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의 의미에 대하여
2013-08-18 22:57:06
성찬식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예식이다. 성찬 예식은 빵과 포도주로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함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극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님은 유월절 마지막 식사 자리에서 이 예식을 제정하셨고 이 예식을 행함으로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이후 교회의 전통에서 성찬 예식은 예배의식의 중요한 형태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종교개혁기에는 성찬예식의 해석에 대한 심각한 논쟁이 있었고 그 의견차이는 개혁자들간의 연합에 큰 장애로 대두되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예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살펴보아야 한다.
전통적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리적 죽음으로 주로 해석하고 성찬예식을 통하여 신자들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전통적 해석을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을 대리적 죽음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런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신자들의 삶을 그 사랑에 대한 보답과 감사로 주로 규정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리적 죽음이라기 보다는 대표적 죽음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히 구약의 제사제도에서 희생제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 드려지는 희생제물에게 제사인은 안수를 하는데 이 안수의 의미는 분명 희생제물이 제사인을 대리하기 보다는 대표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 제사에서 희생동물이 제사인을 대리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희생동물의 죽음은 제사인의 죽음을 대표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전통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속죄적 죽음으로 주로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의 제사제도에는 죄와 관련된 제사뿐만 아니라 죄와 관계가 없는 제사제도가 있음을 주목하여야 한다. 반드시 죄와 관련된 제사는 속죄제뿐이고 속건제나 번제, 화목제 그리고 소제는 죄와 관련이 없는 제사이다. 이렇게 보면 구약의 제사는 죄와 관련된 제사보다는 죄와 관련되지 않은 제사가 더 많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구약의 제사중 죄와 관련된 제사에 국한 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나타난 구약의 제사제도의 의미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죄와 관련된 것이든 아니든 제사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죄적 죽음에 국한시키기 보다는 하나님과 신약의 언약백성인 신자들의 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키는 총체적 사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대리가 아닌 대표로 그리고 속죄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총제적 사역으로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예식의 의미를 새롭게 바로볼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살을 상징하는 떡을 떼며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잔을 마실 때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 되며 우리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대표하는 죽음이므로 그의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고 한 바울의 유명한 선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됨으로 그의 부활에도 연합된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성찬예식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할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이 단순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부정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유지, 발전되는 긍정적이고 총체적 차원임을 인식하게 된다. 성찬예식을 이렇게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서 성찬예식은 단순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관계의 회복, 유지 발전을 위하여 제정된 구약의 제사제도가 신약적으로 성취된 것이며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순한 대속적 죽음이 아니라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언약적 죽음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성찬식을 다시 생각함
2013-11-17 17:41:32
교회의 전통 예배식에서 성찬식은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교회에서 성찬식에 대한 인식은 빈약한 것 같다. 주님이 성찬식을 제정하신 때가 유월절 기념 절기인 것은 의미 심장하다. 주님은 성찬식을 통하여 자신의 임박한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인데 그것을 유월절에 행하신 것은 유월절의 의미와 주님의 죽음의 의미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중의 첫 절기이며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을 나타내는 절기이다. 유월절은 사실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었는데 이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첫째,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였으며 둘째, 애굽의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심판이요 동시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는 멸망의 심판인 것이다. 그러니까 유월절 절기는하나님의 이중적 역사를 기념하는 절기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이 유월절 절기에 임박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으며 또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유월절과 연관시켜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으신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죄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대표한 사람들의 죄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대속의 교리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표하신 것이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을( 소위 선택된 백성들) 대표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육신 곧 사람이 되심이 인류 보편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였지 특정한 선택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편 인류를 지으신 분이시지 특정한 사람들만을 지으신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죽음 역시 보편 인류와 관련된 죽음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몰론 이 말이 만인구원이나 보편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사람이 되신 일이 특정 사람들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보편 인류와 관련된 것이므로 그의 죽음 역시 그렇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은 보편 인류가 죽어야 할 죽음을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며 하나님의 형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편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준다. 유월절 사건으로 돌아가 보면 당시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이스라엘이 제외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이 죽음을 피한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보고 천사들이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애굽이 멸망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했기 때문이요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이다. 만일 애굽인도 집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다면 그들도 구원을 받았을 것이요 만일 이스라엘이라도 그 말을 믿지 않고 피를 바르지 않았다면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사건이요. 보편 인류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구원 사건임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것이 심판 사건이었음을 먼저 말해야 한다. 물론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므로 자기 죄로 심판을 받은 것이 아니요 자신이 대표한 보편 인류의 죄로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심판 사건이 구원 사건이 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사건임을 알고 그 죽음이 자신의 죄를 대신한 대속적 죽음인 것을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 사건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보편 인류를 대표한 죽음이었지만 보편 인류를 위한 대속적 죽음은 아닌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가 받았던 진노를 당하게 될 것이요 믿는 자는 그리스도가 대신 진노를 받았으므로 그 진노를 면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믿는 자에게는 대속적 죽음이 되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진노의 죽음이 되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나타나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택함을 받은 자를 위한 하나님의 대속과 용서가 나타난 이중적 죽음인 것이다.
성찬식은 바로 주님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임을 믿는 자들을 위하여 제정된 예식인 것이다. 이는 마치 유월절에 어린 양의 피가 자신들을 구원함을 믿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유월절 예식이 제장된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성찬예식을 정할 때 주님은 자신의 죽음의 대속적 의미를 떡과 포도주를 사용하여 가르치셨다. 주님의 깊고 심각한 계시가 떡과 포도주라는 일상적인 음식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사실 떡과 포도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먹는 주식이고 일상의 음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상징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성찬예식이 예배의 형태로 교회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신자들이 함께 모여서 먹고 마시는 일 자체를 통하여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일은 특별한 교회적 예배식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일상적인 음식을 가지고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가르치신 것은 바로 우리의 일상에서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가 되새겨져야 되고 발현되어야 할 것을 염두에 두신 것이 아닐까? 매일 매일 먹고 마실 때 마다, 특별히 신자들이 함께 먹고 마실 때마다 자신이 먹는 떡이 주님의 몸이고 자신이 마시는 피가 주님의 피임을 자각하면서 주님의 대속적 죽음을 기억하고 주님의 죽음이 자신의 죽음이며 나아가 자신도 주님처럼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하며 떡과 포도주가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 주듯이 주님의 대속적 죽음이 신자의 삶의 근본임을 경험하면서 매일 매일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음식을 먹고 마실 때 마다 우리의 일상이 성찬 예식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일상을 통하여 주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죽음으로 경험되고 그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는 실제를 체험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로 성찬은 단순히 예배의식을 넘어서 주님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임을 믿는 자가 먹고 마시는 일상을 통하여 대속적 죽음을 감사하고 주님과 연합하는 기쁨을 누리는 삶의 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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