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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마태복음

마태복음 13장 씨뿌리는 자의 비유

마태복음 13장 씨뿌리는 자의 비유

Tolle Rege/마태복음

2012-04-22 17:58:35


  씨뿌리는 비유는 천국의 비밀에 대한 비유, 즉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이 비유는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있는 사람에게 하신 것인데, 말씀을 계속 듣고 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결실치 못하는 경우가 있고 결실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비유는 두가지 경우 즉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와 결실하는 경우로 크게 구분된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의 비유는 결실치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고 좋은 땅이란 결실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길가, 돌밭,가시떨기의 경우는 결실치 못하는 이유의 객관적이고 구체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결실하는 이유인 좋은 땅이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고 비구체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좋은 땅이란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땅이란 결국 결실하는 땅, 즉 결실로서 입증되는 땅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결실하지 못하는 이유는 길가,돌밭,가시떨기 등, 땅에 관한 설명에서 이해 할 수 있으나 결실하는 이유를 “좋은 땅” 이라는 표현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데 예수님은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설명하시었는데 이것은 결국 결실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깨닫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 비유에서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왜냐하면 깨달음을 일반적인 의미의 깨달음, 곧 “이해하는 것”이라고만 해석한다면 돌밭에, 혹은 가시떨기에 뿌리운 경우도 이해의 수준이나 깊이는 다를지언정 어느 정도의 말씀의 이해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 깨달음이란것도 좋은 땅이라는 표현처럼 결국 결실하느냐 ? 못하느냐? 는 결과를 보고 깨달음 여부를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주관적이고 비구체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다시 결실지 못함으로 깨닫지 못했음이 입증되는 경우와 결실함으로 깨달았음이 입증되는 경우로 두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결국 말씀을 듣고 결실한다는 것이 무엇이며 결실여부의 판단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게 부각될 수 밖에 없다.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깨달음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있는 것이 깨달음의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도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다. 결국 말씀을 계속 듣고 있는 우리에게 결실이 있는가? 없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며 그 결실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을 예민하고 철저하게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듣고 결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씨뿌리는 비유에서 유추해보면 모든 씨는 그 열매의 원형이 그 씨에 내재되어 있다 즉 감람나무씨에서는 감람열매가, 포도나무씨에서는 포도가 결실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가 내재하고 있는 열매의 원형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국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의도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에대한 대답은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의도하시는 것은 사람, 곧 말씀을 들은 우리들이 하나님과 함께 이루는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유기적 공동체 곧 하나님의 나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결실이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결국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잣대를 가지고 결실이라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은 단순히 어떤 개인이 구원을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하는 구원론적 관점이 아니라 구원의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적 관점에서 결실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의식과 비젼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이 땅과 역사에서 실천할 의지와 실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는 결실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씨뿌리는 비유에 나타나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좋은 땅, 이것을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다양한 여러 가지 상황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우리의 경험상으로 보면 한사람이 말씀을 듣더라도 그 사람의 생애의 전체 시기에서 길가에, 돌밭에, 가시떨기에 혹은 좋은 땅에 뿌리운 상태가 각각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어떤 시기에는 말씀을 들으나 전혀 깨닫지 못하는 길가에 떨어진 씨의 때가 있을 수 있고,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으나 환난이나 핍박으로 넘어진 때도 있을 것이며,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처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있는 시기도 있으며 그리고 마침내 말씀을 깨닫고 좋은 땅에 뿌리운 씨처럼 백배, 육십배, 삼심배로 결실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말씀을 듣자마자 깨닫고 결실하는 자도 있을 것이나 아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그렇기 보다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뿌리운 씨와 같은 쓰라리고 답답한 처지를 그 생애에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경우를 경험하나 마침내 결실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결국은 결실치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말씀을 듣고 결실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우여곡절도 많이 있음을 우리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결실한다는 것은 매우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이다. 결실은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이 아니고 가시적인 사실이다. 따라서 결실이란 내적상태라기 보다는 외적현상으로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인 말과 행위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수 있다. 외적현상이란 내적상태로부터 발원하는 것이지만 내적상태가 자동적으로 외적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니며 특히 그 외적 표현이 방해되는 상황에서 쉽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더군다나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외적표현은 그 근원인 내적 충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내적 충실성의 증거도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비유는 내적조건으로서의 씨가 외적 표현으로서의 결실을 통해 입증되며 궁극적 의미를 갖는다는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열매맺지 못하는 씨는 씨로서 의미가 없으며 열매 맺는 사실만이 씨에게 진정한 존재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결실치 못하는 이유로서 씨가 길가,돌밭 혹은 가시떨기에 뿌려졌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것은 악한자가 와서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았거나, 환난이나 핍박을 인하여 넘어졌거나, 혹은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힌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말씀을 듣고 결실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뿌리운 것을 악한자에게 빼앗기지 말아야하고, 환난이나 핍박에 넘어지지 말아야 하며,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이겨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들은 모두 내적 혹은 외적인 싸움을 의미한다. 결국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하는데는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으며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결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

