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 김세윤
2011-07-20 16:59:27
서론
마가가 요약한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 통치가 임박했다는 기쁜 소식이다 예수는 바로 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들을 바로 이 내용을 공통적으로 강조한다.
한편 사도바울이 요약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이다. 바울은 이 복음을 자신 다 먼저 사도된 자들에게서 받아서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이 복음의 더 핵심적인 사건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것이 죄문제를 해결하는 구원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을 가져온 사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즉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위한 구원의 죽임이었음을 확인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서로 뗄수 없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구성하는 것이다. 반면에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가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대권자가 되셨으며 지금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대행하고 있다는 점에 복음선포의 촛점을 맞춘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함께 강조하여 그가 새언약의 제사로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 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복음으로 선포한다.
여기서 문제는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였는데 그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했다는 것인데 나는 이책에서 예수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규명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1. 하나님나라의 이해를 위한 배경과 전제
20세기 중반까지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를 주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연구하였는데 지금은 주로 기독론적인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종말론적 관심이 하나님나라가 언제 임하는가에 대한 관심이라면 하나님나라와 관련된 예수의 자의식과 사명이 기독론적 관점의 주된 내용이다.
구약에는 하나님나라의 표현이 나오지 않지만 내용적으로 하나님나라 개념이 구약에 존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이스라엘과 온 땅을 다스리신다는 사상이 구약과 유대교의 중심사상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내용적으로 구약과 유대교에 배경을 두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를 이해하려면 그 선포가 함의하는 4가지 전제를 알아야 한다.
첫째는 창조사상인데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통치자 왕이신데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셔서 자신의 대리자로 자신이 지으신 땅을 다스리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아담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부왕인 것이다.
둘째는 타락사상이다.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부왕인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스스로 땅을 통치하려 하므로 땅위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죄" 라고 한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저주가 죽음이었다. 죽음은 생명의 근원되신 창조주와의 분리이며 고난은 이 분리로 인한 자원의 결핍이다. 그러므로 인간 실존의 모든 형태의 고난은 바로 이 죽음의 증상들 즉 죽음의 권세하에 놓여있음을 나타내는 증상들이다. 구원은 이 죽음의 권세로 부터의 해방이며 죽음의 증상들로 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함으로 죽음의 권세에 놓여졌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회복될 때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곧 하나님의 통치가 해방되는 것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인 것이다. 예수의 탕자비유는 우리가 어떤 상태에 처해있으며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 무엇인자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탕자 비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가장 잘 설명하는 비유이다.
세째는 언약사상이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방치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행동을 시작하시는데 이것이 구약에서 언약사상으로 표현되었다. 구약의 언약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 곧 하나님의 통치를 그들에게 회복시키신다는 약속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언어는 구약의 언약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네째는 종말사상이다. 말일에 하나님이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것이 종말사상인데 구약에서는 이 날을 여호와의 날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오심은 이 세대의 종말을 의미하며 동시에 하나님이 의와 생명으로 다스리는 새 세대(오는 세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2.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
이른바 주기도문은 에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가장 잘 요약하여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은 하나님을 "아빠" 라고 부를 수 있게 되고 그러기에 이어서 나오는 청원을 할 수 있게된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첫 마디 " 아빠"는 주기도문 전체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의미심장하게 부른 후에 당신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라는 세가지 청원을 하는 것인데 그중에 첫번째 청원이 가장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둘째와 셋째 청원은 첫째 청원 즉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결과로 주어지는 복들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 하나님의 다스림" 즉 사단의 통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나라를 "잔치" 혹은 "상속받음"으로 비유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으로 이루어지는 삶,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삶, 곧 하나님적인 생명인 영생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운 장래에 오리라고 선포한 예수께서는 그 나라가 이미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예수의 축귀와 치유의 사역은 사실상 하나님이 사단의 통치를 몰아내고 그 통치아래 고통받는 자들을 자유케 하고 온전케 하는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사역 전 과정을 사단과의 투쟁의 과정으로 보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이 전쟁을 결판낸 승리의 날이었다 .그러나 사단이 그 세력을 잃었지만 박멸된 것은 아니고 사단의 박멸은 예수의 재림과 심판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의 치유사역은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나라 복음의 실제화(actualization)요 시위(demonstration)이며 그것에 대한 해설(commentary)이요 예시(illustration)이다. 오늘 우리의 복음선포에도 항상 치유가 일어나야 한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복음이 제대로 선포되자 않은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치유가 일어나지 않으면 복음이 약속하는 하나님나라의 구원이 실제화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치유란 전 포괄적인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우리가 실존에서 겪는 온갖 고난들의 해소로 이해하여야 한다.
