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장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
Tolle Rege/마태복음
2012-04-22 17:49:04
마태복음 2장에는 날카로운 대조가 나타난다. 그것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는 질문을 한 것과 이 말을 듣고 헤롯 왕과 온 이스라엘이 소동을 한 것이다. 과연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은 구약의 선지자의 예언을 따라서 유대인의 왕이 유대 땅 베들레험에서 날 것을 말하였지만 정작 그들은 구약의 선자자들이 예언한 유대인의 왕이 나신 사실을 알지 못하였고 이방에서 온 박사들은 오히려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을 알고 찾아온 것이다. 이방인들이 먼저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을 알았고 정작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나신 것을 알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헤롯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죽이려고 획책하기 까지 하였다. 이방은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을 축하러 멀리서 왔는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나신 것을 모르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왕을 죽이려고 한 이 두가지 상반된 사실을 마태복음2장은 날카롭게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는 2장에서도 1장의 어조를 이어받아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 그리고 애굽으로 피신한 것과 헤롯이 사내아이를 죽인 일 . 심지어는 헤롯이 죽은 이후에 애굽에서 돌아와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가서 살게된 것 이 모든 일들이 철저히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기록하고 있다.
[추기] 2012. 11. 20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정작 유대인들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의 거짓 왕인 헤롯이 중심이 되어 왕으로 오신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예수님은 태어나자 마자 애굽으로 피신을 하셔야 했으며 나중에 이스라엘로 돌아와서도 이스라엘에의 시골 변방인 나사렛에서 사셔야만 하였다. 이렇게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시작은 환영받지 못하고 핍박 가운데 시작하셨으며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변방의 시골동네에서 이름없이 고단한 삶을 사신 것이다. 유대인의 왕 아니 온 세상의 왕이 이런 삶을 시작하신 것이다.
[추기] 2014. 4. 11 그리스도의 오심
마태복음의 동방박사에 대한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예수께 처음으로 경배한 자들이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정작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이를 알아본 자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 날 것을 알고 있었을 뿐 정작 그리스도를 경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알고 예언에 익숙하였지만 성경과 예언을 따라서 오신 그리스도는 알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헤롯의 박해를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갔고 헤롯이 죽기까지 애굽에 있었다는 기록은 마치 이스라엘이 기근을 피하여 애굽에 들어간 것을 연상케 한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낮추어 사람이 되시어 자기 백성에게 오셨을 뿐만 아니라 태어나면서 부터 고난을 받으시고 자기 백성과 같이 애굽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 역시 선자자들이 이미 예언한 바가 성취된 것이다. 헤롯의 핍박이 예언을 성취하게 한 것이니 악인의 악행조차도 하나님을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놀라울 뿐이다.
헤롯의 무자비한 살육은 자기의 왕권을 지키려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죽이려던 것이었다. 모든 권세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지만 세상의 권세자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권세를 자기 것으로 간주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지키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악행인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세상의 권세의 타락상이다. 그러나 이런 헤롯의 악행조차도 이미 예레마야는 예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될 뿐이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은 죽었다. 그들이 죽은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죽었기 때문에 생명이 없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생명없음이 죽음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이려던 아기는 결코 죽지 아니히신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기 전에는 누구도 그를 죽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그는 죽으실 것이지만 그 죽음은 생명을 주는 죽음이다. 생명없는 자에게 생명을 주는 죽음, 어두움에 빛을 비춰주는 죽음인 것이다. 그의 부활은 바로 그의 죽음이 생명을 주는 죽음임을 증거하고 선포한 것이다. 오고오는 온 세상에.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서 나셨지만 나사렛으로 가신다. 나사렛 사람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말하게 하신다. 본다는 자들은 보지 못하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하시려는 것이다.
[추기] 2019-11-06 17:02:18
마태복음 2장
동방 박사 이야기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나아가 당시 헤롯 왕가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를 이스라엘은 알지도 못했는데 이방인들이 먼저 알고 경배하러 찾아왔다고 말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 이야기는 유대인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 헤롯이 가짜이고 유대인의 진짜 왕이 예수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롯은 자기 왕권을 위협하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아기 예수는 애굽으로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메시아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했고 유대인의 가짜 왕인 헤롯은 그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마태복음 3장
세례요한 이야기는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마태는 세례요한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의 성취로서 온 자이며 그는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곧게 준비하는 자라고 소개한다. 세례요한은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천국 가까이 왔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자라면 그가 말하는 가까이 온 천국은 곧 가까이 온 메시아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은 메시아가 가까이 오셨다는 말을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말한 것이다. 요한에게 메시아와 천국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 셈이 된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요구한 것인가? 메시아가 가까이 오신 것과 이스라엘의 회개는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 이스라엘의 회개는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곧게 하는 준비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메시아를 보내어 이스라엘 가운데 다시 돌아오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회개 곧 하나님께로 돌이킴은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므로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회개는 용납되지 않고 오히려 심판을 자초할 것이다. 그러니 천국의 도래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되지만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 될 것이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자이고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가 세례를 받고자 하실 때, 요한은 예수가 자신이 감당치 못할 비범한 존재임을 알았지만 자기가 기다리던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이신 줄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고자 하였을까? 더구나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죄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인데 메시아가 왜 그 세례를 받아 하는가? 그래서 요한은 세례 베풀기를 거부했지만 예수는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받는 세례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또한 그가 받는 세례는 메시아로서의 신적 인준을 받는 행위이기도 했다.(16-17절) 전자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의(언약적 신실함)를 이루는 것이라면 후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의(언약적 신실함)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가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의 의, 모두 곧 모든 의를 이루는 방식이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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