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5장 한 예언자의 실천]
N.T. 라이트/JVG
2015-06-17 22:54:56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
제5장 한 예언자의 실천
1. 예수의 개략적인 이력
예수의 말과 행위들은 예수의 세계관 또는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실천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예수의 실천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모형은 예언자 모형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절박한 종말론적 및 묵시론적 메시지를 선포하는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모형은 이 모형을 배제했을 경우에는 주변부에 머물러 있게 될 예수의 삶과 사역의 많은 특징들을 끌어 모아 추가적인 연구의 토대를 제공한다. 특히 이 예언자 모형은 유대교의 대중운동들, 그 중에서도 세례요한의 운동과 관련되어 의미가 잘 통한다.
2. 예수의 배경
주후1세기 유대교는 모종의 역동성, 특히 잠재적인 또는 실제적인 혁명의 저류를 지니고 있었으며 이 시대에 신의 통치에 관한 말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망의 성취를 가리키는 말로 생각되었다. 신의 통치는 계약의 신이 그의 백성을 재조직하고 그들의 포로생활을 끝내며, 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행동하실 것을 의미했다. 제2성전 시대에 전문적인 의미에서의 예언은 멈췄다고 말할 수 있지만 온갖 종류의 예언은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를 위치시키는 것이 신빙성이 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예언자들의 특징은 지도자적 예언자들인데 그들은 모세 또는 여호수아를 본받아서 구원의 약속들을 제시하고 해방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런 지도자적 예언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동을 유발시킨 배경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고난과 비참이 곧 끝나고 새 날이 동트고 이스라엘의 신이 마침내 온 세계의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예수는 바로 이 시대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기본적인 메타서사를 따라서 상징적으로 행동하는 예언자였으며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지도자적 예언자였다. 예수가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하였다는 데에는 모든 학자들이 동의한다. 예수가 세례요한을 자신의 사역의 시작에서 중요한 준거점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세례요한은 자기가 시작한 사역을 완성할 인물이 장차 올 것이라는 예언을 실제로 했고, 예수는 그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했다고 생각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다.
3. 신탁적 및 지도자적 예언자로서의 예수
복음서들 도처에는 예수는 예언자라고 하는 고립적이지만 설득력 있는 수많은 말씀들이 산재하는데 초대교회가 이런 말씀들을 만들어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복음서들이 기록되었을 때 교회는 예수를 예언자보다 훨씬 뛰어난 그 이상의 인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들은 철저하게 진정한 예수 전승을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극히 높다.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의 예언자로 보았고 예수 자신도 스스로 그렇게 보았다. 예수는 이전의 예언자들과 같은 한 예언자로서 계약의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신명기18장에 언급된 “그 예언자”라는 인물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는 세례요한이 그랬듯이 당시의 신탁적 예언자들의 방식을 따라서 예언적인 메시지를 선포하였고 또 지도자적 예언자들의 방식을 따라서 갱신 운동을 시작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
예수의 사역의 예언자적 측면이 흔히 무시되어왔는데 복음서들에는 이를 증거하는 본문들이 하다하다.. 그런데 복음서들 이외의 신약서신에는 예수를 예언자로 말하는 대목이 하나도 없는데,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한 그들의 이해 속에서 이 범주를 신속하게 배제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예수를 예언자로 묘사하는 복음서의 이러한 경향은 예수의 공생애, 특히 예수의 특징적인 실천에 관한 연구의 가장 확실한 토대이다. 복음서 전체를 통하여 예수는 특정한 한 인물이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광범위한 예언자들의 모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세례요한에 까지 이르는 구약 예언자들의 사역과 연속선에 있음을 인식했으며, 나아가 자신의 사역을 그런 예언자 사역의 절정으로 여겼고, 또한 세례요한이 시작한 일을 자신의 출발선으로 사용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확실한 역사적 토대이다.
4. 말과 행위에서 권세 있는 예언자
1) 지도자적 예언자로서의 예수
예수는 신탁 예언자였으며 또한 민간 예언자였다. 예수는 자기 주변에 한 무리의 추종자들을 모았고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들에게 위대한 출애굽, 진정한 포로귀환이 마침내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양한 상징행위들을 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권능 있게 행하실 것이고 예수는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인도할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행하는 일이 세례요한과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를 의도한 듯하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이스라엘의 재구성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였는데 이는 세례요한이 자신의 제자들을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의 핵심으로 본 것을 반영한다. 이러한 예수의 의도적인 실천은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에 대한 변형인 예수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는 순회 사역과 치유사역을 통상적으로 수행하였는데 이것은 예수가 신탁 예언자들의 예언 양식과 갱신운동의 지도자적 예언자 양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의 실천에 대한 이런 개요는 주후1세기 유대적 배경 속에서 전적으로 신뢰할 만하고 초대교회의 전제의 일부로서 의미가 잘 통한다. 또한 예수의 이런 실천은 유대적 배경의 거푸집들을 깨버리며,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대다수 특징적인 활동과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2) 순회 예언자
예수가 순회 예언자였다는 것은 그가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가는 곳마다 실질적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가는 곳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들이 오직 한 번만 나타난 것이라고 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관점은 복음서들에서 예수의 이야기들에 대한 여러 가지 판본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느 하나가 다른 판본을 개작했거나 두 판본 모두가 하나의 공통된 문서자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구두 전승에서 나온 것임을 설명해준다. 예수가 순회 예언자였다는 사실은 예수의 말씀들과 행위들이 단일한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과 그러므로 예수의 사역의 서로 다른 여러 측면들을 균형 있게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3) 말씀에 권세 있는 자
(a) 권세와 하나님나라
예수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능력과 권세로써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예수의 말씀에 권세와 능력이 나타난 것은 그가 말하는 이야기들이 다른 선생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는 주후1세기의 지도자적 예언자들과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며 긴박하고 공적인 메시지를 선포하였으며 그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무시간적인 진리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임박한 재난에 대한 경고이자 회개의 요청이었으며 이스라엘이 되는 새로운 길로의 초대였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시작되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일관되게 재정의하였다.
주후1세기 유대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곧 이스라엘의 포로귀환이며 이스라엘의 신원을 위하여 야훼가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오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은 야훼가 돌아오심으로 계약이 갱신되고 피조세계가 회복되며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소망과 아무 관련이 없는 실존적 상태 혹은 소망, 또는 새로운 유형의 사적인 영성의 제시로 환원될 수 없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이 가진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신념들과 열망들을 확증해 주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패러다임을 폐기하지 않고 아주 강력하게 재확인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신원하실 이스라엘을 재정의하였고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갱신과 회복을 새로운 조건들과 목표들로 바꾸어 제시하였다. 예수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이야기 하였고 그 이야기 속에는 듣는 자들을 향한 경고와 초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은 무시간적인 윤리라는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의 사후에 세워질 새로운 공동체를 위한 삶의 교훈도 아니며 슈바이처가 말하듯이 종말이 가까운 중간기에 적용되는 한시적인 윤리도 아니었다. 예언자로서의 예수의 공적인 면모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동안 교회에 의해 무시간적인 교리와 윤리로 범주화되었던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의 내용들은 이제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의 과제, 즉 신의 계약 백성이 그들의 긴 이야기 속에서 도달한 이 중대한 시점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교훈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서들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다른 장르의 말씀들과 가르침이 전체적으로 통일적인 모습으로 제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세계관적 견지에서 총제적인 실천은 이야기라는 폭넓은 범주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다른 이야기들을 전복시키고 자신의 이야기를 청중들에게 권고하는 방식으로 이스라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b) 비유들(parables)
예수의 선포의 가장 잘 알려진 양식은 암시적인 이야기들, 즉 비유들이다. 예수가 사용한 비유들은 근본적으로 잘 알려진 유대적인 노선을 따랐고 몇몇은 구약성서의 모형들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 비유의 이야기들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며 친숙한 것이지만 그 안에는 이야기들이 비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비유라는 양식으로 이렇게 비틀어진 이야기들은 당시 유대인의 주류의 세계관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면서도 상당히 변경된 세계관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를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을 설명하였으며 유대의 전승을 근본적으로 개혁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비유들은 청중들을 새로운 세계로 초대하고 그들의 통상적인 세계를 이제 새로운 세계의 격자망을 통하여 바라보도록 설득했다.
주요한 유대전승들은 창조주와 우주, 계약의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사상은 고립적인 추상물이나 무시간적인 진리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유대의 풍부한 전승들은 아주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고립적인 경구나 신비적인 통찰의 비이야기적인 세계가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비유들은 그 양식상 예수를 유대적 배경 속에 확고하게 위치시킨다. 비유라는 장르는 심판과 구원이라는 이중의 날을 지닌 메시지를 효력 있게 만들며 비유들은 하나님나라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탄생시키는 수단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비유를 말하는 것 자체가 예언자들의 주된 활동이며 청중들에게 경고와 초대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비유들은 정확히 유대적 예언전승에 속하는 것이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친숙한 양식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들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하는 유대의 오랜 전승을 계승하는 가운데 그것이 어떻게 역설적인 결말에 도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비유들과 가장 근접한 병행은 묵시론적이고 전복성향을 가진 유대의 문학 세계이다. 비유들은 묵시론적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추상적 진리나 무시간적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류의 이야기들을 전복시키는 성향을 가진 위험스러운 메시지였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는 신속하게 그 절정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이 기대한 방식이 아닌 역설적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그 비유들은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계약의 하나님의 참된 이스라엘이며 그들은 곧 신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그 비유들은 믿지 않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이것이 유대 묵시문학이 작용하는 방식이고 예수의 비유들은 이와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고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래서 예수의 비유들은 현재 유대인들의 세계관을 깨뜨리고 그것을 새로운 세계관으로 대체하라는 긴급한 요구로서 기능을 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비유들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암묵적인 주류의 이야기가 중대한 위기국면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들의 상징과 실천을 위협하고 그 근저에 있는 세계관적 질문들에 대한 새롭고 깜짝 놀랄 만난 대답들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들을 귀가 없는 자들은 이 비유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예수의 비유들은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과 묵시 전승을 다시 쓰고 방향을 다시 설정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그 비유들은 예수의 공생애 및 사역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속한 것들이지 초대 교회가 설립된 이후의 시기에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묵시론적 알레고리로서의 비유라는 양식은 경고와 부르심이 암호화되고 베일에 가려질 필요가 있을 때만 필요한 것인데 이미 초대 교회의 시기에는 비유의 비밀들은 공개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비유들은 단순한 가르침이나 도덕적 혹은 종교적인 교훈을 제시한 것이 아니며, 실현된 종말론을 선포하는 것도 아니며 예수와는 상관없이 복음서 기자들로부터 공동체로 이어지는 알레고리들도 아니다. 비유는 예수가 역설적이고 위험스러운 순회를 다니면서 사용했던 이상적인 도구였으며 예수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표현하는 양식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말한 이스라엘 이야기는 그가 채택한 예언자적 실천과 잘 부합한다. 예수는 구약 예언자들로부터 많은 모형을 끌어 와서 그것들을 이스라엘이 처한 특정한 시기에 자신의 인식에 알맞은 새로운 종합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c) 심판의 신탁들(oracles)
유대전승 속에서 예언자들은 계약의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도 하고 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것을 말하기도 하였는데 예수의 예언자적 면모에도 이 두 가지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복음서에는 위협과 경고들의 상당한 목록이 나타나는데 예수의 공적인 면모가 신탁 예언자였다면 이러한 경고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며 이 경고들은 고전적인 예언자의 유형에 속한다. 예언자들의 유대적 전승 속에서 예수는 계약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내리실 심판을 선포하였으며 그 재앙의 한 복판에는 성전의 파괴가 있었다. 특히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것은 예언자라는 틀에 아주 잘 부합하며 또한 예수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면서 심판에 대한 예언적 선포를 한 것은 예수의 예언자적 사역의 다른 측면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4) 행위에 권세 있는 자
(a) 서론
비평학 이전에 예수가 행한 권세 있는 행위들은 실제적인 사건들로서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이에 반해 과거의 자유주의는 이적들은 일어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예수는 신적이지도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이 두 가지 노선의 사상은 모두 동일하게 그릇된 결론을 가지고 있다.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에 대해 복음서는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하지도 않으며 예수에 관한 바울서신의 강력한 주장들도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와 아무 상관도 없다. 최근의 철저한 역사적 연구는 예수의 권세에 대하여 자연주의적인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복음서의 증거들은 예수가 그런 이적을 행했다는 전제에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예수의 동시대인들이 분명히 예수를 주목할 만한 능력자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며 특히 예수가 바알세불과 연합한 자라는 비난을 초대교회가 만들어 냈을 리는 만무하므로, 사실 이런 비난들은 뭔가 주목할 만한 현상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적이니 초자연적이니 하는 말들은 주후1세기 사람들의 세계관적 용어가 아니라 오늘날 세계관의 산물이다. 주후1세기에서 이적에 해당하는 개념은 피조질서 속에 이질적인 세력이 침투한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 안에서 통상적으로 예상될 수 있으며 피조세계를 더욱 본연의 모습으로 만들어주는 권세나 능력의 나타남을 의미했다. 계몽주의 시대이후에 이적이라는 단어에 부가된 전제는 이적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기독교는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계몽주의 공격에 대하여 기독교 전통을 보존하려는 시도는 이적을 뺀 기독교나 혹은 반비평적인 반동으로 나타났다. 예수의 이적 행위들은 예수의 사역의 전체적인 모습과 아주 잘 맞아 떨어지므로 그것들이 후대의 첨가물로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적과 관련된 예수의 의도와 의미이며, 관련된 사람들이나 그 전승을 받은 사람들에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하는 점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이적 행위들에 대한 당시의 비난은 그것들이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세계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사역 전체는 세례요한이 예수에 관하여 물었던 질문과 유사한 심각한 문제를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이것이 자기 백성의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야훼 자신의 역사인가 아니면 백성들을 오도하는 사기꾼의 장난인가?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은 예수의 사역 전체가 보여주는 모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에 예수를 따랐던 자들에게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가 실제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적들로 보였을 것이다.
(b) “권세 있는 행위들” 의 해석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를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려왔던 예언의 성취에 대한 표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치유적인 통치의 일부로 보았을 것이다. 예수가 치유한 사람들 중 다수는 불구나 질병으로 인하여 공동체에서 제외된 사람들 이었고 그러므로 이런 치유의 효과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그들이 공동체 일원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치유사역들은 예수의 동시대인들에게 하나님나라의 개시와 더불어 그 나라로 초청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은 옛 예언을 따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모으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며 갱신된 계약의 축복, 즉 죄 사함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나타남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하나님이 능력으로 오셔서 이전에 민족 전체에게 하신 약속을 개인들에게 이루신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능력의 나타남은 하나님나라 개시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였고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를 보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보도한다.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을 보고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획하신 새로운 질서가 도래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이 세계 전체를 위하여 행하고 계시며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온 피조세계도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므로 복음서들 속에서 예수가 자연 질서에 대하여 권세를 행사하며 그것을 하나님의 구원목적과 새롭게 조화시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결국 주후1세기 유대적 세계관에 의하면 예수의 권세 있는 행위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며 이스라엘을 신원하실 때에 일어날 일이었던 바로 피조세계의 회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공생애 가운데 일어난 권세 있는 행위들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마법도 아니고 그 자체가 예수의 신성을 보여주는 증거도 아니며, 이스라엘 하나님나라의 물리적인 개시, 그 하나님나라의 중심 메시지였던 환영과 경고의 실행 및 그 재정의로 의도된 것이며 또 그런 표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며 이것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예언자적 사역과 동일한 반열에 있는 예언자적 표적이었다.
5. 예언자보다 나은 사람?
복음서에는 예수가 자신을 수많은 예언자들 가운데 한 사람 혹은 신명기 18장의 그 예언자로 여긴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그 절정의 순간에 도달하게 할 사역을 맡은 예언자로 보았다는 많은 지표가 존재한다. 예수는 예언자로서 공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고 이러한 토대위에서 그의 사역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예수가 세례요한을 예언자 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평가한 대목은 초대교회가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예수가 세례요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면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예수가 들려준 이야기들은 그가 자신을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기나긴 예언자의 계보 속에서 오직 한 세대의 임무를 맡은 예언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을 충분히 보여준다. 예수가 말과 행동으로 보여준 이야기들은 그가 자신의 사역을 이스라엘 역사를 그 절정으로 이끄는 것, 곧 하나님나라를 도래시키는 것으로 믿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6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1]
N.T. 라이트/JVG
2015-06-17 22:55:41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
제6장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들: 선포
1. 서론
6장과 다음 두 장에 걸쳐서 예수의 가르침의 상당수가 하나님라에 대한 암묵적인 이야기, 혹은 종종 명시적인 이야기의 견지에서 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특히 예수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고 말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읽기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로 예수는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 또는 나라를 말하면서 청중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이야기의 줄거리 전체를 의도적으로 상기시키고 있었다. 둘째로 예수는 이 친숙한 이야기를 하되 그 통상적인 줄거리를 전복시키고 방향을 재정립하는 방식으로 다시 말하고 있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본적인 선포는 암묵적으로 이스라엘의 이야기 전체를 새로운 형태로 함축하고 있었다.
