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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다시 보는 이신칭의 교리

다시 보는 이신칭의 교리

2014-07-21 01:05:46


 

 성경에서 중요하며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의"라는 단어일 것이다. 이 단어는 "의롭다" 혹은 "의인"이라는 단어로 자주 사용된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의란 무엇인가. 히브리어 "체다카"에 해당하는 이 "의"라는 말은 단순히 옳음, 혹은 정의라는 의미 이전에 어떤 언약관계를 전제하고 언약관계가 있는 양 당사자간의 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체다카라는 개념은 바른 관계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래서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행위는 의로운 행위라하고 그런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며 의롭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언약 관계를 전제한 "언약적 의"인 것이다. 그래서 의로움의 반대말인 불의란 언약적 의무를 행하지 않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언약관계를 배반하는 것이 "불의" 인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 란 바로 이런 불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배반한 것도 죄이고 사람과 사람간이 관계를 배반한 것도 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죄는 처음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배반함으로 시작되었고 이 죄는 결국 사람간의 관계도 배반하는 죄로 발전해 간 것을 볼 수 있다.

 

좌가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관계를 깨는 주범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제외한 다른 피조물에게 이런 죄라는 개념이 없는 것은 죄는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관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자로서 하나님과의 특별하고 유일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직 사람에게만 죄라는 개념이 발생하는 것이다. 죄는 언약관계를 배반한 불의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헤세드(사랑 자비, 인애, 긍휼)와 에메트(공의 신실, 공평, 정의)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언약에 언제나 신실하신(언약적 의무를 항상 다하시는 의로우심) 하나님이 언약 상대방인 사람에 대한 그 언약적 의로움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언약적 반응 혹은 언약적 행동을 표현하는 말이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약 상대방인 사람에 대하여 헤세드를 나타내실 때도 있고 에메트는 나타내실 때도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두가지 다른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동일힌 언약적 신실하심 혹은 언약적 의에서 비롯되는 다른 행동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언약 관계를 전제하고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이 언약적 의무를 다할 때, 언약 관계에는 진정한 샬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늘 의로움을 요구하는 것이며 그 의로움의 준칙은 구체적인 계명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주어진 언약적 의무가 바로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구약의 율법이다. 이 율법을 지킴으로 사람은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며 그것이 사람의 의로움이 되는 것이며 그럴 때 하나님과 사람의 언약 관계는 바르게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유명한 구절이 있고 이것이 이신칭의라는 교리의 강력한 증거본문으로 채택되었다.  여기에도 "의" 란 말이 등장하는데 당연히 이 말의 의미는 이미 설명한  것과 동일한 개념이다.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언약관계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고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복음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편에서 먼저 언약적 의무를 행하셨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에는 관계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로마서는 복음을 하나님이 구약에서 그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구약에 약속된 그 아들이 드디어 오셨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약속의 성취로서 그 아들의 오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이 약속한 아들을 보내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언약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의가 나타난 것이란 의미가 된다.

 

그런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항상 함께 등장하는 말이 믿음이다. 이 말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믿음을 요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믿음을 요구하는 것일까? 그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관계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 편에서 행하신 언약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 언약적 의로움에 대한 사람의 반응으로서 믿음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사람편의 언약적 신실함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은 사람편에서 행하는 언약적 신실함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음이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믿음이 사람편의 언약적 의무를 다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의로움으로 인정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믿음은 의로운 행위인 것이고 의로움 그 자체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의 성경적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신칭의를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됨으로 실제로는 의롭지 않지만 의롭다는 법정적 판결을 받은 것으로 이해한 전통적 해석은 성경적 지지를 받기 힘들다. 성경이 말하는 의란 전가를 통해 이루어지는 법정적 판결이 아니라 관계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믿음은 바로 그 관계적 의무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신칭의에 대한 전통적 해석이 가진 창의와 성화 사이의 갈등의 문제를 해소하는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전통적 해석에서 칭의는 의의 전가를 통한 법정적 판결이기 때문에 의로움을 이미 소유하였거나 의로운 지위를 이미 확보한 것으로 칭의를 이해하였고 그래서 구원을 이미 받고 완성된 것이며 결코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판결로 이해함으로써 성화란 칭의를 얻은 자의 도덕적 의무정도로 생각하고 그것이 이미 받은 구원, 이미 얻은 의로움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신자의 거룩한 삶이란 그저 바람직한 덕목이며 구원에 필수적인 행위로서 요구되는 것은 아니게 되었고 칭의와 성화가 분리되는 길을 가게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 개념을 따라서 칭의를 하나님의 언약적 의에 대한 사람의 언약적 반응인 믿음으로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새롭게 시작한 것이지 믿음으로 구원이 끝난 것이 아니게 된다. 오히려 이제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가 열린 것이므로 이제 관계 회복의 원래 목적인 관계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서 언약적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신칭의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서 야기된 칭의와 성화의 이원론적 갈등이 발생하지 않는다. 믿음은 관계의 시작이고 이제 관계속에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복된 관계속에서 의로운 삶을 살지 않을 때 이미 회복된 관계는 다시 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의 준엄한 경고이다. 그래서 관계의 시작이란 의미에서 구원은 과거혹은 현재적성격을 가지지만 관계의 유지와 발전이란 차원에서는 반드시 미래적이고 종말론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사도가 이미 받은 구원을 즐거워하라고 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