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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열왕기상

열왕기상 13장 여로보암의 죄악

열왕기상 13장 여로보암의 죄악

Tolle Rege/열왕기상

2011-07-14 16:13:12


한 익명의 선지자가 유다에서 부터 벧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의 죄악을 정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에도 선지지가 있었을 텐데 왜 멀리 유다에서 선지지가 온 것일까? 이는 아마도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여로보암을 두려워하여 그 죄악을 지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남 유다의 선지자를 보내신 듯하다. 그만큼 북이스라엘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던 것 같다. 여호보암의 죄악을 제어할 선지자를 유다에서 부터 보내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정치적 분열을 허용하셨지만 두 왕국을    다스리는 원리는 언제나 동일한 여호와의 율법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 유다의 선지자가  여로보암의 죄악을 지적하였지만 여로보암은 오히려 그를 잡으려고 하다가 손이 마르는 재앙을 당하였다. 여로보암의 간청으로 유다의 선지자는 다시 그의 손을 성하게 해주었지만 그는 자신과 함께 쉬고 예물을 받으라는 여로보암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왜나하면 하나님은 이 선지자에게 떡도 먹지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도  되돌아 가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여로보암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혐오를 나타내는 것인 듯하다. 하나님이 멀리 남유다에서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신 것은 단순한 저주의 선포가 이전에 그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고 일반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기까지  하였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멀리 남유다에서 온 선지자를 대접하려고 애를 쓴 것은 아마도 여로보암이 두려워 그 죄악을 정죄하지 못한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한 속죄의 의도였을지 모른다. 이 늙은 선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빙자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남유다의 선지자를 대접하려고 안간힘을 썻고 결국 남유다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그의 집에서 떡을 먹고 물을 마시게 된다. 북이스라엘에 불순종을 지적할 자가 없어서 멀리 남유다에서 보낸 선지자도 불순종을 하게 되었으니 누가 그것을 지적할 것인가?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갑자기 태도를 돌변하여 유다의 선지자를 정죄한 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입술을 움직여서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순종하는 자가 없는 현실에 답답해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남유다의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찢겨 죽은 것은 북이스라엘에서 떡과 물을 먹음으로 여로보암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철저하게 드러내지 못한 그의 죄악을 징벌하신 것이리라.

 

[추기] 2019-11-06 16:47:53

열왕기상 13장

 여로보암이 제단 곁에 서서 막 분향하려고 할 바로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유다로 로부터 베델로 왔다는 것은 북조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이 여로보암의 치명적 죄악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북조 이스라엘에도 예언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은 당연히 여로보암의 죄악을 책망하고 정죄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여로보암이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은 남조 유다에서 예언자를 보내 여로보암을 책망하신 것이다. 이는 여로보암이 다스리는 북조 이스라엘이 회복될 가능성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속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아무도 여로보암의 죄악을 책망하지 않는다면 여로보암이 그 악에서 돌이킬 기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조 이스라엘의 이런 상황에 분노하고 답답해 하셨던 하나님은 부득이 남조 유다에서 예언자를 보내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주님이 유대에서 온 예언자에게 북조 이스라엘에서 심판을 선포한 후에 그곳에서는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며 온 길로 되돌아 가지도 말라고 명하신 일은 여로보암의 죄악과 그 죄악에 동참한 북조 이스라엘에  대한 주님의 분노를 반영한다.  이후에 베델에 살고 있던 늙은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 여로보암을 책망하지 않은 것은 북조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언자가 두려워 침묵하였음을 보여준다. 예언자는 있건만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는 북조 이스라엘의 상황에 주님은 실로 답답하셨기에 유다에서 예언자를 베델로 보내셨던 것이다. 베델의 늙은 예언자가 유다에서 온 예언자를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 집으로 데리고가 밥도 대접하고 물로 대접하려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베델의 예언자는 유다에서 온 이 예언자에게 고마움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자신이 베델의 선지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못했는데 유다에서 선지자가 죽음을 불사하고 그 일을 대신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찌하든지 유다의 선지자를 대접해 보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델의 선지자는 그곳에서 물도 마시지 말고 밥도 먹지 말라고 명하신 주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베델 선지자의 말을 곧이 들은 유다의 선지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조에서든 남조에서든 주님의 심정을 헤아라고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선지자가 없으니 주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는가? 이제 누가 이 유다에서 온 선지자에게 주님의 심정을 전해줄 것인가?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베델의 선지자에게 임했고 주님은 유다 선지자를 데리고 온 베델 선자자의 입을 통해 유다 선지자의 둔함과 불순종을 책망하셨다. 유다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죽임을 당한 일은 예언자가 자기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죄악인지를 보여준다. 주님이 유다에서 예언자를 보내신 일은 여로보암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일과 동시에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긴 뒤에도 여로보암은 여전히 그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아니하고, 오히려 일반 백성 가운데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산당의 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