 

한편, 결실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 비유는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즉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만 결실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만 들은 말씀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 내적,외적인 영적 싸음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각각의 상황과 단계에서 부딪히는 싸움을 이길 만한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예수님께서 하신 “집짓는 자”의 비유를 이런 시각에서 설명해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의 이말을 듣고 행하는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이 비유는 얼핏 보면 말씀을 듣고 행하라 그리하면 반석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시련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라는 뜻 같으나 자세히 보면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만 시련속에서도 말씀을 듣고 행할 수 있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부딪히되” 라는 표현은 결국 말씀을 듣고 행하려고 할 때 영적 싸움이 발생함을 의미한다. 비와 창수와 바람과 싸워 이겨야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듯이 영적 싸음에서 싸워 이겨야만 결실할 수 있는 것이다. 이기려면 이길만한 준비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무너지지 아니한 집은 주초를 반석위에 놓았기 때문이요 무너진 집은 모래위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이길만한 준비로서 그 싸움에 이길수 있을 정도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초보적인 혹은 불충분한 깨달음만 붙잡고 있을 때는 싸움에서 패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이 도전이 올 때 무너짐이 심하다는 것이다. 결국 반석위에 지은 집인지 모래위에 지은 집인지는 비와 창수와 바람에 부딪혀 봐서 무너지는지 무너지지 않는지를 보아야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단순히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지 무너지지 않는다는 교훈이라기 보다는 말씀을 듣고 그 정당한 반응으로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할 때 반드시 싸움이 있다는 것과 그 싸움을 이기려면  반석에 지은 집과 같이 싸음에서 이길만한  수준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잡하고 교묘한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필연적으로 말씀을 듣고 행하려 하는 자들에게 시시각각으로 부딪혀 오는 영적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것인가 ? 그리하여 마침내 결실에 도달할 것인가? 그 답은 오직 그 싸움에 필요한 만큼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 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부딪히는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고 결실하기 위하여 말씀은 계속적으로 새롭고 풍부하고 깊이있게 해명되고 가르쳐지고 깨달아져야 할 필요가 있다.//

 

 

