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첫째 신실한 현존은 우리가 신앙 공동체로서 서로에게 온전한 존재로 있어야 함과 신앙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도 온전한 존재로 있어야 함을 뜻한다. 공동체 안의 사람들에게든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든 우리는 창조주와 구원자를 모방해야 한다. 즉 우리는 서로를 찾고, 서로를 동일시하며, 우리 삶을 각자의 희생적 사랑을 통한 번영을 위해 조정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이것은 실로 대응하기 불가능한 도전일 것이다. 사회계급, 민족, 인종의 경계선을 따라 발생한 기독교 공동체 내부의 분열은 여전히 대단히 깊고, 또 교파적, 신앙고백적 차이를 따라 발생한 분열도 대단히 분파적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신자들의 몸 안에서 신실한 현존을 통해 은총을 확대할 수 없다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은총을 확대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에게 어려운 부분은 신앙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신실하게 현존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성경은 여기서도 짊어질 부담은 동일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우리는 타자들을 찾아야 하며 타인들과 동일시해야 하고, 타자들의 완전함을 위해 수고해야 한다. 둘째, 신실한 현존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사명에 온전히 참여하고 헌신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안에서 일하게 하셨으며 아담이 창조주께 순종하며 노동할 때 그 일은 그분의 거룩하신 본성을 표현했다. 그러나 아담의 불순종으로 노동은 죄에 대한 처벌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목숨을 부지하게 위해 노동해야 하며 노동은 어렵고 부담스러우며 지루하고 걱정스럽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노동의 긴장을 해결하는 한가지 교훈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3:22-24)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이 하는 일에 전심을 다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정말 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추구, 둥일시, 희생적 사랑으로 정의되는 헌신이 요구된다. 우리가 " 주께 하듯" 우리 일을 감당할 때, 일이 우상숭배의 원천이 되지 못하도록 안전장치가 마련된다. 셋째, 신실한 현존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에 온전하게 참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는 우리의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권력이 사용되는 곳에서 그것은 예수의 방식에 일치해야 한다. 즉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근거하고, 지위의 특권을 거절하며, 타인의 필요에 대한 자기희생적 사랑에 따라, 그리고 비강제적이며 무차별적으로 권력이 사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생활의 구조 내에서 모든 이들의 번영에 유익한 상황을 조성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신실한 현존은 소극적 순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실한 현존은 긍정과 대립의 변증법 안에서 억압, 불의, 적의, 부패에 도전하고 축소시키며, 조화, 풍요, 온전함, 아름다움, 즐거움, 안전, 안녕을 촉진하는 새로운 유형의 사회조직을 추구하는 건설적 저항을 의미한다. 사회생활의 정상적 과정에서 신실한 존재와 관련된 도전과 대안은 권력쟁탈을 통한 직접적 반대가 아니라 미로슬라브 볼프의 주장처럼 옛 것의 적절한 영역 안에서 대안을 분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성구조에 대한 직접적인 예언적 반대를 배제하지 않지만 그런 반대를 최후의 수단으로 삼는다. 이러한 예언적 증거는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샬롬의 현실적 비전이 구현되는 총체적 결과다.,
성육신과 성령의 지속적 현존을 통해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근원적 현실을 의심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온전하게 현존해야 하며 교회의 일치의 필요성에 동의할 것이다. 하지만 일과 사회적 영향력이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갈린다. 방어 패러다임은 세속적 생활과 종교적 생활 사이의 분리로 형성된 이원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은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의 경건주의 전통은 이런 이원론을 강화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세속적 세상에서 직업은 기껏해야 필요악 정도였고, 그 일이 복음전도의 발판으로 기능하는 한에서만 하나님나라의 의미를 가졌다. 이런 패러다임에서 일은 도구화되었고 단지 영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적합성 패러다임에서 참여의 일차적 전략은 현대세계의 사람 및 사건과 진정한 관계 형성을 위해 적응하는 것이다. 따라서 구식 자유주의자들이나 이머징 교회에서 높은 수준의 윤리적 행동을 유지하는 것 외에 정말 독특한 관점이나 실천을 없다. 정결 패러다임에서 성육신적 열망은 긍정되지만 그것은 교회생활과 자선활동에 국한된다. 