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N.T. 라이트/JVG
2015-06-16 10:10:00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1부 서론
제1장 과거와 현재의 예수
1. 천사들, 거인들, 조각그림들
2. 절차
3. 탐구들과 유용성
제2장 브레데 길의 교통체증 : 새롭게 등장한 새탐구?
1. 서론
2. 예수 세미나
3. 버튼 맥 그리고 Q의 문제
4. 크로산
5. 견유학파 예수
6. 마커스 보그
7. 결론: 새로운 새탐구
제3장 미래를 향하여 :제3의 탐구
1. 속박을 벗고
2. 질문들
3. 결론: 제3의 탐구의 향후 진로들
제4장 탕자들과 패러다임들
1. 유대인들, 소작농들, 탕자들
2. 비유에서 패러다임으로
제2부 한 예언자의 프로필
제5장 한 예언자의 실천
1. 예수의 개인적인 이력
2. 예수의 배경
3. 신탁적 및 지도자적 예언자로서의 예수
4. 말과 행위에 권세 있는 예수
5. 예언자보다 더한 사람?
제6장 하나님나라 이야기들 :선포
1. 서론
2. 배경들
3. 하나님나라에 대한 재정의: 선포
4. 결론 : 하나님나라를 선포함
제7장 하나님나라 이야기들: 초대, 환영, 도전, 부르심
1. 서론
2. 초대: 회개하고 믿으라는 부르심
3. 환영: 죄인들과 죄 사함
4. 도전 : 새로운 계약백성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
5. 부르심: 예수의 조력자들이 되라는 부르심
6. 많은 이들이 동서로부터 올 것이다.
7. 참된 지혜
8. 결론: 하나님의 갱신된 백성
제8장 하나님나라 이야기들: 심판과 신원
1. 서론
2. 다가올 대재난
3. 신원에 관한 확신
4. 마가복음 13장과 그 병행문들 : 장차 도래할 멸망과 신원
5. 결론: 심판과 신원
제9장 상징과 논쟁
1. 서론: 하나님나라, 상징, 논쟁
2. 이스라엘 정체성의 상징들: 안식일, 음식, 민족, 땅
3. 이스라엘 정체성의 상징들 : 성전
4. 예수와 하나님나라 상징들
5. 예수는 백성들을 오도했는가?
제10장 하나님나라의 질문들
1. 서론
2. 우리는 누구인가?
3.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4.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5. 해법은 무엇인가?
6. 지금은 어느 때인가?
7. 예언자와 하나님나라
제3부 예수의 목적들과 신념들
제11장 예수와 이스라엘 :메시야직의 의미
1. 서론
2.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서의 메시아직
3. 예수와 왕권 : 예루살렘 사건들
4. 예수의 예언자적 사역의 비밀인 메시야직
제12장
1. 서론
2. 로마인들이 붙인 죄목
3. 유대인들이 붙이 죄목
4. 예수의 의도: 핵심 상징
5. 예수의 의도: 말씀들과 상징
6. 예수의 의도: 유대교의 종말론적 구속
7. 예수의 의도: 기이한 승리
제13장 왕의 귀환
1. 서론
2. 유대적 의미의 세계
3. 돌아옴과 높이들림에 관한 예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들
4. 미리 암시된 소명
5. 결론
제4부 결론
제14장 결과들
1부 서론[1장 과거와 현재의 예수]
N.T. 라이트/JVG
2015-06-17 22:51:40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1부 서론
제1장 과거와 현재의 예수
서문
주후 1세기 유대교와 기독교를 연구하면서 예수는 누구이며 그의 목적들은 무엇인가? 예수는 왜 죽었는가? 초기 기독교는 왜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는가? 라는 질문들을 피할 수 없다. 이런 질문들은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중심적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답변되지 않은 질문들이다. 나는 분명하게 정립된 역사적 방법론과 주후1세기 유대교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읽기는 이런 질문에 올바른 방향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물론 역사와 신앙을 혼합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지만 역사와 신앙을 밀접하게 결부시키는 것이 결코 역사나 신앙 어느 쪽에 대해서도 타협하는 것이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1. 천사들, 거인들, 조각그림들
예수에 대한 고전적인 시도들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옷을 부지런히 예수에게 입혔을 뿐 아니라 예수에 대해 너무도 많은 것을 입증하려 했다. 그 결과 거기에는 상상력과 성찰을 위한 여지만이 아니라 신앙을 위한 여지도 없어졌다. 이런 고전적인 시도들에 이어 20세기의 기독교 신학에는 새로운 종류의 부정의 길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예수는 미지의 인물로서 그 삶과 인격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고전적인 시도들이 예수의 자세한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다면 부정의 길은 예수의 실루엣으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래서 20세기 신학자들은 예수에 대한 연구를 점점 더 포기하는 대신에 좀 더 안전해 보이는 길인,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에 힘을 쏟아왔다.
르낭이나 쇼펜하우어가 예수의 실루엣을 감성적인 인물로 만들었다면 슈바이처는 예수의 실루엣을 압도적인 역사적 위대성이라는 개념으로 바꾸었다. 불트만과 바르트는 슈바이처의 이런 예수의 실루엣은 너무 아득하고 오도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며 역사와 관계없는 무시간적 진리로서의 예수라는 또 다른 실루엣을 만들어 내었다. 불트만과 바르트는 복음서의 기록들을 초대교회의 신앙적 표현이거나 복음서 기자들의 관점으로 치부하였다. 불트만과 바르트의 이런 강한 신학적 전제는 역사를 지나치게 천착해 들어가면 정통 기독교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일반 사람들의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결국 통속적으로는(르낭, 쇼펜하우어) 예수의 성상이, 학문적으로는(슈바이처) 예수의 실루엣이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예수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거부해왔다.
슈바이처와 불트만은 신약성서 연구에 있어서 비록 부정적이지만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금세기의 어떤 사람보다도 신약성서가 가진 (예수에 대한) 조각그림의 근본적인 모습, 그리고 그 조각그림을 맞추는 일에 내재된 문제점들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 역사적인 조각그림들을 맞추기가 어려운 이유는 그 조각그림들의 형태가 불분명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 조각그림들의 역사적 위치는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와 주후2세기 기독교사이에 있고 그래서 예수에 대한 연구는 주후 1세기 전체와 뗄레야 뗄 수 없을 정도로 얽혀있다.
20세기 신약학계에서 바이스와 슈바이처의 연구 이래로 예수를 유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은 이전에 비해서 중요한 장점이다. 20세기 전에는 유대교는 잘못된 종교인데 예수가 이를 바로잡고 바른 종교를 세웠다는 신학적 전제를 가지고 예수에 대한 그림조각들 가운데 유대적이거나 인종적으로 제한된 조각들을 모두 제거하여 예수를 위대하고 보편적인 영적 종교의 창시자로 만들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예수상은 칸트와 헤겔 이래로 개신교에 의해서 고상하게 재정립되었다. 그러나 바이스와 슈바이처는 예수는 엄연히 주후1세기의 유대인으로 묘사되어야 하고 그의 말과 행위를 비롯한 모든 면이 주후 1세기 다른 유대인들과 관련하여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수를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시도에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바로 예수와 그의 유대적 배경의 관계이다.
슈바이처나 불트만은 예수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대신에 오늘날 기독교 신앙과 삶에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주후1세기 기독교의 기원을 재구성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 슈바이처는 역사 속에서 예수의 메시지는 실패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비역사적 조치들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나중에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불트만은 예수의 진정한 메시지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껍데기를 찾아내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슈바이처가 전통적인 예수상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했다면 불트만은 예수에 관한 어떤 초상을 그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슈바이처에게 예수는 미지의 인물이 되었고 불트만에게는 예수는 모호한 인물이 되었다.
