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 윤종하
2011-06-28 16:21:00
본내용은 故윤종하 총무께서 1990년 이전에(정확한 연도는 잘 알수 없음) 성서유니온 총무로 재직중에 강의한 내용으로서 총 4시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테이프는 총 6개로 구성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되었고 CD로 제작된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의 녹취록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윤종하 총무강의)
첫째시간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대체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조금 더 성경을 포괄적으로 살피면서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던 부분들 중에서
조금 더 온전하게 채워가는 부분,
그런 부분을 생각해 보는 그런 의도를 갖고 본 강좌를 계획하였습니다.
물론 이 강좌를 넣게 된 동기는 성경을 우리가 좀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받을 것이냐?
성경을 어떻게 묵상 할 것이냐? 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1차적으로 복음이 무엇인지 분명해야만
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성경묵상도하고
성경 해석할 때도 구속사적인 부분이 명백할 것 같아서
복음의 개념이 혹시 정리가 어느 정도 되었을까? 하는 부분이 논의가 되었습니다.
설명하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복음에 대해서 설명을 더 해보고 정리를 해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이 있었다.
또 제 나름대로 복음에 대해서 성경 읽는 중에 더 보충하고 싶고 깨달아져 왔던 부분들을 나누고 싶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첫 시간에는 주로 성경에서 복음이 어떻게 되어져 가는지를 전반적으로 논리를 찾지 않고 구절들을 대충 훑어가는 식으로 하겠습니다.
조금 지루할지 모르지만 성경 본문을 메시지로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구절만 적으시든지 아니면 구절을 적으시지 않더라도 대개 아는 구절이니까 별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구절을 전반적으로 우리가 찾아보는데 주의할 점은
일단은 '주제별공부'와 '본문공부'의 차이점을 누누이 말씀드렸는데
'주제별 공부'를 하면
기쁜 소식이라는 입장에서 시작해도 되고
구원론으로 연결해 간다든지 여러 가지가 가능하겠는데요,
성경에 설명이 꼭 그렇게 되어 있는지 다르게 되었는지
조금 다양하게 되었는지를 다(all)는 도저히 다 읽을 수 없다.
구약은 전혀 읽지 않을 생각인데요
신약만이라도 다(all)는 아니지만 대충대충 읽어 가는 식으로 해서
거의 커버를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본문을 좀 잘 보시고 거의 아는 내용이지만 조금 보완하고 싶은 부분
그러고 나서 우리가 이론적으로 하나하나를 찾아가는 그런 방식을 취하겠습니다.
맨 먼저 마가복음 1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1장 1절 꽤 뚜렷한 구절인데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그리스도와 복음 사이에 '의'자가 있으면 더 좋겠다는 주석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의'자가 있는 것 하고 없는 것하고 뉘앙스가 좀 차이가 나겠지만
뭐 크게 깊이 생각하시지 말고 여기서는 복음을 무엇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일 가능성이 있고요,
혹시 '의'자를 붙인다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복음
혹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주신 복음 그런 뜻도 되겠는데요.
그래도 신약의 메시지라 FF 부르스가 쓴 책에 보면 이 부분 설명부터 나옵니다.
복음은 일단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있는 것을 이해하시면 좋겠고요.
서론으로 일단 몇 절 찾고 나서 쭉 찾기로 하겠습니다.
로마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말씀하신 것이라" 복음을 무엇이라고 했지요?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된 것.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구약의 약속.
물론 구약의 약속이라는 부분도 어떤 의미를 갖고 있기 하지만
내용은 아들에 관하여 이다.
그런데 3절에 설명을 첨가하기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성육신 했다는 말이다. 육신으로 오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
로마서 1장에서는 꽤 길게 아주 명백하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이미 구약에 약속되어 있는데
약속된 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오셨는데 오실 때 다윗의 혈통에서 육신으로 오셨다.
물론 다윗의 혈통이라는 부분이 무엇을 강조하는지 생각할 부분이 있죠.
왕권에 대한 설명인지 다른 말인지…….
그러나 '육신'으로란 말은 명백하죠! '육'으로 오셨다는... '육신'으로 오셨다는!
그 다음에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여 거기에 죽음을 강조하기보다는 '부활'을 강조하고 있고요.
그래서 3가지 주제가 아니고 즉 ‘육신으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 해서
3가지 주제가 아니고 실제로는 2가지 주제입니다.
‘육신으로 오시고 영으로 부활하시고’ 인데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시고’란 말이 첨가된 것뿐입니다.
‘성육신과 부활’ 그 두 가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이죠.
시작할 때와 끝날 때 그것을 그냥 ‘태어나시고 부활하시고’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육신으로 태어나셨고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셨고’ 라고 하면서
그 아래 보충 설명하시기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성경을 찾아보기로 하고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라는 말은 이 말은 너무나 익숙해서
별 의미 없이 칭호다 라고 넘어갈지 모르지만
우리 주
‘주 되심’과,
‘예수 되심’과,
‘그리스도 되심’,
그 세 가지 의미가 같이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이것이 주제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로마서의 주제를
1장 17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칭의’를
로마서의 주제다 라고 설명해 오기도 하는데요
그렇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앞부분의 1 장 초두에 나오는 대로
'육신으로 오시고 영으로 부활하신 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심'이 복음의 핵심이면서 로마서의 주제입니다.
그 다음 로마서의 두 번째 주제라고 할까요?
부주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를 갖게 된다. 즉 살게 된다.
즉 의롭다함을 받는다 하는 것은 그 다음 주제이다.
첫 번째 주제가 있고 두 번째 주제가 있습니다.
Vos의 설명에 따른다면 하나님의 중심적인 구원사역이 있고
그다음에 우리 개별적인 구원사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중심사역'이 먼저 있어야만
그 구원 사역을 내 것으로 만드는 또는 내가 그 구원사역에 동참하는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
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없이 내가 구원받는다는 말은 문제가 있다.
조직신학에서는 구원론이라고 하는
그 구원의 적용 부분인 하나님의 구원이 내게 어떻게 개인에게서 실현되느냐 하는
적용부분만 다룹니다.
정확하게는 ‘구원의 적용론’이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Vos 같은 학자의 성경 신학에서는
내게 구원이 적용되어지기 이전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이냐? 라는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론을 별도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조직 신학에서는 없는 내용입니다.
성경 신학에서만 다루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중심적이고 객관적인 구원과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구원 두 가지 중에
앞의 부분에 대한 설명을 먼저 정리해야만 복음이 무엇이냐?
구원이 무엇이냐? 하는 이야기가 가능한데
로마서에서 앞부분이 중심적인 객관적인 구원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고
17절에 나오는 부분은 내게 적용되는
개별적인 구원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 주제가 잘 이해가 되면 로마서를 읽어 가면서...
죄(罪)론! 교안을 보십시다.
로마서의 주제는 1장 1절로부터 6절이고요.
로마서 전체의 줄거리는 처음에 죄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그리고 하나님의 한 '의(義)'!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속함'을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다는 설명이 나오고
그 다음에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가 설명되어 지고
그리고 우리가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자로 바뀌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거기까지가 8장(로마서)까지의 설명이고
9장에서 11장까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12장에서 마지막은
그렇게 해서 형성된 ‘하나님의 나라 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지금 그 앞에 1장에서 8장까지의 내용을
중심적인 구원의 입장에서 보는 방법이 하나 있고
내게 적용되는 개인적인 개별적인 구원의 관점에서 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조직신학적인 방법으로 검토되어 온 로마서의 공부 방법은
거의 내가 어떻게 구원받느냐? 하는
거의 개인 구원의 이야기들을 주로 많이 다루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죄론’이 있고 ‘칭의론’이 나오고 ‘성화론’이 나오고 ‘영화론’이 나오고...
이렇게 대개 설명을 합니다.
다시요.
처음에 죄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죄에서 구원받기 위한 칭의에 대한 이야기가 3장에서 부터 나오고
물론 거기에 믿음 같은 설명이 따라 나오지만
성화에 대한 이야기가 6장부터 나오고
성화가 이어져서 성령을 따라 사는 영에 속한 자인
영화가운데로 나아가는 그런 이야기로 이어졌다고 대충 보는데
그러한 분해나 이해가 주제별 공부에서 다루어지는
‘개인의 개별적 구원 주관적인 구원’의 관점을 주로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조금 바꾸어서
‘나’라는 개인 구원 아니라
하나님이 인류를 어떻게 구원해 가시느냐 하는
‘중심적이고 객관적인 구원’을 놓고 보면
처음에 죄(罪)론이 나오고
하나님의 한 의(義)가 등장하고
그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과의 화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나오고
그 경우에 십자가와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자로 바뀌느냐 하는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렇게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을 설명할 때는
주관적인 개인적인 구원과 달리
구원의 순서, 서정이 아니고
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해야 한다.
즉 1장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3장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4장 5장 해서 차례차례로 진행되어 가는 것이기 보다는
8장까지 전체가 똑같은 한 사건을 이렇게 이렇게 여러 면에서 설명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간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이 아니고....
즉 구원의 순서가 아니고
구원 그 자체를 ‘하나의 사건’으로 설명한다 라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이랬는데 이제는 이렇게 되었다’라는 ‘전환점’에 대한 설명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뒤에 가서 다시 설명하기로 하고 성경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부활장이다.
1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여기에 전한 그 말은 복음이다.) 헛되지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내가 전한 복음을 바르게 믿고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두개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그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복음의 핵심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바울의 로마서와 고린도서에서 조금 다른 쪽을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에서는 성육신하신 사건과 부활사건을 설명했는데
고린도서에서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을 설명합니다.
사실 십자가 사건과 성육신 사건과 연결이 될 것이고
또는 십자가 사건은 부활사건과 연결될 것이고 해서
나중에 조금 정리하면 마찬가지 결론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3장 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이 없도다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라"
거기도 앞부분은 그리스도의 생애 ‘성육신’과
영으로 부활하신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을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라고 특이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칭의’가 되신다.
그 부분이 생소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이 정죄 되었으니까 칭의도 되셔야 한다.
예수님이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고라는 그런 설명도 하면
조금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실제로 예수님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라는 말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는데 성령의 세례는 받으실 수 없는가? 마찬가지이다.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으시는 장면이 성령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다.
이 예수님의 성령 세례와 예수님의 성령 충만을 이해하시면
우리가 요즘 많이 논란하고 있는 성령세례가 무엇이며
성령 충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자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정죄 받으신 부분 뿐 아니라
칭의 되신 부분도 생각하시고
그래서 그 부활한 후에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아마 이것은 부활을 드러내신 것인지 또는 의롭게 된 부분을 드러내신 것인지
그의 왕권을 드러내신 것인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 같아 보입니다만
그래서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그리고 영광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마지막 부분은 승천과 왕위에 오르시는 부분 같아 보입니다.
그것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고요
전파되시고 라는 말을 보면 그것을 복음이라고 볼 수 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 전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마가복음 1장, 로마서 1장, 고린도전서 15장, 데모데전서 3장에 나오는 구절들은 복음을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죠?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조금 다르게 바꾸면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
그 3가지 중에 두개가 되었건 세 가지가 되었건 그 안에 해당됩니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그래서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라는 말이 가능하다 이말입니다.
즉 복음은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이다.
그의 생애가 바로 복음이기 때문에 복음의 시작이다 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시작이다 라는 말과도 마찬가지이다.
그 생애가 출생부터 다룰 수도 있고
사역에 들어갈 때부터 다룰 수도 있고
십자가부터 다룰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예수님의 생애의 초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부분을 생각하시면 좋겠고요.
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복음이라고 했을까? 하는 부분을 조금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라고 하면 내게 부터 먼저 생각합니다.
나에게 기쁜소식이 되어야 하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내게 오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 주셨느냐?
무엇이 복음이고
그다음에 그 복음이 나에게 와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대한 부분을
에베소서 1장에서 조금 찾아봅시다.
에베소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복음이라는 말과도 연결되겠는데요)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신 것!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녀, 아들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어떤 연결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뒤에 풀어가야 되겠는데요.
그래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이다.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갖는 의미가 있고
그다음에 이 생애가 우리에게 적용될 때
그것을 우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이라고 하고
때로는 복이 있는 자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한부분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쪽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이 된다라는 부분이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는다. 복음이 무엇이냐?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복된 소식이다 라고 할 때
그것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이 되기 때문에 복된 소식이 되어야 한다.
거기까지 설명합시다.
두 번째는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게 하셨다 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때가 찼을 때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다 라고 해서
이번에는 개인뿐 아니라
전체 구원 받는 자들의 공동체에 대한 통일국가에 대한 설명까지 같이 나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부분에 가서는 이 일을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시는 일이 나옵니다.
13절(엡1장)을 봅시다. "그 안에서(성령님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여기서는 복음을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그 복음을 믿어) 약속의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여기는 그 구원의 복음이 내게 적용되어서
그것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셔서 사역하시는 부분을 이야기 합니다.
물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도 임하여서
즉 구속사역을 이루도록 하시는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사역’에도 성령님이 일하셨지만
그 그리스도의 사건을 내게 연결 지어서
나도 그 혜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도 성령님이 일하신다.
