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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삼위일체를 향하여- 송제근

삼위일체를 향하여- 송제근

2011-07-05 17:43:36


21세기 신학과 교회의 과제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삼위일체

宋 濟 根

(웨신 개혁신학 잡지를 위하여)

 

1. 도 입

역사는 양면적이다. 늘 새롭기도 하지만 동시에 반복적이기 때문이다. 현대가 되어갈수록 반복적인 측면보다 새로운 측면이 많아져 가는 것 같은데, 그것은 문명이 발전해서라기 보다 변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21세기는 새로움의 측면이 더 많이 대두될 것은 그 엄청난 변화의 속도때문 일 것이다(주1).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시간의 진행과 함께 나타나는 새로움의 정도의 가속화 속에서라도 변함없는 진리가 역사 속에 늘 내재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우선 하나님의 항상성과 인간의 항상성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은 새로울 수 있어서 그 입는 옷은 사철이 다르듯이 문화와 역사마다 다르게 보여도 그 안에 있는 인간 자신은 여전히 이전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늘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제 이런 엄청난 변화와 새로움을 형성해 가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동일한 인간에 대한 진리를 적용해서 가장 행복한 삶을 이 땅에서 살게 할 것인가 하는 과제를 우리 교회는 가지고 있다. 21세기의 교회는 선배들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역사를 통과하고 있고 그 속에서 인간과 하나님에 대한 항존적 진리를 구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 전무후무한 사명을 지고 있다. 그 구체적인 면을 살피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서구문화의 한계에 대한 자각은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다.

 

(1) 개인적 차원에서 기계부품처럼 분업화한 사회에서 일을 하지만 그 속에서 진정한 자기 성취를 찾기 어려운 현대인의 공허함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되었다(주2).

(2) 그리고 화학과 물리학을 위주로 한 서구물질문화의 발전(주3)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재반성이 일어난 것(주4)은 가장 먼저 핵폭탄의 참상이 커지고 난 뒤부터였다. 그 중에서 지금은 삼척동자라도 알게 된 가장 현저한 환경문제이다. 그 뿐 아니라 생물학에서 최신의 분야인 유전공학은 각광을 받는 즉시로 정죄당할 위기에 서게 되었다. 소위 그 학문의 발전으로 DNA를 조작한 유전자조작식품(주5)이나 생물해적질(주6)의 문제는 엄청난 위기를 야기하고 있다.

(3) 이어서 사회적으로는 한국사회일각에서 일기 시작한 주말휴무문제는 21세기에 노동문제가 가장 핵심 사항으로 떠오르고 거의 모든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주7).

(4) 더 크게 국제적으로 제국주의를 위주로 한 19-20세기의 세계질서의 재편을 또 다시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제국주의를 통해서 하지 않을 가능성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 속에 우리가 겪는 분단의 아픔은 가장 현실적인 것이다(주8). 그리고 소위 신질서 아래서의 세계화의 문제는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주9).

(5) 9.11사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는 미국의 모습과 거기에 미묘한 자존심으로 대응하는 유럽의 자세, 그리고 아랍세계의 태도는 지금 세계를 인도하는 서구문화와 그 역사 전반에 대한 근본적 재반성을 요구한다. 소위 문명의 충돌(주10)이냐 문명의 대화(주11)냐는 관점이 새로운 문제로 제기되는 형편이다.

 

이런 구체적인 상황들은 지금까지 교회가 이런 세상의 문제에 기여한 것이 얼마나 적은가를 생각하게 만들고 진지하게 각성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두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먼저 세상의 등불로서의 교회의 사명은 어떻게 이런 복잡미묘하고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이룰 수 있을까 ? 그리고 이어서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

첫 번째 질문은 신앙적인 답변을 줄 수 있다. 즉 교회가 어떤 변화의 세상에서라도 주어진 사명을 완전히 감당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것은 증명불가한 우리의 믿음이요, 그것은 우리를 구하시고 우리, 영적 이스라엘과 쌍방언약을 세우시는 전능하신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신뢰와 확신의 표시이다(주12).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최소한 여기서 구체적 대답을 추구해 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의 시도가 완전하지 못할 수 있고, 또 성공적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명백하게 하나님이 끝장내시는 종말로 갈 것이며, 그 종말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나는 세상에서 빛이 되기 위해서 애쓴 흔적을 남긴 우리의 노력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신학과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 반성의 필요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때까지의 신학의 근본에 대한 재반성이다. 신학 즉 현재 우리에게 익숙한 하나님 나라를 지도하는 하나의 체계로서의 서방신학은 근본적으로 철학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고대철학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응용하여서 신학적 작업을 이 때까지 해온 것이 지금까지 전통으로 유지되어 왔다.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두가지 근본적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하나는 인간의 행동의 근본 주체의 문제이고 하나는 방법론의 문제이다.