예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첫 번째 그림조각이라면, 두 번째 그림조각은, 그렇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예수에 대해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 두 가지 질문들은 필연적인 상호연관성을 가진 것이지만 동일한 질문은 아니다. 슈바이처와 불트만은 이 두 개의 그림조각들이 서로 관계가 거의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분명히 서로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와 신학을 통합하는 문제이다. 극단적인 정통주의로부터 극단적인 급진주의에 이르기까지 예수에 관해 연구하면서 역사와 신학을 통합하는 것이 어렵다고 단정해 왔는데, 이것은 역사와 신학의 균열이 서구 기독교 사상을 뿌리 깊게 지배해왔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와 신학의 분열은 한편으로는 예수의 성상을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실루엣을 만들었다. 성상이든 실루엣이든 그 배후에는 역사는 신앙과 신학을 손상시킨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역사와 신학의 결합에 대한 이런 두려움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엄격한 역사(주후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에 대한 열려있는 탐구)와 엄격한 신학(신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무엇을 가리켰는지에 대한 열린 탐구)은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것은 예수에 대한 연구에서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역사와 신앙의 의미와 그 상호 관계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하다. 기독교가 살아남으려면 역사가 알려주거나 입증한 것과 진리여야 하는 것 사이의 간격을 신앙으로 메워야 한다는 통속적인 이해는 역사와 신앙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한 역사란 입증 가능한 일련의 사건들과 자료들의 집합이(실증주의적 역사관) 아니라 극히 복잡한 가설적인 재구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며(비판적 실재론적 역사관) 진정한 신앙이란 역사적 자료들이 없는 공백을 어둠속에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긴밀하고도 열정적으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탐구와 신뢰다. 진정한 역사와 진정한 신앙은 결코 서로 갈등하거나 분리되지 않으며 긴밀하게 결부된다. 우리가 예수를 종교 또는 신앙의 중심에 둘 수 있는 것은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실루엣이나 성상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알고 있었던 오직 하나의 예수의 역사에 근거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역사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논증의 순서
이 책의 제1부에서 나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예수에 관해 쓰인 글들과 지난 20여 년간에 걸친 학계의 동향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전개될 논증의 토대를 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제2부에서는 주후1세기의 유대교 내에서 예수의 공적인 면모는 예언자의 면모였으며 그의 예언자적 선포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라였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어서 제3부에서 예수의 공적인 선포 및 기본적인 사고 내에서 예수는 자신의 목표들과 신념들로 이루어진 통일된 네트워크를 지니고 있었음을 논증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신념들을 세 가지로 논증하는데 11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비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예수의 신념을, 12장에서는 자신의 사명이 어떤 식으로 성취될 것인지에 대한 예수의 신념을, 그리고 13장에서는 자기 자신에 관한 예수의 신념을 논증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위들은 예수가 이런 신념들을 가졌다는 전제하에서만 의미를 갖게된다.
3. 탐구들과 유용성
(a) 역사 속의 예수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고집했지만, 그들이 복음서들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서 만족스러운 신학적 결과를 발견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들은 무시간적인 교리적 및 윤리적 가르침을 주로 서신서들에서 찾았으며 그 결과 복음서들도 이와 동일한 무시간적인 진리의 저장소로 바꾸어 버렸다. 특히 그들은 복음서의 절정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세상의 죄를 단번에 해결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로 이해하고 예수의 삶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예수는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에는 철저한 대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는 왜 살았는가라는 질문에는 제대로 된 대답을 거의 갖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정통신앙에서 예수의 사역과 목적에 대한 분명한 개념을 갖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들에게 예수의 사역과 죽음의 연결고리는 끊어져 있다.
종교개혁 신앙이 가진 두 가지 약점은 예수의 사역이 갖는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지 못한 것, 그리고 복음서들을 이야기 그대로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혼란의 주된 이유들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역사적 예수 자체가 아니라 예수의 사역의 결과들, 즉 유익들에 초점을 맞추었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익을 아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중세교회와의 결별과 아울러 역사와 신앙의 분리를 통해 역사와의 단절을 꾀하였다. 켈러나 불트만 같은 후기 루터파학자들은 역사적 예수에 대항하여 성서적 그리스도를 제시하거나, 결단으로서의 무시간적 부르심을 밝혀내기 위해 유대의 묵시론적 신화를 담고 있는 편집층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의 주장은 역사와 단절을 꾀한 종교개혁의 확고한 전통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와 가톨릭은 모두 문자적 의미라는 해석원칙의 등 뒤에서 알레고리를 사용하여 복음서들을 윤리와 교리, 신도들의 덕을 세우는데 필요한 자료들로 사용해왔고 세상을 구속하신 신적인 그리스도, 교황과 설교자를 통하여 세상에 유익을 주시는 신적인 그리스도라는 예수상을 세웠다. 라이마루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 성상이 대표하는 예수가 진정 복음서가 말하는 예수와 동일한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b) 비평운동의 등장: 라이마루스에서 슈바이처까지
라이마루스(1694-1786)는 위대한 성상파괴자였으며 예수에 대한 지배적인 신화에 도전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라이마루스는 기독교의 주류전통이 예수와 복음서에 대해 가진 견해가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여 당시의 기독교가 역사적 왜곡 또는 허구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를 뿌리째 파괴하고자 했다. 역사적 예수 연구는 이렇게 명백하게 반신학적이고 반기독교적이며 반교리적인 운동으로 시작했다. 이 운동이 내건 최초의 과제는 기독교 신앙이 토대로 삼을 수 있는 예수를 발견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신앙이 실제의 나사렛 예수를 토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라이마루스는 복음서들은 역사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 신앙의 기록들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를 연구해보면 판이하게 다른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라이마루스의 공격은 역사와 신앙 간의 균열을 이용한 것이었는데,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는 이러한 공격에 지금도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라이마루스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단순히 반기독교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참된 개혁자로 보아야 한다. 라이마루스 이후에 슈트라우스나 르낭이 쓴 예수의 전기들이 등장했을 때, 슈바이처는 이런 자유주의적인 예수의 초상을 가장 날카롭고 효과적으로 거부했지만, 그 역시 자기 멋대로 예수의 실루엣을 대담하게 그린 것은 마찬가지다. 하지만 슈바이처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그가 그려낸 예수의 실루엣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고 뚜렷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슈바이처는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철저한 회의주의나, 아니면 철저한 종말론이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브레데(Wrede)의 견해냐 슈바이처(Schweitzer)의 견해냐,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브레데와 슈바이처는 예수에 대한 진지한 역사적 연구는 주류 정통신앙이 전제해 왔거나 원했던 것과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길은 달랐다. 브레데는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거의 알지 못하고 복음서는 오직 초대교회의 관심들만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한 반면에, 슈바이처는 예수를 묵시론적 유대교의 배경 속에 위치시켜 놓고 이를 토대로 예수 자신, 초대교회, 복음서들 사이의 훨씬 더 많은 연속성을 주장하였다. 이 두 길은 20세기 말에 이루어진 예수에 관한 비평적 글쓰기의 두 가지 대로가 되었는데, 이 두 대로 간의 차이는 뚜렷하다. 브레데는 우리는 예수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고 복음서들은 대체로 예수에 관한 잘못된 초상을 제공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슈바이처는 예수는 묵시론적 유대교의 예언자였고 복음서들은 각각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선포를 상당부분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c) 옛 탐구(무탐구)에서 새 탐구로: 슈바이처에서 쉴레벡스로