성령의 힘을 빌어 축귀와 질병치료를 강조하는 오순절 신학의 미신적 부작용에 반발하여 개혁신학은 성령의 기적적인 치유는 사도시대에만 일시적으로 허락된 것이고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이런 식의 견해를 취하는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통치가 또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예수의 주권이 성령을 통하여 가져다 주는 구원을 추상화하고 관념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치유를 우리 실존의 모든 영역들에서 고통을 제거하고 온전케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런 두 극단을 피할 수 있다. 예수의 치유는 바로 이런 치유였다. 죄인이 회개하여 히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셜롬을 누림으로 그들의 삶이 온전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나라 복음을 제대로 선포하면 포괄적인 의미로서의 치유가 일어나게 되어있다. 이 치유는 하나님나라의 현재적 시위 혹은 현재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안식일에 치유사역을 하신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안식일 계명의 법정신은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아래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노릇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을 의미한다. 태초부터 있었던 안식일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업을 중단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안식일 치유사역은 안식일의 정신인 하나님의 통치의 실제화를 증시하는 사역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안식일에 차유를 하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통치가 실현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자신이 이 통치와 안식을 가져오는 존재임을 보여주시려고 한 것이다.
3.하나님나라는 언제 오는가?
슈바이처를 중심한 철저 종말론(Throughgoing Eschatology)과 도드를 중심으로 한 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 이 두학파들의 토론을 거치면서 1930년 대 이후는 학자들이 성경은 하나님나라는 미래에 올 것과 현재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둘다 가르쳤음을 인정하기 사작하였다. 예수의 오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는 이미 실현되기 시작하였고 미래의 완성을 향하여 출범한 것이다.
4.하나님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예수는 하나님나라와 함께 사용한 동사를 하나님나라가 "온다", 하나님나라를 "주신다" 우리가 그나라에 "들어간다", "상속으로 받는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초월성과 은혜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인간이 이루고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초월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범신론 종교인 힌두교와 불교는 신의 초월이 부인되고 내재성만 인정한다. 이런 범신론의 구원론은 자력구원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지식을 얻어서 스스로를 구원하여야 한다. 반면에 이슬람의 신관은 신의 내재를 부인하고 초월성만을 강조하는 이신론 혹은 부재신론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구원관은 숙명론이든지 자력구원론이 되는 것이다. 범신론이나 이신론이나 자력구원관을 가르친다는 점에서 동일하므로 인간에게 사실상 신을 필요없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하나님은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론적 존재이어야만 하나님은 초월하시며 동시에 내재하시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중 겨자씨 비유나 누룩의 비유는 그 나라의 은닉성, 필연성, 점진성을 시사한다. 겨자씨 비유가 하나님나라의 외연의 확대를 의미한다면 누룩비유는 하나님나라가 가져올 질적인 변화를 가리킨다. 이런 비유들은 당시의 열심당적 혁명운동이나 바리새적 경건운동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겨자씨 비유나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전제한다.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구체적으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되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온다고 보았다.사랑의 이중계명의 요구로 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적극 순종함으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내세적인 것도 아니다. 사랑의 계명에 순종할 때 이 땅에 현재적으로 임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5. 하나님나라 선포에 있어서의 예수의 의도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나라로 들어오라는 초청의 메시지였다. 그것은 죄와 죽음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나라에서 우리를 해방하여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시기 위함이었다.예수는 자신이 사단의 나라에서 해방하여 하나님나라로 불러 모은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새로운 성전으로 보았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의 예수는 자신의 메시아적 과업을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 즉 하나님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게하시는 것으로 보았다.
