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Justification)와 중생(Regeneration)의 관계
2014-01-03 12:21:58
칭의(Justification) 그리고 중생(Regeneration)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칭의는 주로 법정적 의미로서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로움이 신자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신자들이 가진 의가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가 가지신 의로움인데 그것이 신자들의 의로움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칭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 혹은 이신득의 교리이다.
이러한 칭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한 자들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는 전제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은 그리스도는 택한 자들을 법적이고 공적으로 대표하여 대신 형벌을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택한 자들의 죽음이 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택한 자들의 부활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칭의교리는 택자들이 아무런 행위를 한 것이 없이 그리스도의 공로적 행위로 말미암아 획득된 의로움을 값없이 전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칭의는 값없는 것이지만 반드시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의의 전가는 반드시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칭의를 얻는 믿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칭의가 믿음으로 주어지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칭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와 택자들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는 택자들을 공적이고 법적으로 대표하는 관계에 있고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택자들의 죽음으로 간주되며 그리스도의 부활이 택자들의 부활로 간주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가리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법적이고 공적인 대표의 관계의 실체는 그리스도와 택자와의 실제적인 연합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연합이 바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국 칭의를 얻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가져오는 믿음인 것이며 오직 이 믿음으로 택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그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부활이 곧 택자의 죽음과 부활이 되는 것이다.
중생 교리는 이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중생이란 성령의 역사인데 택한 자에게 새로운 영적 본성이 주어지는 것이다. 결국 중생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모든 유익을 택자들에게 적용시키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중생을 통하여 택자들에게 믿음이 주어지고 이 믿음은 택자들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키는 수단이 된다.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교리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 곧 거듭남이란 첫번째 아담에서 연합되어 있던 자가 죽고 두번째 아담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첫 아담과 연합되어 있을 때는 필연적으로 그의 죄책과 죄성과도 연합되어 있으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는 새로운 출생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수여받게 되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칭의의 실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은 중생을 통하여 주어지며 그 믿음을 통하여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신자들에게 전가되는 것이다. 이 연합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죽음이 신자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신자의 부활이 되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영적 유익이 신자의 유익이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없는 믿음이 없으며 믿음없는 칭의가 없을 것이니 결국 중생없는 칭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칭의를 얻는 믿음은 오직 중생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 이후에 성화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기 전에 중생없는 칭의를 염려해야 한다. 중생없는 칭의는 헛되고 거짓된 칭의일 뿐이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못된 열매를 맺듯이 진정한 칭의는 반드시 성화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고 선명한 중생의 교리의 확립은 매우 근본적이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칭의 (Justification)
2014-10-03 18:49:20
하나님의 구원은 그 스케일이 엄청나게 크기 때문에 거기에 내포된 의미도 다양하고 풍부하다. 칭의 교리는 구원의 다채로운 측면의 또 다른 면을 설명해준다.
우선적으로 칭의는 법정적 개념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신다. 비록 지금 형벌은 유예되고 있지만 반드시 그 형벌은 집행될 것이다. 인간은 마치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을 앞두고 있는 사형수와 같다고 할 것이다. 칭의란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고 즉 죄인이 아니라고 법정에서 선언한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하는 것이다. 칭의 개념이 법정적이란 말은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자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무죄라고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면 유죄 판결을 받아야 하는데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을 칭의라고 한다. 실제로는 죄가 있는데 죄가 없다고 인정한다는 것이요 실제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전가(imputation)를 통해 이루어진다. 전가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는데 하나는 소극적 전가로서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께 넘어가는 전가이다. 이 전가를 통하여 내가 받을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으신 것이다. 나의 죄를 대신지고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 바로 소극적 전가교리이다. 소극적 전가 교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용서헤 주는가를 설명해준다. 두번째는 적극적 전가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확득하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죄의 용서만 가고는 불충분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여 의로운 자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이 적극적 전가 교리이다. 이처럼 칭의는 소극적 전가와 적극적 전자 이 두가지 전가를 근거로 이루어지는 법적인 선포이다.
두번째로 칭의는 관계적 개념이다. 의롭게 되었다는 법적이 선언은 법적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의 회복을 가져온다. 그래서 로마서 5장 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고 말한다. 원래 히브리적 사고에서 "의" 라는 개념은 관계를 맺은 쌍방이 그 상대방을 향하여 언약적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칭의 곧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은 단순히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언약적 의무를 다할 것을 전제한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에서 하나님과 실제적인 화목을 누림이 중요하고 그런 실제적이 누림을 통하여 칭의가 비로소 의미있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전가 교리는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헤요 우리의 공로가 아마것도 없음을 말해준다. 우리는 행위가 아나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하지만 믿음 조차도 우리가 자랑할 수 행위가 아니라 단순히 전가의 통로일 뿐이다. 믿음은 자기 무력감의 고백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표명이다. 그러나 칭의가 행위를 베제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칭의를 강조하다 보면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야고보의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야고보는 이신칭의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칭의를 얻는 믿음을 다시 정의한 것이다. 칭의를 얻는 믿음은 가짜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아라야 된다는 것이고 참된 믿음에는 행함이 있다는 의미이다. 칭의가 구원의 한 측면일진대 구원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듯이 믿음의 진위 여부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고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존프레임의 말은 정확하다. "구원은 행위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일으키는 믿음을 통해서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마찬가지로 칭의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지며 또한 출발일 뿐이다. 칭의는 내적인 변화를 조건으로 하지 않는 법정적 선언이지만 내적인 변화를 전제하는 것이다. 의롭다함을 받았디면 실제적으로 의로운 삶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칭의는 법정적 개념뿐 아니라 관계적 개념도 동시에 있는 것이다. 구원은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이다. 그러므로 구원의 한 측면인 칭의 역시종말론적 완성을 기다린다. 칭의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칭의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언약을 지키면서 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언약을 깨뜨리면 관계는 파기되고 언약은 무효가 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르 인용하면서
칭의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의 때까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세윤 교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믿음으로 칭의되고 의인의 신분을 얻은 사람은 이제 최후의 심판 때 칭의의 완성을 받을 때까지 자신이 진입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있어야 한다." 물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우리의 소원이나애씀과 무관하게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칭의는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렇게 해서 칭의는 성화의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칭의는 성화를 낳으며 성화없는 칭의는 효과없는 사문서로 전락한다.
칭의 교리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 인간의 가능성이나 인본주의적 종교가 무의미함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칭의 교리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한다. 또한 칭의 교리는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세상의 상식이나 기준과 다름을 보여준다. 세상을 상을 받을 자격이나 능력이 있는 자에게 상을 준다. 그러나 죄인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의 은헤는 이런 세상 기준을 뒤집는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니이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다고 말한다.(고전 1:26-28) 하나님의 은혜는 자격이나 능력이 없는 자에게 상을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의미이다. 공정함도 중요하지만 공정함은 소극적이고 기존 질서를 전제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 세상을 치유하고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공정함을 넘어서는 은혜의 원리이다. 칭의는 무조건적 은혜를 말하지만 우리를 절대 방종하게 만들지 않는다. 칭의 교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자라면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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