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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바울 복음의 핵심

바울 복음의 핵심

2014-11-26 14:34:16


  복음에 대한 왜곡은 구원에 대한 오해를 초래한다. 하나님은 약속으로 찾아오시고 약속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신다.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이 믿음은 행위에 대한 반제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의 능력에 참여하는 삶이다.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복음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먼저 지도가 선명해져야한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이다.  믿음의 반제로 행위를 제시하는 듯한 야고보서의 메시지가 고민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맹목이 아니다. 신앙이 맹목적이 되면 믿음이란 말로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합리화하기 쉽다. 루터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씨름하고 고민해야 한다. 물론 루터처럼 야고보서를 버리면 안되고 바울과 야고보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바울과 야고보, 복음서의 메시지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 은혜의 의미를 오해해서 충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울이 믿음이나 은혜를 말하는 맥락은 행위의 반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가 인간적 수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와 은혜는 생명을 줄 수 없는 거짓 가치들로 부터 자유하게 힌다. 이 자유를 누림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누리게 되는데 이것이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방식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복음에는 역동성이 나타난다.

 

  복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전제는 행위심판의 원리이다.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행위로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하신다. 대충 살아도 구원을 받는 그런 복음은 없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우리를 행위로, 삶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십자가의 공로는 우리의 무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가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게하신다. 구원은 결국 삶과 연결될 수 밖에 없다. 이게 수긍이 안되면 그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없다.

 

 구원은 미이 얻었고 완료된 것이 아니다. 구원의 길에서 탕락 가능성은 항상 있다. 바울이 말한 돌감람나무와 참감람나무 비유는 구원의 탈락 가능성에 대한 무서운 경고이다. 복음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핵심은 바울의 믿음 은혜를 새롭게 보는 것인데 그것은 믿음이나 은혜가 행위의 반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의 문맥은 그렇다. 이신칭의가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경륜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엳게 하시려는 것이다. 십자가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고 성령은 우리를 부름에 합당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는데 아브라함의 맏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은혜)에 대한 신뢰였고 반응이었다. 은혜란 하나님의 값없는 약속이지만 믿음을 요구한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의 반제가 아니라 오히려 성령의 역사를 통해 행위를 지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말하면서 믿음의 순종이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믿음이 행위의 반제가 아니듯이 은혜도 행위의 반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그리고. 인간의 거짓 가치를 부인하는 하나님의 선택이다.

 

  십자가의 참된 능력은 새로운 삶의 능력이고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거짓 가치는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거짓 가치를 추구하는 결과는 죽음이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은혜는 거짓 가치로 부터 자유를 준다. 은혜는 값없이, 조건없이 차별이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다. 은헤는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 약속에 대한 신뢰로서 믿음을 요구한다. 생명의 능력은 인간적 조작이 불가능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역사이며 죽은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울의 문맥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공짜로 주어진다. 그러나 로마서 5장에서 보듯이 은혜에는 또다른 차원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은혜이다. 아담이 물려준 공간이 죄와 죽음이라면 그리스도가 물려준 공간은 은혜와 영생이다. 공간은 지배 개념을 동반한다. 죄의 공간에서는 죄의 지배를 받고 은혜의 공간에서는 은혜의 지배를 받는다. 죽음이 죄를 통해 지배한다면 은혜는 의를 통하여 지배함으로 영생에 이르게 한다. 의를 통해 지배한다는 것은 죄와 단절되고 거룩한 열매를 맺는 삶을 의미한다. 부정과 불법으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의와 거룩으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은혜의 통치아래 들어가는 것이고 그 결과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에 합당한 반응으로서 행위가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면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은혜의 지배이고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믿음이나 은혜는 행위의 반제가 아니라 행위를 지향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믿음이니 은혜니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삶을 정당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죄의 개념이 약화되어 죄를 두려워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은혜와 믿음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복음이 왜곡됨으로 죄의식이 없어진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 교회의 도덕적 갱신을 기대할 수 없다.

 

바울의 복음과 복음서의 복음

2014-09-12 14:03:42


  바울의 복음은 순종의 복음이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데 이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복음을 믿는 자를 순종케 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선포한 복음인 하나님나라의 실재가 무엇인자를 말해준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나라인데 그것은 통치의 대상인 하나님나라 백성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나라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서 순종이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요약되는 바울의 복음은 복음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 도래의 복음과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바로 그 나라의 백성을 창조하고 그 나라의 백성을 순종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종의 복음인 바울의 복음은 곧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하나님나라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통치나 순종이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방식은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율법이라는 구체적인 방식이 없이 순종이나 통치가 역사 가운데 나타날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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