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말하다.
2014-11-24 16:50:25
구약 성경에는 이상한 책이 두권있는데 그것은 에스더서와 아가서이다. 왜 이 두 책이 이상한 책인가하면 그 책에는 종교적인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제사, 기도이런 말도 없고 더구나 하나님이란 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두 책은 정경성에 의심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책은 어였하게 기독교 성경에서 정경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다. 히브리 성경에서도 이 두 책이 속한 카테고리가 다섯 두루마리인 걸 보면 아마 히브리인들도 이 책이 역사서나 시가서나 선지서 어디에도 분류하기 힘든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지 않았나 싶다.
에스더서는 종교적 언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러티브 자체는 대단히 종교적이다. 포로로 사로잡혀간 바벨론 땅에서 유대인들이 몰살을 당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하여 다시 살아날 뿐 아니라 유대인을 죽이려던 원수들이 오히려 몰살을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뜻이니 은혜니 이런 말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를 실감나게 그 이야기를 통해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에스더서를 보면서 하나님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는 구절이 생각난다. 에스더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포로지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걸핏하면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의 은혜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니 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종교적 언어로 미화하는 위선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에스더서는 일체의 종교적 언어없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무엇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살 수 없을까? 자신이 크리스찬이니 구원을 받았느니 이런 말하지 않고도 정말 크리스찬이며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실제에서 능력있게 드러낼 수 없는건가?
아가서는 에스더보다도 더 비종교적이다. 에스더서는 비록 종교적 언어가 없어도 그 내러티브 자체가 대단히 종교적인 주제임을 암시적으로 보여주지만 아가서의 내러테브에는 그런 암시도 없다. 남녀간의 사랑 그것도 정신적인 것뿐 아니라 대단히 노골적인 육체의 사랑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 해석 전통에서는 아가서가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사랑을 남녀의 사랑으로 비유하여 노래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자연스럽지 못하기는 매 한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아가서를 통하여 세상의 어떤 사랑 이야기 보다고 더 진실되고 완전한 사람의 모습을 본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지은 "노래중에 노래", 즉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노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가서에서는 남녀의 깊고 아름다운 전인격적인 사랑의 고백이 풍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아가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남녀로 지으셨다. 즉 인간이 남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인 것이다. 그렇다면 남녀간의 진실되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남녀간의 진실되고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는 삼위 하나님간의 완전한 사랑의 관계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의 반영으로서의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아가서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아가서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사랑보다는 차라리 언약백성인 이스라엘간의 진실한 사랑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종교적 위선이 넘쳐나는 우리 시대에 종교적 언어가 절제될 필요가 있다. 언어가 아닌 삶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인도를 드러낼 수 없을까? 에스더서와 아가서는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시하며 또한 어떻게 하나님없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살제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건 아닐까? 에스더서와 아가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없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을 배우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