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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개신교의 율법관

개신교의 율법관

2015-01-03 21:59:56


개신교의 율법관 소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 및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중심으로

 

 

기독교 강요 제2권 7장 율법에 대하여

 

  칼빈은 율법의 첫번째 기능으로 정죄하는 기능을 언급한다. 율법 특히 도덕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드러남으로써 각 사람에게 자신의 불의에 대해 경계하고 알리고 깨우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율법 자체가 아니라 사람의 부패한 본성이다. 율법은 의롭고 신령하지만 사람의 부패한 본성이 하나님의 신령한 법에 대적하기 때문에 본래 구원을 위하여 주어진 율법이 죄와 사망을 이루는 것으로 바뀌고 만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은 율법의 정죄하는 기능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죄는 우리를 심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의지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고 기다리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의 두번째 기능은 범죄자들에게 율법에 부가된 형벌의 두려움을 갖게 하여 그들을 억제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억제는 강압적인 것이지만 공공사회를 위하여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율법의 이런 두가지 기능은 모두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성령이 그 마음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신자들과 관련된 것인데 칼빈은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이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이고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성령을 통해서 신자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사모하는 상태에 있는데 율법은 그들이 사모하는 바 주의 뜻의 본질을 배우고 또 그 뜻을 깨닫고 있음을 확인해주는데 최고의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들은 율법을 묵상하여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깨움을 받으며 돌이킴을 받으므로 율법을 통해서 발전하고 전진을 계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칼빈은 일부 무지한 자들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내 던지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운 모범이 율법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바르고 정의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율법에서 떠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칼빈은 신자들에게는 이제 율법은 엄격한 재판관처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권고함으로써 우리기 열심히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제시해준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칼빈은 율법의 첫째, 둘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고 세번째 기능은 그리스도께 인도된 신자들의 규범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고 세번째 기능이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이고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의 첫째 둘째 기능은 율법의 본래의 목적이나 고유한 기능이라기보다는 사람의 부패한 본성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율법이 도리어 정죄하는 것으로 변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구약의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의미는 율법이 신자들에게 무엇이 옳바른가를 명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의 정죄하는 기능이 사라졌다는 의미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신자들에게 율법의 첫번째 두번깨 기능이 사라졌다는 의미이지 율법의 고유하고 본래적인 기능인 세번째 기능은 사리지거나 폐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의식법들은 그 효과는 폐지되지 않았지만 그 사용은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그 의식들의 사용을 폐지하였고 또 그 의식들의 효력을 확증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의식법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으므로 폐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3문에서 율법에 대해 처음 언급하면서 율법을 통하여 사림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4문에서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율법을 통하여 알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5문에는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이유는 자신 안에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어지는 문답에서 사람의 타락한 본성의 기원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과 불순종임을 말하고 그래서 사람은 본질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고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9문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본성적으로 부패해서 행할 수 없는 것을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라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지만 그에 대하여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탓으로 돌리는 좀 이상한 대답을 한다. 왜냐하면 율법이 주어진 것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과 타락이후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사람이 본성적으로 부패하여 율법의 요구를 행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9문의 질문을 아담과 하와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 아닌가? 동문서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91문에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선행이란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62문에서는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고 불완전하여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선행의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63문에선 하나님은 선행에 상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셨지만 우리의 선행은 아무 공로가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상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얻는 선물이라는 좀 동문서답 같은 설명을 한다. 결국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의 선행의 의미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64문에서는 이런 가르침의 현실적 한계를 우려한 듯이 이런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선행에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는가? 가는 질문을 하지만 그 대답은 참된 신자라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좀 추상적인 대답을 한다. 결국 이 대답은 참된 신자인지 여부는 선행으로 판가름 난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왜 선행이 하나님 앞에 의의 한 부분이 되거나 하나님의 상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인가? 86문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왜 신자가 선행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그 대답은 신자가 하나님의 은덕에 감사하고 신자를 통해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기 위함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결국 신자의 선행의 의미를 구원에 대해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의 선행은 구원을 얻는 데는 상관이 없다는 말인데 이상하게도 87문에서는 감사치도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삶을 살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선행이 구원에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신자의 선행과 구원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한 설명을 하지 못한 듯이 보인다.

