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초기기독교에서의 부활[9장 부활기사들 이외의 복음서 전승들]
N.T. 라이트/RSG
2015-09-17 01:24:23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3부 초기기독교(바울을 제외한)에서의 부활
제9장 초점이 다시 맞춰진 소망: 부활기사들 이외의 복음서 전승들
1. 서론
복음서들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복음서들이 부활이라는 주제에 대해 적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의외이다. 물론 이것은 초대 교회가 이전의 학자들이 전제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이 “예수의 말씀들”을 신속하게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표지이다. 교회의 필요에 기여하기 위해 전승을 만들었다는 옛 전제들을 받아들인다면 부활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해 줄 “주의 말씀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쉬웠을 것이다. 만약 예수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형태로 부활이란 주제에 대해 말한 것이 있었다면 그 말씀들은 보존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씀들이 없다는 사실은 부활이 예수의 가르침의 주된 주제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이 주제에 대하여 거의 말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가 이 주제에 관해 말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도 다른 사람의 부추김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는 분명히 부활을 신의 백성에게 약속된 미래로 믿었지만, 부활은 당시의 유대교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주된 주제로 역할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선포의 주된 주제는 하나님나라였다. 예수가 부활에 대해 말했을 때도 그것을 고립된 주제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일부로 보았을 것이다. 부활은 분명히 예수의 중심적인 또는 주요한 주제가 아니었다. 부활 또는 실제로 죽음 이후의 모종의 삶에 대한 언급들은 복음서 전승들 속에서 무작위적이고 비체계적인 것으로 보인다.
2. 마가복음 및 그 병행문들에서의 부활
마가에서 부활에 관한 내용은 주로 치유, 도전, 장래의 신원에 관한 예고들, 수수께끼 같은 말씀들이라는 네 개의 범주들 속에서 나온다.
(1) 치유
마가복음에 나오는 야이로의 딸을 치유한 사건 및 누가와 요한에 나오는 이와 병행되는 치유사건들은 엘리야가 엘리사가 죽은 자들을 살려낸 사건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애곡하는 자들에게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통상적인 은유로 잠잔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들은 자들에게 잠자는 자들은 깨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다니엘서 12장2절을 연상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잠잔다.’는 언급은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것’에 관한 묘사로 이어진다. 여기서 예수의 말에 대한 구경꾼들의 조소는 예수의 부활 이야기를 들은 자들의 불신앙을 반영하고 있으며 또한 깨어난 소녀를 보고 부모들이 놀란 것은 예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과 그 소식을 들었던 자들의 놀람을 반영한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이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이와 동일한 종류의 놀라운 능력이 더 크고 위대하게 나타난 사례로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야이로의 딸은 언젠가는 다시 죽게 될 것이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죽음을 통과하여 그 반대편으로 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서를 끝마친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들의 청중들에게 복음서 끝에 나오는 부활 이야기로부터 터져 나오게 될 주제에 관한 예비적인 진술을 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2) 도전
부활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두 번째 범주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준 도전, 새로운 세상 속에서의 위대한 역전들에 관한 그의 예고이다.(마가복음 8장34-37절; 9장43-47절; 10장 29-31절) 요세푸스와 제2성전 시대 문서들에 비추어 볼 때, 이 본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부활에 관한 약속으로 읽혀질 수 있고 그러한 약속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문맥상으로는 예수를 좇으라는 구체적인 도전과 연결되어 있지만 부활의 약속은 당시의 그 어떤 혁명운동에서도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주된 주제가 하나님나라였다는 것을 감안할 때, 부활은 하나님나라에 관한 약속과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도전은 제2성전 시대의 문맥을 따라서 신의 백성에게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걸라는 도전 속에 놓여 있고, 목숨을 잃는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암호화된 약속에는 부활이란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두 번째 본문(마가복음9장 43-47절)은 상당히 개인적인 희생을 치루고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마지막 행에서는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것으로 바뀜)에 관하여 말하는데, 이것은 현세와 내세라는 전형적인 유대적인 이분법 그리고 현세와 내세에서의 상당한 정도의 몸의 연속성을 전제한다. 세 번째 본문(마가복음 10장 29-31절)은 계약백성이 마침내 신원될 것이라고 말하는 유대적인 전승들을 활용하고 있다. ‘내세’에 관한 약속이 명시적으로 나오고 내세에 합당한 생명(통상적으로 ‘영생’으로 번역되는)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본문들 속에 ‘부활’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단어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관념이 함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3) 예수의 장래의 신원
마가 전승은 세 번에 걸쳐 예수가 자신의 죽음뿐 아니라 자신의 부활에 대해서도 예고했다고 보도한다.(마가복음 8장31절; 9장31절; 10장33절) 이미 예수는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예루살렘에 갔고,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소명으로 주신 것이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논증한 바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에 참여한 제2성전 시대 유대인으로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신이 그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시고 고난 후에 그를 신원하실 것을 믿었고 또한 선포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런 예고들이 예수가 한 것에 관한 문자적인 보도들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인데, 그 어디에도 제자들이 예수가 거의 즉각적인 부활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표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제자들은 예수가 임박한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거나 도대체 예수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들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세계에서 두드러진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마카베오2서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신에게 순종하여 죽은 자들이 몸으로 부활할 것에 대한 신앙을 보여주는 확고한 증거들로서 제2성전 시대 유대교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에는 바울이나 초기 기독교에서 발견되는 것과 달리, 유대교 전승 내부로부터의 혁신들에 관한 암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4) 수수께끼 같은 말씀들
(a) 헤롯
복음서에는 헤롯 안디바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세례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말했다는 기사들이 나온다. 헤롯과 그의 신하들이 제2성전 시대 유대인들의 주류신앙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인물들은 아니지만 이 이야기는 제2성전 시대 유대인들의 신앙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이 이야기는 죽음 직후에 또는 일정시간이 지나서 죽은 영혼이 다른 사람의 몸을 입고 오는 것을 가리키는 환생 혹은 윤회에 대한 신앙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다. 헤롯이 부활이라고 표현한 것은 유령들이나 귀신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은 몸을 입은 사람에 관해 말하는 것이다. 헤롯의 말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은 적어도 마카베오서와 다니엘서 이래로 통용된 일반적인 관념, 즉 이스라엘의 신이 의롭게 고난 받은 자를 신원하실 것이라는 관념이었고 헤롯은 세례요한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b) 제자들의 당혹감
부활에 관한 주후1세기 언어는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본문(마가복음 9장9-10절)이 제2성전 시대에 부활신앙이 널리 퍼져 있지도 않았고 또 정통신앙으로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헤롯이 무엇을 생각했든지 제2성전 시대에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는 것’은 통상적으로 한 의로운 사람이 시간의 중간에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종말에 모든 의인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예수는 죽음 너머의 궁극적인 장래의 삶과 관련된 신앙을 가져다가 ‘돌연히 제자들이 변화되는 것에 관해 자유롭게 얘기하게 될 그 때를 보여주는 임박한 사건들의 일정 속에 끼워 넣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본문은 바울에 대한 연구 속에서 중요한 기독교적 혁신이라고 보았던 것들 중의 하나, 즉 부활은 두 단계로 구분되어 일어나는데 예수의 부활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어났다는 관념을 제시하고 있다.
(5) 사두개인들의 질문
(a) 서론
복음서 전승 전체에서 부활에 관한 가장 중요한 본문은 예수가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관해 답변한 대답이다.(마가복음12장 18-27절) 수많은 세월동안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개신교 개혁자들이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그 다음으로 사람이 연옥에 가는 것인지에 대하여 로마 전통에 대항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도전하였을 때에도, 그들은 궁극적인 목적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는 신앙에 대하서는 도전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 속에서 ‘부활’이란 단어는 단순히 ‘죽음 이후의 삶’ 또는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것이 예수가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단언하는 것이라고. 많은 독자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이런 관념들은 예수 또는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주후1세기 유대인들이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대교 전통 안에서 적어도 주후1세기에는 ‘천국’은 의인들이 죽음 직후에 또는 죽음 이후의 어느 단계에서 가는 곳에 대한 통상적인 명칭이 아니었다. 그리고 ‘부활’이란 단어가 일반적인 ‘죽음 이후의 삶’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이 본문은 공관 복음서 모두에서, 그 맥락은 성전에서의 예수의 상징적인 행위 이후에 예수와 여러 다양한 집단들 간에 벌어진 일련의 긴 논쟁이다. 이 논쟁들은 장래의 삶에 관한 신학 또는 신앙의 더 정교한 내용들에 관한 추상적인 논쟁이 아니라 예수가 방금 성전에서 행한 일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가 그 주된 쟁점이었다. 복음서 안에서 부활에 관한 논쟁은 이러한 더 큰 복합적인 사고, 즉 공관복음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정치와 신학의 풍부하고 폭발성 있는 결합 내에 속한다.
(b) 부활의 삶 속에는 혼인이 없다
사두개파의 질문에는 신명기 25장5-10절에 나오는 수혼법이 전제되어 있다. 사두개파의 질문에는 성경 및 신의 능력에 대한 무지가 드러나 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는 예수의 대답은 부활한 자들이 천사들과 같이 하늘에 있을 것이란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같다’는 존재론적 의미에서 부활한 자들이 천사들과 동일한 종류의 피조물이 된다거나 장소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천사들과 동일한 공간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능적인 의미에서 천사들이 혼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혼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성전기 유대인들에게 내세와 현세는 개인적 종말론이라 불리는 것과 아울러서 우주론과 정치를 이해하는 표준적인 틀이었다. 예수는 이 두 시대를 날카롭게 구별하고 현세에서는 혼인이 합당하지만 내세에서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혼인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내세가 불멸에 의해서 특징지워질 것이지 때문에 혼인이 불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부활은 더 이상 죽지 않는 불멸을 얻은 것이다. 부활은 야이로의 딸이나 나사로처럼 단순한 소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세와 동일한 종류의 세상 속에서 다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해서 반대편으로 나와서 죽음이 없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대답에는 두 가지 전제가 암시되어 있는데 그것은 혼인은 사람들이 죽는다는 문제점 때문에 제정되었다는 것과 천사들은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혼법은 아주 명시적으로 죽음에 직면했을 때, 가문을 잇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누가의 판본 속에서 예수는 이 수혼법이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 불필요할 뿐 아니라 혼인제도 자체도 마찬가지로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사두개파의 질문의 핵심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장래의 삶 속에서 어떻게 가문이 계속해서 지켜질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고 예수는 수혼법은 부활의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창조주 신이 만들 새로운 세상에는 죽음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혼인을 통한 생식도 필요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c) 산 자들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오래전에 죽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이 부활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것이 ‘산 자들의 하나님’이란 어구에 대한 전통적인 읽기이다. 이런 읽기는 결국 부활을 몸의 부활이 아니라 영적인 부활이란 견해, 즉 부활은 인간의 삶을 천사들의 삶과 같은 비육신적인 형태로 변화시키는 신의 창조적인 능력을 내포한다는 견해로 낙착된다. 그러나 제2성전기에 몸을 입지 않은 불멸이 사람이 죽음 직후에 들어가는 최종적인 상태라고 믿었던 유대인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활이 의미하는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산 자들의 하나님’이란 말은 족장들이 야훼의 존전 앞에서 몸을 입지 않은 상태로 여전히 살아있다면 그들은 장래에 부활하게 될 것이란 의미로 보아야 한다.
사실 사두개파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부활소망에 대한 초점의 재조정, 특히 자신의 사역을 통한 초점의 재조정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특질을 지닌 삶, 죽음이 더 이상 건드릴 수 없는 삶, 그러므로 생식을 위한 혼인을 포함한 죽을 운명을 가진 통상적인 삶의 척도들은 더 이상 타당하지 않은 삶에 관해 말한다. 그것은 모든 죽은 의인들이 바리새파든 사두개파든 누구나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부활을 기다리면서 모종의 지속적인 삶 속에 있는 중간 상태에 관하여 말한다. 그것은 현재의 실체를 가리킴(족장들은 여전히 살아있다)으로써 장래의 소망을(족장들은 새로운 몸을 입은 삶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단언하기 위하여 야훼가 모세에게 한 말씀에 관하여 말한다. 본문에 대한 이런 읽기는 이 논쟁을 ‘부활’이란 단어를 ‘죽음 이후의 삶’과 대체적으로 동의어로 사용해오던 후대 서구의 사상체계가 아니라 주후1세기 유대교의 세계 속에 위치시키는 장점을 가진다. 또한 이런 읽기는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이 본문을 기독교 특유의 내용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나름대로 편집한 것도 아니고 예수의 부활에 관한 그들의 나중의 이야기들을 부인하게 될 내용을 예수가 긍정하는 논의를 수동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d) 족장들, 출애굽, 하나님의 나라
부활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견해에서 상당히 중요한 또 하나의 차원은 정치적인 의미다. 바로 이것이 사두개파가 이 교리를 반대했던 이유들 중의 하나였다. 이 본문을 보면 부활에 대한 그런 정치적인 의미가 초기 기독교에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활의 정치적 의미는 아마도 흄과 같은 경험주의자들의 암묵적인 회의론뿐 아니라 후대의 서구사상이 부활에 대해 그렇게 반대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본문은(마가복음12장 18-27절) 예수가 방금 성전에서 행한 일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의 권세는 어디서 왔는지, 그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을 폐하라고 하는 것인지, 궁극적으로는 그가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인지에 관한 일련의 논쟁 한 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복음서 기자들이 이 이야기를 이런 순서 및 맥락에 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이 특정한 이야기를 예수 자신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게 될 때, 사두개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 사건은 그 밖의 다른 사건들 특히 성전의 파괴와 긴밀하게 결부될 것이다.
이 본문에 나타난 출애굽기 3장의 인용문이 지닌 의도적이고 전복적인 함의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출애굽기 3장6절은 단순히 부활에 관한 잠재적인 증거본문이 아니라 야훼가 자기 백성을 해방시킨다는 본문의 일부이다. 야훼의 이런 약속은 수많은 유대인들의 저항 운동의 지지대였고 또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의 핵심에 있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그 자체가 새로운 출애굽 운동, 해방 운동, 포로 귀환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부활을 긍정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신이 세상을 전복시키고 현재의 유대인들의 통치자들에게 예수가 성전에서 행했던 일을 행하기 위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것이었다.
출애굽기 3장6절은 족장들에 관해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에 관하여 뭔가를 말하기 위해 인용된 말씀들 중의 하나였다. 이스라엘의 신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와 미래에서도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실 것이다. 야훼는 족장들에게 신실하셨고 이런 신실하심은 모세의 때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야훼의 신실하심은 이후의 상황들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신이 참 신이며 자유의 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말해졌다. 주후1세기 이스라엘이 갈망하던 자유는 새로운 출애굽이라는 관점에서 표현될 수 있었고, 이 관념들은 은유와 환유를 통해 부활에 대한 이미지와 견고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 당시에는 부활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부활 그 자체가 이스라엘의 신이 계약에 의해서 행하기도 되어 있었던 자유와 관련된 총체적인 내용 중의 한 요소로 여겨졌다.