이런 암묵적인 이야기들은 동일한 시기에 나온 요세푸스나 하박국 페셰르의 글들 속에도 나오는데, 이 두 경우에 다시 말해진 이야기들은 오직 공유된 의미의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하면 청중들은 통상적인 이야기 줄거리 혹은 메타서사를 전제하고 이에 비추어서 변형된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민족 이야기에 대한 이런 다시 말하기 들은 당시의 혁명 운동이나 갱신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자신의 예언자적 사역의 일부로서 이스라엘 이야기를 명시적 및 암묵적으로 다시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수는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이스라엘의 갱신과 구원 운동에 선봉장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믿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제 왕이 되어 다스리실 것인데 자신이 그 하나님의 참 예언자라고 주장하였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에 관하여 책의 2부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논증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질 것이다. 첫째,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할 때에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6장), 둘째,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 되는 새로운 길에 이스라엘의 동참을 촉구하였다(7장), 셋째,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장엄하고 절정에 해당하는 결말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것이고, 참된 길을 좇는 자들은 신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8장) 넷째,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상징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낳았고, 이로 인하여 다른 견해들을 가진 자들이 예수와 충돌하게 되었다.(9장) 다섯째, 이스라엘 이야기에 대한 다시 말하기와 그 상징들에 대한 재조정은 이스라엘의 세계관적 핵심 질문들에 대한 예수의 새로운 대답들을 보여주었다. 예수는 상충되는 견해들과 갈등의 배후에 진정한 원수가 존재하며, 이 원수에 대한 승리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0장)
요컨대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변형하여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야기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은 예수의 사역과의 연관 속에서 인식되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이스라엘의 세계관을 변형하고 전복하는 예수의 사고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가 변형한 이야기 및 예수가 개작한 실천, 상징들, 질문들은 제2성전기의 이스라엘 주류의 이야기에 대한 다시 말하기들(예를 들면 세례요한, 요세푸스 등)이라는 전체적인 네트워크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이야기를 전복시키는 방향으로 유대인 특유의 활동을 하였고 이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세계관적 요소들을 재조정하였다.
본서 2부의 논증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예비적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하나님나라가 지금 실제로 도래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이스라엘이 상상해 왔던 것과 다른 모습이라는 것을 선포하였다. 포로생활로부터의 해방, 악의 세력의 패배, 시온으로의 야훼의 귀환,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생각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회복의 때가 이르렀고 모든 이스라엘은 이때를 누리도록 초대받고 있다. 만일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방식대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엄청난 민족적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청중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이 되어서 지금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들에게 합당한 역할을 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만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따른다면 저 큰 날이 임할 때에 신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예수는 진정한 원수인 사탄과의 결정적인 싸움을 하고 있었다. 예수의 이런 선포로 인해 야기된 갈등은 사탄과의 싸움의 필연적인 결과였고, 사탄과의 싸움은 장차 도래할 사건들, 특히 예수 자신과 성전이 연루된 사건들 가운데 그 절정에 도달할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제2부의 결론들은 주후1세기 팔레스타인의 배경을 벗어나지 않으며 당시의 다른 유대 지도자적 예언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이 결론들 중 그 어느 것도 후대의 기독교적 관점들이 예수의 생애에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없다. 유대적 하나님나라 이야기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말한 하나님나라 이야기들은 연속성과 동시에 비연속성이 존재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용법은 분명히 동시대인들의 용법과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초대교회가 하나님나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예수가 사용했던 의미를 완전히 오해했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2. 배경들
(1) 유대적 소망
(a) 종말론
하나님나라에 대한 주후1세기 용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소망 및 기대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는 일반적인 종교적 후광을 지닌 모호한 어구나, 인간 사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어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는 방식이었으며, 하나님이 왕이 되었을 때 시공간의 세계가 회복될 것이라는 유대적 종말론을 표현하는 말이었다. 주후1세기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계약의 하나님이 능력 중에 임하셔서 그가 항상 의도하셨던 방식대로 세상을 통치하실 것이라는 오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깨뜨려질 수 없는 계약으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계신 야훼는 온 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마침내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신원하심으로 온 세계의 질서를 다시 정립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라는 말은 야훼가 이런 식으로 역사 안에서 행하실 것이라는 소망, 그리고 그 때가 언제일까라는 질문, 그리고 그 때를 기다릴 뿐 아니라 그 때를 향하여 적절한 방식으로 일하고자하는 과제를 내포하고 있다.
나아가 야훼가 왕이 되신다는 개념은 세상의 통치자들을 배제하는 혁명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나 헤롯 그리고 대제사장 가문은 배제될 것이며, 야훼는 진정한 통치자들을 세워 온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 외에는 어떤 왕도 없다는 주후1세기의 슬로건은 유대인의 혁명에 불을 지폈던 구호였다. 유대인들의 유일신 사상과 선민사상은 한 쌍을 이루며 이스라엘에게 종말론 사상을 산출했다. 한 분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곧 스스로를 계시하시기 위하여 행동하실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해방되며 악은 마침내 패배 당할 것이고 야훼는 시온으로 돌아오실 것이다.
주후1세기 유대인들은 이런 소망을 가지고 토라를 지키고 절기들을 기념했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에 대한 신원, 이교도들에 대한 승리, 마침내 주어질 평화와 정의와 번영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한 예언자가 나타나서 그 나라가 임하였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마침내 왕이 되셨다고 선포했을 때 청중들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반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2 성전 시대 유대교 내에서 하나님나라는 포로해방, 악의 패배, 야훼의 귀환이라는 세 가지 주제가 합쳐진 완벽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점을 파악한다면 성전, 토라, 땅, 유대적 정체성과 결부된 상징들 및 실천이 어떤 식으로 소망의 이야기를 유지시키고 강화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런 복합적인 메타서사를 전제해야만 당시의 메시야 사상이나 종말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종말론에 대해서 그동안 많은 오해가 있었는데, 제2 성전기의 유대인들이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오해가 슈바이처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온갖 부류의 학자들과 문자주의자들 근본주의자들에 의하여 전제되어 왔다.
종말론에 대한 여러 주장들을 다음과 같이 7가지로 정리된다. (1)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종말 (2) 시공간적 우주의 종말과 이스라엘의 절정을 포함한 종말 (3) 세상의 종말은 은유로 사용하지만 시공간의 역사 안에서 새롭고 판이하게 다른 국면을 가져올 여러 사건들을 포함한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을 의미하는 종말 (4) 세상의 종말을 은유로 사용하여 주요한 사건들을 의미하는 종말론 (5) 영적으로 새로운 실존의 차원 속으로 상승해 움직여 가는 수평적 언어를 의미하는 종말론 (6) 현재의 세상 질서를 비판하고 새로운 질서를 제안하는 종말론 (6) 현 사회정치적 질서를 비판하면서 그 개혁안들을 제안하는 종말론. 전통적인 해석은 (1)번이었고 슈바이처는 (2)번을 불트만은 (5)번을 주장하였고 크로산은 (6)번과 (7)번의 결합이고 보그는 (4)번을 주장했다. (3)번 견해는 예수의 가르침의 긴급성과 긴박성을 유지시키면서 예수가 공유했던 유대적 묵시론적 언어의 실제적인 지시 대상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강점이 있다.
제2성전 시대 유대인들 다수는 포로해방을 의미하는 새로운 출애굽을 소망하였으며 그때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절정에 도달하고 큰 싸움이 벌어지며 악은 패배하고 이스라엘은 해방되어 자기 땅으로 돌아올 것이며 야훼는 시온으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기대하였는데 이것은 은유적 의미에서 세상의 종말이 될 것이며 동시에 야훼가 약속했던 새로운 세상의 개막이 될 것이다. 이러한 종말론은 계약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단순히 일반적인 원칙의 범례적인 사례가 아니라 계약의 절정이 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개념들과 주제들 전체는 추상적 개념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전체를 이루고 있다.
(b) 비묵시론적 하나님나라?
버튼 맥, 크로산 등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은 묵시론적 형태로 표현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소망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배경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유대의 묵시론이 아니라 당시의 전반적인 헬레니즘 문화를 배경으로 한 지혜론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들은 이스라엘의 특정한 기대나 열망과는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당시 백성들에게 그들의 삶과 사회적 상황을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설득하는 지혜적 권유라고 말한다. 이런 사고 노선의 문제점은 묵시 사상에 대한 고전적인 그릇된 읽기를 고수하는 것이다. 비묵시론적인 예수가 초기 기독교를 낳았고 나중에 초대 교회가 비묵시론적인 의미를 예수에게서 발견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묵시론적 예수에서 출발하여 묵시론적 초대교회로 넘어가고 기독교가 발전해감에 따라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역사적이고 영지주의적인 이해로 옮겨갔다고 보는 편이 훨씬 쉽다. 그러므로 예수와 바울의 유대적인 사상을 헬레니즘을 토대로 설명하려는 예수 세미나는 심각한 오도를 하고 있다. 묵시문학을 비롯한 상당히 폭넓은 양식들을 통해 표현된 주후1세기 유대적 기대의 세계는 단연코 이스라엘과 그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특히 이 하나님이 어떻게 왕이 되실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였으며, 이것이 예수의 다시 말하기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분명한 맥락과 배경을 제시해 준다.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말하는 주후1세기 유대인은 전통적인 유대적 이야기로부터 그 이야기의 의미를 얻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따라서 주후1세기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도피적이거나 이원론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혁명적인 것이었다.
(2) 기독교적 재 전유(Reappropriation)
예수의 하나님나라 언어를 이해하는 한 출발점이 제2성전 시대 유대교라면 또 다른 쪽의 출발점은 초기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이 초기 기독교 저작들 속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나라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이 표현은 교회의 설교와 변증에서 기독교의 존재 근거를 나타내는 일종의 요약문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또한 초기 기독교에서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은 유대교에서 하나님나라가 지니고 있었던 주요한 특징들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선민사상이 결합하여 종말론을 낳았던 것처럼 기독교의 하나님나라 사상에는 이런 유대적 유산이 반영되어 있었고 이것은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을 주후1세기 유대적 지도 위에 굳건하게 위치시킨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용법은 기본적으로 유대적 틀 안에 있었지만 그 안에서 다음과 같은 핵심적인 내용에서 실질적인 재정의가 일어났다.
첫째, 초기 기독교는 예상할 수 있는 어떤 설명도 없이 하나님나라가 참 하나님뿐 아니라 메시야에게도 속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둘째, 한 핵심적인 대목에서는(고전 15:20-28) 본질적으로 유대적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하나님나라 개념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요소가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제2성전 시대 문헌들과 이 대목의 결정적인 차이는 하나님나라가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미래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현존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 전체의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면서 여기에는 현재적 실현 과 미래적 소망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 있다. 이 대목은 메시야의 나라는 이미 세워져 있고 하나님 나라는 좀 더 엄밀한 의미에서 아직 미래의 일이라고 설명한다. 바울은 이러한 구별을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의 계약과 관련된 계획 속에서는 하나님나라가 여전히 미래적인 지점에 있다는 것을 말함과 동시에 이 계획 속에서 새로운 국면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메시야적 사건들을 통해서 온전히 계시되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셋째, 이 새로운 국면은 이미 실현된 하나님나라인데, 이것은 유대교가 그토록 갈망했지만 결코 보지 못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는 이미 메시야의 백성들이 참여하는 현실이며 그들은 이미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서 나라와 제사장들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초기 기독교에서 하나님나라의 현재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그 미래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공존하면서, 이 두 가지 입장이 재정의된 묵시론적 도식 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유대적 묵시론은 초기 기독교에서 포기된 것이 아니라 재정의되었다. 유대적 묵시론에 대한 재정의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하신 예수가 이 묵시론적 드라마의 중심인물이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적 묵시론은 현재적 하나님나라는 미래적 하나님나라의 첫 열매들이며 또한 미래적 하나님나라는 시공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폐지가 아니라 창조를 위협하는 죄와 사망의 폐지라는 것으로 재정의되었다. 전 피조세계는 메시야와 그의 백성이 부활한 결과로서 자신의 출애굽과 자신의 포로귀환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넷째, 이렇게 유대적 묵시론은 유대적이고 유일신론적인 하나님나라 비전의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런 재정의를 통해 세계관이라는 차원에서 통상적인 유대적 상징들이 완전히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운동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인종적, 지리적 해방을 준거로 하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나라의 실천을 토라를 준거로 삼아 정의하지도 않는다. 이 운동에서 세계관적 질문들에 대한 대답도 이스라엘의 민족적 소망이 아니라 구속받은 인류와 우주라는 견지에서 주어진다. 이렇게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표현은 민족적 이스라엘의 신원, 로마통치의 전복, 새로운 성전의 건설, 토라의 준수, 열방들이 시온으로 몰려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로 유대교의 하나님나라 개념에 주요한 재정의가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재정의에 대한 단서는 기독교의 주류 이야기 자체 속에 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동일한 이야기 내의 새로운 계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창조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유대적 이야기였는데 주된 차이점은 유대인은 전체 드라마 속에서 자신들을 제3막에 위치시켰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제5막에 위치시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제3막에서 제기된 문제점들이 극적으로 해소된 제4막이 이미 일어났고, 이제 5막이 시작되었으므로 제3막에서 필요한 상징들은 이미 부적절하게 되어버렸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이 위치한 제5막은 온 세계의 구속을 항상 염두에 두셨던 창조주의 계약 목적이 단일한 민족의 협소한 한계를 뛰어넘어 민족과 문화를 초월한 공동체를 탄생시킨 시기에 해당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5막은 창조주 하나님, 계약의 하나님이 손으로 만든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자기 백성들에게 돌아와 그들과 함께 거하게 된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나라 표현은 완전히 비유대적인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상징, 실천, 질문들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철저한 개작은 고전적인 유대 이야기의 포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바로 그 나라의 새로운 국면 속에서 살고 있다는 신념 가운데 생겨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동일한 이야기 내의 새로운 막이었다. 모든 증거들은 하나님나라 표현에 관한 이런 재정의가 주후 70년 이전에 이미 상당부분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재정의가 예수 자신의 성찰 그리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장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의 성찰에 근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든 가설은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재인식하고 말했는가라는 질문과 아울러 왜 초기의 제자들이 그의 죽음과 부활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3) 하나님나라에 관한 최근의 연구 동향
그동안 하나님나라에 관한 많은 논의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시대착오적인데, 최근의 연구 동향들은 다음과 같이 평가될 수 있다.
첫째,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가 정치적인 것이었다는 주장은 주후1세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으로서 종교와 아무 상관이 없는 현대 사회의 정치를 주장하는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지적한다. 오히려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들 속에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정치와 종교는 서로 풀 수 없을 정도로 얽혀있었다.
