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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2/5)- 톰 라이트

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5장 고린도서를 제외한 서신에서의 부활]

N.T. 라이트/RSG

2015-09-17 01:19:59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

제5장 바울서신(고린도 서신을 제외한)에서의 부활

 

1. 서론

 

   초기 기독교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장래의 소망에 관해 거의 일치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교세계와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신앙의 스펙트럼이 아니라, 이교도들이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자, 유대교에서 장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역설했던 것, 즉 부활을 거의 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이라고 말했을 때, 그 단어의 의미는 이교 세계가 부정했으며 유대교가 긍정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한 세대 전에 크리스토퍼 에반스가 표현했듯이 기독교를 통해서 부활이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동한, 정확하고 정교하며 확신에 찬 신앙이 출현하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인가? 

 

   이것만으로도 역사적인 설명을 요구하지만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유대교의 부활신앙의 흐름으로부터 실질적인 돌연변이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를 계기로 유대교에서의 부활에 대한 은유적인 의미(정치, 사회적인 의미에서의 이스라엘의 회복)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고 그 대신에 일련의 다른 은유적인 의미들이 출현했다. 달리 말하면 초기 기독교는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신앙을 유대교의 부활이란 지점에 확고하게 위치시킴과 동시에 이 단어가 유대교에서 지니고 있던 의미와는 상당히 다른 은유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기독교와 유대교 간의 강력한 유사성 및 분명한 상이성, 이 둘을 모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나는 이 책의 제2부와 3부에서 초기 기독교운동을 살펴보면서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염두에 두려고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해 무엇을 믿었는가? 부활은 그들에게 어떤 은유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들은 유대교에서 통용되던 은유적 의미들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초기 기독교운동은 철두철미하게 부활운동이었으며, 초기 기독교는 부활이 정확히 무엇을 내포하는지를 훨씬 더 정밀하게 진술했다. 또한, 문자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은 여전히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지만 그것은 현재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색깔과 형태를 부여했다. 그렇다면 초기 기독교는 왜 그러한 형태를 띠었고, 특히 왜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라고 믿었는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들, 부활에 대한 새로운 은유적 용법, 기독교 운동의 형태와 예수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  궁극적인 몸의 부활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적 소망, 그 소망을 더 정확하게 표현한 다양한 방식들, 부활의 은유적 의미들에 대한 그들의 재정의, 그들 자신이 누구이고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그들의 인식, 이것은 모두 나사렛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그들의 확고한 신앙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나는 제4부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정경복음서들에 나오는 첫 번째 부활절에 관한 기사를 살펴볼 것이다. 그동안 이 부활 기사들은 후대의 기독교신앙을 과거로 투영시킨 것으로서 역사적 진정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부활 기사는 초대교회의 신학적 및 석의적 성찰의 최종적인 산물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발전을 촉발시킨 원천으로 볼 때에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어서 나는 제5부에서 오늘날의 독자들이 초기 기독교 신앙에 대해 무엇이라고 논평할 수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묻고 있다. 제1세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다고 믿었다면 우리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초대교회의 등장, 유대교의 부활신앙에 대한 초대교회의 재천명/발전/수정에 대한 대안적인 설명을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활절 자체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그러나 초기 기독교의 자료들은 이 문제를 그렇게 질서정연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다. 자료들은 한편으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적 소망,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자신의 부활이라는 문제를 아주 풍부한 패턴들을 통해 서로 엮어 놓았다. 이것은 가장 초기의 자료이자 가장 상세한 자료인 사도바울의 경우에 더욱 그러하다. 바울 사상의 대부분의 측면들은 관념들, 성경의 반영들, 암묵적인 이야기들, 실천적인 교훈들이 놀라울 정도로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부활은 이런 그물망의 많은 부분에서 중심적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것에 대한 검토는 그 자체로 상당히 축소되어야 한다. 나는 바울의 진정한 서신으로 간주되는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데살로니가전서를 중심으로 논증을 전개하고자 한다. 먼저 이 본문들을 검토하면서 적용할 세 가지 구체적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궁극적인 기독교적 소망에 관한 바울의 신앙은 고대세계의 수많은 가능성들의 스펙트럼 위에서 어느 지점에 속하는가? (2) 바울은 부활 및 이와 비슷한 언어와 관념들을 은유적으로 어떤 방식들로 사용했는가? 그의 저작들 속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는 유대적인 은유는 어떻게 되었는가? (3) 바울은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2. 데살로니가전후서

 

   부활한 예수는 현재 하늘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장차 돌아와서 자기 백성을 진노로부터 구원하리라는 것은 아주 초기부터 바울의 글 속에서 중심적인 것들이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13절-5장:11절을 중심으로 부활에 관한 바울의 핵심적인 신앙을 다음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이 본문에서 바울은 무덤 너머의 삶에 관한 고대의 견해들의 스펙트럼 위에 서 어느 지점이 있는 것인가? 본문에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이 그의 백성의 부활을 위한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부활신앙이 제2성전 시대 유대교 신앙들의 한복판에 속해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여기서 한 신의 백성에 속해 있는 자들로서 현재 죽어있는 자들을 진노로부터 구원으로 이끌어 낼 미래적인 부활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부활에 관한 바리새파의 입장이었다. 이것은 바울이 회심 후에도 부활을 몸의 부활로 보는 유대교의 부활신앙을 견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또한 바울은 부활을 믿었던 제2성전 시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몸의 죽음과 몸의 부활 사이의 기간의 중간상태라는 문제에 봉착했는데 그는 죽음을 가리켜 잠잔다는 통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일부 해석자들은 영혼의 잠은 부활을 통하여 깨어나기 이전에 사후의 무의식적인 실존  상태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런 주장은 바울을 오도하는 것이다. 바울이 중간 상태를 지칭할 때에 영혼(프쉬케)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고 말한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잠자고 있는 것은 몸이라고 말해야 한다. 바울은 잠잔다는 말을 통해서 새롭게 활동을 재개하는 단계와 대비하여 일시적으로 활동을 멈추는 단계라는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3) 현재적 삶과 최종적인 부활의 상태 사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보여주는 어떤 표지들이 존재하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빛의 자녀들, 낮의 자녀들이라고 칭하면서 잠자지 말고 깨어있으라고 촉구한다. 이것은 단순히 밤늦도록 잠자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트기 전 아직 어두울 때에 일찍 일어나 깨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인 상태라고 역설하는데 이것은 강력한 윤리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아직 동트기 전이라 어둡지만 이미 낮인 것처럼 처신하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런 이미지는 개시된 종말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의 몸은 아직 변화되지 않았지만 부활에 관한 잠자고 깨어 있는 것에 관한 이미지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이미 깨어있고, 또 그런 상태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4) 여기서 바울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다시 만나는 것은 예수가 다시 돌아올 때에 성취될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바울은 다시 만나는 장면을 주가 강림하고 신자들이 구름 위로 올라가서 주를 공중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동안 근본주의와 비평학계에서 모두 이 본문을 문자적 의미로 받아들여서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은 구름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라간다는 의미로 주장하여왔다. 그러나 이 본문이 가진 다중적인 묵시론적인 공명들과 혼합된 은유들을 고려해 볼 때, 그런 해석은 거의 신빙성이 없다. 여기서 주의 강림을 가리키는 헬라어 “파루시아”는 황제의 방문(visitation)을 가리키는 이교적인 용법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니까 “파루시아”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은 백성들이 황제를 영접하기 위해 도성 밖으로 나가서 그를 옹위하여 도성 안으로 모셔 들이는 그런 만남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이 묘사하는 이 장면은 주가 하늘로부터 올 때, 즉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의 통치가 개시될 때, 신자들이 주를 만나서 그를 옹위하여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5) 제2성전 유대교에서 부활의 은유적 용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압제와 포로생활로부터 구원하실 것과 그 사건은 새로운 창조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에게서 이런 의미는 사라졌고 또 다른 은유적인 구성물로 대체되었다.  바울은 부활과 관련된 언어를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변화를 가리키는 데 사용했다. 바울은 이런 은유를 통해서 자신의 도덕적 가르침을 강화하고 이스라엘이 열망해온 부활과 회복이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는 개시된 종말론을 묘사할 수 있었다.

 

   (6) 이 본문에서 예수의 부활은 모든 논증의 전제이다.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모든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모델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있어 예수의 부활은 죽음 자체와 실질적으로 동의어인 승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에게 있어 예수 또는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은 육신적인 죽음 직후에 영혼이 새로운  상태로 옮겨져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의 “죽음 이후의 삶” 이후의 새로운 삶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의 부활은 이스라엘의 소망의 날카롭고 충격적인 성취로서,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낮의 자녀로서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살아야 하는 역사의 새롭고 예기치 않은 때를 개시한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14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최종적인 목표가 메시아인 주 예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서술하는데 이는 데살로니가전서 5:9에 나오는 “구원”과 동일한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를 다중적인 방식으로 서술하는데 이 모든 것에 대한 단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죽음의 권세를 패배시켰다는데 있다. 그래서 바울은 새로운 세상, 새 창조, 새 날이 동터오는 것은 이미 복음의 말씀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선취되고 있고 메시아가 다시 오실 때 완성된다고 말한다. 그 날에 죽은 자들은 새로운 몸으로 일으키심을 받고, 산 자들은 새로운 몸으로 변화됨으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썩어짐으로부터 구출되고 메시아가 이미 누리고 있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3. 갈라디아서

 

    부활은 갈라디아서의 주된 주제가 아니지만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는 그 전반적인 논증이나 세부적인 내용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바울이 계약의 하나님이 “우리를  악한 세대에서 건지셨다”고 말할 때, 그는 무슨 일이 이미 일어났고, 이 일로 인하여 내세가 현세로 뚫고 들어왔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내세의 돌입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쌍둥이 사건들과 결부시키면서 예수의 죽음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준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메시아로 자처하던 자의 죽음 그 자체만으로, 내세가 이미 돌입했고 사람들은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개념을 생겨날 수는 없다. 십자가에 대한 그런 개념은 부활과 결합되어야만 생겨나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약속된 새 시대를 개시한 것이고 이 내세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원의 때이다. 여기서 부활에 대한 유대적인 은유(포로생활과 압제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는 다른 은유로 변형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고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악한 세대로부터 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 19-20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죽음”과 “다시 산 것”에 대해 말하는데, 이러한 은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염두에 둔 자신의 회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더 이상 자신의 육체적 실존에 의해서 정의되지 않는 바울의 새로운 정체성의 변화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런 정체성의 변화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과 압제로부터의 구원에 대한 은유로서, 부활이 바울 자신의 인격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실현되었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미하는 육신의 옛 유대들은 계약의 신의 백성을 정의하는데 이제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역설하는데, 이 논증의 근거는 바로 새로운 정체성이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상징적 차별화는 이제 폐지되었고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표지는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 즉 메시아이신 예수의 신실함이었다. 이 은유가 가리키는 것은 구체적인 실체, 즉 새로워진 인간 존재로서 그의 정체성과 자기와 마찬가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모든 자들과의 식탁교제이다.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던 것은 비록 여기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강력하게 현존하고 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체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갈라디아서 3장의 주제중 하나는 유대인들의 오랜 소망이 변형된 가운데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저주에 빠지면서 고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짊어진 메시아를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셨으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 본문의 근저에 있는 암묵적인 이야기는 부활에 관한 유대적인 은유인데, 바울이 그 약속들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던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들은 바울이나 대다수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그런 방식으로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봉착했던 거대한 문제점이었고 갈라디아서는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답변중의 하나였다. 바울은 기존의 유대적인 은유를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 재정의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답변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들 중의 하나는 4장1-7절인데 여기서도 바울은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노예들을 속박에서 해방하여 자신의 자녀로 삼은 출애굽의 이야기를 활용하여 한 분 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사역을 통하여 노예 주인의 권세를 파했으며, 또한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상속자 신분을 회복시켜 준다고 말한다. 이 동일한 이야기가 로마서 8장에서는 명시적으로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비록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근저에는 부활 관념이 있다. 세상을 바꿀 사건들이 이미 일어났고, 바울은 그 사건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이스라엘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다음 본문에서도 바울은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그 대신에 최후의 “신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는 지위를 얻게 될 미래적 소망을 말한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부활의 소망”과 “의의 소망”이란 말을 서로 바꿔 쓰고 있는데 이는 바울의 사상에서 부활과 칭의간의 개념적 연관성을 보여준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육신을 좇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는 어구를 창조주의 말씀이 남김없이 다 이루어져 피조세계가 완전히 회복되는 궁극적인 미래를 가리키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계약백성을 위한 궁극적인 미래를 서술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서 주후1세기 바리새인이라면 누구나 이 어구를 부활의 소망과 동일시했을 것이다. 이 미래적 소망이 담고 있는 함의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현재의 삶은 장래의 유업에 대한 보장이라는 것이다. 갈라디아 6장에서 바울은 이런 사고를 “심고 거두는 것”이란 이미지를 사용해서 발전시킨다. 이 이미지는 바울이 현재의 삶과 내세의 삶 사이의 연속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의 현재의 삶은 그가 육신과 성령 중 어느 쪽에 속해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육신에 속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나 성령에 속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영생”이란 어구는 “몸을 입지 않은 지복의 상태 속에서의 지속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열망했던 내세에서의 삶”을 가리킨다.

 

    갈라디아서 5장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심는 자들은 “내세”를 유업으로 거두게 될 것이고 말한다. 이것은 어깨를 움츠리고 하나님의 최후의 구원사역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현재 삶속에서 내세의 유업과 잇대어 있는 일을 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실존과 최종적인 실존 간의 연속성을 강력히 의미한다. 이런 사상은 갈라디아서 6장 14-16절의 의해 확증되는데 여기서 바울은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 창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부활신앙의 근저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반영하고 있다. 이 본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세계에 관한 비전과 그 미래의 빛 아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십자가에서 새 창조로 흐르는 사고에는 부활의 모든 표지들이 나타나있고, 게다가 부활은 정확히 새 창조로 간주되고 있다. 바울은 창세기 1,2장을 언제나 마음 깊숙이 염두에 두고 있었고, 통상적으로 최후의 구속행위를 피조세계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피조세계의 갱신으로 보았다. 이것은 바울의 소망이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소망과 동일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인하여 세상은 다른 곳이 되었고 자신도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구별은 이제 더 이상 타당성을 지니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갈라디아서는 부활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많은 대목에서 부활 관념이 근저에 깔려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은 “현세”를 대신하여 “내세”를 개시하는 하나님의 계획의 핵심이며, “새 창조”의 시작이고, 예수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율법의 저주를 처리하고,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예수의 사랑이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역사라고 말한다. 제2성전 시대에 부활의 은유적 의미는 이교도들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은유적 의미를 새로운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바울은 다른 노예상태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것은 “세상의 초등학문들”에 사로잡힌 인류의 노예상태이며, 율법의 저주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노예상태이다. 또한 바울은 다른 자유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것은 율법과 세상의 권세들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삶이고, 믿음의 삶이며,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삶이다. 그 삶은 새 창조에 속한 삶이며, 아브라함의 단일한 가족에 속하여 더 이상 인종적인 경계표지들이 불필요한 삶이다. 이런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의”가 최종적으로 수여될 장래의 그때, 즉 하나님나라가 온전하게 임하기를 열렬하게 소망한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성령 안에서의 “현재적인 삶”은 이러한 “내세의 삶”의 진정한 선취였다. 이것은 제2성전 시대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것과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유대적 세계관의 돌연변이로만 설명될 수 있다.

 

4. 빌립보서

 

   바울은 복음 전파를 마음과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성령의 도구로 본다. 바울은 하나님이 복음과 성령을 통해서 현재적 삶에서 이미 행하신 일이 최종적인 구원에 대한 보장이라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현재적인 삶을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여기서 육체는 썩어 없어지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존재론적인 부정적 함의를 지닌다. 바울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와 함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중간 상태에 대한 바울의 유일한 언급이다. 그에게 현재적 삶은 메시아라는 견지에서 정의되고 있고 장래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구원”이란 죽음을 피하는 것이나 혹은 죽으면 더 나은 삶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바울이 부활을 통해서 완성될 “부활의 삶”이라는 견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철저하게 사고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시민권의 성격은 거주와 장소가 아니라 신분과 충성에 대한 것이다. 로마의 시민으로서 식민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임무는 로마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규칙에 따라 식민지에 사는 것이었다, 그들이 종종 필요로 했던 것은 로마로의 여행이 아니라 황제가 로마로부터 와서 그들이 겪고 있는 지역적인 어려움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시민권과 관련해 사용하는 모형인데,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차원에서 작용한다.

 

   첫째로 이 모형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강력한 기능을 한다. 바울에게 영혼이 몸이라는 감옥에 갇혀있고 거기서 벗어나서 자기가 왔던 본향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사상은 히브리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라 피타고라스나 플라톤에게서 온 것이다. 바울의 진술의 핵심은 몸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유를 포괄하는 메시아의 권세를 통하여 만들 새로운 세상에서 그의 백성들에게 갱신된 몸이 주어질 것을 의미한다. 현재 살아있는 자들은 죽은 자들과 마찬가지로 새롭고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욕된 것”에서  “영광스러운 것” 으로, 혹은 “썩을 것”에서 “썩지 않을 것”으로의 변화라고 말한다. 죽음에 종속된 현재의 몸은 “욕된 것”이며 “썩어질 것”이지만 현재의 몸은 벗어나야 할 감옥이 아니다.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은 변화이다. 바울의 사상의 근저에는 창조신학이 놓여있다. 메시아는 피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 참된 인간 존재로서, 이제는 나머지 피조질서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메시아는 피조질서로부터 도피할 필요가 없다. 메시아는 피조질서의 주님이시다. 메시아는 땅에서 하늘로 도피할 필요가 없다. 메시아는 자기 백성을 땅에서 하늘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땅으로 내려 올 것이다. 바울의 논증이 “주 안에서 견고하게 서는 것”에 맞춰져 있는 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간의 이러한 연속성 때문이다.

