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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중생론에 대하여

중생론에 대하여

2014-01-07 01:34:04


    바빙크는 회심을 중생의 열매라고 말한다 중생이 생명의 씨가 심기워진 것아라면 회심은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은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중생이 성령의 신비하고 무의식적 역사라면 그 결과가 의식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회심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생과 회심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있을 수 있음을 상정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도 씨가 뿌려졌다면 열매를 맺어야하고 만일 열매가 없다면 씨가 뿌려지지 않았거나 죽은 씨라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중생은 회심으로서 그 참됨 여부가 검증되어야 한다. 중생이 없는 회심이 가짜이듯이 회심이 없는 중생도 가짜라고 말해야 한다

  하나님나라에 관한 교훈인 씨뿌리는 비유는 분명히 씨를 뿌려도 열매가 없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은 열매가 없다면 가짜라는 것이다. 조직신학적으로는 열매 없는 경우는 외적부르심이고 열매 맺는 경우는 내적부르심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지만 아뭏튼 그것이 외적인지 내적부르심인지는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는것이다. 중생이라는 성령의 초월적, 무의식적 역사는 회심이라는 역사적, 의식적 결과로서 확증되어야 한다. 중생은 신비한 것이므로 검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신비주의이거나 맹목주의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벌콥은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적 역사이고 인간은 피동적인데 반하여 회심에 있어서는 인간은 협동하도록 요청받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중생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지만 회심은 의식적으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중생의 역사가 일어난 인간에게 회심에 이르려는 의식적 애씀이 요구된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벌콥은 그런 애씀은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행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이지만 아뭏든 안간은 중생에서와 달리  회시에서는  피동적이 아니고 협력적이라는 말이다.

 

  바빙크나 벌콥은 모두 좁은 의미의 중생 개념을 가지고 있으며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고 있지만 회심을 중생의 결과나 열매로 보고있다.  그런데 연중론에서는 중생을 회심을 포함한 넓은 의미로 보려는 것이다. 즉 좁은 의미의 중생은 중생의 시작으로 보고 회심을 중생의 완성으로 보려는 것이다. 이상의 두가지 진술은 중생과 회심사이에 일정한 간격이 있으며 중생한 회심에 이르기까지는 인간의 애씀이 요구된다는 연중론의 주장을 지지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연중론이 중생을 이렇게 넓은 의미로 보는 것은 중생을 사변적이 아니라 영적 실제로 본 17-18세기 개혁신학의 관점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을 넓은 관점으로 보는 것은 매우 실제적인 영적 유익이 있다. 중생을 좁은 관점으로만 보면 중생의 체험을 통한 확신도 없는 가짓 중생자는 양산할 위험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중생을 관념상의 차원으로 다루고 중생을 이미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이고 이후의 실제적 변화를  성화의 단계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때 개인적이나 교회적으로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를 규명하기 어렵게 된다.

 

 

언약적 중생론

2014-01-29 17:47:58


 구약에 나타난 언약의 연속성 상에서 우리는 새 언약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새 언약의 중보자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이고 그리스도가 언약의 중보자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언약사상은 구약에서 기원하며 창조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의 언약사상은 하나님과 인간의 특수한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관계속에서 언약개념이 태동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 교제가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언약적 관계가 수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언약은 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지만 관계가 언약은 아니고 관계에 기초한 쌍방간 권리와 의무가 언약의 내용을 구성한다.

 