둘째, 하나님나라의 도래 시기와 관련된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도래의 시기가 아니라 도래의 내용이다. 왜냐하면 도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기 전에는 도래의 시기가 현재적인지 미래적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나라 선포에서 세상의 종말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본문들이 사실은 유대적 의미의 종말론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하나님이 멀리 계신지 또는 가까이 계신지에 대한 논의도 주후1세기 유대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런 사고는 18세기 이신론이나 에피쿠로스학파의 사상에 속하는 것이지 유대인들의 사고가 아니다. 유대인들의 관심사는 그런 추상적 사변이 아니라 야훼가 언제 약속한 대로 시온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넷째,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표현 속에 함축된 기독론에 대한 논의도 기독론에 초점을 맞추려는 피상적인 읽기보다는 예수가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는 분명히 자신에 대한 언급을 포함하고 있었고 이것은 주후1세기의 다른 지도자적 예언자들이나 자칭 메시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을 선포하였고 교회는 예수를 선포했다는 과거의 도식은 핵심을 놓친 것으로서, 이런 주장은 예수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역할에 대한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비역사적인 독단을 반영한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말 앞에 수레를 다는 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완벽히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제2성전 시대에는 많은 지도자적 예언자들이 존재하였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은 모종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랫동안 지속하였는데 에세네파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하나님나라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신원하고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무찌르는 계약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말론적 기대이다. 유대인들의 소망은 민족 전체에 초점이 맞춰진 유형적이고 현세적인 준거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자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재정의를 시도하면서 이런 유대적 개념들을 폐기하여 버렸다. 적어도 슈바이처 이래로 예수에 대한 연구는 실제적인 역사에 비추어서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인식되어 왔지만 슈바이처가 제시한 역사는 점점 더 비역사적인 발전을 만들어 왔다. 주후1세기 역사에 충실하려면 당시의 실제적인 신념들과 기대에 비추어서, 예수가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한 도전을 하나님나라의 재정의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나라가 주후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 그리고 예수가 어떤 생각에서 이런 의미를 천명하였고 어떻게 나중에 제자들이 그들에게 나타났던 의미들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이 개념을 정의하였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는 경우라 할지라도 많은 이야기들이 하나님나라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연구를 하나님나라라는 명시적인 단어나 분명한 동어표현의 구절에 국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만일 그런 식으로 제한을 한다면 하나님나라와 관련된 많은 내용이 생략되고 말 것이다.
3. 하나님나라에 대한 재정의: 선포
(1) 서론: 요약적인 선포들
예수의 예언자적 활동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그가 말하고 행동했던 암묵적인 혹은 명시적인 이야기였는데, 그것은 절정에 다다른 이스라엘의 이야기였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말하는 것은 청중들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그 다음에 그 이야기가 어떻게 완결될 것인가를 기대하고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더 큰 이야기의 일부로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인식은 그 선포의 역사성에 대한 예비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선포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그 선포는 유대적 배경 속에서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면서 동시에 초대교회에서 등장한 하나님나라의 개념에 대한 전제로서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당시 유대적 배경 속에서 통용되었던 몇몇 전제들에 도전하면서 예수의 공생애의 특징을 이루었던 특별한 초점을 보유하고 있다. 부언하면 예수의 선포는 유대교 내에 위치하지만 유대교에 대한 도전이었으며, 예수의 선포는 초대교회에 대한 전제이지만 초대교회에 대한 청사진은 아니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유사성과 이중적인 상이성은 역사성을 주장하는 그 어떤 분석에서든 하나의 특징을 이루어야 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오직 확고한 유대적 배경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지만 유대교의 경계를 넘어섰던 초대교회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그런 견지에서 선포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그들의 실천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가 매우 유대적인 의미였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다. 초대교회는 한 분 참 하나님, 창조주가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목적을 성취했고 그 결과 이제 온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들은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를 강조했던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어떤 큰 이야기의 한 부분이고 바로 그런 것으로서만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메시지가 속한 큰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이야기로서 야훼께서 마침내 돌아오셔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실 때 악은 패배당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결코 무시간적이거나 일반적인 진리의 선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의 선포였다. 공관복음서에 짧은 요약문으로 나타난 하나님나라 선포에 관한 진술의 의미는 축귀를 비롯한 이적 행위를 통해서 더욱 강화되었으며 예수의 그러한 실천은 하나님나라가 지금 도래하고 있다는 분명한 표적들이었다.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이런 짧은 요약문들이 이스라엘 이야기 전체를 상기시키고 있다면 예수의 비유들은 더욱 그러하다.
(2) 이스라엘의 역설적인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
(a) 서론
예수의 비유들은 그 근저에 있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상기시키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 이야기가 어떻게 고도로 역설적인 결말에 도달하게 될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게다가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명시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이야기를 듣는 자들이 예수와 함께 이스라엘이 되는 새로운 방식에 참여하도록 초청한다. 예수의 비유는 청중들에게 그들이 가진 현재적 이야기가 예수의 위험스럽고 혁명적인 이야기에 의해 전복되고 수정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예수의 비유들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도전을 하고 실천을 촉구하며 그들이 가진 기존의 이야기들을 전복시킨다.
(b)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예수가 이 비유를 어떤 의도로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의견의 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유가 공관복음서들 모두에서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들 중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치를 고려할 때, 이 비유에 대한 역사가들 간의 의견의 불일치는 그들이 아직 예수의 공생애의 핵심을 아직 포착하지 못한 증거일 것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 이야기에 대한 묵시론적 다시 말하기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과 구조를 사용하여 두 가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첫째,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이야기, 특히 포로귀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에 대해 역설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둘째, 이 비유는 예수의 사역이 전체 이스라엘 이야기의 성취이며 또한 그 이야기의 역설적인 결말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는 다음 세 가지로 논증할 수 있다.
첫째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다는 단서는 이 비유는 양식이나 내용에서 창조주가 세상 및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것에 관해 암호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가 어떻게 극적이고 놀라운 절정에 도달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사용되는 묵시문학적인 서사 양식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비유를 유대적 배경 속에서 읽는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다니엘서 2장의 신상에 대한 환상과 마찬가지로 세상 나라들과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스라엘의 주류 이야기를 다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둘째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다는 단서는 이 비유와 악한 농부에 대한 비유와 가진 밀접한 병행 관계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악한 농부 비유는 야훼가 예언자들을 보냈고 마지막에는 그의 아들을 보냈다는 관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보냄을 받은 예언자들은 열매를 요구하고 있는데 실패한 씨앗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공한 씨앗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다. 아들은 거부를 당한 것 같지만 결국에는 모퉁이 돌이 된다. 악한 농부 비유는 예수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전복적으로 다시 한 것이며,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위와 정확히 일치한다.
셋째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다는 단서는 이 이야기의 핵심, 즉 씨앗이라는 개념 자체에 있다. 제2성전 시대 유대교에서 씨앗이라는 개념은 마침내 포로생활이 끝나고 귀환하게 될 남은 자를 의미하는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씨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마침내 행동하실 때 신원을 받아서 자기 땅에 뿌려질 참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은유이다. 누가 뿌려진 씨앗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한다면 그것은 남은 자가 지금 돌아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씨앗이 맺을 열매는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 그리고 그에 따른 온 피조물의 갱신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핵심에는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때가 마침내 이르렀다는 암호적인 선포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마지막 추수의 때가 그들이 생각했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올 것임을 경고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예언적인 말씀을 뿌리고 계시지만 그 씨앗 중 상당수는 무익하게 될 것이고 악한 세력들에 먹혀버리거나 바위와 가시떨기 같은 포로 생활 가운데 소멸되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있게 될 마지막 추수는 엄청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단순히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듣는 자들을 초대하는 하나의 행위이다. 지금 선포하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그 나라의 남은 자들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악한 농부와 같이 스스로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이런 고찰들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예수 자신의 사역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포로귀환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강력하게 말해준다. 예수의 이 비유는 암호적인 경고와 동시에 초대이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의 긴 이야기를 하면서 마침내 그 이야기가 목표지점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의 공생애 사역과 하나님나라 선포가 바로 온 이스라엘 역사가 지금가지 추구해온 바로 그 지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엄청난 주장이고 대단히 전복적이며 거의 죽음을 자초할 정도로 위험한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비유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절정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의 요약으로서 예수 자신의 사역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수는 야훼의 새로운 창조의 말씀을 뿌리는 예언자적 인물이었고 그는 예언들이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을 동일하게 겪게 될 것이다. 마치 아들이 악한 농부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사람들에게 거부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거부당함 속에 하나님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다. 버림받은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것이며 좋은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비유는 예수 자신의 사역이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이자 요약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율법과 예언자는 요한의 때까지이고 그 이후에는 예수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선포된다. 이스라엘의 기나긴 기다림은 이제 끝이 났고 야훼는 마침내 열매를 맺게 될 좋은 씨를 뿌리고 있다. 이전에 뿌려진 씨들은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씀이었지만 열매를 맺지 못했다. 예수는 비록 거부를 당했지만 예언자들이 실패했던 바로 그곳에서 성공을 거둔다. 이전의 예언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도 거부를 당할 것이지만 야훼의 기이한 목적은 오히려 그런 거부에도 불구하고 성취될 것이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철저한 심판을 받지만 그 심판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긍휼을 받게 하는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긍휼의 표는 남은 그루터기 안에 숨겨진 씨앗이 될 것이다. 악한 농부의 비유가 이사야 5장을 상기시킨다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이사야 6장을 상기시킨다. 이 비유들은 거부당했던 예언자들, 그 결과 임한 심판 그리고 심판의 다른 측면인 갱신(긍휼을 의미)이라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리고 그러한 예언자적 유산의 절정이며 요약이며 재현으로서 예수의 사역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이사야서를 상기시킨다. 이사야에 나타난 사역과 그 결과가 예수의 사역 안에서 재현되어 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예수가 무시간적인 진리를 가르친 교사였거나 알 수 없는 수수께끼를 선포한 자라고 인식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예수의 비유는 전복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위험한 주장이었기 때문에 때가 이르기 전에는 비유를 통하여 암시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비유들은 이스라엘의 현재적 삶과 야망들을 반대하고 그것에 도전하였기 때문에, 예수의 선포는 오히려 듣는 자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며 거부하며 또 깨닫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야훼의 돌아오심과 이스라엘의 해방이 성취되는 방법은 감춰진 것이고 비밀스러운 계시를 포함하고 있었다.
말씀을 뿌리는 역설적인 예언 사역은 예수 자신의 사역 속에서 재현되고 있었다. 사탄은 그 씨앗을 빼앗기 위하여 활동 중이다. 많은 씨가 뿌려졌지만 열매를 거둔 것은 소수이듯이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이 비유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 끝까지 인내하여 열매를 맺은 자가 되라는 도전으로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였고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가 예수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그 위대한 절정의 순간에 도달했다는 주장이었다. 이제 결실하지 못하던 때가 지나가고 결실의 때가 도래하였으며 계약은 갱신되고 있다. 야훼는 약속대로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왔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운명을 회복할 것이다.
(c) 이스라엘 이야기에 관한 다른 비유들
4. 결론: 하나님나라를 선포함
예수는 자신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기대가 지금 성취되고 있고 새로운 출애굽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마침내 기나긴 포로생활이 끝나고 이스라엘은 자기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예수의 사역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런 선포를 초청과 경고라는 관점에서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7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2]
N.T. 라이트/JVG
2015-06-17 22:56:11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
제7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들: 초대, 환영, 도전, 부르심
1. 서론: 끝이 열려있는 이야기
7장에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그 청중들을 초청하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논증하려고 한다. 그 초청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자들 가운데 적절한 실천을 만들어 냈다. 세계관 모형 속에서 이야기들은 다른 세계관들과 사고방식들을 향하여 말을 걸고 변화된 이야기들, 상징들, 실천이라는 반응을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예수의 권면, 명령 등은 단순히 도덕규범들이나 교훈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청중들에게 세계관의 재정립과 그에 따른 실천을 이끌어 내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의 이야기는 청중들에게 초대로 시작하여 환영과 도전 그리고 부르심으로 작용했다.
2. 초대 : 회개하고 믿으라는 부르심
(1) 회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회개하라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요구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와 어떤 식으로 부합하는가? 전통적으로 이 회개를 회심이라는 소극적인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예수가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무시간적인 진리를 선포하였고 예수는 인간의 회심을 요구한다는 비역사적인 도식을 견지해 왔다. 샌더스는 예수는 회개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따르라는 요구를 했다고 주장했는데, 그가 예수가 통상적인 의미에서 회개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고 본 것은 옳지만 예수가 회개 자체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본 것은 틀렸다. 샌더스는 암묵적인 이야기의 요소, 즉 이야기가 만들어 내는 실천이라는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
세례요한도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요구했는데, 이 회개의 요구는 이스라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되는 이스라엘 이야기로서 유대인들의 폭넓은 개념인 종말론적 회개에 속하는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회개란 개념은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끝내고자 한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었으며 신명기적 관점에서 볼 때 회개는 쉐마, 즉 전심으로 야훼께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였다. 예언자들도 통상적으로 회개를 야훼께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로 이루어진 회복과 포로해방을 의미하였다. 특히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이 전심으로 야훼께 돌아오는 것이 이스라엘이 자신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결정적인 조건이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이와 동일한 주제가 성서 시대 이후 문헌, 특히 쿰란 두루마리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회개는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요건으로서, 비역사적이거나 개인주의적 경건이 아니라 종말론과 필연적으로 결부된다.
그러므로 예수가 요구한 회개는 야훼께서 마침내 이스라엘의 운명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는 함의를 지녔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면서 이스라엘의 운명이 회복되고 있음을 분명히 천명했고, 이런 맥락에서 그의 선포 속에 회개 요구를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가 요구한 회개의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의 혁명적 열심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회개하라는 예수의 요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역사적 재구성은 유대인들에게 민족주의적 폭력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요구한 회개는 도덕적 부름이 아니라 종말론적 부름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민족적 과제들을 포기하고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과제들을 받아들이라고 촉구하는 정치적 부름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과제란 예수 자신에 대한 신뢰와 충성이었고 이것이 바로 참된 회개였다.
예레미야나 아모스 그리고 세례요한이 그랬듯이, 예수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박한 심판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민족주의적 폭력을 포기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회개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원을 약속하였다. 반대로 회개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민족적 재앙이라는 심각한 심판을 경고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의 회개 요구는 그의 예언자적 면모와 잘 부합된다. 예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끝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고 회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종말론적 회개, 민족주의적 폭력으로 부터의 회개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함께 결합되어 있었다.
회개의 이런 실제적인 내용에 대한 증거들은 비유들 속에서도 풍부하게 등장한다. 잃어버린 양이나 동전의 비유, 탕자의 비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들이 그것들이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으로 품에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환영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수가 가난하고 버려진 자를 환영한 것은 진정한 포로귀환, 새로운 시대, 부활이 도래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새로운 시대에 속하고자 하는 사람은 회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유들은 회개가 예수의 선포 속에서 중심적 요소를 형성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회개와 관련된 주된 요소는 누가 진정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라는 질문이며, 이것은 회개하라는 예수의 부르심에 관한 가장 뚜렷한 핵심을 제기한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가 요구한 회개는 개인적인 것이든 민족적인 것이든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례요한이 회개의 상징으로 세례를 제시하였듯이 예수는 동일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세와 자신의 절차에 따라서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이 되는 길을 제시하였다. 예수에게 포로귀환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은 그의 사명이었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이 누가 회복된 이스라엘에 속하는지를 선포할 권리를 지니고 있는 듯이 행동하였다. 예수의 이런 행위가 유대인들에게 걸림돌이 된 것은 예수가 죄 사함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일에 성전 제의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요구한 회개는 통상적인 유대적 회개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 유대인들이 보기에 예수가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만밀 그것이 참이라면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의 순간이 도래한 것이고, 만일 거짓이라면 예수는 백성들을 오도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요세푸스와 마찬가지로 당시 청중들에게 기존의 생활방식 전체를 버리고 자신의 선포를 따라서 다른 생활방식을 추구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촉구한 회개는 당시 청중들이 예상했던 방식이 아니었다. 예수의 선포에 함축되어 있는 이야기는 통상적인 유대인들의 이야기에서 예상되는 민족의 회복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되는 다른 방식과 다른 종류의 신원을 기다리라는 도전이었으며 회개란 바로 이런 도전에 대한 청중들에게 요구된 응답이었다.
(2) 믿음
예수가 믿음을 이야기 했을 때 그가 의도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자세하게 다루는 주석서들은 거의 없다. 믿음이란 주제가 유대 세계에서는 그렇게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지만 구약성서에 따르면 믿음이란 주제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함의를 가진다. 첫째로 계약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 지녀야 할 정당한 자세이다. 둘째, 믿음은 위기와 심판의 때에 참된 이스라엘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셋째, 믿음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회복된 백성의 특징을 이루게 될 것이다. 넷째, 한분 참 하나님을 믿고 이방의 우상들을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믿음은 이스라엘에 합류하려는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특징이었다.
따라서 믿음을 단순히 종교적인 내적 성향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면 안 된다. 믿음과 관련하여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은 커다란 위기의 때에 참된 이스라엘을 정의하는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믿음을 요구한 것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 대안이나 차원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종말론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믿음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의 사역 속에서 절정에 달한 활동을 하고 계신 것을 믿는 것이었으며, 이스라엘이 기다려왔던 바로 그 순간이 예수의 현존과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믿음이었다.