 

2.1. 이성위주의 학문방법론에 대한 반성

하나는 인간 문화를 이루어가는 주체가 과연 인간 속의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철학의 도움을 받아서 신학적 작업을 하다 보니 교회를 지도하는 체제가 결국에는 학문, 논리적 사유를 통과하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을 이용하여서 그리스철학에 익숙한 서양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철학 그 자체에 다시 사로잡히는 상황이 전개되게 된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철학적 설명의 그릇에 다 담으려고 한 사실이 애초에 잘못된 일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변화무쌍한 서양철학의 사조를 따라서 신학도 자연히 움직여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은 특히 근대와 현대가 되어갈수록 더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주13).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요소 중에서 이성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제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이 중에서 교회를 지도하는 체제도 신학, 즉 하나님에 대한 논리적인 증명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은 것이다(주14).

여기에 우리는 그 동안 해결된 것으로 알고 던지지 않던 더 본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과연 인간의 이성이 인간존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가 ? 또 이것은 과연 인간의 다른 영역에 근본적인 명령을 내릴 수 있는가 ? 이 질문들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은 이 때까지 자명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자명한 것은 아님이 점점 학문 자체 속에서도 밝혀졌다. 이성적 한계를 넘어서는 영역에서의 인간과 세계의 삶에 대한 실제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주15).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 속에 더 근본적인 영역을 찾아야 하는데 우리는 찾았는가 ?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이것이 부정적이라면 우리가 쌓은 교회를 지도하는 체제로서의 신학이 가진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이어서 인간 문화가 주로 이성위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한 근본적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가 가지는 모든 문제가 일어나는 것일 수 있다.

 

2.2. 학문의 한 영역으로만 머문 신학에 대한 재반성의 필요

두번째는 방법론의 문제이다. 서양문화와 학문은 철저히 직관적이고 분석적인데 이것은 유일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론일 뿐이다. 이 방법에 대한 유일성의 확신은 다른 문화와 방법론에 대한 근본적인 인정을 하지 못하게 하였고 궁극적으로 성경과 고대 이스라엘의 삶에 대한 근본적 몰이해에 이르게 되었다(주16).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와 삶의 방법은 비유적 총체적인 것인데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성경종교에 대한 오해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될 때에 생기는 가장 현저한 문제는 서양학문의 성향을 따라서 각 학문은 전체 속에서 하나의 영역만을 담당할 뿐이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도, 물론 일반 세상은 신학의 영역을 인정하지는 않지만, 그 작은 영역만을 감당할 뿐이다. 이렇게 될 때에 근본적인 문제는 어느 영역이 각 영역의 통합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주17). 통합이 없는 분리와 분석은 결국 총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과 그 인간이 이루는 사회에 대한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인간이 사는 삶의 각 영역 속에서 심각한 해체와 분리와 무연관 무관심의 상태가 이어지게 된 것이며 이것은 인간 삶에서 근본적인 소외를 가져온 것이다.

 

3. 인간 본질의 새로운 이해를 향하여  (1) : 영으로서의 인간이해

이런 서양이 주도하는 현대문명과 서양신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성경이 제시하는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데, 그것은 인간이 영적 존재, 아니 영이라는 사실에 있다.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과거에 인식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영역은 하나의 영역으로만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세부적인 면에 대해서는 신비주의자나 취급하는 것으로 알았다. 또 인간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주로 이 때까지 부정적으로 감정적인 측면과 동일시 하여 비판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인간이 영이라는 사실이 인간 존재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일 뿐 아니라 인간의 각 영역을 통합,조정하는 영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인간에 내재하는 영역을 정확하게 분리 분석하는 것은 성경이 허용하고 있지 않다. 인간의 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만 관계하는 영역이고 이 영역에서 모든 다른 영역들이 의미를 가지며 상호관계를 하여 한 인생의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중에 최근에 인간의 영성을 위주로 한 신학, 영성신학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주18).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해방이 되지 못한다. 그것은 영성의 활동을 이성적 작업인 신학으로 이해하겠다는 말이 된다. 영을 표현하고 이해하고 심지어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이성 즉 학문이 역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성적 작업은 어디까지나 영성의 활동에서 흘러나와야 하는 작업일 뿐이다. 그리고 이성이 하던 인간 삶을 통제하고 통합하던 역할을 이제 인간의 영성에 자리를 물려주는 일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어야 인간 삶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인간의 삶과 함께 인간 삶의 총체성을 진실된 의미에서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인간본질의 새로운 이해를 향하여 (2) : 공동체로서의 인간이해

인간본질에 대하여 더 본질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영역이 있는 데 그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이다. 서구문명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대의 문명은 공동체적 성격이 아주 강했다(주19). 그런데 근세 서양에서 R. Decartes의 철학이후에 모든 존재의 기초가 자기 자신이 되었고, 인간 존재의 근본은 자신의 인식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 결과 각 개인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었으며, 모든 것에 대한 절대적 독재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 개개인을 자신의 뿌리인 부모마저 철학적으로 부인하는 '부친살해죄'를 짓는 고아(orphan)으로 전락하게 만든 것이다(주20).

