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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2013-03-09 22:25:16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복음서에서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전통적으로 이 비유는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이웃에서 선을 행하라는 교훈을 가르치신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이런 전통적인 해석은 성경의 문맥에 주의하지  않고 선입견을 가지고 성경을 바라본 해석의 전형적인 예일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이 자신의 안경을 끼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임을 믿는다면 성경을 읽는 우리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 선 자 처럼 겸손하여야 할 것이고 그 겸손은 자신의 안경을 벗고 듣고자하는 진지하고 낮은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을 자신이 가진 잣대로 재려고 하는 태도야 말로 교만일 것이다.

 

  먼저 우리는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접근한 목적이 진리를 알고자하는 진정한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온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이 율법에 정통한 교사요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임을 자부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가 비록 겉으로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며 예수님에게 물었지만 그의 질문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는 줄 아느냐"는 것이었다. 자신은 율법선생으로서 그런 것을 이미 다 안다는 전제를 가지고 예수를 시험하려고 이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기에 그의 질문에 대답하시기 보다는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는 줄 율법 선생인 너는 다 알지 않느냐고 반문하시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율법선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답을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잘 알고 있구나 좋다 그러면 네가 말한대로 행하라 그리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율법 선생은 내 이웃이 누구이냐고 물었다. 그런데 율법선생이 내 이웃이 누구이냐고 물은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런 질문을 하였다고 말한다. 그가 하나님이 누구시냐고 묻지 않고 내 이웃이 누구이냐고 물은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는 잘 안다는 전제를 한 것이고 다만 이웃을 사랑하려면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이 율법선생은 이웃이 누구인지 몰라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율법을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드러내려고 이런 지문을 하였을 것이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 라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소위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신다. 그 비유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되었는데 제사장,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갔지만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를 하시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고,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 곧 어떤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르시되 너도 이와같이 하라 하셨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듣고 율법사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아마도 그는 예수님이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하신 것은 강도만난 자를 보고 피하여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말만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위선자이듯이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도 마찬가지로 말만 하고 행동을 하지 않는 위선자라고 비난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비유가 율법사와 같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의 위선과 무능을  지적한 비유인 것은 분명하다.  특별히 강도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한다면 강도만난 자를 피하여 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영적으로 거의 죽게된 백성들에게 아무 도움도 안되는 무능하고 위선적인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소위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핵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율법사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라고 질문하였는데 강도만난 자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이 되었으므로 결국 이 비유를 통해서 율법사는 강도만난 자가 되고, 이 율법사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이 된 셈이다. 결국 이 비유를 통하서 예수님은 율법사의 실체가 강도만나 거의 죽게된 자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스스로 율법의 선생으로서 남을 가르키며 자신이 율법을 잘 알고 행한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이 모두 거짓이고 율법사의 실체는 율법을 알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 마치 강도만나 거의 죽게된 자와 같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극히 무능하고 무지한 자임을 지적하신 것이다. 아마도 율법사는 이 비유를 듣고 이 비유의 핵심이 바로 자신이 강도만나 거의 죽게된 자임을 지적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도만나 거의 죽게된 자를 구원하여 준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으며 상종도 하지 않는 종교적으로 더러운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강도만난 자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간 것을 보아서 아마도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끔직히 싫어하고 무시하는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오히려 구원해주는 은인, 구원자로 비유된 것이다. 이는 아마도 율법사가 무시하고 미워하여 시험하려고한 예수님이 바로 강도만나 거의 죽게된 율법사를 구원하여 줄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비유하신 것이 아닐까? 진정으로 율법사가 이 비유를 알아듣고 자신이 강도만나 거의 죽게된 자와 같은 신세임을 깨달았다면 그는 자신이 무시하고 미워하여 시험하려던 예수님이야 말로 자신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알고 그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지만 이 율법사는 들을 귀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연 한번이라도 자신이 들을 귀 없는 자일 것이라고 의심해 본 적이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