3. 환영 :죄인들과 죄 사함
(1) 죄인들은 누구인가?
예수가 죄인들을 환영했고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는 어느 정도 보편적인 합의가 존재한다. 그러나 죄인들이 과연 누구였으며 예수가 그들에게 무엇을 제시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난제들이 존재한다. 몇몇 영향력 있는 저작들에서 죄인의 의미는 “암메 하아레츠” 즉 땅의 백성들에 관한 본문에서 도출되었다. 죄인이라는 단어는 초기 기독교 문헌들에서는 종종 율법 없는 열등한 족속들“ 즉 이방인들을 지칭하였고 그러므로 만일 이 말이 어떤 유대인에 대해 사용되었다면 이 단어는 그를 이방인과 다름이 없는 자로 규정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2성전기에 죄인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유대인 부류에 대한 확고한 증거들은 없다. 이 시기의 죄인이란 말의 범주를 다음과 같다. 첫째로 제2성전 시대에 죄인이란 의미의 ”땅의 백성“은 이스라엘의 바빌론 포로기에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사람들, 즉 혈통이 불분명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속하는지 여부가 불투명한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둘째, 죄인이란 의미의 ”땅의 백성들“ 이란 말은 주후135년 이후에는 랍비들의 토라 준수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셋째, 주전 70년 이전에는 바리새파에 속하지 않는 통상적인 유대인들을 토라를 범하는 자들로 간주하여 죄인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넷째, 죄인이란 표현은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토라를 범하는 자들을 포함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창녀들이나 세리들이 그런 부류였을 것이다. 아무튼 예수가 세리들과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고 확고한 역사적 사실로 간주되어야 한다.
(2) 죄 사함
죄 사함과 관련된 기독교의 전통적인 용법은 개인적이고 추상적이며 비역사적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죄 사함에 대한 분석에서 예수와 초대교회가 자주 인용하였던 성서시대 및 그 이후의 유대교 문헌들 속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내용이 간과되어 왔다. 죄 사함은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구약의 예언서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그들의 죄악에 대한 형벌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만일 이스라엘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다면 그것은 그들의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가 약속한 계약의 갱신은 포로생활의 해방을 의미하고 포로해방은 곧 죄 사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죄 사함은 단순히 계약 갱신에 수반되는 하나의 부수적인 축복이 아니라 바로 계약 갱신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사야서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포로귀환과 야훼가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것에 대한 약속을 다루는데 이런 메시지는 죄 사함이란 방식을 통해서 선포되고 있다. 달리 말하면 포로생활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야기되었는데 이제 죄 사함을 받았다면 포로생활은 마땅히 끝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사야서에서 포로귀환과 죄 사함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에 나오는 기도문들도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주후1세기 유대인에게 죄 사함은 단순히 개인적인 축복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었고 그래서 당시의 유대인들은 종말론적이고 민족적인 축복으로서의 죄 사함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는 바로 죄 사함을 위한 세례, 즉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구속을 가져올 세례였다.
이러한 결론은 앞에서 살펴본 죄인들에 대한 고찰 및 회개하고 믿으라는 예수의 초대에 대한 분석과 일치한다. 최근의 학문적인 논의들은 죄 사함을 무시간적인 순간을 중심으로 개인에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춤으로 이런 역사적 맥락을 무시했다. 주후1세기 유대인들은 행위로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원시 펠라기우스주의자들도 아니었고 자력적 도덕주의를 주장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포로귀환, 갱신된 계약, 종말론적 죄 사함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있었다. 예수는 유대교의 공적인 구조들 밖에서, 자기 권세로 죄인들에게 이런 종말론적 축복을 선포하였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가 범한 진정한 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죄인들을 환영한 것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반감은 유대 종교와는 거의 상관이 없고 종말론과 철저하게 관련된 것이었다. 예수가 제시한 것은 유대교와 다른 종류의 종교체제가 아니라 유대교가 바라던 새로운 세상 질서, 이스라엘의 소망의 절정, 최종적인 죄 사함, 곧 하나님나라의 도래였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송축하였고 이러한 송축을 예수와 함께 공유하였던 자들은 이 위대한 죄 사함의 유익을 이미 개인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예수가 불러일으킨 반감은 그가 종말론적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그 속에 온갖 부류의 사람들을 포함시켰다는데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의 행위를 반대한 것은 예수가 바리새파와 달리 사랑과 긍휼을 설파했기 때문도 아니고 다른 종교제도를 선전했기 때문도 아니며 죄인들과 어울렸기 때문도 아니다. 예수에게 비난이 쏟아진 것은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면서 죄인들을 환영했고 그들을 하나님나라의 참 백성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반감의 핵심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재정의였다. 예수는 성전이나 토라에 대한 충성을 예수 자신에 대한 충성으로 대체하고 있었고, 회복과 정결은 통상적인 통로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자신을 통해서 얻어져야 한다고 하나님나라를 재정의하고 있었다.
4. 도전 : 새로운 계약백성으로 살라는 부르심
(1) 서론: 공동체와 실천
예수가 죄인들을 환영했다는 것은 예수가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나라 선포를 믿는 사람들을 그들이 죄인일지라도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인정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예수가 부르심에 응답한 자들 앞에 제시한 과제들은 사람들을 긴장시킬 정도로 강도 높은 것이었다. 이스라엘 이야기에 대한 예수의 다시 말하기는 계약의 갱신,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들의 성취, 소망의 실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갱신된 이스라엘, 새 계약의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요구와 도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2) 새로운 계약, 새로운 공동체
예수는 교회를 세우고자 의도하였는가? 아닌가? 라는 질문은 해결될 가망이 없다. 역사의 차원에서 지금까지 제시된 비교적 만족스러운 견해는 예수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는 의도를 갖지 않았다는 게르하르트 로핑크의 견해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예수의 의도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복음서의 증거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인의 지역 공동체들 속에서 자신을 따르는 구별된 무리를 세우고자 의도했으며 그러한 무리들은 어떤 점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니 에세네파와 같은 분파들로 보였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예수를 따랐던 자들은 그렇지 않은 다른 무리들과 구별되는 실천을 가진 무리였을 것이다.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독특한 생활양식을 행하라고 도전하였다. 제자들은 새로운 계약의 백성, 진정으로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 그들 속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이 마침내 성취된, 그런 자들로 살아가도록 요구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 이야기에 수반된 실천은 개인적 윤리나 은혜에 대한 개인적 응답이라는 관점으로 축소될 수 없다. 에세네파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가 요구한 실천의 취지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하나의 독특한 공동체로 구별하는 것이었다. 마가복음 3:31-35에 나타난 예수의 요구는 가족이 사람의 기본적인 공동체를 제공해 주던 농촌 사회에서 지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대안 가족을 이루라는 요구였다. 이것은 개인적 차원의 도전만이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정치적 차원에서도 철저하게 전복적인 도전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이 선포한 하나님나라 이야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요구한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다른 무리들과 구별된 것은 그들이 예수가 다시 말한 이스라엘 이야기에 대해 헌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에서 나온 일련의 실천과 상징들을 따라서 살고, 핵심질문들에 대한 일련의 대답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그들을 당시의 다른 유대인들과 구별되게 만들었다.
(3) 새로운 계약, 새로운 실천
(a) 서론
“예수의 윤리”라는 표현이 가진 위험성은 그것이 예수는 단순한 도덕적 개혁자 혹은 무시간적인 도덕규범의 설교자였다는 뜻을 함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슈바이처는 예수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종말론적이었기 때문에 중간기의 윤리, 임시적인 윤리였다고 주장했다. 종말론에 대한 좀 더 진지한 역사적 읽기가 진행된다면 단순한 도덕교사라는 예수상이나 혹은 도덕이나 윤리와는 상관없는 문자적인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예수상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에 대한 역사적 읽기란 종말론을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및 세상의 구원과 갱신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그럴 때 윤리란 이런 갱신 속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삶의 방식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종말과 윤리는 역사적 읽기 속에서 서로 충돌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다.
종교개혁 신학, 특히 루터파 전통에서는 복음서들에 나오는 자세한 도덕적 가르침을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놓고 고민해 왔다. 그러니까 이런 교훈을 죄악을 깨닫게 해서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하는 율법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율법의 세 번째 용도로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자들을 위한 행동지침으로 읽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었다. 예수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제시한 과제들을 이런 식으로 논의하는 것은 핵심을 비켜가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행동의 배경은 계약이었듯이 예수에게 행동의 배경은 계약의 갱신이었다. 결국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하나님나라의 실천을 창출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해야 할 질문은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야훼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었던 사람에게 어떤 종류의 가르침을 기대하고 있었을까? 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로마의 압제를 벗어나기 위한 폭력혁명의 촉구이거나 야훼의 승리와 신원을 보장받을 수 있는 토라의 엄격한 준수일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어떤 형태이든지간에 모두 계약에 대한 충성, 야훼의 은혜에 응답하는 충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예수가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있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하나님나라가 윤리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윤리도 하나님나라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하나님나라와 윤리는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b) 갱신된 마음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에 대한 성서의 약속들 중의 하나가 마음의 갱신이었다는데,(신30:6-10 ; 렘31:33 ; 렘32:38-40 ; 겔36:26-27) 이것은 계약의 갱신과 마음의 갱신이 보조를 같이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개신교적인 행위/믿음이나 플라톤적인 물질/비물질, 그리고 낭만주의적인 외적/내적이라는 이분법적인 해석은 모두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지극히 중요한 구별은 악한 상태(내적이든 외적이든)와 새로워진 상태(내적이든 외적이든)간의 구별이다. 구약성서에서 전자의 상태는 이스라엘의 현재의 모습이고 후자의 상태는 포로귀환의 한 측면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가 포로귀환과 마음의 갱신의 때가 지금 도래하고 있다고 선포했다면, 그것은 예수가 말한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그러한 갱신에 적절한 내적 상태와 외적 실천 모두를 창출해 내는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르게 이해된 종말론은 윤리와 대립되지 않으며 바른 종말론은 바른 윤리를 낳는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가 도래할 때, 야훼의 뜻은 하늘에서와 마찬가지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현재의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갱신의 때가 자신의 사역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뿐 아니라 이 갱신의 때에 완악한 마음이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혼과 관련한 교훈은 단순한 율법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이혼에 관한 신명기의 가르침이 야훼의 경륜 속에서 잠정적 단계임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더 나은 질서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모세 시대의 질서가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을 새 날이 동터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신명기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창세기 이야기로 다시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와 세계를 위한 야훼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혼을 허용하는 모세의 가르침이 이스라엘의 완악함 때문이었다면, 이혼을 거부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이스라엘의 완악한 마음이 해결됨을 전제할 때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예수가 예언자들이 말하던 그 위대한 갱신의 때, 즉 율법을 이스라엘의 마음에 새기게 될 그 때가 자신을 통해 도래하고 있다고 믿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계약의 갱신은 하나님의 계획의 새로운 국면, 즉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 즉 인류를 악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 실현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예수는 이 새로운 국면의 드라마에 적합한 실천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야훼는 현재 상태의 이스라엘을 신원하는 것이 아니라 토라가 진정으로 의도했던 것을 실천하는 새로워진 이스라엘을 신원함으로 왕이 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교훈은 단순한 윤리적 요구가 아니라 새 계약의 개시를 보여주는 징표로서 예레미야서가 말한 약속된 새 마음이었다.
(c) 산상수훈
그러므로 산상수훈은 단순한 윤리적 모음집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답게 되라고 도전한 것이다. 산상수훈을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수가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읽어야 한다. 산상수훈의 복선언문들은 예수가 청중들에게 야훼의 종말론적 백성으로서 그들의 참된 소명을 발견하되, 당시 지도자들의 길이 아니라 예수가 제시하는 실천을 따름으로써 그렇게 하라는 호소로 읽을 수 있다. 산상수훈은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며 그 길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모든 유대인들에게 열려졌음을 가르친다. 산상수훈은 차원이 높은 요구였으며 율법 및 예언자들과 연속성을 지니는 이스라엘의 소명과 운명에 대한 예수의 재해석이었다.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살인, 간음, 맹세, 복수, 원수에 대한 5가지 반제들은 대체적으로 앞선 복선언문의 적용과 주석의 기능을 한다. 이 반제 단락들의 강조점은 바리새파와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외적인 행위들을 좀 더 꼼꼼하게 정의해서 토라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마음과 행위가 전체적으로 통합된 충성이란 관점에서 토라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도전한다. 이 반제들은 율법에 대한 외적인 준수와 내적인 준수 간의 대비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이라는 실제 생활 속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반제들은 예수의 사역 속에서 이스라엘이 되는 새로운 방식, 이스라엘이 직면한 민족적 긴장에 대처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로마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특히 산상수훈은 이스라엘이 가야할 길은 폭력적 저항이나 바리새인의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비폭력적 저항의 길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다른 대안적인 운동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길을 따르는 것이 민족적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엄중한 경고로 산상수훈을 끝맺는다.
결론적으로 산상수훈은 주후1세기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가장 의미가 잘 통한다. 산상수훈은 당시 백성들이 묻고 있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심한 압박과 모호성으로 가득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역사가 절정에 달했다고 생각했던 그 시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야훼의 계약에 신실한 것이 되는가? 산상수훈은 바로 이런 질문에 대한 포괄적인 대답으로서 일련의 하나님나라 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d) 주기도문
주기도문이 산상수훈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산상수훈과 동일한 사고의 흐름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주기도문은 하나님나라가 하나님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망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보여준다. 물론 주기도문에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망은 예수의 재해석을 통해 재해석되었으며 주기도문 전체가 예수의 사역의 맥락과 잘 부합된다. 예수의 관점에서 보면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했던 사람들은 참된 이스라엘, 계약의 하나님이 장차 신원하실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e) 희년: 채무의 면제
예수가 민족 전체가 희년을 준수하도록 촉구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제자들에게 희년 원칙을 따라서 살라가기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서로 죄를 용서하고 채무를 탕감해 줄 것을 가르쳤는데 이것은 물건을 공동으로 사용했던 에세네파의 방식과 유사한 방식으로 물건들을 서로 통용했던 초대교회의 실천을 설명해준다. 특히 용서는 예수에게 충성하는 자들에게 삶의 중심적인 특성이 되어야 했고 이런 식으로 해서 그들은 야훼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f) 혁명, 정치, 공동체, 신학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와 실천은 그의 청중들에게 그들이 모든 삶의 차원에서 함의를 가지는 행위를 하도록 도전하였고 이런 의미에서 예수는 사회적 혁명을 수행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혁명은 좀 더 폭넓은 정치적 함의들을 지니고 있다. 예수가 야훼의 나라를 선포하며 무력적 저항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이미 심각한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기득권 세력들뿐 아니라 저항운동에 헌신하는 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가 내건 과제가 추종자 집단을 창출하는 사회적 성격을 가진 것은 예수의 과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학적이었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의 운동이 위험스럽게 정치적이었던 것은 그 운동에 예수의 그런 신학을 반영한 삶의 방식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5. 부르심: 예수의 조력자들이 되라는 부르심
(1) 예수를 따르라는 부르심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초대, 환영, 도전을 낳았고 청중들에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을 포함한다. 예수에게는 성취하고자 하는 과제와 목적이 있었기에 특별한 조력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수는 청중들 중 일부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을 따르라고 구체적으로 명령하였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12제자라는 측근 집단들이 있었고 이들은 이스라엘의 재구성을 의미했다. 예수가 그들에게 탁월한 지위를 약속한 것은 그들을 통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을 염두에 두었음을 암시한다.
(2) 부자 청년
공관 복음서에서 예수의 부르심은 부자 청년 이야기에서 절정에 달한다. 부자 청년의 질문은 물론 하나님나라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청년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토라를 폐기하고 무시간적인 윤리를 제시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대답은 토라가 아니라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토라는 그 진정한 의도가 성취되는 것을 통해서 상대화되고 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하나님나라 이야기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함축된 종말론, 토라의 위치,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였다.
(3) 하나님나라 선포를 도우라는 부르심
(4)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부르심
공관복음 전승에서 예수를 따르라는 부름은 흔히 정치적인 위험과 그에 수반된 죽음을 각오하라는 부르심으로 강화된다. 유대의 순교자 이야기의 맥락에서 보면 이러한 부르심은 헌신한 자들이 나중에 야훼의 신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함의를 지닌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는 사실은 예수 및 그의 제자들을 주후1세기의 사회적, 정치적 전복운동들의 역사적 맥락에 확고하게 위치시킨다.
