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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사람이 되신 하나님- 성육신의 의미

사람이 되신 하나님- 성육신의 의미

2012-12-25 19:11:47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일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근본이므로 이것이 없이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닐 것이다., 유사한 신앙을 가진 이슬람교나 유대교가  기독교와 구별되는 점이 바로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어 자신의 피조세계로 들어오셨다는 이 놀라운 파라독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이 세상에 어떤 종교도 이런 놀라운 계시를 가르치는 종교는 없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계시를 단순히 하나님이 육신을 입은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정말로 사람이 되신 것이지 육체만 입으신 것이 아니다. 사람과 모든면에서 동일한 진짜 사람, 우리와 동일한 사람, 다만 죄는 없으신 사람이 되신 것이다. 교리적으로는 이것을 인성과 신성의 신비한 연합으로 설명하지만 인성과 신성이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피조물인 인성과 창조주인 신성이 어떻게 연합될 수 있는 것인가? 교리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논쟁이 많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교리는 이 연합을 혼합이나 뒤섞임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이 각각의 고유한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하나의 인격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마치 삼위하나님이 각각의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한 신성안에서 연합하여 계신 것을 방불케한다.

 

  사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교적 사상으로는 결코 납득할 수 없는 모순일 것이다. 이교사상의 원류인 헬라 사상은 창조자와 피조세계간의 엄격한 분리를 강조하고 있으므로 헬라 사상으로 볼때 창조주와 피조물의 연합은 상상할 수 없는 사상인 것이다. 힌두교에서 발원한 범신론적 사상으로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연합사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힌두교적 범신론은 기독교의 신인연합 교리와는 분명히 다르다. 왜냐하면 기독교에서는 모든 피조물에 신성이 깃든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에게만 신성이 있다는 것이며 하나님은 오직 사람이 되신 것이지 사람외에 다른 피조물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떠받드는 유대인들에게도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생소한 계시였던 것이다. 그들의 전통적인 메시야 사상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세나 다윗을 능가하는 뛰어난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을 구약에 약속된 메시야로, 나아가 하나님과 동등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들에게는 신성모독외에 달릴 해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구약에서 계시된 메시야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깊이 숙고하였다면 자신들이 가진 세속적 메시야 사상으로 성경을 제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사실 그들의 메시야 사상의 뿌리는 다윗의 후손의 영원한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인데 이 약속은 그들의 메시야 사상으로는 충분히 해석할 수 없는 계시였던 것이다. 하나님이 다윗의 후손의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 약속하셨는데 어떻게 인간의 왕권이 영원할 수가 있겠는가? 그 왕권이 영원한 왕권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인간의 왕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일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성경은 한번도 인간의 왕권이 영원할 수 있다고 암시한 적이 없고 오히려 인간의 왕권은 반드시 부패하고 만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교훈이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인간 왕으로 국한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왕권의 주인을 다니엘서는 좀더 분명하게 하늘구름을 타고 오신 인자와 같은 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바로 그에게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권세가 주어지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 인자와 같은 이가 옛적 부터 항상 계신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옛적 부터 항상 계신 이는 하나님이심이 분명한데 인자와 같은 이는 누구인가? 다니엘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지만 그 분이 하늘구름을 타고오신 인자와 같은 분이라함은 그 분이 신적인 면과 인간적인 모습의 양면을 다 가지신 존재임을 암시한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되게 여기시면서도 자신을 인자로 표현하시길 즐기셨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메시야 사상이 과연 구약의 계시에 일치하였다면 그들이 정작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미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더면 나를 알았을 것이요 아버지를 사랑하였다면 아들을 사랑하였을 것이라" 고 하셨듯이 문제는 유대인들 이 구약성경을 떠 받들고 읊조렸지만 정작 그 계시에는 무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계시가 구약적으로 보아서도 전혀 생소한 계시는 아닌 것이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고 함으로써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인 동시에 하나님과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닮은꼴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는 중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창조시부터 하나님은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으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떨레야 뗄 수 없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의 중심에 놓으셨고 사람을 통하여 창조목적을 이루시길 기뻐하셨기 때문에 사람이 없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 이것이 인간의 본연의 정체성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사람이 되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이유와 목적이 결국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간을 지으셨으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그 창조목적을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신 것이다. 그러니까 성육신의 사건은 단순히 인간의 죄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목적의 성취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하고 있다. 죄는 창조목적의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길 원하신 것이다. 물론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유일하고도 탁월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죄의 문제 해결의 수단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하나님의 경륜적 행동이셨던 것이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님은 사람의 죄책을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성육신 사건이 단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사람이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이전과 동일하게 하나님이신 사람으로 부활하셨고 그 모습으로 승천하셨고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우편에서 다스리시며 그 모습 그대로 심판하러 오실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성육신의 사건은 단순히 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 것이다. 성경은 한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은 영원히 사람이 되신 하나님으로 계신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성육신은 창조목적을 이루는 방편이나 수단이 아니라 창조목적 그 자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번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계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독특하게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길 원하셨지만 사실 하나님의 창조는 거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의 차원까지 나아가기를 기뻐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이 영원히 지속되어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으로 계셔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으로까지 나아가도록 작정하신 놀랍고 신비한 창조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서 계시된 메시야는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었다. 다니엘서가 표현한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신 인자와 같은 이라는 계시는 바로 이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구약에의 성막제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동거, 곧 한 장막에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지내는 것은 구약적 사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으니라고 성육신 사건을 구약의 성막제도를 염두에 두고 표현하였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장막에서 사람과 동거하는 방식으로 연합하셨다면 이제 신약에서는 아예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사람과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방식으로 연합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신비한 연합, 인성과 신성의 혼합되지 않는 신비한 연합, 이것이 성육신의 사건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가 도달해야할 목적지인 것이다. 지금도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사람으로 계시는 예수님은 창조목적의 완성의 실재로서 영원히 계시면서 성령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해야할 목적지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이요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성부께 나아가는 신인합일일 것이다. 삼위 하나님께서 각각의 독립되고 고유한 인격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한 신성안에서 신비한 연합으로 일체를 이루시듯이 우리도 우리 각자의 인격과 인성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을 이루게 될 것이요 이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성육신