성령님은 중심적인 구원사역도 동참하시고
우리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구원사역에도 참여하셔서 보증으로 일하십니다.
그래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이런 엄청난 ‘계획’을 세우시고 ‘집행’해 가십니다.
그 전체를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핵심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그 아래 질문이 네 개가 나오는데요. 조금만 생각해보겠습니다.
1.복음서의 핵심이 무엇인가?
2.그리스도의 생애의 의미는 무엇인가?
복음서의 핵심은 쉽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입니다.
3.그런데 그 그리스도의 생애의 초점이 무엇인가?
핵심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성육신과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든가
십자가와 부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네 복음서마다 상당히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거의 때로는 삼분의 일에 가까울 만큼의 부분이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4.그 다음에 생각할 것은 이 그리스도의 생애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점은 질문 자체가 좀 애매 한데요!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생애도 어떤 의미가 있느냐?
‘성육신하신 것’부터 시작해서 그가 ‘자라나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시며 살아가신 ‘3년 반의 생애!’ 그 생애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그것이 복음과 관계가 있는가?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을 보십시다.
2장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성육신에 대한 이야기이다)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십자가의 의미이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그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세토막으로도 볼 수 있다.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는 이렇다 라고 말하지 않고
앞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나온다.
그러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이 객관적인 복음 구원의 스토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모습 사실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마음을 배워야 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마음을 배워야 하고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가 영광을 누리신 그 영광을 우리는 어떻게 누려야 할 것인가? 라는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 뒤 12절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하므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하노라"
거기에 보면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서 구원을 이루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노력하라 라는 말씀이 나오고
그렇게 해서 흠이 없고 순전해서 이 거스리는 세대가운데 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
마치 예수님처럼....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셨다.
그런 표현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애를 두고
“참 잘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나 뜻대로 아름다운 생애를 보냈다”라고
자기 아들에게 그것을 칭의하실 뿐 아니라
그 아들을 영광으로 높여주시고
모든 만물이 그분을 자기의 주(主)로 받아들이도록 그렇게 하셨다 이말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그리스도가 나와 관계가 있어서 나도 그 분을 본받아서
그분과 같은 영광의 자리에 같이 올라가게 하신다 이말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관계가 있으면서
우리에게 포괄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나에게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의 탄생부터 영광까지가 나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원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은 뒤에서 살펴보겠는데 일단 지금 설명 드린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복음서를 쭉 찾고 사도행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마태복음부터 봅시다.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쭉 지나간 후에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21절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여기 예수란 뜻은 구원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구원하시느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22-3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의 된 것은(즉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게 된 동기는, 목적은 즉 족보를 죽 설명해 놓고 그 오랜 예고 끝에 실제로 이 예언대로 오시게 된 목적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였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리라 하심이라"
즉 예수님은 왜 예수로 오셨느냐?
왜 자기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느냐?
하나님이 우리가운데 계시기 원하셔서다.
임마누엘이 되시기 원해서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보내셨다.
막연하게 풀어 가면 여러분이 힘들까요?
사실은 제가 미리 답을 드리지 않고 하려는 이유는
주제별 공부처럼 빠져나가지 않기 위해서 이거든요?
본문부터 다 찾고 나서 답을 찾고 싶은데 왜 자꾸 이런 구절을 찾을까? 라고 하면서 괴로워하실지 모르겠어서 답을 좀 드리지요!
구원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거룩한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을 놓치고 있다.
구원이 무엇이냐 하면 거룩한 자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임재하실 만한 성소’가 되어야 한다 이거죠!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무조건 내가 성소가 되느냐? 꼭 그런 것이 아니고
복음에는 내가 성화되어야 하는, ‘거룩해져야 할 부분’을 꾸준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와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단순히 내 죄를 대신해서 죽고 부활하고 만이 아니고
그 죽음과 부활에는 내가 온전해져야 될 거룩해져야 될 그런 어떤 ‘윤리적인 의미’가 따라있고
그래서 예수님이 33년 동안 특별히 3년 반 동안 아버지에게 절대 순종하시면서 사신 그 의로운 삶이 있다.
그 삶 자체하고 내 구원하고도 관계가 있다 이말입니다.
그다음, 2장 6절에 보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을 예언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스리는 자다. 내 백성의 목자다. 라는 말씀을 쓰고 있죠?
목자라는 말이나 왕이라는 말이나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 ‘왕권’ ‘통치’라는 말은
이 세상에 흔히 하는 왕들과 비슷한 왕권하고 조금 다르다.
목자와 같은 왕권입니다. 군림하는 왕권이 아니고!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을 원했을 때
이 세상의 주권자들은 군림하니까
너희들이 그것을 바라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고 ‘섬기는 나라’다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섬기러 왔지 섬김을 받으러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섬기시는 왕권의 의미를 갖고 있어서
‘목자상’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3장에 가서 2절에 세례요한이 복음을 외쳐 말하기를
"회개하라 천국(왕권)이 가까왔느니라"라고 두 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를 왜 강조하느냐? 하는 부분하고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왕권에 대한 설명이 왜 나오느냐? 하는 부분이고요.
4장 17절에 똑같은 말씀이 나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그대로 또 말씀 하셨습니다.
역시 회개를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기 때문에
여기 회개라는 말은
하나님의 왕권으로 돌아오라 즉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자가되라 라는 것이 1차적이 의미가 있고
2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왕권으로 돌아온다는 말, 즉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말은
윤리적으로 의로워져야 된다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가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설교에 굉장히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팔복부터 그 아래 나오는 모든 것이
철저한 윤리를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5장 17절 부터 봅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
이 부분은 둘째나 셋째시간에 한번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명하겠습니다.
18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가르치고 행하면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아서 들어간다’라고만 설명하고 있지 않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義) 보다 더 나아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시고
그 아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원수들을 사랑하라 라는 그런 등등의 교훈들을 다시 풀이하시면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도전해 오시고 제시하시죠!
끝부분에 가서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는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 명령이 같이 나온다.
그 다음에도 기도에 대한 말씀이라든지
물질에 대한 부분이라든지 다른 사람과의 대인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든지
쭉 설명해가시다가 끝에 가서
7장 13절 이하에 가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많은 사람이 오지 않는다.
복음이 복된 소식이고 너무너무 좋은 것이고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이냐? 그런데 안 온다.
많은 사람이 오지 않는다.
왜? 길이 너무 좁아서. 힘드니까 오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는 왜 이렇게 많이 오느냐? 문이 너무 넓어서이다. 실제적인 이야기입니다.
생명으로 인도 하는 문은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크게 열어 놓고 초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번쯤은 생각해볼 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 15절 이하에
거짓선지자를 삼가라 라고 했다.
실제로 성경에는 거짓 선지자가 굉장히 많다 라고 했다.
참 선지자와 거짓선지자와 비례해 볼 때 거짓선지자가 더 많다.
거기 거짓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 라고 한다.
물론 그 열매를 단순히 행함이라고 말하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단순한 행함이라고는 할 수 없는데
그 아래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라고 해서 천국 문이 좁다는 것을 분명히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싸구려로 넓게 판매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합니다.
천국 복음은 인스턴트 물건 팔듯이 싸게 팔수는 없습니다.
천국복음은 굉장히 좁은 힘든 길입니다.
물론 내가 노력해서 구원 얻는 것 아니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 얻는 것이니까
어떻게 보면 공짜요 은혜요 너무나 쉬운 것이죠!
그 은혜로 준다는 말은 내가 어떤 댓가를 주고 받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라는 말이지
그 은혜를 받아 누릴 때 일단 받을 때는 거저 받을 수 있는데
후에 그것이 편안한 길이냐 아니냐하는 부분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것만 읽으니까 문이 넓어지는데 바로 그 다음 구절을 안 읽는다.
그 다음 구절을 가르쳐 주면 잘 안 올것이니까!
바로 그다음 구절에 ‘내게 와서 내게 배우고 내 멍에를 메라’ 라고 되어있다.
그 구절을 이야기 하면 골치 아프다.
그러지 않아도 짐을 잔뜩 지고 오는 자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이리 오너라 와서 예수님에게 배우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시요 그러면 쉼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면 안 온다 이거죠!
그러니까 뒤엣것은 빼고 “이리 오시요 그러면 짐이 다 없어집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라고만 하시오 그러면 다 구원 얻습니다.” 그러니까 와서 다 한다 말입니다.
그것도 잘 안통하면 플러스 복을 또 이야기 합니다.
‘세상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면 더 잘 온다.
왜 구원은 없더라고 이쪽 거라도 받을 수 있으니까!
그런 부분이 많은 신자들로 하여금 오해를 사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라고 말씀하신 후에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다.
탑을 쌓는 비유와 전쟁하는 비유를 드셨다.
그 비유는 이런 뜻이다.
미리 계산해 보고 타산이 안 맞으면 처음부터 포기하라
예산도 모자라는데 탑을 쌓으면 되느냐?
전쟁에서 질것인데 왜 전쟁을 시작하느냐?
나를 따라오는 일은 미리 잘 계산해 보고 수지가 안 맞겠으면 아예 따라오지 마라.
나를 따라오는 것이 쉽게 생각했다가 오니까 너무 힘들죠?
집도 없고 머리둘 곳이 없고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고 큰 희생을 치를 각오가 충분히 되어있거든 따라오라!
너희 목숨을 내 놓을 만큼 복음이 확실하거든 따라오라!
그런데 그렇게 안하고 쉽게 데려다 놓고 보자! 서서히 가르치면 되지 않느냐?
어떻게 보면 그것도 전도 이론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일단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것 부터 주고 일단 피신처로 만들어 놓고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느냐? 라는 말도 제가 물론 부정할 수는 없고
방법론 중의 하나가 될지 모르지만
문제는 이 사람들이 복음을 정상적으로 깨닫고
자기를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또 데려오고 또 데려오고 해서
그런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이 교회의 문이 너무 넓어지고
열심히 전도하는 대부분의 전도의 내용이
앞에 있는 넓은 문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한다.
그래서 자꾸만 더 많이 온다.
좁은 문에 대한 이야기를 미처 들을 시간이 없다.
말하는 사람이 얼마 안 되니까!
만 명의 교인 중에
구천 명 정도는 다 아직도 사탕발림에 일단 와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에게 사탕발림 전도를 한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어중이 떠중이가 다 들어와서 교회 문이 넓어져 있어서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사람이 아닌
욕심이 가득찬 사람들이 애걸복걸 하며
욕심을 부리고 복을 비는 그런 사람들의 집단체를 보고는
교회에 실망을 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려고 하니까 복을 설명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부흥회를 할 때마다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되고
헌금 내라고 강요하면서 많이 바치면 복을 받을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은 와서는 보고서 염증을 내고는 돌아간다.
그런 악순환이 우리 교회 내에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우리가 실제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천국을, 복음을, 구원을, 넓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의해야합니다.
물론 성경에 이런 구절도 많이 있죠?
‘믿기만 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소녀야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조금 더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 믿음이 무엇일까?
구원받는 믿음인지 단순히 병이 낫는 믿음인지?
병이 낫기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것은 병이 낫고 끝나는 믿음이죠?
구원의 문제는 그 다음 더 깊은 생각을 해야 되죠!
물론 예수님과의 치료 신유와 구원의 문제, 복음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지만 일단 피해 가십시다.
자~ 5,6,7장에서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설명했고
그 윤리가 굉장히 높게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8, 9, 10장 쭉 내려가면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시는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긍휼의 사건이 쭉 등장합니다. 많은 기적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 왜 그것이 등장할까? 앞에는 높은 윤리를 설명해오시다가
갑자기 병을 고치는 아주 혜택이 주어지는 이야기가 진행되죠!
설명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 설명이 별로 없이 조금씩 조금씩 설명이 나온다.
예를 들면 중풍병자를 고치시면서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는데
데리고 올 때는 병을 고쳐주십시오 라고 데려왔는데
예수님이 선언하시기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옆에 있다가 이 사람이 죄인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고
함부로 죄를 사했다고 합니까? 언제 죄를 말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내가 병을 고쳐주는 것은
죄 사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래서 병을 고쳐주는 많은 사건은
죄를 사해주시는 것을 보여주는 자신의 능력을 즉 복음의 능력을 임시로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가 뒷부분에 가면 그 이하에 쭉 내려가면서
본격적으로 복음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천국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세례요한의 오해부터 시작해서 왜 세례요한이 오해하고 있느냐?
물론 그 11장 들어가기 앞에 10장에 제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자는 합당치 않다. 라는 말씀을 쭉 하시고
11장 이하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성격의 것인지 회개해야 될 부분이라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받을 수 있다든지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편안하게 따라 오던 이야기가 갑자기 편안하지 않고
마음에 부담스럽고 무언가 걸려있는 세례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으면 복이 있다 라는 것처럼
자꾸 발에 걸려 넘어지는 그런 어떤 이야기를 하신다.
세례요한도 사실 걸려 넘어졌던 이야기를 하신다.