(5) 큰 계명과 선한 사마리아인
이웃에 대한 율법사의 질문 배후에는 계약의 경계선이 어느 지점이냐는 관심사가 있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예수의 사마리아인 비유는 이스라엘, 토라 자체 그리고 암묵적으로는 성전 제의의 계약적 경계를 극적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율법사는 어떻게 하면 장차 도래한 새 시대를 물려받을 것인가를 질문하였고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예수를 따라서 토라 준수에 대한 새롭고 근본적인 길을 구하라는 것이었다. 계약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택함 받은 백성의 경계 너머에 있던 자들을 다시 이웃으로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의롭다함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계약의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마지막으로 행하실 때에 신원을 받게 될 것이다. 사마리아인 이야기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6. 많은 이들이 동서로부터 오게 될 것임
주후1세기 유대인들의 기대의 흐름에는 이방민족들의 운명은 이스라엘의 운명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야훼는 이방인들에게 행하고자 의도했던 일을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루실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야훼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기로 하신 것을 이루셨을 때 이방인들은 그 결과에 동참할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이방에 대한 심판을 행할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이 이스라엘의 축복에 참여할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 왕으로 통치하신다고 선포하는 것은 마침내 하나님나라가 이스라엘을 넘어 땅 끝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의미의 종교 공동체를 창출할 뿐이고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가 이스라엘에게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고 도전한 것은 동시대의 유대인들이 이방에 대한 승리에만 관심이 있고 이방세계에 야훼의 구원을 선포하는데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물론 예수가 자신의 사명과 또한 제자들의 사명을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예레미야스의 말대로 예수는 이스라엘의 택함과 우선권을 인정한 것이지 이방인들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제2성전 시대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적어도 일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장차 도래할 하나님나라에 참여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며 자신의 하나님나라 선포에서 이스라엘의 소명은 마침내 실현될 것을 암시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세상의 빛이 되어서 열방들이 그 빛을 보고 하나님께로 와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서 걸림돌은 그 종교적 의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종말론적 그러니까 정치적 의미에 있었다.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이방세계에 대하여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소명을 저버린 이스라엘에게 준엄한 경고를 하였다. 이런 식으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는 유대적 뿌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예수의 관점에서 볼 때 야훼가 이스라엘을 다루는 이야기는 더 큰 이야기 즉 창조주가 온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었다.
7. 참된 지혜
예수는 동시대인들에게 기존의 지혜의 길을 버리고 예수 자신이 제시하고 실천으로 보여주는 새로운 길을 따르라고 촉구하였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유대 전승의 위대한 지혜교사들의 반열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지혜교사로서의 예수상이 다른 강조점들에 비하여 지나치게 과장된 것이 문제다. 특히 예수 세미나의 구성원들은 예수가 지혜교사임을 강조하면서 예수는 예언자가 아니었고, 미래에 대해 말하지 않았으며 묵시사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대세계에서 지혜와 예언, 지혜와 묵시상은 서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 있다. 유대전통에서 예언자와 묵시론자는 유대 지혜 전승의 과제들을 공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지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세계를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비밀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유대세계에서 참된 지혜는 이스라엘 이야기 및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솔로몬의 지혜서에서 지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악을 무찌르고 그의 백성을 해방시키며 신원할 것이라는 신학과 철저히 양립하며 그 신학을 뒷받침 해준다. 벤시락서에서 말하는 지혜도 위대한 지도자들과 영웅들 속에서 부각된 이스라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쿰란 두루마리도 지혜와 묵시사상을 분명하게 결합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혜는 이스라엘 이야기와 그 전통적인 모티프라는 배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유대 문서 어디에도 지혜를 개인적이고 비의적이며 비역사적인 지식으로 말하지 않으며, 지혜는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한 참된 해석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 신원을 받는 것을 의미하였다. 지혜와 묵시사상은 서로 배제하지 않고 보조를 같이하며, 둘 다 모두 이스라엘의 소망과 관련된 문제, 역사의 결정적인 시기에 야훼의 백성이 되도록 이스라엘이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문제를 말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지혜 교사로서의 예수는 궁극적으로 예언자 예수의 하위 범주에 속하며 예언자 예수의 한 측면일 뿐인 것이다.
요컨대 예수는 자신의 종말론적 확신들을 지혜 양식들을 통해서 표현했던 현자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말씀들은 그의 종말론적 확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혜였다. 그러므로 예수를 하나의 현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그를 하나님나라 도래에 관심이 없는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잘못된 신학적 시도이다. 예수에게 진정으로 중요했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및 세계를 다루시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예수 자신의 사역 속에서 절정에 도달한 이야기였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현실 질서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청중들에게 기존의 메타서사들을 버리고 예수 자신의 이야기를 따르도록 초대하였던 것이다.
8. 결론 :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예수는 그 이야기에 응답한 자들이 스스로를 참되고 회복된 이스라엘로 보도록 의도하였다. 우리는 예수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그들의 특징을 이루는 삶의 방식을 제시하였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의 이런 가르침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매도하거나, 반대로 단순히 무시간적인 윤리로 취급하거나 또는 종말론적 차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주후1세기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매우 다른 종류의 종말론적 성취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이것으로부터 다음 세 가지 주제들이 도출된다..
첫째, 예수는 이스라엘이 로마에 맞선 폭력혁명을 포기하고 예수의 대안적 비전을 따르지 않는다면, 즉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비참한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고 일관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경고하였다. 그러나 야훼의 참된 백성들은 장차 도래할 심판에서 신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8장의 주제이다.
둘째, 예수가 제시한 하나님나라 비전에 충성하는 무리들로 구성되는 공동체들은 에세네파와 같이 은둔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파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리고 그런 충돌은 종교, 제의, 도덕률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예수와 그의 경쟁자들과의 충돌, 이것이 9장의 주제이다.
셋째,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청중들에게 도전과 부르심으로 작용하였지만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과제의 모든 것이나 최종적인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물리적으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신학적으로는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것을 향하여 가고 있었다. 여기서 세계관과 관련된 질문이 나오는데 예수는 이스라엘 및 세계에 대하여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 해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것이 10장의 주제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초대, 환영, 도전, 부르심)의 직접적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예수의 공생에 동안에 추종자들의 무리가 있었지만 그 성격은 대단히 모호했고 그들은 상당부분 실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가 제시한 길은 추종자들의 실패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신원되었다. 예수는 제자들이 그의 공생애 동안에 부르심을 따르는데 실패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야훼 백성의 갱신된 공동체로 회복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8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3]
N.T. 라이트/JVG
2015-06-17 22:56:43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
제8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이야기들 : 심판과 신원
1. 서론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의 결말부분에는 임박한 민족적 재난, 장차 도래할 정치적, 군사적, 사회적 재앙과 그 결과로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경고가 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이런 재앙을 피하게 될 것이라는 확언이 있다. 이 두 가지는 마가복음 13장과 그 병행문들 속에 하나로 통합되어 나온다. 유대인들은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종말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이 다시 읽혀져야 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종말론적 경고는 세상의 물질적 종말이 아니라 시공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날 사건들을 의도한 것이다.
2. 다가올 대재난
(1) 서론
공관복음 전승에는 심판에 대한 수많은 경고들이 발견된다.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 전체 특히 예루살렘에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한 것은 분명하다. 예수는 통상적인 유대인들이 이방에 임할 심판이라고 생각하는 그 심판이 오히려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임할 것이라고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경고들은 명백히 역사적 배경을 가진 경고들, 즉 예루살렘의 멸망을 포함한 민족적 재난에 관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경고는 당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음과 같은 다중적인 성격을 지닌다. 예수의 경고가 가진 이런 네 가지 요소들에는 고전적인 예언자적 성격, 내부로 부터의 비판이라는 성격이 발견된다. 예수가 다시 말한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현 체제는 심판을 받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새 이스라엘로서 신원을 받게 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첫째로 예수의 경고는 당시의 유대교의 분파주의의 맥락과 부합한다. 현 체제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고 더구나 반유대적인 징후도 아니었다. 예수의 엄중한 선포들은 주후1세기 유대교 내부의 논쟁의 세계 속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둘째로, 예수의 경고는 로마의 위협적인 지배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주후1세기 배경과 잘 부합한다. 요세푸스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이스라엘의 폭력적인 저항은 결국 멸망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수는 그것은 계약의 하나님께 대하 불충성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라고 해석하였다.
셋째, 예수의 경고는 오랜 세월 동안의 예언자 전통을 반영하고 있었으며 그 경고는 추상적이고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현 세대가 직면할 역사 속의 특정한 시기를 지목하고 있었다.
넷째 예수의 경고는 유대교내의 주류의 흐름들과 정면으로 배치되었다. 그 경고는 혁명을 추구하는 바리새파나 성전을 중심으로 권력을 추구하는 제사장 그룹을 향한 도전이기도 했다.
(2) 세례 요한
예수의 경고가 세례 요한의 경고 예언들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예수의 경고와 마찬가지로 세례요한의 경고도 역사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3)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과 경고들
예수는 심판의 경고들을 약화시키지 않고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예수의 경고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전통수호를 자처하는 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그의 나라를 세우고 있다는 전제가 내포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이스라엘을 재정의하고 있었다. 참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 이스라엘 밖에 있다는 것은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길을 배우지 않는다면 곧 때가 늦게 될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길을 이스라엘에게 제시하였고 이 길을 거부하는 자는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수가 제시한 그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어서 찾는 자가 적은 그런 길이었다. 예수의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는 그의 가르침, 이야기들, 행보들 전체에 걸쳐서 반복하여 울려 퍼졌으며 이 경고는 이스라엘을 재정의하는 것이었다.
(4) 이 세대에 대한 심판과 경고들
예수의 경고는 이 세대를 향한 구체적인 경고였지 시공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의 심판 목록은 이 세대를 향한 구체적인 경고로 끝을 맺는다.
(5)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심판과 경고들
예수는 당시의 다른 유대교 분파와 마찬가지로 참된 성전을 세우는데 동참하라고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은 머지않아 파괴될 것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예수의 성전 행위가 의미를 갖게 된다. 예수는 여러 다양한 말씀들을 통해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암묵적인 선언을 하고 있었고, 자신도 더 이상 성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시작하고 있었다. 예수는 자신이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할 수 있는 예언자적이고 메시야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주장했고 이것 때문에 당국자들 앞에서 고소당하고 심문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3. 신원의 확신
그러나 예수의 심판과 경고는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들의 신원으로 끝난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근본적인 소망에 대한 확언이며 재천명이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서 변함없는 강조점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재난을 모면하며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신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약속을 상속할 자들이며 포로해방을 경험할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위대한 구원에 앞서 올 시험과 환난의 때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악한 자로부터 구원을 받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예수를 따르던 자들은 궁극적으로 환난과 핍박 속에서 보호받고 보존될 뿐 아니라 장차 위대한 갱신의 때가 이르면 열두 보좌에 앉아서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잃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돌려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택하신 자들을 신속하게 신원하실 것이다. 예수는 성전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예수가 새로운 성전을 지을 것이고 그의 백성은 진정한 예루살렘이 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예수의 이야기 전체에는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과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 대한 신원이 함께 요약되어 나타난다. 예루살렘의 멸망 그리고 제자들의 구원은 예수가 그의 전 사역에 걸쳐 말했던 것이 옳았음을 입증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들을 유대적 회복 종말론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부언하면 예수가 이스라엘의 소망들을 재정의하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의 과제들을 중심으로 재형성했던 사고 도식 속에서 예수의 말씀들을 보아야 의미가 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사성과 상이성이라는 이중적인 판별이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작용한다. 예수는 당시에 주류를 이루고 있던 회복 종말론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즉 장차 도래할 심판과 신원을 포함한 이스라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예수가 그 앞의 무수한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심판과 신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줄거리는 동일하다. 다만 등장인물과 배역이 바뀌었을 뿐이다.
불트만을 비롯한 주류 학계는 위에서 거론한 예수의 말씀들의 대부분을 초대교회의 것으로 간주한다. 현상주의 혹은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기반으로 한 주류 학계에서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위에서 제기한 가설이 자료들의 의미를 더욱 잘 밝혀주고 불트만 이후의 여러 대안들 보다 더 폭넓은 분야에 빛을 비추어 준다고 확신한다. 이 가설이 유대교 및 초대교회와 유사성 및 상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이 가설의 역사적 개연성을 보여주는 증거다.
4. 마가복음 13장과 그 병행문들: 장차 도래한 멸망과 신원
(1) 서론
마가복음 13장과 그 병행문들은 내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예수의 사역 전체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경고들과 약속들을 통합하고 있다. 그 무대는 신빙성이 있고 그 시기도 마찬가지로 완벽하며 그 내용도 의미가 잘 통하고 그 언어도 상황에 잘 맞는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묵시록으로 취급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이 구절이 주후70년의 사건들에 비추어 이후에 창작되었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 구절에 나타난 인자의 의미에 대한 오해가 진지한 역사적 읽기를 방해한다. 여기서 인자의 이야기를 예수의 재림 사상으로 읽으면서 바이스나 슈바이처는 예수가 임박한 종말을 예언하였는데 그 예언이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고, 반면에 오래된 경건주의 전통은 이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잘못되었다. 제자들은 예수가 합법적인 왕으로 등극할 것을 기대하고 예루살렘에 왔으며 이것은 예수가 성전이 상징하던 권세를 넘겨받는 것을 필연적으로 포함하였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전의 파괴라는 깜짝 놀랄만한 예언에 직면하였고 성전의 파괴가 곧 예수 자신에 대한 신원이라는 선포를 들었다. 이런 배경에서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 말은 예수가 신원을 받고 합법적인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구절을 주후1세기 사람들의 귀에 들려졌을 그대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이 대목이 현세적이고 혁명적이며 사회정치적 준거를 지니고 있다는 것과 또한 이 대목이 철저하게 상징적이고 신학적이며 신화론적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읽기이다.
(2) 예루살렘의 멸망
마가복음 13장을 오독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 신학에서 예루살렘 멸망이 신학적 의미를 전혀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가복음13장 뿐 아니라 복음서들에 나오는 물리적인 재난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문자 그대로 내세에 있을 지옥불에 관한 일반적인 경고로 이해했다. 예수는 당시 많은 분파주의적 유대인들이 말했을 법한 방식으로 또한 요세푸스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피할 수 없으며, 그것을 이스라엘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것이다.
주후1세기의 전형적인 유대인들이었던 제자들이 예수의 감람산 강화를 시공간상의 우주의 종말로 생각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제자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와서 왕으로 통치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성취되고 이스라엘의 성서에 나온 그 이야기가 정해진 절정에 도달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다렸던 “이 시대의 끝”은 결코 시공간상의 질서의 종말이 아니라 현재의 악한 시대(포로생활)의 종말이자 다가올 새 시대(해방과 신원)의 개시였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24:3의 “주의 임하심”은 주후1세기 배경 속에서는 “예수 재림의 파루시아”가 아니라 예수가 예루살렘의 현 세력들을 몰아내고 왕으로 등극한다는 의미에서의 예수의 오심 혹은 도래로 이해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3) “화”들의 시작과 제자들의 시련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에서 시작부분은 전형적으로 개작된 묵시사상의 단편이다. 예수는 장차 일어날 사건들이 메시야적 재앙이며 새 시대를 위한 산고라고 대답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재탄생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4) 비상사태의 구체적인 징조들
이 대목은 주후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요세푸스의 서술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기 이후에 기록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되어 왔다. 이런 의심에는 상당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대목을 사건이 일어난 후에 역사를 사이비 예언으로 전환시킨 어설픈 시도로 읽는 것보다는 성서에 나오는 고대 예언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예수는 성서적 배경을 가진 이스라엘의 예언자적 유산을 다시 사용하여 자신의 전체적인 목표들과 부합하게 그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기 때문에, 가설로 전제된 예수의 사고방식과 관련하여 시사해주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가 예언 전승으로부터 이야기 줄거리를 가져와서 자기 사역의 초점에 맞추어 다시 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가복음 13장 전체는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언으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그 멸망이 이스라엘의 배교와 성전의 타락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암묵적인 주장으로 읽어야 한다. 여기에 인용된 구약성서를 현재의 맥락과 결합시키면 예수는 예루살렘을 이교도들의 침공으로 더럽혀진 희생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자체를 바벨론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바벨론의 멸망, 그 와중에서의 이스라엘의 도피에 관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예언들, 하나님의 백성의 신원과 악한 제국의 멸망에 관한 다니엘의 예언은 여기에 잘 부합한다. 마가복음 13장과 그 병행문들에 간접 인용된 구약 본문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를 반대하는 세력은 로마가 아니라 현재의 예루살렘과 그 지배층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과 제자들의 피신은 이스라엘의 신원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진정으로 왕이 되셨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
(5) 인자의 신원
인자의 오심은 어떤 인간적인 존재가 실제로 구름을 타고 땅으로 내려온다는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파루시아를 가리키지 않는다. 또한 인자라는 어구 자체도 초인간적인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언어들은 단순히 중요한 사회정치적 사건들을 가리키고 그 사건들의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전형적인 유대적 이미지들이다. 특히 인자의 오심과 관련하여 다니엘7장은 이 장면을 땅의 관점이 아니라 하늘의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인자의 오심은 인자라는 존재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아가는 것, 즉 고난 후에 신원을 받고 땅으로부터 하늘로 간다고 읽어야 한다. 다니엘서의 이야기는 언제나 신원과 승귀에 관한 이야기였고 주후1세기에도 그렇게 이해되었다.