슈바이처는 옛 탐구를 아주 성공적으로 와해시키고 충격적인 대안을 제시하였기 때문에 예수에 관한 탐구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이후 반세기 동안 예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다시 역사로 돌아가야 하는 커다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불트만은 19세기 개신교의 자유주의적 예수상은 거부했지만, 슈바이처와는 달리 예수의 인격은 현존하는 기록들로부터 복원될 수 없으며 신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브레데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에 관한 진술은 역사적인 기억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나아가 불트만은 예수는 당시의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전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지의 진정한 요지를 알아내려면 비신화화를 통해서 그러한 전망의 배후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불트만은 이렇게 유대적 배경과 부활 사건이후의 교회, 이 양자로부터 분리된 예수상을 만들어 내었다. 불트만과 칼 바르트는 제1,2차 세계대전의 기간 동안에 예수에 관한 진정한 역사적 연구를 진척시키는 일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이 두 사람은 초기 기독교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열쇠는 의심스럽게 재구성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신앙과 체험에 있다고 믿었다. 불트만이 실제로 일어난 일과 복음서 저자들의 신앙을 포함한 교회의 신앙들을 구별한 것은 라이마루스와 브레데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차이점은 라이마루스는 신앙은 역사에 근거한다고 말한 반면에 불트만은 역사와 신앙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불트만의 제자인 케제만은 1953년에 역사적 예수의 문제점이라는 강연을 하였는데 이를 계시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새탐구라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케제만은 불트만의 관념론과 가현설적 위험성을 지적하고 예수를 역사 속에 정초시키지 않는다면 예수는 신학적 또는 정치적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케제만의 이런 매우 분명한 신학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한 새탐구는 완전한 의미에서 역사적 회귀를 보여주지 못했다. 새탐구의 학자들은 묵시사상을 문자 그대로의 세상의 종말로 이해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견해를 뒤흔들지도 못했고, 또한 진지한 역사적 재구성에 장애가 되어왔던 양식 비평과 전승 비평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새탐구의 대표적인 학자로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속한 신학자 쉴레벡스가 있는데 그는 전승사 비평위에 구축된 예수에 관한 방대한 저작에서 불트만과 동일하게 역사와 신학은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새탐구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이며 브레데-불트만 노선의 추종자들은 여전히 상당수 존재하고 1980년대의 잠복기를 거쳐서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d) 지난 200년간의 탐구
라이마루스로부터 쉴레벡스에 이르는 200년의 기간 동안 예수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 질문을 신학이라는 지도위에 확고하게 표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역사적 질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 기간 동안에 조직신학의 기독론 분야에 주목할 만한 저작들이 많이 나타났는데(예를 들면, 칼 바르트, 폴 틸리히, 칼 라너, 카스퍼, 쇼넨베르크, 쉴레벡스, 한스 큉) 이 저작들은 역사적 예수라는 문제가 지닌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지만 예수에 관한 역사적 증거들이 그들이 도달한 교의학적 결론들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예수에 관한 실루엣의 시대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학자들이 예수에 관한 확고한 역사적 예수상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초대교회에 관한 새로운 그림들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그림들은 수많은 오류를 지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후1세기 역사와 그 잠재적인 신학적 의미에 관한 새로운 인식이 자라났다. 지난 200년의 기간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아주 중요하지만 예수에 관한 역사적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부 서론[2장 브레데 길의 교통체증]
N.T. 라이트/JVG
2015-06-17 22:52:09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1부 서론
제2장 브레데 길의 교통체증“ 새롭게 등장한 새탐구?
1. 서론
이 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브레데의 길과 그 추종자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브레데의 길과 슈바이처의 길의 추종자들은 비교적 분명하게 구별된다. 예를 들면 예수에 관한 것은 거의 알 수 없고 복음서들은 신학적인 허구라고 주장하는 버튼 맥 같은 사람은 분명히 브레데의 노선에 서 있으며 보그와 크로산은 버튼 맥 보다는 예수의 비중을 높게 잡고 예수의 사역 안의 종말론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그들의 주된 강조점을 보면 그들 역시 수정된 브레데의 추종자들이다. 또한 예수의 유대적 배경을 역설했지만 종말론을 거의 중시하지 않은 버미스도 브레데와 닮았다. 이와 달리 예수를 유대의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위치시키고, 그런 입장을 제시하는 공관복음서 기록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하비나 샌더스는 슈바이처의 노선에 선 학자로 평가된다.
2. 예수 세미나
브레데-불트만 노선을 따르는 새탐구는 1980년대에 사양길에 접어드는 듯 했지만 1980년대 중반에 예수 세미나를 통하여 다시 등장했다. 1985년 몬테나 대학 교수였던 로버트 펑크는 북미 학자들을 결집하여 예수의 말씀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그것들의 진정성에 대해 참여한 학자들이 투표하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 세미나이다. 예수 세미나가 예수 연구에 정경이외의 자료들을 포함시킨 것은 훌륭한 학문적인 태도였으며, 복음서의 비평 본문들을 만들어 내려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은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 세미나에 두 가지 점이 비판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첫째는 이 세미나가 역사에 대해 말하면서 고전적인 실증주의적 표현을 하고 있는 점은 그들이 실증주의라는 공식적인 이미지와 내적인 방법론의 불확실성 사이에서 불안하게 요동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 프로젝트가 운용되고 있는 방식인데, 그들은 복음서들에 대한 모든 비평적 연구의 토대를 이루는 전제들에 참여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주장하지만, 진술된 내용들이 대단히 의심스런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결론들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셋째는 그들이 말씀들을 진정한 것으로 여기는 주된 이유가 그 각각의 말씀이 개별적으로 몇몇 추상적인 판별기준에 비추어 검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선택되어 있는 그들의 예수상에 잘 부합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수 세미나가 지닌 문제점은 지금까지 이 세미나가 제시한 분명한 목적과 주장들을 스스로 상대화시키고 있는 점이다. 예수 세미나의 문제는 개별적인 말씀들에 대한 자세하고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서 예수와 초대교회에 대한 견해를 도출한 것이 아니라 예수와 초대교회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전제하고 그 견해에 부합하는 말씀들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새탐구는 분명히 불트만적 운동으로서 불트만의 추종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의 케리그마에 대한 불트만의 이해를 토대로 역사적 예수를 재건하고자한 시도였다. 예수 세미나의 대표자들인 맥과 크로산은 예수가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관심을 가진 점에서는 대단히 비불트만적이지만 불트만 학파와의 공통점도 여전히 많다.