교회밖의 일과 사회생활은 사람들의 필요를 제공하기 위한 활동 외에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들에게 일과 관련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로 부름 받았다는 사상은 완전히 틀렸다. 그들에게 일은 하나님의 지속된 창조를 완성시키거나 역할을 감당하는 방법이 아니라 단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신재세례파는 직업이 소명이나 부르심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상을 거부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회적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영역을 통해 우리의 일이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상도 거부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행하는 일상의 노동이 그들의 교회 활동을 제외하고는 거의 혹은 아무런 영젹 의미도 갖지 못한다. 신재세례파의 관점에는 영지주의가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일, 소명, 예술, 상업, 학문 등에 대한 신학을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보통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신학을 제공한다. 그들의 교회론은 복음주의나 근본주의와 다르지만 그들이 수용하는 이원론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오늘날 세상에서 말과 세상의 관계는 악화되고 의지와 권력의 관계는 더욱 밀접해졌다. 지배의지는 의지의 지배 자체의 가장 분명한 표현이다. 이런 상황에서 의지는 자신의 열망, 성취, 기쁨을 계속 추구한다. 하지만 문화에 대한 의지의 헌신은 그 욕구가 만족되는 동안만 지속된다. 이것에 반대하여 나는 현실을 위한 성육신에서 가장 강력하게 상징된 다른 토대와 다른 종류의 헌신이 있다고 주장한다. 성육신은 말과 세상이 하나되는 대안적 길을 대표한다. 우리가 해체와 차이의 도전에 대해 유일하게 적합한 대응을 발견하는 것은 성육신,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특이한 방법 안에서다. 참으로 우리가 현대세계에서 인간적 번영이나 희망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샬롬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이 되고 우리를 통해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 속에서 우리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에서 실천될 때 시작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정의되는 모든 번영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우리와 타자들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일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영향력의 영역 내에서, 육신이 될 때, 부재는 존재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우리가 서로와 세상에게 하는 말은 진정성 있고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신실한 현존의 신학이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끝없이 자기성취와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의 무한한 지평에 반대하여, 신자들에게 자기 의지를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한 세계를 가르치고 개발하라고 요청한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사람과 장소에 먼저 집중하라고 요청한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우리 앞에 있는 공동체, 이웃, 도시 그리고 이런 것을 구성하는 사람들에 우선 순위를 부여한다. 우리의 다양한 일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현존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그런 일이 구속적이지는 않아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게 할 수는 있다. 우리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역과 관련하에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의 삶, 일, 관계의 양식들이 교회뿐 아니라 교회밖의 모든 사람들의 복지를 추구하는 샬롬을 지향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만든다. 권력의 사용은 불가피하지만 그 영향의 수단과 목적은 그리스도가 모범을 보여주신 권력의 사용과 일치해야 한다. 생명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몸 전체에서 실행될 때, 개인적, 집단적, 제도적 참여를 통해 그 몸의 모든 회원들 속에서 말씀이 실현되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전개되는 살아있는 내러티브에서 모든 단어와 문법이 실현된다. 그 내러티브는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가리키며 그것은 실천되기 때문에 진정성이 있으며 하나님의 샬롬을 반영하고 드러내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3부 5장
2016-05-18 21:04:39
3부 5장 신실한 현존의 신학 실천하기