이렇게 인자의 오심은 원수들의 패배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원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대한 주후1세기의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그리고 마가복음 13장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형태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한 세대 이전에 예수는 성전의 파괴를 예언했다. 만일 성전이 건재했다면 예수의 운동은 사라져버렸을 것이고 예수는 거짓 예언자임이 입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교도들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고 희생제사가 멈추고 예수의 제자들은 무사히 도피를 한다면 예수는 이제 단순한 예언자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표자인 인자로서 신원을 받게 될 것이다.
이 때 일어날 현상들로 묘사된 우주적인 경천동지의 모습들은 현세에서 일어날 놀랍고 엄청난 사건들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유대적 이미지들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그 정해진 절정으로 이끌기 위한 사건들을 유대인들이 전형적인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표현했던 것이다. 인자의 신원의 결과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마침내 끝나는 것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이 소망이 예수 자신 및 그의 백성들을 통해 성취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예수의 백성이 파국에서 피신한다면 그것은 야훼가 왕이 되시고 그의 참된 백성이 포로에서 해방되는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 된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이 일이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슈바이처와 그 후의 수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한 세대 내에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결국 예수의 말은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학자들은 묵시론적인 이런 말을 예수가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초대교회가 이 대목을 날조했지만 결국 초대교회도 틀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잘못된 주장들이 모두 묵시론적 언어들에 대한 엄청난 오해에서 나온 것이다. 이 대목은 이미 예수의 사역 속에 현존하였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절정에 달했던 하나님나라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통해서 신원을 받게 될 한 세대 내에 분명히 드러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6) 노아, 롯, 그리고 인자
5. 결론: 심판과 신원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이야기는 당시의 전형적인 유대인들의 이야기 패턴과 다음 두 가지 점에서 잘 부합한다. 첫째 예수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기나긴 포로생활이 어떻게 그 결말에 이르게 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둘째, 예수의 이야기는 예루살렘에 있는 현 체제를 격렬한 성토의 대상으로 삼는 전복적인 이야기였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야기를 경구들이나 격언 성격의 가르침으로 왜곡하거나 무시간적인 도덕이나 교리적 가르침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야훼께서 이루시는 새 일,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그 일을 예언자로서 행하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스라엘의 일탈과 부패를 규탄하였지만 그것은 반유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참된 조상들의 예언자 전통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역사적인 가설들을 포함하는 학문적이 가설로서 요구되는 다음과 같은 강점을 가진다. 첫째로 이 관점은 자료들을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해준다. 이 관점을 통해서 전체적으로 서로 잘 연결되고 의미가 통하는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이 관점은 예수를 주후1세기의 유대교 세계 속에 위치시키는 단순한 틀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관점에서 도출된 예수상은 수많은 해결되지 않은 자료들을 도처에 남겨둔 채 얼기설기 엮은 것이 아니다.
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9장 상징과 논쟁]
N.T. 라이트/JVG
2015-06-17 22:57:12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
제9장 상징과 논쟁
1. 서론 : 하나님나라, 상징, 논쟁
(1) 상징들에 관한 문제
실천은 사람을 당혹하게 할 수 있고 이야기들은 전복적인 성향을 지닐 수 있지만 상징을 공격하면 사람들은 포악해진다. 적대감을 생성시키는 것은 상징들의 충돌이다. 이 장에서는 예수가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제2성전 시대 유대교의 상징들을 공격하였고 동시에 하나님나라 선포의 일부로서 새로운 상징을 내세운 것이 그가 받은 적대감의 주된 원인임을 논증하려고 한다. 상징 세계들의 충돌은 예수가 처형된 이유와 직접 결부되어 있다.
예수의 죽음을 설명하는 두 가지 표준적인 방식이 존재하는데 첫째는 예수는 유대인 혁명가였으며 로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는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처형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종류의 종교를 설파한 교사였던 예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사랑, 긍휼, 은혜를 설파하였고 토라를 반대하였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런 종교적 이유로 예수를 반대하였고 정치적 죄목을 씌워서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어 죽게 했다는 것이다. 첫째는 정치적 예수라는 인물을 상정함으로써 십자가 사건은 설명하지만 예수의 사역과 논쟁들은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는 종교적 예수라는 인물을 상정함으로써 논쟁들은 설명하지만 주후1세기 유대인들에 관한 대부분의 증거들을 희생키시며, 또한 십자가 사건을 설명하지 못한다.
샌더스의 강력한 주장이후에 최근에는 예수의 성전 행위를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종교와 정치라는 해묵은 대립 구조를 효과적으로 제거하며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역사적으로 개연성 있는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도 예수의 공생애 초반에 일어난 종교적 논쟁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실천과 이야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이중적 주장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되고 야훼가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주장과 야훼의 심판이 이방인에게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충성한 자들에게도 임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예수의 이런 주장은 제2성전 시대의 갱신운동들의 특징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두드러지게 달랐는데 그것은 예수는 성취와 재난, 이 두 가지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2) 논쟁에 관한 논쟁
예수와 대적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그것이 순수한 종교적 논쟁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예수는 사랑과 은혜의 종교를 설파하고 율법의 외적 준수가 아니라 내적 준수를 강조하는 교사였으며, 이에 반해 율법 준수를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반율법적인 위험한 존재로 간주했고 그래서 상호간에 논쟁이 벌어졌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전통적 읽기는 최근에 특히 샌더스에 의해 역사적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를 받아왔다.
예수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뿐 아니라 상징을 통해서도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였다는 점을 제시한다. 예수는 자신이 제시하는 하나님나라 비전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을 공격했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이스라엘을 어그러진 길로 이끄는 죄를 범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논쟁은 종교나 도덕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과 정치에 관한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종말론적으로 예수는 이스라엘의 소망이 지금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혁명적 열심을 반대하였던 것이다.
논쟁에 대한 양식비평의 통상적인 전제들은 논쟁 이야기가 초대교회의 특정한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사문법이나 전승사 속에는 논쟁이야기들이 후대의 창작물이라 주장할만한 근거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초대교회의 격렬한 논쟁거리들이 복음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논쟁의 역사성을 반대하는 논거들은 20세기 유대인 대학살 이후에 등장한 유대인과 기독교를 화해시키려는 신학적 주장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이런 주장은 분명히 예수에 대해서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관해서도 논증할 필요성을 초래한다. 예수가 동시대의 유대인들을 반대하지 않았다면 왜 초대교회는 동시대인들을 반대하였는가? 논쟁의 역사성을 반대하는 몇 가지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1. 데이비스(Davies)는 논쟁이야기들은 예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하지도 않고, 주후70년까지의 교회 상황을 반영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논쟁 이야기들은 랍비들의 얌니아 회의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배척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논쟁을 예수 시대로 투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후85년의 얌니아 회의의 역사적인 증거는 매우 희박하며 그리스도인들과 바리새인들 간의 대립은 주후85년이 아니라 주후 35년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던 때 시작되었다.
2. 예수를 갈릴리 출신의 하시드로 묘사하는 게자 버미스((Geza Vermes)는 예수를 동시대인들과 충돌한 인물로 보지 않으며 논쟁 이야기의 역사성 자체를 부인한다. 그의 주장은 예수가 누구인가에는 나름대로 답하고 있지만 예수는 왜 처형당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3. 유대인 학자인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는 예수와 바리새인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예수는 유대교와는 완전히 다른 종교제도를 세우려고 했다고 주장한다. 뉴스너의 이런 주장은 역사적 증거와는 거의 상관이 없다. 예수는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종교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의 핵심적 소망이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예수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유대교와 다른 새로운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유대교의 소망이 성취되고 있음을 선포했고 따라서 예수와 유대인들의 논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가장 중요한 주장은 샌더스의 주장이다. (a)그는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작은 집단이었을 뿐이고 (b) 그들은 예수를 적절한 논쟁 상대로 보지 않았으며 더구나 폭력적인 방법으로 응수하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c) 바리새인들이 관심은 다른 사람들의 정결을 살피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결에 있었으며 (d) 예수의 가르침 대부분은 토라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화하였으므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예수가 율법을 비난했다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e) 그러나 예수는 율법을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러 가지 점에서 모세 체제의 적합성에 도전하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대변자로 자처했던 예수의 주장 및 그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아울러 바리새인들의 진정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의 주장이 성전과의 갈등을 일으켰을 때, 이것은 그의 죽음을 초래하였다.
샌더스의 마지막 주장(e)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충돌의 원인은 종교적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샌더스가 묘사대로 종말론적인 충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종말론적 신념들과 과제들이 충돌의 근본 원인이었다. 그러나 샌더스는 자신의 나머지 주장들에서 이런 통찰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했다. 샌더스의 나머지 주장들은 다음과 같이 반박될 수 있다.
(a) 예수 당시에 중대한 정치적 사건들에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참여하였고 그들이 다 바리새인이 아닐지라도 바리새파 운동에 공감하고 참여하는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요세푸스가 [유대 고대사]에서 6천명이라고 말한 것은 헤롯 치세 중 가이사에게 충성맹세하기를 거부한 바리새인의 숫자를 가리킨다..
(b) 물론 바리새 분파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지만 폭력이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주장이 단순한 윤리나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주장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예수의 종말론적 주장은 바리새인들의 프레임과 전제에 도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반대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으며 유대 민족 전체에 대규모의 결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주장, 그리고 이런 일들이 예수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 이것이 예수의 종말론적 신념이었다.
(c) 바리새인들의 주된 관심은 단순한 정결이 아니라 정결이 상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것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해방을 위한 정치적 투쟁이었다. 특히 주후70년까지 샴마이 학파는 강한 혁명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다소의 사울이 보여준 열심은 예수 시대에 바리새인들의 과제를 주도했던 샴마이 학파의 노선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들 분파외의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왕과 제사장들 같은 지배계층을 비판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의 정결을 방관하지 않았다.
(d) 물론 예수가 토라를 강화했다면, 그의 추종자들이 반율법주의자들처럼 되어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에 대한 예수의 태도가 아니라 샌더스가 인정하듯이 예수의 종말론적인 주장이었다. 예수는 토라를 비판하지 않았지만 예수의 종말론적 신념에는 성서의 약속이 성취되었을 때 토라의 최고의 지위는 상대화된다고 주장이 내포되어 있었다.
(e) 율법의 문제에서 초대교회가 그 핵심을 파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은 예수의 강령이 율법에 대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소망에 대해서 말했고 그 소망이 자신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선포했으며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그 소망이 실제로 실현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초대교회는 새롭게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분투했다. 예수의 종말론적 주장에서 문제는 토라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및 세상에 대하여 무엇을 행하고 계시며 그 가운데 토라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것이다. 이른바 바울의 율법 비판은 율법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된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토라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수단이 된다면 토라는 걸림돌이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세계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부르고 계시므로 이 가운데 토라가 기여할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토라와 관련된 핵심 쟁점은 이방인들을 받아들일 때 할례를 시행하느냐 여부의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이방인과의 식탁교제의 문제나 안식일 준수의 문제도 이방 그리스도인들의 신분의 정의(statue-definition)라는 문제와 결부된 것이었고, 바울이 문제 삼은 것은 이런 것이었다. 바울은 지금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그들이 유대인으로 개종하여 토라의 멍에를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토라를 비난하였다면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샌더스의 말은 옳지 않다. 예수가 토라를 선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듯이 바울은 토라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바울은 예수가 직면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효과를 철저하게 생각했던 것이지 예수와 다른 신학적 입장을 주장했던 것이 아니다.
(f) 예수는 새로운 경륜의 날이 지금 동터오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여러 가지 점에서 모세 시대의 적절성에 도전했다는 샌더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수를 그의 동시대인들과 충돌하게 만들었고 결국에는 그의 죽음을 초래한 것은 바로 예수가 주장한 종말론적 강령이었다. 분명히 이것이 예수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하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2.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상징들: 안식일, 음식, 민족, 땅
(1) 서론 : 배경과 과제들
예수와 동시대 유대인들 간의 주된 논쟁은, 때가 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나라를 개시하고 계시며, 예수의 이야기, 실천이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는 방식이자 수단이라는 예수의 주장이었다. 여기까지는 샌더스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는 시기만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의 성취를 위해 유대인들이 추구하던 길을 버리고 예수가 제시하는 새로운 길을 따르라는 요구였고 동시에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한 경고였다. 예수의 이런 복합적인 하나님나라 선포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을 촉발시킨 것이다.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의 주도적인 과제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히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야훼에 대한 열심은 곧 토라에 대한 열심을 의미하였는데 그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준수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존하고 폭력혁명을 통해서라도 로마의 멍에를 벗어버리려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과제 때문에 예수와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들에게 하나님나라는 민족의 해방과 이교도의 패배였다면, 예수에게 하나님나라는 그런 열망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파와 예수가 충돌하고 논쟁을 벌였던 핵심 쟁점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정결규범과 정치적 열망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에게 성전제의, 안식일, 음식법, 그리고 할례는 유대인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핵심적 상징들로서 그들의 정치적 및 종교적 과제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수단이었다. 요컨대 성전, 안식일, 할례, 음식의 정결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결정적인 표지였고 그러한 표지를 위협하는 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은 저항하였다.
유대인들의 율법준수는 펠라기우스주의의 초기 형태로서 그들은 도덕적 노력을 통해 칭의 또는 구원을 얻고자 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부인되어야 한다. 샌더스는 주후1세기의 자료에 비추어 볼 때, 그런 개념은 철저하게 거짓된 것으로서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유대인의 율법 준수는 그 세부적인 내용들에서 유대민족을 구별하는 경계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민족의 경계와 열망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해결책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로 보았다.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있었고, 이방의 빛이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소명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위한 표지로서의 토라는 상대화되어야 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예수의 재정의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강조가 상징이 되어 있던 사회에는 강력한 도전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유대인의 상징들에 도전한 것은 새로운 종교나 윤리를 전파하려는 것이거나 유대교에 대해 반대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절정이 큰 기회와 함께 위험을 수반하며 다가오고 있다는 예수의 종말론적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는 유대인의 상징들에 도전했지만 토라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선택사상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운명과 이스라엘의 소명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스라엘을 재정의하였던 것이다.