 

   둘째로, 이 모형은 정치적 차원에서 아주 다르게 기능하고 부활 자체와도 밀접하게 얽혀있다. 필로의 목표가 언제나 현재의 세상질서로부터 완전한 도피였다면 바울에게는 세상질서와의 대결이라는 의식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 예수가 하늘에서 땅으로 다시 오는 것을 표현한 “파루시아”는 아마도 바울이 가이사의 “파루시아”에 의도적으로 반대하여 형성한 표현일 가능성이 있다. 위기에 처한 식민지 도시를 구출하기 위하여 황제가 온다는 “파루시아” 개념은 빌립보 교인들의 체험 속에서 뚜렷한 공명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이 본문에서 예수에 대해 사용하는 기독론적인 호칭들(구주, 주, 메시아)은 무모할 정도로 반제국적인 것이었다. 특히 “구주”라는 단어는 바울 서신들 중에서 여기에서 유일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 단어는 지중해 세계 전체에 걸친 가이사의 주장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 본문의 근저에 있는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창조주의 계획과 그 성취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1장이 보여주듯이 그 계획의 성취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류라는 대리자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했다. 바울은 이 계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고 이제 그의 백성을 통해서 완성되고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바울의 사고 속에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세상을 지배하고자 한 가이사의 꿈에 의해서 희화화된 바로 그 실체였다.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주로 선포될 때, 그의 통치는 확장되어서 하나님이 죽은 자로부터 그를 일으키신 바로 그 능력을 통해서 피조 세계에 생명과 질서를 부여하고 독재자의 최종적 병기인 죽음 자체를 폐기하는 과업이 완성될 그 날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바울은 한 분 하나님의 참 백성이 새로운 몸을 입고 살아가게 될 미래를 기대한다. 그날에 현재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은 변화를 받을 것이며 죽은 자들은 새로운 종류의 몸을 입은 삶으로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이 참여할 “영광”은 현재의 굴복의 상태와는 대조적으로 메시아와 함께 공유하게 될 세상에 대한 미래적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울은 언제나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세상 간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몸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받게 되는 것이고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과제는 “주 안에 견고하게 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의 부활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아들의 통치를 통하여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바울의 더 긴 이야기와 잘 부합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의 모든 논증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그가 과거에도 참이고 현재에도 참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대체 어디에서 장차 그리스도인들이 욕됨에서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란 자신의 믿음을 가져왔겠는가? 이것은 바울이 예수의 몸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변화된 것이라는 믿음을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승귀는 죽음의 욕됨으로부터 부활의 영광으로 그의 몸이 변화되는 것을 포함한다. 예수의 부활과 승귀는 그를 세상의 참된 주이자 구주로 선포하고 또한 세운다. 달리 말하면 바울의 복음에서 가이사가 주가 아니라 예수가 주인 것은 바로 부활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미래적인 부활과 영광은 한 분 하나님의 참 백성으로서 그들을 신원하고 세상의 권세들에 대한 복음의 승리를 선포하게 될 것이다. 바리새파의 신앙에서처럼, 부활 신앙은 창조주이자 계약의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 관한 소식을 통해서 세상의 권세들에 도전하고 있다.

 

   빌립보서에는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전반부와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삶과 메시아 안에서의 그의 삶이다. 이런 대비를 유대교 세계 전체에 대하여 바울이 부정적인 판단을 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신의 새로운 삶 속에서 얻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히 메시아와 부활, 즉 그가 바리새인으로서 소중이 여겨왔던 쌍둥이 소망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폐기한 것은 율법 아래서, 육체를 따라 규정된 자신의 신분이지 그가 소중히 여겨왔던 소망들이 아니다. 여기에 폐기와 아울러 성취의 강력한 뉘앙스가 존재한다. 새로워진 유대인 혹은 성취된 유대인으로서의 삶에 관한 바울의 비전의 핵심에는 메시아와 부활에 관한 약속이 놓여있다.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에 상응하는 신자들의 부활은 아직 미래적인 사건이지만, 그 권능은 이미 현재의 삶 속에 심지어 고난과 죽음의 한복판에서조차 활동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서 드러났고, 예수가 다시 올 때에 완전히 드러나게 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 메시아를 믿고 아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통하여 이미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다. 아무리 고난 중에서 역설적으로 경험된다고 할지라도, 바울은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경험의 일부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울은 부활의 일차적인 의미는 여전히 미래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종말은 개시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새 시대의 실체는 부활절에 시작되었고 예수의 재림과 그의 백성의 최종적 부활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장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인 신분, 현재적인 정치적 태도, 현재적인 윤리적 삶을 제시하면서 또한 견고하게 떠받쳐주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이 장래의 부활은 메시아인 예수 자신의 부활에 견고하게 토대를 두고 있다.

 

5.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학자들은 흔히 바울의 다른 서신들은 신자들의 부활을 여전히 미래로 보고 있는 반면에 이 옥중서신들은 그것을 현재적 실체로 보고 있다고 말한다. 이 두 서신이 미래가 아니라 교회의 현재적 상태와 상황을 강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바울은 부활의 미래적 차원을 잘 알고 있었고, 개시된 종말론의 긴장관계를 실현된 종말론으로 만들어 버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경험과 최종적 소망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이 둘 다를 보고 있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상태라는 견지에서가 아니라 소유와 책임이라는 견지에서 “유업”이라는 장래의 소망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성령의 수여는 이미 보장되어 있지만, 아직 소유되지는 않은 장래의 유업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 바울은 기도 속에서 온전한 유업을 기다리는 교회의 현재적 위치를 송축하는데, 그 핵심은 예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역사하여 그를 다시 살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히시며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온 세상에 대한 메시아의 현재적 통치를 통해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고 있는 것을 본다. 바울은 이 모든 일을 하는 능력이 지금 그리스도인 안에서 역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장래의 소망은 현재적 실체 속에서 성취된다.

 

   바울은 출애굽 이야기와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권세들에 대하여 승리한 이야기를 한 후에 이제 인류가 보편적인 죽음으로부터 메시아 안에서의 삶으로 어떻게 옮겨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한다. 메시아 안에 있는 자들의 현재적 상태는 그들이 이미 메시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고 그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메시아와 관련하여 참된 것은 그 안에 있는 자들에도 참되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에서 “부활”의 은유적 사용에 대한 바울의 중심적 대답의 일부이다. 여기서 부활은 에스겔 37장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회복,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인류의 회복, 죄와 사망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을 가리킨다. 교회가 메시아의 부활과 자신의 궁극적인 새로운 삶 사이의 기간 동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실제적인 부활의 미래적 소망을 경시하지 않는 가운데 부활 언어의 은유적 사용이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삶을 가리키도록 각색된 것이다.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메시아 안에서 인류 전체가 통합되는 것에 관한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었는데, 여기서도 예수의 부활은 이런 큰 그림의 강력하게 암묵적인 토대가 되었다. 바울은 계약의 하나님이 메시아의 육체(죽음과 부활)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적대관계를 폐기하였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메시아 안에서 단일한 새 인류를 만들어 내었다고 말한다.

 

   부활의 이런 은유적 용법(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인 삶의 근거로서의 부활)은 바울이 인용하는 초기 기독교의 노래 또는 시에서 강력하게 강조된다. 빌립보서에서 현 세상의 어둠은 창조주의 새 날의 빛,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와 더불어 이미 비추고 있는 빛과 대비된다. 그리고 그 빛을 미래를 위해 유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속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이것은 실현된 종말론을 전혀 함축함이 없이 최종적인 부활을 여전히 미래에 둔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전히 싸울 싸움이 있고 원수들은 아직 최종적으로 패배당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의 부활 속에서 개시된 종말론은 승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골로새서도 신자들의 현재적인 은유적 부활과 아울러 여전히 미래에 실현될 소망에 관해 말한다. “하늘에 예비해 둔 소망”이란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망을 얻기 위해 땅을 떠나서 하늘로 가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은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들이 하늘과 땅이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될 새 시대를 기다리면서 준비되어 있는 곳임을 의미한다. 바울은 예수의 도래 혹은 재림을 예수가 “나타날” 때라고 즐겨 말한다. 이 나타남은 메시아와 그와 함께 다스리는 그의 백성의 실체, 즉 현재는 하늘에 감추어진 실체가 계시되는 때이다. 이것은 부활 자체, 미래적 소망이 온전히 실현되는 때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세례를 통하여 메시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신분은 이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은유적 용법은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심을 받은 “메시아 안에서의” 그들의 신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은유적 용법은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아의 영광에 참여함으로 미래의 문자적인 부활을 성취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의 토대는 메시아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이고 창조와 새 창조의 장자(firstborn)이라는 계시다. 골로새서 1장 15-20절은 예수의 부활을 세상의 창조와 병행으로 놓고, 예수의 부활을 창조주가 이제 이룬 일과 지금 이루어가는 일 , 즉 만물을 자기와 화해케 하는 일의 토대이자 기원으로 보고 있다. 이 본문은 일회적인 사건인 예수의 부활이 원래의 창조를 폐기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성취하는 행위임을 강력하게 말한다. 메시아는 태초에 만물이 그를 통하여 만들어진 그분, 그 안에서 만물이 서로 결합되어 있는 바로 그분, 만물이 그 안에서 그를 통하여 지금 창조주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 바로 그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둠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그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그의 아들 안에서 구속, 즉 죄 사함을 받게 함으로써 빛 가운데서 성도들의 유업에 참여하게 하였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새로운 출애굽이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의 오랜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이며 세상을 종으로 묶어 놓았던 권세들을 패배시킨 사건이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의도가 마침내 성취되는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생활양식이다.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에서 바울의 중심적인 주제들의 핵심적 요소는 옛 인류와 새 인류의 대비다. 전자가 메시아의 죽음을 본받는 세례를 통하여 폐기되었다면 후자는 메시아의 부활을 본받아 세례를 통하여 창조되었다. 바울에게 부활의 요지는 창조의 부정이 아니라 창조에 대한 재확인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백성은 “영광중에 그와 함께 나타날” 최종적인 그날 이전에 이미 이 새로운 창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재창조된 인류를 교회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한다.

 

6. 빌레몬서

 

   바울은 빌레몬에게 도망친 노예인 오네시모를 다시 받아들이라고 강권하면서 갈라디아서 4장 1-7절과 로마서8장 12-17절에서 사용하는 “구속”이라는 언어를 활용하고 있는데 이 두 본문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건진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빌레몬서의 서사에서 예수의 죽음에 관한 복음, 또한 예수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바울의 모습을 본다. 오네시모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빌레몬의 형제로 대우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두 사람은 모두 구속을 받아서 한 분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이다.

 

7. 로마서

 

(1) 서론

 

   로마서는 부활 언어로 뒤덮여 있기 때문에 만약 로마서가 이신칭의에 관한 최고의 서신으로 환영받지 않았다면 로마서는 부활에 관한 최고의 서신으로 알려지게 되었을 것이다.

 

(2) 로마서 1-4장

 

(a) 1장 1-17절

 

   그동안 1장 16-17절은 로마서의 주된 주제로 간주되어 왔고 주석자들은 로마서는 복음, 즉 이신칭의와 구원에 관한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런 석의의 주된 결점은 바울이 복음의 요약문으로 제시한 1장 3-5절의 내용을 무시한 것이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복음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신칭의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다윗 자손에 속한 이스라엘의 메시아인 예수가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주로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주목할 점은 바울이 예수의 신분에 덧붙이는 모든 의미는 그의 부활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윗의 자손 중 오직 한 사람만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였다. 바울은 바로 이것이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아들, 즉 메시아라는 표지라고 분명히 말한다. 예수의 부활이 다윗의 자손인 나사렛 예수를 진정한 메시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는 것이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요지다. 그러므로 복음은 가이사가 신의 아들이자 세상의 주로 선포된 세계에서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부활은 예수를 세상의 참된 통치자로 만든 표지였고 가이사는 세상의 참된 통치자를 흉내 낸 존재에 불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를 중심으로 다시 초점이 맞춰진 바리새파 고유의 신학이다. 부활은 언제나 고도의 정치적인 가르침이었고, 예수의 부활사건으로 인해서 세상의 권세들은 새로운 실체, 되살아난 유대적 소망, 고난을 당한 인자의 신원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것은 고립적이고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모든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부활이 예수를 메시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다고 생각한 것인가? 부활에 관한 제2성전기의 방대한 문헌에서 보았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도 메시아가 수치스러운 죽음을 죽는다든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한다든지 하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누가 죽은 자로부터 살아난다면 아마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선지자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적어도 메시아라고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예수의 삶, 행위들, 가르침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부활이 각각 독립적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진실로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그 결과는 분명히 나타났다. 이 두 가지 각각은 예수가 메시아이기 위한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둘이 합쳐질 때, 그것들은 충분조건이 된다. 메시아를 자처하고 말하고 행하고 죽임을 당한 사람의 부활은 그가 메시아임을 웅변적으로 모두 말한 것이다. 창조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세상 법정이 언도했던 사망선고를 뒤집음으로 그 판결을 뒤집어 놓았다. 예수가 진정으로 유대인들의 왕이었다면, 그는 메시아이며, 예수가 메시아라면 그는 진정으로 세상의 주이시다. 이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그의 보좌에 앉힐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 바로 그것만이 그러한 결과를 낳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진술이 예수가 완전히 죽은 후에 그 몸이 새로운 삶을 얻은 것을 의미하는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수의 몸의 부활은 이 서신의 토대이며, 예수가 주라는 복음의 핵심이고, 가이사에 대한 바울의 암묵적인 비판의 중심이며, 칭의와 구원의 교리에 관한 원천이다. 이런 연결고리를 볼 때에만 바울사상 전반에서, 특히 로마서에서 “부활한 메시아로서의 예수” 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b) 1장 18절-3장 20절

 

   이 본문 인간의 모든 악에 대항한 하나님의 공의의 계시에 관한 것으로서 많은 유대 사상과 마찬가지로 메시아 자신이 재판장이 될 최후의 심판 장면 속에서 구원받지 못한 자들과 구원받은 자들의 최후의 상태에 관해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참 백성의 장래에 관한 비전을 뚜렷하게 서술한다. 그들은 내세의 생명 혹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부활이란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영광과 존귀와 평안이 새 시대의 축복들의 목록이란 사실은 그가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구원을 받을 자들에 주어질 축복들은 그들이 부활한 몸으로서 그 축복에 참여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c) 3장 21절-4장 25절

 

  이 본문은 “하나님의 의”, 즉 아브라함과의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어떻게 예수에 관한 복음 속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는 방식이었으며 또한 그런 목적을 좌절시키는 것처럼 보였던 보편적인 죄를 다루는 방식이었다. 로마서 4장은 창세기 15장의 하나님의 약속과 아브라함의 믿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여기서 믿음에 대해 말하는 전체적인 요지는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한 성찰로부터 힘을 얻는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바울은 참 하나님과 생명을 주시는 그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인류가 회복되어 가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임을 나타낸다. 이 본문에도 바울이 예수의 몸의 부활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아브라함 및 그의 부활신앙과의 병행은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부활이 단지 예수의 영혼을 이 땅에서 하늘의 실존으로 옮기는 것이었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권능의 행위가 불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삭의 잉태와 출생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선취였으며 따라서 기독교신앙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브라함은 죽음만이 있는 곳에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칭의에도 참여한다. 여기서 진정한 문제는 예수의 부활이 어떤 식으로 해서 칭의를 확보하는데 특별한 도구가 되느냐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메시아,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 및 세상의 대표자인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신원이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믿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칭의는 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고, 그들의 죄가 이제 사해졌다는 하나님의 선포를 가리킨다. 이것은 “메시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고린도 전서 15장 17절의 맥락과 동일하다. 부활은 십자가가 단순히 메시아를 참칭하는 자를 제거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행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킨 하나님의 행위는 그 안에 칭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신원을 포함한 행위였다. 따라서 로마서 4장은 예수의 부활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이 죽음 자체를 이기고 생명을 주는 사건임을 보여줄 뿐 아니라, 계약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을 신원함으로써 자신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더 큰 이야기의 일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3) 로마서 5-8장

 

 (a) 5장 1-11절

 

  이 단원의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는 부활에 관한 바울의 묘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의롭다 하신 자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 예수의 부활은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가운데 이제 최종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살아가고 있는 영역을 구성한다. 