3. 버튼 맥(그리고 Q의 문제)
버튼 맥의 저서 “순수의 신화: 마가복음과 기독교의 기원” 은 예수 세미나에 강력한 방향을 제시한 책들 중 하나였다. 맥은 이 책에서 마가는 무죄한 신의 아들인 예수가 세상의 종말을 선포했다는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내었고 그 신화가 정경화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재앙에 가까운 결과들을 초래하였다고 주장한다. 맥은 권세 있는 자의 최초의 등장이나 영광중에 오실 자의 최후의 출현에 대한 마가의 환상은 지금 요구되고 있는 기독교의 지혜와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맥은 초기 기독교가 세상을 정죄했던 바로 그 비참한 순간을 정경화하여 세상을 정죄 아래 두었다고 말하면서 마가가 말한 무죄한 신의 아들의 손에 세상을 구속하는 권세가 있다면 세상의 미래는 더 이상 생각하기 힘들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맥은 브레데와 마찬가지로 마가복음이 기독교1세대의 마지막 시기에 여러 신학적 이유들로 인해 만들어진 허구로서 거기에는 예수의 원래 메시지와 그를 따르던 자들의 신념들이 판이하게 다른 사고도식에 의해 근본적으로 수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맥은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의 발전을 두 자기 흐름으로(예수를 따라 그의 가르침을 이어갔던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추종자들의 흐름과 바울을 대표로 하는 헬레니즘적인 그리스도 제의를 따르는 사람들의 흐름) 인식하고 마가는 바로 그 두 흐름을 통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트만이 마가가 이 두 흐름을 혼합한 것이 탁월하고 창조적인 시도라고 생각한 반면에, 맥에게 그것은 재앙이었고 또한 지금도 여전히 재앙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맥에게 예수는 신의 아들이나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사회적 저항과 변혁이라는 어느 정도 비유대적인 전통을 시작한, 사람들을 끄는 흡인력이 극히 강했던 견유학파적인 달변가였다. 여기서 예수의 구원을 위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찬과 교회를 초점으로 하는 주류 기독교에 대한 맥의 근본적인 거부를 보게 된다. 맥의 주장은 반 레이건주의의 조류를 타고 북미의 대안적인 신화로 호소력 있게 등장하여, 실제의 예수는 보수적인 미국교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예수와 결부시켰던 저 악한 묵시사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대중들을 설득하였다.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맥은 비판을 받아야 한다. 첫째는 마가복음의 묵시론적 언어에 대한 맥의 오해이다. 마가복음은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적 묵시론이지만 이것은 세상 또는 역사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맥은 이것을 여전히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둘째는 맥은 마가복음을 마가의 허구라고 주장했지만 공관복음 전승 전체는 실제의 나사렛 예수를 보여줄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셋째는 Q자료에 대한 맥의 지나친 의존과 편견이다. 맥이 Q를 복음서로 취급한 것은 증거들을 벗어나는 것이다. Q자료를 신뢰하는 학자들조차도 Q가 초기 기독교 내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지리적, 신학적 위치와 Q의 편집 단계들에 대해서 결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다. 맥은 Q자료 본문들을 제멋대로 잘라내어 버리고 그 위치를 이리저리 바꿈으로 주후1세기 유대교를 근본적으로 잘못 읽고 있으며 바울의 신학과 종교를 철저하게 소외시키고 있다.
4. 존 도미닉 크로산
(a) 서론
크로산은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가장 탁월하고 매력적이며 박식하고 재치 있는 신약학자로 평가된다. 특히 크로산은 맥보다는 새탐구의 물결이 이루어낸 업적을 더 많이 대변한다. 그러나 크로산은 맥과 마찬가지로 마가가 근본적으로 허구적인 예수상을 후세에 물려주었다고 보는 점에서 브레데를 따르고 있다. 물론 크로산은 맥과는 달리 마가가 파괴적이고 이원론적인 묵시사상을 내세운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크로산은 맥과는 달리 마가는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전복시키는 것이었으며 마가에서 시작된 이런 기독교 전통이 콘스탄티누스적 기독교로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크로산도 맥과 마찬가지로 몇몇 핵심적인 측면들에서 불트만을 따르고 있다. 물론 크로산은 불트만과는 달리 역사적 예수에 대해 상당히 많은 내용을 알 수 있고 그것은 기독교적 신앙과 실천에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일차적인 관심이 예수 자신이 아니라 예수 전승에 있다는 크로산의 고백은 그도 역시 불트만과 동일한 노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b) 기본적인 특징들
크로산의 저서들 자체를 살펴보면, 그의 자료들을 다루는 방법, 역사적 방법론, 거기에 함축된 인식론 모두가 독창적이고 명쾌하며 매우 도발적이다. 특히 자료를 다루면서 크로산은 상당한 분량의 예수전승 목록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목록은 그의 전체 프로젝트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공관복음서를 비교적 후기에 위치시키고 온갖 다른 종류의 저작들을 시기적으로 예수의 공생애 기간에 위치시킨 크로산의 목록이 옳다면, 지난 250년 동안 이루어진 예수에 관한 거의 모든 연구가 허구가 되고 말 것이다. 크로산이 제시하는 예수전승 목록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크로산은 이 목록의 층위들을 자신의 프로젝트의 출발점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실 예수 및 초기 기독교에 관한 그의 기본적인 전제들로부터 도출된 결론들일 뿐이다. 크로산의 목록에 근거한 전체적인 가설들은 궁극적으로 순환론적이다. 크로산이 자신의 목록에 부여한 과학적이고 방법론적인 엄격함은 단지 외관일 뿐이며 역사적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크로산이 사회인류학을 이용한 거시적 역사 서술을 시도한 것을 공로로 인정되지만, 그는 농민층에 대한 충분한 분석을 하지 않은 채 예수를 일종의 혁명가로 묘사하려는 자신의 의도에 맞추어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료를 선별적으로 사용했다.
(c) 예수에 대한 역사적 재구성
크로산은 중개체제라는 극히 중요한 개념을 사용하여 주후1세기 역사의 내용을 셋으로 구분한다. 그것은 중개체제인 로마제국(주인-노예, 후견인-예속민 관계로 이루어진 고도로 발달된 네트워크를 가진 로마세계), 전투태세를 갖춘 중개체제(주후 66-70년 전쟁에 이르기까지 시위, 강도질, 혁명이 고조된 주후1세기 팔레스타인 세계) 그리고 중개체제 없는 하나님나라(예수 자신의 과제들과 사역)이다. 크로산은 예수가 중개체제 없는 하나님나라를 개시시키고자 했다고 주장한다. 예수는 중개체제가 가진 원칙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원칙들 위에 농민 사회를 건설하려고 하였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지중해 세계와 대립시키려고 했다는 것이 예수에 대한 크로산의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이다. 크로산은 맥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강령이 당시 지중해의 농민 문화의 통상적인 사회적 기대들과 어떤 식으로 단절되어 있었는지를 강조하면서 예수의 과제들이 지닌 유대 특유의 차원을 근본적으로 일관되게 과소평가했다.
크로산의 말대로 예수의 사역의 목표가 중개체제 없는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었다면 예수는 왜 죽었고 왜 초대교회는 그의 죽음에 그들이 말한 의미를 부여한 것일까? 크로산의 저작 전체가 이 질문에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못한다. 예수의 죽음과 관련된 가장 초기의 해석들이 이 사건을 유대성서의 빛 아래서 보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성서적 해석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초대교회의 필사자들이 역사적 공백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말한다면, 크로산은 본문들을 순전한 허구 상황 속에 놓고 있는 것이 된다. 예수의 수난 이야기들에 대한 크로산의 역사적 재구성을 보면 그가 브레데의 노선에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d) 초대교회
초대교회 및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해 보여준 관심과 관련하여, 크로산이 제시한 설명보다 사변성이 복잡하게 뒤엉킨 것은 아마 없을 것이다. 크로산은 초기 기독교를 설명하면서 도마의 기독교, 바울의 기독교, Q의 기독교 그리고 주석적 기독교가 존재하다고 말한다. 이런 현란하고 사람을 압도하는 재구성은 크로산의 저작 대부분의 내용들에 나오는데 그의 이런 전제들을 근거가 없거나 허구다. 이 천재적인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도식이 마치 실제 역사라고 생각하게 하는 유혹에 빠지게 만들지만 그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마치 슈바이처와 불트만이 20세기 학자들 위로 높이 솟아 있듯이 크로산도 거의 동일한 이유로 새롭게 등장한 새탐구의 학자들 위로 높이 솟아 있다. 크로산은 슈바이처나 불트만과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자신의 가설을 끝까지 추적하여 근본적으로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매우 매력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며 그것을 독설 없이 공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 비록 크로산과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지만, 그가 오늘날 살아있는 신약학자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5. 견유학파 예수?