세례요한도 걸려 넘어졌던 부분입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은 ‘회의’가 일어 날수 있다.
그 이야기가 11장 12장에 나타나고 13장에 와서는
이제 천국의 이야기가 비유로 쭉 나옵니다.
그런데 이 천국이야기 편안하게 되어있지 않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처럼 길가 가시덤불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가라지와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많은 그런 어려운 부분도 같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이 심판받을 것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을 이 천국의 비유들 중에 찾아볼 수 있습니다.
끝에 가서 13장 끝에 가서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14장에 가서는 헤롯의 박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오천 명에 대한 처리를 제대로 못하는 부분,
바다 풍랑 속에서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
계속해서 이번에는 실망적인, 박해 또는 풍랑과 같은 그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좌절되고 있는...
실패되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이 쭉 나열되고 있습니다.
15장 이하에 내려가면 잘못된 부분에 대한 책망도 나오고요.
16장에 가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의 전환점이라고 하죠?
16장 가이사랴 빌립보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도입하시기 시작합니다.
‘비로소 가르치시니’라는 말씀이 16장 21절 끝에 나옵니다.
이때로부터----비로소 가르치시니....
그 내용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을 것과
제 3일에 살아 나야할 것을 비로소 가르치시기 시작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것을 숨겨두고 천국에 대한 이야기만 죽 해오셨는데
제자들이 좋다가 말았다가 좋다가 말았다가 하는데
16장부터 와서 교회를 세우겠다고 이야기 하시면서
갑자기 이 천국은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고 부활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이것이 베드로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보고 말리다가 ‘사탄아 뒤로 물러가라’는 무서운 책망을 듣고
‘다시 한 번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와야 한다’라는 극단적인 교훈을 받습니다.
그래서 아마 베드로가 굉장히 낙심되었을 것입니다.
17장에 변화산에서 다시 격려가 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모여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붕 뜬다.
그러나 다시 찬물을 쫙 끼얹으시고는 데리고 내려가서 산 밑에 내려가니까 또 아니죠!
18장에 가면 이 제자들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18장에 가서 서로 누가 높으냐?
그러자 예수님이 어린아이들을 놓고 다시 낮아져야 할 것을 설명하십니다.
이것이 ‘자기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잃은 양 비유라든지 등등 계속해서 베드로나 제자들이 생각했던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고
고난의 문제 잃어버린 양 하나의 귀중성 등등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해주고 있고
어린아이 하나라도 상처를 주는 범죄케 하는 실족케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을 아주 엄하게 이야기 하시면서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베드로가 질문하면서 당황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해야 됩니까?’
그런데 엉뚱한 너무나 당황스러운 대답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19장에 가서 다시 제자 들이 누가 높은가에 대해서 다시 또 논쟁을 합니다.
그런데 거기 ‘천국에는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다’ 그런 어려운 말씀도 같이 하시고
‘어린아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19장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오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절에 중간에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어느 계명 이오니이까? 예수님이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마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공경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네가 이 모든 것을 지켰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 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네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나서 나를 좇으라!“
얼핏 읽으면
“됐다 이거다! 구원을 얻었는데 온전하고자 할진대 ---구원은 얻게 되지만 온전하고자 하면 팔아서 남에게 주고 오면 상을 많이 받을 것이다” 라는 말같이 들린다.
구원 더하기 상! 그런데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러면 그 청년이 구원을 포기하고 가는 것이냐? 상급을 포기하고 가는 것이냐?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23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이거다. 왜? 재물 때문에!
계명들을 다 지켜도 안 된다. 왜? 계명들을 제대로 못 지켰으니까!
어떻게 지켜야 되느냐?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를 줄 만큼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
이런 이야기를 쭉 하시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부분은 구원이 무엇이냐?
복음이 무엇이냐?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밖에 더 되느냐?
지금까지 읽어온 구절은 거의 ‘행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수님!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이야기입니까?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것 아닙니까?”
그런 질문이 나올 만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복음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할 때 주제별로 자꾸 접촉하면서
어떤 학자들이 어떤 부분만 자꾸 인용해왔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한쪽 부분만 자꾸 배우고 해서 오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됩니다.
왜 예수님의 교훈을 피해 다니고 쉬운 바울의 말만 자꾸 듣죠?
바울이 행함으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다. 일한 것이 없어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 라는 구절이 참 기분이 좋죠!
그래서 다 필요 없고 예수님 믿습니다만 하십시오.
그래서 숨이 넘어가는 가족을 붙들고 제발 예수님 믿습니다! 라고만 하십시오.
죽는 사람이 밑져야 본전이죠? 믿습니다. 라고 말하니까 아! 믿는다고 했으니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야 가족들이 위로를 받겠죠?
저도 그 앞에서는 차마 ‘글쎄요?’ 라고 차마 말을 못하겠습니다.
그 앞에서는 차마 그런 말을 못하겠는데 그 유족 때문에 설교시간에는 이해를 가끔 드립니다. 제가 보기에는 ‘구원이 아니다’라고! 그렇게 구원이 싸구려가 아니다.
그러면 흔히 질문을 합니다. 누가복음에 있는 것? 그것은 조금 있다가 보겠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그렇게 간단하게 믿기만 하라고 가르치셨느냐?
그럼 지금까지 하신 이 많은 말씀은 무엇 때문에 있느냐?
그래서 주제별로 다루어 왔을 때는 이 부분이 걸림이 되니까 어떻게 해석해 왔느냐 하면
‘계명을 지키라’ 라는 말은
계명을 지켜서 구원 얻는 다는 말이 아니고 결국 못하지 않느냐?
계명을 지켜서 구원 얻으려고 하지 말아라.
믿으면 되는데 왜 자꾸 계명을 지키려고 하느냐?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한 것이다 라고
둘러서 설명해 왔다.
글쎄요? 그렇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아닌지?
그리고 그 다음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러면 부자는 전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느냐? 하나님은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 라는 말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죠?
부자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재물을 나누어 주건 말건 믿기만 하면 구원 얻는 것이니까 상관이 없다 라는 말처럼 까지 끌고 가고 싶기도 하죠?
그러나 이 구절만 있는 것 아니고 앞에서부터 쭉 읽어왔습니다.
여러 구절을 읽어왔기 때문에 그렇게 이 구절만 바꾸어 놓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뀌어 지지 않습니다.
자 그러자 베드로가 무어라고 했는지 봅시다.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여러분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좇은 것이 사실 같아 보입니까?
버린 것 있습니다. 배도 버리고 아버지도 버리고 물고기도 버리고 그물도 버리고 왔다.
그러나 버리지 않은 것 있다. 무엇입니까?
장관하고 싶은 것 안 버리고 있습니다. 서로 누가 높으냐?
계속해서 따지고 앉았죠? 왜? 그것 바라고 있으니까!
사실은 버린 것이 아니고 더 큰 것 얻으려고 투자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베드로의 생각에는 상당히 이해 타산적이다.
이 부자 청년이 멍청해 보인다 이거다. 그 재산 좀 못 팔고 왜 안 오느냐?
재산팔고 따라오면 그보다 더 수지가 맞을 것인데 계산할 줄 모른다 이말이죠?
그래서 베드로가 우리는 다 버리고 주를 따랐사오니 어떻게 되오리이까?
그 다음의 예수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28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 위에 앉을 때에(이 소리 들을 때에 베드로가 아주 신이 났을 것이다. 지금 그것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 자꾸 왔다 갔다 하는데 죽는다고 했다가 한다고 하셨다고 하니까 불확실했는데 드디어 인자가 자기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그러면 그렇지! 그런데 자리가 몇 개냐?
12개라고 했으니까 한자리는 틀림없이 돌아오는구나!
걱정 없는데, 어느 자리인가만 따지면 된다.
높은 자리인지 낮은 자리인지. 장관자리는 확보되어 있다.
29절에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수지맞죠? 장관자리는 확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포기한 것의 여러 배가 돌아오니까
배한 척 버렸으니까 아마 배가 너댓척 돌아올 것이고
고기 버린 것보다 더 많이 생긴 것일 것이고
고기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라고 했으니까
‘고기 그거 시시하고 사람이 내 밑에, 내 신하가, 내 국민이, 수두룩하게 생기면 고기보다 낫다‘ 그런 생각을 하고 따라왔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쉽게 전도하기 위해서 다 버리고 따라왔다 라고 이해할지도 모르지만
물론 예수님은 전도하는 뜻으로 말했지만
베드로는 자기가 장관이 되면 내밑에 부하를 많이 거느릴 것이다 라고 이해하고 따라왔을 가능성이 있다.
베드로의 생애가 한 토막만 놓고 보면 잘한 것 같지만 문맥을 따라 살펴서 뒤에까지 와보면 그것이 아니다. 전도의 생각을 하고 따라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베드로가 굉장히 흐뭇해 졌습니다. 두 가지가 약속되어있죠? 그러고는 또)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 두 가지만 해도 충분한데 죽은 후에 영생까지 죽지 않고 영원히 이거는 보통 수지맞는 것 아니다.
마태복음에는 이렇게만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딱 한 구절이 끼어있다.
‘환란을 겸하여 받고’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죽을지언정 나는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는 말을 고백했다. 그것은 각오가 되어있다는 말이다.
막상해보면 안되지만! 그런데 그것보다 묘한 것이 30절입니다.
"그러나(이 ‘그러나’가 사람의 기를 죽인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될 자가 많으니라"
앞뒤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
내가 지금 1번 타자냐? 2번 타자냐? 뒤로 밀려가느냐? 앞으로 오느냐?
참 애매해 보이죠? 참 알송달송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고는 포도밭 농부비유를 길게 하십니다.
아침에 온 사람하고 저녁에 온 사람하고 다 이야기 하고 끝에 16절에
"이와 같이 나중온자로서 먼저 되고 나중된자로서 먼저되리라" 이 비유를 이렇게 해석해야 된다.
그 앞에 구절이 있으니까. 늦게 온 사람이 똑 같이 받는다. 참 기가 막힌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포기 하는 댓가로 주어지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다.
주의해야 될 것은 복음, 즉 구원은 댓가를 우리에게 바라지 않고
행위를 요구하지 않고 은혜로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분명한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지만 버릴 것이 있다.
수고가 아니고, 버릴 것을 버려라 이거다.
자기를 버려라! 자기를 사랑하면 안 된다. 목숨을 내놓아라 이거다.
목숨을 버리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목숨을 내놓으라는 사람에게 재물 내놓으라는 말은 문제도 아니다.
이 부자청년에게 너 가진 재산 다 내놓아라!
그것도 안 되는데 어떻게 목숨을 내 놓느냐? 그래서 목숨이 잘 안 내놓아지죠!
그래서 베드로가 큰소리를 꽝꽝 쳤지만 다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목숨은 커녕 다른 것도 내 놓기 힘들죠! 장관자리 안 내놓으려고 그렇게 싸웠으니까요!
그래서 20장 비유도 우리에게 굉장히 큰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7절 이하에서 다시 이런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내말좀 잘 들으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다른 구절에 보면 예수님이 당장 왕이 될 줄 생각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니 가서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들이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여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또 맥 빠지는 이야기를 하신다. 왕이 죽으면 다 끝나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20절에 그때에 세베대의 어미가 와서 아들 둘 데리고 와서 하는 말이 ‘예수님 좌우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죽을 예수님에게 그 이야기 하면 무엇 합니까?
예수님이 내가 마실 잔을 마실 수 있느냐?
그 무슨 말인지 모르고 '예'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나는 목숨을 내 놓고 많은 사람을 섬기러 왔다라고 ‘섬김을 받는 나라’ 라고 명백히 말하십니다.
이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부분하고 ‘섬겨야 한다는 부분’하고 늘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말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 단순히 ‘내 죄를 청산하기 위해서다’라고 이해하지 말고
그 이전에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얼마만큼 낮아져야만 그것이 가능하냐? 이거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의 혜택을 입는다고만 쉽게 생각하시지 말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란 말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실 때 얼마만큼 고통을 겪으셨는가!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자기의 내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하면서 괴로움을 하나님에게 내놓고 통사정을 했다.
아버지 뜻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라고!
그 지기 힘든 십자가를 자기를 죽기까지 복종시키시는 그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워야만
복음이 나에게 공짜로 주어지는 구원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공짜로 주어지는데 받을 사람의 자세가 필요하다 이거다.
드디어 21장에는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초라한 모습으로 들어가신다.
이왕이면 좀 큰것 타고 가면 좋은데! 제자들이 보기에는 좀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그리고는 쭉 많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천국비유가 나오고 쭉 하시다가
마침내 붙들려 가셔서 처형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뿔뿔이 다 흩어졌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 제자들이 믿지 않았어요!
믿지 않은 것을 봐서 베드로는 전혀 부활에 대해서는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고
부활이, 예수님이 부활한다는 말씀이 자기는 전혀 아무런 의미로도 들리지 않았다.
설령 부활하시기 전에는 무심코 들었더라도
부활하신 후에 그전에 하셨던 말씀을 좀 기억하면 좋은데
기억해봤자 그것이 자기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필요 없다! 나에게!