 

 (b) 5장 12-21절

 

    이 본문의 18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효과들에 관한 바울의 이해의 핵심에 접근하게 된다. 죄는 모든 인류에게 퍼져서 보편적인 죽음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를 위하여, 한 사람 메시아로 말미암아 계약의 약속들을 성취함으로써 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처리했다. 아담의 비극은 단순히 그가 죄와 사망을 세상에 들여왔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은 피조세계에 대한 창조주의 지혜로운 대리자들로 만들어졌는데, 인간들이 창조주가 아니라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기는 경우에는 이러한 인간창조 목적이 성취되지 못하게 된다. 로마서8장 29절에는 동일한 사고의 흐름을 이렇게 표현한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하심이니라.” 그래서 바울은 17절에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가 그 선물을 받는 자들이 “왕들로서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존재가 만들어진 목적이었고 또한 이것이 바로 가이사가 한 분 참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했던 그것이었다.

 

   이어서 바울은 18절에서 중요한 명제를 진술하는데 여기서 의로운 행위는 아담의 범죄를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는 예수의 순종적 죽음을 가리킬 것이며, 생명의 칭의는 예수만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원행위로서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 절에서 많은 사람들을 의인의 신분으로 만든 것은 한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라고 말할 수 있었다. 마지막 21절의 진술에서 은혜는 거저 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고 “의”는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런 하나님의 행위로 유익을 얻는 모든 자들은 영생을 유업으로 받게 된다. 이 영생은 당연히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러므로 부활은 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죄의 결과들에 대해서도 창조주의 대답이 된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인간이 물려받은 죄와 사망의 사슬을 끊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단일한 행위를 구성한다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5장 21절의 함의를 통하여 6장에서 세례 받은 자들의 신분과 그들의 행실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세례를 통하여 신자와 메시아는 동일시됨으로, 메시아의 부활은 신자들에게 문자적인 미래적인 부활과 은유적인 현재적 부활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바울이 묻는 질문들과 그가 제시하는 대답들은 그가 신자들의 미래적인 부활의 삶과 아울러 현재적인 부활의 삶을 단언하고 있다고 볼 때에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c) 6장

 

    세례를 통하여 메시아에게 적용되는 것은 이제 세례 받은 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메시아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었고 그 후에 새 생명으로 부활하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세례 받은 자들은 메시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가? 죽음 이후에, 그렇지만 부활 이전의 일종의 림보 또는 중간 상태에 있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바울은 여전히 미래적인 부활이 있고, 그 부활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개시된 종말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든, 지금의 요소가 얼마나 많이 있든지, 여전히 수많은 아직이 존재한다. 문자 그대로의 부활은 예수 외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그리스도인들은 실제로 일종의 중간 상태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 죽음과 삶의 중간쯤 되는 지점, 일종의 중립 지대에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에 관한 논증과 행실에 관한 논증들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세례를 통하여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되어 있다는 바울의 믿음에 근거하여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강력한 윤리적 논증은 세례 받은 자들은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을 변경한 것이기 때문에 마치 새로운 나라로 이주한 사람처럼 그 나라에 맞추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윤리적 논증이 행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그 근저에는 새로운 신분과 궁극적 목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까지 바울의 논증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중심적이고 결정적인 사건들이 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창출하며, 그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자들의 행실의 근본적인 변화라는 은유적인 부활을 통하여 그들을 문자 그대로의 미래적인 부활로 이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제2성전 유대교에서 은유적 부활의 구체적인 지시대상은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이었고,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죄로부터의 해방이었는데, 이것이 바울 서신에서는 그 지시대상이 죄에서 해방된 신자의 새로운 삶이라는 은유적인 부활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바울의 은유적 용법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제2성전 시대 유대교에서 제공된 준거 틀 안에서 새롭게 발전된 것으로서, 메시아에 관한 사건들과 메시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현재적 및 미래적으로 그러한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바울의 해석 작업의 결과였다. 

 

 (d) 7장 1절-8장 11절

 

   이 본문은 7장에서 율법에 대한 논증을 거쳐서 부활에 관한 가장 풍부한 해설을 담고 있는 8장 1-11절로 나아간다. 바울은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매어있는 것에 비유하여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율법에 의하여 아담과의 연대에 매여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자유롭게 되어 다시 결혼할 수 있듯이, 옛 사람이 메시아와 함께 죽으면 메시아와 결혼할 수 있게 된다. 새 신랑으로서의 예수의 부활은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이것을 바울은 계약의 갱신과 관련된 언어로 서술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의문의 묵은 것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예수의 문자적인 부활은 신자들 자신의 문자적인 부활에 대한 선취로서 은유적인 부활을 위한 맥락을 설정한다. 물론 문자적인 의미가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면 은유적 의미는 실제적인 거룩함과 섬김을 가리킨다.

 

   토라가 시내산에서 주어진 이래로 이스라엘이 토라 아래에서 계속적으로 살아가고자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바울은 정교하고 복잡하게 설명한다. 토라는 실제로 생명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토라를 받아들인 자들은 토라가 주어진 그 순간부터 이스라엘이 토라를 어기고 아담의 죄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부각시켜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결국 아담 안에 있었고, 율법은 공허하고 서글픈 메아리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죄와 사망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율법이 약속했던 생명을 줄 수 없었던 것은 율법 자체에 어떤  잘못이 존재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받아서 행해야 했던 인간 존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8장을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메시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는 위대한 선언을 한다. 그 이유는 부활을 불변의 준거로 사용하는 2-11절에서 주어진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백성의 대표자인 메시아의 육체에 죄를 정하고 생명을 주는 성령을 통해서 현재적으로 새로운 지향성과 사고방식을 주며, 궁극적인 미래에 있어서는 몸의 부활이라는 약속을 주었는데 이것은 토라가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예수와 신자의 부활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활을 이룰 때 사용하는 수단은 성령이다. 바울 사상 전체에 걸쳐서 성령은 장래의 유업, 즉 새로운 세상에 적합하게 될 몸에 대한 현재적인 보증이다. 또한 성령의 내주라는 언어는 제2성전 유대교 사상 안에서 성전에 쉐키나의 임재, 성막 안에 야훼의 임재와 맥을 같이 한다. 바울이 메시아와 그에 속한 모든 자들의 부활에 관해 말할 때 유대적 세계 안에서 설정하는 주요한 공명들은 성전의 재건과 새로운 방식으로의 율법의 성취였다. 메시아 안에 있는 자들, 즉 예수의 부활과 그들 자신의 부활 사이에 사는 자들은 부활이라는 터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육체가 아니라 성령에 착념하여야 한다. 그 결과 그들은 미래에서 뿐 아니라 현재에도 생명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이다. 바울은 세례를 통하여 신자 안에 일어난 근본적인 단절을 역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아담 안에, 즉 육신 안에 있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점차 자신의 논증을 현재에 썩어 없어질 몸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부활의 삶이 주어질 몸에 맞춘다.

 

 (e) 8장 12절-39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영광이 보장되고 실제로 한 분 참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거나 메시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된다. 여기서 영광은 메시아의 백성이 메시아 자신의 영광에 참여하여 누리게 될 위엄과 존귀를 의미하는 것을 보인다. 메시아의 영광은 그가  세상의 참된 주라는 것이고, 그러므로 메시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그의 왕적인 통치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메시아의 백성은 영광을 받기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러한 병행은 영광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부활과 동의어라는 것을 보여준다. 부활한 몸은 더 이상 썩음과 죽음에 종속되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부활한 자들은 새 창조 안에서 새로운 책임을 지닌다는 점에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약속된 새 시대에 관한 바울의 더 큰 그림에 속하는 이 부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부활의 때에 어떤 종류의 몸을 입을 것인지가 아니라 그들이 통치권을 행사할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울은 그 영역이 새로워진 우주 전체라고 역설한다. 우주는 죽은 자로부터 일으킴을 받아서 메시아의 영광, 즉 메시아의 왕적인 통치에 참여하게 될 자들의 행위를 통해서 새로워질 것이다.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화롭게 될 때에 찾아오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자유는 메시아 예수의 주권 아래서, 성령에 의해 주어질 부활 생명을 가진 모든 자들의 왕적인 통치로부터 결과적으로 주어지는 자유이다. 이 그림은 선하게 창조되었지만 썩어질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허무함을 일종의 노예상태로 보고, 따라서 피조물도 출애굽의 해방을 경험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바울은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백성도 새로운 세상의 탄생을 기다리며 수고하고 신음한다고 말한다. 성령은 현재에 있어 종말론적인 성취의 개시를 제공해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는 말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통치하게 될 장래의 영광에 미리 앞서서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논증을 마무리 하면서 하나님의 참 형상으로서의 예수의 신분과 그 형상으로 새롭게 된 예수의 백성의 신분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여기서 바울이 “예정”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창조주가 자신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자신의 창조질서, 공의, 갱신, 특히 무엇보다도 썩어짐의 종노릇으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대리자들로 세운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한다.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은 예비적으로 그의 영광에 참여하고, 몸이 부활할 때에 온전히 그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바울에게 부활의 은유적 현재는 언제나 부활의 문자적 미래와 닿아있다. 그런 후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그의 백성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사고의 흐름은 8장의 마지막 단락(31-39절)에서 송축으로 마무리 된다. 바울은 이 단락의 중심인 34절에서 예수의 부활이 기독교 소망의 모퉁이 돌이란 것을 강조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현재적 고난, 핍박, 순교는 하나님이 메시아를 통하여 부어주신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바울의 이런 확신의 분명한 근거는 사망 자체가 이미 패배 당했다는 것이다. 죽음은 재정의되지도 않았고, 다른 견지에서 이해된 것도 아니며, 단지 패배당한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전체의 가장 핵심중 하나로서, 창조주이자 계약의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바울의 믿음을 떠받치는 토대다. 

 

(4) 로마서 9-11장

 

    이 단원을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는 별개의 글로 치부해 버리고자 한 과거의 시도들, 그리고 예수와는 아무 상관없이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을 남겨주는 이 논증 속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최근의 주장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석의적 또는 신학적 토대가 없는 것들이다. 사실 이 논증 전체는 메시아로서 예수의 부활을 믿음의 초점이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기나긴 계약 역사의 절정이자 중심이라고 말하는 10장의 중반부에서 본격화된다. 바울은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은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메시아가 율법의 목표이며, 이 이야기 전체가 향하여 달려온 바로 그 지점이며, 약속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제2성전기의 유대문헌들은 신명기 30장에서 약속된 계약의 갱신이 일어나기 직전에 있거나 이미 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바울은 여기에 동의하였지만 판이하게 다른 이유에서 동의했는데, 그는 이 계약이 메시아 안에서 및 메시아를 통하여 갱신되었다고 본다.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예수는 주시다) 그리고 그것이 토대로 하고 있는 근본적인 믿음(창조주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셨다.)은 그러한 것들이 등장할 때에 계약갱신이 일어났고, 이러한 신앙은 그것을 가진 자들은 계약의 참된 지체들이자 수혜자들임을 보여주는 표지이다. 바울에게 분명히 예수의 부활은 계약을 갱신하는 계기였다. 이스라엘 하나님의 결정적인 행위인 그 사건에 대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갱신된 계약에 속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계약갱신의 사건으로서의 부활과, 그 갱신된 계약에 속한다는 표지로서 그 사건에 대한 믿음과 관련한 바울의 주장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의미는 그가 죽은 자로부터 예수의 몸의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5) 로마서 12-16장

 

   이 단원에서 논증의 틀은 현세와 장차 도래할 내세 간의 중복이라는 종말론적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12장1-2절에 의해 설정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돌입해 온 내세에 따라 살도록 권면하며 그들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본문에서 현세와 지금 돌입해 오고 있는 내세가 대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이 내세는 이미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순종에 대해 말하면서 육체가 아니라 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몸(소마)는 바울의 인간론에서 분기점 역할을 하는데, 이 몸은 결국 죽게 될 것이며 썩어 없어질 것이며 또한 몸은 여전히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몸은 다시 일으키심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바로 이 점이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의 몸을 예배와 섬김의 중심 지점에 위치하게 만든다. 몸은 창조의 선한 세계의 시공 속에서 현존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인간 존재 전체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본받아” 그리고 “변화를 받아”라고 말할 때, 바울은 예수가 현재의 몸을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화시킬”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는 빌립보서 3장21절의 언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장래의 부활 사건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현재 일어나야 할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마음에 적용하고 있다. 마음은 인류가 잘못되어 왔던 바로 그 지점이고 갱신되어야 할 지점이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합쳐져서 예수로 인하여 시작된 새 시대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변화는 골로새서 3장10절에서 말한 것과 아주 흡사하다. 새 사람은 창조주의 형상을 따라서 지식에까지 새로워지고 있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될 새로워진 인류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부활에 관한 언어를 이용하여 예수의 부활을 끌어오고 궁극적인 몸의 부활에 관한 약속을 끌어와서 새 시대 안에서 참된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근본적인 진술을 만들어 낸다. 이런 종말론적인 서론은 밤이 지나가고 낮이 이미 동터오고 있다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11절을 반영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낮에 속해 있기 때문에 밤이 아니라 낮에 행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 새 사람, 즉 메시아 자신, 부활하신 주 예수로 옷 입으라고 강권한다. 로마서 6장과 마찬가지로 이 본문이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부활의 터 위에 서있다는 믿음이다. 오직 이렇게 볼 때에만 육체를 따라서 행하지 말하는 명령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14장 1절-15장 13절의 긴 논증은 이 단원의 중심이자 로마서 전체의 신학적 결론이다. 이 논증은 단순한 실용적인 논증이 아니라 복음의 핵심적인 사건들에 토대를 둔 것이다. 바울은 이 본문에서 예수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분명한 진술을 “사나 죽으나 주께 속한” 그리스도인의 지위에 관한 진술과 결합시키고 있다. 예수가 “죽은 자와 산 자” 모두의 주라는 사실은 최후의 심판을 위한 토대이다. 이것은 죽었다가 부활한 메시아가 죽은 자와 산자의 주로서 그들을 심판으로 호출할 수 있는 지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종말론적인 구도는 문화적으로 다양한 기독교 집단들 간의 에큐메니칼적인 프로젝트를 복음 자체의 토대 위에서 진척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다윗 가문의 메시아로서 예수가 부활로 말미암아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메시아로 선포되었다는 복음에 관한 진술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서신의 마지막 부활 본문에서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전통적인 경계를 뛰어넘은 교회의 통일성에 관한 논증으로 끝을 낸다. 이렇게 해서 15장 12절은 1장 3-5절에서 시작된 거대한 원을 완성한다. 

 

    다윗 가문의 메시아는 부활을 통해서 참된 메시아, 만유의 주이자 재판장으로 인정되었다. 바울의 선교는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 믿음의 순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제 바울은 통일을 위한 근거를 다시 한 번 복음 속에서 찾고 있다. 바울에게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 칭의의 근거, 그리스도인의 순종적 삶의 토대, 통일성을 위한 동기, 특히 정사와 권세들에 대한 도전이다. 부활은 “또 다른 왕” 이 존재한다는 선언이고, 유대 성경에서 주어진 약속의 성취이며, 부활절에서 시작되어 최종적인 새 세상에서 완성될 소망 속에서 사람들에게 충성과 새로운 방식의 삶을 촉구하는 사건이다. 바울이 이런 모든 방식으로 부활에 관하여 말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예수의 몸의 부활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8. 간주곡 : 목회서신들

 

    목회서신들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에 대해 별로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소망과 관련된 분명한 본문은 디모데후서 2장에서 사람들에게 다른 것을 가르치는 두 사람에 대해 경고하는 내용에서 나온다. 후메네오와 빌레도가 가르친 것은 아마도 나중에 다른 분파들에게도 유행한 견해, 즉 이제 부활을 죽음 이후의 장래의 몸과 관련된 소망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단순히 현재적인 삶을 사는 동안 누릴 수 있는 영적 경험으로 해석한 견해인 것 같다. 아무튼 그들은 이런 저런 식으로 사람들을 기독교의 주류적인 소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임명된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한 반도들로 볼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미래의 소망에 대해 도전하고 있었다. 본문에서 디모데후서 기자는 하나님이 장래의 심판을 통해서 그에게 속한 자들과 아닌 자들을 분명하게 구별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목회서신에서 무덤 너머의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언급은 불멸에 대한 반복된 언급이다. 디모데전서 6장16절은 메시아 예수가 참 왕이라고 선언한다. 예수는 유일한 군주,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고 오직 그만이 불멸을 지니고 접근할 수 없는 빛 속에 거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불멸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는 헬레니즘적 견해와는 반대로 오직 예수만이 죽음을 통과하여 더 이상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간 유일한 분이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디모데후서 1장 10절에서는 예수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예수 외에 다른 사람이 불멸을 소유한다는 것에 대한 부정은 사망이 패배했고 위에 있는 새 생명이 예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열려졌다는 긍정과 대칭되어 있다.