예수는 자신의 공생애 전체에 걸쳐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재천명함과 동시에 자신을 중심으로 그것을 재정의하였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메시지는 상징 행위를 통한 성전에 대한 강력한 도전에서 절정에 달했고, 그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신이 부활이라는 강력한 상징이 말하고 있었던 일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현재의 질서를 뒤엎고 하나님나라를 개시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복음서의 이 이야기는 예수의 부활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세상의 주로 세웠다고 바울이 말했을 때(로마서1장3-5절) 의미하던 것, 예수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능력을 가진 주이자 구원자이기 때문에 예수의 백성의 부활이 장래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고전 15장 20-28절; 빌립보3장 20-21절) 그가 의미했던 것에서 멀지 않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과 예수의 논쟁은 주후1세기 유대교에서 일어나고 있던 논쟁들과 유대교 내부에서 자라나서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고 믿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 속에서 신속하게 형성되었던 새로운 견해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사두개인이 바리새파의 부활 신앙에서 이미 간파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신앙은 모든 면에서 정치적인 의미에서 혁명적으로 보인다. 이것이 이 이야기가 공관복음서 이야기들 속에서 현 위치에 놓인 이유이다. 그리고 바울 및 주후2세기에 이르기까지 초대교회로 하여금 가이사가 아니라 예수에게 충성을 바치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부활 신앙이었다. 이 본문은 예수 및 그의 백성의 부활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믿음, 즉 부활절에 개시된 새 시대가 참 신이 마침내 온 세상을 위해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셨던 그 일을 성취하게 될 시대라는 인식을 큰 소리로 말해준다. 예수는 악을 심판하고 자기 백성을 해방시키며, 마침내 공의와 소망을 가져다 줄 것이다.
3. 마태/누가자료(이른 바, Q 자료)에서의 부활
마가가 대변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 그리고 장래에 신의 모든 백성의 부활을 굳게 믿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많은 학자들이 마태와 누가가 공유하고 있는 전승에 초기 기독교가 그런 부활 신앙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해 왔다. 나는 마가복음을 제외한 공관 복음서 전승에서 어느 정도 병행되고 있는 주요 본문을 근거로 이런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첫 번째 병행본문(마태8장 11-12절; 누가13장 28-29절)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라는 맥락 속에서 볼 때 종말론적인 위대한 역전이 진행 중이고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족장들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여 그들의 후손들만이 아니라 이방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병행본문(마태 19장28절; 누가22장 29절)의 핵심적 내용은 하나님나라가 제대로 세워질 때, 이스라엘의 신이 이스라엘과 세상을 다스리게 될 때,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식탁에 앉으며 한 분 참 신의 주권적인 통치를 베풀 것을 위임받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 본문은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부활과 그들 자신의 부활을 믿었을 강력한 개연성을 보여준다. 몸은 죽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한 예수의 경고와 약속인 세 번째 병행본문(마태10장 28-31절; 누가12장 407절)은 부활에 관하여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본문이다. 몸을 죽일 수 있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권면의 전제는 몸의 죽음 이후에 기다리고 있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고난과 순교를 마카베오2서 및 솔로몬의 지혜서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라는 권면이다. 이것도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미래에 관한 신앙들의 스펙트럼과 부합하고, 이러한 신원이 일어나게 될 장래의 부활에 대한 신앙과 잘 들어맞는다. 네 번째 병행본문(마태12장 39-42절; 누가11장 29-32절)은 요나의 표적에 관한 예수의 암호 같은 말씀인데, 관련된 이중적 전승 본문들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논쟁이 많은 본문이다. 여기서 주목한 것은 니느웨 사람들 및 남방의 여왕과 관련하여 사용된 가장 명시적인 부활 언어이다. 두 판본은 모두 예수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이 ‘심판 때에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을 강조한다. 이것도 장래의 부활이 통상적으로 심판의 때에 일어난다고 믿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스펙트럼에 속한다. 또한 마태나 누가가 ’요나의 표적‘을 예수 자신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것을 의도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것은 이 세대가 받게 될 유일한 표적은 요나가 구현했던 것과 동일한 표적이라고 말하는 마태의 경우에는 더욱 분명하며 누가 역시 마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을 ’표적‘으로 보도록 의도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결론적으로 마태와 누가가 대변하는 이중적 전승은 초기 기독교의 그 밖의 다른 분파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며, 그러므로 이중적 전승은 부활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초기 기독교의 한 형태에 대한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자료들은 초기 기독교 전승들과 예수 자신의 말씀들이 부활에 관한 제2성진 시대 유대교의 지도 위에 확고하게 서 있음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이 자료들에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모든 사람의 장래의 부활에 대한 반복적인 강조가 존재하며, 부활은 새로운 몸을 입은 삶을 지칭하는 것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특히 요나의 표적에 관한 본문 속에는 예수의 부활이 요나의 표적과 상응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표적으로 간주되었다는 상당한 증거가 존재한다. 그 표적은 과거 지향적으로는 예수의 선지자적 및 메시아적 사역의 합법성을 보여주고(이것이 표적을 요구한 핵심적인 동기였다.) 미래 지향적으로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역할이 역전될 최후의 표적이었다.
4. 마태복음의 부활
마태/누가 병행 본문이 아니면서 마태복음에서 부활에 관한 그림을 더해주는 본문은 첫 번째로 마태복음 10장 8절이 있는데,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행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질병 치유들을 행할 뿐 아니라 심지어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라고 지시한다. 이것은 장차 있을 더 위대한 부활을 보여주는 표적일 수 있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가장 두드러진 종류의 치유로 여겨진다. 두 번째 본문은 다니엘 12장3절(의인들이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을 간접 인용하는 마태13장 43절이다. 이 본문에서 마태는 하나님나라는 다른 무엇보다도 부활에 관한 약속을 성취하는 것이라는 암시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마태도 다른 전승들과 마찬가지로 제2성전 시대 유대교적 부활 신앙의 지도 위에서 주류적인 바리새파 신학과 동일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해 준다.
5. 누가복음의 부활
누가의 경우에 그가 부활이라는 주제를 복음서 전체적인 구조 속에 짜 넣고자 의도했음을 보여주는 추가적인 몇몇 표지들이 부활 이야기 자체와 더불어 존재하는데 이것은 심지어 예수의 출생 및 유년기에 관한 이야기들 속에서부터 시작된다.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전한 말씀(누가2장 34-35절)은 심판 장면의 축소판이다. 사람들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은 마지막 날이나 그것에 대한 위대한 선취에서 일어날 일이다. 누가는 시므온의 말을 통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의 운명은 이스라엘 자체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누가의 독자들은 예수에 대한 점증하는 비방과 예수의 삶의 행보를 보는 마리아의 고뇌를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의 절정에 도달했다가 그 너머의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표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누가는 독자들이 복음서 전체를 부활에 관한 이야기로 이해함으로써 실제로 부활 사건이 일어날 때에 그것이 옳고 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길 의도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뭔가 다른 것에 관한 하나의 이야기 말미에 덧붙여진 해피엔딩이 아니라 복음서 안에서 내내 진실이었던 것의 완성, 성경의 약속이 성취하는 완성을 의미했다. 누가에게 부활은 과거에 예수에게 일어났던 일에 관한 진리이자 종말의 의인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진리였을 뿐 아니라, 문자적이고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선취로서 부활이라는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는 그 밖의 다른 사건들 속에서 생겨나는 진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부활의 은유적 용법은 분명하고 구체적인 지시대상이 있다. 예수는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먹는데, 이것은 죄인들 편에서 보면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 것의 극적이고 생생한 형태이다. 진정한 포로귀환이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예수 자신의 부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장래의 부활이 예수의 인격 및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현재 속으로 돌입해 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탕자의 비유는 포로생활로부터 귀환에 대한 생생한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 주제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 나오는 놀라운 결론(‘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16장 31절)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말씀은 예수 자신의 궁극적인 부활에 빗대어서 성경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런 사건을 통해서도 확신을 갖게 못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며, 부활의 의미는 성경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부활한 예수의 말씀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은 앞에서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큰 아들들‘ 즉 예수가 죄인들을 영접하여 함께 먹을 때 비난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사역 속에서 현재적으로 진행되는 부활을 목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누가가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여기에(15장 24,32절의 개시된 종말론 직후와 17장 22-37절의 묵시론적 경고들의 직전) 배치한 것은 현재에 행해지고 결정된 일들은 약속된 미래의 빛 아래서 보아야 한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부활‘은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현재로 돌입해 오고 있지만, 그것을 볼 수 없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따라서 재정립할 수 없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활에 관한 이러한 메시지가 초기 기독교 전체에 걸쳐 밀접하게 연관된 주제였던 공의에 대한 요구와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다가올 예수 자신의 부활이 그의 하나님나라 선포, 그의 사역의 특징이었던 상징적인 행위들을 통한 하나님나라의 구현이 지향하고 있던 결정적인 순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도전이 현재 목숨을 잃음으로써 생명을 얻으라는 부르심과 장래에 있어서 그들이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될 새 세상에 관한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장래의 부활은 현재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스스로에 대하여 죽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사건들을 치유능력의 극적인 사례로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에 관련하여 행하실 일을 보여주는 이정표로 보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활에 관한 공관복음서 전승의 기여를(부활기사들 자체를 제외하고)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어떤 차원에서 이 전승은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하여 제2성전 시대 유대교가 이해하고 있던 방식들에 대한 추가적인 중요한 증거들을 제공해준다. 또 다른 차원에서 이 전승은 예수 자신이 부활이란 주제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고 생각했는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증거들을 제공해준다. 또한 이 전승은 초기 기독교의 일부 흐름들, 아마도 몇몇 서로 다른 흐름들이 죽임과 그 이후의 삶에 관해 생각했던 방식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준다. 달리 말하면 이 전승은 바울과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및 그가 말하고 행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거기에 형태를 부여하고 궁극적으로는 모종의 함의들을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문학적인 배경들을 부여하는 방식에 관한 다양하고 복잡한 그림을 제공해준다.
공관복음서 전승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부활이 분명히 예수 자신 및 그의 제자들의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중간 상태의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자주 언급되진 않는다. 또한 공관복음의 부활 전승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이 두 개의 별개의 사건들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과 부활의 삶은 혼인과 생식의 일이 불필요하게 되는 그런 삶이라는 점에서 부활이 주류 유대교에서 상정되었던 것과는 미묘하게 다른 종류의 것이라는 표지들이 존재한다. ‘부활’언어는 은유적으로 예수의 사역 내에서의 사건들, 특히 예수가 죄인들을 영접한 것을 가리키는 기능을 한다. 이것은 부활이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은유이자 환유였던 유대교 전승들에 초점을 다시 맞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공관복음서 전승이 바울의 신학을 예수의 가르침과 사역에 관한 전승들 속으로 거꾸로 투영한 교묘한 창작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준다. 복음서들 속에 부활에 관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것이 초대교회 전체에 걸쳐서 부활이 핵심적으로 강력하게 강조되었다는 것과 날카롭게 대비되는 것은 적어도 이 분야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시대에 속한 내용을 예수의 입에 넣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6. 요한복음의 부활
요한복음은 공관 복음서와 판이하게 다르지만 부활관념에 있어서는 다른 복음서들과 흡사하다. 요한복음도 초기 기독교의 한 별개의 흐름 속에서 부활관념들의 중심성과 풍부한 다양성을 증언해 준다. 요한복음에서 부활 속에서 절정에 도달하게 될 새 생명은 현재 속으로 들어와 역사하고 있고 예수의 사역 속에서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이런 것을 밝히려는 의도로 요한은 의도적으로 ‘표적들’을 연속적으로 묘사하면서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번째 표적을 시작으로 일곱 번째 표적인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표적들을 독자들이 따라가도록 의도하고 있다.
요한복음 읽기를 위한 강력한 함의로서 예수의 공생애는 부활을 새 창조의 시작으로 하는 원래의 창조에 대한 완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복음 전체는 부활 사건을 위한 일종의 준비로서 부활에 대한 표적들을 몇몇 대목들에 미리 이정표로서 배치하고 있다. 특히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 본문(요한복음2장 20-22절)은 요한의 신학이 예수의 삶과 죽음으로 끝나고, 실제로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할 것을 말할 필요가 없었다는 오래된 소문을 일거에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여기서 요한은 성전의 파괴가 예수가 자기가 했던 일을 할 권리를 갖고 있는 것과 예수가 그것에 부여한 의미를 보여줄 궁극적인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재의 성전체제는 부패했고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은 참 신이 이 새 일을 행하시는 수단이 될 것이고, 이 새 일을 통하여 이제까지 성전에서 수행되어왔던 것들이 이제는 예수 자신을 통해서 수행될 것이다. 부활은 성전 예배가 지리 및 인종적 배경과는 상관없이 모든 자들과 온갖 부류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활짝 열리게 될 새 세상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고위 제사장들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사건 후에 재빨리 깨달았던 것처럼 예수의 행위들은 실제로 모든 것이 변화되고 특히 성전이 폐지될 미래를 지향하고 있었다. 요한은 이미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오랫동안 약속되어 왔던 새로운 세상을 열어놓았고,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민족들에게 퍼져나가게 될 것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비록 분위기와 어조는 매우 다르지만 바울의 신앙에서 그리 멀지 않다.