이 문제를 생각하려면 하나님의 인간창조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야한다.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다. 여기서 언약의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고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근본적이고 불변하는 내용이다. 결국 언약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수단이고 언약을 통하여 창조목적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창조언약이라고 부를 것이다 성경의 언약사상의 뿌리는 바로 이 창조언약이다. 이 창조언약이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으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새 언약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창조언약의 전제요 기초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훼손되어 버렸다. 그러므로 언약이 다시 수립되기 위하여 깨어진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이 일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루셨고 신약에 와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하였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들과 언약을 세우셨는데 그 언약이 바로 시내산 언약이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은 창조언약의 반영이다. 창조언약에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다면 시내산 언약에서는 가나안땅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진 것이며 창조언약에서 선악과 금령으로 대표된 포괄적인 하나님의 뜻이 제시되었다면 시내산언약에서는 십계명과 세부법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이어진 역사를 보듯이 이스라엘은 첫사람 아담처럼 불순종함으로 언약을 배반하였다. 문제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간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수술되야만 했다. 새 언약은 바로 인간마음의 근본적인 수술을 통해 세워진 언약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본문제는 죄의 문제이다. 죄책으로 죽을수 밖에 없으며 죄성으로 선을 행헐수 없게 된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수술은 곧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죄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던 언약적 존재인 인간을 짓누르던 멍에가 깨뜨려진 것이다. 이제 인간은 자유로운 언약적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게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새언약이 아니라 새언약을 맺을수 있는 관계가 준비된 것이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거듭난다는 말로 표현된 이것이 바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그 멍에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 것이다. 마치 죽은 듯이 선을 행하기에 무능한 자에게 생명이 주어진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새 생명을 주셔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이제 언약적 존재로 다시 세우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출발이다. 마치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시내산 언약을 맺기 위한 출발이었듯이 거듭남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첫 단계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창조목적을 떠나서 하나님나라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차음 창조언약에서 주어졌던 것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다스리되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후 승천하기시 전에 제자들에게 소위 대사명을 부여하셨는데 그들에게 주어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사람들을 제자삼고 세례를 주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할 점은 구약의 언약과 신약의 언약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 되었다는 점이다. 구약에서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언약적 관계가 수립되었듯이 신약에서도 그런 언약관계가 수립되었지만 그 관계의 차원은 엄청 나게 다르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가 언약의 중보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어떻게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것인가? 그것은 언약의 파트너인 인간을 자신과 연합시키는 방식으로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즉 이제 신약의 언약의 파트너가 된 인간은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을 하게 되었고 그리스도로 부터 모든 영적인 유익을 누리면서 언약적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온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가운데 들어간 것이고 하나님나라의 삶도 그리스도와의 신비힌 연합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신약의 언약적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그러니까 거듭남 중생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이 연합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결국 엄밀히 말하면 중생을 한 이후에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성령은 죄인을 부르시어 그리스도와 연합을 시키시는 분이시고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이 죄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생명을 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 생명적 연합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적 목적은 모두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요  구원의 목적이다. 중생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요 새언약을 이루는 출발인 것이다.

 

연속적 중생론

2014-01-09 01:48:27


  1. 부르심(소명)- 중생의 머리부분

 

     외적 부르심은 성령이 역사하실 때 내적 부르심으로 전환된다.

     이때 성령은 통상적으로 은혜의 방편인 말씀을 사용하신다.

 

     내적 부르심으로 생명의 씨가 심기워지고 죽은 자가 살아난다.

     이 때 부르심을 듣고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죽은 자를 살려서 반응하도록 하는 성령의 사역이 바로 내적소명이다.

     

     이것은 성령의 일방적 사역으로서 순간적이며 무의식적으로 발생한다.

     이것이 원리적인 의미(좁은 의미)의 중생이다. 

     

 

 2. 회심( 회개와 믿음)- 중생의 꼬리부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반응적 응답이 회심이다.

   회심은 죄를 통회하는 회개와 복음을 수납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회심을 통하여 원리적인 중생(좁은 의미 중생)에서 심기워진 생명의 씨가 발현된다.

   이것이 실제적인 의미(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이 된다.

   

   이것은 의식적이고 인격적인 과정이며 부르심 이후 즉각 혹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하여 발생한다.

 

 

 3. 연중론 

 

   연중론에서 말하는 중생은 부르심으로 시작하여  부르심에 대한 반응인

   회심으로 완성되는 실제적인 의미( 넓은 의미)의 중생이다.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

2014-01-29 22:37:19


구약의 언약 사상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으로 발전되었다. 

구약에서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듯이

신약에서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새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자신과 신자들을 연합시키는 방식으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다.

 

그리스도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신자들을 위한 모든 영적 유익을 준비하여 놓으셨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또한 영원한 의로움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과 의로움을 받아 누리게 된다.

 

그런데  죄인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믿음을 불러 일으키심으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그러니까 성령의 부르심의 목적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그러므로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 성령의 부르심은 완결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에는 과정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부르심으로 좁은 의미의 중생이 시작된다면 죄인이 부르심에

반응함으로(회개와 믿음) 넓은 의미의 중생이 완결되는 것이고

중생이 완결되는 시점에서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중생을 회심이 일어나기 전의 좁은 의미에만 국한 시켜 순간적이라고만

본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는 때가 모호하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 아니시고 그리스도이시다.

왜냐하면 죄인이 받는 생명은 그리스도가 준비하신 생명이고 성령은 

죄인을 불러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역할을 하시기 때문이다.

중생은 바로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이 죄인에게 주어짐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듯이 새로운 영적 생명이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칭의란 바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이 연합을 통하여 죄인에게 전가됨으로

아직 의롭지 않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죄책의 처리)

그리고 성화란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연합을 통하여 죄인에게 나누어짐으로 실제적으로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죄성의 처리)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 속에 내주하시면서

그리스도와 죄인의 연합을 견고하게 붙드시어

죄인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의로움 속에서 

언약적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시고 이끄신다.

