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그리스도
2013-05-19 21:57:08
1. 하나님의 창조 경륜
하나님의 창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특별힌 피조물로 창조되었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단순히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님을 계시한다. 인간은 창조주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이라는 독특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이러한 독특한 존재로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악과 금령은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진리를 계시한 것이다.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목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두가지 질문은 하나님의 창조 경륜과 깊이 관련된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처음 창조된 상태에 머무르도록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만물은 인간의 다스림을 받아서 창조의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지어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식물의 씨가 인간의 경작을 통하여 그 씨의 완전한 발현체인 꽃과 열매를 맺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의 칠일에 모든 일을 마치시고 쉬신 것은 창조된 만물이 도달할 창조의 목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만물이 그 존재의 충만함을 이루며 더 이상 이룰 것이 없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것임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린다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만물이 그 존재의 충만함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특별히 인간을 통하여 이루시기를 기뻐하셨고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2. 언약과 율법
하나님의 창조 경륜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풍부하게 계시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주시는데 이 율법은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삶의 준칙과도 같은 것이다. 이방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이 언약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에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율법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언약관계가 없다면 율법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요 그 율법에 순종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언약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율법준수 여부에 따라서 좌우된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언약의 목적이 율법 준수에 있다는 의미이다. 즉 언약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율법준수가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이라고 할지라도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다면 언약백성으로서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과 율법은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짓고 선악과 금령을 주신 창조 경륜을 반영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 처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선약과 금령을 통한 순종이 요구된 것은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율법의 순종이 요구된 것과 동일하다. 이렇게 언약과 율법에 기초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창조 경륜을 반영한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스라엘이 장차 들어갈 가나안 땅에서의 삶을 염두에 두고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실 것인데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이유는 그 땅에서 율법을 따라 삶으로서 그 땅을 새롭게 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가나안 족속들의 행위로 더러워진 땅을 이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으로써 새롭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이 사명은 아담에게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라는 창조경륜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3. 그리스도의 오심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리스도가 오시는 모판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만일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이 그리스도가 오셨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 도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예언되었고 준비되었다. 메시야 사상은 이스라엘 역사를 관통하는 사상이었고 무너진 이스라엘의 역사에 소망을 부여하는 사상이었다. 언약에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약에 실패한 아담의 모습을 반영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아담이 선악과 금령에 실패한 것처럼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준수하는 삶에 실패하였다. 아담의 실패는 하나님이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목적을 상실한 것이듯이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목적을 상실한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창조경륜의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모든 사역의 촛점은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국한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일부분일 뿐 전부가 아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이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것 처럼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기 위한 첫단계일 뿐이다. 그리스도는 창조경륜에 실패한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창조 경륜을 이루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그리스도를 두번째 아담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이 주어진 것도 그리스도가 창조경륜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원래 아담이야 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호칭은 아버지의 권한을 이어받는 법적인 상속자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되신 것은 바로 아담이 잃어버렸던 아들의 권세를 다시 찾아주시는 분이심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범죄이후에 인간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부랴부랴 준비하신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는 이미 창조이전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고 곧 창조목적을 이루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신 것이다.
4. 성령과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는 지상에서의 자기 사명을 마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어 주셨다. 그러니까 성령은 그리스도가 세우신 기초위에서 그리스도가 이루시려는 일을 이어받아 일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도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을 떠난 성령 사역을 상상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창조경륜의 맥락에서 성령 사역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성령은 독자적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로 하나님의 자녀들안에서 역사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경륜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이 만물을 직접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하여 다스리게 하신 것과 동일하다. 인간을 통하여 만물을 다스림으로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던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변함없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니까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창조의 동역자로서 일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원의 의미는 바로 창조의 동역자로서 일을 하는데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신자안에 내주하시며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신자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과 인간의 창조의 동역자임을 분명히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런 창조경륜을 떠난 개인 구원은 성경의 계시를 떠난 미신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란 바로 창조경륜이 이루어지는 나라인 것이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어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서 다스리시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기 까지 신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도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오셨으며 이 일을 이루기 까지 신자 안에서 탄식하시며 일하실 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에게 기도하였다. 에베소서는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계시한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성령)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에게 알게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성령)이 그리스도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 우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물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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