요한복음에서 부활은 계속해서 현재적인 것과 동시에 미래적인 것이기 때문에 미래적인 강조점을 주변화시키거나 실현된 종말론을 과도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물론 바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에게도 ‘영생’은 단순히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 속에서 신자들이 누리고 있는 것임은 사실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부활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관한 가장 두드러진 진술은 생명의 떡에 관한 강론이다.(요한복음 6장 39-54절) 이 본문은 부활의 현재적 의미와 미래적 의미를 자연스럽게 결합시켜 놓는다. 이 본문에 비추어볼 때 다른 본문(요한복음5장 24-29절)을 다른 종류의 부활이 돌연히 난입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여기서도 부활의 현재적인 성취에 관한 언급과 함께 장래의 부활에 관한 약속이 나온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신앙 또는 불신앙의 반응들은 그들의 미래적인 운명을 보여주는 진정한 현재적인 표지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점에 있어서 개시된 종말론을 묘사하고 있는 요한복음 5장28절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아주 비슷하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 이야기는 정경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묘사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이야기들 중의 하나인데, 요한은 독자들이 이 사건을 앞으로 있게 될 예수의 부활사건에 대한 이정표로 보기를 의도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미래에 성취될 일을 미리 보여줌과 동시에 그 효력을 갑자기 현재 속으로 가져오고 있다. 장래의 부활이 분명하게 단언되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그 부활을 선취한 현재적으로 죽지 않는 ‘영생’이 주어진다. 믿는 자들은 현재 속에서 진정한 새로운 정체성, 이제 결코 죽지 않을 생명이 주어진다. 달리 말하면 믿는 자들은 이제 죽음에서도 살아남고 최종적인 부활 속에서 다시 몸을 입게 될 하나님이 주신 불멸의 삶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주후1세기 부활신앙에 관하여 제기한 일련의 질문들에 대한 요한의 가장 완전한 대답이다. 현재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은유로서의 ‘부활’은 메시아, 참 신이 보내신 분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 믿음을 근거로 한 ‘내세의 생명’의 소유와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예수는 자신이 부활이라고 말해줄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현재적 사역을 통해서 나사로 같은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서 정상적인 몸의 삶을 재개할 수 있다는 것과 그를 믿는 자들은 이미 내세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의 다가올 부활을 통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장차 일어나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또 다른 본문(요한복음 12장 23-26절)은 부활 신학을 하나의 도전으로 만들어준다. 이 본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도래하는 ‘때’에 앞서서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를 따르라는 도전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부활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다중적인 의미가 존재한다. 첫째로 부활은 씨앗이 식물로 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모(transformation)를 의미한다. 둘째로 부활은 예수가 먼저 겪어야 하고 나중에 그의 제자들이 겪어야 하는 바로 그런 것이다. 셋째로 이 과정을 거치면서 관련된 사람들은 죽음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되며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예수가 헬라인들에게 무엇을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가 그들의 요청을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이스라엘의 신의 구원의 통치 아래 있게 될 때가 급속하게 다가오고 있고 이미 도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조로 이해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고 바울 사상과의 병행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고별강론(13-17장)에서 예수는 자기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말한다. 그는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히 천국에 가는 과정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명시적으로 몸을 입은 부활 현현들은 엄밀히 말해서 불필요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견해가 대두된 것은 바로 이런 표현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 표현의 취지를 놓치는 것이다. 요한복음20장에서 예수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부활 생명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명시적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다.(20:17) 여기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한 후에 이제까지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닌 최종적인 상태와 관련하여 제자들을 준비시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와서 새로운 방식으로 예수의 현존을 알게 해 줄 것이고 인도하심과 가르침을 베풀 것임이 강조된다. 그러므로 여기서 ’거할 곳‘이란 표현은 유대묵시 문헌들 속에서 자연스런 병행이 나타나는, 영혼들이 궁극적인 부활의 날까지 보존되어 있는 방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거할 처소들‘은 죽은 자들이 장차 있게 될 부활을 기다리는 가운데 잠시 거처하고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것은 부활 사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약속이 있는 본문(요한복음 16장20-22절)으로 이어진다. 이 약속은 분명히 부활절 이야기들 속에서 성취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3:20) 그들이 예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1616-19)은 단순히 성령의 오심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요한의 신학 속에서 예수가 지금 아버지에게 가고 성령을 자기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보낸다는 것은 하나의 포괄적인 현실로서 중요하다. 그러나 그 안에서 부활,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 후에 그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을 통해서 새 창조가 동터왔고, 신의 창조의 ‘여덟째 날이 도래하였으며 모든 것이 이제 새롭게 되었다는 것도 아울러 중요하다. 요한에게 새 창조는 태초에 말씀으로 만들어진 만물의 갱신(1:3)이며 부활절은 참 빛이 어둠에 비쳐서 아무도 가릴 수 없는 때이다.(1:5; 20:1) 왜냐하면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1:4; 5:26) 요한은 처음부터 여러 표지판들을 설치했는데 그 표지판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죽음 이후에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절이었다. 이제 예수가 성령을 보내서 아버지와 아들의 내적인 상태를 제자들과 함께 나누도록 하고 자신은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17:20-24)을 사는 것은 그가 적절한 때에 아버지가 그에게 이미 맡긴 것, 즉 죽은 자들을 새 생명으로 일으키는 것을 수행하는 토대가 될 삶이다.(5:25-29)
요한은 바울과 마찬가지로 유대교의 부활 신학의 테두리들과 그 신학을 예수 자신을 중심으로 재정의한 초기 기독교의 표준들 내에 견고하게 위치해 있다. 요한은 바울 및 공관 복음 전승과 아울러 초대교회의 삶과 전승들 안에서의 ‘부활’의 중심성에 대한 강력하고도 두드러진 추가적인 증언을 제공해준다. 요한이 물려받은 전승은 고대 세계의 신앙들의 스펙트럼 속에서 유대교 쪽에 속해 있는 초기 기독교의 부활신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한에게 부활은 결코 단순히 현재의 영적인 삶에 대한 은유만이 아니다. 예수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할 때 현재 새로운 가능성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삶, 내세의 생명이 현재 속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신자들은 그것을 이미 누릴 수 있고 그 생명은 육신의 죽음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미래로 이어질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생’은 최종적인 상태와 아울러 중간 상태에 관하여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궁극적인 부활에 관한 약속은 재확인된다. 그리고 예수는 부활에 관한 이런 모든 재정의들이 일어나는 중심에 서 있는 인물로 규정된다.
7. 복음서들의 부활: 결론
부활절 이야기를 제외하더라도, 사복음서에는 부활을 약속된 미래로 말하고 있는 아주 다양한 암시들과 지표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복음서 전체를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신앙들의 지도 위에 놓는다면 그것들은 이교적인 견해와는 대비되는 유대교적인 견해에 속하고, 유대교적 견해 중에서도 다른 여러 대안들과 대비되는 바리새파의 견해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복음서에는 부활사상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제2성전 시대 저자들과 비교해 보더라도, 하나의 주제로서의 부활이 상당히 빈번하게 등장할 뿐 아니라, 바울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부활개념의 발전과 재정의를 보여준다. ‘부활’은 여전히 궁극적으로는 종말에 하나님이 그의 모든 백성에게 선물로 주시는 새로운 몸을 입은 삶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활은 유대교 속에서 은유적 용법들의 발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현재에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을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복음서의 부활관념에서 바울에게서 두드러진 것과 동일한 다음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한다. 첫째로, 부활은 두 단계로 나뉘어져 있다는 반복적인 인식이 존재하는데, 제자들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다가 성경에 비추어서 부활절 사건을 상고하면서 그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둘째는, 비록 예수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긴 했지만 하나의 사상으로서의 부활은 단순히 사람들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육신의 삶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최종적인 장래의 삶은 상당한 정도로 다를 것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은 나사로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떠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어떤 종류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 복음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이 그런 문제에 대답을 시작할 때 사용했던 이미지가 요한복음에는 예수가 ‘때’가 지금 왔다는 사실에 직면한 대목에서(요한복음12장 23—24절) 나올 뿐 아니라, 공관복음서들에서는 가장 중요한 비유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부활절 이야기들의 빛 아래서 읽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적어도 후대의 청중들에게는 단순히 예수가 복음의 말씀을 뿌리는 것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이 예수라는 말씀을 뿌리는 것에 관한 묘사로 들렸을 것이다.
3부 초기기독교에서의 부활[10장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 서신들]
N.T. 라이트/RSG
2015-09-17 01:25:33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3부 초기기독교(바울을 제외한)에서의 부활
제10장 초점이 다시 맞춰진 소망: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서의 다른 책들
1. 서론
이미 살펴보았듯이 복음서에는 바리새파의 신앙과 부합하는 장래의 부활에 대한 신앙에 대한 언급이 유대교적인 자료들에서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나온다. 그런데 복음서에 유대교의 부활주제에 대한 두 가지 변형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부활은 예수 안에서 먼저 이루어졌고 나중에 그의 백성에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앙과 이 부활은 단순히 동일한 종류의 삶으로의 소생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하여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종류의 삶, 더 이상 썩어짐이나 죽음에 종속되지 않는 몸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신앙이다. 또한 부활에 대한 은유적 용법도 이제는 포로생활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예배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현재에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이런 두드러진 발견들은 이제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서의 나머지 책들에서 검증될 필요가 있다. 신약성서의 책들 중에서 가장 긴 책인 사도행전은 누가의 작품이라는 것이 공통된 견해이다. 요한서신들과 요한계시록은 온갖 종류의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요한복음과 모종의 가족관계에 있다. 이 장에서는 복음서를 제외한 신약성서의 책들이 부활에 관해서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2. 사도행전
부활에 관한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을 전해주는 사도행전에는 저자가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인 운명에 대해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장차 큰 심판이 있을 것이며, 그날에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한 예수가 심판장이 되실 것이고, 그때에 예수를 믿은 모든 자들은 신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예수가 장래의 심판장으로 ‘지명되었다’ 혹은 ‘정해졌다’는 표현은(10:42;17:31) 바울이 로마서1:4에서 말한 바, 예수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즉 심판의 역할을 맡을 메시아)로 ’선포‘되었으며 장래에 있을 심판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약속된 죄사함을 받을 때 현재적으로 선취된다는 메시지와 흡사하다.
‘죽은 자들의 부활’은 어떤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을 통하여 이미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성전의 직원들과 사두개인들의 분노를 샀다고 말하는 본문의 의미이다.(행4:1-2) 이것은 사도들이 예수를 원형(prototype)으로 삼아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일어났다고 선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 말할 때 이것은 예수 안에서 및 예수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세계의 역사 속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고 말한 것이었다.(3:24) 이렇게 해서 예수의 부활은 이스라엘이 마침내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것이었다.(3:26)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이렇게 이미 예수 안에서 일어났다면, 그것은 분명히 장래에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일어날 것이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확고한 증거들은( 23:6;24:14-21; 25:18-19; 26:6-23) 사도행전이 초기 전승들을 어느 정도나 포함하는지에 상관없이 사도행전은 예수의 부활을 신학의 중심적인 위치에 놓고 있음을 보여준다. 죽은 자로부터의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이다. 이렇게 부활은 두 개의 서로 구별되는 계기들로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시간 간격은 예언이 성취되는 때이며 이스라엘의 위로가 마침내 오는 때이고 이방이 들어오는 때로 이해되고 있다. 예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오직 유대교 내에서만 이해될 수 있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아무도 부활을 이렇게 두 단계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부활과 ‘아포카타스타시스’(만물의 회복) 사이의 기간 동안에는 믿는 자들은 새로운 치유의 가능성과 더불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살리신 것은 오직 예수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표적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이 행한 놀라운 치유사역에 대한 설명으로 예수의 부활을 제시했다.(4:5-12) 초기 기독교의 메시지 전체는 여기서 말하는 ‘이 생명의 말씀’(5:20)이라는 어구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것은 지금은 생명의 때이고 회복과 부활의 때라는 의미다. 죽은 자들의 부활이 예수에게서 이미 시작된 것으로 선포하는 이러한 신학 전체는 사도행전에서 극히 중요한 토대위에 구축되어 있다. 그 토대는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한 매우 상세한 해설, 그리고 예수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을 알게 해주는 성경적 맥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2성전 시대와 초기 기독교의 모든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사도행전에는 그 어디에도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 이외의 것을 가리키는 부활은 존재하지 않는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적어도 누가는 예수의 부활이 그의 육신적인 몸이 무덤에서 썩는 것이 아니라 그 몸이 썩지 않음을 포함하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부활을 육신적인 몸이 썩어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생명을 받은 몸으로 생각할 때만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본문 전체는 그것이 의도했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역사 내에서의 한 사건으로서 부활은 유대교에서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세상에 대한 심판이 지금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활을 통해서 메시아로 인정된 바로 그분이 재판장의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이렇게 부활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전승들에 의해 대변된 초기 기독교의 모든 흐름들과 그것들을 하나로 통합했던 누가의 관점에서 분명히 중심적인 것이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부활 사상은 고대세계의 스펙트럼 중에서 유대교에 속하며 특히 바리새파 사상에 속한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사상의 다른 부분들과 마찬가지로 부활 사상도 바리새인의 사상적 틀 안에서 철저하게 수정되었다. 부활은 한 사람에게 이미 일어난 일로서, 그가 선지자, 주, 메시야라는 것을 드러내준다. 그리고 그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로 알려져 있는 장래에 일어날 단일한 사건의 시작이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에 앞서서 한 사람이 부활한 것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시간 간격은 예언이 성취되는 때,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원의 때로 해석되었다. 그리고 구원은 더 이상 정치적인 해방으로 읽혀지지 않고 ‘죄 사함’ 특히 하나님의 메시아를 거절한 것에 대한 죄 사함이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부활에 관한 사도행전의 묘사는 바울의 묘사와 몇 가지 중복되는 것들이 존재하지만 사도행전이 이 주제에 관해 바울의 묘사를 맹목적으로 모방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부활에 대한 사도행전의 묘사는 누가복음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만 누가복음에서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상세하게 등장하는데, 이것은 누가가 복음서에서는 말을 아끼고 사도행전에서 특히 베드로와 바울에 의해서 드러나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3. 히브리서
히브리서는 초기 기독교의 책들 중에서 비중 있는 책에 속하지만 부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초심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기본적인 교리로 전제하고 있다. 히브리서는 11장에서 믿음의 영웅들에 관한 긴 목록을 제시하면서 부활을 논의의 주제로 삼지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말하면서 그 믿음은 하나님이 죽은 자와 방불한 자에게 자녀를 주실 수 있다고 믿었던 믿음이라고(히11:19) 소개하면서 진정한 믿음은 부활신앙이라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11장에서 ‘믿음’의 핵심은 약속되어 있지만 아직 허락되지 않은 것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그 약속이 ‘하늘에 있는 본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믿음과 소망의 핵심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임을 히브리서는 단언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이 본문이 그런 것이었다면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부활신앙 또는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더 나은 부활을 구했던(11:35) 자들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하늘에 있는 본향’은 12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설명된다.(12:22) 다시 한 번 이것도 ‘영적인’, 천상의, 다른 세상과 관련된 헬레니즘적 목표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은 절정부분에서 하늘에 준비되어 있는 장래의 세상에 대한 소망을 죽은 자들의 부활 신앙과 함께 결합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히브리서 전체의 논증은 시편8편과 110편을 따라서 세상을 통치하는 메시아로 세워진 예수의 죽음에 의한 승리를 토대로 하고 있다. 그리고 관련 본문들은 명시적으로 예수의 부활과 그 결과들보다는 예수가 천사들 보다 우월하다는 것(6:13) 및 만물 위에 즉위했다는 것(2:5-9)과 연결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은 논리적으로 부활에 의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가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패배시켰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히브리서가 ‘예수가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는 분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주된 관심이 부활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에 선행하였던 십자가의 효력 있는 희생제사 및 그 후에 있은 승천(ascension)과 즉위(enthronement)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1장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부활이 히브리서 기자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마지막 축도에서 부활 언어는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이란 표현(히13ㅣ20)에서 명시적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목자이신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불러올렸다’는 관념은 야훼가 목자인 모세를 애굽에서 불러올린‘ 것에 대하 말하는 이사야 63:11-14절을 반영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가 고립적인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양떼의 목자로 불러올려진 것같이 예수의 부활은 종말에 있을 모든 자들의 부활을 선취한 것임을 암시한다. 바울에게 있어 메시아와 주로서의 예수의 즉위는 그의 부활과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이러한 연결 관계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히브리서에서 부활이 당연히 도처에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명시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히브리서를 부활에 대한 재정의를 보여주는 중심적인 증언으로 사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4. 일반서신들
야고보서는 신자들 또는 모든 인간의 장래의 사후의 실존이나 예수의 부활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베드로서와 유다서도 그 묵시론적인 분위기로 보아서 종말에 관한 모종의 시나리오를 예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베드로후서에는 이사야가 약속했던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한 언급이 나타난다.(벧후3:5-13) 이것은 쇠함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되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새로워진 세계를 그리고 있는 로마서8장, 고린도전서 15장과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극적인 시나리오에서 부활 자체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에 대한 언급과 만유의 갱신에 관한 약속은 다른 본문들에서 부활을 우주적인 드라마 속에서 인간에게 제시하고 있는 특유한 소망과 동일하다.
베드로후서 서신 전체의 중심축을 이루는 결정적은 구절은 3장10절이다. 이 구절은 피조세계 전체가 없어지고 새롭게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세계가 그것을 대신하게 될 것이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태워지다’라는 어구의 가장 좋은 사본적 증거들은 ‘발견되어지다’이며 이것은 현세와 내세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강조하는 뉘앙스가 있다. 이것은 새 세상, 그리고 거기에 거하게 될 새 백성은 고난이라는 가혹한 시련을 통해서 시험되고 연단되며 정화되어 나타난다고 하는 연속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서 발견되는 세계관은 피조세계의 소멸을 말하는 이원론이 아니라 피조세계가 여전히 선하다는 것을 믿으면서 현재의 악을 대신할 공의와 선함에 대한 창조주의 갈망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태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정화하기 위한 불의 과정이라고 보는 세계관일 것이다.
요한서신들도 사후의 궁극적인 미래 또는 그 토대가 되는 예수의 부활에 관한 언급이 별로 없다. 요한1서의 서두는 물론 온통 ‘생명’에 관한 것이지만 이 서신의 강조점은 미래가 아니라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그 현재적인 함의들에 두어져 있다. 하지만 요한1서는 지금이 ‘마지막 때’라고 말하면서 현재는 감추어져 있는 ‘예수가 나타날 그 날’ 을 고대하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일이 있을 때, 그의 백성도 나타날 것이다. 여기서 드러난 사고의 흐름은 바울의 몇몇 본문들과 매우 흡사하다. 그 요지는 예수는 현재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현재의 삶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예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으며 언제가 예수가 나타날 때, 신자들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생명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왕적인 현존(파루시아)은 현재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는 감추어진 실체가 새로운 세상과 갱신된 백성의 공적인 현실이 될 위대한 변화를 위한 신호탄이 될 것이다.