 

언약적 기독론

2014-02-01 23:24:39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핵심이다

언약이란 창조목적 곧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수립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그러므로 언약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수단이다

그리스도는 창조목적의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언약적 맥락에서 이해하여야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언약적 기독론이다.

기독론에서 부터 모든 교리가 파생된다.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 모두 기독론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기독론을 언약적으로 이해하면 나머지 교리도

언약적으로 전개된다.

언약을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이해한 전통신학의

언약이해는 언약을 인간구원의 수단으로 이해한 것이다.

조직신학에 창조론이 없다. 창조를 떠난 모든 교리는 그 목적성을 잃어버린다.

 

중생(Regeneration)

2014-10-03 17:35:40


 중생, 칭의, 양자됨, 회심, 성화 등등은 전통적으로 구원의 서정으로 이해되어왔지만 이것은 과도하게 이론화된 것이고 구원론을 사변화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동일한 구원 사건에 대한 다양한  측면들 다양한 특성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중생(거듭남) Rebirth, Regeneration

 

중생은 구원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현상임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영적 증생을 잘 보여주는 예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다시 태어나 새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구원을 의미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구원을 받는 것을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중생을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으로 말씀하셨지만 성경 다른 곳에는 하나님으로 부터 나는 것(요1:13, 요일5:1)으로 혹은  진리의 말씀으로 태어나는 것(벧전 1:23, 약1:18)으로 표현한다. 이 모든 말씀의 의미는 중생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성령임이 그 의미를 깨닫게 해주심으로 우리가 믿게되는 것이 중생인 것이다. 그래서 중생을 성령으로 태어나고 말씀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중생의 특징은 무엇인가?  중생은 분명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사후적으로 중생의 현상을 보고 알 뿐이다. 마치 바람이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를 듣고 바람이 분 것을 알게되듯이 그러하다. 중생이 성령의 사역이란 말은 중생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이란 의미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이므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날 수 없다.(엡2:1) 하나님이 우리는 다시 살리신 것이다.(엡2:4-5) 마치 우리가 태어난 후에게 자신이 태어난 것을 알게되듯이 영적 태어남인 중생도 마찬가지이다. 중생의 결과로서 으리가 복음에 반응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구원받은 사실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모두 중생의 결과로 생기는 현상인 것이다. 또한 중생은 단한번 순간에 일어난다. 태어남이 순간적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중생에 대한 인식은 점진적일 수 있지만 중생 자체가 점진적은 아니다. 중생의 시점을 모르거나 혹 중생의 순간에 극적인 체험이 없으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거짓이다. 중생의 시점을 안다거나 극적인 체험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중생이후에 얼마나 하나님과 같은 사랑의 관계를 현재적으로 누리느냐가 중요하다. 

 

중생의 결과는 무엇인가? 중생 그 자체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신비한 영적 사실이지만 중생의 결과는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중생의 결과를 보고 우리의 중생을 인식하게 된다. 중생의 결과의 중요한 것은 복음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란 의미이다. 요한일서 5장 1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 하나님께로터 낳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 곳곳에는 복음에 대한 믿음과 회개를 촉구하고 강조한다. 중생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신비한 일이므로 성경이 중생을 촉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믿음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과 회개를 해야 중생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믿음과 회개는 중생의 원인이 아니라 중생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하는 태도도는 양면적이어야 한다. 복음에 대한 반응으로서 믿음과 회개를 촉구하는 동시에 그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이 주도하신 중생의 결과임을 동시에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중생은 전 존재의 변화를 수반한다.고린도 후서 5:17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중생은 영혼만의 태어남이 아니라 전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의미이다. 구원의 핵심은 죄로 부터의 구원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중생자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결과중의 하나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한일서 3:9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한다.물론 중생한 즉기 완전히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지만 중생자는 죄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된다. 또한 중생자는 자신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감사 신뢰의 마음이 생겨나며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교제하기를 기뻐한다. 이런 모든 것들을 성경은 성령의 열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중생은 성령의 역사여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열매는 종교적 활동이나 이적이나 영적 능력이 아니라 인격과 삶의 거룩함이다. 결론적으로 중생은 삶의 방향과 목적의 전환을 가져온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된다. (고전 10:31) 그러나 중생은 결코 완성이 아니고 완성으로 나아가는 출발일 뿐이다. 더 자라고 성숙해가야 할 것이 많이 남아있다. 중생은 출발을 의미할 뿐이고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