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느헤미야의 신학
2014-11-10 16:50:17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성전은 파괴되었고 예루살렘은 멸망을 당했으니 상상도 못하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따라서 포로기는 이스라엘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체성의 혼란이 생긴 시대였다. 바벨론 땅에 살던 유대 포로들이 부르는 노래인 시편 137편은 이런 현실을 보여준다.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등장하자 바벨론과 다른 정책이 시행되었는데 그것은 피지배 국민들의 전통종교와 삶의 방식을 존중한 것과 포로귀환을 허용한 것이다. 페르시아의 이런 정책은 고레스 원통(Cyrus cylinder)이라는 고고학적 유물에도 나타나있다.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이야기가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의 기록이다. 현재 형태의 에스라 느헤미야는 최소한 주전 5세기 말 이후의 시점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두 책은 한권의 책이었으나 주후 4세기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한 벌게이트 성경에서 부터 두 책으로 분리되어 오늘까지 이른다. 에스라서는 7장 27절 부터 9장 마지막까지 에스라가 일인칭으로 등장하다가 10장부터 다시 3인칭으로 바뀌고 있다. 느헤미야는 1-7장까지 그리고 12, 13장에서 근데군데 일인칭으로 등장한다. 일인칭으로 등장하는 단락은 회고록이나 비망록 양식을 취하여 에스라와 느헤미아가 자신이 직접 관찰하고 참여했던 커다란 사건들에 촛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에스라 느헤미야서에는 수많은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구성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주관적일 수 있는 회고록의 신방성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
에스라서의 첫부분은 주전 538년에 귀환한 공동체가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포로들이 돌아오기 전에 유대땅에 살고 있던 이들로 말미암아 성전 건축 작업은 장벽에 부딪힌다. 앗수르에 의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식민되어 살던 그 땅 백성들(암 하이레츠)은 성전 재건에 동참하고자 했으나 귀한 공동체가 거부하였고 결국 그들은 페르시아 당국을 동원하여 다리오 왕 이년까지 성전재건을 중단시키고 말았다. 주전 520년 다리오왕 이년에 성전건축은 다시 재개되었고 다리오 왕 6년인 주전 516년 드디어 제2성전이 완공된다. 이 일후에(에스라 7:1) 에스라가 일단의 무리들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귀환하는데 제사장이면서 율법학자인 그는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목적으로 오게된다. 에스라는 솔로몬 당시의 대제사장이었더 사독의 후손이었고 그 족보는 이론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스라는 사독의 후예로서 대제사장의 정통 계보였던 것이다. 에스라가 돌아온 것이 아닥사스다 7년인 458년이니 성전이 완공된지 무려 5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에스라가 돌아온 후 이방 혼인문제가 터진 것을 보면 1차 귀환 공동체는 성전을 완공하고 제의를 수행하였지만 정작 율법에 불순종하는 삶을 그들의 조상처럼 또 반복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성전과 제사 제도라는 종교적 방편이 실제 삶에서 순종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태가 또 나타난 것이다. 에스라의 회개 기도를 보면 이스라엘은 조상 때 부터 거역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스라는 율법을 연구 준행 가르침으로 이런 현실을 개혁하려고 돌아왔던 것이다. 한편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파견되었는데 (에스라 7:1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시의 시대 상황속에서 율법에 따른 개혁을 가능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고 동시에 이 부분은 세속 권력과 종교 개혁의 결합이 나타난 사례이기도 하다. 세속권력의 이익과 종교개혁의 소망이 서로 일치한 것이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20년인 주전 445년에 귀환했으며 에스라는 에스라 7장 8-9절에 따르면 아닥사스다 7년에 돌아왔으니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13년 먼저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느헤미야서에 나타나는 예루살렘의 모습은 에스라가 13년동안 아무 개혁도 이루어내지 못한 것 처럼 보인다. 에스라 4장은 1차 귀한 공동체가 성전을 완성한 후에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 재위에 성벽 재건도 시도하였지만 그 땅에 사는 자들의 방해로 중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마도 에스라는 자신의 소명대로 율법을 연구 준행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었던 성벽 재건은 느헤미야가 오기까지 답보상태였던 것 같다. 느헤미야 1장 3절은 성벽이 재건되지 못함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온 것 같지 않은 비참한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참고 시편 85편, 126편) 느헤미야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운 것은 이사야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느헤미야가 반응한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 모두 자신들이 살던 시대 속에서 가야할 길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자발적으로 응한 이들이다. 이전의 구약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직접 들은 이들이었다면 에스라 느헤미야는 상황속에서 자신들의 부르심을 발견하고 거기에 응답했던 이들이었다. 에스라와 마찬가지로 느헤미야도 역시 페르시아 왕실의 후원하에 유대땅의 회복을 위한 사역을 감당한다. 페르시아 왕에 의해 유대 땅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온 느헤미야가 착수한 작업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려고 한 것은 외부와 금을 그으려고 한 것인가? 아니면 성전을 보호하려고 한 것인가? 느헤미야의 싸움은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싸움이었는데 그는 외환을 가지고 내환을 덮지 않았다. 내부를 제대로 바로 잡아야 외환을 이기는 힘이 생긴다. 느헤미야 5장은 느헤미야 개혁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레위기의 희년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느헤미야는 희년 공동체를 추구한 것 같다. 성벽 완성이 이어지는 느헤미야 7장은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을 소개하는데 에스라 2장의 것과 동일하다.
에스라-느헤미야의 주제는 성전과 성벽의 재건이다. 에스라서는 성전 재건을 느헤미야서는 성벽 재건을 다루지만 성벽 완공을 하고 나서 예루살렘 전체가 "거룩한 성"으로 불리게 된다.(느11:1) 성벽 재건 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명단과 활동에 대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다루어진 것은 성벽 재건이 단지 군사적인 목적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신앙적으로 결집시키고 구별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깨닫게 한다. 이러한 구별은 당연히 배타성을 전제할 수 밖에 없다. 이방의 지배하에 살고 있고 사방이 이방인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는 현실에서 귀환공동체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은 가장 중요한 당면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이방인 배척은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문제였지만 후대에 이르러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의 인종적인 배타적 태도를 유발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에스라 느헤미야 개혁의 근본에는 모세의 율법책이 있다. 이전에는 율법이 구전되었다면 에스라 시대에는 기록된 율법이 있었다. 결국 에스라 느헤미야 개혁의 중심에는 여호와의 율법을 준수하는 삶의 회복이 놓였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에스라 10장에는 불순종의 명단이 나오지만 느헤미야 10장에는 순종의 명단이 나오는데 이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협동 사역으로 공동체가 율법을 준수하는 삶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에스라서에서 처음으로 유대인(Jew) 혹은 예후드란 말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남왕국이었던 유다(Judah) 혹은 예후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 속주였던 팔레스타인 남부지역을 의미한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활동한 제2 성전 시기를 후기유대교 시기(Later Judaism period)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예언자 종교인 이스라엘의 종교가 에스라 시대에 울법종교로 변질되었고 에스라의 후예가 바라새인이라는 벨하우젠의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개혁을 왜곡하여 이스라엘 종교가 형식화되고 위선적으로 변질했다는 반유대주의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에스라 느헤미야의 개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