새롭게 등장한 새탐구의 일관된 흐름은 견유학파의 철학을 반영하는 자료들 속에서 예수의 말씀들에 대한 병행을 찾아내려는 것이었다. 맥과 크로산도 이런 방향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견유학파 철학자들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활동한 대중철학자들로서 현 사회는 부패하고 무기치하다고 가르치며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생각과 개혁을 주창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견유학파는 주전 5세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안티스테네스라는 인물로 소급된다고 하니 지중해 세계에서는 1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견유학파의 가르침이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예수가 견유학파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한 대표적인 저술가는 영국학자인 제럴드 다우닝인데 그는 견유학파 사상으로 알려진 폭넓은 대중사상이 예수의 가르침, 초대교회, 특히 공관복음 전승에 상당히 많이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다우닝은 견유학파의 가르침과 예수의 가르침 간의 병행을 근거로 예수와 초기 기독교는 일종의 견유학파적 운동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후1세기 팔레스타인에 견유학파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초기 기독교는 현저하게 유대적인 세계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역사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바울은 견유학파를 연상시키는 표현들을 사용했지만 그의 사상과 논증의 방향은 여전히 유대적 및 묵시론적 세계 속에 머물러 있음을 다우닝은 간과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가 견유학파 사상과 일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고 세계관에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예수 전승은 견유학파의 무시간적인 도전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신, 세계의 창조주가 이스라엘 역사와 세계의 역사를 장엄한 결정으로 몰고 가고 있으며,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절박한 행동을 요구한다는 구체적인 어조로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도 다우닝의 주장이 가진 근본적인 모순은 견유학파의 선생중 하나인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이, 왜 다른 견유학파와 판이하게, 아주 급속하게 전 세계로 퍼져나간 운동을 시작했는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또한 다우닝의 주장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고 있다. 다우닝의 주장은 초기 기독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서 수많은 결정적인 내용들을 생략함으로써 얻어진 것일 뿐이다. 견유학파로서의 예수라는 모형이 예수 세미나에 속한 학자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수평적 종말론(이스라엘의 신이 장래에 역사 안에서 행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교묘히 피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이 모형이 제공해 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6. 마커스 보그
마커스 보그는 새탐구와 제3의 탐구 사이에 있는 중도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보그가 예수를 유대 묵시사상 속에 위치시킨 것은 예수를 철저하게 비묵시적 인물로 보는 예수 세미나의 동료들과 다른 축에 서있음을 의미한다. 보그는 예수에 대한 그림을 종교에 대한 비교문화적인 분석으로부터 가져온 범주들을 통해서 발전시켰는데 탈혼 종교인, 치유자, 지혜교사, 사회적 예언자, 운동의 창시자라는 다섯 가지 모습으로 예수에 대한 그림을 제시한다. 보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신적인 아들로 생각하지 않으며 예수가 세상의 죄를 위하여 의도적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보그는 예수가 메시지의 초점을 자신에게 맞추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그의 예수상은 예수 세미나 전체. 특히 버튼 맥 같은 저술가의 예수상보다 철저히 유대적이고 유대적 내부의 논쟁에 참여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보그는 비판되어야 한다. 첫째로, 보그는 예수를 철저히 유대적인 인물로 그리면서도 그의 예수상에는 메시야 같은 유대적인 범주들이 배제되어있다. 둘째는 보그의 말대로 예수가 속죄를 위한 죽음을 죽은 것이 아니라면 예수는 모든 점에서 실패한 인물이 된다. 셋째는 보그는 예수를 종말론적 인물로 묘사했지만 그는 종말론이란 언어를 본질적으로 무시간적인 진리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하고 있다. 넷째는 보그는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라는 구분의 새로운 판본을 제시하고 있다.
7. 결론 :새로운 새탐구
10년 전만 해도 새탐구의 흐름은 이제 소멸되었고 이제 예수 연구의 미래는 슈바이처의 준거 틀 속에서 이루어질 제3의 탐구의 흐름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예수 세미나를 중심으로 새탐구가 다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데, 새탐구가 지닌 내재적인 약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새탐구는 불트만의 영향 아래서 예수의 말씀을 일차적인 자료로 사용하려는 성향이 있다. 둘째는 새탐구는 이러한 말씀들을 여러 종류의 판별기준으로 평가함으로써 역사적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잘못된 사고를 지니고 있다. 셋째, 새탐구는 이제는 포기되어야 할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가지고 작업을 한다. 이 그림은 대체로 보면 불트만이 그린 그림으로서, 비신화화된 수직적 종말론을 전파한 비유대적 예수, 초기에 신학적 해석이 결부되지 않았던 십자가 사건, 얼마 후 특정 집단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되어버린 부활, 지혜적/영지주의적 집단인 초기 기독교 , 헬레니즘적 제의를 만든 바울, 허구적인 공관복음 전승, 이런 그림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더니즘적 그림이야 말로 진정한 허구이며 이런 허구를 주장하던 시절은 이미 끝났다.
브레데의 길과 슈바이처의 길은 양립할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슈바이처의 길이 옳다고 확신한다. 20세기 말에 새롭게 등장한 새탐구는 브레데의 길 위에서 정체상태에 빠져 있는 반면에 제3의 탐구하고 불리는 슈바이처의 길은 앞으로 질주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브레데의 길을 따르는 예수 세미나는 유대적 종말론 특히 묵시사상을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배경으로 삼기를 거부했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마가의 이야기를 하나의 허구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제3의 탐구는 마가의 이야기를 아주 단순하게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를 유대적 종말론이라는 맥락 속에 위치시켜 왔고, 그 결과 확고한 역사적 연구의 새로운 길들을 발견해 왔다. 결론적으로 새탐구는 실패한 것으로 보이며 그들의 실패로 말미암아 제3의 탐구가 가급적 빨리 주자로 나서야 할 필요성이 과거 어느 때 보다 절박하게 되었다.
1부 서론[3장 미래를 향하여]
N.T. 라이트/JVG
2015-06-17 22:52:53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1부 서론
제3장 미래를 향하여 :제3의 탐구
1. 속박을 벗고
옛 탐구 그리고 케제만에 의해 시작되었고 예수 세미나에 의해 부활된 새탐구 대신에 이제 슈바이처가 시작한 제3의 탐구를 추구해야 한다. 예수를 유대적 종말론의 범주로 보는 슈바이처가 시작한 관점은 오늘날 예수 연구에 선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범주라고 생각한다. 옛 탐구는 예수를 가급적 주후1세기 유대인으로 보지 않기로 작정했고 그래서 불트만은 주후1세기 유대인이라는 성격 속에서 예수의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새탐구도 이런 노선을 따라서 예수가 지닌 유대적 특성을 경시했고 그 대신에 예수가 지중해 세계의 다른 문화들을 공유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새탐구는 예수의 죽음이 지닌 의미도 대체로 과소평가하며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아는 것이 거의 없으며 초기의 그리스도인들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제3의 탐구는 예수를 주후1세기의 전형적인 유대인,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힐만한 일을 한 주후1세기 유대인으로 이해한다. 제3의 탐구는 예수를 확고하게 유대교 내에 위치시키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이 유대 당국자들에 의해서 거부된 이유들을 찾는다. 또한 제3의 탐구는 예수의 제자들이 아주 초기부터 유대교 내의 한 분파로 인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 간의 주된 연속성을 전제한다. 제3의 탐구가 추구하는 것은 바로 역사적 진리이며 사이비 판별기준들을 사이비 역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고 진지한 역사적 방법론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제3의 탐구에서 예수를 연구하는 역사가에게 놓인 과제는 예수에 관한 전승들을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 두고 재구성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에 대한 진지한 가설을 제시하고 그것들이 얼마나 잘 들어맞는지를 보기 위하여 관련된 자료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2. 질문들
제3의 탐구 속에서 다루어져야 할 다음 5가지 핵심 질문들은 고립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점에서 서로 중복되고 얽혀 있다. 이 질문들은 모두 제3의 탐구 속에서 명시적으로 제기되며 예수에 관한 어떤 연구도 암묵적으로 이 질문 모두와 관련하여 어떤 입장을 취하지 않고는 개시될 수 없다. 그 5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는 어떻게 당시의 유대교와 부합하는가? 2) 예수의 목표들은 무엇이었는가? 3) 예수는 왜 죽었는가? 4) 초대교회는 어떻게 탄생되었고 왜 그런 모습을 띠게 되었는가? 5) 복음서들은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인가?