리더십의 문제로서의 신실한 현존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일상에서 어떤 모습을 취할까? 이상해 보이겠지만 리더십에 대해 검토하는 것은 신실한 현존의 실천을 위한 질문을 시작하는 유용한 지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리더십은 활동과 관계의 영역들 내애서 우리가 가진 영향력이다. 우리 모두는 다양한 상황에서 상대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다양한 정도의 리더십을 발휘한다. 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은 영향력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영향력면에서 거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하지만 사람을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와 영향력이 없는 추종자로 분리하는 단순한 이분법적 시각은 세상이나 그 안에서 우리 삶의 현실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 정도와 방법은 다양하지만 모든 사람이 리더십의 의무에 연루되어 있다. 대위임령을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해석하면, 교회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실제로 교회는 이런 영역들 속으로 사람들을 보내야 하며 이런 분야에서 사람들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한 신학적 자원들을 제공하고 제자를 삼고 그런 분야의 재능있는 청년들에게 멘토링과 재정을 제공해야 한다. 교회가 사람들을 이런 분야로 파송하지 않을 때, 이 영역에서 사역과 참여를 이해하는 신학을 제공하지 않을 때, 교회는 "온 천하를 다니며"라는 대위임령을 완수하지 못한다. 대위임령에 복종하려면 교회는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다양한 리더십을 발휘할 사람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따라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신실한 현존의 추구는 사회적 결과를 나타낸다. 이것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은 엘리트적이지 않고 오히려 대위임령을 완수하는 것이다. 지위는 본질적으로 기독교 신앙과 증언에 모순되기에 대단히 유해한 주제지만 그것은 현대교회가 활동하고 신실하게 현존하려는 세상의 엄연한 현실이다. 지위의 사회적 역학은 근본적으로 배제의 역학이기 때문에 지위는 복음에 해롭고 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위는 리더십의 위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엘리트적 방식으로 행동하려는 유혹을 일으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사용해서 타자들을 배제하거나 자기의 권력과 이익을 확대하려고 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신실한 현존을 추구하는 것과 성취의 사회적 결과 사이에서 리더십과 엘리트주의 사이에서 불가피한 역설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겸손의 삶, 타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삶, 약자의 필요에 민감한 삶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리더십은 불가피하게 모든 것을 영향력과 이점의 상대적 지위에 위치시키는 위험을 내포한다. 이 역설을 피해갈 방도는 없으며. 사람들이 더 많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수록 특히 심각해진다. 이렇게 리더십과 엘리트주의의 관계는 강력하지만 엘리트주의가 리더십에 고유한 것은 아니다. 비록 영향력과 권위의 허식이 항상 존재하고 오만의 기회가 도처에 널려있지만, 지위와 특권을 거절했던 예수의 리더십을 본받는 다른 길이 있다.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리더십의 실천은 본질적으로 희생적이다. 신실한 현존에 내포된 헌신은 반드시 댓가를 강요한다. 리더십이 희생적이고 비이기적인 이유는 리더십의 실천이 "순종하는 권력"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재능, 자원, 영향력은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 이래 존재하며 신자들은 청지기로써 그것을 책임있게 다루어야 한다. 신실한 현존을 실천하는 것은 삶과 활동의 모든 영역과 수준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번영을 지향하는 헌신을 대표하며, 엘리트주의가 내포하는 지배와는 정반대다. 모든 세대에 걸쳐 리더십의 의무와 교회와 모든 기독교인들의 과제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즉 우리의 개인 삶과 관계, 가족, 일과 레저, 공동체 속에서 천국의 질서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우리가 지닌 관계, 우리가 수행하는 과제,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실현하도록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다. 샬롬의 의무는 우리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다. 여럿인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자가 다른 모두에게 속하기 때문에 이런 의무는 모든 교회가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짊어져야 한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가진 영향력이 클수록 우리가 짊어질 부담도 커진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언약적 헌신으로서의 신실한 현존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헌신과 약속의 신학이다. 