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소고

다시 읽는 주 기도문

다시 읽는 주 기도문

2013-08-04 22:20:34


     주님이 가르쳐 주신 주 기도문은 기도의 모범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사상을 풍성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가 바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우리의 기도의 중심이어야 함을 주 기도문은 분명히 보여준다. 복음의 핵심은 죄사함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이다. 복음은 죄사함이라는 내용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지향한다. 그래서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죄사함도 복음의 중요한 내용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죄사함과 하나님나라는 동등한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목적이라면 죄사함은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첫 관문 정도인 것이다. 주  기도문은 이러한 하나님나라 사상을 풍성하게 가르쳐 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기도하지 못하며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나라 사상을 반영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며 우리가 기도할 바를 가르치실 것이다.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을 여는 이 첫 구절은 주기도문의 서문일 뿐만 아니라 주기도문의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바른 신관은 바른 신앙의 토대이다. 바른 신관이 없이 바른 신앙이 세워질 수 없다. 이 구절은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바른 신관을 제시하고 있다.

 

 1.1.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 함은 우리는 땅에 거하는 존재임을 전제한 것이다. 그 분이 하늘에 계신 분이라함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대 주재이심을 의미한다. 우리는 바로 그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전능자 하나님, 그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으며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중을 꿰뚫어 보시는 분, 바로 그 분 앞에 우리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2.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나 개인을 상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라는 관계에 선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우리의 구성원이됨으로써 비로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은 오늘날 현대의 개인구원 신학을 치료하는 중요한 신관이다. 나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근본이고 중요하며 모든 것의 출발이라는 신앙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앞에 부수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나 개인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없다면 그가 가진 신관은 성경적 신관에서 빗나간 것임을 인정하여야 한다. 구약적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신관은 자명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신 것이지 그 구성원 개개인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각 개인은 공동체의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 공동체가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공동체로 부터의 퇴출은 곧 하나님과의 언약밖으로 나감을 의미했던 것이다.

 

1.3.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주님은 자신이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을 우리에게도 아버지라 부르라고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들이셨으므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는데 이제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우리는 이것을 일견 우리와 하나님의 친밀한 관계에 대한 유비로 생각하기 쉬운데 아버지라는 호칭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중대한 계시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호칭한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구약적 맥락으로 보면 매우 획기적인 호칭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들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과는 형제 지간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의 신분이며 동시에 예수님과 우리도 하나님안에서 형제임을 전제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생물학적인 유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아버지와아들의 관계는 구약적 맥락을 가진 용어이다. 구약 성경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공적이고 법적인 상속자 혹은 후계자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가 그의 아들들이란 관계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공적이고 법적인 상속자나 후계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경우도 마친가지이다.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부자관계는 당연히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는 하나님이 가지신 권세를 법적이고 공적으로 상속하는 후계자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법적이고 공적인 상속자들로 세워졌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은 대단히 언약적인 호칭이다. 구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의미인데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고 할 때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분이시라고 이해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라는 구약의 언약적 표현이 신약적으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라는 호칭은 대단히 언약적 표현이고 구약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2.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2.1. 하나님의 이름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였다면 신약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아버지이시다. 구약의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듯이 신약의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약의 신자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이름은 아버지이시다. 주 기도문의 두번째 청원은 바로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약의 신자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아들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 곧 아들들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란 기도자인 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오직 아들에 의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오직 아들만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외에 어떤 누구에게도 자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 받기를 기대하시지 않고 오직 아들에게만 기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공적이고 법적인 언약 관계를 맺고 있는 신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이다.

 

 

2.2 거룩의 의미

 

  그렇다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거룩이란 말은 언약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거룩이란 말은 언약관계속에서 나오는 개념인 것이다. 이것은 언약 관계를 가진 쌍방이 서로 언약의 상대방을 특별하게 구별된 존재로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이란 말에 포함된 윤리적 도덕적 개념들은 여디서 파생된 2차적 개념이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는 명령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오직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시듯이 이스라엘도 하나님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는 언약적 충성의 요구인 것이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에서 주어진 십계명의 ' 너는 네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는 첫 계명은 바로 이스라엘이 언약 맺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라는 언약적 충성의 요구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아들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아들다운 삶을 살게 될 때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들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바라며 아버지외에 어떠한 것도 신뢰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삶이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고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이 아들로서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삶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미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거룩히 여실 자들은 오직 아들 밖에는 없다. 이버지는 바로 그런 아들을 찾으시는 것이다. 아들중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바로 아버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시는 탁월한 모범의 삶을 사셨고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세우신 것이다.