 

   여기서도 부활 언어는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인 삶을 가리키는데 사용될 수 있다. 디모데후서 2장은 복음의 도전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는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다윗 가문의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그의 부활을 토대로 복음의 핵심으로 천명하고 있는 로마서 1장3-4절을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제 예수의 메시아 됨은 예수 자신의 부활에 의해서 확증되고, 이것은 그와 함께 살기 위하여 그와 함께 죽으라는 도전을 강화시킨다.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집약적으로 진술되어 있는데 여기서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란 어구는 부활을 가리키는 직접적인 방식일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정죄를 당해서 죽은 후에 살아남으로 하나님에 의해 신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영으로” 라는 말은 부활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가리키는 것이지 칭의가 일어나는 몸과 상관없는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목회서신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장래의 부활과 예수 자신의 몸의 부활 그리고 이들 간의 연결 관계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흔적을 보여준다. 목회서신들에는 부활에 대한 언급이 상대적으로 적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서신들이 말하는 것은 비록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지만, 다른 바울서신들에서 발견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9. 결론

 

   바울 서신에 대한 이런 개관으로부터 우리는 다음 다섯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바울은 부활에 대해 다양하지만 모순 없이 통합되는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상호연관 속에서 항상 불변하는 다음 세 가지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1)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 있는 행위로서의 메시아 예수의 몸의 부활 (2) 메시아에게 속한 자들의 장래의 몸의 부활 (3)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인 삶이라는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토대를 둔 장래의 몸의 부활의 선취. 바울은 몸의 부활을 확고하게 믿은 사람이었다. 부활에 관한한 바울은 이교도들에 반대하여 자신의 동포인 유대인들 편에 섰고, 다른 유대인들에 반대하여 자신의 동료인 바리새인들 편에 섰다. 또한 바울은 중간 상태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을 조심스럽게 자신의 신앙으로부터 유래한 새로운 언어로 발전시켰다.

 

  둘째, 부활에 관해 바울 서신들 속에서 유일하게 발견되는 변화는 메시아가 다시 오실 때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 바울 자신이 끼어 있을 것이라는 초기 확신으로부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으로 변한 것이다.

 

  셋째, 부활에 관한 바울의 견해들은 여전히 유대교 속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유대적 배경 안에서 바울은 적어도 다음 일곱 가지 두드러지게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의 개념들을 발전시켰다. (1) 바울은 자신이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서 새로운 단계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 메시아의 부활을 통해서 내세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유대교 내에서 쿰란 공동체도 개시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특정한 출발점을 제시하지 못했고 그들이 말하는 의의 교사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 부활이 신자들에게 장래에 그리고 현재에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대한 바울의 설명은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날카롭고 뚜렷한 초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죽음의 과정을 통과하여 그 너머에 있는 새로운 종류의 삶으로의 변화를 의미했다. (3) 바울은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을 가리켰던 부활에 대한 유대교의 은유적 언어를 창조주이자 계약의 하나님에 의한 은혜의 새로운 시대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4) 바울은 부활을 믿는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을 부활에 대한 자신의 사고의 확고한 토대로 삼고 있었다. (5) 바울은 육신(사륵스)과 몸(소마)라는 구별을 통해서 몸을 입은 현재적인 실존과 미래적인 실존 간의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확립할 수 있었다. 바울이“영광”을 하나님의 새 세상에서의 존귀, 특권, 책임을 가리키는 전문용어로 사용한 것은 유대교의 용어를 사용하되 그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 (6) 바울은 예수의 부활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그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최후의 심판에 대한 유대교의 교설을 새롭게 발전시켰다. 그것은 심판을 연대기적으로 둘로 구분한 것인데 십자가에서 이미 정죄함이 일어났기 때문에 메시아 예수에게 속한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새로운 교설이었다. 이렇게 두 단계의 부활은 예수가 이루신 일에 토대를 두고 마지막 날의 판결을 선취하는,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에 중심적인 틀이 되었다. (7) 유대교 전승으로부터 가장 두드러진 발전은 바울의 사상 속에서 부활이 차지하는 엄청난 분량과 빈번한 언급이다. 모든 점들에서 바울은 유대교적 전승 위에 확고하게 두 발을 딛고 있었고, 그것들을 메시아의 빛 아래서 다시 사고함으로써 중요한 발전과 수정을 만들어 냈다.

 

  넷째, 바울의 세계관 전체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유대교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있으면서, 예수 특히 그의 부활을 중심으로 극적으로 다시 사고한 것이었다. (1) 바울이 통상적으로 활용했던 표본적인 이야기들은 유대교 세계관의 토대인 창조와 출애굽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관점에서 그 이야기들을 새롭게 말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가 예수에게서 충격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그 목적지에 도달한 것으로 이해했다. (2) 이방선교를 비롯한 바울의 사도적 실천들은 모두 유대적인 세계관에서 자라난 것이지만, 복음의 사건들 특히 부활에 의해서 재편성되었다. 바울이 지금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 것은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3) 바울의 사역과 그가 세운 공동체들의 상징들은 바울 자신의 복음의 선포, 암호화된 세례 이야기를 포함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예수의 죽음 및 몸의 부활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4) 세계관적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들은 다음과 같이 쉽게 요약할 수 있다. (a)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예수를 부활한 주로 믿는 새 계약의 백성, 율법을 성취하는 백성, 한 분 참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전 세계에 걸친 가족이다. (b)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피조세계 속에 있다. 비록 피조물들은 썩어짐으로부터 해방을 고대하며 신음하는 가운데 있지만 피조 세계는 이미 부활하고 승천한 메시아의 주권 아래 있다. (c)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세계와 우리 자신은 아직 장차 우리가 될 모습으로 구속받지 못한 상태로 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메시아 예수 안에서 행하신 일을 모르고 있다. (d) 무엇이 해법인가? 궁극적인 해법은 만유 자체를 해방하고 참된 공의와 평화가 승리하며 모든 의인들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며 그때에 살아있는 자들도 새로운 몸으로 변화를 받는 창조주의 새 창조가 도래하는 것이다. 현재적인 해법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어서 그 강력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으로 은유적인 의미에서의 부활이 일어나는 것이다. (e) 지금은 어느 때인가?  장차 도래 할 새 시대는 이미 개시되었지만 현세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과 우리 자신의 부활 사이의 기간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바울의 비전 전체를 관통하고 있고 고난과 기도에 관한 그의 견해를 떠받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의 세계관은 모든 점에서 유대교에 여전히 뿌리를 두고 거기서 기본적인 영감과 범주를 끌어오는 동시에, 그것들을 예수의 부활 사건의 빛 아래서 도출되는 결론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발전되었다. 

 

   다섯째, 바울이 부활에 관한 유대적인 신앙들과 소망들을 이토록 철저하게 활용하고 있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부활에 관해 새롭게 말하게 한 것인가? 바울은 예언서들과 후대의 유대교 전승에서 말한 부활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부활의 은유적인 의미에서도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이란 현 위치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부활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그것을 자신의 선포의 모퉁잇돌로, 또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는 근거로, 나아가 자신의 세계관 전체를 수정하는 계기로 삼은 것인가? 이것은 절실한 역사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물론 분명하다. 바울은 예수의 몸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믿었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견해들은, 비록 유대교적 견해로부터 나왔지만, 이전에 그 어떤 유대인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전승이 바울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던 그 무엇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을 강력히 보여준다. 바울에게 부활은 두 단계로 일어나고 있었다. 먼저는 예수에게 그 다음에는 그의 모든 백성에게, 그리고 은유로서의 부활도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도덕적인 회복을 의미했다. 또한 부활은 원수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가 아니라 이방선교를 통해 믿음을 토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모두가 동등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부활은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다시는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었다. 부활 관념에 대한 이런 수정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바울이 예수에게서 일어났다고 믿었던 믿음에서 그것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6장 고린도 서신에서의 부활]

N.T. 라이트/RSG

2015-09-17 01:20:48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

제6장 고린도 서신에서의 부활: 서론

 

1. 서론

 

    예수의 부활과 그의 백성의 부활이란 주제는 고린도서신을 지배하고 있다. 고린도서에서 이 중심적인 논의는 불가피하게 다른 온갖 종류의 쟁점들과 뒤얽혀 있다. 부활과 관련하여 살펴 볼 중심적 본문은 고린도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4장7절-5장10절이다. 한 주제에 관한 바울의 길고 끈질긴 논증인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사용하지 않았던 몇 가지 이미지들과 전문적인 용어들이 나타나는데 특히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콘)”이라는 용어는 매우 논란이 많다. 고린도후서 4-5장에서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이것 역시 논란이 되어 왔다. 나는 먼저 이 핵심적인 본문을 제외하고 고린도전후서 전체를 폭넓게 개관함으로써 이 두 핵심 본문들이 고립된 논의가 아니라 고린도서 전체의 주된 주제에 관한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2. 고린도전서(15장을 제외한)에서의 부활

 

(1) 서론

 

   고린도전서에는 인간의 삶과 기독교적 성찰에 관한 복잡하고 현란한 목록들이 등장하는데, 그러한 현란한 목록들 안에서 15장과 부활이라는 주제는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15장은 이 현란한 목록들 가운데 하나의 주제에 불과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15장에는 교회 안의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나는 부활이라는 주제와 이 서신에서 다루는 다른 다양한 주제들과의 유기적인 연관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수년 전에 씨슬턴이 이것이 대한 대답을 제안했는데, 그것은 고린도 교인들은 모종의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하였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미 부활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15장은 이런 주장의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미래의 부활을 길게 논증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씨슬턴의 이런 주장은 점차 폐기되고 있으며 이제는 많은 학자들이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은 지나친 종말론이 아니라 오히려 불충분한 종말론이었다는 리처드 헤이스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고린도 교인들은 기독교와 이교사상을 혼합하려고 시도하였고 그들의 자랑하는 태도는 유대교적 스타일의 종말론이 이미 그들을 하나님의 최종적인 미래로 데려다 주었다는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들의 신앙을 이교 철학, 특히 스토아학파의 관념들과 결합시킨 것으로부터 왔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 이스라엘, 세계에 관한 유대적인 위대한 이야기들을 공동체적, 개인적, 우주적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치려고 했다. 그리고 바울은 이런 가르침 속에서 고린도 같은 도시에서 사회적 문화적 긴장관계로 생겨난 문제들에 대답해야 했다.

 

(2) 고린도전서 1-4장

 

    개인숭배로 인한 갈등의 문제를 다루는 바울의 방식은 복음의 토대로 돌아가는 것이고 특히 메시아의 십자가에 관한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메시아의 십자가 속에서 구현된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통해서 세상을 뒤엎었고 기대들을 혼란케 하였으며, 지혜로운 자들을 어리석게 하고 힘 있는 자들을 약하게 만들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부활에 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언제나 바울 메시지의 핵심이었지만, 이 경우에 고린도 교인들이 들을 필요가 있었던 것은 참 신이 스스로 연약하게 되어 세상의 권세를 이긴 계기로서의 십자가였다. 이 모든 것의 한복판에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는 고린도교인들의 부르심이 어떻게 일어났는가에 관한 바울의 교훈이 있다. 참 신은 그들이 지혜롭지도, 강하지도, 고상하지도 않은 때에 그들을 선택하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인들은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이 우주 속에 새로운 세계 질서가 돌입했고 신비가 벗겨지는 것과 같이 이 세상의 권세들에게 그들의 때가 끝났다는 것을 말해주는 소식이 전해졌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가르침, 그러한 지혜를 받을 수 있을까? 그들은 성숙한 자들, 신령한 자들이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을, 영적인(프뉴마티코스) 사람과 혼적인(프쉬키코스) 사람으로 대비하고 있다. 혼적인 사람은 그 의 삶이 현세에 의해 결정되고 단지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통상적인 혼(프쉬케)에 의하여 활동하는 사람이다. 성령은 완전한 새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미 확정되어 있는 미래로부터 오는 창조주 신의 선물이다. 그리고 성령은 미래가 결정적으로 침노(invaded)하였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여전히 덜거덕거리며 굴러가는 현세 속으로 돌입해(break into)오고 있다. 영적인 사람은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살아계신 신이 성령을 통해서 역사함으로 말미암아 기이한 새 시대의 새 진리들을 이해하고 바울이 그토록 나누어 주고 싶어 하는 신비, 지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여기서 “프쉬케”라는 단어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히브리어 “네페쉬”가 통상적으로 의미했던 것으로서 인간의 내적 삶이라는 관점에서 본 인간 존재 전체를 가리킨다. 이것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삶과 결부되어 있지만 그 자체로는 분명히 육체적인 효과들도 아니고 정신 과정들의 결과도 아닌 감정, 이해, 상상, 사고, 정서의 혼합물이다. 바울에게 “소마”가 공적인 시공간상의 현존이라는 관점에서 본 총체적 인간이고 “사륵스”가 썩어짐과 반역이라는 관점에서 본 총체적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로 

“프쉬케”는 개략적으로 “내적”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에서 본 총체적 인간이다. 바울의 요지는 이런 혼적인 사람은 여전히 현세에 속해서 내세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인격의 중심이자 사람이 참 신과 만나는 접촉점인 마음(카르다아)과 거의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는 인간의 “영”을 가리키기 위하여 “프뉴마”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영적인(프뉴마티코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살아계신 신의 성령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열어서 내세로부터 오는 진리와 능력을 받아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에게 개인숭배를 하는 고린도 교인들의 모습은 그들이 영적인 자들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혼적인 자들일 뿐 아니라 육적인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영적인 자들, 혼적인 자들, 육적인 자들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혼적인 자와 육적인 자는 둘 다 바울이 통상적으로 인간적인 사람들, 단순히 현세적 가치관에 의해 살아가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혼적인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인간적인 삶에 의해 활동한다는 관점에서 묘사하는 말이다. 고린도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책망은 그들이 영적인 자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육적이고 반역적인 존재들이며, 하나님의 미래의 모습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의 책망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종말론과 관련되어 있다. 터를 놓는 자와 건축자는 모두 그들이 한 일에 대해 판단 받을 날이 올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날에 어떤 공로는 불타 없어지게 될 것이고 어떤 공로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이미지를 통해서 바울은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 및 불연속성에 대해 생생하게 말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심판의 날이 장차 도래할 것이란 관념은 낯익은 것이지만 그 어디에서도 불에 의한 심판을 통해서 현세에서 행한 일과 창조주 신이 만들고자 하는 새로운 세상 간의 연속성에 대한 이토록 강렬한 인식을 보지 못한다. 잘 지어진 집들이 살아남게 된다는 것은 선하고 신실한 사도적 사역은 창조주가 의도하고 있는 장차 도래한 세상의 일부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장래의 부활로 인하여 현재적 부활 속에서 행한 일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메시아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상이 이미 시작되었고, 성령이 사람들과 교회들로 하여금 그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고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미래로부터 현재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일은 장래에도 살아남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서신들 전체에 걸쳐서 서술되고 있는 부활의 패턴이다.

 

    바울은 3장16-17절에서 이것을 성전 이미지를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데 신자들은 참 신의 성전이고 “셰키나”가 성전에 거하였듯이 그의 성령은 신자들 속에 거한다. 그러므로 성전은 마땅히 거룩한 것인데, 어떤 사람이 성전을 파괴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복음 전파는 새로운 성전, 사람들이 가다려 왔고 모든 열방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할 종말론적인 거처를 건설하는 것이고, 이 일은 바로 부활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다. 4장의 논증도 종말론적인 심판이라는 맥락 속에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판단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마지막 날에 있을 판단이다. 이렇게 이 서신의 긴 서론 부분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종말론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새 시대가 현재의 악한 시대 속으로 돌입해 오고 있는 까닭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적인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육적인 자들이나 혼적인 자들이 아니라 영적인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받아서 내세의 빛 아래서, 내세의 표준에 따라서 현세를 살아가야 한다. 이런 논증으로 시작되는 고린도전서가 부활의 몸에 관한 핵심적인 언어를 혼적인 몸과 영적인 몸의 구별에 초점을 맞추고, 또한 부활에 관한 전면적인 서술로 마무리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3) 고린도전서 5-6장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의 여러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근친상간의 문제였는데, 바울은 이런 자들을 심판하여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심판은 주의 날에 있을 장래의 심판에 앞서서 공동체 자체가 범죄자들을 치리하면서 행사하는 심판이었다. 그것은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들의 친교로부터 추방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그를 사탄에게 내어주어 그의 육체는 멸해지더라도 그의 영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육체적으로 죽은 후에 영혼이 구원을 누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공동체에 의한 현재적인 심판을 주의 날에 임할 장래의 심판과의 관련 속에서 바라본 것이다. 공동체의 현재적 심판을 통해서 최후의 심판의 진면목이 현재 속으로 투영된다면, 범죄한 그 사람이 회개에 이르러 구원을 받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분석과 비판의 핵심은 메시아적 유대교, 즉 메시아 예수를 통해서 재정의된 유대교 스타일의 표본적 이야기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세상과 타협해서는 안 된고 장래의 세상의 빛 아래서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바울은 유대교적 종말론의 기독교 판본을 그려내고 있다.

 

   그 다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 앞에서 소송을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바울의 비판의 핵심은 고린도 교인들이 기독교적인 종말론적 소망, 다시 말하면 메시아 예수를 중심으로 재편성된 유대교적 묵시론적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성도들이 세상을 판단하고 심지어 천사들 판단할 것을 모르느냐고 반문한다. 이 주목할 만한 진술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짐승들을 심판하고 열방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진다는 다니엘 7장의 본문을 반영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다시금 장래에 실현될 것으로부터 현재에 관한 결론들을 도출해낸다. 장차 도래할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의 법정 앞에서 서로 다투고 송사하는 것은 전혀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바울은 다시 성적인 문제, 구체적으로 매춘의 문제를 거론하는데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에 대해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나라”라는 어구는 메시아가 참 신과 그의 선한 피조물의 모든 원수들을 굴복시키는 자신의 사역을 끝마쳤을 때 오게 될 최종적인 나라를 가리킨다. 6장의 논증은 사람들이 현재의 몸으로 행한 일이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몸이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바울의 신앙에 의존해 있다. 현재의 몸과 미래의 부활할 몸 간의 연속성은 현재의 윤리적 명령에 무게를 더해준다. 14절(하나님이 주를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에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연결시키면서, 이 둘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13절에서 신자의 현재적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를 위하여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여기서 음란에 빠져 남용될 수 있는 현재적이 몸과 주를 위하여 존재할 장래의 몸 간의 연속성을 말하면서 현재적인 몸의 남용이 잘못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적 몸의 삶과 장래의 몸의 부활 간의 연속성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적으로 그들의 몸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종말론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전 이미지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며 “너희는 값 주고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너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것은 성령의 전인 신자의 현재적 삶이 성령이 보증하고 있는 미래에 닿아 있음을 의미한다.