헌신은 언약적이기에 그것은 우리가 맺은 관계,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드러나는 강력한 의무다. 그것은 우리 주변 세계의 번영을 지향한다. 성경의 중심적 비유가 결혼이란 사실은 우연이 아니라 그것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합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가 맺은 언약의 기호이자 상징이다. 결혼의 언약적 특성은 신실한 현존의 실천에서 요구되는 헌신과 유사하다. 그것은 참여, 가까움, 친근함이란 이미지다. 그 관계에서 핵심질문은 사랑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다. 언약과 언약 관계는 정의 사상의 기원이기도 하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정의의 원천은 세속적 계몽주의가 아니라 정의를 고통받는 한 집단의 주장이 아니라 고통받는 모든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 속에서 이해했던 기독교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실한 현존의 의무는 무엇인가? 기독교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인간의 번영은 어떤 모습인가? 이런 신실한 현존이 실천되는 수단이 성육신적 샬롬의 제공이라면, 그것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나는 성육신적 샬롬의 구체적 현현이 핵심적으로 믿음, 소망, 사랑을 포함하며 또 이것들이 존재하는 곳에 기쁨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믿음, 소망, 사랑을 개인경건이란 전통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은 예배와 자비의 행위 속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몸에 의해 공유된 믿음, 주장된 소망, 표현된 사랑으로 확장된다. 또한 믿음,소망, 사랑은 인간 공동체 전체에서 공유된 인간의 기본적 필요애 대해 말하기 때문에 보다 폭넓은 특징을 지닌다. 그러므로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언약적 관계와 제도를 형성한다. 그것의 목적은 단지 기독교인만아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의미, 목적, 진리, 아름다움, 소속감, 공평을 육성하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에 대한 이런 포괄적인 이해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반대할 것이며 세상에 대한 그들의 헌신이 비신자들을 설득하여 회심시키는 노력 그 이상의 것을 지향하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이런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정치적 이유로서, 기독교인은 자신이 타인에게 거절한 것을 자신에게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권리는 타인의 권리이기도 하며 또 모든 이를 위한 책임이다. 둘째는 문화적 이유로서, 기독교 신앙의 타당성과 설득력은 그 안에서 의미, 목적, 진리, 아름다움, 소속감이 가능한 문화적 상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생명력과 공유 가능성은 모든 신앙이 타당한 것으로 대접받는 사회적 환경에 의존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포스트모던 세계의 많은 것이 믿음, 소망, 사랑의 이상과 실천에 대조된다. 포스트모던 세계에서는 무의미, 추함, 소외, 무정함, 잔인함을 양산하는 많은 요인들이 존재한다. 근본주의의 정체성은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벌어지는 문화적 박탈감에 대한 반작용으로 부정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근본주의도 결국 허무주의적이다. 근본주의가 허무주의라는 증거는 근본주의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곤란한 문제들에 대해 어떤 창조적 업적이나 건설적 제안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주의를 생산하는 포스트모던 세계와 문화적 논리의 허무주의를 배경으로 신실한 현존의 실천적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신실한 현존의 근저에서 언약적 헌신은 믿음, 소망, 사랑을 양성하고 포스트모던 세계의 문화적 토대를 급진적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이 공격은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그 공격의 본질은 그 안에서부터 새 창조가 출현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자신이 맡은 언약적 의무의 정도에 따라 믿음, 소망, 사랑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실천으로서의 신실한 현존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일의 세계, 그리고 사업과 상업의 제도들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피고용자와 소비자들이 경제적 행위자로서 자신들의 가시적 공헌보다 훨씬 더 큰 본질적 가치를 지닌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 혹은 사업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단순한 계약을 넘어 언약으로 넘어가는 관점에서 다시 개념화하는 것이다. 이런 재개념화는 근본적으로 시장 관계의 확립된 관계들을 바꿀 것이며, 작업 환경도 철저히 인간화할 수 있다. 시각예술과 문화와 음악에서 이런 도전은 학적 탁월함과 예술적 생산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헌신으로 나타날 수 있다. 