2014-09-12 15:59:34


  성육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한 결합이다.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안에 결홥되어 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교리는 삼위일체와 더불어 가장 난해한 신학 주제이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일체 교리가 정립된 이후에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가 정립되었다.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와 관련된 세가지 부적절한 이론들은 다음과 같다. 

 

1. 아폴리 나라우스- 그리스도의 인성을 육체로 국한하고 마음과 영혼은 신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인성은 육체와 함께 영혼으로 구성되었는데 영혼을 부인함으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것이다.

2. 네스토리우스 - 한 몸에 신적 인격과 인적 인격의 두 인격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를 두 존재의 결합으로 본 것이다. 결국 두 인격 두 본성론

3. 유티케스 -그리스도는 성육신 이전에는 두 본성이 있었지만 성육신 이후에는 인성과 신성이 융합되어 하나의 본성이 생겨났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제3의 본성(신성도 인성도 아닌)을 주장한 단성론(monophysitism)이다. 

 

칼케돈 결정(451년)은 한 인격안에 신성과 인성의 두 본성이 연합되어 있다는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를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 그리스도는 혼합(confusion), 변화(change), 나누임( division), 분리(separation)없이 두가지 본성을 지니고 계신다. 그러나 본성들의 구분은 그들의 연합을 통해 소멸되지 않았으묘 두 본성의 원형들은 보존되어 하나의 위격과 본체를 형성하셨으니 두 위격으로 분리되거나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칼케돈 회의에서 결정된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의 핵심은 "한 인격안에 두 본성"(two nature in one person)이었다. 한 인격안에 연합된 두 본성은 구별은 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위격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라 한다.

 

성육신의 실천적 함의(성육신적 삶)는 다움 두가지로 볼 수 있다.

 

1. 자기 비움(케노시스)의 신학 (빌립보 2:6-8)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종의 모습을 취함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남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함

 

2. 섬김의 신학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함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세상 속으로 들어옴

섬기는 대상의 상황속으로 들어가 동일한 일상의 삶을 경험함

다른 사람을 섬기고 희생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전적으로 순종함

 

[ 성육신의 교리는 구원론의 기초 교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며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분이라는 중보교리와 대속교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헬라적 신관으로는 성육신은 난센스가 되겠지만 사실 성경적 신관에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다는 성육신의 교리는 신비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자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육신 교리의 중요성은 성육신이 단순히 구원을 위한 임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번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는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영원히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존재하시기 때문이니 이것을 보면 성육신은 창조목적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