베드로전서는 문안 인사 후에 통상적으로 구원은 현 세상을 떠나서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어 온 본문(벧전1:3-9)으로 시작된다. 이 본문은 구원받는 것은 영혼(프쉬케)이고(9절), 이 구원은 하늘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다음 세 가지 관점은 이것이 전혀 이 서신의 의도가 아님을 보여준다. 첫째는 구원은 마지막 때에 나타난다는 언급이다.(5절) 만일 구원이 단순히 하늘로 떠나가서 거기 머무는 것이고 땅은 결국 멸망할 것이라면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믿음과 인내에 대한 상급이 죽은 영혼이 천국에 도달할 때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가 나타날 때’ 드러날 것이란 표현은 여기서 하늘은 죽은 자의 영혼이 땅을 떠나 몸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도달할 하늘이라는 이원론적 개념보다는 창조주의 장래의 목적들이 약속된 세상에서 드러날 때까지 준비되고 안전하게 보존되는 장소로서의 ‘하늘’의 관념이 어울린다. 둘째로, 여기서 구원은 바울의 부활을 토대로 한 구원론을 강력하게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베드로전서가 바울전승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 언어는 바울의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셋째로, 구원은 예수 자신의 부활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언급이다.(3절) 만일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메시아의 백성에 속하게 된 새로운 생명이 단순히 몸을 버리고 땅도 몸도 없는 영역으로 떠나가는 것이라면 부활이라는 표현 자체가 범주 오류가 된다. 그리고 9절의 프쉬케도 그 문맥상으로 보면 모든 인간들이 자동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불멸의 요소, 즉 육신에서 해방되어 저 끝 날을 기다리고 있는 영혼이 아니라, 은밀하고 내면적으로 갱신되어서 인간의 전인적 존재에 대해 이루어질 약속을 지닌 인간 존재의 한 측면(고린도후서 4:16의 속사람과 같은)을 가리키는 역할을 한다.
신약성서의 일반서신들은 바울서신, 복음서들,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부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나 빈번한 언급을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소망은 여전히 변함없이 존재하고 예수의 부활은 그 토대가 되고 있다. 주된 관심으로서의 부활이란 주제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 주제가 사라져버리거나 뭔가 다른 것으로 변질되거나 왜곡되지는 않았고 부활은 여전히 주후1세기에 다른 곳에서 그것이 의미했던 것을 의미하고 있다.
5.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강력한 책이지만 자주 오해되고 있는 책이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에 나오는 ‘하늘의 도성’에 관한 묘사는 흔히 후대의 서구적인 경건의 렌즈를 통해 해석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후에 가게 될 ‘천국’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런 견해는 좀 부족한 해석 정도가 아니라 본문을 제대로 읽는 데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하늘의 도성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다. 이것이 이 이야기기 말하려는 핵심이다. 크리스토퍼 로울랜드가 역설하였듯이, 요한계시록의 결말은 초연한 타계적인 영성을 거부하고, 피조세계의 두 절반인 하늘과 땅이 마침내 연합되는 새 창조에 관한 통합된 비전을 제시한다. 언제나 서로 결합되고자 했던 하늘과 땅은 이렇게 다시 만들어져서 살아계신 신이 그의 백성 가운데 영원히 거하게 될 것으로 거듭난다.
서두에서 절정을 이루는 예수에 관한 환상에서 부활한 주는 죽음에 대한 자신의 승리로 인해서 그가 지금 사망과 음부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한다. 일곱 교회들에게 주어지는 약속과 경고들은 고난을 통한 악과 세상의 정복이라는 표준적인 유대교 주제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한 새로운 초점을 부여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모든 이야기들은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룬 일에 토대를 두고 있다. 골로새서1장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죽은 자들의 첫 열매로서 지금 땅의 왕들의 통치자가 되어 있다. 천년왕국에 대한 사고도식들은 주후2세기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교회사의 여러 시기들 마다 각각 달랐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부활의 언어와 신앙은 기독교 자체의 내부로부터 새롭고 독특한 돌연변이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돌연변이는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서 살펴보았던 중요한 발전들 중의 하나, 즉 부활이 연대기적으로 둘로 나누어진다는 것(첫째는 예수의 부활, 그 후에는 그의 모든 백성의 부활)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예수의 백성의 부활 자체가 둘로 나뉜다. 첫째는 순교자들이고 다음으로는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악인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하게 된다는 것도 분명하게 말한다. 20장 5-6절에서 말하는 첫째 부활은 모든 의인들이 아니라 일부 의인들, 특히 어떤 유형의 순교자들이 처음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고전적인 ‘전천년설’은 이 본문을 모든 의인들 혹은 일부 의인들이 부활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문자 그대로의 천년왕국을 이루는 미래의 시기로 이해한다. 이런 전천년설을 반박하는 시도 중에 흔히 제시되는 것은 첫째 부활을 단순히 모든 의인들이 복된 중간 상태로 들어가기 위해 죽음을 통과하는 것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유대교, 기독교문헌들 전체에서 부활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 용법은 없다. 첫째 부활은 최종적인 몸의 부활이라는 의미와는 다르고 또한 그것에 선행하는 의미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데 부활이란 단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로마서6장, 골로새서3장 등에서 ‘선취된 부활’이라는 개념 속에서 어느 정도 유비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서 세례 받은 신자는 그 현재의 삶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거의 사건을 토대로 하고 있고 그의 몸은 장래에 부활하게 될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미 메시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신자의 현재의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이런 식으로 ‘부활’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요한계시록20:4에서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과 적어도 부분적인 병행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용법은 매우 낯선 것이기는 하지만, 통상적인 유대적 및 기독교적 언어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서 이미 검증된 범주들을 과감하게 확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두 장은 새 창조를 보여주는 언어들로 가득하다. 거기에는 지복의 상태에 대한 정적인 묘사가 아니라 새로운 계획들, 목표들, 가능성들이 터져 나오는 역동적인 새 창조가 묘사되고 있다.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 메시아에 관한 기나긴 이야기는 마침내 그 목표지점에 도달하였다. 죽음은 언제나 선한 피조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부정이었고 이제 죽음이 폐해짐으로써 창조주의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수 있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는 부활에 관한 핵심적인 단어들이 아주 드물게 등장하지만, 신약성서의 다른 책만큼이나 부활사상에 푹 젖어 있다. 요한계시록의 이야기 전체는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세계관, 특히 장차 도래할 하나님나라를 갈망하면서 악한 열방들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고난 받는 백성의 신원을 가져올 그날을 갈망하며 살았던 그런 세계관 내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6. 결론: 신약성서에서의 부활
신약성서는 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분명히 밀접한 화음을 통해서 한 무리의 목소리들로 부활을 노래하고 있다.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주요한 책들은 부활을 중심적이고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고 그것을 창조주이자 재판장인 한 분 하나님에 관한 유대교적인 사고의 틀 속에 둔다. 이러한 부활신앙은 한편으로는 이교사상의 세계에 맞서서 확고하게 서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자신의 부활을 중심으로 유대교의 부활신앙을 극적으로 수정하여 재형성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섯 가지 주목할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활이 유대교내에서 가르쳐졌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거의 주된 관심이 아니었지만 초기 기독교에서 부활은 주된 관심이었다. 부활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옮겨갔다. 둘째, 고대 후기의 유대교와 이교 세계는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사변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유대교 내에서도 폭넓은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및 이교와 관련된 아주 다양한 출신배경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 속에는 실질적으로 그런 스펙트럼이 전무하다. 셋째, 부활에 관한 바리새파의 견해는 특히 두 가지 점에서 분명하게 일관되게 수정되었다. 종말론적인 사건으로서 부활은 두 단계로 구분되었고 장래에 부활할 몸의 성격은 더 추가적으로 설명되었다. 부활한 몸은 죽거나 쇠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죽은 자들만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도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부활을 비육신적인 영적인 생존으로 말하지 않았다. 넷째,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게 일어난 일과 예수의 모든 백성에게 장차 일어나게 될 일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일관되게 성경의 몇몇 본문들을 강조하여 많이 사용하였다. 다섯째, 유대교에서 부활이란 관념은 포로귀환이라는 장래의 구체적인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은유로 사용되었던 반면에 초기 기독교에서 부활의 은유적 용법은 세례, 육신적 삶의 거룩함, 기독교적 증거등과 같은 지시대상들을 지닌 부활로 사용되었다.
3부 초기기독교에서의 부활[11장 정경 이외의 초기기독교 문헌들]
N.T. 라이트/RSG
2015-09-17 01:26:18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3부 초기기독교(바울을 제외한)에서의 부활
제11장 초점이 다시 맞춰진 소망: 정경 이외의 초기 기독교 문헌들
1. 서론
초대교회의 출현과 주후2세기를 통과하면서 발전해간 모습은 아주 방대하고 거대하며 무차별적으로 뻗어나간 이야기이다. 초대교회는 죽음 이후의 삶을 비롯한 온갖 종류의 주제들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들을 발전시켰는데, 그것들은 종종 신약성서 대부분의 내용을 반영한 것들이었고 종종 그렇지 않은 것들이기도 했다. 두 세기의 어느 지점에서 ‘영지’(gnosis) 혹은 ‘영적인 체험’을 가리키는 판이하게 다른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부활’ 언어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통상적으로 예수의 부활은 교회의 선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의미는 다각도로 연구되었다.
초대교회에 대하여 물어야 할 질문은 신약성서에 대해 제기했던 질문과 동일하다. 초대교회는 죽음 이후의 미래의 소망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부활 언어가 등장하는 곳에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중간 상태에 대한 언급은 없었는가? 현재의 몸과 장래의 몸 간에는 어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는가? 부활이란 언어가 어떤 은유적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질문은 초대교회는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그 밖의 다른 질문들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 주제를 사도교부들로부터 시작해서 변증가들을 거쳐 주후2세기 말과 3세기 초에 활동했던 위대한 네 명의 저술가들인, 테르툴리아누스, 이레나이우스, 히폴리투스, 오리게네스를 중심으로 먼저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기 시리아의 기독교와 나그 함마디 문서들도 살펴볼 것이다.
사도교부들은 정경에 나오는 그들의 전임자와 매우 흡사한 입장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특히 가현설과 대항해서 싸웠으며, 특히 이그나티우스는 부활한 몸을 현재의 썩어질 몸과 구별하지 않고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상황들에 대처하기 위하여 새로운 언어와 이미지들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항상 부활을 논의하거나 단언하지는 않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압도적인 다수에게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소망이었고, 명확히 몸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이해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부활은 영광스럽고 복된 모종의 중간 상태를 수반하며, 장래의 부활은 예수 자신의 부활에 의거해 있고 그것을 모델로 한다는 것을 확증해준다. 그들이 부활이란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한 시도는 전혀 없었다. 부활은 여전히 문자 그대로의 용법으로 사용되었고 구체적인 지시대상이 있었으며, 초기 기독교의 신학과 소망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었다.
2. 사도교부들
(1) 클레멘스1서
클레멘스1서는 통상적으로 주후1세기의 90년대 중반에 로마의 감독이었던 클레멘스가 쓴 진정한 서신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이 서신은 연대상으로 신약성서와 가장 근접하고 정경문서들 중에서 시기적으로 앞 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클레멘스1서가 신약성서와 별반 다르지 않은 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클레멘스1서에는 베드로가 죽어서 ‘영광의 장소’로 갔고 바울은 죽어서 ‘거룩한 곳’에 갔으며 순교자들은 ‘고귀한 상급과 불멸의 삶’이라는 선물을 얻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본문들은 그 자체로는 몸을 입지 않은 최종적인 상태에 대한 신앙, 즉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하는 신앙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가리키는 것은 죽은 자가 거하는 일시적인 거처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클레멘스는 죽은 자들의 최종적인 복된 상태를 부활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최종적인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이 불합리한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다양한 논증들을 제시한다. 그 다음에 나오는 본문에서 클레멘스는 두 단계로 된 사후의 삶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면서 먼저는 ‘안식의 때’이고, 그 후에는 그 나라가 임할 때에 모든 것이 ‘명백해지는 때’라고 말한다. 또한 클레멘스는 신자의 장래의 부활이 예수 자신의 부활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말한다. 이렇게 클레멘스는 신약성서의 노선에서 일탈함이 없이 부활 전승에 대한 지속적이고 창조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초기 증인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
(2) 클레멘스2서
이 서신에는 클레멘스1서보다 짧지만, 단순한 몸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에 대한 테르툴리아누스의 견해를 미리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본문을 포함해서 부활에 대한 몇몇 본문들이 나타난다. 이 본문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단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몸과 장래의 몸 간의 연속성이 성전 이미지를 통해서 현재의 윤리적인 노력에 실체를 부여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성도들의 부활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이 서신이 이런 묘사를 더 발전시키지는 않고, 예수 자신의 부활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클레멘스1서 및 정경의 기자들과 동일한 사상 세계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다.
(3)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이그나티우스(주후 35-107년경)가 주후2세기 초반에 순교를 당하기 위해 로마로 가눈 도중에 쓴 그의 서신들에서 반복적으로 표명된 관심사는 예수의 부활이었다. 그는 가현론자들에게 반대하여 예수의 부활이 실제적인 것임을 단호하게 천명하면서 예수는 진정으로 부활했고 우리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헌장은 예수 그리스도, 특히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고 말했다. 이그나티우스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육체’의 부활을 역설하면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으면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인이 되고 그 안에서 자유로운 자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신앙 안에서 죽음을 맞으러 간다고 말한다. 이그나티우스는 클레멘스와 마찬가지로 부활의 몇몇 관념들을 새로운 방식을 발전시켰고 다른 용어들을 사용했는데, 예를 들면 그는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는 구별, 즉 십자가에 못 박힌 몸과 부활한 예수의 몸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의 변증적인 관심사는 불연속성이 아니라 연속성에 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부활 신앙의 눈금자 위에서 보면 이그나티우스는 신약성서와 동일한 지점에 속한다.
(4) 폴리캅: 서신과 순교
폴리캅(주후 69-155년경)은 소아시아의 서쪽 해변에 있던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그의 서신은 신약성서와 완전히 맥을 같이 하면서, 예수 자신은 하나님에 의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고,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의 재판장이 될 것이다. 죽은 자로부터 예수를 살리신 이는 또한 그의 뜻을 행하는 자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만이 아니라 바리새파의 사상과 매우 흡사하다. 또한 폴리캅은 클레멘스와 비슷한 방식으로 순교자들의 중간 상태에 대하여 말하는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빌립보1장의 바울과 비슷한 관점에서 사후의 삶 후에 주어질 최종적인 상태인 부활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죽음 직후의 삶에 관해 조심스런 언급을 하고 있다.
(5) 디다케
이 책의 기록 연대와 장소는 논란이 많지만 이 책이 초기 기독교에 속한 책인 것은 분명하다. 이 책은 주된 관심사는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는 두 길에 대해 말하면서 경건과 선행의 삶을 권면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자세한 윤리적인 권면들에서 그 어디에도 죽음 이후의 궁극적인 인정 또는 상급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디다케가 부활을 장차 도래할 하나님나라 신학의 일부로 단언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이 클레멘스,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신학 노선에 서있음을 의미한다.