기독교인 예술가들의 의무는 물질성이 인간 경험에 대한 적절하고 충분한 이해가 아니며, 우리의 삶의 표층에서 눈으로 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영원한 특성과 영구성을 풍부한 상상력과 설득력있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도전은 건축과 도시계획에서 뉴스 미디어와 학계에서, 공적 담론에서 창조적으로 모든 인간의 번영을 지향함으로 나타날 수 있다. 결국 신실한 현존의 실천은 언약적인 관계와 제도를 만든다. 이런 관계와 제도는 의미와 목적과 소속감을 육성하는 공간을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현대세계에 만연한 인간의 도구화에 저항한다. 사람과 피조물의 가치를 단지 효용성으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현대세계에서 우리의 그런 헌신은 경제적 혹은 정치적 토대 위에서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물리적, 미학적, 지적, 사회적 건강을 제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선하고,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삶 속에 보내신 사람들과 그들에게 허락하신 사회적, 물리적 세계와 신자들이 맺은 언약의 일부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개인적으로 짊어져야 할 부담인 동시에 제도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 각각의 직업이나 소명에서 지도자들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모든 자원들을 공통된 명분 속에 동원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이런 노력의 총제적 결과로서 기독교인과 교회 전체는 신자들의 이익이 아니라 모두의 선을 위해 축복, 아름다움, 의미, 목적을 구현할 구조들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신실한 현존의 실천에서 이런 제도적 측면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결정적이다. 일상의 물질적 조건과 사회제도를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국 현재의 기독교적 삶의 증거를 치명적으로 붕괴시키는 개인주의와 관념론으로 끝나고 만다. 이 모든 것 가운데 교회가 가장 중요하다. 교회는 예배와 형성의 공간으로서 이런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촉매일 뿐 아니라 중첩된 네트워크 중에서 결합조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교회는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부름의 생생한 표현을 발견한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목회나 새로운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회생활의 범위와 환경과 영역에서 인간 번영의 비전을 실현하는, 협소하게 정치적이지 않고 공적인 방법들을 만들어 내는 창조적 상상력과 근면함이다. 이것은 개인주의와 관념론 그리고 실용주의에 지배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신실한 현존의 제도적 측면은 새로운 전략이 아니라 새로운 모형의 개인적 집단적 존재이며 포스트모던 세계에서 교회가 세상에 참여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기독교에서 예술을 후원하고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제도를 만든 것은 모두 신실한 현존을 실천했던 전통이다. 이제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시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이 일을 다시 해야 한다. 진실로 삶의 모든 영역과 중요한 모든 질서에서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지적, 경제적,경영적 자원들이 교회와 기독교인들 안에 있다. 이것은 협력과 네트워크, 상호의존, 제도 형성이 가능성을 의미한다. 기독교인들이 혼자서 혹은 신자나 비신자들과 협력할 수 있을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의 지향점은 만인의 복지 향상이다. 가장 실천적인 의미에서 이런 참여의 효용성에 대한 기준은 생명력의 표현을 발견할 수 있는 여러 방식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과 공동체가 건강, 지식, 지혜, 번영, 자유, 관용의 측면에서 성장하는가? 아무런 특권과 이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관심을 받고 가시적 방식으로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 물론 성취의 내용과 정도는 시간과 환경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샬롬이 물질적 풍요와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샬롬은 생명의 선함에 대한 인식, 풍요로움, 그 안에 있는 환희의 경험과 함께 온다. 따라서 샬롬과 함께 우리는 풍부함의 부재 속에도 풍부함을, 흥겨움의 부재 속에 환희를, 어울림의 부재 속에 조화를, 심지어 치료의 부재 속에 건강을 누릴 수 있다. 공공선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에 반대하여, 이런 식으로 타인의 번영을 지향하는 삶은 타인과 삶의 모든 영역에 있는 공동체와 도시를 위해 건설적이고 점증하는 차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3부 6장
2016-05-18 23:39:27