근대철학은 사상적으로 종교개혁의 교회의 신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은 종교개혁의 출발점이 이신칭의인 것과 상관된다. 즉 개신교는 그렇게 해서 개인구원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모든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런 신앙의 이기성과 근대서양의 이기적 인간관은 서로 일맥상통한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근대서양철학의 기초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내가 우주와 인간의 삶 전체를 결정하는 독재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생각들이 일게 되었다. 내가 독재자가 되면 우주는 독재자들의 충돌만 있을 수 밖에 없고 거기서 궁극적 파멸만이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며 3인칭적인 존재로 내가 '파악하는'(grasp) 것이 아니라 2인칭적 존재로 내 앞에 서 있는 분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이다(주21). 그럴 때에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인 나를 '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너와 같이 있는 존재, 즉 '우리'로 인식하는 것이다(주22). 이것을 우리는 인간 개체성이 소멸되지 않는 가운데 나타나는 공동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그 동안 인간 사회 속에 있었던 모든 계급투쟁, 민족투쟁, 그리고 각종 소외 문제에 대한 철학적 새 기반이 마련되는 셈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런 인간정의의 파급효과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이해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적 죄성이 이런 공동체적 인간관을 실현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드디어 교회가 할 영역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교회는 조직된 체제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삶의 총체성이 공유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교회가 이기성의 노예가 된 세상에 나가서 그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여야 할 것이다(주23).

 

5. 해석학의 과제로서의 대화적 행위의 중요성

공동체로서의 인간존재에 가장 필수적인 그 다음의 요소는 개체성이 소멸되지 않는 가운데 어떻게 공동체로서의 실체를 유지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공동체적 인간들의 하나됨의 활동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 대화적 행위이다. 21세기의 벽두에 벌어진 9.11사태는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적 기초 위에 세워진 서양세계간의 갈등의 문제이다. 지상 공동체의 이 시급한 문제는 결국 대화적 행위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주24). 이렇게 만남과 대화적 행위의 필요성을 인생의 생존 자체의 기본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남의 여건을 날마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해서 만드는 열심과 성실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행위는 책임을 동반하는 윤리적 행위이다 (주25).

그런데 실제로 해석행위, 대화적 행위는 어떻게 일어날까 ? 해석은 내가 상대방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지평의 핵융합이 일어나야 가능한 것이다(주26). 이 지평의 핵융합은 한쪽에서의 우월 혹은 지배와 다른 쪽에서의 열등 혹은 피지배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한 쪽 즉 우월한 쪽에서의 희생과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불완전한 공동체 형성에 근본적 혁명을 제공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할 수 있다(주27). 피조물인 우리를 근본적으로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당신의 언약의 파트너로 간주하시고 완전한 공동체를 형성하기를 원하시는데 그 시작은 우리보다 크신 분 성자의 포기와 희생, 즉 낮아지심과 자신을 주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대화적 행위가 인간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그 하나님을 소개할 뿐 아니라 소개하는 자신이 또 한번 그러한 낮아짐과 희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슬람과 기독교의 역사적 오랜 대치를 끝내는 길은 사랑의 종교가 되지 못한 기독교의 활동들 (십자군원정)을 이교도 앞에 회개할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은 전혀 하나님의 대화방식이 아닌 인간적 사탄적 대화방식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사랑으로 죽는 종교를 다시 소개하여야 한다.

 

6. Sola Scriptura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서

성경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계시이자 동시에 하나님과 우리의 대화의 자취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성경을 제대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과제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어두움의 도전을 늘 받아왔다. 고대교회는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육체적인 고난과 같은 직접적인 핍박이라는 행태의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예언자 예례미야의 경우와 같이 성경을 반포되지 못하도록 원본을 없애려고 하였다.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성경을 일부만 가지고 있고, 개인이 성경의 번역과 해석을 하는 것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전과 표현의 자유로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자 어두움의 세력은 성경의 해석에 혼돈을 가져 옮으로서 성경의 진리의 확산을 막는 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런 시기에 종교개혁의 슬로건이었던 Sola scriptura의 새로운 의미 발견을 통하여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선 종교개혁 이후 성경연구를 주도하던 소위 '고전적 문학비평'(old literary criticism)이 얼마나 히브리적이 아닌 그리스-로마적 문학적 표준을 따라서 진행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주28). 옛 교부가 말한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는 선포가 필요한 것이다. 진정으로 히브리적인 것을 히브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 즉 '새로운 히브리적 문학비평'(new literary criticism)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슬로건은 전통적 신학에 있어서도 도전을 주는 것이다. 즉 성경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 자신은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럴 때에 우리는 왜 성경에 정통한 학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서 나오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즉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글을 읽거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을 만나며 대화하며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주29).