1) 예수는 어떻게 당시의 유대교와 부합하는가?
이 질문은 예수를 주후1세기의 유대교 내의 어떤 지점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의 문제다. 첫째, 예수를 그가 살았던 유대적 배경 속에 아주 철저하게 넣어버려서 그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예수의 모습은 철저히 유랑하는 하시드, 유대인 혁명가의 모습이 된다. 둘째는 또 다른 극단으로서 예수가 지닌 유대적 배경을 극소화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예수의 모습은 무시간적이고 비유대적인 진리를 설파하는 설교자, 견유학파적인 예수가 될 것이다. 이런 양 극단을 적당히 접촉시키고 수정해서 만든 예수상도 있는데, 예를 들면 예수를 매우 유대적 인물로 상정하면서도 실존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무시간적인 형태의 진리를 설파하는 버미스의 예수상과 비유대적인 인물이면서도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함으로 유대적 운동들과 연대하는 크로산의 예수상이 그것이다. 셋째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입장인데, 이것은 예수의 배경이었던 유대교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의 덩어리이고 예수는 그것을 반대하고 다룬 종류의 종교, 즉 내적인 영적 종교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만약 전통적 입장이 진실이라면 하나님이 역사 내에 개입하셔서 뭔가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던 굶주린 백성들에게 예수는 추상적이고 내면적인 진리를 설파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사가 되고 말 것이다. 첫째가 예수와 유대교를 거의 동일시한 경우라면 둘째는 예수와 유대교를 거의 분리시킨 경우이고 셋째는 유대교 유산의 핵심적인 부분을 반대하고 수정한 예수를 제시함으로써 예수와 유대교를 대결시킨 경우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주후1세기 유대교에 대한 세심한 역사적 재구성에 달려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소망 및 기대들과 예수가 어떤 관계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이스와 슈바이처 이래로 학자들은 예수와 그의 동시대 사람들은 시공간으로 이루어진 현재적 질서가 끝나고 역사는 사라지며 현세대와 본질적으로 불연속성을 이루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와 동시대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참 신의 백성을 주관하는 현 시대의 종말과 신의 백성의 운명이 회복되는 때의 개시를 기대했다. 불트만 이후의 새탐구 속에서는 신의 나라 혹은 하늘구름을 타고 오시는 인자를 시공간 질서를 끝장낼, 곧 일어날 사건에 대한 문자적인 예언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유대교의 묵시론적 언어를 이런 식으로 읽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묵시론적 언어는 역사적 사건들에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정교한 은유체계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묵시론적 언어는 주후1세기 유대교의 종말론적 기대라는 풍토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임박한 심판에 대한 예수의 경고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절정의 순간으로 인식된 사회 정치적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민족적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2) 예수의 목표들은 무엇이었는가?
이 질문은 첫 번째 질문에서 자연스럽게 따라 나오는 것으로서 예수가 유대교 내에서 무엇을 하려던 것이었는가? 그리고 예수의 사역은 예수의 목표와 어떻게 관련된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신앙에서는 예수의 목표는 세상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죽는 것이었고 라이마루스나 브랜던에게 예수의 목표는 유대인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는 것이었다. 전통신학은 통상적으로 예수가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에서 예수는 왜 죽었는가라는 질문으로 건너뛰고 그 중간 과정을 비워놓는 것으로 만족해 왔는데, 예수의 목표에 대한 이런 전통적인 관점은 첫 번째 질문을 전혀 고찰하지 않는 결점을 지닌다.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살펴보아야 할 두 가지 점은, 첫째 주후1세기 당시의 해당 사회 또는 문화의 세계관을 연구하여야 하며 당시 사람들이 세계를 보았던 방식, 그들이 소망했던 것,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예수 개인의 사고방식을 연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세계관은 거대하고 포괄적이어서 지역적이나 개인적 편차가 들어설 수 있는 풍부한 여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목표들을 탐구하기 위하여 예수의 특정한 세계관 그리고 그 세계관에 도전하면서도 관련된 의미가 있는 의도들을 지닌 예수의 특정한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비평학 이전의 전통적인 견해는 예수는 세상 죄를 위하여 죽었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왔다는 것이고, 이와 달리 옛 탐구는 예수는 기본적으로 진리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고 전제하며 예수의 말씀들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무시간적인 진리들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제3의 탐구에 속한 저술가들은 예수의 목표들이 하나님나라와 관련이 있고 또 거기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3) 예수는 왜 죽었는가?
예수가 죽고자 하는 의도의 유무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충분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는 사건을 초래하게 된 상황이 무엇이었는지? 이 사건에 연루된 여러 주체들의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나타내주는 목적과 의도는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의 많은 분파들은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일련의 신학적 대답들을 제시하지만 복음서 기자들은 신학적 대답보다는 역사적 대답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복음서의 역사적 설명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초기 기독교 속에서 발견되는 십자가 사건에 관한 신학적인 기사들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 사건이 대한 복음서 기자들의 역사적 기사들이 후대의 신학적 관심들을 반영한 것인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
예수는 왜 죽었는가? 탈무드 시대로부터 유대인들 가운데 유포되었던 대답은 예수는 백성을 기만한 자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라이마루스 이래로 옛 탐구에 속한 학자들의 대답은 예수는 이스라엘 당국과 로마당국을 반대한 혁명가였기 때문에 처형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단순화된 설명에 반대하여 샌더스는 예수는 성전에서의 행위로 인하여 유대교 제사장과 지배층을 자극하였고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잡아 로마에 넘겼다고 말한다. 제3의 탐구 속에 등장하는 중요한 흐름은 성전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그의 죽음과의 연관성을 결부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에 대한 역사적 질문에 어떤 만족스런 대답을 발견하다고 하더라도 신학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기독교 전승 속에서 아주 초기에 예수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 해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는 정형 문구는 십자가 사건이 있은 지 불과 수년 내에 전승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왜 죽었는가? 라는 질문은 왜 초대교회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그런 의미를 부여했는가? 라는 질문을 포함하게 된다.
4) 초대교회는 어떻게 탄생되었고 왜 그런 모습을 띠게 되었는가?
제3의 탐구는 복음서들의 빛 아래서, 즉 초대교회에 비추어서 예수를 연구하며 또 예수의 빛 아래서 복음서들을 비롯한 초대교회를 연구하는 순환을 피할 수 없다. 한 대목에서의 가설들은 다른 대목에서의 가설들과 부합하여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다양성을 넘어서 하나로 통합된 것은 그들이 예수 안에서 절정에 도달했고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새 삶과 과제를 낳았던 이스라엘 이야기의 한 형태를 말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마지막 날에 구원하실 것이라는 유대교의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그 구원을 장엄한 법정 장면의 견지에서 해석하였는데, 여기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적 견해와 달리 그 평결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이미 선언되었음을 믿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종말이 이미 이르렀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종말이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종말이 아니라고 선포했다. 교회에 이런 신앙을 가져온 사건,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초대교회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우리를 끊임없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또한 이 질문은 예수와 모종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초대 교회에서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특징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왜 초기의 제자들은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했을 때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핍박을 각오하고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이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다고 선포하게 되었을까? 왜 제자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그런 식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왜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를 예배하고 예수를 유대식의 유일신 사상의 정형문구들 속에 포함하기 시작한 것인가? 예수에 관한 모든 묘사들은 적든 많든 그것과 보완관계에 있는 초대교회에 관한 묘사에 의존하며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역사와 신학의 상관관계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5) 복음서들은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인가?