6. 예수는 하나님나라 백성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고 새 성전을 짓는가? 두 단계인데 첫째는 하나님나라의 선포를 통해서이고 두번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첫단계인 하나님나라 선포는 약속과 초대의 행위이다. 예수는 사단의 통치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였다. 이 초대에 스스로 경건하다 하는 바리새인들은 오지 않았지만 가난한 자들과 병자들과 죄인들은 많이 응하였다. 그 부름에 응한 자들 가운데 열 둘을 택해 새로운 하나님나라 백성의 대표가 되게 한 것이다.
둘째 단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나라 백성을 창조힌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의 사건이 그 만찬에 참여한 자들에게 생명을 주는 사건임을 드러낸다. 유월절 만찬에서 사용된 새언약이란 말은 그 만찬이 시내산에서 맺은 옛 언약에 상응하는 하나님나라 백성을 창조하는 행위임을 의미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선포가 사단의 통치에서 해방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약속이라면 예수의 죽음은 그 하나님나라 선포를 성취시키는 사건인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나라 선포로 약속한 바를 자신의 죽음으로 성취시킨 것이다.
7. 예수의 죽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종말론적인 속죄와 새언약의 제사로 보았으므로 그의 성전 청결사건은 타락한 성전은 이제 하나님의 심판으로 파괴될 것이라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단의 신탁에 따라 새성전을 짓게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엇다. 그가 짓겠다고 한 성전은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8. 예수의 부활과 사도들의 복음의 기원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일으크신 부활 사건은 예수의 옳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이 예수의 모든 주장을 옳다고 인정하신 사건인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자신의 북음이 대속의 죽음이요 새언약의 제사라고 주장한 것이 모두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한 죽임이었던 것이 증명된 셈이다. 그래서 신학적 혼란과 두려움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예수는 메시아"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온 세상의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사건인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민족의 역사에 기초한 예수의 사건이 온 인류를 위한 사건으로 확대되는 근거인 것이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자연히 그 부활의 빛에 비추어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즉 제자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사도들의 케리그마(복음 선포)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성취한 그의 죽음에 촛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이 메시아적 구원의 행위라는 것은 부활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이 복음선포의 촛점이 되게 만든 사건이 바로 부활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같은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는 관점의 차이였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즉음과 부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그것이 성취할 하나님나라"를 복음으로 선포하였다면 사도들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를 성취시킨 "예수의 죽음과 부활" 복음으로 선포한 것이었다.
9.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
이렇게 기원한 복음을 사도들은 주로 구약과 예수의 가르침에서 얻은 다양한 그림 언어들을 사용하여 선포하기 시작했다.