 

(4) 고린도전서 7장

 

    바울은 7장에서 “현재의 때가 단축”되었으므로 신자들은 마치 그들이 세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인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동안 이 구절은 바울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을 정도로 메시아의 재림이 매우 임박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것이 당시에 지중해 일대를 뒤덮었던 심각한 기근과 환난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의 요지는 현재의 세상과 그 속에서 모든 자연스러운 삶은 결국 예수와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이미 시작된 세상의 질서로 대체될 것이라는 것이고 그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새로운 질서를 현재로 가져와서 그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5) 고린도전서 8-10장

 

    고린도 교인들이 제기했던 그 다음 문제는 우상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역시 종말론적인 이야기. 창조주의 선한 세계와 그것이 메시아에 의해서 어떻게 구속되었는지에 관한 유대적 서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메시아 안에서 그들이 얻은 신분을 따라서 포괄적인 책임을 수반하는 권리와 자유를 규율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의 근저에는 기본적인 창조의 유일신 사상이 놓여있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한 분 참 신이 현재 세상의 창조주가 아니라거나 새 창조의 위대한 행위를 통해서 현재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의향이 없다는 것을 함축할 수 있다. 바울은 이교사상의 통상적인 이런 이원론 속으로 빠져들기를 거부한다. 피조세계는 선하고 창조주는 그것을 재 긍정할 의향을 가지고 있다는 창조의 유일신 사상은 바울에게 이 문제를 지도하는 빛이고 15장의 부활신학의 토대였다.

 

   우상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해 바울은 서로의 양심에 대한 존중과 아울러 공동체 안의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제한해야 한다는 준칙을 제시한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고린도 교회를 대하여 몇 가지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복음의 진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 권리들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역설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복음 및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권리들을 포기하는 모범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목표는 분명히 부활이다. 바울에게 목표는 부활 속에서 약속된 새롭게 몸을 입은 삶이다. 그리고 현재의 몸의 훈련은 그러한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이어서 바울은 출애굽으로 시작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고린도 교회의 이야기와 병행 관계 및 연속적인 관계 속에 두고 있다. 병행관계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유월절 체험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아적 사건들 속에서 발생학적으로 반복되며, 기독교의 세례와 성찬은 홍해를 건넌 것과 광야에서의 만나 사건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연속적인 관계라는 것은 원래의 출애굽이 메시아 예수를 절정으로 하고 교회를 현재의 결과물로 하는 이야기 속에서 과거의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은 육체를 따른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새 공동체는 많은 다양한 배경들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전 세계적인 가족으로 이루어졌다. 바울은 여기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수를 중심으로 재편되었지만, 철저하게 유대적인 방식으로 창조주와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이 이 이야기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깨닫기를 원했다. 

 

(6) 고린도전서 11-14장

 

    다음 문제는 성찬에 관한 것인데 주의 식사를 거행하면서 패를 가르는 일이 생긴 것이다. 바울은 성찬 제정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성찬의 잔은 메시아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을 나타낸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앞 장의 출애굽 이야기가 서사적 연속 속에서 더 명시적으로 개진되는 시점이다.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새 언약”의 수혜자이다. 그리고 이 계약은 지금/아직이라는 종말론적 긴장 관계를 지닌다. 바울은 성찬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에게 성찬은 과거, 현재,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또 하나의 다리였으며, 성찬의 행위들은 십자가 사건을 되돌아보고 예수의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여기서 바울은 메시아의 몸으로서의 교회라는 개념을 전개하는데, 이것은 무작위로 선택된 은유가 아니다. 창조주 신이 예수 안에서 및 예수로 말미암아 이룬 일은 인류의 갱신,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에 만드셨을 때 의도하셨던 바로 그 모습으로의 갱신이었다. 그러므로 지체와 기관들이 원래 의도된 대로 움직이는 인간의 몸이라는 이미지는 갱신된 공동체의 삶을 묘사하는데 아주 적합하다. 현재적인 교회의 통일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메시아의 몸(소마 크리스투)의 지체들이 각각 자신의 영적인 은사들을 사용하여 마침내 부활로 주어질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을 선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영적 은사는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은사들을 영적인 몸을 위해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이 강조하는 교회의 통일성의 토대는 한 성령, 한 주, 한 신이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역사와 세계의 창조주이자 주이신 분이 결국은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것이라는 내용을 그 이야기 전체의 결론으로 삼는 15장과 닿아 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노래하는 13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지닌 지금/아직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삶을 장래의 하나님나라와 이어주고 있다. 교회를 하나로 묶어줄 것은 바로 믿음, 소망, 사랑이다. 13장은 15장과 더불어 고린도전서의 진정한 핵심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13장은 부활의 삶과 지금 여기의 삶 간의 연속성에 관한 최종적인 논의인 15장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3장의 요지는 교회는 하나님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폐하여지지 않을 것들 위에서 현재적으로 사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람은 폐하여지지 않을 것이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높이 평가되었던 예언, 방언, 지식은 폐하여 질 것이다. 예배의 질서와 치리에 관한 이어지는 논증도 이러한 표제 아래 있다. 이것도 궁극적으로 새 창조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고린도 전서 전체는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일어난 복음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런 과거의 사건들이 보증하고 있는 미래의 사건들을 토대로 해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고 있다. 메시아 예수의 부활, 그리고 그가 다시 오실 날에 이루어질 그의 모든 백성의 부활은 바울에 말한 모든 것들을 의미있게 만드는 주제이다.

 

3. 고린도후서(4장 7절-5장 11절을 제외한)에서의 부활

 

(1) 서론

 

   고린도 후서는 고린도 전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의미에서 온통 부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판이하게 달라진 상황에 맞추어서 논증을 제시하기 위하여 복음의 중심적인 사건들을 활용한다. 고린도 후서를 쓸 때의 바울의 상황에 대해 다음 두 가지를 언급할 수 있는데 첫째는 사도행전에서 암시하듯이 바울이 에베소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너무도 철저하게 압도를 당해서 자기가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했다. 둘째는 범죄한 자의 출교를 포함해서 교회의 엄격한 치리를 담고 있는 고린도 전서를 쓴 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불시에 방문했다가 고린도 교회의 일들이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처리되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 가운데서 바울은 부활의 복음만이 다시금 그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은 위로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에서의 부활의 역할은 고린도 전서에서의 그 역할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현재의 삶과 장차 올 세상의 삶 간에는 몸의 연속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까지 닿아 있는 이야기를 의식하며 사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의 요지는 상당히 다르다. 물론 바울은 미래를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를 미래를 합당하게 준비하는 때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 속으로 침투해 들어와서 그 어떤 수단으로도 불가능하게 보였던 소망과 힘을 준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두 서신 모두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미래적 소망과 그리스도인의 현재적 체험 간의 연속성이다. 그러나 고린도 전서에서는 이 움직임이 주로 미래를 지향하여 현재 부활을 향하여 애쓰고 분투하며 부활을 선취하기 위해 현재 무엇을 행할지를 발견하는데 초점이 있다면, 고린도 후서에서는 이 움직임이 현재를 지향하고 있고 예수의 부활과 그의 모든 백성에게 약속된 부활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의 고난을 이겨낼 비밀을 발견하고 있다.

 

(2) 고린도후서 1-2장

 

   바울이 당하는 고난과 그 가운데 받는 위로는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의 패턴을 반영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의 부활과 장래의 자신의 부활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고 그러므로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현재 역사하고 있고 그 결과들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종종 자기 백성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건져내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고난과 위로, 자신의 죽음과 삶이 고린도 교회의 고난 및 위로와 결부되어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메시아와 교회 간에 일어나는 고난과 영광의 주고받음 같은 것이 사도인 자신과 고린도 교회 간에도 일어나고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고린도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의 확신의 토대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신이 그 속에서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바로 그 이야기였다. 그것은 구약의 약속들에 뿌리를 두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미래를 내다보며 현재적으로 주어진 성령이 그 미래에 대한 보증이라는 이야기였다. 바울이 심대한 고난을 겪었지만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교회와 세상에 대하여 메시아의 복음을 보여주는 표지였다.

 

(3) 고린도후서 3장1절-6장13절

 

   이 단락에는 사도직에 관한 바울의 변론이 등장한다.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바울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 날카롭게 변론하고 있다. 그들의 말은 바울이 당하는 고난들, 그의 사역의 스타일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복음에 관한 그들이 견해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론하기 위해 선택한 이야기는 계약에 관한 이야기, 즉 모세에게 주어졌고 메시아로 말미암아 갱신되어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을 이룬 계약에 관한 이야기였다. 바울이 말하는 계약 갱신의 요지는 그것이 피조물 자체를 갱신하는 하나님의 의도된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사도적 사역은 고린도 교인들의 문화적 기대들, 그리고 아마도 바울의 대적자들의 신학적 도식들에 비추어 볼 때 괴상하고 심지어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새 계약과 새 창조, 모든 약속들이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이야기를 배운다면, 그들은 바울의 삶과 사역의 스타일이 참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고 계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일 뿐 아니라, 실제로 그것의 화신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위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이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실제로는 영광의 사역임을 역설한다. 이것은 옛 것과 새 것이라는 날카로운 대비를 지닌 대전환을 가져왔는데 계약 백성의 표지는 더 이상 율법의 돌판들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새로운 사역 방식이 도입되었고, 그 방식의 효력이 바울을 통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바울 사역의 특유한 영광이었다. 바울의 얼굴이 모세처럼 빛이 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의 사역은 성령이 생명을 주시는 사역이기 때문에 바울의 사역은 영광의 사역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모세의 사역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울의 사역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정죄가 아니라 칭의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속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울의 사역은 실제로 새 창조의 사역이기 때문에 이런 노선을 취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이 바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바울의 복음이나 그 복음을 선포하는 바울의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거나 잘못되어서가 아니었다. 이 중심적인 단원의 첫 부분은 새 계약과 새 창조의 토대를 놓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의 화해 사역을 통해서 일어나는 새 창조에 관하여 아주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계시한다는 것이 바울의 논증에서 토대가 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현재의 신자들의 새 생명은 메시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하고, 장차 오게 될 것의 선취로 간주된다. 이런 토대에서 볼 때, 서로를 판단하고, 특히 사람들의 사역을 평가하는 인간적인 기준들은 그 어떤 타당성도 지니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은 새 창조이고, 이 새 창조는 메시아 안에서 성취되었고 지금은 사도적 사역을 통해서 적용되고 있는 화해사역으로 말미암아 메시아 안에서 제시된 것이다. 절정은 5장 21절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의 의(디카이오쉬네 데우)”라는 어구는 신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갖게 되는 신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 계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새 창조를 탄생시킨 바로 그 신실하심이다. 바울은 그의 논증 전체에서 자신의 사도적 사역이 그러한 하나님의 계약적 신실하심을 구현하고, 그러한 새 창조를 구현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메시아가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약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구현되고 수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의 날이 미래로부터 현재 속으로 다가왔다고 역설한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부활 생명을 고난과 슬픔 가운데 체험할 수밖에 없는 이 현재에 옛 시대와 동터오는 새 시대 간의 긴장 관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의 패턴은 고린도 교인들을 그토록 혼란하게 했던 바울의 사역 속에서 수행되고 재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그것이 자신 안에서 구현되고 수행되는 방식은 고린도 교회가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영광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4) 고린도후서 6장 14절-9장 15절 

 

(5) 고린도후서 10-13장

 

   이 단락에서 바울은 다시 자신의 사도직 변론으로 되돌아간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들, 연약함이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도록 만든 일이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연약함 속에서 완성되는 주님의 능력, 바울에게 거처를 정한 메시아의 능력, 바울이 연약할 때에 그에게 속한 능력에 대해 말한다.  능력에 대한 바울의 이런 삼중적인 강조는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바울의 통상적인 언급과 잘 부합한다. 그것은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난 가운데 바울이 겪어야 했던 연약함은 바울이 메시아와 동일시되고 있는 바로 그 지점, 그러니까 메시아의 부활의 능력이 사도의 현재적인 삶과 사역 속으로 들어와서 성령에 의해서 여전히 장래에 그를 기다리는 부활이 선취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이다. 메시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사도적 사역 전반 특히 말 안 듣는 완고한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도적 치리를 위한 패턴을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의 핵심은 고린도 전서 4장 20절에서처럼 참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일으키신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 모든 백성을 장차 일으키실 하나님의 능력,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켜서 사도로 하여금 현재적으로 연약함과 동시에 능력 있게 해주는 바로 그 능력이었다.

 

4. 결론: 고린도 서신에서의 부활

 

    비록 문체와 언어상에서 주목할 만한 차이점이 있지만, 고린도 전서와 후서는 모두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하나로 수렴된다. 부활은 바울의 사상 모든 면면에 깊이 배여 있어서, 바울에게 부활은 단순히 여러 주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주제들의 뼈대와 구조를 이루는 주제로서 도처에 등장한다. 고린도 전서와 후서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로서의 부활은 근본적인 것이다. 이 두 서신에서 새 창조의 일부로서 사도 및 모든 계약백성의 장래의 부활은 명시적으로 표현되고 전제되고 있다. 이 두 서신에서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부활과 미래에 일어날 신자들의 부활 사이의 기간에 살아가는 삶은 전자를 토대로 해서 후자를 선취하는 방식으로 근본적으로 결정된다. 특히 고린도 후서에 나타난 고난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바울의 이상하고 충격적인 스타일의 삶과 사역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이 두 서신은 세계관적 질문들에 대하여 바울의 나머지 서신들과 동일한 대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준다. (1)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고대의 신앙 스펙트럼에서 볼 때, 바울은 이교도들과는 반대되고 유대인들과는 같은 편에 서있다. 바울은 현재의 성령을 신자들이 새로운 몸을 입게 될 장래의 부활에 대한 보증으로 보았다. 또한 이 서신들이 중간 상태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다른 서신들에 나타난 견해와 모순되는 내용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 삶과 미래의 부활의 삶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고린도 전서와 후서에서 극히 중요하다. 이것은 고린도 전서의 논증들이 의거하는 지점이고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사역을 역설적인 영광으로 해석하게 만든 개념이었다. (2) 바울은 이 두 서신 속에서 이 개념의 지속적이고 미묘한 은유적 용법을 사용하여 현재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도적 사역의 여러 측면들을 가리키기 위하여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상당히 발전시킨다. (3) 바울은 부활절에 정확하게 무엇이 일어났고 예수의 부활이 실제로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언제나 궁극적인 미래 및 그 미래의 현재적인 선취를 위한 모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은 단순한 소생을 뛰어넘는 새로운 몸의 삶으로 구성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것은 육체의 부패성이 폐지된 삶, 예수가 지금 하늘과 땅이라는 선한 피조세계의 두 차원에서 똑같이 거처하는 삶이다.

 

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7장 고린도 서신에서의 부활: 핵심 본문]

N.T. 라이트/RSG

2015-09-17 01:21:28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

제7장 고린도 서신에서의 부활: 핵심본문들

 

1. 고린도전서 15장

 

(1) 서론

 

   고린도 서신의 핵심적인 부활 본문은 고린도전서 15장과 고린도후서 4-5장이다. 고린도전서는 신자들의 현재적 삶과 신자들이 장차 약속받은 미래의 삶 간의 연속성에 관해 말하고 있고 결국 이 주제에 대한 논증은 15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결국 15장의 논증은 새 창조에 대한 논증이고 메시아에게 속한 모든 자들의 장래의 부활에 대한 해설이다. 그래서 이 본문 전체는 창세기 1-3장의 이야기가 그 배경을 이루고 있으며, 바울은 이 장 전체를 창조의 갱신, 그 초점으로서의 인간의 갱신에 관한 해설로 의도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대 세계에서 신앙의 스펙트럼이란 관점에서 볼 때, 이 본문은 이교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유대적이다. 왜냐하면 유대교 내에서 이 본문은 창조주 신과 그의 공의라는 쌍둥이 신앙에 토대를 둔 부활신학의 고전적인 예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의 틀 내에서 볼 때, 죽음은 침입자이고 창조주의 선한 세계를 파괴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창조주의 대답은 모종의 합의 또는 타협이 될 수 없다. 죽음은 메시아 안에서 패배 당했고 또한 패배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인간 존재의 어떤 부분이 죽은 후에 살아남아서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적인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새로운 삶이 주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현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은 현세의 삶과 미래의 삶 간의 연속성에 입각해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바울에게 부활은 언제나 몸의 부활을 의미했기 때문에 서구인들이 데카르트 이래 생각해 온 육체적인 것과 영적인 것 또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을 바울이 상정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증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미래 어느 때에 창조주 신이 이미 예수에게 이루어졌던 부활에 대응하는 새 창조의 행위를 수행하실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소망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바울의 논증의 토대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의 논증의 토대는 당연히 예수의 부활이다. 바울의 논증에서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갑자가 세상 속으로 돌입해 옴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며또한 메시아 안에 있는 자들의 장래의 부활을 보증하는 토대 역할을 하는 사건으로 제시되고 있다.