3부 6장 새로운 도시 광장을 향해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세계를 더 나은 쪽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건강한 욕망을 품어왔다. 그리고 그 욕망은 건전한 성경적, 신학적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인들이 과거 못지않게 좋은 의도와 동기에서 선을 실천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 문제는 그런 시도들의 상당 부분을 주도하는 사회 이론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문화가 일반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축적된 가치와 믿음으로 형성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세계변혁의 수단과 목적은 충분한 수의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켜 종국에는 사회질서 속에 그들이 신봉하는 가치와 믿음이 반영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인들이 자주 사회변화를 복음전도와 시민적 갱신, 민주적 정치행동을 추구하는 이유다. 그러나 역사와 사회학의 증거는 이런 종류의 문화 및 문화변혁 이론이 틀렸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 근거한 모든 운동은 실패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견해에 반대해서 나는 가장 심오한 수준의 문화변혁은 문화 생산의 최고 중심에 위치한 제도들 안에서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는 엘리트들의 긴밀한 연대를 통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 기독교의 문화 경제는 주로 문화적 중심보다는 문화적 주변부에서 가장 강력하며 중하급 수준에 머물러있다. 그래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미와 서구의 기독교는 일반적으로 약한 주변부 문화다. 그들은 핵심 신앙과 조직에서 분열되고 일관된 집단적 정체성과 사명이 없으며 그 자체 내에서 분리되었고 내부적 적대감으로 약화되어 있다. 세계변혁에 대한 모든 이야기와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공동체는 세계를 중요한 방식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위치에 좀처럼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문화적 영향력을 계속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결과는 대체로 치명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의 세계변혁이 권력을 내포하고 있고, 또한 기독교인들이 권력 사용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왔던 권력 이론들이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권력 이론은 정복과 지배를 향한 콘스탄티누스적 경향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기독교 보수주의자든 진보주의자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종국에 정치적 지배로 귀결되는 것 외에는 다른 식으로 권력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현 시대의 정신에 순응하여 권력을 정치권력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인처럼 기독교인들도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의 모든 측면을 정치화했다. 보수와 진보의 기독교 활동가들이 각각 정치 영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상처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버리지 못한채 권력의 수단을 수용했다. 현대 기독교의 공적, 정치적 문화는 그런 부정들로 정의되었다. 물론 이것에 불법적인 것은 없지만 그 비극적 모순은 현대의 허무주의에 저항한다는 명분 하에 기독교인들이 권력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와 그것을 부추키는 분노 속에서 허무주의를 영속시킨다는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고 확산시키고 샆어하는 복음의 메시지를 무너뜨린다. 기독교의 문화참여의 주도적 모델은 우파의 방어 패러다임, 좌파의 적합성 패러다임, 신재세례파의 정결 패러다임인데, 각 패러다임은 현대세계에서 가장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작동한다. 우파에게는 현대세계의 세속화, 좌파에게는 자본주의에 근거한 사람과 환경에 대한 착취, 신재세례파에게는 국가와 시장의 폭력이 그들에게 주된 도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패러다임들은 차이와 해체의 도전이 일차적으로 기독교가 처한 핵심적 도전임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 문제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다른 문제들도 일관되고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 선한 의도만으로는 세상에 참여하는데 충분하지 못하며 참여의 구식 모델들은 더 이상 먹혀들지 못한다. 만약 차이와 해체의 도전에 대한 내 생각이 옳다면 구식 모델이 현재의 도전을 충분히 다룰 수 없다. 나는 방어, 적합성, 정결 패러다임에 반대해서 내부에서의 신실한 현존이라는 참여 모델을 제안했다. 이 참여 모델의 토대는 신실한 현존의 신학이다. 바벨론에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렘29:4-7), 기독교인들을 세상의 나그네로 지칭하면서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며 선을 행하고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는 베드로전서의 권면,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며 너희 관용을 모든사람에게 알게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는 바울서신의 권면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나그네로 거하는 도시들의 복지에 헌신해야 한다는 교훈과 일치한다. 