왜? 그런 식으로 살아나서 무슨 왕이 되느냐? 이거다.
유대나라 왕이 되려면 뭐 죽어서 영혼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무슨 왕이 되느냐!
그런 생각 때문에 베드로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 아무런 용기도 주지 못했다.
그냥 환상을 보는 기분으로 왔다갔다 뭐 어떻게 되는 것이냐? 뭐 정신이 없다.
또 와서 보고하고, 또 와서 보고하고, 하는데도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죠!
마지막 봅시다.
28장 16절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의 명하시던 산에 가서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
저분이 도대체 누구냐? 이거다.
저 살아나셨다는 저분이 도대체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냐? 뭐냐?
왕이 될 생각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자기들이 왕이 될 것은 불가능해 보이고
그래서 부활의 의미가 그들에게는 그분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고
계시기는 계시는 모양인데 어쨌든 왕이고 뭐고 그건 다 끝났고
계시기는 계신 모양인데 같이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같이 밥을 먹고 사는 것도 아니고 가끔 나타나시니까
도대체 저 분하고 뭘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냐? 어이가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제자들이 무어라고 대답했을까요?
뒤에 아무 말이 없다.
이거 뭐 '예' 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요'라고 할 수도 없고
이거 참 아직도 의심스러운데 뭐 어떻게 해요!
이글을 쓴 사람이 마태이다. 마태도 그중에 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자기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죠!
같은 이야기들이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다 나옵니다.
몇 절만 더 찾아봅시다.
누가복음 16장! 거의 마태복음과 같은 내용들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특이한 것 한두 개만 더 찾아보겠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를 좀 봅시다.
성경 읽을 때 익숙한 본문이라도 자세히 보셔야지 안 그러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자기가 알고 있는 생각만 따라 읽기 쉽다. 읽다가 보면 빼먹고 지나간다.
25절에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부자가 천국에 못 들어가고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는 이 세상에서 호강했으니까 고생 좀 하라! 나사로는 고생했으니까 호강 좀 하고! 그렇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라는 말이 없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 것하고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을 그렇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설명을 잘 들어야 한다.
이 비유를 하기 바로 앞에는 귀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 불의한 청지기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비유를 죽 하고 끝에 가서 13절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부자는 둘 다 섬기려고 하니까 안 되죠! 부자 청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하나를 버리라! 포기하라! 하나님 하고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너 왕위에 오르는 것! 장관자리에 오르고 싶은 것
하나님을 누리는 것하고 두 가지를 동시에 받을 수 없다. 하나를 버리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런 것 생각하면 일이 안 된다.
그런 것은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것은 내가 덤으로 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마찬가지 아니냐?’ 라고 생각하겠죠? ‘이것도 받고 저것도 받고!’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렇지 않고
앞의 것을 포기해야만 뒤엣것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해야만 뒤엣것이 따라오지
이것 포기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안 따라온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다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라고 하니까
다 버리고 따라온 사람에게는 내가 여러 배를 주겠다 라고 했습니다. 땅에서도!
누가복음에는 백배로 되어 있습니다.
현세에서 백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도 누리고 열두 보좌에 앉고!
그런데 어떻게 할때? 버리고 나서이다.
자기 목숨을 버리고 나서 이야기다.
그런데 베드로는 다 버렸나이다 라고 했지만 안 버린것이 있었다.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죽어버리니까 기대가 내려앉아 버리니까 제자들이 맥이 확 빠져버렸다. 야, 다 틀렸다. 고기잡이하러 가자! (요21장)
고기잡이하러 갔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자마자 마리아에게 시켜서 말씀하시기를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나를 보자고 하자 라고 한 것이 두 번이나 나온다.
심부름을 또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이 갈릴리에 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뭐하러 가느냐?....다 끝났는데!
안갔다. 그래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만나고 싶은데 안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다락방에 또 나타나고 또 나타나고 했다.
그 후에 갈릴리에 제자들이 갔는데 무엇하러 갔느냐? 예수님 만나러 간 것이 아니다.
고기잡이 하러 갔다. 그래서 예수님이 할 수 없이 고기잡는 데까지 따라왔다.
뭐하느냐? 왜 고기잡고 있느냐?
그래서 이번에는 예수님이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었다. 안 따라 오니까! 낚싯밥으로!
그러자 베드로가 깜짝 놀랐다.
지난번에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겪었던 장면이 또 등장하니까! 아! 저분 따라가서 수지가 맞긴 맞을 모양인데!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이야기했다. 베드로야 앞으로 다른사람이 네 허리띠를 묶고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갈것이다 라고....
또 이상하죠? 예수님 만나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복음인지 알수가 없죠!
그러니까 '예'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요'라고 할 수 없고. 그러니까 무어라고 했습니까?
'요한은요?'라고 했다.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요한이 어떻게 되든 너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 라고 했다.
그러나 입장이 또 난처해진다. 그러고는 이야기가 딱 끝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어쨌든 ‘다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고 그때 일곱명의 제자가 갔습니다.
일곱명의 제자 중에는 ‘주를 만져보고는 믿겠다’라고 하던 도마도 있었습니다.
‘나는 만져보고야 믿겠다’라고 하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만져보라’라고 했습니다.
만져보고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했다.
그 고백이 완전해 보입니까?
‘아! 당신 내가 만져보니까 틀림없이 다시 살아나셨군요! 당신 이제 왕이 되겠죠! 그러면 나 장관될 것을 믿겠습니다’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바로 그다음 요한복음21장에
베드로가 ‘야! 나 고기잡이하러 간다’ 라고 하니까 도마도 따라갔다.
도마도 고기 잡으러 갔다.
마찬가지이다. 베드로나 도마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기잡이하고 다시 불렀다.
그래서 이번에는 갈릴리 산에 왔다.
가서 보고 예수님을 경배하면서도 아직도 긴가민가 의심하더라 라고 했다.
복음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점을 조금 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18장도 봅시다.
29절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가 되면 그것은 쉽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리면 다 얻어지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제자들이 갈등을 느꼈던 것이다.
즉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구원을 받으려면, 천국에 들어가려면 ‘다 버려야 된다.’
다 버리지 않으면 LORDSHIP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주인을 새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주인이 비켜주어야 한다.
실제로 그것 잘 안 비켜집니다. 비키는 척만 한다.
‘예수님 여기 앉으십시요’라고는 하지만 그런데 예수님보다야 더 앉으려고 안한다.
차마 예수님 앞에서 ‘내가 앉겠습니다.’ 라고 누가 하겠습니까? 감히.... 그것은 물론 아니지만 예수님 의자에 앉혀놓고 나는 무엇이냐?
예수님 밑에 있지만 나도 이 예수님 덕분에 장관을 하고 싶다 이거다.
예수님이 ‘그것마저 내 놓으라’라고 하면 그것은 곤란하다 이거다.
조금은 내려갈 수 있는데 안 버린다 이거다.
안 버리면 주인이 갈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이 앉는데 조금은 비켜줄 수 있는데 완전히는 안 물러난다 이말입니다.
자기 실속을 은근히 차린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 라는 말이 계속 따라 다닙니다.
‘다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라는 말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의해서 내가 죄 사함 받고 구원 받는다고 할 때
그 십자가가 나는 가만히 앉아서 덕만 본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면 네 짐을 벗겨준다 하셨다.
내게 와서 내 멍에를 메고 배워라!
내 십자가를 지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에게 복종하며 사는지를 배우라!
그러고 나면 내가 영광의 자리에 이르는 것처럼 아주 편안해 질것이니까
너도 나처럼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면
네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고
네가 지고 있는 짐은 너 욕심 때문에 오는 짐이다.
그러니까 내게 와서 십자가를 지면 홀가분해 진다 이말이다.
내 짐은 쉽고 가볍다 라고 했다. 그런데 쉬운지 가벼운지는 십자가를 져봐야 알 수 있다. 그런데 십자가가 겁이 나니까 안 지려고 한다.
십자가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십자가의 비밀은, 즉 복음은 ‘나는 가만히 있고’
예수님이 혼자서 죽으셔서 내 죄를 싹 씻어 주었다 라고 ‘착각’하는 신자는 진짜 구원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같이 져야합니다. 그러면 강도는 어떻게 되었느냐? 강도는 죽기 전에 믿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을 받지 않았느냐?
23장 41절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당연하거니와(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음이 없느니라(예수님을 인식했고 자기의 죄됨을 충분히 인식했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느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자기는 충분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고 불평이 없었다.)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고백의 어려움이 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그것이 무슨뜻입니까? 당신이 죽은 후에라는 말이 아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예수님이 자기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까?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될 때 끝장이다 라고 생각하고 도망했다.
다시 살아나신 이후에도 아! 이분이 ‘자기나라’에 들어와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라는 말은 다르게 설명하면 ‘당신의 왕권에 이를 때에, 당신이 왕권으로 나타날 때에, 당신이 왕으로 오실 때에’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구절하고 비슷합니다. 16장 다시 봅시다. 16장 마지막절.
2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거기 왕권을 가지고 온다 라고 되어있는데
원문에는 ‘그 왕권 안에 오는 것을 볼 때에, 그 나라 안에 오는 것을 볼 때에’라는 뜻입니다. in his kingdom으로 되어있다.
‘가지고 온다’라고 되어있지 않고 ‘그의 나라 안에 오실 때에’라고 되어있다.
그것이 실제로는 가지고 온다 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나라에 온다라는 말은
자기가 자기 나라에 ‘왕이된다’라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나라 사탄의 권세가 있는 이 세상나라에 와서 죄악의 권세 사탄의 권세에서 처형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탄의 권세 하에서 처형됩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처형되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부활시키셔서
다시 ‘자기의 나라에 돌아가서 자기 왕위에 올라가십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죽기 전에 내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
내 나라에서 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
그 말하고 여기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하고 마찬가지이다. 당신의 왕권에 임하실 때하고!
이 강도의 고백은 당시의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의 신앙상태보다 더 정확했던 것 같다.
우리가 성경을 잘 안 읽고 그냥 십자가의 강도는 죽기 전에 그냥 믿습니다 라고만 하고 구원받았는데! 라고 하지만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모든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권을 못 알아차리고 헤매고 있는데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왕권을 이해했다는 자체는
그동안에 예수님을 만나고 고백한 일은 없었지만
또 이 사람이 어떤 이유로 붙들려 있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처형될 때 이 사람이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그동안 들었을 수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겠죠! 이 사람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 말을 할 때 상당히 유심히 들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이 왕이냐? 저분이 말하는 왕국이 무엇이냐? 저 분이 왕이 된다는 말이 무엇이냐? 궁금했었는데 십자가에서 딱 마주쳤다. 가만히 옆에서 이야기하시는 것 등등 보았겠죠!
또 여기 기록은 한두 마디밖에 없지만 어쩌면 기록보다 더 나누었을 수도 있다.
무려 6시간을 같이 매달려 있었는데! 여쭈어 보고 또 여쭈어 보고 했을 수도 있다.
옆에 제자들이 바로 들을 수가 없으니까 모를 수도 있다. 왜? 제자들이 옆에 없었으니까!
여기 기록된 부분 중에 누구에게서 어떻게 전승받았는지 모르지만
다(all)는 기록 안 되었을 수도 있다.
가상칠언이라고 해서 꼭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만 했는지
칠십 마디만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이거다.
하여튼 이 사람이 여기서 예수님을 보고
마지막 이분에게 자기 신앙고백을 정상적으로 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이 말은 죽은 후에 자기의 생애가 있을 것을 믿는 것이다. 죽은 후에 이야기이다.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느냐? 이분도 죽고 나도 죽지만 죽은 후에 이분은 왕위에 오른다.
그러면 나는 그때 어떤 혜택을 받아야 된다.
그렇다면 지금이 아니고 그때에는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이해하고 있지 못할 때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
복음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그렇게 한마디로 '믿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조금 다시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복음은 거의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거의 잘 아는 구절들이니까 간단히 지나갑시다. 요한복음 1장부터 봅시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여기 '영접하는 자' 그 말을 바꾸어서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져가 되는 권세가 주신다라고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그 앞에 11절을 봅시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는" 이라고 나온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으나’라는 말이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자기 백성에게 자기 땅에 오신 왕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이라고 말했으니까! 그래서 영접한다는 말은 왕으로 영접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하느냐? 나는 그분의 땅에 사는 그분의 백성이다.
나는 그분을 섬겨야만 마땅한 그분의 영토에서 그분의 치하에서 마땅히 복종하며 살아야할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안았다 이거다. 그런데 이제 그 분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그래서 왕이 자기 아들을 보낸다. 자기 아들이 찾아온다.
그때 다른 포도원 농부들은 아~ 상속자니 죽이자 라고 했는데....
그렇지 않고 아~이분이 우리 영토의 주인이고 이 세상의 주인이고
저분이 우리의 왕이신 데도 불구하고 거역했었구나!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그분을 왕으로 영접했을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믿는다는 말, 영접한다는 말은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왕권을 인정해야 되고 그분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내가 그분의 백성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인정되어야 한다.
중생에 대한 부분을 찾아봅시다.
