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나라
2013-03-15 21:15:51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유일한 존재임을 계시하고 있다 .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에 기초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유일한 존재라면 하나님의 형상이야 말로 인간과 다른 피조물을 구별짓는 유일한 구별점이 될 것이다. 인용된 성경본문은 하나님의 형상 혹은 모양이 무엇인가에 대한 단서를 분명히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려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고 특별히 자기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다스림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 만유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닮아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간이 지음을 받은 것이라면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통치의 능력일 것이다. 이것은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다른 피조물과 인간을 구별짓는 현저하고도 유일한 구별점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이 가진 통치력은 단순히 지배하고 정복하는 통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과 원리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조직하며 다스리는 능력을 포함한 것이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문명과 학문, 과학기술들이 바로 인간의 이런 통치력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하나님처럼 통치력을 가짐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통치력에 기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전통신학은 인간의 문화활동을 하나님의 일반은총이라고 설명하지만 인간 문화의 악하고 왜곡된 모습을 보면 그런 설명이 납득되지 않는다. 물론 신학자들은 일반은총이 악을 제어하고 선을 권장하는 면을 강조하지만 그것을 굳이 일반은총이란 용어를 쓰지 않아도 하나님의 통치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 아닐까?
인간이 구유한 하나님의 형상이 통치능력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범죄는 인간이 구유한 하나님의 형상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가? 신학자들은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이지러지고 파괴되었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이 완전히 동물처럼 되지 않고 어느정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통치력으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형상에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먼저 인간의 타락 혹은 범죄의 본질은 선악과 사건에서 보듯이 인간의 불순종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지음을 받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만물을 자기의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통치력과 통치권은 하나님으로 부터 위임된 것이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통치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선악과 금령은 바로 이 진리를 선명하게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에게 선악과 금령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치시려 한 것이다. 아담은 선약과 금령을 통하여 이 교훈을 배워나갔어야 했다. 인간이 선악과 금령을 어겼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다스리겠다고 주장한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범죄, 혹은 타락이 인간이 구유한 하나님의 형상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이 구유한 통치능력은 사라지지 않았고 어쩌면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치명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간은 이제 자신이 부여받은 통치능력을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뜻대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후에 가인의 후손들에게 나타난 자기 중심적 문화의 발전과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자기 욕망을 따라서 통치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이 만든 고도의 문명들은 인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의 욕망과 뜻을 추구하면서 자신들의 통치력을 사용하여 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것을 보면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은 고도로 그 능력을 발휘하였지만 다만 그 능력이 사용되는 방향에 변화가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을 따라서 발휘되어 온 것이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인간들은 자신의 썩어질 욕망을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주어진 통치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만물을 다스리며 고도의 문명을 이룩하여 온 것이다. 죄의 현저한 특징은 자기중심성이다. 범죄한 이후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통치력을 자기중심적으로 사용하여 왔다. 하나님을 대하여는 우상을 만들어 자기 욕망을 충족시겼으며 인간을 대하여는 자기 이익을 위하여 지배하고 정복하였고 자연을 비롯한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는 착취하고 훼손하는 짓을 한 것이다. 결국 인간이 가진 고도한 통치력이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므로써 인간의 모든 불행과 슬픔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인간문명은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된 통치력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인간은 지어졌는데 이제 인간은 자기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역사는 자기 뜻대로 만물을 다스린 역사이고 인간이 이룬 문명은 그 다스림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떠나 버렸고 이런 인간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질 가망이 없게된 것이다. 비로 이런 인간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취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역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의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목적의 성취이며 그 수단은 인간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새롭게 되는 것을 예수님은 "다시 태어남"이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자기 중심성이 무너지는 것이요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새로운 존재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인간의 재창조는 단순히 재창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재창조인 것이다. 그 무엇이란 당연히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성취인 것이며 여기에 구원의 진정한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다. 구원이란 그저 죄의 용서를 받고 심판을 면하여 죽어서 천당에 가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불순종하던 인간이 순종하는 인간으로 재창조되는 것이고 재장조된 인간이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창조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잘못 사용하여 온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 무너지는 것이다. 자기 중심성이 무너질 때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을 사용하신 것을 보아도 메시아의 등장은 통치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된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적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란 왕과 같이 다스리는 자 통치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자 통치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메시아는 인간들을 재창조하여 그들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이다. 로마서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자기들을 뜻대로 피조물을 착취하고 정복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들을 다스려 줄 진정한 인간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기를 피조물들도 탄식하며 학수고대한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아들들이 등장하여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에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죄를 사하고 인간 영혼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성취하시려고 오신 분이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런 총체적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로 삼아주신 목적이다. 하나님의 아들됨만 얘기하고 하나님의 아들 노릇하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이는 우리를 아들 삼아주신 하나님의 본의를 무시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됨이 없이 하나님의 아들 노릇이 불가능하듯이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지 않는 아들됨도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됨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무관심한 한국교회의 현실은 결국 구원의 문제를 총제적으로 알지 못하는 부분 신학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아들들 노릇함 혹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의 삶, 이것이 바로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임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나라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고 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노릇을 할 것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노릇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이다. 그렇다면 물질에 종노릇하거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세상 근심에 사로잡혀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과는 아예 상관도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이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들 노릇하는 삶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노릇하는 삶은 결코 쉽거나 단순한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스스로 사람이 되셨으며 사람으로써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노릇하는 삶의 극치를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이런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와 이 땅 가운데 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된 자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임한 하나님나라를 계승한 자들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진정한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릴 의무와 권한이 주어진 것이며 그 다스림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처럼 죽기까지 자기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순종인 것이다. 이런 순종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진정한 통치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권면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 것,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을 것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진정한 통치자의 덕목일 것이다.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땅 가운데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얼마나 하나님나라 열매를 맺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그 다스림은 지배나 정복이 아닌 자기 희생의 다스림이요 사랑과 섬김의 통치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 가르치셨으며 또 "누구든지 이 어인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고 하신 것이다. 자기중심적 통치로 얼룩지고 이지러진 인간 문화를 새롭게하는 일을 누가할 것인가? 누가 이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치함으로 더러워진 이 땅과 역사를 새롭게 할 것인가? 이 일은 거대한 일이요 장구한 세월을 요하는 일이다. 장구한 세월동안 인간은 자기 중심적 통치로 오늘날의 인간문명을 건설하였다. 그 문명은 고도하고 찬란한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더러운 문명이요 하나님을 배반한 문명인 것이다. 이 문명을 고치고 새롭게하는 일이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통치자들의 사명이요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부르신 것이다. 타락한 인간들이 장구한 세월동안 힘을 합하여 이룬 문명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장구한 세월동안 힘을 합하여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힘을 합하여 노력하고 분투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적으로 이 세상 가운데 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이 이방인들의 죄악으로 더러워진 그 땅을 이제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 깨끗하게 하라고 하신 것이듯이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더러워진 이 땅을 새롭게 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온 세상과 만물이 근본적이고 우주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성취될 것이지만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성취하는 일에 하나님과 동역하는 통치자로 우리를 역사 가운데 부르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영광스러운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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