(6) 바나바서
저작 연대가 주후1세기 후반 또는 주후2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바나바서는 대체로 구약성서의 모형론적인 성취라는 관점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확대된 해설을 제공해 준다. 이 책은 마지막 단락에서 장차 도래할 심판에 대한 경고와 최종적인 구원에 관한 약속을 거듭하여 반복하면서 현재의 삶은 장차 도래한 삶에 비추어 볼 때만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런 설명은 신약성서 속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것과도 매우 다른 종류이긴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다른 상황 속에서 새 창조와 새 계약에 관한 초기의 신학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보아야 하며, 여전히 그 안의 중요한 흐름은 예수 및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이다.
(7) 헤르마스의 목자서
헤르마스가 쓴 3부로 된 이 작품은 통상적으로 주후2세기 중반에 쓰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레나이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 책을 신약성서의 일부로 생각했다. 이 책의 대부분은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짓고서 회개의 가능성이 있느냐에 대한 것으로서, 악한 행실과 선한 행실의 여러 수준들과 유형들에 관해 길고 고통스러운 분석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신약성서 및 다른 사도교부들이 말하는 중요한 교리에 대해 침묵하고 있고,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나 기독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에 관한 유일하게 명시적인 진술에서도 헤르마스가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상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육체와 영의 하나 됨과 어느 한쪽이 없이는 다른 한 쪽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의 논증 핵심으로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종말에 육체와 영의 부활을 긍정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8) 파피아스
파피아스(주후 60-130년경)는 폴리캅이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시기에 히에라폴리스의 감독이었다. 유세비우스는 파피아스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몸으로 세워질 때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천년의 기간에 있게 될 것으로 믿었다고 말해준다. 제롬도 이레나이우스나 아폴리나리우스 등을 비롯한 사람들이 파피아스의 이런 천년왕국설을 따라서 부활 이후에 주님이 몸으로 성도들과 함께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파피아스는 클레멘스 및 이그나티우스와 더불어 의인들 및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구원이 눈에 보이는 육신적인 형태를 띠게 될 것을 지지했던 또 한 명의 분명한 증인으로 인용될 수 있다.
(9) 디오그네투스서
이 책은 통상적으로 사도교부들과 함께 취급되지만 사실은 사도교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주후2세기말 또는 심지어 3세기 초에 나온 변증서들로 분류되어야 한다. 이 책은 기독교적 소망에 관해 말할 때도 클레멘스, 이그나티우스, 폴리캅과 맥을 같이 하지 않는다. 이 책은 몸속에 갇혀있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표준적인 헬레니즘적 견해를 지니고 있다. 디오그네투스는 수많은 서구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신약성서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개인적 종말론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
3. 초기 기독교의 외경들
(1) 서론
통상적으로 신약 외경들로 분류되는 책들은 연대와 배경에 논란이 있지만 초기 기독교 운동에 관하여 상당한 내용을 밝혀줄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2) 이사야 승천기
이사야 승천기로 알려져 있는 이 저작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에티오피아 판본과 단편들로 남아있는 헬라어, 라틴어, 슬라브어, 콥트어 본문들이 전해진다. 가장 최근의 비평적 연구는 이 저작의 본질적인 통일성을 주장하면서 그 저작 연대를 주후1세기, 그리고 70년대로 확고하게 설정한다. 이 책에 나타난 부활에 관한 환상은 영지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살펴본 신약성서 및 사도교부들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3) 베드로 묵시록
이 저작은 바르 코크바 시대에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의 내부에서 쓰인 것으로 보이는데 신약성서의 몇몇 부분들, 그리고 유대적인 묵시록 저작 내에서 통용되던 관념들에 의존하고 있다. 부활과 관련하여 중심적인 본문은 주후2세기 다른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씨앗과 식물들에 관한 바울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과 더불어 성경의 예언, 특히 에스겔37장을 반영하여 부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래의 몸들을 필요로 하는 장래의 심판에 관한 이 강조적인 진술은 택함 받은 자들과 의인들이 입게 될 새로운 의복들과 그들이 누리게 될 낙원이라는 중간 상태라는 관점으로 확대되어 설명된다. 이것은 분명히 유대교 및 기독교 자료들에서 말하는 주류적인 부활관념들에 속한다.
(4) 에스라5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저작이 바르 코크바 혁명의 영향을 받아 쓰인 기독교 저작이라는 견해에 동의한다. 죽은 자의 부활을 약속하는 이 저작의 두 번째 장은 에스겔37장을 반영하면서 부활을 에덴이 회복되는 새 창조의 더 큰 환상 가운데 언급한다. 이 저작은 핍박받는 어린 교회에게 유대교 순교자들이 마카베오2서 및 그 밖의 다른 곳에서 했던 것과 동일한 약속들을 제시하고 있다.
(5) 사도서신
이 저작은 열한명의 생존한 사도들이 온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와 나눈 대화들을 말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 저작은 특히 케린투스와 시몬 마그누스와 같은 거짓 교사들에 대항하여 예수의 몸의 부활과 그를 좇는 자들의 장래에 몸을 입은 삶에 관한 단호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 저작에서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도 모든 피조세계의 갱신의 일부로서 새로운 썩지 않은 몸들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아버지가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깨웠듯이 그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다시 일으켜져서 썩지 않는 의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예수의 잃어버려지고 연약한 것이 회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저기로 흩어졌던 육체는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도서신이 몸의 부활을 분명하게 단언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변증가들
(1) 순교자 유스티누스
주후2세기 중반에 활동한 유스티누스(주후100-165년경)는 완전한 의미에서 책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을 쓴 최초의 기독교 사상이다. 그는 다른 변증가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대한 각종 비방들(음행, 선동, 무신론)을 반박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임무로 삼았다. 또한 그는 세상의 나머지는 잘못되었고 그리스도인들만 옳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는 이교사상 속에 들어있는 희미한 불빛들에 온전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진리라고 논증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첫 번째 변증(First Apology)에서 그는 악인과 의인들은 모두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교문화 속에 접촉점들로부터 논증을 제시하려고 심지어 접신술조차도 죽음 이후에 영혼의 지속적인 삶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이런 이교적 입장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러한 것을 진리를 향한 디딤돌로 주장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는 우리의 죽을 몸들이 죽어서 땅에 흩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몸을 다시 받을 것을 기대한다고 말한다.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에서 유스티누스는 부활을 더 상세하게 다루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면서도 몸의 부활을 믿지 않고 단순히 영혼이 죽은 후에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에 대항하여 몸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통렬하게 설명한다. 유대교의 표준적인 부활신학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부활신앙은 무엇보다도 창조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육체가 영혼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사람들에 반대하여 육체와 영혼이 모두 범죄에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둘 모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육체와 영혼을 모두 지으신 하나님은 그 둘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스티누스에게 부활은 오직 영적인 부활일 수 없다. 그는 만일 구원이 오직 영혼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이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냐고 반문하면서 복음은 이미 알려진 것을 약간 변형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롭고 기이한 소망’이라고 강조한다. 이 소논문은 정확히 고린도전서의 전체적인 논증과 맥을 같이 하는 하나의 본문으로 끝난다. 그는 육체가 다시 살리심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육체로 행하는 것들이 중요하며, 만일 육체가 다시 살리심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육체의 다양한 욕구를 채우며 방탕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유스티누스는 현재적인 몸과 장래의 몸 간의 연속성만이 아니라 그것들 간의 차이에 관해서도 신약성서와 정확히 맥을 같이 한다. 그가 중간상태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영혼 문제에 대한 그의 조심스러운 서술은 그가 몸의 갱신을 기다리는 영혼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사고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 자신이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며 사도교부들과 마찬가지로 현재적인 윤리적 삶과 장래의 부활 간의 연속성을 강조하지만 부활 언어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바울 이후 약100년이 지나서 순교한 유스티누스는 부활이란 주제에 대하여 바울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견해를 흡수한 가운데 이교철학이 횡행하는 환경 속에서 바울이 예전에 했던 것보다 더 길게 그런 견해를 변호했다는 온갖 표지들을 보여준다.
(2) 아테나고라스
유스티누스와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아테나고라스는 그의 저작 ‘변증’에서 이미 보편화되어 있던 그리스도들에 대한 비난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는 변론이며 동시에 이교 사상의 어리석음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는 한 분 신이 누구신가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예배가 식인축제라는 비난을 반박하면서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여러 가지 비난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증명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에서 부활에 대한 더 실질적인 논증으로 옮겨간다. 그는 부활은 신에게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은 결국 창조주이기 때문이며 창조주로서 신은 분명히 죽은 자들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사도교부들과 유스티누스보다 다 충실하게 바울을 반영하면서 부활의 몸은 썩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현재의 몸과 상당히 다르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몸들이 해체되거나 흩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다시 재생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 하나님이 부활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다시 살리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논증하면서 하나님은 사람들을 창조하였을 때 나름대로의 목적을 지닌 피조물로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들을 멸망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적절한 모든 필수적인 변화들을 통과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부활을 인간이 애초에 창조된 이유들에 대한 고찰을 통해 논증한다.
부활은 최후의 심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아테나고라스는 단지 장래의 심판을 토대로 해서 부활을 논증하는 것은 별로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부활은 인간 자체의 본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몸과 영혼이 조화 속에서 함께 존재하도록 창조했고 이러한 통일성은 유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몸은 영혼의 감옥이고, 영혼은 몸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때 행복하게 된다는 플라톤적인 대안은 고려조차 되지 않는다. 아테나고라스는 부활의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철저하게 유대적인 창조신학에 뿌리를 준다. 장래의 심판을 부활을 위한 토대로 삼는 것을 경고하면서, 아테나고라스는 이제 장래의 심판이 있다면, 그것은 몸과 영혼 모두에 대한 심판일 것이 틀림없다고 논증한다. 그의 부활논증 가운데 가장 긴 이것은 고린도전서의 논증과 잘 부합하는 것으로서, 현재의 몸의 실존과 장래의 몸의 실존 간의 연속성을 현재의 도덕적 삶을 위한 주된 근거로 강조한다.
그러나 그가 강력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의 목적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인간 존재의 특별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짐승들의 목적과 동일한 것일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은 단순히 몸을 입지 않은 영혼의 행복 또는 고통으로부터 자유일 수는 없으며, 그것은 몸과 영혼이 공유하는 목표, 동일한 영혼과 몸이 재결합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아테나고라스는 온전하게 몸을 입은 부활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유스티누스, 이그나티우스, 클레멘스와 보조를 같이하는데, 실제로 이것이 부활이란 단어가 고대세계 속에서 의미했던 바로 그것이다. 만약 부활이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유스티누스 또는 아테나고라스가 사용한 논증들은 그 어느 것도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아테나고라스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부활 논증들을 주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토대로 삼아서 전개한다. 그는 다른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과는 달리 영혼이 이미 불멸하다고 말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지만, 영혼이 몸이 없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중간 상태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영혼에 관한 그의 견해는 그가 중간 상태를 현재적 삶과 장래의 삶 간의 연속성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준다.
(3) 테오필로스
주후2세기 후반에 안디옥의 감독이었던 테오필로스는 다른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에 관한 강력한 교리를 지니고 있다. 그는 유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그의 독자들의 세계와의 접촉점을 찾아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신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기독교의 부활 주장을 거부하면서 자랑하는 이교사상 속에 이미 그런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부활 담론에 관한 유대교 및 기독교 전승들 전체에 걸쳐서 친숙한 것이기도 한 그의 전체적인 요지는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능력이다. 기본적으로 바울적인 전승을 증언하는 또 한 사람의 증인으로서, 테오필로스는 장래에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되는 것에 관한 소망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 해석학적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창조에 관한 교리, 피조질서 내에서 부활에 대한 유비들을 다룬다.
(4) 미누키우스 펠릭스
주후2세기 후반이나 주후3세기 저술가로 여겨지는 미누키우스 펠릭스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소논문에서 흥미롭게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을 쓴 방식처럼 대화형식을 통해서 귀류법에 의한 부활의 부정을 포함해서 반기독교적인 논증을 반박하고 있다. 부활의 부정에 대한 그의 주된 대답은 하나님은 창조주시라는 것이다. 이미 행해진 것을 반복하는 것보다 지금까지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창조해 내는 것은 더 어렵다. 그는 그러므로 부활은 창조 자체보다 하나님에게 더 쉬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장래에 부활이 있을 것이고 죽은 자들은 의식을 지닌 채로 안식 가운데서 그것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것에 대한 증거는 예수 자신의 부활만이 아니라 자연세계가 보여주는 풍부한 증거들이라고 말한다. 그가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단순히 부활 교리를 그의 독자들에게 친숙한 것들과 결합시키려는 것뿐 아니라 기독교는 이상한 미신이 아니라 창조주 신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5. 위대한 초기 신학자들
(1) 테르툴리아누스
라틴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테르툴리아누스(주후 160-225년경)는 변증가들에서 신학자들로 넘어가는 과도적인 인물이다. 그의 저작 ‘변증(Apology)’은 그리스도인들과 비판자들 사이에서 쟁점이 되던 문제들 대부분을 탁월한 필체로 다루고 있는데 부활에 관한 그의 묘사는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변증가들과 맥을 같이 한다. ‘부활에 관하여’라는 그의 글은 죽은 자들에 대한 이교적인 신앙들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하면서 이교의 대적자들만이 아니라 교회내에 있는 이원론자들 또는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 이전이나 이후에 진정한 육체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그는 다른 변증가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물질세계의 창조주이며 하나님은 자기가 만든 것을 최상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논증의 토대로 삼는다. 그는 사람의 육체도 하나님이 만든 것이므로 육체는 영혼과 함께 유업을 받는 공동 상속자이며, 육체는 기독교적 사고 속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는 사도 바울이 육체에 관하여 부정적인 것들을 말했을 때, 바울은 육체라는 본질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들을 언급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부활 신학은 장래의 심판에 대한 고전적인 유대교 및 기독교의 견해와 부합한다. 그는 심판이 완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과 몸이 다시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되며 이생에서 함께 활동했던 영혼과 육체는 종말에도 함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관념을 현재적인 삶 속에서의 도덕적인 변화 또는 몸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교회내의 이단들과도 논쟁을 벌인다. 그는 부활에 관한 예언들이 영적인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것들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실제적인 지시대상이 존재한 것에 의거한 것이라고 역설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은 단순히 뭔가를 가리키기 위한 비유적인 언어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성경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거나 부활이 죽음 직후에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부활은 세상의 종말에 일어나고 이런 부활은 분명히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고린도서신에 나오는 핵심적인 부활 본문들에서 바울이 정죄하는 것은 육체의 본질이 아니라 육체의 일들이므로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는 저 유명한 말은 몸의 부활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는 부활의 때에 몸은 변화되어 썩지 않는 것이 될 것이지만, 이런 변화가 본질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며, 부활이 있기 위해서 변화들, 개조들, 변혁들이 일어나지만 육체의 본질은 여전히 보존될 것이라고 말한다. 부활한 몸과 현재의 몸 간의 동일성을 통해서 사람의 몸은 완전한 상태로 회복되고 거기에 기쁨과 평안이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을 영지주의적인 방향으로 해석하는 자들과는 반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고 이 점에서 이레나이우스라는 헬라 신학의 위대한 교부들 중 한 사람과 긴밀한 동맹자이다. 이 두 사람은 ‘부활의 몸’에 관한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인 개념과 철저한 변화를 지나치게 강조한 견해를 서로 보완적인 방식으로 통합하였다.