(2) 안식일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안식일 관련 이야기에 대해 샌더스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가 안식일에 했던 일은 불법적이거나 비난을 받을 일들이 아니었으며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도 랍비들의 가르침에서 용납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예수는 안식일 준수를 비난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샌더스는 이 논쟁들은 초대교회의 논쟁들의 투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샌더스가 예수가 회복 종말론의 예언자였다는 그의 기본적인 명제에서 비종말론적인 종교와 윤리라는 논거로 후퇴하는 주장이다. 종말론으로 돌아가면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주후1세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는 평범한 유대인이 아니었고 따라서 바리새인들에게 주목의 대상이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혁명적 열망에 반대하였고 그것을 이스라엘 하나님과 성서의 권위에 의지하여 주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주목하고 그의 주장이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하는지 조사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곡식 이삭을 잘랐다는 죄목에 대한 반응로서 주어진 예수의 이야기는 율법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이 선포하는 하나님나라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다. 사울의 핍박을 피해 도망 다니던 다윗은 사실 진정한 왕이었고 적절한 때에 야훼의 신원을 받았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와 그 추종자들은 다윗과 그를 따르던 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다윗을 고발한 에돔 사람 도엑에 해당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덧붙인 인자란 말을 주후1세기 유대인들은 다니엘서에서의 맥락 속에서 이해했을 것이다. 그것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이방의 원수로부터 신원할 때를 가리키며 그 신원의 중심인물은 다가올 위대한 승리의 선봉장이 될 다윗 가문의 왕을 암시한다. 예수가 의도적으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은 이스라엘의 오랜 열망이 자기 안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기뻐하게 될 위대한 안식의 날이 자신의 사역 속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범한 사례들에 대한 예수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 정당성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종말론적 확신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 이야기들은 초대교회가 자신들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들은 그것이 탄생한 정치적 상황들이 사라지면서 초대교회에서는 논점이 약화되었다. 그러므로 안식일 논쟁은 예수 당시의 주후1세기 유대인들을 배경으로 할 때에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3) 음식
이 이야기는 손을 씻는 관습에 대한 논쟁으로 시작하여 바리새인들의 전승에 대한 예수의 비판으로 이어진다. 이야기의 쟁점은 물론 정결이지만 그 배후에는 역시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문제가 있다. 예수는 토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의 해석이 참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진정한 정결은 마음의 문제이고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통상적 정결의식들은 정결의 문제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이렇게 읽으면 이것도 초대교회의 삶의 반영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보아야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재정의하고 계시며, 진정한 정결은 재정의된 이스라엘의 마음이 새롭게 됨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민족과 가족
이스라엘은 자신의 정체성의 결정적이고 중심적인 부분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는 공통의 조상으로 부터 얻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과의 통혼을 엄격하게 막았다. 유대인들에게 민족적 연대는 주요한 상징이자 경계 표시기능을 했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은 유대인들의 세계관 전체를 유지시켜주는 민족이라는 상징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징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예수가 민족주의를 반대하고 다원주의를 주장한 종교개혁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하나님나라를 선포한 종말론적 예언자였다. 예수는 유대인의 상징들이 악하다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역을 통해 동터오는 하나님나라에서 그런 상징들이 불필요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민족이라는 상징 대신에 예수는 자신 및 하나님나라 운동에 대한 충성을 통해 대안적인 가족을 창설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달리 말하면 예수는 자신에 대한 충성을 유대인들의 민족이란 상징이나 가족 정체성보다 우선한 것이다. 이런 주제는 예수 당시의 유대적 세계에 대한 충격적 도전이었으며 아주 신속하게 바울 등에 의해 주창된 다민족주의의 뿌리로서 그 의미가 잘 통한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선포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가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종말론적 긴급성을 의미했다.
(5) 소유물들
고대세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소유물은 땅이었고 땅은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던 가장 기본적인 유업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땅은 야훼께서 그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거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소유물을 포기하라는 예수의 명령은 가족적 충성을 버리라는 명령만큼 문제가 되는 주제였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은 땅을 분배받았고 특히 포로기 이후에 땅에 돌아와 땅을 유업으로 지키는 것은 유대인의 종교적 상징체계의 일부였다. 가족과 함께 땅은 유대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상징적 기능을 하였는데 예수는 민족과 땅이라는 이 두 주요한 상징에 도전을 한 것이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 예수의 하나님나라 과제에 충성하는 자들은 비록 그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상징들: 성전
(1) 서론
지난 20년간 예수 연구에서 중요한 성과들 중의 하나는 예수와 성전의 관계에 대한 주제가 논의의 중심으로 다시 복귀한 것이다. 예수가 성전에서 극적인 행위를 했고 이것이 그가 처형당하게 된 주된 이유라는 점에서 학자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성전 행위가 정확하게 무엇이며 왜 그런 행위를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아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성전과 그 의미
예수 당시의 성전은 유대교의 중심 상징, 이스라엘의 가장 특징적인 실천의 장소,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들 중 일부의 주제, 이스라엘의 가장 깊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들 중 일부의 주제였다. 그리고 그곳은 예수가 그의 가장 극적인 공적 행위를 하려고 선택한 장소였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계약의 하나님이 임하시는 장소로 여겨졌으며 또한 성전은 희생제사의 장소였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사셨던 장소임과 동시에 죄와 부정들을 처리해서 개인적으로든 민족으로든 사림들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임재를 누릴 수 있게 해준 희생제사의 장소였다.
또한 성전은 정치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최초의 성전인 솔로몬 성전은 왕권의 핵심적인 특징이었다. 마카베오 가문이 주전 164년에 성전을 정화한 것은 하스모네 왕조의 창건의 길을 열어 주었고 헤롯이 성전을 웅장하게 재건한 것은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주장과 관련된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식으로 성전은 유대교의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핵심 상징이었다. 그래서 성전은 이스라엘의 신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야훼의 약속, 야훼께서 백성들의 부정함, 죄악들, 궁극적으로 포로생활을 해결하실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성전을 짓거나 재건하는 통치자들에게 부여되는 정통성을 상징하였다.
물론 예수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동일한 열정으로 성전을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다. 하스모네 대제사장의 왕조를 악한 찬탈자로 간주했던 에세네파는 성전제의를 거부하였고 바리새인들 혹은 그들의 후계자로 자처했던 랍비들은 토라 연구가 성전과 거의 대등한 기능을 한다는 신학을 발전시켰다. 랍비들이 성전제의를 대신하는 토라 연구 및 실천을 강조한 것은 시기적으로 성전 파괴 이후에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3) 성전에서 예수의 행위
그렇다면 예수는 성전에서 무슨 행동을 했고 왜 그런 행동을 한 것인가? 많은 학자들은 예수가 성전제의를 폐지하려던 것이 아니라 개혁하려던 것이라고 믿는다. 최근에 일부 학자들은 예수는 성전의 파괴 자체를 상징적으로 실현하였다고 주장한다. 고대 역사의 많은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성전행위는 명확하게 그 성격을 결정지을 수 없는 사건이다. 하지만 성전행위가 예수가 아무 의도 없이 임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당연히 예수의 성전행위는 그의 사역과 밀접하게 통합되어 있고 그 정점을 이루고 있다고 가정해야한다. 그리고 이전의 모든 논증을 바탕으로 볼 때, 예수의 성전행위는 심판을 행위로 보여준 비유로 보아야 한다. 또한 복음서 내부와 외부의 거의 모든 전승들이 성전의 파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예수의 성전행위는 성전의 정화나 개혁이 아니라 성전의 파괴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전파괴의 모티프는 성전에서 계속 예배를 드렸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관행과 아주 다르기 때문에 초기 기독교 신학의 한 특징의 투영으로 볼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왔을 때 예언적인 상징 행위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을 보여주었다. 그 심판은 성전행위 이전과 이후에 여러 행위와 말로써 알렸던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삶의 중심적 상징이었던 성전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였고, 만일 이스라엘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성전은 이교도들에게 파괴되고 말 것이다. 성전행위에서 나타난 예수의 이런 주장은 예수가 스스로를 단순히 성전의 파국을 선포한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가 아니라 하스모네 왕가나 헤롯 왕가가 가진 바로 그런 권세를 가진 왕으로 인식하였음을 의미하였다.
예수 당시에 성전은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성전은 예레미야 당시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폭력의 부적처럼,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시고 그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실 것이라는 보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수반되었던 경고는 성전파괴에 대한 예레미야의 경고를 반영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예레미야서의 맥락을 의도적으로 상기시킨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학자들은 성전 사건 전체를 이사야, 예레미야서에 더하여 스가랴서의 의도적인 재적용이라는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수가 왕과 같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일, 성전에 대한 예수의 메시아적 권세를 나타낸 일, 그리고 대격변에 대한 경고, 이런 것들이 모두 스가랴서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언서의 이런 자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의 성전행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예수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쫒음으로서 희생 제사를 중단시킨 것은 그것이 성전의 개혁이 아니라 심판을 상징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희생제사가 없다면 성전은 그 존재 이유 전체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성전행위는 야훼가 시온으로 돌아와서 성전에 좌정하지 않을 것이며, 성전의 위치와 기능 그리고 현재적인 운용이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결국 성전은 파괴될 것을 예언적으로 상징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성전행위는 성전의 임박한 파괴에 대한 극적인 상징으로 의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스가랴서 예언의 암묵적인 맥락과 이사야서 및 예레미야서의 인용문들에 의해 밑받침된다. 예수의 성전행위와 그와 관련된 말과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나라의 도래,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거부한 예루살렘 및 성전의 멸망을 보여주는 예언적 및 종말론적 상징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전행위에 대한 이런 해석은 그가 공생애 사역을 통해 행하고 말했던 모든 것들과 완전히 일치한다.
4. 예수의 하나님나라 상징들
(1) 서론: 귀환의 상징들
예수는 진정한 예언자적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중심 제도들과 상징들을 정면으로 공격했다. 예수가 그렇게 한 것은 그것들 자체가 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것들을 유대적 세계관의 거짓된 읽기 및 실천의 버팀목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의도는 유대교 및 이스라엘의 전통에서 떠나고자한 것이 아니라 전통들의 참된 의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역에 나타난 적극적인 상징들을 유대교와 다른 비 유대교적 삶의 방식을 세우려는 시도로 보면 안 된다. 예수의 사역의 상징들은 그 근저에 유대적 세계관의 포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특정한 변형을 보여주며 참된 유대적 상징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위대한 갱신들의 표적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주제는 포로해방과 야훼의 귀환이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사역의 상징들이 이 주제를 강력하게 강화시켜주고 조명해 준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땅. 토라, 가족, 성전이라는 상징들과 관련하여 인식되었는데, 예수는 이런 상징들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을 전복시키고 새롭고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하였다.
(2) 회복된 땅, 회복된 백성
예수는 포로해방과 야훼의 귀환에 관한 예언들을 피조세계의 극적인 회복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예수의 치유사역들은 피조세계의 회복에 대한 상징으로 의도된 것이다. 예수의 치유사역들은 야훼께서 그의 백성을 치유하기 위해 오실 것에 관하여, 즉 야훼의 귀환과 포로해방에 관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세례요한이 예수에 대해 당혹스러워했을 때 자신이 행하는 치유사역의 상징적 가치를 환기시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회복된 땅에 대한 기대는 회복된 인간에 그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고 예수는 사람들이 포기해야 했던 땅 보다 더 큰 것을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통해서 갱신되고 회복된 인간의 삶과 공동체였다. 거룩한 땅의 개념은 종말론적 약속에 의해 삼키어졌다. 야훼는 이제 온 땅의 왕이 되실 것이다.
(3) 재정의된 가족
예수는 기존의 가족 및 민족의 상징체계에 도전하였고 대신에 그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대체 가족을 만들고자 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은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였다. 마치 쿰란 공동체처럼 인간적인 가족에 대한 근본적이고 충격적인 단절과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상호간의 전적인 헌신과 충성이 요구되었다. 이것은 남은 자 신학, 포로생활로 부터의 귀환의 신학이다.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에게 이제 그들의 정체성은 자신들의 족보가 아니라 새로운 백성을 위한 예수 자신과 그의 하나님나라 선포였다.
그리고 이 새로운 가족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원칙적으로 열려 있었다. 땅과 가족은 종말론적 축복이 전통적인 범위를 넘어설 것이라는 약속에 비추어서 다시 고찰되었다. 예언자들이 예언했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동서로부터 와서 하나님나라에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앉게 될 것이다. 예수가 회복된 이스라엘을 자신에 대한 충성이라는 견지에서 재정의한 이상, 그것은 원칙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었다. 이 새로운 가족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식사를 한 예수의 행동을 통해서 특징지어지고 구별되었다. 이러한 식탁교제는 예수가 실천과 이야기를 통해서 나타낸 주장, 즉 자신이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하나님나라를 개시하고 있다는 주장과 맞물리면서 엄청난 상징성을 지니게 된다.
(4) 재정의된 토라
민족과 가족에 대한 예수의 재정의와 나란히 그리고 아주 일맥상통하게 토라에 대한 예수의 재정의가 있었다. 토라는 이스라엘을 정의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토라의 행위들은 상징적 실천으로서의 기능, 즉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이웃에게 자신들이 진정으로 계약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로서 기능을 하였다. 예수에게 있어 자신의 제자들을 구별하고 그런 의미에서 재정의된 토라로 볼 수 있는 상징적 실천은 산상수훈 같은 대목에 자세하게 나타난다.
(5) 재건된 성전
모든 재정의된 상징들은 예수의 대안적인 성전 상징체계 속에 통합되어 있다. 성전에서의 예수의 행동과 말씀들은 토라에 관한 그의 행위들 및 말씀들과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상징적 기능을 한다. 두 경우(성전과 토라) 모두에서 예수는 그 제도 자체가 선하고 존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그 제도를 초월할 때가 왔다는 단언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들 모두에 나오는 금식 논쟁은 종교적인 이슈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이슈였다. 제2성전 시대 유대인들에게 금식은 여전히 포로생활 중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의 파괴를 기념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금식할 때가 아니라 잔치중이라는 예수의 말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소망이 실현되고 있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전이 재건되고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금식논쟁에서도 예수는 종교나 도덕에 관한 가르침이나 무시간적인 진리를 설파한 것이 아니라 종말론적 주장을 한 것이다.
죄 사함에 대한 예수의 선포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비역사적인 초연한 축복이나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죄 사함은 종말론적 축복으로서 이스라엘의 포로해방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죄로 인하여 포로로 끌려간 것이라면 죄 사함은 곧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 사함에 대한 예수의 선포는 이런 포로해방과 야훼 귀환이 지금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후1세기 유대인들에게 야훼께서 죄를 사해주는 방식은 성전과 제사장이라는 공식적으로 설정된 통로들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죄 사함을 선포한 것은 자신이 성전에 부여되어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다는 암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조상들의 전통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예수의 충돌이 지닌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금식은 이스라엘이 여전히 포로 중에 있음을, 안식일은 위대한 안식의 날이 아직 미래에 있음을, 음식법들은 이스라엘이 열방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는 민족적인 경계가 여전히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이야기, 행동, 실천, 상징들은 이런 모든 상징들이 의미하는 바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전통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자들은 예수의 주장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그가 줄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는 것을, 그것을 받을 권리가 없는 자들에게, 그가 설정할 권리가 전혀 없는 조건들 아래서 주겠다고 주장한 자였다.
(6) 상징적 초점
이제까지 살펴본 예수의 모든 상징들을 종합하면 다음 세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첫째 예수의 유월절 식사는 예수의 실천, 이야기, 상징들과 완전히 부합한다. 둘째, 예수의 성전행위와 그의 유월절 식사는 서로를 해석해주는 역할을 한다. 셋째, 예수가 새롭게 만들어 낸 상징적 우주의 핵심에는 예수 자신이 있다. 예수의 사역, 예수의 현존, 예수의 가르침, 심지어 예수의 임박한 운명, 이 모든 것들은 하나로 결합되어 예수 자신이야말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 사역의 가장 큰 상징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관해 말했고 초대교회는 예수에 관하여 말했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5. 예수는 백성을 오도했는가?
예수가 이스라엘을 어그러진 길로 인도한다는 고소는 복음서들 속에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러한 고소는 신명기 13장에 근거하는데 거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열거되어 있다. 백성들에게 다른 신들을 쫒으라고 설득하는 예언자, 이와 동일한 죄를 범하는 친구나 가족 구성원, 그리고 마을 전체를 어그러진 길로 인도하는 건달이 그들인데 각각의 경우에 범죄자들은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 주후1세기 유대인들은 예수가 신명기 13장의 범주에 해당하다고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가 그런 범주에 속하는 자로 간주되었다면 그것은 다른 식으로는 설명하기 불가능한 어떤 일을 예수가 행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행한 권세 있는 행위들, 예수가 말한 역설들의 역사적 존재는 부정될 수 없다. 여기서 문제는 권세 있는 행위들 자체가 아니라 야훼에 대한 불충성으로 비칠 수 있는 역설적인 가르침이었다. 야훼에 대한 불충성으로 보이는 가르침을 하면서 권세 있는 행위를 하는 인물은 더욱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려 한 역사적 이유를 설명을 해준다.