 

그러면서도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92문부터 113문에 이르기 까지 십계명을 자세하게 다룬다. 그리고 신자라도 이 계명들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고 겨우 순종을 시작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는 첫째는 신자가 평생 동안 죄악된 본성을 더욱 알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죄와 의로움을 더 간절히 추구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둘째는 신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더욱 변화되기를 노력하고 성령의 은혜를 구하게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이 말은 율법의 기능이 주로 죄를 깨닫고 그래서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하는데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인데 바로 이것을 지도하는 준칙이 구약과 신약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이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믿을 것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이 두 가지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소요리문답은 성경이 가르치는 이 두 가지 준칙을 기둥으로 하여 전개된다.

14문에서는 죄란 하나님의 율법을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지키거나 그 법을 어기는 것이라고 설명한 후에 첫 사람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죄와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20문부터 37문까지 길게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리고 39문부터 81문까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유사하게 십계명에 대하여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앞에 성경이 가르치는 두 가지 준칙의 두 번째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십계명을 가지고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82문에서는 타락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생각과 말과 행위로 날마다 범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죄마다 마땅히 받아야 할 보응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진노와 저주를 피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며 은혜의 방도(말씀과 성례와 기도)를 부지런히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요리문답은 율법이 신자가 되기 전에 죄를 정죄하고 죄를 깨닫게 하여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기능으로 주로 이해하는 듯하며 신자가 된 후에 삶의 준칙이나 선행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는 소요리문답이 하이델베르크 문답보다 율법이나 선행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있지 않는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문답의 경우는 같은 십계명을 다루면서도 율법을 신자에 대한 요구와 관련한 반면에 소요리문답은 신자가 되기 이전의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관련시키고 있다.

 

이상의 검토에서 보듯이 개혁주의 신앙노선의 대표적인 두 요리문답의 율법관은 율법의 부정적 기능인 정죄와 죄를 깨닫게 하는 일 그래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구하게 하는 일로 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칼빈이 루터와 달리 율법의 제3의 용도로서 신자의 삶의 준칙을 강조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루터의 율법관과 별로 차별되지 않고 있음이 이 대표적인 두 요리문답에서 나타난다. 결국 구원을 받는 일이 제일 중요하고 율법은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죄를 깨닫는 기능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의 선행의 문제에 대하서도 소요리문답은 아예 언급이 없고 하이델베르크는 언급하고 있지만 신행과 구원의 유기적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 전통은 구원을 받는 일, 신자가 되는 일은 강조되지만 구원을 받은 후, 신자가 된 후에 어떻게 살 것인가? 대해서는 매우 취약하다고 판단된다. 이것은 결국 구원의 의미를 죄 사함에 주로 국한시키는 개신교의 신학적 편협함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가운데 율법을 총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데 기인할 것이다.

 

특히 우리는 하이델베르크 9문에서 던진 질문 “하나님이 사람이 본성적으로 부패해서 행할 수 없는 것을 율법에서 요구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닌가?” 에 대하여 깊이 숙고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사람의 타락이후에 율법은 주신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키지 못할 율법을 사람에게 요구하신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하이델베르크 문답은 이 질문을 스스로 해놓고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스스로 가진 신학적 전제 때문일 것이다. 또한 하이델베르크 64문에서는 선행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나 공로가 되지 않는다는 이런 가르침으로 사람들이 선행에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하고서도 그 질문에 제대로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하지 못하는데 이것 역시 하이델베르크 문답이 가진 신학적 전제로 인한 것이라 생각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율법의 세가지 기능을 설명하고 세 번째 기능이 율법의 가장 중요하고 고유의 기능이라고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대표적인 이 두 요리문답이 보여주듯이 개신교의 목회현실에서는 칼빈의 율법관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주로 율법의 부정적이고 부차적 기능에 국한된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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