(2) 이레나이우스
이레나이우스(주후130-200년경)는 주후177년에 대박해로 전임자가 순교한 직후에 리옹의 감독이 되었다. 그에게 신학과 석의는 이교 제국과 이교 문화에 맞서서 수행하는 위험스럽고 어려운 증언 사역을 위하여 교회를 무장시키는 과제의 일부였다. 이레나이우스는 다른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주로서 하나님에 관한 강력한 교리를 자신의 신학의 토대로 삼았다. 그는 ‘이단들을 반박함(Against Heresies)’이라는 저작에서 종말에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분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 발렌티누스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부활에 관하여 설명한다. 그는 테르툴리아누스와 마찬가지로 영혼과 몸은 함께 속해 있고 하나님은 죽을 몸들을 다시 소생시키실 때에 그 몸들을 썩지 않고 죽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창조주로서 하나님은 각각의 몸에 적절한 영혼을 수여하실 수도 있고, 이때에 의인들에게는 상급으로서, 불의한 자들에게는 징벌로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이레나이우스는 특히 참 신이 정확히 어떤 분이신지, 교회가 원래의 메시지에 충실한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발렌티누스주의자들과 마르키온주의자들을 반박하는 논쟁을 길게 제시한다. 그는 인간의 육체가 선하다는 것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것이므로, 인간의 육체는 연약하지만, 그 육체를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은 혼, 영, 몸의 결합과 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이것들은 한데 어우러져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룬다고 말한다. 그는 바울이 사람들을 ‘영적’이라고 부를 때, 그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이 육체를 벗어버렸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며, 성령의 전이 되는 것은 이러한 완전한 인간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레나이우스는 고린도전서 15장 35-39절을 해설하면서 ‘영적인 몸’이라는 어구는 혼 또는 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영속적인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몸을 가리킨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레나이우스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라는 구절에 대한 고전적인 잘못된 읽기를 정면으로 다루면서 이단들은 이 본문을 물질적인 피조세계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용하는데 이것을 잘못된 이해라고 말한다. 그는 ‘혈과 육’은 생명의 원리를 갖고 있지 않은 자들, 즉 하나님의 성령이 그들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죽은 자들과 다름이 없는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단들을 반박하면서 예수가 죽어서 단순히 천국에 간 것이 아니었다고 역설한다. 그는 예수는 성경대로 무덤 속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 3일을 보냈으며 부활하고 승천했으므로 주의 모든 백성은 두 단계의 사후 실존이라는 패턴을 따르게 될 것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이레나이우스가 부활에 관해 취했던 입장, 또는 그가 반박하고자 했던 기본적인 입장에 대해서는 어떤 의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및 장래의 사람들의 몸의 부활은 이레나이우스에게 고립적인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한 창조주, 진정으로 성육신한 말씀, 예수의 참된 가르침의 보고로서의 교회와 정경에 관한 여러 교리들과 무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부활은 다른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레나이우스가 강력한 핵심으로 여겼던 신앙의 네트워크 또는 그물망의 일부였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강점은 이교적인 불신앙에 맞서서 뿐만 아니라 이교도들의 적대감에 맞서서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이레나이우스는 영지주의적인 대안을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수적인 싸움을 회피하고 박해를 초래하지도 않는 영성의 영역으로 도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레나이우스에게 몸의 부활은 이교제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악한 것에 맞서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무장들 중의 일부였고 그것은 모든 다른 무장들과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3) 히폴리투스
주후 3세기 초의 저술가였던 히폴리투스(주후 170-236년경)는 음부, 즉 모든 죽은 자들이 현재 거처하는 곳을 영혼들을 위한 구치소로 묘사하면서 거기에서는 최후의 심판에 앞서서 이미 징벌들이 시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의인들도 잠시 동안 음부에 있지만 그들은 악인과는 격리된 장소에 있으면서 ‘썩어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나라’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 후에 종말에 이르러서 신은 부활을 이루실 것이다. 그 부활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몸들 자체를 다시 살림으로써 이루는 것이다. 사람들의 몸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창조주가 동일한 원소들을 모아서 그 몸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의 몸은 한 알의 밀알로 뿌려지지만 그 후에는 그 형체가 새롭게 형성되는 씨앗과 같다. 즉음 이후의 몸은 지금과 동일한 것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순결하고 더 이상 썩어지지 않을 것으로 부활하며 이런 몸들은 각각 그것에 적합한 영혼을 갖게 될 것이다.
(4) 오리게네스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저술가인 오리게네스(주후 185-245년경)는 그의 동시대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더불어 플라톤 철학에 더 많은 공간을 부여했다는 좋지 않은 평판을 얻고 있다. ‘아포카타스타시스’에 관한 그의 가르침, 즉 모든 것들이 최초의 기원에서 그것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로 회복되거나 되돌아온다는 것에 관한 가르침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그는 심지어 마귀도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과 관련하여 그는 아우구스투스부터 심한 공격을 받은 후 주후543년에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가 막히게 박식하고 분별력 있는 주석자이자 신학자였고 부활에 관한 연구가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오리게네스가 바울과 나그 함마디 문서 사이의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은 그를 정당하게 대우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에 관한 유대적인 교리와 관련해서 아주 확고하게 바울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는 죽는 몸이 존재한다면 부활하는 몸도 존재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바울이 ‘영적인 몸’에 관해 말할 때 그는 분명히 물리적인 몸을 의미하고 있으며 우리가 부활의 때에 물리적 몸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영적’이란 단어는 썩어짐과 죽을 것을 벗어버린 것과 관련되며 따라서 영적 몸은 이전의 동물적이 몸의 변모를 포함하겠지만 그것의 폐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변모는 부활의 몸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견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오리게네스에게 부활의 몸은 죽은 몸과 동일한 것임과 동시에 다른 것이기도 한데, 이 둘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죽지 않는 새로운 몸이 지닌 썩지 않음이라는 특성에 있다. 학자들이 오리게네스에 대하여 너무도 자주 의문을 제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활을 비롯한 몇몇 중심적인 사항들에 있어서 확고하게 정통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다.
오리게네스는 장래의 몸은 현재의 몸과 절대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주로 고린도전서 15장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성경에서 가르치는 부활교리를 폐기하는 자들을 비판한다. 여기서 오리게네스가 몸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 부활을 가르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해체된 몸의 모든 조각들을 찾아내서 다시 그것들을 한데 붙여놓는다는 단순한 소생 또는 재구성을 가르치는 자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오리게네스는 부활에 관한 기독교 교리는 플라톤의 윤회설을 오해한 것이라는 켈수스의 주장을 반박하며 부활은 수준 높은 난해한 교리이며, 다른 것들보다 더 그것이 신에게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를 보이기 위해서는 고도의 진보된 지혜를 요구하는 교리라고 말한다. 그런 후에 그는 고린도후서5장 1-5절과 고린도전서15장을 근거로 영혼은 몸을 입어야 하지만 몸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오리게네스는 부활에 관한 주후2세기의 설명들이 보여주었던 공백을 채우고 있다. 클레멘스, 이그나티우스, 유스티누스, 테르툴리아누스는 바울이 현재의 몸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온통 연속성에 관심을 집중했기 때문에 불연속성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그들과는 정반대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오리게네스가 일종의 플라톤주의자, 알레고리주의자라는 평판을 받고 있지만 그에게 예수의 부활은 이 땅에서 예수가 실제로 지니고 있었던 그 몸의 변화된 모습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특히 몸의 부활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의 부활도 비록 썩지 않을 몸일 것이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육신적인 몸일 것이다. 오리게네스가 부활을 단언할 때, 그는 이전의 몸과의 중요한 연속성과 중요한 불연속성 안에서의 실제적인 몸을 의미했다. 그는 영혼이라는 관점에서 중간 상태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즐겨하고 심지어 예수의 영혼이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죽은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다른 저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도 신자들이 현재 세례와 거룩함 속에서 갖고 있는 새로운 생명을 가리키는데 은유적인 용법으로서 부활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장래에 복된 몸을 입지 않은 상태로 귀결될 현재에 있어서의 영적인 체험을 가리키는데 어떤 식으로든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6. 시리아의 초기 기독교
(1) 서론
시리아의 초기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세 개의 본문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주후 1세기 말과 3세기 중반 사이의 어느 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들은 모두 시리아어를 사용하는 세계 속에서 정통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보여주는 경건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2) 솔로몬의 시편
시리아어로 쓰인 ‘솔로몬의 시편(Odes of Solomon)’으로 알려진 저작에는 마흔 두 편의 시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의 저작 연대와 성격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크게 엇갈린다. 그것들은 비록 시편과 쿰란 문헌들에 의해 대변되는 유대적 경건 속에 뿌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신약성서나 사도교부들에게 보는 것 보다 더 발전된 신학과 광범위한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신학과 영성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편들은 주후2세기 말과 3세기 초의 저술가들의 저작들과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솔로몬의 시편은 유려한 시리아의 시가로 표현되어 따듯한 영성을 보여주는데 후대의 몇몇 시리아 기독교와는 달리, 이것들은 창조와 성육신에 관한 강력한 교리 속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다. 신자는 메시아, 성령, 창조주 신과 더불어 밀접하고도 친밀한 생명을 주는 연합을 누린다. 이 시편들은 요한복음을 연상시키는 언어를 통해서 신자가 메시아, 불멸하는 자, 그 자신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고 그 생명을 주는 분과 연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솔로몬의 시편은 부활 자체도 가르치고 있는데 15편은 고린도전서 15장을 반영하고 있다. 29편은 주님이 신자들을 스올에서 건지시는 것에 관해 말한다. 부활에 관해서 가장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22편과 42편은 분명히 에스겔 37장에 대한 묵상으로서, 부활을 백성을 구속한 하나님의 행위에 적용하고, 온 세상을 썩어짐과 쇠함을 거쳐서 새 창조, 즉 하나님의 나라, 구속받은 자들의 궁극적인 본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노래한다. ‘솔로몬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정서는 이사야, 요한계시록, 바울로부터 결코 벗어난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유대적이고 바울적이기도 한 17편의 주된 요점은 죽음과 스올은 하나님, 세상, 인간의 원수들이며, 메시아의 구속 사역은 그것들을 패배시키고 그것들이 장악하고 있는 것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메시아 자신을 중심으로 재정의된 제2성전 유대교의 주류적인 신앙에 관한 재서술이다. 이 시편에서 메시아의 부활은 모든 믿는 자들을 메시아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리는 수단이라고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솔로몬의 시편은 첫 두 세기 동안의 위대한 신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으로서, 교회가 신학적인 논증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시와 노래를 통해서도 자신의 부활신앙을 표현하고 배웠다는 것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3) 타티아누스
타티아누스는 아테나고라스와 거의 동시대인으로서 유스티누스의 제자였지만, 곧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간 사람이다. 그는 정경에 나오는 사복음서를 조화시켜 쓴 ‘디아테사론(Diatessaron)으로 유명하다. 그는 많은 저작을 썼지만 아마도 불신을 받았기 때문인지 거의 모든 저작들이 멸실된 상태이다. 그의 현존하는 저작 ’헬라인들에게 고함‘에는 부활에 관한 짧은 본문이 나오는데 그는 부활을 창조주로서 신에 대한 믿음에 토대를 두고 유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창조주의 최초의(first-begotten) 작품으로서 ’로고스’에 관한 교리를 담고 있다. 그는 만물이 완성된 후에 몸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이 부활의 목적은 심판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스토와 학파의 주기적인 윤회와는 구별되는 ‘일회적인 부활’이다. 타티아누스의 다른 견해들에 대한 후대의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부활 주제와 관련해서는 신약성서 및 주후2세기 저술가들과 확고하게 맥을 같이 한다.
(4) 도마행전
도마행전은 원래 시리아어로 쓰인 마니교적 성향을 지닌 작품으로서 도마가 순교자로서 죽임을 당하고 그 뼈들이 에데사로 옮겨졌다는 전설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주후3세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이 저작은 도마의 삶 속에서 일어났던 온갖 종류의 일화들을 금욕주의적 영성을 가르치기 위한 틀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저작은 발렌티누스주의적인 영지주의의 발전된 신화체계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느슨한 이원론적이고 비의적인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이 저작은 영지주의적 유비들을 보여주면서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영혼이며 최후의 여행에서 몸은 기꺼이 버려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약성서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기독교 저술들을 떠나버린 진정한 변질이 보인다. 이 저작은 다시금 고대 플라톤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서 부활을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부활을 기각하고 있는 영지주의의 문턱에 서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7. 나그 함마디 문서와 그 밖의 본문들
(1) 서론
나그 함마디 분서들은 저작 연대나 그것들이 담고 있는 관념들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몸과 부활에 관한 좀 더 폭 넓은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2) 도마복음서
도마 복음서 속에는 영지주의적 신학의 영향이 분명히 존재한다. 도마 복음서에 의하면 기본적인 종교적 체험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적인 정체성에 대한 인식만이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기원과 운명에 대한 인식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기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육체의 의복을 벗어버리고 현재의 썩어질 실존을 지나감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후에야 새 세상, 빛과 평화와 생명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통상적인 육신의 몸은 ‘의복들’이고 그 의복들을 스스로 벗어서 멸시할 것들로 생각해서 그것을 발아래 짓밟도록 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한 시간, 공간, 물질로 이루어진 현재의 질서는 본질적으로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우리가 살고 있는 피조세계는 언제가 기꺼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도마 복음서에서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가져올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의 최후의 행위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기대는 명시적으로 거부된다. 도마 복음서는 명백하게 반(反)창조적이라는 점에서 도마행전을 능가한다. 공간, 시간, 물질의 세계는 예수에 의해 계시된 신보다 더 하급의 신이 만들어낸 악한 피조물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이 세계를 벗어나서 몸을 입지 않은 상태로 되돌아 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런 내용은 발렌티누스주의적인 만개한 영지주의는 아니지만, 분명히 우주론적 및 이원론적 인간론, 그것에 수반된 구원론 쪽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 저작은 초기 기독교에서 나온 자료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판이하게 다른 세계관 내에서 통합하였다. 그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신약성서와 기독교 저술가들이 말한 부활은 우연적으로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3) 그 밖의 도마문헌들
‘논쟁자 도마서’는 부활한 예수와 소위 그의 쌍둥이 형제라고 하는 ‘유다 도마’ 가 나눈 대화록이다. 이 저작은 주후3세기 초에 시리아에서 나온 것이 거의 확실하며, 완전히 만개한 영지주의의 급진적인 이원론이 아니라 타티아누스가 앞서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던 시리아 기독교의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금욕적인 이원론은 타티아누스의의 몇몇 저작들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완전한 체계라기보다는 비의적이고 영지주의적 경향들을 보여주는 표지들을 지니고 있다.
(4) 레기노스서
나그 함마디 문서들 중에서 부활에 관한 주제를 직접 다루는 책은 레기노스서의 ‘부활에 관한 소고‘ 이다. 이 저작은 초기 기독교 전승과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부활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식인, 영 또는 혼의 부활로 이어지는 현재의 영적인 부활을 가리키는 의미로 부활 언어를 해석하고 있다. 이 책은 주후2세기 말경에 발렌티누스 분파 또는 다른 세계관들의 압력 아래서 기독교적인 가르침을 고수하고자 애쓴 매우 혼합적인 정통신앙의 신자에 의해 쓰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저작은 신의 아들인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통해 죽음을 정복하였고, 자신의 인성을 통해서 우리는 부차적은 죽음의 장소인 피조 세계로부터 건져내어 ‘플로레마’ 즉 충만으로 우리를 회복시킨다고 말하는데 사실 여기서 ‘죽음을 삼켰다’고 말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피조세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연적이고 육신적인 것들이 모두 제거된 부활을 의미한다. 이 책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가지고 부활을 설명하고 있지만 그 유사성은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바울의 설명 전체는 창세기 1장과 2장에 관한 끈질기고 긍정적인 석의가 유지되는 반면에 이 저작에서 ‘부활에 관한 소고’는 발렌티누스주의와 마찬가지로 피조세계의 가치에 관한 깊은 회의론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신자들은 이미 자기 자신 속에 더 나은 것을 소유하고 있고, 그들이 장차 가는 곳에는 육체가 필요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바울(그리고 그에게 의존하고 있는 후대의 전승)이 긍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사실상의 구체적인 부정이다. 신자들은 이미 이생에서 부활했고 그들은 죽을 때에 가시적인 지체들인 몸을 버리게 될 것이고 오직 그것들 안에 있는 생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이 책에는 바울 및 주후1세기 저술가들과는 달리 그 어떤 중간지 또는 ‘잠자는 것’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들이 부활 언어를 통해 의미하는 것은 장래의 몸의 부활이 아니라 현재의 영적인 부활인데 이 부활이 현실이고 세상은 환상이다. 이렇게 부활은 새 창조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재의 세상이 환상이고 따라서 현재 또는 장래에 세상을 벗어남으로써 부활을 발견할 수 있다는 관념은 바울에게 전적으로 낯선 것이었다.