 

    바울에게 나타난 부활에 관한  발전과 수정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첫째, 부활의 때에 관하여 바울은 유대교의 기대와는 반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이 하나의 사건이지만 두 단계에 걸쳐서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먼저는 메시아의 부활이고 나중에는 그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이다. 둘째는 부활의 몸이 어떤 유형인가에 대한 것인데, 바울은 유대교적 설명을 뛰어넘어서 부활은 동일한 종류의 몸으로 소생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일정 시기를 통과하여 변화된 몸을 입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활에 대한 바울의 이런 주장은 바리새파적 세계관을 수정한 것이지만 창조주와 공의를 행하는 하나님이라는 유대적 견해를 강조하고 강화하는 방식이지 결코 그것들을 폐기하는 방식이 아니다. 바울의 이런 발전들과 수정들은 분명히 바울이 부활절에 예수에게 일어났다고 믿었던 것에 입각하고 있다.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은 장래의 부활을 위한 원형이고 모델이었다.

 

   15장의 논증은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한 것에 대한 대답으로 시작되었다. 부활에 대한 이런 부정이 계속된다면 부활 약속에 의거하고 있는 바울의 이전의 모든 논증들은 크게 손상을 입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5장에서 기독교의 복음에 관한 재진술로 시작하여 예수 자신의 부활에 대한 논증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논증의 토대는 창조주 신이 예수와 관련하여 행하신 일은 그가 예수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행하게 될 일의 모델이자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5장 도입부에서 복음이 예수의 부활에 닻을 내리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만일 예수의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복음은 헛된 것이 된다고 말한다.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종말론적인 사건의 시작이다. 예수의 부활은 첫 열매로서 장차 일어날 그의 백성의 부활에 대한 원형적인 모범이고 수단이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계획을 방해하는 사망을 비롯한 모든 원수들은 참 인간인 메시아의 신분과 직임으로 말미암아 패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활한 예수는 부활한 인간이 성령을 통해서 무엇으로 구성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한 새로운 몸의 썩지 않음을 강조하고,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의 부활 사건의 성격을 강조하면서 장래의 부활의 때에 관한 서술로서 논증을 마무리한다.

 

(2)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본문의 도입부는 공식적이고 엄숙하며 복합적이고 논쟁적인데, 여기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부활이라는 장래의 실제적인 사건의 근저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다수의 증인들이 있는 사건으로 언급하면서 자신이 예수를 본 것을 이런 일련의 현현 사건들 중 마지막 사건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부활한 예수의 현현 사건은 지속적인 환상들과 계시들 혹은 예수의 임재에 관한 영적인 인식들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 도입부의 서론에서 자신의 복음이 매우 초기의 교회 전승을 통해 자신이 받았던 복음이었고 오직 이 복음만이 기독교적인 삶에 형태를 부여하고 기독교적인 소망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자신이 만든 특유한 복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말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사도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토대 위에 서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바울은 복음에 대한 계시를 예루살렘의 사도들로 부터가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직접 받았다. 그러나 복음의 양식, 복음을 말하는 방식은 분명히 그에게 전해진 것이었고, 또한 이미 교회들에 전해진 것이었다. 이것은 어떤 공동체가 함부로 변경할 자유를 가질 수 없는 토대가 되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바울이 그것을 전해 받았을 때에 이미 정형적인 형태로 되어 있었던 가장 초기의 기독교 전승에 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정형 문구를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에게서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었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 정형 문구(3-4절;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서…….)에서 예수가 메시아(크리스토스)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 초기의 정형 문구에서 메시아라는 단어가 고유명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메시아라는 단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왕적 호칭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도 20-28절에서 메시아적 논증을 제시하면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왕적 통치에 관해 진술한다.

 

    이 정형 문구에는 가장 초기의 기독교적 확신이 나타나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죽음이 현재의 악한 시대가 지나가고 있고 예수에게 속한 자들이 그 시대에서 구원받는 전환점이 되는 것은 바로 예수가 메시아이기 때문이라는 확신이다. 갈라디아서 1장4절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던 죄의 처리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위대한 종말론적 전환점의 일부이자 핵심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죄를 처리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없다. 예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의 확인이다. 하나님이 죄들을 단번에 처리하실 것이라는 관념은 포로귀환, 계약갱신, 은유적 부활이라는 제2성전시대 유대교 전승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성경대로”라고 말할 때 이것은 메시아에게서 그 절정에 도달하였고, 죄로부터 구원과 죽음으로부터 구원(즉 부활)을 그 특징으로 하는 내세가 돌입해 온 이야기로서의 성경의 전체적인 서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예수는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살아났다”는 동사는 부정과거가 아니라 완료형인데 헬라어에서 완료 시제는 일회적인 사건의 지속적인 결과를 가리키는데, 이 경우에는 예수가 지금 부활한 메시아이자 주라는 영속적인 결과를 의미한다. 또한 이 동사는 수동형으로서 예수의 부활이 창조주 자신의 위대한 행위임을 나타낸다. 기나긴 성경의 서사 안에서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지점은 야훼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사하고 새 시대를 오게 하며 계약을 갱신하고 창조를 회복하는 시점이다. 또한 “ 사흘 만에” 라는 어구는 호세아 6장 2절을 반영하는 것인데 부활에 관한 랍비들의 언급 속에 자주 등장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그 어떤 시간차에 관한 언급은 초대교회가 예수가 죽었던 금요일 이후의 제 삼일에 뭔가  극적인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초기의 전승 속에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몸으로 부활했고, 이 사건은 성경의 이야기들을 성취한 것으로 믿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들이 있다. 

 

   그러나 바울 또는 초기의 전승은 단순히 메시아가 실제로 부활하였다고 선포하는 것으로 민족하지 않고 증인들을 등장시켰다. 부활한 예수는 게바와 열두 제자에게 그 후에 오백여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났다. 이 증인들의 명단은 바울이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의 체험 혹은 역사 너머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은유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 제시하는 증인들의 명단에는 사복음서의 모든 기사들에 아주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여자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여자들은 신뢰할 만한 증인들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일차 자료인 복음서에서 여자 증인들을 축출하지는 못했지만 부활 이야기가 교회 공식적인 전승으로 진술되었을 때 여자들에 대한 언급이 배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바울은 맨 나중에 자신이 예수를 본 사건을 게바, 야고보 등이 부활하신 예수를 본 사건들과 동일한 것으로 놓고 있는데, 이는 바울이 다른 사도들이 보았던 것, 즉 부활하신 예수를 자신이 직접 보았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를 본 것은 사도들이 예수를 보았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동일한 것이었지만, 자기가 열심 있는 유대교의 모태에서 찢겨져 나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광채 나는 얼굴을 대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3) 고린도전서 15장 12-28절

 

 (a) 서론

 

   바울은 부활과 관련하여 주된 도전에 직면하였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서 몇몇 사람들이 죽은 자의 부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이다. 분명히 여기서 논란이 된 것은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장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백성의 부활이다. 바울은 장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것은 결국 복음 선포 자체를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음을 논증한다. 바울은 논증에서 부활에 대한 그런 부정이 가져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그 후에 메시아의 부활로 시작해서 모든 백성의 부활이 어떻게 자연스럽게 도출되는지를 보여줌으로 반론을 전개한다.

 

 (b)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이 단락에서 바울은 장래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메시아의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 전체를 무너뜨리게 된다는 것을 논증한다. 바울의 기본적인 논증은 장래의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은 그들이 지금 앉아 있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임을 보여준다. 장래 부활이 없다면 사도들은 지금까지 헛소리를 한 것이고 그들의 말을 믿은 자들도 헛된 것을 믿은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만일 장래의 부활이 없다면 그들은 단순히 부활 및 예수에 관한 헛된 말을 믿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죄들이 해결되는 새 시대가 개시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부활은 창조주 하나님이 한 개인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부활을 통해서 악한 현 세대가 내세, 회복된 시대, 계약 갱신, 죄 사함의 시대로 대치되었다는 의미였다. 한 사건이 일어났고 그 사건의 결과로 세상이 다른 곳이 되었으며 인간 존재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 될 새로운 가능성을 갖게 된 것이다. 죄와 죽음의 밀접한 연관 관계를 전제한다면 이러한 신앙논리는 간단하다. 하나님이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이겼다면 죄의 권능은 꺾어진 것이다.

 

   장래의 부활에 대한 부정은 두 가지 끔직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첫째는 기독교 신앙의 통상적인 것을 망하게 할 것이며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도 망하게 될 것이다. 둘째는 현재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싸우는 사람들도 희망이 없는 장래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되고 만다. 이런 점들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부활이 장래의 지복 상태가 아니라 실제로 몸의 부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은 죽음 이후에 몸을 입지 않은 생존을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신이 창조한 선한 인간의 몸이 죽은 자체로부터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장래의 부활에 대한 전망이 없이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은 망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장래의 부활이 없다면 고난을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이 오직 이생을 위한 것임을 의미하게 된다.

 

 (c) 고린도전서 15장 20-28절

 

   이 단락에서 바울은 부활에 대한 더 큰 그림, 즉 예수의 부활과 그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에 관한 고전적인 진술을 제시한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현재는 첫 번째 부활에서 일어났던 일이 온전히 수행되고 참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가 될 미래를 가리킨다는 관점에서 종말론적 사고를 하도록 가르치는 대목이다. 바울은 메시아는 첫 열매, 즉 더 많은 수확을 보증해주는 추수의 첫 단으로서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장래의 부활은 참 사람, 즉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지니고 있는 분이신 예수의 신분에 의해 보증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참 사람으로서 창조주의 구원의 새 질서를 세상에 가져오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은 인류가 창조주의 질서를 세상에 정립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가 메시아로 세움을 받은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세상의 참된 주라는 것을 계시한 것이고, 그는 성경에서 메시아에 관하여 말한 대로 창조주 신의 모든 원수들을 정복할 때까지 다스릴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예수가 참 사람이요 메시아라는 것은 단언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이 더 큰 추수의 시작이라는 것과 그 추수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를 설명한다.

 

   실제로 이 본문은 옛 창조의 성취와 구속으로서의 새 창조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내내 창조와 인간에 관한 신학을 전개하고 있으며, 성경에 대한 간접 인용들은 예수의 부활이 그 이야기의 절정이고 의도된 목표지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이 세상을 위한 빛을 지닌 백성이 되는 것에 실패했을 때 계약의 하나님은 그 소명을 취소해 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메시아를 보내어 이스라엘 대신 행하게 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피조세계에 대한 창조주의 형상을 지닌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사명을 사람이 실패하자 창조주는 그 소명을 취소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 사람인 메시아를 보내어 이루게 하셨다. 하나님의 목적은 예수로 하여금 그의 새롭게 되고 부활된 인간의 삶을 통해서 인류나 피조물이 스스로 할 수 없었던 것을 행할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구약성서에 뿌리를 박고서 메시아에게 속한 자들의 부활에 관한 이런 서술을 통하여 재천명되고 있는 참 하나님, 인간, 피조물에 관한 신학이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승리를 통해서 만유 안에서 만유의 주가 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속에서 내 디딘 결정적인 첫 걸음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이다. 이렇게 새 창조의 신학 안에서 부활이란 주제를 발견할 때 이것은 분명히 몸의 부활을 가리킨다는 것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의 논증의 핵심은 세계의 질서 재편과 관련된 연대기적 순서와 존재론적(혹은 형이상학적) 계층구조에 대한 것이다. 바울은 시편 8편 7절을 통해서 질서 재편을 설명하고 시편110편과 다니엘서로부터 왕권 및 메시아적 통치라는 주제를 가져오는데, 이것은 메시아의 모든 백성에게 장래의 부활이 보증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가 세계를 창조주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 아래 복속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나라의 초점은 죽음 자체의 패배와 폐지이다. 그리고 죽음의 패배와 폐지는 새로운 삶, 새로운 몸을 입은 부활을 의미할 것에 틀림없다. 이렇게 해서 인간의 과제와 메시아의 과제는 서로 잘 부합된다. 참 사람인 메시아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가운데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제는 자신의 부활로 말미암아 메시아로 인정된 예수에 의하여 현세 동안에 수행된다. 궁극적인 목표는 창조주이자 계약의 하나님이 메시아를 다스리고 메시아는 세상을 다스리는 최종적이고 안정적인 질서의 수립이다. 이것은 메시아가 창세기 1장, 2장에서 인류에게 배정된 지위, 그리고 다니엘 7장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에게 배정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 지위는 죽음 및 죽음으로 이끄는 모든 권세들의 파괴적인 통치에 굴복한 세계에 창조주의 지혜로운 구원과 승리의 질서를 가져오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세계 속에 반영하는 지위이다. 그때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만유의 주가 되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시작된 패배를 토대로 한 장래의 죽음의 패배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현재의 악한 세대의 한 복판에서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개시된 내세의 최종적인 완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예수가 왕으로 나타나실 때 그에게 속한 모든 자들이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하게 될 때이다. 바울은 이 논증 전체를 통하여 창조주가 원래의 창조를 구원하고 새롭게 하는 사역을 완성시키는데 있어서, 메시아의 부활이 메시아의 모든 백성을 새로운 몸을 입은 삶으로 부활시키는 것의 출발점이자 수단임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로마서 8장, 빌립보서 2, 3장과 더불어 피조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고전적인 해설인 동시에 가이사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어린 고린도 교회에게 예수가 주이시고 그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될 것을 강력하게 상기시키고 있는 글이다.

 

(4) 고린도전서 15장 29-34절

 

    바울은 부활에 대한 부정이 실제로 기독교의 상징적 실천, 바울 자신의 사도적 생활양식, 기독교 윤리에 대해 무엇을 의미할지를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바울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관행을 언급하면서 그런 관행은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고 해야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수고를 언급하면서 장래의 부활이 없다면 자신이 그토록 많은 고난, 핍박, 수고, 학대를 겪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현재의 삶과 부활의 삶 간의 연속성, 장래의 삶은 그것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될 현재의 삶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동일한 연속성을 기독교 윤리 문제에 적용한다. 장래의 삶이 없다면 현재의 삶에서 온갖 악행들을 행하여 살아도 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장래의 부활을 기독교적 도덕의 궁극적인 토대라고 말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올바르게 생각하며 범죄하기를 그치라고 권면한다.

 

(5) 고린도전서 15장 35-49절

 

 (a) 서론

 

    이제 바울은 가장 어려운 문제에 분명하게 답해야 하는데 그것은 죽은 자들이 실제로 부활하게 된다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떤 종류의 몸을 입게 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논증하는 이 본문들은 창세기 1,2장에 토대를 둔 바울의 새 창조에 관한 신학의 일부이다. 바울은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 그들은 “하늘에 속한 자”, 즉 “마지막 아담” 메시아의 형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창세기 1장의 절정에서 창조주는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서 나머지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하고 창세기 2장에서는 아담에게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책임을 맡겼다. 바울에게 이 이야기의 절정은 마지막 아담의 생명을 주는 활동을 통한 인류의 재창조이다. 이것은 실제로 새로운 창세기, 갱신된 창조에 관한 의도적이고 치밀한 신학이다.

 

   바울은 이제 앞으로 말한 새 창조를 이해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서 피조 질서로부터 여러 범주들을 세워가면서 새로운 부활의 몸은 현재의 몸과 연속성 및 불연속성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몸의 부활을 논증하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한 소생과는 판이하게 다른 몸의 부활을 논증한다. 마지막 아담, 새로워진 인류의 시작으로서의 메시아는 새로운 인류의 모델만이 아니라 그런 인류를 창조할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그리고 그가 그런 권세를 행사할 때 그 능력은 바로 성령이다. 본문의 이런 요점들은 유대교 세계에 확고하게 속해있지만 유대교의 문헌들 중에서 이와 같은 것을 말한 본문은 전혀 없었다. 

 

 (b) 고린도전서 15장 35-41절

 

   어떤 수단 혹은 능력에 의해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가? 라는 질문에 바울은 씨앗을 뿌리는 경우에 창조주가 그 씨앗에 합당한 몸을 준다고 말하면서 메시아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논증을 한다. 그리고 수많은 다른 유형의 몸들이 존재하고 그 몸들 간에는 불연속성과 아울러 연속성도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만약 바울이 몸을 입지 않은 영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온갖 수고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바울이 이 논증에서 말하려는 요지는 창조주의 능력이 죽은 씨앗에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씨앗과 식물의 유비에서 바울은 연속성도 말하지만 불연속성을 말하는데 그 강조점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사역뿐 아니라 선물로 주어질 새 몸에도 있다. 바울은 부활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암묵적인 대답은 부활은 창조주의 역사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며, 부활을 통해서 입게 될 몸의 종류는 현재의 벌거벗은 몸이 온전하게 옷을 입는 모습과 같다는 것이다.