복음서는 문학의 새로운 장르이다. 왜냐하면 복음서는 단순한 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단순한 종교적 선전물도 아니며, 이 둘의 중요한 특징을 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이 예수와 모종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왜 복음서들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주후1세기의 유대교와 복음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조각그림 맞추기의 서로 정반대쪽에 있는 모서리들로서 예수에 관한 모든 담론들은 이 둘 사이에서 생겨난다.
6) 다섯 가지 질문들에 대한 종합적인 고찰
이 다섯 가지 질문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른 질문들 속에서 공명을 일으킨다. 그래서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 다섯 가지 질문들은 모두 합쳐져서 예수에 관한 조각그림을 형성하고, 이 형성된 조각그림은 기독교의 출현이라는 더 큰 조각그림 안의 한 조각이 된다. 이 다섯 가지 질문들은 결국 한 편으로는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관계, 다른 한편으로는 초대교회에 대한 예수의 관계라는 주제로 통합된다. 브레데가 초대교회와 복음서에 관한 질문에 비중을 두었다면 슈바이처는 예수에 관한 질문에 비중을 두었으며 불트만은 오직 초대교회에 관한 질문에 모든 비중을 두었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한 가지 질문에 제시된 대답이 종종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는 엉성하고 잘 맞지 않는 답변을 초래하는 것이다. 불트만의 도식에서는 역사가 신앙을 손상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리고 예수 세미나에서는 역사가 정통신앙을 어느 정도 만들어 내거나 밑받침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그들은 비평적 방법론들을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침묵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슈바이처가 예수를 유대적 배경 속에 놓은 것, 그리고 유대적 배경을 묵시론적으로 본 것은 옳지만, 그러한 묵시론적 종말론을 해석한 방식은 잘못되었다. 슈바이처의 이런 약점은 결국 질문2와 질문3에 대한 그의 대답들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나아가 질문4와 질문5에 대한 그의 답변들도 의심스럽게 만든다. 이런 문제는 제3의 탐구들 내에서도 생긴다. 예를 들면 질문1과 질문2에 답하고자 하는 시도는 종종 질문4와 질문5에 대한 대답에 실패하게 만든다. 또 다른 예는 질문2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예수를 견유학파에 속한 설교자로 묘사) 제공해준 다우닝은 질문3에 대하서도 암묵적인 해법을 제시했지만 질문1에 대해서는 의심스런 대답을 했고 질문4와 질문5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실패했다.
7) 여섯 번째 질문 : 오늘날의 과제들과 신학
우리가 역사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예수는 오늘날 교회와 세계에 대하여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 질문이 연구과정에서 지렛대 역할을 해서는 안 되지만 궁극적으로 고려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질문1, 즉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관계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들을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제3의 탐구를 향한 최초의 추진력들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를 좀 더 유대적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3의 탐구들 안에서도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엇갈린다. 20세기 초의 신학자들은 유대교는 단지 밝은 빛을 더 비추게 하는 어두운 배경 막에 불과하다는 전제하에 종교사적 연구를 했고 그 결과 기독교의 기원을 비유대적인 곳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반대로 2차 대전 후의 반동은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따라서 정반대로 유대적 개념들은 선하고 비유대적 개념들은 나쁘다는 전제를 가지고 기독교의 기원을 유대적인 것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유대적 개념들과 비유대적 개념들을 구별하는 일이 사실 매우 어려운 일이고 어떤 개념들을 특정한 문화와 결부시켜서 평가해야 한다는 신념도 거부되기 쉽다. 제3의 탐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오늘날 신학화를 위한 은폐물로서 역사적 논증을 사용하는 사적인 게임이 되고 말 것이다. 제3의 탐구에서 가장 민감한 신학적 문제는 기독론이다. 과연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드려왔던 예배를 불러일으키거나 적어도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예수상을 그려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전기적 정보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복음서 기사들을 선험적으로 후대의 첨가물로 보고 있기 때문인가? 우리는 예수의 실제의 모습에 관해 더 많이 알기 위하여 복음서를 읽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실제의 모습에 상관없이 예수가 성육신한 신의 아들이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라는 복음서 기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복음서를 읽는 것인가? 이런 두 가지 차원의 읽기는 서로 결합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상호 배타적인 것인가? 제3의 탐구는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어떤 결론이나 전제를 가지지 않고 열려있다.
3. 제3의 탐구의 향후 진로들
역사적 예수상을 그의 종교적 의의에 대한 재발견과 통합시켜야 한다. 제3의 탐구는 엄격한 역사적 재구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역사와 신학을 분리하지 않고 정당하게 다루는 새로운 통합을 그 과제로 한다. 교회의 실천이나 신학에 소용없는 짓이라는 비판이 두려워서 제3의 탐구를 수행하고 진보시키는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역사가 건드릴 수 없는 신앙이라는 사적인 세계 속으로 물러나서는 안 되며 역사적 문제를 붙잡고 계속해서 도전해야 한다. 만일 역사를 떠난 사적인 신앙의 세계로 물러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특히 유대적 종말론을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부각해야 한다. 그 질문을 따라 그 방법론을 사용함으로써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예수에 대한 이해를 실질적으로 전진시킬 수 있고 나사렛 예수와 기독교 신앙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아주 중요한 문제들을 새로운 방식을 제기할 수 있다. 신약성서의 기자들이 예수와의 만남을 이스라엘 신과의 만남이라고 말했을 때, 그들은 예수가 누구였으며 또한 누구인지를 새롭게 재정의함으로써 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재정의한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는 역사를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지금은 주후1세기 유대교에 대한 발견들과 연구의 엄청난 물결에 힘입어서 라이마루스, 슈바이처, 불트만, 샌더스, 크로산 등이 제기한 문제들에 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역사를 연구함으로 계몽주의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신학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의 성상들과 실루엣의 무더기 배후에 감춰져 있는 신학적 가능성들을 재발견해 낼 수 있다.