(5) 빌립 복음서
이 저작은 유대교 및 기독교 사상과 육체성을 제거하고 순수한 영이 되고자 하는 헬레니즘적인 소망의 종합을 시도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는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오리게네스 사상의 격류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용된 단어 중 일부는 궁극적인 몸에 머물고자 하는 시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변화된 몸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묘사할 수 있는 단어들을 발견하는 것이 어렵고, 또 오리게네스의 사상을 제대로 다루기 위한 단어들을 발견하는 것은 더 한층 어렵다. 그래서 레기노스서나 빌립 복음서에 담긴 사상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용어들을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 저작의 근저에 놓여있는 세계관은 분명하다. 부활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유대교 및 초기 기독교 저작들 전체에 걸쳐서, 부활은 창조주로서의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 및 최후의 심판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반면에, 이런 모티프들이 여기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레기노스서 및 빌립 복음서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관은 정경에 속한 책들 및 초기교부들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바울로부터 테르툴리아누스에 이르기까지의 공통적인 흐름, 즉 피조세계의 선함에 대한 강력하고도 반복된 긍정에 관한 어떤 표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빌립 복음서는 육체는 경멸한 만한 것이고 영혼은 선한 것이며, 따라서 영혼은 육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 그 밖의 나그함마디 문서들
‘베드로묵시록‘은 정통 신앙을 지닌 자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던 여러 무리의 영지주의적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였다. 이 책은 영적인 체험들에 관한 묘사를 베드로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베드로가 체험한 빛에 관한 환상을 통해서 영지주의자들의 체험에 대한 사도적 공인을 주장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편집자가 주후3세기에 애굽에서 나온 것일 가능성이 많다고 설명하는 ’야고보 외전‘은 550일의 대기 기간 후에 부활한 예수가 사도들, 특히 야고보와 베드로에게 준 비밀스런 계시들을 말하고 있다.’베드로가 빌립에서 보낸 편지‘는 예수가 더 이상 없는 상황에서 감람산, 곧 예수가 육체로 계실 때에 제자들과 함께 모이곤 했던 곳을 배경으로 한 짧은 장면을 담고 있다. 끝으로 ’영혼의 석의‘는 부활에 관한 영지주의적 재해석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본문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 부활 언어는 포로 되었던 세상, 즉 영혼이 물질과 육신적인 몸에 묶여 있던 곳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중생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다.
(7) 구주 복음서
(8) 나그함마디 문서: 결론
나그함마디 문서들은 일률적인 분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많은 견해들이 나타나 있고 동일한 문서들 속에서 그런 경우도 종종 있다. 발렌티누스적이거나 이와 비슷한 사변의 세계 속에 있는 이런 문서들에서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우며, 어느 하나가 주류를 이루고 있을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발견되는 주된 내용들을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기독교의 처음 두 세기 동안에 사용된 ‘부활’이라는 단어와 그 동일 어원의 단어들이 지니고 있는 주된 의미에서의 부활은 이러한 본문들에서 부정되거나 근본적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부활은 현재적인 삶을 사는 동안에 겪는, 몸과 상관없는 종교적 체험 또는 죽은 이후에 몸을 입지 않은 생존과 승귀를 가리키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둘째, 바울로부터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심지어 오리게네스에 이르기까지 예수 및 신자들의 부활에 관한 서술을 지배하고 있는 주제가 나그함마디 문서 및 관련 본문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 창조에 관한 유대교 초기 기독교의 교리, 현재의 피조 질서의 선함, 그것을 만들었고 그것을 갱신시키고자 하는 한 분 참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전혀 없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끈질기고 종종 경멸적인 거부, 그리고 부활에 대한 제2성전기 유대교의 모든 서술 및 바울로부터 오리게네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기독교적 서술들의 핵심에 놓여있는 우주론과 존재론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 존재한다. (2) 장래의 심판, 그 심판이 진정으로 의로운 것이 되기 위해서 부활을 필요로 하는 그러한 심판에 대한 강조가 없다. 장래의 지복과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단지 현재에 있어서 자기 자신, 자신의 영혼 등등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과 자신의 정체성을 몸과 그 주변의 세계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들을 포기하는 것이다. 부활에 관한 유대교 및 기독교의 서술들에서 그토록 중심적이었던 창조와 심판에 관한 교리들은 영지주의적 재정의들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3) 부활이 기존 세력들에 대항하는 자세를 수반한다는 것은 거의 또는 전혀 의미가 없다. 종종 영지주의적으로 재정의된 ‘부활’ 즉 영혼의 승천은 현재적인 고난을 벗어나는 관점에서 말해진다. 적어도 다니엘서와 마카베오 2서로부터 시작해서 바울, 요한을 거쳐 이그나티우스, 베드로묵시록, 유스티누스, 테르툴리아누스, 이레나이우스에 이르기까지 관통하는 뉘앙스, 즉 부활은 창조주가 세상의 나라들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것과 관련된 혁명적인 교리라는 것을 여기서는 전혀 볼 수 없다.
셋째, 바울로부터 테르툴리아누스에 이르기까지 몸의 부활을 주장했던 주류적인 지지자들은 반복해서 구약성서 본문들을 사용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신, 그를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리셨고 마찬가지로 그의 모든 백성을 다시 살리실 신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신이었고, 그의 목적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절정에 도달했으며 이제 세상 속에서 시행될 것이라는 중심적인 신앙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그러나 나그함마디 문서들 가운데 영지주의적이거나 그와 비슷한 저작들은 마치 역병이라도 되는 것 같이 구약성서를 회피하였다. 마르키온적인 태도들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영성, 자신들이 믿는 예수,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하는 사건들, 그들 자신의 장래의 소망이 구약성서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을 볼 때, 나그함마디 문서들이 역사적으로 및 신학적으로 어디에 속해 있는지 분명하다. 레기노스서 및 그 밖의 다른 문헌들에서 사용된 의미로 부활에 대하 말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언어에 대한 후대의 근본적인 수정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서들은 기독교의 한 핵심적인 용어인 부활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거기에 새로운 내용을 채워 넣으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교적인 용법에서나 유대교적인 용법에서 부활과 그 동일 어원의 단어들은 결코 이 문서들이 사용했던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나그함마디 문서 및 그것과 유사한 문서들의 상당 부분은 기독교 초기의 자료들과는 달리 바울로부터 테르툴리아누스에 이르기까지의 흐름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병행되는 흐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유대교 속에서 부활신앙의 뿌리들, 즉 구약성서, 창조와 심판에 관한 교리들, 제국의 권세로부터의 핍박에 직면한 사회적인 상황 등과 같은 뿌리들과 명시적으로 단절된 전혀 새로운 운동을 대변한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예수를 예수되게 한 바로 그러한 것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답게 만든 그런 것들을 내버린 영성이다.
8. 주후2세기 : 결론
부활에 대한 신앙은 모든 형태의 초기 기독교에서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 죽음을 모든 것의 종말이라고 본 표준적인 이교적 견해에 맞서서, 기독교는 비기독교적인 상당수의 유대인들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장래에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을 단언하였다. 나아가 기독교는 부활에 관한 발전된 유대교적 견해들과는 대조적으로 부활은 죽음을 통과하여 그 너머에 있는 썩지 않을 몸으로 나아가는 것을 포함하며, 한 사람 메시아가 다른 모든 사람에 앞서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였다는 것을 포함하고, 또 죽은 사람이 부활의 때까지 주와 함께 거한다는 관점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는 중간 상태를 포함하는 신앙을 아주 상세하게 단언하였다.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와 심판에 관한 교리들을 토대로 하고 있었고 일회적인 사건들에 대한 예언들로서만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절정에 도달했다고 믿어진 근본적인 이야기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유대성경을 다시 읽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부활의 문자적인 용법과 구체적인 지시대상을 떠남이 없이 유대교의 통상적인 은유적 용법(이스라엘의 민족적 구속이라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가리키는)을 버리고 세례, 몸과 행실의 거룩함이라는 구체적인 사건들을 가리키는 또 다른 은유적 용법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부활 개념을 발전시켰다.
주목할 만한 것은 부활신앙에 관한한 기독교는 언제나 유대교의 스펙트럼 안에서 한 점에 굳건하게 머물러 있었다는 점이다. 더 주목할 만한 것은 기독교는 유대교의 입장을 뛰어넘는 새로운 방식들, 즉 유대교 자료들로부터는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교 자료들과의 강력한 연속성 상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새로운 방식들을 통해서 부활이 무엇을 포함하고, 어떻게 부활이 일어날 것인지에 관해 말하는 것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주목할 만한 발전을 야기했고 부활을 신앙의 주변부로부터 최중심부로 옮겨놓았을 뿐 아니라, 절반쯤 형성된 신앙으로부터 매우 날카로운 초점을 지닌 신앙으로 바꾸어 넣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물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예수 자신의 부활에 의해서 개시되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은 그들이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확고하게 믿은 것 때문이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였고, 세상의 참된 주였다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과 마찬가지로 부활교리의 발전도 역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3부 초기기독교에서의 부활[12장 참 소망: 메시야와 주로서의 예수]
N.T. 라이트/RSG
2015-09-17 01:27:08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3부 초기기독교(바울을 제외한)에서의 부활
제12장 참 소망: 메시아와 주로서의 예수
1. 서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장래의 소망은 철저하게 유대적인 방식으로 부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그 소망은 유대교가 말한 것을 뛰어넘는 것을 중심으로 재정의되었다. 그런데 그 중심적인 재정의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한 사람 예수의 부활에 대한 믿음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 한 사람, 예수에 관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이 재정의의 여러 표지들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퀴리오스’와 ‘크리스토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관하여 믿고 있는 것을 표현한 핵심적인 단어들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그들이 이름을 알고 있는 메시아가 세상의 참된 주라고 믿었다. 이 두 가지 호칭이 로마인들에 의해 처형당한 한 사람에게 사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들이 그렇게 믿은 것은 그의 부활 때문이었다.
2. 메시아로서의 예수
(1) 초기 기독교에서의 메시아직
초기 기독교는 철저하게 메시아적이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메시아,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메시아직은 예수와 같은 그런 메시아를 상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주장을 했으며, 예수가 메시아라는 믿음에 따라서 자신들의 삶을 재정립한 것인지 물어야 한다. 메시아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사고 속에 아주 철저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미 바울에게 ‘크리스토스’라는 단어는 더 이상 특별한 내포(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가리키는)를 지니지 않고 오직 외연(나사렛 예수를 가리키는) 만을 지닌 고유명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아직은 바울에게 여전히 중심적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으로서, 그의 신학의 다른 중요한 주제들과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었다. ‘크리스토스라는 단어가 그 명칭적인 의미를 잃고 하나의 이름이 되어버릴 정도로 바울 이전의 기독교를 그토록 확고하게 메시아적으로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물론 예수의 메시아직은 공관 복음서들에 나타나 있는 여러 전승들 속에서 고유명사의 지위로 축소되어 있지는 않다. 예수의 메시아직은 요한복음에서도 주된 주제이다. 요한의 고등 기독론이 복음서 전체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크리스토스‘로서의 예수는 여전히 주된 관심이 된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그 결말에서 자기가 이 모든 것을 자세히 기록한 목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믿게 하려함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메시아직은 복음서들과 사도행전 그리고 적어도 바울서신에서도 주된 주제이다.
요세푸스도 예수를 묘사하면서 ‘이 사람이 메시아였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야고보의 죽음에 관해서 말할 때도 그를 ‘소위 메시아의 동생’이라고 설명한다. 예수는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그 외부에서도 메시아로 확고하게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비메시아적인 운동으로 시작된 후에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면서 갑자기 메시아로서 예수에 관한 온갖 종루의 전승들을 발전시켰다는 관념은 비역사적인 사고다. 그렇다면 왜 예수가 초기 기독교 전체에 걸쳐서 메시아로 여겨졌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대답은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로 여겼고 자신이 그런 소명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일들을 말하고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 유대교에서의 메시아직
문제는 당시의 다양한 유대교들 속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다양한 묘사들이 예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과도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이교도들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 성전을 재건하거나 정결케 하며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신이 주신 참된 공의와 평화를 온 세상에 가져올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예수는 이교도들을 패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손에 죽었고, 성전을 재건하거나 정결케 한 것이 아니라 성전에 임박한 심판을 경고했으며, 이교도들에게 공의와 평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손에 불의한 폭력을 당했다. 이런 것은 유대교에서 메시아와 관련하여 전혀 예상할 수 없던 것이었다. 예수에게 일어난 사건은 강력하고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고 야훼의 나라는 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이것은 유사한 시기에 메시아를 자처했던 아주 유명한 두 인물인 시몬 바르 기오라(주후 66-70년 제1차 유대전쟁 기간) 와 시므온 벤 코시바(주후 132-134년 제2차 유대전쟁 기간)의 죽음이후 벌어진 상황을 보면 아주 분명하다.
(3) 왜 사람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불렀는가?
그렇다면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분명히 메시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부르며 환호한 것인가? 더구나 왜 그들은 이 신앙을 중심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재정립해서 유대교의 메시아사상과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이는 메시아적 운동을 시작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를 중심으로 한 메시아적 소망을 품고 있었던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그의 죽음 이후에 정반대의 결정적인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그가 진정으로 메시아였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적인 메시아 신앙의 기본적인 형태를 유지하였고 이와 동시에 그들은 이 신앙을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신속하게 변형시켰다. (1)메시아는 인종적 특수성을 상실하였다. 메시아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었다. (2) 메시아적 전투는 그 성격이 바뀌었다. 메시아는 군사적인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악 그 자체와 대결한다. (3) 재건된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자들의 공동체다. (4) 메시아가 세상에 가져올 공의, 평화, 구원은 로마제국의 꿈에 대한 유대적인 판본이 아니라 피조세계 전체의 갱신을 통해서 세상에 쏟아 부어질 하나님의 공의(디카이오쉬네), 하나님의 평화, 하나님의 구원이다. 장래의 부활에 대한 유대교의 신앙에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일이 장차 오실 메시아에 관한 신앙에도
일어난 것이다. 유대교의 메시아직은 결코 포기되지도 않았고 단순히 재천명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를 중심으로 재정의되었다. 왜냐하면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가 메시아였고 또한 지금도 메시아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3. 메시아 예수는 주이다.