[메시야/그리스도-예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보통명사인 메시야는 유대의 멸망이후 구속에 대한 갈망이 생기면서 "종말론적 구원자"라는 의미의 고유명사로 발전하였다. 유대인들은 나단의 신탁에 근거하여 다윗왕조를 문자적으로 재건하고 유대민족이 열방위에 군림하게 하는 " 메시야"를 기대하였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이런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않았지만 나단의 신탁의 본래적인 의미(하나님의 통치의 회복으로서의 다윗 왕조의 재건)를 그의 죽음을 통하여 성취하였으므로 그의 죽음은 메시아적 행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메시아(그리스도)적 행위였고 우리를 위한 종말론적 구원의 사건이었으므로 예수를 메시야( 그리스도) 칭호로 부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예수는 우리의 그리스도(메시야) 이다" 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마치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를 방불케 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작용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사도들은 구약의 제사제도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한 예수의 교훈에서 지침을 얻어 속죄제가, 속량, 새 언약의 제사 유월절 제사로 설명하기도 하였고 아담의 모형론을 차용하기도 하였다. 믿음이란 복음 즉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것을 줄여서 "그리스도를 믿음" 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구원을 덕입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때 엄게될 완성된 구원의 첫열매이다. 이 첫열매는 성령의 힘으로 우리 실존의 모든 면에서 치유를 가져오며 그 힘을 발휘한다. 그들이 지금 체험하는 구원의 첫 열매는 영생에 대한 보증금이기에 구원의 완성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칭의- 의인이 됨]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을 믿음으로 얻는 실존적 구원을 여러가지 그림언어들로 표현한다. 의인이 되게함, 화목됨, 성화됨, , 하나님의 자녀됨,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형상을 얻음, 이런 것들이 바울이 사용하는 구원론의 범주들이다. 그런데 루터와 종교개혁의 후예들은 의인으로 칭함의 그림을 단순히 법정적 개념으로만 축소시켜 윤리를 구원론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오늘날 한국이 개신교가 기독교적인 윤리나 사회윤리면에서 아무 미약하게 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복음에 대한 오해, 특히 칭의론으로 표현되는 복음에 대한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 오해의 근본은 성경에서 "의"는 법정적 개념일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관계적 개념이란 사실이 간과된채 그리스-로마적 사고방식으로 법정적으로만 이해한 것이다. 성경에서 "의"란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의란 관계에 신실함이라 혹은 관계를 원만히 지탱하는 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는 샬롬 화평을 낳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언약관계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 노릇을 할 의무가 부여되고 인간에게는 하나님에게 순종할 의무가 부여된 관계이다. 인간이 불순종함으로 인간은 불의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하나님 노릇 할 의무를 다하지 않는 셈이 되므로 불의하게 될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 노릇을 하신, 즉 언약적 의미룰 이행하신 것이므로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의"의 범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고 하나님의 사랑, 은혜와 동의어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선포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신의 "의" 로 우리의 불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기쁜 소식(복음)이 아닐 수 없다. 이와같이 "의"가 근본적으로 관계론적 개념이므로 "의인"으로 선언된다는 말이 무죄로 선언된다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뜻만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의 회복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관계인 것이다. 이 말은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로 옮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회복한 하나님과의 바른 언약관계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함으로 바른 언약관계에 머무를 수 있고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는 의를 행하라 그러면 의인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너는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의인으로 살아야 된다는 요구와 함께 의인으로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화해-화목, 화평]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은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여 갈등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회목제사로서 드려져 하나님과 인간의 갈등이 해소되고 화평을 이룬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화목이란 그림언어는 의인됨이란 그림언어와 미찬가지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회목을 구원의 실재로 본 것이다. 바울은 화목됨이란 그림언어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에도 적용하며 그 결과로 태어난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심지어 온 만물과의 관계에도 화목이란 그림언어가 젹용되어 그 결과로 온 우주에 걸쳐 화평이 이루어 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람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듯이 하나님과의 화목은 당연히 이웃과의 화목을 동반한다. 바울의 모범을 따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의인됨"의 범주와 함께 " 화목됨"의 범주로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신약성경이 공통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형태중 하나가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는 것이다. 예수는 독특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자신을 인자 곧 그사람의 아들이라 주장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시켜 그의 주장이 옳다고 인정하였으므로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라고 선포하게 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아들이란 법적 상속자를 의미하는 그림언어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는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을 상속받아 행사하는 왕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된 것은 나단의 신탁의 근본적 성취인 다윗의 왕권이 회복된 것을 의미한다.
신약성경은 이 사실을 "보냄의 형식(the sending formula)"으로 표현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실행하였다는 것이다. 이 "보냄의 형식"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구원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좋은 소식인 것이다. 이 보냄의 형식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신적 구원을 이루었다는 뜻이 잘 드러난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신적 구원 사역의 실행은 그의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는데 이것을 신약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 자기 아들을 내어주셨다는 "내어줌의 형식(the giving-up formula)"으로 표현한다. 이 형식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본질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아들됨에 참여시키며 그의 상속자 됨에 참여시키며 그의 왕됨에 참여시킨다. 아들된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상속자로 인정받는 것이다. 아담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하다가 사단의 종노릇을 하게되었는데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하나님같이 되는 길이 열린 것이다.