3장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번역이 불충분합니다.
주가 붙어있죠? ‘위에서’ 나지 아니하면 이라고 해서 (거듭난다) 이라는 부사가 붙어있습니다. 니고데모가 다시 물었다.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 있습니까?
‘위에서’ 난다라고 했는데도 그렇게 이해하죠?
그 (거듭난다)이라는 말이 위에서 라는 말 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지는 제가 모르겠는데요.
그러나 요한복음의 주제를 보면 분명합니다.
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성령이라는 낱말도 번역에 문제가 있습니다.
영이라는 번역해야 하는데 성령이라고 번역하니까 오해가 일어납니다.
마찬가지일 수 있는데 그래도 조금 오해가 일어납니다.
holy라는 낱말이 붙어 있으면 성령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냥 영이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여기는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어쨌든, ‘물과 성령(영)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예수님이 명백히 이야기 했다.
믿으면 무조건 들어간다 라고 되어있지 않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너 지금 태어난 것은 ‘육’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너는 ‘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 말은 서두에 했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육으로 오시고 영으로 부활하셨다 라는 말과 똑같은 흐름입니다.
지금 영, 육에 대한 이야기는 다하지는 않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강의가 엉뚱한 데로 빠지니까...처음 듣는 사람에게 한 마디만 합니다.
성경에 영이라는 말과 영혼이라는 말은 다르고,
육이라는 말과 육체, 몸이라는 말은 다르기 때문에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영으로 부활했다’라는 말은 영혼이 부활하고
몸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고
몸도 부활했는데 영적인 몸으로 부활했다 라는 그 영의 뜻이 다른 뜻이 있습니다.
영이라는 말이 영혼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시고 영으로 부활했다 라는 표현이 로마서 하고 디모데 전서에서 나왔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육신으로 계시다가
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도 육신으로 태어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영으로 부활해야만
구원에 들어간다라는 의미에서 성육신과 부활의 의미가 우리에게 있다.
다른 의미도 있지만 일단 그 의미를 이 본문에서 짚고 지나갑시다.
십자가는 무엇이냐? 십자가는 육을 죽이는 것을 말하고
육으로 태어난 자가 죽고 영으로 부활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의미가 있다 이말입니다.
그것이 자기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육이 무엇이냐? 자아를 말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라는 말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버리고’ 그래야만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신다.
그것이 영에 속한 사람이란 뜻이 된다.
육으로 나고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즉 그것을 ‘다시 태어난다’라고 해도 좋지만
요한복음에는 ‘위에서 태어난다’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아래 봅시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니라"
여기 ‘인자가 들려야 한다’라는 말은 이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나무꼭대기에 들린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십자가에 들린다는 의미를 여기서 특별히 들린다고 강조할 이유가 무엇이냐?
그냥 십자가에 못 박힌다고 하지 않고 ‘들려야 된다’라는 말은
‘낮은데서 높은 데로 들려 올라간다’는 의미를 함께 설명하기 위한 아이디어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 뒷부분을 봅시다.
31절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있는 것을 말하느니라" 라는 말이 있다.
거기 관주를 하나 더 봅시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해서 거기 'ㅍ'관주가 있다.
요한복음 8장 28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든 후에 내가 그 인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거기에 인자를 든 후에 라는 말이 있다.
12장 32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한복음에서는 ‘들린다’ ‘위에서 왔다’ ‘아래서 났다’ 라는 말씀을 많이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주제입니다.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그 3장에서는 ‘위로부터 나야 된다’라고 해서
그 ‘위’라는 말은 ‘영’에 속한 영으로 부활한 상태를 이야기 하고 있고
‘아래에서 난다’라는 것은 ‘육’에 속한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구원된 상태와 아닌 상태 또는 재창조된 상태와 아닌 상태,
구속사적으로 말하면 ‘새 시대’와 ‘이 시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3장에서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위에서 태어나야 된다.
육으로 난 것으로 육이기 때문에 안된다 라고 하시면서
적어도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즉 복음의 혜택이 나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예수님 안에서 내가 ‘육’에 속한 자기를 버리고... 죽이고, 십자가에 처형하고 새로 태어나야한다는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중생이라고 한다.
그냥 중생이 무엇이냐 라고 설명하면
일반적으로는 신비로운 것이다라고 하면서
성령님이 행하시기 때문에 신비로운 것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생해야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가끔 묻습니다. 당신 중생했습니까?
저도 질문을 몇 번 받은 일이 있습니다.
중생이라는 것은 ‘자기 부정’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되는 사람도 있지만 아주 힘든 사람도 있습니다.
야곱은 언제 중생했을까요?
언제 자아가 깨어졌나요?
얍복강 같죠? 설명을 들어서 그렇지 얍복강에 그런 말이 나옵니까?
물론 얍복강에서 항복 한번 하긴 했지요. 그런데 그 뒤에 가면 마찬가지이다.
또 혼나고 혼나고 꾸중 듣고....
베드로는 언제 중생되었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 자기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중생했습니까?
그 후에 고기잡이 해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신(1년 후에 일입니다) 그때입니까?
그것도 계속해서 아니죠? 마지막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부인하고 또 고기잡이 하러 가고 베드로가 언제 중생했습니까?
물론 바울같은 사람은 다메섹 도상이라고 말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전환점 외에는 다른 설명이 없고
거의 그때 획기적인 전환점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순간적이 아니고 서서히 서서히 일어나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날 때부터 부모가 믿습니다. 모태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는데 철이 들면서 부모가 자꾸만 하나님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계신 줄 알고 배워갑니다.
그래서 자라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나의 왕이요 나의 주로 인식되어 가면서 자라갑니다.
완전한 인식은 아니지만 인식되면서 자라갑니다.
그러면서 자아도 자라가고 하나님의 왕이심도 자라간다. 두 주인이 자란다.
씨름을 하지만 그러면서 서서히 서서히 잘만 배우면
결국은 자아를 서서히 포기하고 왕을 나의 왕으로 모시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는 태어나면서 부터 똑바고 올라간다. 그런 사람은 전환점이 없다.
그런데 자라날 때 하나님 쪽으로 안 자라고
자랄 때 반대쪽으로 가는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반대쪽으로 가는 사람은
돌아와야 할 전환점이 있다.
중생이란 것은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냐 하는 것은 신경 쓸 필요 없고 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으니까
점진적으로 될 수 있으니까
문제는 현재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느냐? ‘육’에 속해 있느냐? ‘영’에 속해 있느냐?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배경을 깔고 요한복음 3:16절에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그 아래 내려가면서 좀 더 봅시다.
요절을 한절만 외우면 안 된다고 제가 가끔 이야기 하는데요
요한복음 3장 16절만 암송하고는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 라고 되어 있지 않느냐? 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든지에게 혜택을 주긴 주는데 그러나 조건이 있다.
구원받을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17절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
거기까지만 해도 굉장히 좋은 이야기 같죠?
18절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이미 심판 받았으니까 그 사람은 이야기 할 필요 없고 구원도 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럼 그 사람은 심판을 받았느냐?
19절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들어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거기 보면 어두움에 속한 악한 자들이 빛을 싫어하고 빛으로 오기를 싫어해서
예수님을 안 믿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라는 말은
어두움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보내신 것이다.
1장에서 예수님을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빛이 왔는데 이 빛을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고
영접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못 받는다는 뜻이 1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도 빛을 싫어해서 악을 계속해서 원하는 자는 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셨는데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는 믿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이 악, 어두움에서 벗어나서 빛으로 와야 한다. 즉 빛으로 오기 위해서 어두움을 버려야 된다. 어두움을, 자기 어두움의 삶,
어두움의 사고방식, 어두움의 모든 욕심을 다 버려야 되는데 양다리 걸치기 한다.
그 어두움의 한 부분이 무엇이냐?
물질도 될 수 있고, 명예욕도 그중의 하나이다. 베드로 같은 사람도 그중의 하나이다.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그 말씀만 보면 대개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이미 얻었고
이미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이를 믿는 자는’이란 설명이 나옵니다.
거기에도 믿는다는 말을 설명해야 하는데 뒤에 가서 설명하겠습니다.
그아래도 쭉 내려가면서
29절 "선한 일을 행한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라고
선한일을 행한다 또는 악한일을 행한다.
악한자는 또는 악을 행하는 자는 이란 말이 나오기 때문에
이 내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다라는 말에는 그 아버지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느냐 아니냐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가 따라 다닙니다.
그렇다고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과는 다릅니다.
제 강의를 잘못 들으시면 행함을 자꾸 설명하니까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고 이해할지 모르지만 그 말이 아닙니다.
지금 도덕적인 행위를 쌓아서 적선(積善)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고
구원은 은혜로 주어지기 때문에 복음인데 이 복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따라오느냐 하면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악한 생활을 청산하고
빛의 선한 생활로 와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 ‘악’이 무엇이고 선이 무엇이냐? ‘자기 자아’입니다.
‘자기 욕심’입니다. 그것이 어두움의 생각이고 죄입니다.
그것을 씻음 받고 그것을 버리고 나서야 드디어 빛으로 올 수 있다.
6장에 가면 오천명을 먹이시고 이말을 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성찬식을 행하라는 말입니까?
물론 성찬식도 똑같은 의미이지만 성찬식을 행한다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성찬식을 행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가야 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와 나와 동화(同化)되어야 할 중요한 부분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다시 부활해야 된다.
성찬예식이 십자가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을 행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올 때까지 기념하라’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의미를 성찬식을 통해서 반복시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것인데 그 죽으심이 내 죽으심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그 말은 나도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면서 죽어야 한다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12장 25절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생명을 버리라는 말을 분명히 합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라고!
14장에는 내안에 거하라. 그리고 내 계명을 지키라. 나를 사랑 하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계명을 지킬것이다.
그런 구절이 나올 때마다 피하고 싶죠?
요한일서 같은 것을 읽을 때마다 자꾸 괴롭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만하면 참 편하겠는데 뭐 자꾸 내 계명을 지켰느냐?
계명을 못 지켜서 예수를 믿었는데 또 내 계명을 지켰느냐? 하니까 이구절을 어디에 필요한지가 참 애매하죠?
그래서 구원론을 다룰 때는 그 구절을 안한다.
그러면 그것이 언제 필요하냐?
성화를 설명하고 상급 받는데만 갖다 붙이기 때문에 정 하기 싫으면 상은 받지 말고 구원만 받으라 라고 하는데 그런 구원은 없다.
복음을 굉장히 복된 소식인데
이 복음은 우리에게 목숨을 내 놓으라고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라’고 도전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예수님을 사랑해야 되고, 예수님 안에 있어야 된다”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도 여러가지 다른 설명들이 나오지만 우리가 다시 좀 잘 정리하면 되겠는데요. 제가 믿음에 대한 부분을 다시 또 두번째 시간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해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사십일동안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물론 이것은 복음입니다.
제자들이 아직도 복음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복음을 다시 설명해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살아계실 때 그 설명을 하시지 못하셨을까?
사실은 충분히 하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못 알아 들었다. 왜?
예수님께서 설명하시는 복음은 즉 예수님의 생애 자체는 ‘부활’이라는 마지막 부분이 있어야만 예수님의 생애가 의미가 살아납니다.
이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부분인 부활과, 영광의 부분하고,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하고 연결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이 전혀 이해가 안되고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왕위에 오를것이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현세적인 왕위’밖에 이해가 안된다.
왜? 부활을 이 세상을 벗어나는 것을 말하니까!
육으로 오신 예수님이 육에서 벗어나서 영인 영적인 상태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 영적인 영역으로 옮겨가고 나야만 '나라'도 그쪽으로 따라가죠!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육으로 계신 예수님을 만났으니까 지상에서 유대나라의 왕이 될것으로만 이해했다.
그래서 부활이 이해될 때까지는 베드로나 제자들이 ‘왕권’에 대해서 '나라'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이해를 못했고....그렇다면 복음도 이해가 안된다.
즉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무엇이냐?
병이 낫는 정도거나 아니면 겨우 지상에서 장관이 되는 정도밖에 이해가 안되었다.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이
사람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국가'를 이루고 지상에서 그런 의미로만 이해했는데
죽으시니까 문제가 혼란이 옵니다.
그리고 자꾸만 예수님이 ‘너 죽어야 된다.’
‘자기를 부인해라’ ‘십자가에 죽어라’ ‘자기 목숨을 잃어야 된다’ ‘내 놓아야 된다’ ‘생명을 사랑하면 안된다’ 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오해를 일으킨다.
즉 주님을 위해서 좀 고생하고 어떤 것을 포기하라 라는 것까지는 따라가겠는데
‘마지막 목숨을 아예 내 놓으라 죽어 버려라’라고 하니까 죽으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물론 바리새인들이 부활의 신앙이 있었지만 즉 내세에 대한 신앙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부활과 내세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된 부활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 개념이 분명하지 않았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부활은,
이 현세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최근의 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는 학자들이 부활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늘 우리가 복음이라고 설명할 때는 십자가를 설명하고 생각하고 했다.
부활을 설명하기보다는 십자가를 설명했다.