이것은 오래된 지혜지만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의 징표를 제시한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치시킨 환경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샬롬을 실행하고 타인을 위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비전이며 모든 평신도가 자신이 수행하는 과제와 직업 속에서 그리고 삶의 행보 속에서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가지고 감당해야 할 부담이다. 하나님의 눈에 중요한 것은 신실한 현존이다. 그리고 신실한 현존은 기독교인들의 세상에 대한 개별적 참여를 넘어서 자신이 속한 제도 속으로, 그리고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 내에서 새로운 제도를 형성하는 것으로까지 확장될 필요가 있다. 이 견해는 기독교인이 타인과 세상을 공유하고 세상의 번영에 기여해야 한다는 인식을 전제하고 있다. 또한 이 견해에는 공적 영역은 자율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된다는 현대의 지배적인 자유주의 개념에 반대하여, 공적 다양성이 다중적 전통과 공동체에 의해 집단적으로 정의된다는 인식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도시 광장에 헌신하는 것은 다원주의적 세계에서 인간의 번영이라는 최고의 이상과 실천에 기독교 공동체가 헌신하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은 언제가 반드시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 교회가 함께 살아야 하고 신중하고 활동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긴장들이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선을 행하려는 열망과 다른 한편으로는 선을 추구하면서 자신의 최악의 성향으로부터 발생하는 긴장이다. 첫번째 긴장은 콘스탄티누스적 유혹에서 작동한다. 기독교는 문화구원, 하나님나라 확장, 하나님나라 건설, 세계변혁, 문화교정, 문화개혁, 세계변혁이란 언어를 버리고 그에 대한 일체의 담론을 포기해야 한다. 정복과 장악과 지배를 의미하는 그런 언어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 아니다. 기독교 우파와 좌파의 정치신학은 모두 이런 언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상적인 것은 탈-콘스탄타누스적 참여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배를 추구하지 않는 방식으로, 또한 지배에 반대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증언을 정의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목적은 문화화복이나 문화장악 그리고 문화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가 처한 세계는 후기기독교문회이며, 기독교 공동체는 그 어느 시대보다 이방의 땅에서 영적인 거류민이 되었다. 예레미야의 말처럼 현대의 기독교인들도 이런 거류민 신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가 거부해야 하는 것은 단순히 콘스탄티누스적 유혹만이 아니라 그것을 옹호하는 권력 추구다. 지배와 모든 것의 정치화 경향이 오늘날 기독교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 이런 식의 방향은 기독교의 공적 증언의 상당부분을 기독교가 마땅히 제공해야 하는 증언과 정반대 방향으로 변형시켜 버린다. 신실한 현존의 신학에 근거한 새로운 도시광장의 비전은 오늘날 기독교의 공적 증언의 상당부분을 정의하고 있는 분노를 거절하게 만들며 권력을 탈정치적 견해로 이끈다. 신실한 현존은 기독교인들이 법, 정책, 정치적 동원을 통해 신앙을 표현하려고 시도하기 보다 침묵하며 샬롬의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공적으로 실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것은 시민적 개인주의를 권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고 더 나은 방법으로 세상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이다. 또한 신실한 현존의 신학에 뿌리를 둔 새로운 도시광장의 비전은 기독교 내의 차이들의 많은 부분을 가볍게 다루도록 이끌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차이가 존재하는 신자들의 공동체 내에서 신실한 현존을 통해 사랑과 은총을 확대할 수 없다면 그들은 그 공동체 밖 사람들에게까지 은총을 확장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가 주목해야 하는 두 번째 긴장은 세상과의 긴장이다. 교회는 긍정과 대립 사이의 변증법 속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도시 광장의 추구가 우리 시대의 대단히 비인간적인 경향과 운동에 대해, 그리고 정사와 권세가 이런 파괴적 경향에 영감을 불어넣고 제도화하고 합법화하는 방식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비판하면서 전개된다는 뜻이다. 기독교인은 지역교회의 중심성을 긍정함으로써 세상과의 이런 긴장을 초래해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신 선물이요 특히 우리 시대에 허락하신 전략적 선물인 이유는 그것이 공동체요 제도라는 사실이다. 강력한 이상과 진리, 내러티브, 행동과 관계유형, 사회조직 그리고 광범위한 자원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제도로서의 교회는 그것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총합보다 더 큰 하나의 사회적 실재다. 