[추기] 2011. 12. 31 토요일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언제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도전으로 다가오게된다.  왜냐하면 그 비유는 과연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있는 나는 열매가 있는가라고 자문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계시하는 비유라면 결국 하나님나라는 열매맺는 백성만이 상속하게 된다는 것이며 동시에 말씀을 듣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반드시 있다는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 인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13장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시작하고 그 비유는 다시 해석되고 있는데 이어지는 몇가지 비유들이 바로 이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해석적 비유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13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련의 비유들은 모두 이 씨뿌리는 비유는 중심으로 긴밀한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가라지 비유는 앞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결실치 못하는 자에 대한 해석적 비유인 것이다.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을 가라지로 비유한 것인데  결실치 못하는 자들은 결실기가 이르기 전에는 결실하는 자와 거의 구별이 힘들 정도로 섞여 있지만 결실기가 되면 그 열매없음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며 결국은 뽑혀서 불에 던지우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 비유는 열매가 없다면 심판을 받고 불에 던지우게 된다는 무서운 경고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결실하는 자에대한 해석적 비유인 것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의미하는 결실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새들이 깃들일 만한 큰 나무가 되는 것 처럼 시작은 미미해 보이지만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누룩비유는 작은 누룩이 서말이나되는 가루를 전부 부풀게 하는 것 처럼 하나님나라의 열매는 철저하고 강력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두가지 비유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나라 열매의 성격은 신자들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놀랍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말하는 열매의 의미이다. 그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열매는 신자들의 순종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인 바 곧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강조하는 것은 열매를 맺는냐 못 맺는냐 하는 문제인데 결국 열매의 유무를 결정짓는 관건은 말씀을 듣고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깨달음에 대한 해석적 비유가 바로 이어서 나타나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의 비유인 것이다.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그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자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사는 것이며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두 비유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비유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산다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나라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다는 것의 본질적 성격을 선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자기의 모든 것과 다 바꿀만큼 가치있는 것이라는 의미이거나 혹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이 바유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에서 소위 양다리 걸치기는 용납될 수 없으며 전적인 헌신이 요구된다는 것일 것이다. 천국말씀의 절대적인 가치와 소중함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깨달을 때 전적인 헌신은 불가피하게 나타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급된 그물비유는 가리지 비유와 동일한 내용인데 이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해석적 비유 전체를 감싸는 인쿠루지오일 것이다. 이 인쿠루지오 구조를 통해서 그 핵심에 놓인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비유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핵심은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 즉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신 것 아닐까?

 

[추기] 2019-11-06 17:07:58

마태복음 13장

비록 예수의 표적들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의 저항을 받았지만. 그 놀라운 표적을 본 큰 무리들이 모여들었고 예수는 비유로 여러가지를 그들에게 말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널리 알려진 씨뿌리는 비유였다. 그리고 예수는 무리들에게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이 비유를 들을 귀가 없다면 비유를 깨닫지 못함을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 비유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어찌하여 무리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로 말하시는가라고 여쭈었다. 예수의 대답은 뜻밖에도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지만 무리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무리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기 때문이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귀가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12절) 무리에게 들을 귀가 없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나라 비밀이 비유로 주어진 것은 그들로 하여금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이사야 시대에 불순종하고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과 귀가 둔하게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그 나라의 비밀을 깨달을 기회가 박탈되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여 결실하지 못하는 사람과 천국말씀을 듣고 깨달아 결실하는 사람간의 날카로운 대조이다. 깨닫지 못하여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는 3가지로 제시되는데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 말씀을 듣고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자, 그리고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가 그것이다. 이 세가지 경우의 공통점은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함으로 결실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씨뿌리는 비유의 키워드 두 가지는 결실하는 것과 깨닫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지는 가라지 비유는 결실하는 일에 대해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가라지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결실에 대한 몇가지 통찰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결실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결실을 향해 자라는 동안에는 결실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 구분이 어렵다는 것, 마지막 추수때에 결실 여부는 농부가 판단한다는 것, 그리고 결실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겨자씨 비유나 누룩 비유도 결실에 대한 설명이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결실은 시작은 대단히 은밀하고 미약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 결과는 놀랍도록 풍성하고 엄청나다는 것이다. 가라지 비유에 대한 해석이 주어진 후에 또 두 가지 비유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밭에 감추인 보화 비유와 좋은 진주 비유다. 이 두 비유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천국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밭에 보화가 감추인 것을 아는 자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는 것, 혹은 극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가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것은 말씀을 이해하고 동의하는 그런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전실존적인 결단이란 사실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그물 비유는 가라지 비유와 더불어 씨뿌리는 비유를 설명하는 비유들을 감싸는 인클루지오 구조를 형성한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에서 결실하는 자와 결실하지 못하는 자는 종국에 분리될 것이고 결실하지 못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임을 강조한다. 결국 이 모든 비유들의 결론은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에서 지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무리들에게 여러가지 비유가 주어졌지만 그들은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이후에 10절부터는 무리들이 아닌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들인 것 같다. 그래서 51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질문하시고 제자들은 그러하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예수는 이 비유들을 깨달은 제자들이 장차 예수의 뒤를 이어 천국복음을 전파할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비유를 마친 후에 예수는 고향으로 돌아가시지만 그곳에서도 배척을 받으신다. 그들은 예수가 행하는 능력을 보고서도 믿지 않았고 그래서 예수는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