그런데 실제로 사도행전에 와서 보면 이 부활이 이해가 안되기 때문에
복음과 천국을 이해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보충 교육을 했다.
그래서 40일동안 자기를 보이시면서 계속해서 불러놓고 가르치시고 또 가르시치고 했다. 처음에 한 두주간은 계속해서 헤메었다.
그러나 모두 6주간에 계셨으니까 4주간 정도의 집중교육을 통해서 눈이 떨어진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 사도 보선하는 장면까지 가서 보면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라고 해서 그 때는 이미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를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 2장에서 그의 설교를 보면 베드로가 너무나도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2장 31절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하기 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드디어 그리스도가 되신것이다. 부활한 후에!
현세에서 그리스도 왕이 되실분이 아니다는 말이다. 그 사실이 베드로나 제자들에게 확실이 깨달아 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약성경에 근거하고 있고 시편을 계속 인용하고 있다.
이 오순절의 설교를 보면
베드로가 이제는 확실히 ‘하나님의 나라’와 ‘왕권’과 ‘부활’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그때까지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계속해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제자들이 자리다툼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교회의 대표자로 있었다고 대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별문제가 없었고 베드로가 유명하게 되어도 별문제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책망을 듣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베드로나 제자들이 서로 어떤 갈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모든 교인들에게도 너무나 부활을 잘 가르쳤기 때문에
그 아래 보면 4장 33절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있는 자는 팔아 그 판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니라"
부활을 깨닫고 나서 제자들이 재산을 내 놓을수 있었다.
부자 청년은 안되었죠? 그러나 제자들이 이제는 가능해졌다.
베드로처럼 장관 자리하고 바꾸려고 내놓은것 아니고 완전히 공동체를 위해서 내놓았습니다.
그렇게 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거기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오히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잘못할 때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교인들이 모든 물건을 다 베드로 앞에 갖다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거기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았다.
3장에 성전에 가다가 미문앞에서 앉은뱅이에게 무어라고 말했죠?
내게는 은금이 없거니와 라고 했다.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부자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것이 아니죠? 거기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손대지 않았다.
이것을 필요에 따라 나누어 쓰는데 나누어 쓰다가 문제가 생겼다.
히브리파 과부들하고 헬라파 과부들이 문제가 생겼다. 그때 베드로가 사도들이 무어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복음만을 전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 재산관리를 하니까 문제가 있다.
재산에서 손떼어야 되겠다라고 했다.
자기들이 가져가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관리하는 것 마저도 잘한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초대교회는 물질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왜? 부활때문이죠!
자 이번에는 부활에 대한 설명이 어떻게 되는지 봅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조금 다른 설명이 나오기 때문에 봅시다.
다시 2장으로 돌아와서 끝에
2장 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물론 성경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라는 구절이 있긴 있다.
그래도 사도행전에 쭉 따라가 보면 그렇게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왕으로 보냈다. 왕으로 보내셨는데
땅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예수를 상속자니 죽이자 라고 말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해 버렸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너희가 죽였다’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이 죽인것이 아니고 ‘너희가 죽였다’고 되어있다.
그것이 계속해서 나오니까 봅시다.
3장 14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5장 30절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다’고 한다.
31절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죄사함을 받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라고 되어있다.
또는 승천시키셔서 왕과 구주를 삼으셨다라고 되어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승천하고 왕이 되시는 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조금 설명하고 지나갑시다.
복음에 있어서 중요한 한 부분은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십자가가 우리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붙어있는 죄라는 부분을 떼어내는 작업으로서 생각하시죠?
우리가 죄를 범해서 죄가 있는데
이 죄를 사(赦)해야만 구원 얻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셔서 내 형벌이 면제되어서 내 죄는 용서받고 없어졌다 라고 이해하고 있죠? 그 이해가 성경에 근거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성경에 그 근거가 그렇게 많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도 다른 설명이 더 많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성경을 자꾸 읽고 있는데요.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구절 다시 자세히 찾아보세요. 그런지 아닌지를.
십자가의 의미가 우리가 저지른 죄과를 내게 따라와 있는
어떤 더러운 부분을 싹 씻어 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의미가 조금 검토할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개념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이냐?
죄라는 것이 나에게 붙어 다니는 어떤 때처럼 아니면 혹처럼 붙어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라내면 끝난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했고 무엇을 훔쳤고 어떻게 했고 그런 부분만 싹 정리하면 된다 라는 것이 아니다.
그 죄를 누가 범하느냐? 내가 범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범한다는 말을 하기 싫으니까 ‘죄성이 있어서 그랬다’라고 한다.
‘아담의 죄성이 있어서 그랬다’라고 한다.
그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분명 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성’이 내게 내려온다는 것은 그런 근거가 없다.
내가 아담과 똑같이 나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싶은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 죄를 잘라내라고 하지 않고 ‘너 자신을 버리라’고 했다.
‘너 목숨을 내 놓으라’고 했다.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했다.
십자가의 의미는 ‘내가 죽는 것’이지 내 안의 죄만 잘라내는 것이 아니고 죄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다.
즉 죄는 어떤 물질이거나 따라 다니는 부분이 아닙니다.
즉 죄는 때가 아니다.
유전인자도 아니다.
죄는 ‘나’라는 인격 전체입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아야 된다 라는 말은
내가 저지른 행동을 용서 받는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 행동을 저지른 내가 처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죄의 댓가가 무엇입니까? 사망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되지 피로 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피로 정결케 되었다는 말이
피가 비누거품처럼 되어서 죄를 씻어낸다 라고 오해하시면 안된다.
피는 생명을 가리킨다고 구약에는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내 죄사함을 받았다 라는 말은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내 생명 대신에 내 놓으셨다는 것이다. 내 생명 대신에!....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내 생명을 내놓지 않고 예수님의 생명을 내놓으면 내 죄가 없어지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죄는 ‘내’가 범했는데 ‘예수님’이 대신 형벌을 받으면 내 죄가 없어지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서적인 근거가 있는지 찾아봅시다.
저도 늘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수년 동안 성경을 읽다보니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요.
죄를 내가 범했는데 내가 죄를 범한 당사자인데
내가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예수님이라는 분이 대신 벌을 받으면 내가 깨끗해지느냐?
그렇습니까? 과연 그런가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바꿔치기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공의가 바꿔치기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구약에 바꿔치기 의미가 깔려있습니다.
대속의 의미가 구약에 나옵니다.
장자하고 레위지파하고 바꾸기도 하고
죄를 지은 사람 대신에 제물로 소, 양을 가지고 왔다. 바꿔치기 했다.
그런데 그것이 바꿔치기의 설명이 아니고 다른 의미가 들어있다.
내 대신의 의미가 아니고 내가 죽는 것을 표시하는 것뿐입니다.
사실은 내가 죽어야 하는데 소나 양을 죽이면서 내가 죽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죽으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내 대신만 죽는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형벌을 내가 받는 것이지 예수님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로마서 6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죽어야 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장사지내야 되고,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부활해야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아니하면 나는 내 죄를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한다. 그 죽음이 무엇인가?
육체의 목숨이 끊어진 것만 생각하시면 안된다.
그렇게 말하면 ‘존재’가 없어져 버려서 구원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사실은 십자가는 형벌이고 십자가는 생명이 아니다.
십자가만으로서는 우리의 생명이 끝나지 않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을 봅시다.
17절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아니했으면 우리는 여전히 죄가운데 있을 것이요,
즉 십자가만으로는 죄가 사(赦)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만으로는 죄가 사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슨말이냐?
죄의 개념을 또 생각하고 생각하고 하셔야 합니다.
죄라고 하면 자꾸 내가 저지른 행동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죄가 아니고 죄의 결과입니다. 죄는 나 자신입니다.
내 자신의 다른 생각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것 뿐입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란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고 내 생각대로 ‘나’ 뜻대로 하는 ‘자아’입니다. ‘자기고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어야 된다’라는 말이 ‘자기’를... ‘아집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자아를 죽여라. 자아를 죽이면 어떻게 됩니까?
끝나면 아무것도 아니죠!
여기 사형을 받아야할 죄수가 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엄청난 죄를 지어서 사형집행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이 사람의 죄의 대가로 이 사람을 사형시킵니다.
그러면 이사람은 죽었죠?
그러면 이사람의 형벌은 죽음과 사형집행과 함께 끝난다.
끝나면 이 사람 무엇이 됩니까?
없죠? 그러면 죄사함 받은 것입니까?
죄사함 받은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로 죽은 것이다.
사(赦)함받은 것이 아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십자가 자체는 형벌로서 끝나는 것입니다.
사함을 받는 것은 안 죽어야하는 것인데, 죽었는데, 죽임을 당하는데, 어떻게 사함을 받는 것입니까?
사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용서를 못 받고 죽은 것’이다. 그렇죠?
십자가는 ‘용서를 하지 않고 죽인다’는 의미입니다.
죽었는데 끝났으면 형벌로 끝나는데 다시 살리면 그것이 ‘용서’이다. 이해가 되십니까?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죽음으로 그것은 형벌로 끝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만일 부활하시지 않으셨으면 그리스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죽고 끝났으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그간 삼년반 동안 행한 모든 업적 아무 의미가 없다. 죽었는데!
즉 형벌로서 하나님이 다 청산하고 말았으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그래서 복음에는 부활이 꼭 전제되어 있어야 하고 부활의 의미가 살지 않으면 십자가의 의미는 퇴색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만 늘 깨달아 와서 ‘십자가에서 내 죄가 씻어졌다’라고 말하는데 안 씻어졌다 이말입니다.
십자가에서는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형벌을 받았는데 그것을 끝장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니고 살려주어서
“어떻게 내가 다시 살아났지? 아! 하나님 나를 용서해주셨구나!” 그런 이야기이다.
그런데 실제로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 아니죠? 물론 죽어도 될지 모르지만....
죽는 것 아니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은 ‘자기 부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아를 하나님께 내어놓고,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나의 새로운 ‘주인’과 ‘왕’으로 받아들이면 ‘자기가 죽은 것’이다.
그것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십자가에 나를 못 박아야 된다고 바울도 말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된다. 그러면 내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오신다.
그리스도가 내 안 에 들어오신다.
그 그리스도가 오셔서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나를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영광스럽게 받아주신다.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부활입니다.
영적인 부활이라는 말이 있는가?
에베소서 2장에서 봅시다.
1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거기 죽었다는 말이 있죠? 죄로 죽었어요.
그런데 ‘너희를 살리셨도다’란 말은 작은 글자로 되었으니까 원문에는 없습니다.
2절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즉 세상풍속을 따라다니고 사탄을 따라다니는 것이 죄입니다.
3절에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죄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에게서 잘려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우리를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실제로 죽고 끝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 이유없이 살려주신 것은 은혜이다.
공짜로 살려주셨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혔으니“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 사실은 2000년 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된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물론 그렇게 된것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큰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는 살아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아 이미 함께 하늘에 앉혀있다.
이미 천국에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하나님 우편에 같이 앉아 있다.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해주겠다고 요한계시록에 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보좌에 함께 앉아있습니다.
실제로는 아직 난 땅에 살고 있고 부활하지 않았고 승천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중에 재림할 때 일어날 일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 몸이라는 것을 두고 볼때 그런 것이고 ‘이미’ 우리는 부활해서 일으킴을 받아서 하늘에 앉아 있지만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이미’와 ‘아직’의 두개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이미’ 되어있기도 하고 ‘아직’ 아니기도 하다.
그것을 천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이라고 한다.
구원이라고 말하면 구원의 ‘현재성’과 구원의 ‘미래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도 되고 동시에 아직 ‘안 받았다’라고 말해도 됩니다.
죄는 자기 욕심대로 행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자아를 말하고 그 자아가 죽어야 되고 이번에는 성령님을 따라서 사는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새로운 존재로 출발하는 것을 부활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복음이 무엇이냐?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자가 되시기 위해서 육신으로 오셔서 나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나와 똑같은 죄인이 되신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죄인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래서 나를 자기와 포함시켜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실 때 자기는 죄가 없는데 왜 죽습니까?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나 때문에 죽는 것이다.
나하고 바꿔치기 해서 혼자 죽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같이 죽는 것이다.
그러고는 다시 부활하셨다.
그래서 복음은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활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부활이 중요하다.
그 부활을 깨닫기 전까지는 베드로나 모든 제자들이 구원의 개념과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더라 이거다.
그런데 부활이 인식되고 나니까
“아! 이거 참 이상하다. 새로운 시작이구나.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이구나! 새로운 영역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의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이고 3장 4장 5장에 계속 반복해서 너희가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살리셨다 라고 한다.
예수를 죽일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야 되죠! 자기를 죽여야 되죠! 그런데 예수님을 죽인다 이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그것은 죽을 죄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 이말입니다.
즉 십자가의 의미는 복잡합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나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임과 동시에
베드로의 설교에서는 계속해서 너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라고 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에서 처럼 자기 아들을 보내시자
사람들이 상속자니 죽이자 라고 해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고 죽이더라 라는 이야기를 자꾸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거역하는 무리에 의한 거역행위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된다’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내가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은 자기가 왕 자리를 내놓기 싫으니까 포도원을 내놓기 싫으니까 주인을 죽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떻게 보면 거역하는 사람들이 자기의 ‘자아’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행위이다.
