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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창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창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2013-05-18 21:36:02


   하나님의 계시를 여는 창세기는 엄청난 계시들로 가득차 있다. 창세기는 성경 계시의 시작이라는 의미뿐 아니라 성경 계시의 토대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창세기는 명백히 1-11장의 기록과 12장 이후의 기록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는 창조를 중심으로한 인류 역사가 출발하는 거대 계시이고 후반부는 아브람의 등장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는 기록이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두가지 역사의 출발을 알리는 기록인데 하나는 인류역사의 출발이요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인 셈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역사의 출발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 두가지 역사가 갖는 상관관계에 대하여 주목할 것이다.

 

1. 인류 역사의 출발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웅대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최초의 자계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초의 자계시로 부터 하나님의 계시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두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신 일을 선포하시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점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자신이 인간을 비롯한 만물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가를 선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히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을 비롯한 만유를 지으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계시를 받는 모든 존재들은 자신이 피조물임을 명심하고 창조주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1장 1절의 위대한 선포는 성경의 모든 계시의 가장 근본이고 출발이 된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 인간 창조가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는데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 존재의 유일한 정체성이며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두가지를 명하셨는데 첫째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었다. 하나님이 아담만을 지으신 것이 아니라 하와를 지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존재는 남자와 여자로 구성되는 것이지 남자나 여자 혼자서는 인간이란 존재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따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으로 부터 하와를 지으심으로 남자와 여자는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을 돕는 배필로 지으심으로써 남자와 여자를 동역자의 관계로 지으셨다. 이리하여 아담과 하와는하나님의 두가지 명령에 따라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 그리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는 동역자인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선악과 금령은 만물을 다스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헝상으로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만물을 다스려야 한다는 진리의 계시이다. 선악과 금령에 덧붙여진 사망의 형별은 불순종은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상실케 한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그런데 인간이 선악과 금령에 불순종하였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창조의 불완전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인간을 불순종할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지으신 것은 인간 창조의 완전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은 지극히 자발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성경의 위대한 계시를 만나게 된다. 첫째로 인간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점이다. 둘째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전적으로 자발적인 순종을 요구하셨다는 점이다. 이 두가지로 부터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매우 쌍방적인 관계를 가진 존재라는 계시를 만나게 된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고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하나님과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인 관계에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었고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인간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경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이 요구되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간은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진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불순종은 인류 역사의 첫단추를 잘못 꿰고 말았다. 가인의 역사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함의 역사이며 그 말로는 홍수 사건이라는 비통하고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홍수 사건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하나님의 동역자로 세워진 인간들이 멸절 당하였고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할 동물들도 함께 멸절 당한 것이다.  홍수 사건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난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을 웅변적을 보여준다.  인간 존재는 위대하지만 그 자체로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을 때만 위대한 것이다.

 

 

2.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

 

  이미 11장에서 셈의 족보 가운데 아브람이 나타나고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시작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세가지 약속을 해주신다. 첫번째는 땅의 약속이다. 물론 이 당시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이 보여주시겠다고 하는 땅은 아브람의 후손에게 약속된 땅이었다. 두번째는 씨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이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  세번째는 복의 약속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복이 될 것이다. 그래서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람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현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람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기근과 생명의 위협이었다. 그리고 가나안땅에 거한지 25년이 지나도록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애굽여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브람의 씨가 아니었다.

 

  아브람의 일대기에서 하나님은 반복하여 땅의 약속과 씨의 약속을 하신다. 그 내용은 아브람의 후손이 큰 나라를 이루어 가나안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람이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요구하신 것은 믿음이었다. 그  믿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확신하는 것이요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었다. 약속과 현실의 괴리를 넘어서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믿음 뿐이었다. 드디어 하나님은 아브람이 99세때에 나타나셔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사래의 아름을 사라라고 고쳐주신다. 그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만 세우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대대 후손사이에 세워지는 영원한 언약이었다. 이 언약이후에 언약의 성취로서 이삭이 태어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로서 주어진 이삭을 오히려 죽이라고 명하신 것이다. 이 역설적인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요구일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아브라함은 이 사건을 통하여 배웠던 것이다.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할 막벨라굴을 돈을 주고 사는데 이것은 아브람의 믿음의 행동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땅을 주실 것을 믿고 그곳에서 뼈를 묻기를 작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400년을 종살이 할 것이요 그 이후에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올 것을 미리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약속이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을 믿고 약속의 땅에 사라와 함께 자신의 뼈도 묻으려고 한 것이다. 이삭과 야곱도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묻혔으며 요셉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애굽을 떠날 때 반드시 자기 해골을 메고 나가 약속의 땅에 매장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야곱이 식구들을 데리고 애굽을 향할 때 식솔의 숫자는 70명에 불과하였고 자신들은 기약없이 약속의 땅을 떠났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가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참음으로 기다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 여기셨으며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세가지 약속은 하나님나라의 약속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선포는 때가 찻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신 것이다.

 

 

3. 두가지 역사의 상관관계

 

  아담으로 부터 시작된 인류의 역사와 아브라함으로 부터 출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창세기의 두가지 주제인데 이 두가지 역사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노아의 홍수 사건이후에 하나님은 왜 셋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인가? 그리고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의 약속을 하신 것인가? 그리고 그 약속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두가지 역사의 상관관계를 알게될 때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노아의 훙수사건은 일견 하나님의 창조의 실패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와 그 식구들을 보존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비록 아담의 불순종과 가인의 후예의 악행으로 하나님의 창조경륜이 훼손되는 듯이 보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창조 경륜을 포기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 역시 당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시려는 경륜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시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적 도구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이는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족속의 죄악으로 더러워진 땅을 새롭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서 삶으로써 더렵혀진 그 땅을 깨끗게 만들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에게 땅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신 것 그리고 그 다스림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진리의 계시가 아브라함의 역사를 통하여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대로 지으신 것 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주신 것 처럼 아브라함에게는 후손의 큰 나라를 이룬다는 약속이 주어진다. 또한 아담에게 땅을 다스리는 사명을 주신 것 처럼 아브라함에게도 그 후손이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이 약속된 것은 단순한 땅의 약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할 것이 전제된 것이었다. 더럽혀진 그 땅을 새롭게 하라고 그 땅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다면 그들도 그 땅에서 쫒겨날 것이 경고된 것이다. 이것도 아담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땅을 다스려야 하는 사명을 가진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11장의 인류 역사의 시작에서 주어진 계시는 12장 이후에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다시 주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계시의 본질은 동일한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고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창조경륜을 이루신다는 진리인 것이다. 다른 점은 씨와 땅의 범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전반부가 아담으로 대표되는 인류 전체였다면 후반부는 이스라엘에 국한되었다는 것이고 또한 땅의 범위도 전반부는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이었다면 후반부는 가나안 땅에 국한된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담에게 계시하셨던 창조 경륜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다시 역사 가운데 계시하셨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전반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창조경륜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다시 풍부하게 역사적으로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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