예수는 바리새파의 다른 분파들 사이에 있었던 논쟁과 판이하게 다른 논쟁들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민족성과 민족적 열망들이 양도할 수 없는 상징들로 간주하였던 것들을 굳건하게 붙들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행위와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재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사역의 상징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예수가 백성을 어그러진 길로 이끄는 자라는 고소는 예수의 이러한 선포와 잘 부합된다. 예수는 철저히 1세기 유대교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성서, 이스라엘의 참 소명을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조상들의 종교적 상징들을 고수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이스라엘이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소명에 불순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집착하는 상징들에 도전하였다. 이렇게 예수의 과제는 모든 점에서 그들의 과제와 충돌하였고 예수의 동시대인들은 이런 식으로 말하고 행하는 예수를 백성을 어그러진 길로 이끄는 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 실천 및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상징에서도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방식,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충성하는 방식에서 예수의 방식은 그들의 방식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10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질문들]
N.T. 라이트/JVG
2015-06-17 22:57:44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
제10장 하나님나라에 관한 질문들
1. 서론
지금까지 예수의 특징적 행위들, 그의 이야기들, 그의 상징세계를 구성하는 방식들을 살펴보았는데, 이 장에서는 그의 세계관을 특징짓는 핵심 질문들을 고찰하려고 한다. 그것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해법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은 어느 때인가? 라는 질문들이다.
2. 우리는 누구인가?
이것은 예수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진정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참된 백성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이야기에서 상징적 갱신의 핵심에 자라잡고 있는 메시지이다. 예수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백성, 죄 사람을 받은 새 계약의 백성이다. 이것이 그들의 존재 이유 전체이며 이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행했던 모든 것은 오직 그들이 계약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라고 생각했을 때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의 다른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라고 생각한 것과 너무도 달랐을 것이다. 새로운 운동의 공동체가 가진 정체성은 유대 종말론적 기대 속에 굳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하여 택함 받은 백성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이 바로 이런 성서적 소명을 물려받은 자들로, 그리고 야훼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종말론적 백성으로 보았다.
3.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의 동시대인들 대다수는 그들이 중요한 점에서 여전히 포로생활 중에 있다고 믿었다.
4.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1) 서론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야훼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소명에 따라 살지 못하고 있다고 반복적으로 질책하였다. 동시대인들에 대한 예수의 고소는 히브리 예언자들의 전통 속에 서 있었다. 예수는 이스라엘 문제의 뿌리는 이스라엘 자체가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한다는 점이라고 보았다. 세상을 오도한 사탄이 이스라엘도 오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은 이방인들 속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택함 받은 백성들 안에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시각은 결코 반유대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주후1세기의 유대교 분파들의 지도 위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또한 성전 전통에 대한 예수의 반대도 유대 민족주의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 내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요세푸스를 비롯하여 폭력적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는 주후1세기 유대교 내에서 여럿 존재한다. 나사렛 예수도 바로 그런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예수는 평화의 길은 자신이 진정한 원수에 대항한 진정한 싸움을 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예수 당시에 이스라엘은 커다란 전투에 직면하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가 싸워야 할 전투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였다. 예수가 다양한 종류의 논쟁에 휘말린 것은 그의 근본적인 과제들이 동시대인들 특히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의 과제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는 동시대인들이 싸우기를 원했던 그런 싸움을 거부하고 오히려 동시대인들을 대항한 싸움, 나아가 그들 가운데 역사하는 진정한 원수인 사탄과 대항한 싸움을 싸웠던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전통이었던 “열심에 의한 거룩한 전쟁”을 재정의하였다. 이것은 아주 초기부터 이스라엘 이야기 속에 있던 것으로서 야훼 및 그의 율법을 향한 열심에 불타올라서 이교도들이나 내부의 배교자들에게 결정적이고 폭력적 행위를 취하였던 전통이었다. 비느하스 이래로 마카베오 혁명까지 이어져 온 이런 전통은 단순한 민족주의적 열망이 아니라 이교도와의 최후의 대전투를 통해서 나타났다. 이것은 야훼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소망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 전통은 주후1세기 유대인들의 주된 현실 인식의 일부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 혹은 메시야가 이 싸움을 싸울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예수는 이런 거룩한 전쟁에 관한 유대인의 전통을 재정의함으로써 그런 싸움을 싸우고자 했던 자들에 맞서 싸움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
예수는 큰 전투를 통해 로마로부터 민족의 해방을 얻어내려는 이스라엘의 열망은 그 자체가 이스라엘이 근본적으로 병들어 있는 징후로 보았다. 예수는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해방, 그러니까 이교도를 군사적 무력으로 분쇄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방에 빛을 비추는 존재로서의 이스라엘의 소명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한 일은 단지 폭력을 반대하고 평화와 자비의 복음을 전파한 것은 아니라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전투와 이스라엘의 진정한 원수를 재정의한 것이었다.
(2) 진정한 원수의 정체 : 로마가 아니라 사탄
예수가 볼 때 로마는 기껏해야 부차적인 원수에 불과했고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교 세력들은 야훼의 백성의 진정한 대적이 아니었다. 진정한 원수는 이스라엘의 포로생활 배후에 있는 사탄, 즉 고소하는 자로 알려져 있었던 어둠의 세력이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다가올 싸움은 단순히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것이었다.
(a) 바알세블 논쟁
그러므로 예수의 축귀사역은 단순히 고통 받는 자들을 귀신의 속박에서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명의 일부였다. 예수의 대적자들은 예수의 축귀사건을 비난하였는데 그들의 비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야훼와의 계약, 토라, 성전에 대하여 불충실하다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축귀사역을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마귀의 능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비난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축귀 사역은 사탄과의 싸움을 싸운 것이며 또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보여준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바알세블 논쟁은 하나님나라를 위한 싸움이 예수의 관점에서 재정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싸움의 초점은 로마가 아니라 사탄에게 맞추어졌으며 예수는 이 싸움에서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상태였다. 예수의 축귀사건들은 그러한 승리의 결과물일 뿐이었다. 예수는 축귀사건을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어떤 의미에서는 이미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암묵적으로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서 그 하나님나라를 도래케 하는 주인공임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미 예수의 사역 속에서 왕이 되어가고 있었다.
(b)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눅12: 4) 이 구절은 진정한 원수와 진정한 싸움을 재정의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원수인 로마를 가리킨다면 죽인 후에 지옥에 던져 넣은 권세 있는 자는 야훼가 아니라 진정한 원수 곧 사탄으로 보아야 한다.
(c) 더 악한 귀신 일곱
더 악한 귀신 일곱(마12:43-45; 눅11:24-26)에 대한 이야기에서 축귀는 이스라엘의 이런저런 개혁운동이나 혁명운동 또는 성전재건을 가리키는 것 같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은 이런 것들이 이스라엘의 상황을 제대로 해결해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운동들이 일시적으로는 집을 깨끗하게 할 수 있었지만 귀신들이 힘을 써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d) 최초의 승리
악의 세력에 대한 예수의 최초의 승리는 공생애 시작 전에 일어난 광야 시험이었을 것이다. 바알세불 논쟁에서 예수가 말했던 것을 설명하려면 진정한 원수에 대한 최초의 결정적인 승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가 받은 광야시험은 예수의 소명과 사역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 시험은 굶주림이라는 압박감, 신속한 성공의 유혹, 세상의 빛이 되라는 소명을 다른 수단을 통해서 자신의 통치 아래 두려는 욕망과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이 예수의 관점에서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예수가 당시대에 자신에게 제시된 메시야 스타일을 채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입증된다. 예수는 당시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공유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행동하려는 유혹을 받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했던 그런 방식의 메시야가 되려는 유혹은 실제적이었고 매우 강력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정확히 예수에게 시험이었고 예수는 그 시험을 물리침으로 자신의 소명과 사역의 방향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예수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스스로를 높이거나 백성들에 주목할 만한 표적을 행하기보다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의 통치를 알렸고 개시시켰다. 진정한 원수와의 상징적 싸움은 예수의 공생애가 시작되었던 바로 그 시점에 사적이고 은밀한 싸움으로 시작되었고 그 싸움은 그의 동시대인들 간의 논쟁들로 나타났다.
(3) 재배치된 원수: 이스라엘과 사탄
이스라엘은 구원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예수는 자신이 바로 그것을 행하러 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예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포로로 사로잡고 있는 원수는 외부의 대적자가 아니라 내부의 대적자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의 사역은 실로 혁명적이었지만 그 혁명은 로마를 대항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현재 지도자들을 대항한 혁명이었다. 예수는 현재 유대의 통치자들과 선생들을 사탄의 하수인들로 보았고 자신과 그 추종자들을 진정한 이스라엘로 보았다. 예수는 구약 예언자들의 오랜 전통을 따라서 현재의 통치자들과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참된 백성에 대한 대적자로 규정한 것이다.
(4) 결론 :문제점에 대한 예수의 분석
사탄은 이스라엘 및 이스라엘이 고수했던 민족적인 제도들과 열망들을 자신의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싸워야 했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이었다. 예수가 볼 때, 이스라엘의 민족주의는 야훼에 대한 참된 충성을 가장한 사탄의 유혹에서 나온 잘못된 세계관이었다. 바리새인들과 고위 제사장들이 예수를 대적한 것은 예수가 유대인의 민족적 및 문화적 상징들에 대한 자신들의 장악력을 약화시키고 무너뜨린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을 선택하였는데 그들은 하나님나라, 이스라엘이 되는 새로운 길의 선포와 개시에 있어서 예수의 조력자들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 그리고 이스라엘 내에 있는 자신들의 야망을 소중히 여겼는데 이것은 그들이 예수의 과제가 가진 급진적인 성격을 파악하고 있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제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를 버릴 수 있는 소지를 항상 안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죄종적인 싸움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예수는 어느 결정적 시점에서 이 싸움을 자신이 홀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 해법은 무엇인가?
예수의 전체적인 과제와 선포는 이스라엘이 처한 곤경에 대한 재정의에 상응하는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있는 곳에,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있는 곳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 그의 예언자적 실천, 그의 축복, 경고, 상징적 활동, 이 모든 것들은 이스라엘을 갱신시키고 악을 패배시키며 야훼를 마침내 시온으로 돌아오게 할 운동이었다.
슈바이처가 예수를 주후1세기의 역사적 배경 속에 둔 것은 옳았지만 예수의 종말론을 시공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종말로 간주한 것을 잘못이었다. 불트만이 종말론을 예수의 중심 메시지로 본 것은 옳았지만, 그 메시지를 비역사화하고 탈신화하여 개인의 현재적이고 실존적인 결단을 향한 부르심으로 간주한 것을 잘못이었다. 도드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가 이미 현존한다고 주장한 것을 옳았지만 이 하나님나라를 개인의 종교적 또는 도덕적 체험이라는 차원으로 축소시킨 것, 그리고 미래의 하나님나라가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날 것을 차단해버린 것은 잘못이었다. 브랜던이 라이마루스를 따라서 예수를 주후1세기 유대의 민족주의적 기대들이라는 배경 속에 놓은 것은 잘한 것이지만, 그런 기대들을 예수의 사역의 중심에 놓은 것은 잘못이었다.
지난 200년 동안 하나님나라에 관한 사고의 주된 흐름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라이마루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운동을 군사적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흐름이었고 둘째는 슈바이처와 그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종말론을 물질적인 세상의 종말이란 관점에서 본 흐름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스라엘이 처한 곤경을 재정의했고 그에 대한 예수가 제시한 해법은 진정한 원수인 사탄에 맞서는 싸움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는 악은 군사적 승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극히 혁명적인 방법에 의해 패배당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야기들 속에서 포로회복, 하나님나라라는 큰 주제들은 예수가 받을 고난과 신원의 위대한 순간에 그 절정에 도달하게 될 것이었다. 고난과 신원이라는 상징은 위대한 구원, 위대한 승리에 대한 유대인들의 기대 속에서 핵심적인 구성 요소였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자신과 관련해서 고난과 신원이라는 비슷한 운명을 예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수난 기사의 대목들은 역사적으로 훨씬 더 오래전에 예수를 사로잡고 있었던 소명에 대한 예수 자신의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는 당국자들과 필연적으로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그런 갈등은 단순히 그들과의 갈등이 아니라 그들 배후에 있는 어둠의 세력과의 갈등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를 위한 싸움의 절정은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예수 자신의 죽음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미 예수가 인식하고 있었듯이, 이러한 죽음은 하나님나라의 실제적인 승리가 될 것이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마침내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이스라엘 이야기를 자신을 중심으로 재형성해서 말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예수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로 다시 말하였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지금 예수 자신의 사역, 자신의 삶, 그리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왕이 되고 계신다는 기이하고도 전복적인 선포였다.
6. 지금은 어느 때인가?
예수는 분명히 자신의 사역을 통하여 뭔가 극적으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옛적에 약속하셨던 것을 행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일은 장차 일어날 것이지만 너무도 빨리 닥칠 것이기 때문에 청중들이 깨어있지 않는다면 밤중의 도적처럼 그들에게 닥칠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생각한다면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즉 이미 세워졌으면서도 여전히 그 결정적인 승리를 미래에 두고 있는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은 완벽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세례요한의 날로부터 하나님나라가 돌입해 오고 있다는 말은 예수가 자신의 사역과 세례요한의 사역의 연속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하나님나라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무대에 등장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분명히 현존하지만 여전히 장차 그 최종적인 승리를 얻을 필요가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위험에 처해있다.
어떤 종류의 최종적인 확정을 아직 기다리고 있지만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현재적 실체로서의 하나님나라라는 의미를 강화시켜주는 말씀이 축귀사역에 관한 말씀이다.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들을 쫒아내는 것이라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이 주장은 하나님나라가 예수의 사역 속에 현존하고 있음을 단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성격도 재정의하고 있다. 비록 하나님나라는 현재적 실체이지만 이 말씀은 문맥상으로 예수가 귀신들의 왕을 패배시키고 그의 나라를 노략질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질 미래의 때를 보여준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라는 말은 미래의 승리와 신원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다. 주후1세기의 다른 많은 예언자들이나 메시야적 인물들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청중들은 이 말을 그들의 지도자가 민족전체가 열망하는 그 최종적인 승리를 약속한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마치 예수의 재림이나 혹은 슈바이처처럼 세상의 종말이라는 의미에서 파루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사고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드러남이 여전히 미래에 있다는 사실은 이미 현존하는 그 무엇, 곧 예수의 메시야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를 신학적 도식으로 비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했을 때,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어구는 “가까웠으니” 곧 그리스어로 “엥기켄”이다. 학자들은 이 어구를 하나님나라의 현존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지 아니면 하나님나라의 임박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지를 놓고 결정을 하지 못했다. 야훼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재정의에 의하면 하나님나라는 실제로 현존하지만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왕이 되고 계신다. 그 하나님나라는 장차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서 싸울 싸움 속에서 절정에 달할 것이다. 한 세대 내에 예수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건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야훼는 왕이 될 것이고 참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해방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는 예수가 있는 바로 그곳에 이미 현존하고 있었다. 예수의 공생애 그 자체가 곧 세워질 하나님나라의 참된 시작이었다. 하나님나라가 이미 현존하지 않는다면 그 최종적인 승리가 임박했다는 것을 예수의 추종자들이 무엇으로 보장을 받았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나라의 현존을 부정하는 것은 백성들이 소망하는 미래를 훼손하는 일이 될 것이다.
7. 예언자와 하나님나라
예수는 당시 유대교와 어떤 관계에 있었으며, 그의 목적들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는 당시의 복잡하고 다면적인 유대교 내에 철저하게 속해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항의들은 성격상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내부적 비판이었고, 예수의 주장들 역시 비록 그 내용에서는 달랐지만 그 형식에서는 당시의 다른 유대 지도자들의 주장과 유사하였다. 예수의 활동들은 유대적 세계관 내에서 의미를 가지도록 의도되었다. 그래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표준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그 이야기들을 새롭게 이야기했으며 그 새로운 이야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상징들을 재정립하였고 그런 주장은 동시대의 유대인들의 표준적 상징들에 도전으로 작용하였다. 이렇게 예수의 실천, 이야기들, 상징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그의 목적들과 약속들을 성취하고 계시다는 예수의 주장과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인가? 예수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절정으로 인도하고자 했다. 예수는 청중들에게 야훼의 백성이 되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는데 이 길은 성서 이야기의 참된 성취이지만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예수는 그의 청중들에게 그들의 세계관을 포기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 세계관 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위대한 구속에 관한 야훼의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는 이스라엘로 생각했다. 예수는 바로 그런 소망을 제시했지만 그가 제시한 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것과 같지 않았다. 예수의 상징적 행위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소망을 인식하는 방식을 거부하며 동시에 예수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예수는 자신을 중심으로 포로생활에서 귀환한 진정한 이스라엘을 재구성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노예로 삼고 있던 악에 대한 이스라엘 하나님의 승리, 시온으로 개선하는 야훼의 승리를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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