그러면 ‘자아’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영접한다 라는 말은
완전히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반대 행위가 일어나야 한다.
‘자기’를 십자가에 처형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가 자기에게 복음의 소식으로 올 수 있다.
그 후에 ‘부활이라는 사건’이 우리에게 등장하고
이 ‘부활’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비로소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윤종하 총무강의)
두번째 시간
계속해서 복음의 중심사상에 대한 것을 다시 정리하고자 합니다.
어제 우리가 살핀대로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또는 ‘사역’이라고 했는데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성육신부터 시작해서 그의 순종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 왕위에 오름 등등 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좀 중요하게 다루어진 부분이 성육신과 부활 또는 십자가가 중요한 것을 우리가 살폈습니다.
그 중에서 십자가에 대한 부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데
다른 부분이 좀 잘 이해가 안되어 있고
또 십자가에 대해서도 다른 부분이 이해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려고 하다 보니까
십자가의 의미중에 내가 함께 죽어야 할 부분들이 잘 정리가 안된 부분을 어제 살폈습니다.
오늘은 편지서를 주로 다루면서 바울의 서신이나 베드로나 야고보 요한의 서신에서 우리 구원에 대해서나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조금더 찾으면서 정리하고자 합니다.
먼저 로마서에 있는 부분을 봅시다.
로마서 1장 2,3,4절에서는 이미 첫 시간에 언급한대로 성육신과 부활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그러고 나서 16절을 봅시다.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서 복음에 대한 설명이 몇가지 나오는데
하나는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이다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에 복음은 어떤 ‘능력적인 사역’으로 봐야한다.
은혜로 선물로 거저 주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은혜로 선물로 준다고 해서 그냥 쉽게 주면 끝나는 정도의 일이 아니고
‘강력한 능력있는 어떤 일’이다 이거다.
또 17절에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라고 한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뒤에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옳다’라고 인정받는 부분 칭의까지 연결되겠지만 칭의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가 ‘의’라고 설명되는 부분이 나옵니다. 조금있다가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라는 말은
그 하나님의 ‘의’를 내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믿음’이라는 통로가 필요하다는 뜻이 되겠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하박국서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오늘 시간이 안되면 내일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일단 믿음의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부활부분을 좀더 설명을 해야 되겠어서
이 복음의 능력이 십자가와 부활사건과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를 조금 더 살피고자 합니다.
지금 이 로마서에서는 제일 앞부분에 죄에 대한 설명이 길게 나오다가 3장에 가면
21절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라고 되어있다.
거기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라고하고
이것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다 라고해서
거기까지는 거의 예수 그리스도다 라는 의미를 풍기고 있는데요
조금더 보충설명해서 곧 예수 그리스도 이신데
그 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분에게 그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치는 것이다. 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의를 마련하셨는데
이 의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라는 의미가 깔려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는데요.
죄를 도덕적으로 이해하시려고 하지말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 이전에 그것은 결과적인 것이고
죄는 인격적인 부분이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인간이라는 인격 자체를 두고 죄냐 아니냐라는 설명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의롭게 된다’라는 말도 ‘도덕적인 의’를 일차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 되어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고 말씀할 때도
그 물론 도덕적인 측면으로 이해 할수도 있겠지만
‘나라’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는 하나님의 통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뜻! 그것을 ‘의’라고 한다.
그래서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는 사람 또는 그 행동을 ‘의’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 따르는 행동은 그 따르는 인격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인격자체는 하나님을 잘 따르지 않는데도 선한 행동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하는 ‘의’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일컫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 믿는자가 하나님 앞에 행동이 썩 아름답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에게 복종하려고 할때 그것을 ‘의’라고 일컬어 주신다. 칭의라고 해주십니다.
물론 이 ‘의’의 개념은 로마서에서 상당히 많이 다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읽었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는 아들이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서 거기에 ‘의’의 요소가 들어있다.
그래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거룩해져야 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훌륭해 져야하는 것이 사실인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나’라는 존재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화되는 ‘의인’이 되어야만 의로운 행동이 나타나는 것이지
사람은 죄인인데 ‘의’가 나타나고
사람은 의인인데 ‘죄’를 범하고 그런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 행동을 하는 인격체와
이 인격체에서 나타나는 행동을 우리는 구분해서 이해할 때 착각이 자꾸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의롭게, 의로운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지
나를 통해서 의로운 행동이 나타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면 곤란하다.
그래서 이것은 설명하기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따르는 백성들이 모여 있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게 되어있다 이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또는 ‘의’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하라는 것 그것이 ‘의’이고 ‘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할 사람만 있으면 그것은 하게 되어있다.
말을 잘 듣는 국민들만 있으면 하게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말은 잘 안 들으면서 ‘알아서’ 선을 행할 수 있느냐?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뜻’이니까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가 아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나타나는 선과 악의 설명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또는 휴머니즘적인 그런 어떤 차원에서 이해하는 선과 악의 개념의 차이라고 볼수 있다.
그것은 명백히 짚고 지나가지 않으면 복음을 이해할 때 늘 어려워집니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할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어 있느냐?
하나님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하지
이 사람이 행하는 행동이 깨끗하냐 아니냐에 달려있지 않다.
사실 믿지 않는 사람이 때로는 우리 성도들보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더 아름답게 깨끗하게 의롭게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결코 ‘의’라고 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으로 하는 ‘의’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무엇이 ‘의’냐? 무엇이 ‘선’이냐?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명령만이 ‘선’이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어떤 ‘선’이 ‘선’이 아니다 이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혼자서 통치하시는 일인 정치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간첩이라고 우리가 보낸것은 죄인이 아니고 저쪽에서 보낸 간첩은 죄인이다.
요즘 북한에 간 것도 그런 것이다.
허락하고 보낸 것은 잘한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죄인이 된다.
그간 동기나 목적에 따라서 따지지 않고
허락을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에 따라서 따지는 그런 부분들이 국민들이 볼때는 불만이 있지만
그것은 어떤 정치 체제에 있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된다.
이세상 나라에서는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하니까 정부에서 하는 결정이 못마땅하다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런것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꼭 허락을 받고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그런다. ‘하나님의 뜻’이었느냐?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느냐?
내가 아무리 선하다고 생각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것이냐? 아니냐?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 말만 하지 말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 심지어 선지자 노릇을 하거나 귀신을 쫓아내거나 많은 권능을 행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장에 있는 그 말씀들 뒤에 가면 4,5장에 내려가면 믿음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 설명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요.
5장 12절 이하에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오고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들어왔다라는 대표사상이 깔려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담과 연관관계가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관관계가 있습니다.
그 연관관계를 solidarity라는 말을 쓰는데요 내가 아담에게 속해있느냐?
그리스도에 속해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생명을 누리느냐 죽음에 처하느냐하는 결판이 난다.
소속의 문제입니다.
나는 아담의 후손이냐?
그리스도의 후손이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는 6장에 가서 지난 시간에 살폈습니다만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세례를 받고, 연합해서 죽고 장사되고, 연합해서 다시 부활해야된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4절부터 조금 봅시다.
6장 4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우리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새생명이 되어야 하는데 그 새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다시 살리셔야 새생명이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도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것은 죄의 몸의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거기에 어제 설명드린대로 십자가 사건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처형될 때만이 십자가가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는 함께 안 죽고 예수님 혼자 죽으신 것은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그 십자가하고 나하고 ‘연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예,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줄 인정합니다.‘라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내가 그렇게 ’죽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죽지 않았는데 내가 그렇게 ‘인정’한다는 것은 필요 없다.
말로 고백하는 이 믿음이 아니다.
실제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는지 아닌지 불확실한데
말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줄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내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건 안하건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어야 한다. 실제로!
물론 말로 고백해야 된다라는 말은 실제가 먼저 있고 나서 말로 고백해야지 실제적인 것은 다루지 않고 말만 일단 하면 되느냐? 아니다.
그것이 마치 주여 주여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주여 라는 말 안하더라도 실제로 아버지의 뜻대로 살면 그것은 종이 된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그렇게 고백하면 그것은 말이 된다.
그런데 무엇이 십자가에 못박히느냐?
이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
자, ‘영’과 ‘육’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하고 지나갑시다.
사람은 보통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분설이냐? 삼분설이냐?
최근의 신학자들은 하나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 하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쉽게 저는 아직은 이분설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쉽게 봅시다.
사람에게는 영혼과 몸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영혼을 SOUL이라고 말하고 몸을 BODY라고 한다.
영혼이라는 말은 헬라말로 (프쉬케)라고 하고 몸이라는 말은 (소마)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영혼이라는 말 외에 성경에는 또 다른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에서 관계되는 말 두가지만 더 찾읍시다.
하나는 영이란 낱말로 영어로는 SPIRIT 이고, 헬라말로는 (프뉴마)라고 합니다.
이 영, 혼,이라는 말과 영혼이라는 말이 비슷하죠?
영혼이라는 말은 영도 있고 혼도 있고 그런것 같으니까....
그런데 사실 영혼이라는 말은 혼이라고 하면 쉽겠습니다.
몸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하나있습니다. ‘육’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FLESH라고 하며 헬라말로는 (사륵스)라고 합니다.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로마서 7장 8장에 가면 ‘육’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육을 따라 사는 사람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라는 구절이 자꾸 나옵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영, 혼, 몸 이렇게 세가지가 있다. 라고 해석을 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구절은 유일하게 데살로니가전서에 한번 나옵니다.
온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의 날에 온전해지기를 기도한다라는 말이 5절 끝에 나옵니다.
그 구절을 뒷받침해서 사람은 세 요소가 있다라고 말하는데 그 한구절 밖에 없다.
다른 많은 구절에 보면 또 다르게 나온다.
너희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대해서 힘을 다해서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하는데서는 마음도 있고 몸도 있고 뜻도 있고 물론 원문에 따지면 혼이라는 낱말도 있고 몇가지 낱말이 나오지만 세가지가 아니고 세가지 네가지도 나오고 네 마음의 생각과 뜻이라는 낱말도 나오고 골수와 관절이라는 말도 나오고 거기에 혼 영 다 나옵니다.
여섯가지도 나오고 여덟가지도 나오고 하기 때문에 도저히 그것 가지고는 구분이 안됩니다.
그러나 요즘 신학자들이 대충 정리한대로는 아직도 정리가 덜 끝났지만 그래서 이것이 확실한 결론적인 것으로 이해할수 없지만 아마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거의 맥을 잡아주는데는 거의 합의 되어있는 어느 정도 따라 갈수 있는 이론 같아 보입니다.
사람은 혼과 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혼과 몸이 처음 지음받은 상태,
창조된 상태로 심지어 타락된 상태로까지도 말하지만
제 생각에는
타락을 안했더라도 첫 창조된 상태로 있는 이 ‘혼’과 ‘몸’을 가진 인간을 가리켜서
‘육에 속한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재창조된 이 ‘혼’과 ‘몸’을 가진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제가 이것을 이 시간에 설명하느냐 하면
어제부터 ‘육’으로 오시고 ‘영’으로 부활했다라고 말하니까 혼란을 빚으실까 싶어서 입니다.
그 낱말에 오해가 있으실까 싶어서 입니다.
혼도 있고 몸도 있는데 혼과 몸이 첫창조된 상태에 있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상태이다.
그것을 육적인 혼, 육적인 몸 이라고 부를수 있다.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혼에 속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육에 속한 몸이 있은즉 영에 속한 몸이 있다’라고 한것은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혼에 속한 몸이 있은즉 영에 속한 몸이 있다’라고 해야 한다.
‘혼에 속한 몸’과 ‘육에 속한 몸’과 거의 같은 뜻이 아닌가 하고 일단 학자들이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서는 그렇게 나오니까요.
같은 바울이 쓴 글인데 낱말의 차이가 있어서 아직도 연구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일단 결론적으로는 이렇게 말할수 없더라도 대략 방향을 잡고 이해하는 것이
바울의 글 특별히 로마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요
그리고 어제부터 설명해오던 복음의 핵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람이 첫창조된 상태, 특별히 타락된 이후의 사람은 육에 속한 자라고 말하고
그것을 이 로마서에서는 ‘옛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 옛사람이 육에 속한 혼과 몸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러면 다시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생명을 얻어서 살아나 새생명 가운데 행하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영에 속한 혼과 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실때에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실때에 ‘혼과 몸’을 가진 인간으로 오셨다.
혼과 몸은 우리와 똑같이 있는데 육적이냐? 영적이냐?라고 묻는다면 ‘육적인 혼과 몸’을 가진 인간으로 오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것을 ‘성육신’이라고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때만은 항상 성육신, 즉 육신을 입고 왔다라고 나온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고민이 조금 있었다.
예수님은 타락하시지 않았는데 왜 예수님을 ‘타락한 요소’인 육을 입고 왔다고 말했을까?
