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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로마서

로마서 9장 약속의 자녀

로마서 9장 약속의 자녀

Tolle Rege/로마서

2012-10-10 23:06:41


 

  바울은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자신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형제 곧 골육과 친척인 이스라엘 사람들로 인한 것이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하서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받아들이길 소원하고 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매우 중대한 진리를 선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삭이나 야곱의 경우에서 보듯이 육신의 자녀가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온 땅에 전파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이를 긍휼하게 여기신다. 바울은 여기서 분명히 인간의 행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인간은 누구라도 이것에 대하여 도전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는 마치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반문할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려는 요점은 하나님의 이 자유로운 선택이 유대인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호세아의 예언을 들어 하나님이 이방인을 부르시는 것은 이미 구약에 예언된 것임을 증거하였다. 또한 바울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서 모든 육적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거하였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이 유대인들 가운데 남은 자들과 이방인들 가운데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임한 것이고 바로 이들이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에 대한 중요한 진술을 한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추구하였지만 결국은 율법의 요구에 이르지 못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을 알지 못하던 이방인들이 오히려 의를 얻었는데 이것이 곧 믿음에서 난 의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율법의 요구 자체가 인간의 외적    행위 이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없이는 결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실패는 율법의 의미 자체에 대한 무지에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방인들은 이스라엘과 같은 율법은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율법의 요구에 이른 것이고 이것이 바로 믿음에서 난 의라는 것이다.

 

추기 2014. 4. 28  하나님의 절대주권

 

8장 에서 바울은 신자들이 장차 도달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말하고 그 영광의 목적지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자가 없다는 놀라운 확신을 노래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마음 한편에는 유대인 동족들을 향한 마음의 고통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의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며 그리스도도 육신으로는 그들에게서 나셨는데 정작 그들이 복음을 대적하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문제로 인하여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한다. 동족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움이다.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먼저 바울은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라고 단언한다.

 

하나님은 천하만민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리는 약속을 하셨다. 그런데 이 약속은 누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느냐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중 이삭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고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그의 씨로 불리리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야곱과 에서가 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야곱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미리 정하셨다.

이것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중대한 원리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긍휼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지 않고 달음박질하는자로 말미암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은 완악하게도 하신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사람이 하나님께 따질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며 사람은 하나님을 판단할 위치에 절대 있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의 이 근본적 관계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사람은 반드시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다. 

 

추기 2014. 4. 28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은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만드시며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긍휼의 그릇을 만드신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은 진노의 그릇에도 바로 진노를 부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덧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반응에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 중에서건 이방인 중에서건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 바로 긍휼의 그릇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라,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사야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 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언한 것도 바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 곧 부르신 자를 통하여 이루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여 이 진리를 논증함으로써 자신이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미 구약에서 계시된 것임을 암시한다.

 

율법을 모르던 이방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따르지 않았지만 의를 얻었으니 이것이 바로 믿음에서 난 의이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따라간 이스라엘은 그 의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얻을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율법외에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으니 이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하나님은 걸림 돌과 거치는 바위를 이스라엘에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복음이었다. 이 복음을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은 걸림 돌과 거치는 바위가 될 것이나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날도 복음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