 

7. 말과 행위의 일치문제

대화에서 중요한 수단은 말과 행동이다. 첫째로 우리는 현대일수록 대화의 두 요소의 완벽한 일치를 경험하기가 어렵게 된다. 공동체를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루어야 하는 것이 무시되며 일시적인 이익을 위하여 말과 행동을 괴리시키거나 부인하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자연현상 속에서도 말과 행동의 일치를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다 (주30).

두 번째로 그러나 언어는 학문적으로 실제적으로 단지 인간의 의사를 전달하는 하나의 부호체계로만 이해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이것이 불신과 거짓, 위선과 속임과 같은 현대문명의 치명적인 문제를 낳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의 삶의 총체성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이다(주31). 그러므로 언어사용은 부호를 사용한 대화행위라고 볼 수 있고 그 진정한 의미는 인격간의 만남인 것이다. 이 인격과의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먼저 말과 행동의 정확한 일치를 역사적으로 보여주셨다 (주32). 언약의 당사자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신 약속에 신실하셨으며, 말씀하신 심판에 대해서도 그러하셨다.

말씀하신 자비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결국 자신의 종들을 고난으로 몰아가시다가 하나님 자신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자비를 완성하셨다. 단순히 자비로우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언약의 두 원리인 공의/심판과 자비/용서를 행동으로서 표현하신 것이다.

또 하나님의 행동하시는 말씀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다루신다. 하나님의 행동하시는 말씀이 있는 곳에 인간은 가장 깊은 내면에서 가장 외적인 사회적 삶과 자연적 환경에 있어서도 완전한 치유를 이루신다. 이스라엘이 언약에 충실할 때에 들어가며 나가며 복을 받고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는 것이다 (신 28장).

 

8. 본질로의 회귀 : 삼위일체를 향하여

이 모든 현대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이 오래된 성경의 진리인 삼위일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주33). 그러므로 이전보다 더 삼위일체에 본질적으로 돌아가야 한다.

 

(1) 인간본질의 새로운 선포인 영으로서의 이해의 기초로서의 삼위일체

칼빈의 말대로 인간지식은 신지식에 기원한다. 인간은 누구인가에 대한 궁극적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있다. 인간이 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사실에 근거하는 것이다 (요 4:22-24, 롬 8:16). 세 하나님 모두 영이시고 그 분들 사이의 관계와 교제는 모두 영적이다. 이것이 인간의 영성, 영됨에 대한 근본적 기초이다.

 

(2) 인간본질의 새로운 선포인 공동체적 존재의 기초로서의 삼위일체

인간이 공동체됨에 대한 근본적 선언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되는 가장 중요한 표가 바로 인간이 더불어 사는 존재인 점에서 그러하다. 창 1:26은 하나님의 공동체성을 나타내고, 그 다음절인 1:27은 인간의 공동체성을 나타낸다. 이 두 공동체성의 유사성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기초인 것이다 (주34).

 

(3) 모든 대화행위의 기초로서의 삼위일체

여기서 인간 공동체의 모든 대화행위의 기초가 형성된다. 우선 하나님 상호간에 진정한 대화행위가 있고 이것이 인간상호간에 진정한 대화의 기초가 된다. 삼위하나님 사이에 진정한 권위와 거기에 대한 순종이 있으며 사랑함과 포기가 있었다. 이것이 인간공동체 형성의 진정한 기초가 된다. 그리고 그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된 인간공동체를 향하여 대화행위를 행하시는 것이다. 즉 공동체 하나님이 공동체 인간에게 대화행위를 하시는 것이다.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이 절대피조물인 우리와 공동주체를 형성하려 손을 뻣치시는 것이다. 이러한 낮아지심에 대한 우리의 무한한 경외심이 모든 대화행위의 기초가 된다. 비록 하나님을 향하여서 뿐 아니라 동료 인간에 대해서도 그런 경외심을 적용하게 된다.

 

(4) 말과 행동의 일치를 이루시는 삼위일체

말과 행동이 하나된 근본출발은 삼위하나님 사이에 있는 일이다. 두 분이 아니라 세 분이시기 때문에 이 말과 행동의 하나됨은 쉽게 점검된다. 성자의 임직식에 성부와 성령이 나타나셨고 성자의 메시야로서의 임직을 말로서 행동으로서 완성하셨다. 성자의 수난에서 부활과 승천에서도 말과 행동의 하나됨을 보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