 

    부활에 대한 부분적인 유비로서 씨앗과 식물의 원칙을 설정한 후에 바울은 또 다른 흐름의 사고를 시작하는데 그것은 각각 고유한 위엄과 가치를 지닌 서로 다른 유형의 몸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주된 강조점은 ‘하늘의 몸’과 ‘땅의 몸’이라는 구별이다. 바울은 ‘하늘의 몸’이란 말로 부활을 별이나 해와 달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별과 관련된 불멸의 틀에서 설명하는 것도 아니다. 플라톤이나 키케로에게 별과 관련된 불멸에 대한 해석은 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였지만 바울에게 문제는 몸 자체가 아니라 몸 안에 거처를 정하고 부패, 욕됨, 연약함을 낳는 죄와 죽음이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영혼이 별과 같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혼(프쉬케)이 몸의 활동을 지배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바울에게 인간 곤경의 참된 해법은 몸의 활동을 지배하는 원리로서의 혼을 성령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c) 고린도전서 15장 42-49절

 

    이 단락은 지금까지 논증을 하나로 묶어서 새로운 부활의 몸이 현재의 몸과 어떻게 다를 것인지 그리고 이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압축해서 진술한다. 여기서 바울은 씨 뿌리고 추수하는 것에 관한 언어를 은유적인 의미로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썩고 없어질 몸과 그런 일들이 전혀 해당되지 않는 몸 간의 구별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렇게 부패하거나 죽을 수 없는 몸이 지니게 될 특징으로서 수치 대신에 존귀, 연약함 대신에 능력에 주목한다. 이것은 부활의 때에 인간들이 원래 창조되었던 그 모습이 되어서, 마침내 그들이 현재 알고 있는 부끄럽고 욕된 신분과 성품 대신에 그들에게 원래 고유하였던 영광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현재는 역설적이고 오직 믿음의 눈에만 보이는 창조주의 능력이 새 세상에서는 그의 백성의 새로운 몸들 속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 대비에서 혼적인 몸(소마 프쉬키콘)으로 뿌려지고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는다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 두 어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부분의 역본들은 바울이 새로운 부활의 몸을 비육신적인 그 무엇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의 서구인들에게 “영적”이란 단어가 지닌 문제점은 그것이 극히 오도하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데 있다. 계몽주의 이후의 주류의 세계관에 의하면 “영적”이란 말은 시공으로 이뤄진 세계와 중복됨이 없는 세계, 즉 머나먼 곳에 초연히 있는 하나님, 공적이거나 정치적인 사건들에서 물러나서 추구하는 사적인 영성과 같은 이신론적 특징들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어구에 대한 바울의 그동안의 용례를 볼 때 여기서 혼적인(프쉬키코스)와 영적인(프뉴마티코스)의 대비는 통상적인 인간의 삶과 성령이 내주하는 삶의 대비로 규정되어야 한다. 아마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고린도 교인들은 영적 은사들을 자랑하며 자신들을 영적인(프뉴마티코스)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영(프뉴마)가 아니라 혼(프쉬케)와 육(사륵스)의 혼합물이 들어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들이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들이었다면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하나님이 그의 영(프뉴마)의 사역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알았을 것이고 그들은 진정한 영적인 자들의 목표가 새로운 몸의 부활에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영위하고 있는 삶은 혼적인(프쉬키코스) 삶, 즉 통상적인 인간의 삶이었다.

 

   이 본문의 두 번째 주제는 당시에 통용되고 있었고 아마도 고린도 교회의 몇몇 신자들이 주장한 것으로 보이는 창세기 1,2장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단호하게 배제하는 것이다. 필로는 창세기 본문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창세기 1장의 첫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었고 창세기 2장의 흙의 티끌로 만들어진 사람은 땅에 속한 자라고 말했다. 필로에 의하면 하늘에 속한 사람은 비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썩어 없어지지 않았고 육신적인 속성은 땅에 속한 두 번째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대한 이런 읽기는 인류의 진정한 목표가 시공으로 이뤄진 물질세계를 떠난 하늘에 속한 첫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에게 창세기 2장에서 창조주가 아담을 살아있는 혼(프쉬케)로 만든 것은 두 번째 형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최초의 형태였다. 그러므로 지금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육신의 몸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성령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게 될 마지막 아담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창조의 세계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채 순수하게 비육신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할 주님이시다. 주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신에서 도피하여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되돌아가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부활한 몸을 입고서 계속해서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지니게 해줄 것이다.

 

    필로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새 창조라는 관점에서 창세기를 읽고 있는데, 새 창조는 이 장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부활할 때 어떤 종류의 몸을 입게 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바울은 그들은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 즉 참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생기가 불어넣어지고 활동하는 몸을 입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에 대하여 새로운 몸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라고 대답한 것이며, 그것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에 대하여 새로운 몸은 성령의 생명을 위한 적절한 그릇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혼적인 몸(소마 프쉬키콘), 즉 통상적인 종류의 인간의 몸, 통상적인 생명의 호흡에 의해서 활동하는 몸이 존재한다면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활동하는 몸도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창조주가 성령을 통해서 장차 이 일을 이루실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 즉 이미 아버지 아래서 세상을 통치하고 있는 분이 마침내 모든 원수들을 복속시키고 아버지께 세상을 바칠 메시아가 바로 그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몸을 가져다 줄 성령을 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새로운 형상에 참여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이렇게 바울은 창세기 2장의 안간 창조와의 병행 속에서 메시아 및 그의 부활을 통한 창조주의 새로운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다.

 

   메시아는 부활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으므로 그를 통하여 죽은 자들의 부활도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메시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아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고 여러 차이점들이 있지만 창세기 2장의 아담과 비견될 수 있다. 그는 창조주가 부활을 통해 만들고자 의도한 그런 존재들 중에서 첫 번째 모범일 뿐 아니라, 창조주가 그를 통하여 이 일을 이루게 될 바로 그러한 영적인 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는 생명을 주는 성령으로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는 사역을 행할 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창세기 2장7절은 단순한 증거본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보고 이제 말할 수 있게 된 더 큰 이야기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출현한 좋은 소식은 예수가 바로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미래, 즉 창조주가 계획한 새 시대로 들어가는 길을 개척한 선구자라는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더 큰 이야기, 하늘과 땅의 창조와 새 창조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 아담-메시아라는 대비를 발전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의 요지는 새로운 인간이 하늘이라 불리는 장소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 인간은 예수 자신이 현재적으로 생명을 주는 부활의 몸을 입은 채로 거하는 바로 거기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소망이 현재적으로 이 땅에 위치해 있고 성격상 땅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바울의 모든 논증은 필로만이 아니라 고대와 현대의 플라톤 사상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땅으로부터 도망쳐 마침내 하늘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하늘에 속한 생명이 현재의 땅에 속한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구속받은 자들을 하늘에 속한 자들이라고 지칭하였을 때, 이것이 그가 별과 같은 몸들, 비육신적인 영적인 몸들을 생각했다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다. 바울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것을 말하는 창세기 1장을 되돌아보고, 저 먼 궁극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메시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창조주의 형상으로 따라서 지식에 까지 새롭게 되고 대가족의 맏아들인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닮게 될 그날을 내다본다.

 

(6) 고린도전서 15장 50-58절

 

    이 마지막 단락은 흥분된 모습의 긴 송축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심적 강조점은 예수가 다시 나타날 때에 여전히 살아있는 자들이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몸의 변화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도래할 때에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몸을 잃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로부터 하나님의 미래를 위하여 요구되는 상태로 변화될 것이다. ‘변화된다.(알라게소메다)는 말의 취지는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은 몸으로 부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자들도 썩지 않은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몸을 입게 될 것이고 새로운 유형의 육체를 수여받게 될 것인데 그 육체의 주된 특징은 닳아 없어지거나 썩거나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재 살아있는 자들이 새 창조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다. 최종적인 몸은 썩지 않고 불멸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장 전체는 죽음과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패배에 대하여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쓰러진 원수 앞에서 의기양양한 전사와 같이 이제는 무력하게 된 죽음의 권세를 조롱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땅에 심긴 씨앗에게 몸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고 바울은 선언한다. 그리고 그 승리는 현재의 육신적인 몸이 폐기되거나 현재 상태대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욕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영광으로, 현재의 썩어지고 죽을 몸으로부터 썩지 않고 죽지 않는 새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임을 말하는 새 창조의 신학이다. 사실 이것은 죽음이 몸을 지배하는 것을 허용하고 인간 존재의 어떤 측면은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는 죽음과의 타협이 아니라 죽음의 패배이다. 바울은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주후2세기 이래로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바울이 정말 몸의 부활을 믿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혈과 육이란 통상적이고 썩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 실존을 가리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육신적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썩어짐과 죽음에 종속되어 있는 현재의 육신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이 어구는 부활할 필요가 없이 변화하기만 하면 되는 현재적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견고하고 요동치 말라”는 현재적 과제를 다시 이끌어 온다. 이 권면의 핵심은 썩어 없어질 육신을 지닌 현재의 삶과 썩지 않을 육신으로 살게 될 미래의 세계 간에는 불연속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근저에는 현재의 몸의 삶과 장래의 몸의 삶 간에 연속성이 존재하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재적인 삶에 의미와 방향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주 안에서 너희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만약 메시아의 부활이 아니었다면 바울의 선포와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 주님은 실제로 부활하였고 그러므로 복음 선포, 믿음, 지속적인 수고는 헛된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현재 주안에서 행해진 일은 하나님의 미래에까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부활 논의들에서 도출되는 실제적인 메시지이고 또한 정수이다. 

 

(7) 고린도전서 15장 결론

 

   장래의 부활이라는 사실 그리고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상태 간의 연속성은 고린도전서의 상당부분을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강조점은 바울이 창조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통 바리새파 유대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바울이 여기서 당시의 유대교에 전례가 없던 내용을 첨가한 것은 죽은 자들이 두 단계에 걸쳐서 부활한다는 것과 불연속성의 형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바울이 두 단계의 부활을 믿는 것은 메시아가 다른 어떤 사람들 보다 앞서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현재의 몸과 장래의 몸 간의 연속성은 물론이고 불연속성을 믿는데 이것은 그런 일이 예수의 부활에서 일어났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것만 믿은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이 어디서 왔고 십자가에서 죽은 몸과 부활한 몸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2. 고린도후서 4장 7절-5장 10절

 

(1) 서론

 

    고린도후서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토대를 두고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는 자신의 사도적 사역에 대한 바울의 긴 변론이 나타나있다. 오랜 세월동안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로부터 중대한 변화, 즉 몸의 부활을 포함한 유대교적 종말론에서 벗어나서 더 헬레니즘적인 모형으로 나아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이 주장을 고려하여 이 중심 단락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이 본문의 주된 취지는 현재를 미래의 빛 아래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특히 사도에게 현재는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는 고난에 찬 현재는 부활, 영광, 새 몸, 심판이 있는 미래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고난의 길은 계약을 갱신한 메시아의 죽음이 구체화된 것으로서 그 자체가 어느 정도 그 죽음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그것은 계약 갱신으로부터 초래되는 창조의 갱신의 시작이고 그 갱신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지시등이다. 이 중심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첫 단락에서 바울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들을 묘사하고 그 고난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현재화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4장7-15절), 둘째 단락에서 바울은 이런 경험 전체를 부활의 몸에 관한 미래의 약속과 결부시킨다.(4장16절-5장 5절) 그리고 세 번째 단락에서 바울은 다시 현재를 성찰하면서 미래의 빛 아래서 확신을 가지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왜 적절한지를 설명한다.(5장6-10절) 

 

(2) 고린도후서 4장 7-15절

 

   이 단락은 바울이 당했던 고난들, 즉 고린도 교인들이 그토록 부끄러워했던 것으로 보이는 고난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전해준다. 바울은 지금까지 메시아 예수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에 대해서 말해왔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자신이 영광의 구름을 따라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정반대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 설명은 자신의 사역이 예수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 즉 복음에 필수적인 구현이라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다. 이 논증은 부활이 현재적 삶에서 새로운 종류의 영적 삶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죽을 몸에 드러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는 본문이다. 여전히 죽기로 되어 있고 장차 쇠하여 없어질 현재의 인간의 그 부분조차도 현재에 있어서 부활의 표징들, 부활하신 예수가 이미 가지고 있고 그 백성이 언젠가는 함께 누리게 될 생명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을 싸이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버린바 되지 않고, 망하지 않고. 라는 일련의 말로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시편 116편10절을 인용하여 ‘우리가 믿었으므로 또한 말한다,“ 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단순히 자기가 전할 때에 진정한 믿음으로 말했다는 것이 아니라 시편 기자가 엄청난 환난을 겪으면서 인간의 모든 도움에 대해 절망했을 때 믿고 말했듯이 바울도 고난 가운데 믿고 말한다는 의미이다. 이 모든 것의 요지는 죽음의 덫으로부터 구원의 기쁨으로 옮겨간 이 시편 기자의 여정에 동참함으로써 바울이 예수가 이미 통과한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미리 통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고난은 부끄러워할 것이 아님은 물론이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시편은 15절에서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바울도 동일한 고백을 하고 있다. 죽음은 여전히 최후의 원수이다. 그러나 죽음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은 죽음보다 더 크시고 예수의 부활이 그 모델이 되었고, 또한 사도가 현재적 경험을 통해 미리 맛본 바로 그 구원을 대규모로 이루실 것이다. 바울에게 장래의 부활은 단순히 현재에서 일종의 영생을 위한 은유로서만이 아니라 그가 경험했던 고난과 죽음 가운데 누리는 생명과 기쁨 속에서 선취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3) 고린도후서 4장 16절-5장 5절

 

   바울은 왜 자기가 그런 고난 가운데 망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고린도교인들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하는 자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계속해서 설명해 나간다. 그가 제시하는 근거는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부활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계약의 하나님은 사도에게 그에게 약속된 새로운 실존을 준비시키고 궁극적으로 이루기 위하여 성령으로 역사하고 계신다. 따라서 바울은 마음의 눈과 생각을 그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가리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래의 실체에 고정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 그리고 그것과 현재의 삶의 관계에 관해 말하기 위해 바울은 겉사람과 속사람이라는 용어를 도입한다. 바로 이것이 일부 학자들로 하여금 바울이 그의 토대를 유대적 종말론에서 플라톤적 우주로 바꾸었다는 견해를 갖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그 자체로도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석의적으로도 보장되지 않는다.

 

   이어지는 5장 1-4절은 현재의 몸과 장래의 몸 간의 대비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여기서 바울은 현재의 몸을 지니고 있는 우리는 새 몸, 새 거처를 위로부터 입기를 갈망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현재의 인간들이 갈망하는 것은 벌거벗은 채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옷을 입는 것이라고 말한다. 벌거벗음이란 표현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몸을 벗어버린 영혼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여기서 바울은 현재의 몸 위에 새로운 몸이 입혀지게 될 최후의 상태, 메시아의 백성이 썩지 않을 새로운 종류의 육신을 입게 될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새로운 몸이 ‘하늘에’있다고 말한 것인가? 이것은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후에 ‘하늘로 간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울에게 ‘하늘’은 죽은 자들이 가는 것이 아니라 이 갱신된 세계 속에서 부활이 있게 될 그날까지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이 의도한 미래가 안전하게 마련되어 있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장래의 몸, 썩지 않을 영원한 집은 현재 땅에 반대되는 곳인 하늘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하늘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현재의 집(몸들, 옷들, 집들, 성전들, 장막들) 위에 그것을 덧입기 위해서는 그것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 겉사람과 속사람, 즉 점점 낡아져서 썩어 없어질 것과 새로워질 것 간의 대비는 내적인 생명 또는 영혼이 결국 몸에서 벗어나서 몸을 입지 않은 지복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바울은 궁극적인 몸의 부활 ,썩어지고 쇠해질 현재의 몸을 버린 후에 마치 새롭고 더 큰 옷을 기존의 옷 위에 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삶과 관련하여 기능하게 될 새 몸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미래를 향하여 가는 길은 고난과 성령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그런 미래를 선취하고 그 현재적 상태를 가리키는데 은유적으로 장래의 부활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그 현재적 삶은 ‘갱신’의 삶, 이고 ‘준비’의 삶이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곳을 볼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의 삶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적 소망에 관한 상세한 진술일 뿐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고난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과 그들 자신들을 위하여 내세의 삶이 이미 확보되고 보장되어 있으며, 비록 역설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분투와 슬픔으로 가득 찬 현재 속으로 이미 돌입해 오고 있음을 알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에 관한 진술이기도 하다. 새 계약의 사역자로서 바울은 그 계약의 수단(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현재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바울은 이렇게 몸의 부활을 중심적인 특징으로 하는 새 창조가 준비되고 있고 자신이 그것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다.

 

(4) 고린도후서 5장 6-10절

 

  바울이 장래를 바라볼 때 오직 두 가지 대안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당장 죽게 되든지 아니면 적어도 잠시 동안 계속해서 살아있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어느 경우가 되든지 마음이 든든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죽음 그 자체는 환영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몸을 입고 있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몸 안에 거하여 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 수밖에 없다. 바울은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몸 안에 거하느냐 아니면 몸을 떠나느냐가 아니라 오직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주변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토대로 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 무엇일까를 토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사도의 사역을 감당한다.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장래의 심판에 관하여 언급하고 그 날에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의 상태만이 아니라 몸으로 행한 행위들도 고려하게 될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유대교 문헌들과 초기 기독교 문헌들 중의 상당수가 장래의 심판과 장래의 부활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 말한다.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현재적 삶과 미래적 삶 간의 연속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합당하게 살고 사도의 표징들, 특히 고난과 소망을 나타내 보이도록 바울을 추동한 궁극적인 장래의 기대와 소망이다. 