[ 主 -예수]
신약성경이 공통적으로 선포하는 복음의 형태가 또한 "예수가 主(kyrios/lord)이시다" 라는 메시지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는 선포를 예수가 실제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주권자라는데 촛점을 맞추어 "예수는 주이시다" 라는 언어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이 " 예수를 主이시라"고 선포할 때 예수님은 부활이후에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대행하고 있음을 뜻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 의 성취로 보았는데 여기서 "왕의 우편에 앉음" 은 왕의 권세를 대항하는 총리의 역할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예수를 부활시키고 자신의 우편에 높여 그로 하여금 자신의 통치를 대행하게 하였다."예수가 主(kyrios/lord)이시다" 라는 고백은 예수의 주권에 우리를 의탁(commitment)하는 행위로서 그의 의와 생명의 통치에 의존하며 순종하는 것을 내포한다. "예수가 主이시다" 라고 고백함으로써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주권의 전이(lordship- transfer)" 를 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드러내는 일꾼(agent)이며 그리스도와 사단과의 남은 전쟁에 징집된 군사이다. 이것이 교회의 세상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제거하고 主 예수의 의와 사랑의 통치를 구현하는 넓은 의미의 선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예수의 주권을 의지하고 순종하도록 촉구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모든 제도에서도 주 에수의 의와 생명의 통치가 나타나도록 애써야 한다.
[다양하고 포괄적인 복음선포의 그림들]
바울의 복음 선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좀 더 촛점이 맞추어 지고 그 대속의 죽음으로 얻게되는 의인됨, 화목됨, 자녀됨으로 나타난 반면에 누가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좀 더 촛점을 맞추어 예수가 사단을 결정적으로 꺽고 하나님 우편에 만유의 주로 높임 받으신 분으로서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를 통하여 통치를 펼쳐가신다는 데 좀 더 무게를 싣는다. 그래서 누가는 복음서중 유일하게 예수의 부활후 승천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누가는 예수의 승천후 성령을 보내어 다스리심으로 땅에 계실 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하셨던 치유와 해방의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강조한다. 누가가 선포하는 복음은 주 예수가 성령의 능력으로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의 구원을 지금 이미 죄인들, 가난한 자들, 병자들, 소외된 자들에게 해방과 치유의 형태로 실현하고 있다는데 촛점을 두고 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로마의 통치가 이세상에서 유일한 실재인 것 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주 예수께서 그의 교회를 통하여 사단의 죄와 죽음의 통치를 제압하고 그의 구원의 통치를 펼쳐가는 것을 전쟁의 그림으로 보여준다. 히브리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구원론적 의미를 강조하는 복음 선포 형식을 보여준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자이며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시려 성육신 하신 분이시며 속죄와 새언약의 제사로 단번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들어가게 하였음을 강조한다.
오늘날의 교회도 신약성경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균형있고 건전하며 풍성한 신앙 생활을 유발시킬 수 있다. 이 대전제적 요구를 염두에 두고 교회는 교회가 처한 삶의 자리 (Sitz im Leben)의 구체적인 필요에 따라 신약성경에 나타난 여러 유형이나 범주들 중 하나를 두르어지게 사용하여 (16세기에 루터가 그랬듯이)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 그래야 복음이 삶에의 구체적 정합성(relevance)을 나태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무식하고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한 가운데 오로지 "보수"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시대와 처지를 물론하고 오로지 종교개혁자들(칼빈)식으로만 복음을 " 법정적 의미의 의인됨" 의 범주로만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복음을 왜곡하고 축소시켜 복음의 풍성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포괄적으로 동시에 삶의 정황에 맞게 선포되어야 하고 그래서 복음이 가져오는 구원이 개인과 사회의 삶에 첫열매로서 구체화되어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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