 

 

3. 나라가 임하옵시며

 

  여기서 나라는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킬 것이다. 주님이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셨듯이 신자들이 구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라가 임하옵시고' 라는 이 기도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 라는 앞의 기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고' 라는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자들이 아들다운 삶을 살겠다는 소원과 결심을 아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나라가 임하옵시며' 라는 기도는 바로 신자들이 아들다운 삶을 살게될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진리의 고백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저절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아들다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 , 아버지가 거룩히 여기심을 받게 될 때만 임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신자들을 통하여 이루시는 나라라는 중대한 진리가 여기서 도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들의 언약적 충성을 통하여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인 것이다. 그 나라는 아들중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언약적 충성으로 시작되었고 이제 그 나라는 예수님의 형제된 아들들 곧 신약의 신자들의 거룩한 삶을 통하여 이 땅에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며 성령님은 신자들에게 임하여 내주하시며 역사하고 계신 것이다.

 

 

4.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나라의 두가지 중대한 성격을 보여준다.

 

4.1.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과 아버지 아들이라는 언약을 맺은 아들들이다. 이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다. 그러다면 아들들이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구약적으로는 십계명으로 표현된 율법이고 신약적으로는 산상보훈으로 표현된 주님의 교훈일 것이다. 이 두가지는 표현은 다르지만 그 법정신은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 곧 아들다운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삶이며 하나님외에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는 언약적 순결함의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 중의 뜻이며 이것은 창조시에 주어진 선악과 금령의 정신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었으며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하나님께 다한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순종을 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진다.

 

4.2.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 땅에 임하는 나라이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죽어서 가는 나라라면 주님이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시지 않았을 것이다.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선포하신 것은 그 나라가 이 땅에 가까이 임하였다는 의미이지  하늘에 가까이 임한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언약을 맺은 신약의 신자들이 살아가는 이 땅과 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늘에서는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 땅에서 살게 될 때 그 나라는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주인공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홀로 이루시는 나라도 아니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언약적 충성과 열심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인 신약의 신자들의 존재이유와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만일 아들들이 그 나라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아들들은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인 아버지를 더럽히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언약 백성에게 언약 배반은 곧 존재 이유의 상실을 초래한다. 아담의 범죄이후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나 노아의 홍수로 인류와 피조세계가 멸망한 사건이나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진멸된 일들은 모두 이것에 대한 역사적 증거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기도는 기도자가 자신이 존재해야 할 가치가 있고 이유가 있음을 전제한 기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기도를 듣고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셔야 할 언약적 책임이 있으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산상보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하신 것이다.

 

 

6.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일용항 양식을 구한 기도에 이어 등장하는 것이 죄사함에 대한 기도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죄란 개념은 하나님께 짓는 죄가 아니라 신자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죄를 가르킨다. 신자 상호간에 서로를 대하여 저지르는 여러가지 잘못들과 실수들 실패들 갈등과 오해, 미움, 그런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이 기도는 신자들의 간에 발생하는 이런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중요함을 가르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버지 아들들의 언약관계를 맺은 아들들의 공동체를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동체안의 갈등이나 불화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큰 장애로 작용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런 문제들을 적극적을 해결해 나아가야 하는데 그 해결방법은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것이다. 시시비비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가 먼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만이 공동체안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원리임을 이 기도는 가르쳐 준다. 그럴 때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의 용서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이 기도는 분명히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신자 공동체안의 신자간의 용서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일만 달란트 빚진자의  비유는 잘 보여준다.

 

 

7.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마지막 기도는 시험과 악의 문제에 대한 것이다. 아담의 범죄는 최초의 시험자 뱀의 시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교묘한 영적 유혹이었으며 악의 구덩이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악의 세력의 공격이 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유혹 혹은 시험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분명히 인간이 감당핳 수  없는 영적인 악의 세력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막으려고 온갖 책략을 다 사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그래서 바울은 사단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신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사단의 공격은 늘 유혹과 시험의 형태로 다가온다. 우리가 시험에 들 때 우리는 악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사단은 시험을 통하여 우리를 악으로 이끄는 것임을 선악과 사건은 잘 보여준다. 사단은 우리를 강제로 어떻게 굴복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은 최초의 아들이었던 아담에게 그러하였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아들들인 신약의 신자들도 시험하여 악으로 이끌려고 하는 것이다. 사단이 시험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오도하고 진리를 진리아닌 것과 교묘하게 섞어서 속이는 사이비 방식으로 다가온다. 선악과 사건에서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광야 시험은 사단의 시험의 성격과 방식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을 싸워서 이기신 방식이우리 하나님의 아들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그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서는 것이다. 예수님이 광야 시험에서 완전한 승리를 하신 것은 우리의 승리의 보장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의 훌륭한 모범이 된다. 바로 그 싸움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싸우는 그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악한 권세와 정사와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의 승리없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임할 수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우리 앞서 그 싸움을 싸우셨고 완벽한 승리를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가 자동적으로 우리의 승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예수님의 남은 싸움을 싸워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며 그래서 이 기도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마지막 간구가 되는 것이다.

 

 

'나의 소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찬식의 의미에 대하여  (0) 2023.05.01
언약의 종류와 역사적 전개  (0) 2023.05.01
신학과 신앙  (0) 2023.05.01
창세기 1-11장에 대한 묵상  (0) 2023.05.01
씨뿌리는 비유를 다시 생각함  (0) 2023.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