또한 우리는 강력한 공동체로서의 교회 안에서 현대세계에 만연한 곤경들을 견딜 수 있는 관계적 수단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형성의 과업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나의 공동체요 제도로서 교회는 하나의 타당성 구조이며 또한 대중 문화가 제공한 것에 대안적 형성을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유일한 구조다. 모든 수준에서 인간의 번영을 하나의 비전으로 형성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기독교인들에게 제공한 건강하고 상호의존적이며 예배하는 공동체의 지향성과 사회적, 경제적, 지적, 문화적 자원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급진적 정통주의와 신재세례파의 신학자들이 교회를 독특한 관행 속에서 발언되는 독특한 내러티브, 하나님나라에 의해 그것의 형태와 실체가 정의되는 독특한 목적, 그리고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역사하는 성령의 현존을 특징으로 하는 일종의 폴리스나 대안적 도시라고 말한 것은 정확히 옳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생활로 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반제도적 경향이 건강한 발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그런 경향은 개인적 선택을 중심으로해서 자아를 주권자로 만드는 소비자 논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향은 혁명적 기독교의 표현이라기 보다 현대적 개인주의와 소비주의이며 그 결과는 최악의 현대문화에 건설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구조마저 붕괴시킬 것이다. 거류민의 삶의 맥락에서 긍정과 대립의 긴장은 핵심적일 뿐 아니라 건강하고, 그런 긴장의 형성은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가 새로운 도시 광장에 공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가 이런 긴장을 어떤 식으로 견딜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신실한 현존에 근거한 새로운 도시광장의 추구는 전례가 없던 일이 아니라 사실 교회의 오래된 전통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세상에 어떻게 참여하는가에 대한 인식은 동일하다. 교회가 세상의 문화로부터 격리되고 그 문화의 본질과 내적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며 그 안에서 활동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성장하지도 못할 것이고 공동선에도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신실한 현존의 방식으로 세상에 참여하면 과연 세상은 변할 것인가? 이것은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세상과 역사가 통제되고 관리될 수 있다는 모호한 전제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은 기독교인들이 일차적인 것을 이차적인 것에 종속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선에 대한 하나의 특정한 이해가 목적이 될 때, 선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의는 신속하게 잔인함이 되고, 정의는 빠르게 불의로 돌변한다. 실로 역사는 이 논리의 피비린내 나는 결과로 가득하고 그 논리는 비록 암묵적이지만 지금까지 지속되는 문화전쟁의 모든 국면과 영역 안에 존재한다. 세상의 의를 확립하거나, 선한 가치를 창조하거나, 정의를 실현하거나, 평화를 이루는 일은 우리가 대단한 열정으로 돌보고 추구해야 할 것이지만, 이것은 모두 하나님이라는 일차적 선과 기독교인들이 하는 모든 일에서 그분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일차적 과업과 비교할 때 이차적이다. 이것은 값싼 경건주의가 아니다. 사실 정사와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억압적 제도들에 대한 승리였다. 그것은 현실은 있는 그대로이고, 모든 것은 본래 있어야 할 모습 그대로이며, 세상의 질서는 확립되었기에 변경할 수 없고, 세상의 작동규칙을 우리는 용납하고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에 대한 승리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와 사회의 필연성들에 묶이지 않고 그것들로 부터 자유롭다. 그분이 정사와 권세를 깨뜨린 결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바로 이런 인식이 모든 기독교인이 자신들의 관계와 과업, 영향력의 범주, 그리고 도시안에서 적극적, 창조적, 건설적으로 선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역사적 순간에 실제로 무엇이 성취될 것인지 말하기는 어렵고 여기에는 피할 수 없는 강력한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분명히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한 세상이나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모든 타인을 위해 신실한 존재로서 샬롬을 추구함으로써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장,정치, 복지 그리고 한국교회- 고세훈 (0) | 2023.05.11 |
---|---|
기독교의 공공성과 공공신학 (0) | 2023.05.11 |
언약신학과 조직신학- 송영재 (0) | 2023.05.11 |
교회사 속의 성령 (0) | 2023.05.11 |
오늘날의 하나님나라- 스캇 맥나이트 (0) | 2023.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