1부 서론[4장 탕자들과 패러다임]
N.T. 라이트/JVG
2015-06-17 22:53:28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제1부 서론
제4장 탕자들과 패러다임들
1. 유대인들, 소작농들, 탕자들
누가복음의 ‘탕자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 특히 포로기와 회복기의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포로기의 예언자들인 에스라와 느헤미야 그리고 이후의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의 서사문법과 일치하며 그 궁극적인 배경은 출애굽 곧 포로생활과 회복이다. 포로생활과 회복은 제2성전기 이스라엘이 처한 중심적인 드라마였고 탕자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귀환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고도로 전복성향을 지닌 다시 말하기로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환이 예수 자신의 사역 속에서 극히 역설적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이 끝났고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되었음을 가리키는 이 이야기는 이방인들이 들어올 때라는 좀 더 큰 서사를 포함한다. 이스라엘의 메시야적 회복과 이에 따른 세계 선교의 신학적 근거 제시는 마태복음과 바울 서신 속에서 두드러진 이야기로 나온다. 이스라엘은 포로생활에서의 귀환을 기대하고 있었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그 일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행동하였고,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서 그것을 정당화하였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그들이 예수가 포로 귀환을 수행하는 주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탕자 비유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새로운 세계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세계를 맞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드라마 상으로도, 역사적, 신학적으로도, 이 탕자 이야기는 예수의 사역과 정확하게 부합한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자신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이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한다는 이야기이며 이스라엘의 신의 나라가 도래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비유에서 두 번이나 나오는 부활에 관한 선포는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잘 드러난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신이 자기 안에서 또 자기를 통해서 그의 백성을 회복하고 계시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예수의 이런 주장은 격한 논쟁 그리고 기득권 세력과 충돌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2. 비유에서 패러다임으로
1) 가설을 향하여
탕자 비유는 이스라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만, 그리고 이스라엘 이야기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기 위하여 말하고 있다는 관점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이 비유는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라는 두 세계관들의 간격과 아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비유는 유대적 배경과 초기 기독교의 세계, 이 둘은 결정적으로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면에서 상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적 배경과 기독교 세계간의 이런 이중의 움직임(유사성과 상이성)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예수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후대의 기독교 본문들을 통해서만 연구하거나 아니면 유대교에 대한 복잡한 재구성들로부터만 연구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상이성의 기준과 아울러 유사성의 기준이 예수 연구에 함께 적용되어야 한다. 주후1세기 유대교 내에서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후대의 기독교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때, 예수의 진정한 역사에 접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연구 원칙에 근거하여 앞에서 제기된 5가지 질문에 대한 기본적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세울 수 있다.
(a).예수는 어떻게 당시의 유대교와 부합하는가? 예수는 주후1세기 유대교와 부합하고 그 이야기들을 새롭고 철저하고 포괄적인 방식들로 다시 말했다. 예수는 말과 행동으로 유대교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역설적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b) 예수의 목표들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는 세례요한과 흡사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형성하는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백성의 재형성은 그 자체가 포로귀환이고 구속이며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운동은 반성전 운동으로 인식되었다.
(c) 예수는 왜 죽었는가? 이런 모든 이유들은 바리새인들과 성전 당국자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들은 로마와 합세하여 예수의 갱신운동을 짓밟으려고 했다.
(d) 초대교회는 어떻게 탄생되었고 왜 그런 모습을 띠게 되었는가? 예수의 선포는 죽음으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그 정당성을 신원 받았고 그것은 예수의 부활이라는 역설적인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가 실제로 도래하였다고 믿을 근거와 이방인을 향한 선포의 근거를 제공하였다.
(e) 복음서들은 왜 현재와 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복음서의 저자들은 이 원래의 이야기를 새롭고 신학적으로 일관된 맥락 속에서 다시 말하게 된 것이다.
이런 가설은 본질적으로 단순한 개요가 어떻게 세부적으로 전개되는지를 보여주고, 역으로 다양한 세부적인 내용들이 그 안에서 어떻게 이 가설에 부합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검증될 수 있다. 이 가설의 검증은 다른 모든 가설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자료들을 왜곡함이 없이 포괄하는 것, 설명방식의 본질적인 단순성, 그 밖의 다른 것들을 조명해 줄 수 있는 능력들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2) 이야기들을 말하는 것에 대하여
이 비유가 소작농 사회라는 배경과 부합하고 서로 공명한다는 것은 소작농 사회에서의 이야기하기의 성격과 관련된 또 다른 종류의 가설을 제공해준다. 소작농 사회에서의 삶과 생각은 중요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함으로써 형성된다. 이 비유는 이런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그것은 비공식적이지만 통제된 구전전승의 세계이다. 불트만은 예수에 관한 구전전승들은 비공식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에 게르하르트손과 리젠펠트는 그것들이 공식적이고 통제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베일리는 중동 농촌 사회에서의 선교 경험을 토대로 이 극단적인 두 입장 사이의 중도적인 입장을 대변하여 비공식적이고 통제되지 않은 전승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그것들은 특정한 교사들과 문도들이 없다는 점에서 비공식적이지만 지역사회 전체가 그 전승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전승들은 심각하게 변질되지 않도록 통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야기의 중심적 줄거리들은 변할 수 없지만 내용이 공동체의 정체성과 상관이 없고 지혜롭거나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좀 더 많은 융통성이 허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베일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는 가정은 유지될 수 없다. 나사렛 예수의 말씀들과 행위를 기억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독특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들은 반복해서 말해지고 통제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을 현재의 모습이 되게 한 모든 것은 상실되어 버렸을 것이다.” 베일리의 주장은 공관복음 전승에서 이야기들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말씀들이 어느 정도 동일하게 보존된 방식을 잘 설명한다. 브레데로부터 크로산에 이르기까지 신약성서 비평의 흐름은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들의 이념을 따라서 재형성했고 그 이후에 기독교회는 이것을 정경화하고 심각한 왜곡을 자행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베일리의 주장은 이러한 신약성서 비평의 흐름을 전복시키고 있다.
3) 세계관들과 사고방식들
세계관들은 특정한 사회가 세계를 바라볼 때 사용하는 렌즈들, 좌표들인데 이 세계관들은 이야기들, 상징들, 실천들, 질문과 대답들로 구성되며 이런 특징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들로 서로 상호작용한다. 사고방식은 특정한 개인이 가진 세계관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통상적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지되지만, 특정한 상황 속에서는 전복될 수도 있고 수정될 수도 있다. 그리고 세계관들과 사고방식들은 일련의 신념들과 목적들을 낳고 이것은 부수적 신념들과 의도들을 통해서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표현된다. 예수라는 개인에 대한 역사적 연구는 이런 모든 차원들, 즉 세계관, 사고방식, 신념들, 목적들, 부수적 신념들, 의도들에서 그 인물에 대한 이해에 기여할 수 있는 증거들을 모으고 해석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과정은 두 가지 방향 속에서, 즉 첫째는 사건에서 사고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고 둘째는 이미 확인된 세계관 내의 사고방식으로부터 행위들에 관한 가설로 움직일 수 있다. 이러한 두 종류의 탐구는 역사적 연구가 끊임없이 행하는 과정이다.
특정한 사고방식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세계관 내의 여러 변이들은 모든 차원(상징, 이야기, 실천, 질문들, 신념들, 목적들, 의도들) 에서 생겨날 수 있지만 그것들이 말이나 행위들을 통해 표출될 때 특히 공적이고 가시적이 된다. 그러므로 특정한 행위들을 사용해서 특정한 의도들을 추론할 수 있고 나아가 세계관 내의 하나의 사고방식에 대한 전체적인 모형에 도달할 수 있다. 이사야를 예로 들면, 이사야가 3년 동안 벌거벗고 맨발로 돌아다닌, 이러한 실천은 세계관과 관련된 질문들에 새롭고 놀라운 방식들로 대답하면서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의 상징으로 기능한다. 본서의 제2부의 목적은 당시의 유대적 세계관 내에서 예수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 과제를 위하여 5장에서는 예수의 특유한 실천을, 6-8장에서는 예수가 말한 이야기들을, 9장에서는 유대교의 상징들에 대한 예수의 태도와 이것이 초래한 갈등을, 10장에서는 기본적인 세계관적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들을 검토해 갈 것이다. 그리고 3부에서는 2부에서 규명된 예수의 세계관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신념들과 목적들을 검토하고 이런 과정 속에서 예수 자신의 소명의식과 정체성 의식, 자신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태도를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해결과제들을 통해 제3의 탐구가 제기하는 다섯 가지 질문들 중 처음 3가지 질문(예수와 유대교: 예수의 목적들: 예수의 죽음의 원인들)에 대한 가설들이 검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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