(1) 서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관해 말했던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호칭은 예수는 세상의 참된 주(퀴리오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칠십인역에서 야훼 자신을 가리키는데 사용했던 그 단어였다.(칠십인역에서는 구약에서 야훼를 가리키던 아도나이를 헬라어로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예수가 메시아(크리스토스)였다면 그는 또한 세상의 주(퀴리오스)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신앙은 시편들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뿌리들로부터 단절되는 경우에는 그 특별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단절이 지난 세기 동안에 신약학계의 상당 부분에서 일어났는데 그러한 단절은 다음과 같은 논증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1) 메시아직은 당연히 유대적인 범주이기 때문에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되면서 그 단어는 무의미하게 되었다. (2) 그 시점에서 초기의 복음 전도자들 ,특히 바울은 그것을 전혀 다른 범주, 즉 이방인들 사이에서 이교의 신들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잘 알려진 ‘퀴리오스’로 대체하였다. (3)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의 ‘주되심(Lordship)’은 유대교적인 기대가 아니라 헬레니즘 종교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또한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의 살아난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늘로 승귀된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체험’에 토대를 둔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따라서 예수의 ‘주되심’은 유대적인 하나님나라 기대는 물론이고 사회정치적 현실과 거의 관계가 없었고 예수의 죽음 직후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과도 상관이 없다.
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요점은 바울 이래로 예수가 주시라는 믿음은 메시아로서의 예수에 대한 믿음의 한 기능이지 그 믿음에서 떨어져 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구약의 잘 알려진 메시아 본문들(시편2:7-12; 시72:1, 8-12, 17; 시89:20,22,25-27; 이사야 11:1,4,10; 이사야 42:1,6; 49:1-6; 다니엘 7:13)은 그 온전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1) 이러한 본문들은 모두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주인이 될 장차 오실 왕에 대한 신앙을 증언해 준다. (2) 이러한 본문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일 뿐 아니라 세상의 참된 주라고 말했을 때 인용했던 대목들이다.(3) 그러므로 예수를 주라고 믿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유대교적 범주들을 버리고 헬라적 범주들을 택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버리고 그 대신에 종교적 체험으로 돌아선 것도 아니며, 이 보편적 주권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포기하고 그 대신에 ‘종교적 체험’으로 돌아선 것도 아니며 이 보편적 주권이 지니는 정치적 의미를 포기하고 종교적인 충성이라는 관점에서 재표현한 것도 아니다. 예수가 주시라는 그들의 신앙은 한 분 참 신 창조주가 온 세상의 주가 되실 것이라는 유대적 소망에 관한 새로운 진술로 이해해야 한다. “주‘라는 단어는 메시아 본문들에서 그런 의미는 아니었지만 주후1세기 맥락에서는 세상 나라들에 대한 주권과 통치권을 가진 자를 가리키는데 사용된 단어였다.
(2) 예수와 하나님 나라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가 주시라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나라의 성취에 관하여 말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다. 하나님나라는 여전히 장래의 것으로 말해지지만 또한 현재적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이미 바울 시대에 하나님나라라는 어구는 ‘도’(the Way)와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 운동, 그 삶의 방식, 그 존재 근거를 가리키는 축약어로 사용되고 있었고 이것은 하나님나라를 여전히 장래의 것으로 말하는 다른 본문들과 분명히 긴장관계에 있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진정한 선취는 이미 합법적인 주로서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메시아의 나라이다. 또한 하나님나라는 장래에 메시아가 그 사역을 마치고 나라를 아버지께 바쳐 드릴 때에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런 도식이 가장 뚜렷하게 등장하는 두 본문(고린도전서15장, 빌립보서2-3장)이 부활에 관해 말하는 본문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관한 이야기로 말했고 나아가 그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도래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장래에 도래할 것이라는 것을 토대로 해서 자신들의 삶을 재정립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런 재정의는 이미 예수에게는 일어났지만,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장래의 일인 부활에 관한 재정의와 대응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하나님나라 주제들(포로귀환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회복, 이방제국의 패배, 시온으로의 야훼의 귀환)을 재사용했지만 그것을 수정된 의미로 재사용하였다. 유대교의 하나님나라 개념은 재정의된 것이지 결코 포기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이러한 수정된 의미는 영적인 해석, 즉 사적인 조명 또는 종교적 체험의 범주들을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러한 수정된 의미는 신이 사람들을 피조세계로부터 건져내기 위해 역사한다는 사적이고 내세적인 의미가 아니라 창조주 신이 피조세계 안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있다는 여전히 공적이고 현세적인 의미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이런 공적이고 현세적인 의미는 기독교 공동체의 공통적인 삶, 특히 예수가 사사로운 또는 개인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가 이미 세상의 참된 주권자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예수가 주’라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었다.
제2성전 시대 유대인들이 그들의 신이 왕이 되는 것에 관한 언어를 사용했을 때 기대했던 것들은 어느 것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임했다고 선포했고 그들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소망의 폐기가 아니라 성취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서 구속을 받아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새 계약과 새 성전의 백성이라고 자처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렇게 행하고 이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한 것인가? 물론 그들의 대답은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비록 부활과 마찬가지로 두 단계로 나뉘어 있지만 이미 도래했다고 선포하였다. 그 나라는 예수와 함께 온 하나님나라, 그리고 그가 이미 이루어 놓은 일을 완성시키게 될 장래의 하나님나라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것을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수수께끼 같이 여겨질 수 있는 자료들에 대한 온전하고 완벽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3) 예수와 가이사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주라는 것을 선포하면서 은연중에 거듭하여 가이사는 주가 아니라는 것을 내비쳤다. 예수는 왕적인 강력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에게 세상이 충성맹세를 해야 한다.(로마서 1장3-5절)거나, 복음 안에서 구원(소테리아)과 의(디카이오쉬네)가 나타났다고 선언하는 바울 서신에서 이 주제는 강력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바울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마태의 부활한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지금 그에게 주어져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지금이 그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때냐고 물었을 때, 예수의 대답은 그렇다 그리고 너희는 그 나라의 수혜자들일 뿐만 아니라 그 대리자들이 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세상의 주로서의 예수의 복음은 한편으로 유대인들의 왕으로서 헤롯의 통치와,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주로서의 가이사의 통치와 긴장 관계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만왕의 왕이자 만주의 주’로서 예수를 부각시키고 이것이 단지 영적인 혹은 천상의 주되심이 아니라 피조 세계 자체, 궁극적으로는 그 위대한 갱신 속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주되심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합법적인 당국자들을 한 분 참 신에 의해서 구성된 것으로서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복적인 성향을 지닌 예수의 복음을 선포하는 문서들 자체가 흔히 그러한 순종과 존중을 강권한다. 권세자들을 존중하라는 명령은 복음의 정치적인 도전의 신경줄을 끊어버리는 것이 아니며 예수의 주되심이 순수하게 영적인 문제로 축소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만약 그런 것이었다면 첫 3세기 동안에 큰 박해들을 대체로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영지주의가 택한 길이었다. 가이사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라는 이러한 전복적인 신앙은 가이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자신의 우월한 권세를 명백하게 과시한 상황 속에서 주장되었다. 그들이 그러한 있을 법하지 않고 위험스러운 신앙을 계속해서 견지해 나간 이유는 그들이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4) 예수와 야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퀴리오스’라고 불렀을 때, 그 단어가 놀랍고도 충격적으로 신속하게 획득했던 뉘앙스는 헬라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야훼를 번역하기 위하여 ‘퀴리오스’를 사용했던 본문들이 이제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혁명을 일으킨 것은 과연 무엇이었고, 그것은 다른 재정의들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세상의 참된 주라는 의미에서 퀴리오스로 여겼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야훼 자신과 동일시되는 분으로 여겼던 것인가? 이것은 부활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가?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 속에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기 때문에 예수가 어떤 의미에서 신적이라는 즉각적인 추론이 일어나지 않았다. 제2성전 유대교에서 그 누구도 부활을 그 사람의 신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부활 그 자체가 예수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면 부활은 너무도 많은 것들을 증명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는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변증은 주후1세기의 역사적 세계에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최초의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가 말과 행위에 능한 선지자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점진적이긴 하지만 결국에는 결정적으로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는 유대 및 로마 당국자들 앞에서 예수에게 제시된 주된 죄목이었다. 부활은 그 자체가 부활한 사람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대교 문헌들에서 어떤 사람이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그가 신적인 존재라는 것과 결부시킨 적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사건을 그 사람이 메시아라는 것과 결부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이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믿게 되자마자, 그들이 그것으로부터 이끌어내었을 가장 분명한 최초의 결론은 그가 진실로 말과 행위에 능한 선지자였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가 이스라엘의 메시아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이미 메시아가 죽은 자로부토 부활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로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한 예수에게 일어난 이례적이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분명히 유대 및 로마의 법정 판결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메시아와 부활의 연결 관계를 찾아내기 위하여 초대 교회가 성경의 본문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냈다는 사실은 이것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초기 기독론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유일신론의 범주들 내에서 예수를 창조주 신과 더불어 창조주 신의 인격적인 자기표현으로 말한 결정적인 방식이었다.
예수가 메시아였다는 것은 그가 세상의 참된 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그를 메시아로 높여서 자신의 보좌와 유일무이한 주권을 공유하셨고 그러므로 예수는 퀴리오스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퀴리오스는 예수가 만유의 조종간을 잡고 있는 인간이고, 가이사를 비롯한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야 할 그런 인간이라는 점에서 세상의 주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가 야훼 자신에 대해 말한 것을 현재화하고 가시화하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 관하여 말하는 적절한 범주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에 관한 성서본문들을 샅샅이 뒤진 이유였다. 그들이 처음부터 지니고 있던 고등기독론은 유대교적 삶과 사상을 이교화한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의도에 있어서는 유대교 내부의 핵심을 살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과 창조주 신, 계약의 신이 예수를 죽은 자로로부터 살리셨기 때문에 예수는 진실로 시편2편, 시편89편, 사무엘하7:14의 의미에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신앙에서 시작되었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그의 유일무이한 신분과 역할에 관한 교회의 사변들과 주장들을 위한 토대였다.
4. 결론: 초기 기독교 세계관에서의 부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마치 몇몇 중요한 의미들에 있어서 이미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안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들은 마치 계약이 갱신되었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의미에서 이미 현존하고 있는 것처럼 살았다. 현재적인 하나님나라와 관련된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나라가 아직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맥락들 속에서 전면에 부각된다. 부활과 관련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실천은 이교적인 패러다임이 아니라 유대적인 패러다임에 확고하게 속해 있었던 것으로 범주화시킬 수 있고, 유대적 세계관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부활신앙에 대한 새로운 명확성과 첨예함이 출현했음을 보여주는 표지들을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특히 한 주간의 특별한 날을 마지막 날에서 첫날로 옮긴 주목할 만한 현상 속에서 잘 드러난다. 선견자 요한은 이 날을 주의 날이라고 불렀고 그리스도인들이 이 날에 모임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매우 이른 시기의 증거들이 존재한다. 이그나티우스는 부활이 이러한 새로운 관습의 존재 근거라고 말하고 유스티누스는 그것을 새 창조의 첫 날과 연결시킨다. 일곱 째날 안식일은 유대교에서 주요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지계표였고 할례 및 음식법과 더불어 유대인들을 이교도들과 구별했던 주요한 표지 중 하나였다. 하나의 세계관에서 상징적 실천의 가장 강력한 요소들 중의 하나를 수정하거나 변경하는 데는 의식적이고 의도적이며 끈질긴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모든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그 첫 번째 날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상징 세계는 예수에게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세례와 성찬이라는 상징적인 행위들은 유대교적인 선례들과 이교적인 유비들을 갖고 있긴 하지만, 예수를 준거로 삼아서 의도적으로 행해졌다. 메시아와 주로서의 예수의 신분, 유대적인 유일신론을 그대로 유지한 채 드려진 예수에 대한 예배는 초기 기독교 세계에서 새로운 상징적 용법들을 낳았다. 이것은 특히 십자가의 경우에 가장 잘 드러나는데, 십자가는 제국의 악랄한 압제의 표지로서 그 수치스러운 상징적 가치를 상실하고, 대신에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가 되었다. 초대 교회의 이야기들은 거듭하여 예수 및 그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예수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가 하나님이 정하신 절정과 새 탄생에 도달한 것에 관한 이야기들 및 이스라엘의 하나님나라가 도래한 것에 관한 이야기들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부활 이야기들은 현재 및 미래에 예수의 부활의 수혜자들인 부활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이것은 계약백성이 고난 후에 신원 받는 것에 관한 유대적 스타일의 이야기의 격자망 속에 배치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기독교의 부활 이야기들은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바울 이래로 예수의 부활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간주되었으며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동일한 성령이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있고 장래에 그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계관적 질문들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때, 부활과 관련된 일련의 대답들은 다음과 같이 도출된다. (1)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부활백성이다. 즉 부활절에서 시작하여 성령의 능력을 따라서 세례 및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세상 안에서 형성된 백성이다. (2)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현재는 고난과 쇠함에 종속되어 있고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지만 장차 부활할 몸을 지닌 채, 회복될 하나님의 선한 피조세계 속에 있다. (3)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부활절에 시작된 사업(좌와 사망의 패배)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 사역은 시작되었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4) 해법은 무엇인가? 해법은 피조세계 및 우리 자신들의 온전하고 최종적인 구속인데, 이것은 예수가 다시 나타날 때에 새로운 창조적 은혜의 행위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현재적으로 선취된다. (5) 지금은 어느 때인가? 지금은 현세와 내세가 서로 중복되어 있는 시기이다.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내세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현세는 여전히 계속된다.
이러한 세계관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들, 소망들, 목적들 속에 표현되어 있다. 신과 세상에 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견해는 어떤 차원에서는 제2성전기 유대교의 견해와 실질적으로 동일하다. 그것은 요약하면 한 분 신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분은 세상과 여전히 적극적이고 권능 있는 관계 속에 있으며,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과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이스라엘과 세상의 문제점들에 대한 대답을 제시함으로써 한 분 신과 세상에 대한 견해를 재형성하였다. 그것은 예수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메시아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은 이스라엘의 회복 나아가 세상의 회복의 전조적인 성취라는 새로운 견해였다. 지난 세기 동안 주류적인 학계에서는 앨버트 슈바이처 이래로 제기된 종말론적인 관점과 타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 많은 학자들은 시공간의 세계 속에서 대단한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제하고(달리 말하면 몸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무게를 다른 문제, 즉 임박한 재림에 두어왔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신학의 무게를 이미 일어났다고 굳게 믿은 사건에 두었다. 그들이 재림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재림이 의미가 있었던 것은 몸의 부활 때문이었다.
부활에 의해 형성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세계관은 (나그함마디 문서에서 보듯이) 사적인 영성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장벽을 뛰어넘은 공동체들을 형성하고 모범과 말을 통해서 로마의 관리들, 지방 방백들이 경각심을 가질 정도로 신속하게 퍼져나간 삶의 양식을 형성하였다.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그런 세계관은 로마제국과의 대결을 억제한 것이 아니라 고취하였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는 단지 죽은 후에 천국에 갔고 그들의 목적은 장래에 천국에서 예수를 만나며, 현재 그 축복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는 것이라고 믿었다면, 현재의 세상은 그들에게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고 새 창조가 시작되었으며 그들이 창조주 신의 새로운 나라의 시민들이 되었다면, 예수가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주시라는 그들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가이사와 갈등을 빚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갈등의 표지들 속에서, 그리고 그런 갈등을 해결하려는 방식들 속에서 바울, 요한계시록, 이그나티우스, 유스티누스, 이레나이우스,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사람들은 부활을 주창했다.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이 신학적이나 정치적으로 당시의 보수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부활을 반대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흔히 확고한 몸의 부활 신앙이 오늘날 보수적인 신앙과 부합한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세상에 대한 보수적인 혹은 현상유지적인 견해를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실상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가 메시아였다면 그는 세상의 참된 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부활은 모든 면에서 바리새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급진적인 신앙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이 이미 시작되었고 그러한 부활을 개시시킨 한 사람 예수는 그 이름 앞에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어야 할 주님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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