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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율법에 대해 다시 생각함

율법에 대해 다시 생각함

2014-11-14 16:32:36


  신학의 역사에서 율법에 대한 혼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며 이 혼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도 율법은 복음이나 은혜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고 율법주의는 곧 행위구원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생각할 때 당연히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며 특히 시내산에서 십계명과 세부법을 받은 때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본격적인 율법의 기원은 이 때부터 시작한다고 보아야 한다.  시내산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주어진 것이 율법이다. 물론 안식일 계명과 같이 이전에도 단순한 형태로 주어진 규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인 의미에서 율법은 시내산 언약에서 등장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율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내산 언약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 시내산 언약은 그 자체로 독립된 사건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한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이제 출애굽한 이스라엘 공동체와 갱신하신 것이 시내산 언약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것도 그렇고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언약을 갱신한 것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은 아브라함 언약에서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 것은 이미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실현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은 무엇인가? 시내산 언약의 뿌리인 아브라함 언약은 시내산 언약에 비하면 대단히 일방적인 언약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에게 무수한 후손을 약속하셨고 또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었고 그 믿음의 표로서 할례를 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언약은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이루어진 은혜언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 언약의 확대판인 시내산 언약 역시 본질적으로 은혜언약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내산 언약에서는 아브라함 언약에는 없던 율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은혜 언약에서 율법이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는 주지 않으셨던 율법을 이스라엘 공동체에세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수한 후손을 주시고 또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한 약속의 실현으로 이스라엘은 출애굽하였고 지금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에 시내산 언약이 맺어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런 약속을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약속을 하신 때는 노아 시대 이후 세상이 다시 죄악 가운데 빠져 들어가고 있을 때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고 그의 후손들을 통하여 더럽혀진 세상을 새롭게 하시길 의도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은 가나안 족속의 죄악으로 더렵혀진 가나안 땅에 가서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그 땅을 새롭게 하라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도중에 주어진 율법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가서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율법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붙들어야 한다. 율법은 언약 백성이 되거나 은혜를 받는 방편이나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은혜 안에 있는 언약 백성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약속을 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신 목적은 바로 그들에게 주어진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율법의 정체성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이  정체성은 구약과 신약에서 변함없이 동일하다.

 

  그런데 율법에 대한 논란은 신약성경 특히 바울 서신에 와서 발생한다. 복음서의 메시지는 구약에서 나타난  율법의 근본적 정체성과 충돌하지 않는데 바울 서신은 상당히 충돌하는 듯이 보이고 특히 갈라디아서가 그런 논란의 중심본문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정통 유대인었던 바울이 율법에 대한 생각을 구약과 다르게 생각했다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당연한 얘기이지만 너무 늦게 인지된 진리, 즉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가 아니라는 샌더스의 주장은 이미 성경 신학자들 사이에 의문의 여지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제 2성전기 이후의 유대교가 율법주의적 종교, 즉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특히 복음서에서 율법에 대한 태도는 구약의 율법의 의미와 동일하다. 오히려 산상보훈은 구약 율법의 기준을 훨씬  더 엄격하고 순수하게 내면화함으로써 진정으로 지켜야 할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예수님이 책망한 것은 율법을 지키는 척하지만 사실은 지키지 않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형식적 태도였지 율법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할례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의 위선이었다. 율법에 대한 그런 잘못된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 율법은 정죄하고 죽이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 자들에게 율법은 이제 살리는 성령의 법이 된다고 말한다.

 

  동일한 율법이 위선적인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율법 자체를 반대한 적이 없다. 바울은 반대한 것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태도이며 특별히 위선적 태도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강조한 것은 율법에 대한 바른 태도이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하게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삶의 준칙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율법이 없다면 우리가 순종해야 할 기준이 없어지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부르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참된 언약백성으로 살게하시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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