 

(5) 결론

 

   결론적으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간에 바울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다. 물론 상황의 변화나 그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근저에 있는 이야기나 신학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바울은 부활절에 예수의 죽을 몸이 생명에 의해 삼켜져서 이전의 몸과의 불연속성과 연속성 안에서 새로운 몸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는 만유 위에 재판장이 되어서 심판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공의를 세상에 펼칠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믿었다. 우리는 바울 및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가 주이자 구원자이고 재판장이며, 가이사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해준 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현세와 내세 사이에 붙잡혀 있으며,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부활과 그의 모든 백성에게 약속된 장래의 부활 간의 긴장 관계 속에 있는 현재의 삶을 부활이란 은유를 통해서 말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3. 결론 : 바울에 있어서의 부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문제에서 바울이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아는 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를 발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바울이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바리새파, 묵시록의 저자들과 동일한 위치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참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장래에 몸으로 부활할 것을 믿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와 공의의 하나님으로서 메시아의 백성 안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는 성령을 통해서 이런 부활을 이루실 것을 믿었다. 이와 동시에 바울은 유대적 세계관 내에서 돌연변이로 이해될 수 있는 두 가지 것을 믿었는데, 첫째로 그는 부활이 역사적인 계기로서 둘로 구분되어 있다고 믿었다. 먼저는 메시아의 부활, 그 후에는 파루시아 때에 있게 될 그의 모든 백성의 부활이다. 둘째로 그는 부활이 몸의 부활일 뿐 아니라 부활은 몸의 변화를 포함하게 될 것임을 믿었다. 현재의 몸은 썩어지고 쇠해지며 죽음에 굴복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선한 창조주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죽음은 영원히 최종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주는 새 시대에 합당한 새 세상과 새 몸들을 만드실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구체적이고 육신적인 사건들, 특히 세례와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혹은 속사람의 갱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활에 관한 언어를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유대교에서 포로귀환을 가리키기 위하여 부활이란 언어를 은유적으로 사용한 것을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부활 관념을 영적인 것으로 전환시킨 것이 아니고 또한 지금/아직 이라는 긴장 관계에서 벗어나서 더 온전하게 실현된 종말론으로 나아간 것도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존재론적으로 이원론적인 세계관 내에서 이해된 영적인 경험을 가리키기 위하여 부활 언어를 후대의 영지주의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경향성으로 나아간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예수의 가장 초기의 제자들의 경험과 신앙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의 부활로 시작해서 모든 신자들의 부활로 끝이 나는 역사적 이야기에 속한다는 것과 첫 번째를 이룬 하나님의 성령이 두 번째도 이룰 것이고 지금 현재에도 그 첫 번째 사건을 선취하고 보증하는 사역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한편으로는 유대적인 것을 말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떤 유대인도 말한 적이 없는 것을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러한 유대교 내부로부터의 발전들, 이렇게 새롭게 설명된 부활신앙들을 출현시킨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이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상했던 그런 부활도, 민족의 회복으로서의 은유적 부활도 일어나지 않았다. 바울 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면 그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신앙과 소망을 표현한 이유는 설명될 수 없다. 바울이 메시아의 부활의 몸이 분명히 이전의 몸과 동일하면서도 새로운 종류의 생명으로 살아난 흥미로운 다른 몸이었다고 믿지 않았다면 신자들의 장래의 부활에 관해 그가 그런 방식으로 견해를 발전시킨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8장 바울이 예수를 보았을 때]

N.T. 라이트/RSG

2015-09-17 01:22:07


하나님의 아들의 부활

제2부 바울서신에 나타난 부활

제8장 바울이 예수를 보았을 때

 

1. 서론

 

   바울의 다메섹 사건 이야기는 바울 자신의 글 속에서 세 번, 사도행전에서 세 번 나온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다메섹 도상 사건에 대한 장엄한 묘사는 바울 자신이 마지못해 짤막하게 언급한 것을 읽어 왔던 사람들의 상상력에 현란한 색채를 부여해왔다. 그 동안 이 사건은 바울의 회심 사건으로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회심이란 말이 바울의 체험을 가리키는 최선의 용어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종교를 바꾼 것이 아니라 그가 항상 예배해 왔던 신으로부터 더 온전한 계시를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바울의 회심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에게 일어난 일과 그 이후의 바울 신학의 형태 및 내용과의 관계를 부각시켜왔다.

 

  바울의 회심에 관한 지난 두 세기에 걸친 논의들은 당시에 일어난 일이 ‘객관적’인 체험이었느냐 아니면 주관적인 체험이었느냐 하는 문제로 되돌아오곤 했다. 종교에 대한 모더니즘적인 개념은 또 다른 세계로부터의 계시들에 대한 모든 보도된 체험을 포함한 종교적 체험을 내적인 것으로 생각해왔다. 이것은 18세기 이신론의 노선을 따라서 하나님 또는 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공간. 시간, 물질의 세계와의 접촉으로부터 제거했던 고전적 계몽주의 이후의 패러다임의 일부이다. 그러나 주후1세기 유대인들은 사물을 그런 식을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역으로서의 하늘은 모든 점에서 실재하는 것이었고 땅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들 자신의 실체, 마음, 사고, 감정에 대하여 외부적인 것이었다. 

 

   아울러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구별도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물론 외적인 실체와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단순히 심리적인 또는 생리적인 과정으로 생긴 의식 상태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땅에서든 하늘에서든 외적인 세계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았다는 주장을 관련된 사람의 의식 상태라는 관점에서 설명할 수는 있다고 예단하는 것은 자의적이며 역사적으로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에게 심오한 영향을 미친 그 무엇을 보거나 들었다고 말할 때, 이것은 그가 단순히 그 어떤 객관적인 대상이 없는 종교적인 체험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체험은 해석된 체험이지만 모든 체험이 해석이라는 관점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2. 바울 자신의 설명들

(1) 갈라디아서 1장 11-17절

 

   바울은 다메섹 도상 이야기 자체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경우에 서로 다른 특정한 요지를 말하기 위하여 그 사건에 대하여 언급한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에 대한 비난에 맞서 논증하면서 자기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 같은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의 위임을 통해서 직접 복음을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바울은 이 순간을 두 번이나 ‘계시’(아포칼립시스)라고 표현한다. 아포칼립시스라는 어근은 이차적으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진리 자체를 드러내 보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단어는 이전에는 감추어 있었던 것, 특히 하나님의 실제의 영역인 하늘에 숨겨져 있었던 것, 즉 인간의 영역인 땅에서는 통상적으로 볼 수 없지만 특별한 상황들 아래서는 볼 수 있는 것을 돌연히 드러내 보였다는 뉘앙스를 지닌다.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마지막 날에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던 그 무엇이 미리 앞서서 계시되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복음은 메시아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다시 살아나서 세상의 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의 계시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계시 안에서 및 이 계시를 통하여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살아나셨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2) 고린도전서 9장 1절

 

   고린도전서 8장1절-11장1절에서 바울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에 관한 논증 안에서 자신의 삶을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한다. 바울은 사도로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바울에게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도직의 증거는 사도적 사역이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주 예수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사도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계시적 경험들을 주로 “보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기독교적 관습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를 본 것이 참이라고 믿고 있고 또 그것이 참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바울에게 이것은 그를 사도로 세웠고 두 번 다시 반복될 수 없는 일회적인 최초의 ‘본 것’이었다. 바울에게 나타난 부활 현현은 마지막 현현이었다. 

 

(3) 고린도전서 15장 8-11절

 

   바울은 교회에서 원칙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증인들로서 부활하신 예수를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목록을 제시한 후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신에게도 보이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하는 ‘본 것’이 사적이거나 내적인 체험이라는 의미에서 비육신적인 것이 아니라 통상적인 육안을 통해서 실제로 본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강력하게 나타낸다. 또한 ‘맨 나중에’라는 어구는 적어도 바울에 관한 한 그가 부활하신 예수를 본 것은 끝나게 되어 있던 일련의 사건들 중의 일부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그것은 아무나 언제든지 겪을 수 있는 지속적인 영적 체험이 아닌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한 체험이었다. 이 구절 전체가 무언가를 보았고 인정할 수 있는 증인들이 존재하는 공적인 사건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5장 나머지 부분은 비육신적인 부활을 말하지 않는다. 바울이 ‘예수가 나타났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예수가 바울의 마음이나 생각 속에 나타났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육신의 눈과 시각에 몸으로 부활한 실제의 인간 존재로서 예수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제시해준다. 

 

(4) 고린도후서 4장 6절

 

   여기서 바울이 언급한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전제하는 체험이다. 이러한 맥락은 바울이 자신의 독특한 체험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적인 그 무엇을 말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바울이 자신의 최초의 회심 또는 소명 체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체험 속에서 계속해서 불변의 요소인 그 무엇이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은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사람들이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본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주를 보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문자적인 ‘보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새로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마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광채는 눈에 보이는 광채가 아니고 또한 내적인 체험의 차원의 밝음도 아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해 인식되는 조명이다. 바울이 자신의 회심 때에 보았던 예수의 외적인 실체를 단언하는 김세윤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이 본문을 왜곡하여 그것이 바울이 체험한 동일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5) 고린도후서 12장 1-4절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로 하여금 그의 사도 자격에 대한 모종의 이력이나 공적을 진술하라고 강제하여 왔고 바울은 마침내 그렇게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울이 겪은 기이한 영적 체험에 관한 설명이었다. 바울은 자신이 특별한 종류의 탈혼 체험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그에게 항상 붙어 다녔고 기도를 해도 제거될 수 없던 ‘육체의 가시’였다. 여기서 잠시 언급된 탈혼 체험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했던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연대기적으로 너무 늦고 또한 다른 범주에 속한다. 바울은 이미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본 것을 그 이후의 체험들과는 다른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를 처음에 이례적으로 본 것을 그가 이후에 겪은 통상적인 및 이례적인 기독교적 체험들과 구별하고 있다.

3.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회심과 소명

 

   사도행전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에 대한 강력한 증언이자 로마제국 내에서의 기독교 신앙의 합법성을 지지하려는 의도로 기록되었음이 분명하다. 누가는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도 세 번 말하고 있는데, 그 기사들은 모든 점에서 서로 잘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런 불일치는 누가가 이야기에 흥미를 더하기 위하여 문체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헬레니즘적 관습을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이 기사들 간의 주된 차이점은 누가가 각각의 경우에 상정하고 있는 청중이라는 관점에서 쉽게 설명된다. 첫 번째 기사에서 누가는 바울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그가 핍박자로부터 전도자로 변화되었는지를 설명한다. 두 번째 기사에서 군중들의 폭력에 직면해있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자신이 정통 유대인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왜 그가 이방인들에게로 가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세 번째 기사는 아그립바2세와 버니게 앞에서 심문을 받는 가운데 바울이 당시의 유대교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이었던 이 왕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누가의 의도는 첫째로 독자들이게 알려져 있을 수 있는 환상들과 계시들에 관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반영하려는 것이고, 둘째는 바울이 겉보기에는 전통적인 유대교에 반기를 든 인물로 보일지라도, 그가 지금 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신에 의해서 진정으로 위임받은 것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의 근저에 있는 누가의 목적은 바울을 이스라엘 역사의 선지자들 및 선견자들과 동일한 반열에 올려놓고 또한 바울을 회개하고 돌아서서 새로운 길로 간 이교도들과 나란히 놓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들은 누가가 바울의 새로운 삶과 사역을 위해 변론한 것이었으며 또한 자신이 의도한 청중에게 말하고자 하는 특징을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바울에 관해 그려낸 초상이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바울 자신의 기사들 또는 정경 복음서들에 나오는 부활절 이야기들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역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준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를 보았다고 말하고 있고 그것은 여전히 일차적인 역사적인 사실로 남아있다. 사도행전은 이 역사적 사실을 자신의 청중들에게 특정한 해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회심에 관한 역사적인 설명은 반드시 이런 토대 위에서 진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4. 회심과 기독론

 

   다메섹 도상에서 일어난 체험은 바울을 ‘메시아직’과 같은 어떤 중간적인 단계 없이 곧바로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인정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김세윤은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비주의적 환상으로 바울이 생각했던 것의 일부였다고 주장하면서, ‘아담 기독론’과 ‘인자’에 관한 다니엘의 환상을 중추적인 관념들로 삼는 사고의 틀 속에서 해석하였다. 김세윤은 다메섹 도상의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이 분명한 제2성전시대 유대교라는 맥락을 배제할 정도로 바울신학의 모든 부분을 단순히 다메섹 체험으로부터 끌어내려고 하는데 이는 위험한 시도다. 캐리 뉴먼은 다메섹 체험의 유대교적 맥락을 훨씬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는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이스라엘 회복의 일부로 약속되었던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로 해석했다고 주장했다. 김세윤과 뉴먼의 주장은 바울에게 실제로 일어난 사고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믿음을 갖게 된 계기에 대해 언급한 말들이나 그가 기독론과 관련하여 예수의 부활을 사용하고 있는 방식을 볼 때, 바울의 다메섹 체험은 이스라엘의 신이 예수가 옳다는 것을(즉 예수가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것을) 입증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바울은 기독교가 그릇된 메시아 분파라고 간주하여 핍박했고 이런 바울에 맞서서 이스라엘의 신은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생생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본질적으로 메시아적 의미에서 ‘그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다. 부활은 예수가 다윗의 아들, 이새의 뿌리, 이스라엘의 메시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부활을 통해서 이렇게 예수가 메시아로서 신원되었다면 몇 가지 사실들이 즉시 잇달아 나온다. 예수가 메시아라면 예수는 이스라엘의 참 대표자라는 것, 시대들의 대전환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부활은 둘로 나뉘어서, 먼저 첫 열매인 메시아 예수의 부활이 있고 나중에 그가 돌아올 때에 메시아 백성의 부활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가 메시아라면 성경적 뿌리들로부터 예수가 세상의 참된 주라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는 그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꿇게 될 주님(퀴리오스)이다. 그는 짐승들 위로 승귀된 인자이며 열방들을 다스리는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리고 예수가 세상을 다스리는 승귀된 주님(퀴리오스)이라면, 예수는 이스라엘의 신, 야훼를 가리켜 주님(퀴리오스)이라고 말하고 있는 성경본문들로부터 분리되기가 점점 더 어렵게 된다.

 

    메시아 예수는 주님이시다.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라고 믿은 이스라엘의 신은 예수를 높여서 세상의 참된 주가 되게 하셨다. 다니엘7장과 시편110편이 초대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은 한 분 참 하나님이 예수를 높여서 하나님의 보좌 자체를 공유하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예수가 승귀되어서 자신의 영광을 다른 존재와 공유하지 않는 그 하나님과 그 보좌 자체를 공유하고 있다면 이 예수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바울의 회심에 대한 누가의 해석은 바울이 예수를 본 즉시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추론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예수가 자신을 바울에게 ‘주님’으로서 계시했다는 것이다. ‘주님’이란 어구는 사도행전 전체의 맥락 속에서 너무도 광범위한 의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저 단순하게 ‘신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사실 바울의 회심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 후에 누가는 바울이 다메섹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보도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메시아’이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입에서 나온 이 어구의 또 다른 용례는 이것을 강력하게 밑받침해 준다.

 

  누가는 다메섹 체험 직후에 바울이 예수를 메시아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한 것으로 보도한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가 부활을 통해서 메시아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이 두 사람이 모두 다메섹 체험의 일차적인 의미로 여기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메시아가 결국 신적인 존재하는 결론을 도출해낸 것인가? 바울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게 된 맥락은 그에게 당시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현현들과 흡사하게 보였던 하나의 환상이었다. 이 환상에 나타는 계시를 토대로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어구가 원래의 의미에서는 내내 숨겨져 있었던 새로운 의미, 그리고 유대인들이 초월적이고 감추어진 참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나타낼 때에 사용하였던 그 밖의 다른 개념들과 병행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바울은 점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들 및 그 아들의 영을 보낸 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바울에게 그분은 자신의 공유할 수 없는 영광을 이 새로운 세상의 주와 함께 공유한 분이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반영된 분, 주님(퀴리오스)이라는 단어의 다양한 가능성을 통해서 ‘한 분 하나님 아버지’와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하는 방식을 제공하는 동시에 이교의 다신론에 맞선 유대교의 유일신론을 단언하는 방식을 제공하신 분이셨다.

 

   고대의 유대적인 신앙의 대상인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이런 숨 막히는 탐구들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사람의 무작위적인 묵상이 아니었다. 바울은 자신이 취한 각각의 단계를 성경 속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가 이런 단계들을 취할 수 있었던 근거는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보았던 것이고, 메시아라는 표현이 예수에게 적용되었을 때에 그것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에게 적용된 것과 같은 새로운 신에 관한 언어로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간 것이었다.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알고, 주를 통해서 한 분 참 하나님을 알고, 교회의 교제 속에서 이것을 아는 지속적인 체험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1-6절에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거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 다메섹 도상에서의 최초의 사건의 의미 사이에는 신학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 

 

5. 결론

 

    바울은 자기가 직접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고 믿었고, 이 예수가 누구냐에 대한 그의 이해는 예수가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육신적인 몸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이나 바울서신의 다른 본문들을 토대로 해서 바울의 회심의 때에 ‘진정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제시함으로써 이런 결론을 손상시키려는 시도들은 그 어떤 설득력도 지니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