그래서 종전의 신학에서는 육이라는 말이나 몸이라는 말이나 같은 뜻으로 서로 혼용해서 쓰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단순히 몸을 입고 왔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하면 그러면 영혼을 안입고 왔느냐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실때도 몸만 죽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죽으실때 몸만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혼도 죽으셔야 됩니다.
예수님이 혼을 입고 오지 않으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또 ‘혼’ ‘몸’을 다 입고 오셨다는
범죄할 때 ‘혼’도 ‘몸’도 다 행해야 되고,
의를 행할 때도 ‘혼’도 ‘몸’도 다 행해야 되는데,
예수님 자신은 죄를 범하시지 않으셨지만,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때에
우리가 ‘혼’과 ‘몸’이 함께 죄를 범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몸’만 가지고 십자가에 죽으시면
우리의 ‘혼’의 문제를 담당할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또 그렇게 되면 그것은 인간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몸’만 가지고는 인간이 아니다. 적어도 ‘혼’은 있어야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혼’이 떠나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나 구약 이사야서 53장에 보면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린다는 말씀이 나온다.
또 사도신경에 우리나라말에는 번역이 빠져있는데
거기에는 ‘지옥에 내려가셨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어 지옥에 내려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다는 구절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사도신경이고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그 사흘동안에 내려갔는지 어떤지는 시비가 생긴다.
그것은 사도신경이고 성경이 아니니까 일단 시비가 붙던 어떻든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백들이 우리에게 왜 전해져 오느냐?
실제로 예수님이 ‘지옥의 고통’을 받으셔야만 당연합니다.
지옥이란 하나님의 ‘사형집행’이니까요.
죄를 범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몸’만 죽는 정도로 우리의 죄가 처리되지 않고 ‘지옥’에까지 가셔야된다.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말을 ‘지옥의 고통’이라고 우리가 해석할수 있겠고,
뭐 해석이 많이 따라 올수 있겠지만
하여튼 예수님이 ‘영혼’과 ‘몸’이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는데
그 ‘영혼과 몸’은 육에 속한 영혼과 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이고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혼과 몸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흘만에 부활하시는데 여전히 육신으로 육에 속한 혼과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이번에는 ‘영’에 속한 ‘혼’과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6장 6절에는 ‘옛사람’이라고 나와 있는데 에베소서에는 무어라고 나와있는지 봅시다.
에베소서 4장 22절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거기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라고 나와있는데 옛사람이 무엇이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것이 옛사람이라고 했다.
그 앞에 조금 앞에 가면
19절에 "저희가 감각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그것을 옛사람이라고 한다.
자기 욕심을 따라서 구습을 좇는 세상 풍습을 좇는 사탄을 따라 다니는 것이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즉 육에 속한 인간으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아담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그것을 ‘육에 속한다’라고 한다.
그런데 새사람이 된다라는 말은
심령을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또는 ‘성령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의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거기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거룩’하다는 말은 하나님에게 소속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따라 사는, 지음 받는
또는 성령을 따라 지음받고 사는 그것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로마서 돌아와서 조금더 봅시다.
로마서 6장 12절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라고 나온다.
죄로 너희 몸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라고 말하고
뒤에가면 사욕을 순종치말고 라고 했으니까 죄는 사욕이 죄이다.
자기 사사로운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은 죄에 종노릇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에 죄란 무엇이냐?
‘자기’이다. ‘자아’이다. ‘자기욕심’이다.
13절에 "또한 너희 육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거기에 하나님께 나를 드릴 때는 그냥 드려지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내 사사로운 욕심을 따라 살았는데 육적인 인간이었는데
내가 하나님을 따라 사는 것은 그냥 되느냐?
내 욕심대로 살던 내가 갑자기 하나님을 따라 살게 되느냐?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왜?
‘나를 지배 하는 자’가 누구냐? ‘나 자신’이었다.
그것을 내 욕심 사욕이라고 했다.
자기 욕심대로 살던 내가 갑자기 하나님을 따라 살게 되지 않는다.
자기 욕심대로 즉 자기를 지배하던 그 욕심에 매어있는 ‘자아’가 죽어야만 하나님 뜻을 따라 갈수 있다.
즉 주인이 바뀌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너희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여기 물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 드려져라 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으실때 부터 아버지에게 온전히 드려서 절대 복종하셨다.
우리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말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워서
나도 그리스도처럼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자기를 죽이고
이제는 아버지께 복종하는 그런 ‘새로운 자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이고 새로 살아나는 것을 ‘부활의 의미’라고 합니다.
14절에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
이제 내가 나를 주관할 수 없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아래 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주인으로 등장해 있기 때문에 내가 나를 지배할 수 없다.
7장에 넘어가서 봅시다. 5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지체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거기에 아주 분명하게 나온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첫창조된 상태대로 혹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 이대로 있을 때에는 죄의 정욕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다라고 되어있다.
그 죄의 정욕은 나의 정욕입니다. 죄가 바로 나 자신입니다 .
하나님을 떠난 내가 죄이니까 하나님을 떠난 나의 정욕에 의해서 내 생애가 지배되고 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더니 6절에 "이제는 우리가 얽매었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것이요"라고 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것이요라는 말은
이제는 영에 속한자이니까 성령님에 속한자이니까 영의 새로운 그런것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육에 속한 상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을 섬길수 없다. 자기 욕심때문에!
그것을 버린자가 자기육신을 자기욕심을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만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면서
드디어 하나님에게 속한 성령님에게 속한자로 태어나서
성령의 영의 법을 따라서 새로운 것으로 섬길수 있다는 말입니다.
8장 3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할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이 시행되지 않는다. 왜?
우리가 육에 속해있으니까!
자기 욕심에 집착되어서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순종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율법을 도저히 지킬수 없는 상태에 있는데
또는 율법이 그런 우리를 어떻게 할수 없는 우리를 어떻게 할 만큼 강하지 않고 연약한데
그것을 하나님은 하신다. 어떻게?
율법을 주어서 못하시던 부분을 하나님은 하시는데 어떻게 하시느냐?
다른 방법으로 하셨다.
그것은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거기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어떻게 하느냐?
아들을 보내실때 우리 죄있는 우리 즉 육에 속한 우리와 똑같이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그 육신에게 죄를 정하신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다시 부활시켜서
이번에는 육신을 좇지 않고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 그 영을 좇아 사는자로 우리를 바꾸시는 작업을 통해서
드디어 하나님의 율법의 뜻이 우리의 삶속에 시행되도록 바꾸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에 속한 자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행위로 구원얻을 수 없고, 믿음으로 구원얻는다 라는 말이
너 행위 구원 안해 준다는 말이 아니고
육에 속한 자로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어있지 않다는 말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왜?
자기 욕심, 자기 주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래서 너는 행함으로 구원얻을 수 없다라는 것은 너는 행할 수 없다.
행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너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자아가 죽고, 새사람이 되어야만 드디어 너는 내 뜻을 행할 수 있다.
그런 말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자체가 그런 의미이지 행함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라는 말이 아니다.
행함은 아무리 해도 필요없고 ‘예수 믿습니다’라고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참 우스운 나라입니다.
선을 잘 행하고 행함이 있는 사람은 필요 없고
그저 믿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만 다 받아 주니까 입만 천국에 간다는 식으로 문제가 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저질의 나라로 수준이 내려 갈리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얻는 다는 말 자체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행함으로 구원을 못 얻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사람이 바뀌시기를 원하신다이말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요구’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요구’가 능력으로 나타나서
우리안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 순종할수 없던 우리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행할수 있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옛사람을 죽이고 새사람으로 만들어서
드디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행하게 만들기 때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능력으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8장 8절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너희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이제는 육신에 있는자가 아니고 영에 있는자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육에 속한자가 영에 속한 자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들어오느냐?
육신이 있으면 하나님의 영이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에 못 들어온다.
육을 버려야만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시기 때문에, 육과 영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는!
물론 실제로 내가 성령님을 내가 일단 받아들이고
나를 죽이고 부인하고 성령님을 받아들인 이후에도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들고 일어나고 자기욕심과 고집대로 등장할 때가 물론 가끔씩은 있다.
성경에는 너희들이 아직도 육에 속한자란 말이 가끔 나온다.
아니면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다라는 말이 나오지만 이론적으로는 육과 영이 공존할수 없습니다. 공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안에 두개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을 잘못 이해하면 내안에 두개의 마음이 싸우는 것 같죠?
실제로 처음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려고 할때 싸움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밀려가야 하니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내가 밀려가야 하니까 싸움이 있다.
일단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을 때는 나는 죽었으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로 태어났으니까 자아가 없어야 정상적이다.
사실 이것은 이론인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되느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바울 같은 사람은 그것이 거의 가능한데 우리같은 사람은 아직도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하겠죠?
제가 결혼의 비유를 가끔 듭니다.
결혼할 때, 여자가 남자와 결혼할 때 미리 잘 생각해 봅니다.
‘내가 저 남자와 결혼해서 사는 것이 어떨까?’
우리 교회의 원리대로 결혼할 때 여자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된다는 서약을 해야죠!
내가 저 남편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내 주관을 버리고 남편의 자아를 따라가야 한다.
물론 인간과 인간이니까 하나님과 우리사이보다 좀 차이가 있지만 쉽게 예를 들기 위해서이다.
잘 생각해 보고
“아~ 저 남편은 너무 훌륭하다 내가 저 남편과 결혼하면 내가 남편이 원하는 대로 따라 하겠다.”
그래서 심지어 연애할 때 보면 당신을 위해서 죽기까지 하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에서 복종하죠?
복종하겠습니다라고 목사님에게 주례받으면서 서약을 합니다.
그때 실제로 남편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따르겠다는 자기 부정하고 있는입니다.
물론 부부사이정도에서 이지만!
그런데 막상 결혼해서 살다보면 동의할 수 없을 때가 자주 생깁니다.
서약을 했지만 배리가 뒤틀려서 못 따르겠다! 그래서 막 싸운다. 왜?
서약할 때 나에게 복종한다고 하고서 왜 복종하지 않느냐?
한계가 있지 못하겠다.
그것이 자기를 부정한 아내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느정도 까지냐?
그래서 남편이 그렇다면 당신 나하고 이혼하자!
그러면 좋다 나는 이혼하면 했지 당신에데 굴욕적으로 복종하고 살수 없다
그럼 이혼해야 하죠?
그렇게 하는 경우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셔놓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놓고 순종하니까 기분이 안좋고 안돼서 나 도저히 하나님에게 복종 못하겠습니다. 떠나가는 사람이죠!
그것은 타락입니다. 멸망합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꾸중 들으면 아! 잘못했습니다.
사실은 기분이 나쁘고 그래서 그랬는데 복종하겠습니다.
이혼은 아니다. 이혼은 할수 없다. 난 결혼을 한다.
이런것은 내가 당신에게 따라 가기가 기분나쁘고 따라가기가 싫지만 당신에게 기본적으로는 복종할 마음이 있습니다.
나 그래서 이혼은 안하겠다.
결혼을 유지하겠다 라고 말하면 일단 남편을 주로 모시고는 있는거죠!
다만 자기를 한쪽구석에 남겨 놓는 것뿐이죠! 그와 비슷하게는 가능하죠!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 놓고도 '예'당신을 주로 모십니다. 아닌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고 요만큼 따라 나닐 수는 있죠!
그정도면 제가 보기에는 아직은 구원에는 들어와 있다고 볼수 있겠어요!
그런데 이혼하면 이혼하지 도저히 못하겠습니다까지 가면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야 되죠!
그래서 주인으로 내가 모셔놓고 내가 밀려나 있는데 내가 자꾸 들어오려고 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냐?
기본적인 하나님의 주권을 거역하지 않는 선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서 기본적인 것까지 넘어선다면 구원에서 탈락되는 것이라고 보아야합니다.
다시요.
8장 11절 봅시다. "예수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부분이 조금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런지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셔들이는 순간에
내혼과 몸중에서 억지로 나눈다면
내가 이미 영을 성령님을 하나님을 모셔들였기 때문에
옛사람이 죽었다.
그러고는 새사람이 된것이다.
즉 성령님을 주인으로 모셔들이는 새로운 존재가 된것입니다.
자아가 죽었습니다.
육에 속한 자가 영에 속한 자가 되었는데
인간이 그렇게 되긴 했지만
이 내 몸은 따라는 오지만은
아직도 ‘첫창조’인 ‘육의 속한 상태’로 있다.
그런데 언제 변하느냐?
나중에 우리몸도 변화시킨다고 했다.
그 영으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는 말은
우리몸은 죽을 몸이다는 말이다.
이 몸은 영원히 살 몸이 아니라 죽을 몸이다.
그래서 이 몸도 다시 살리셔야 한다.
부활시켜야 한다.
자! 이렇게 이해합시다.
부활이라고 말할때 우리가 인식하기 쉬운것은 우리 몸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우리 몸의 부활입니다.
그 부활 이전에 육에 속한 육인 자아가 죽고
영에 속한 자로 바뀌는 새로 태어나는 과정이 한번 있다.
그것을 영적인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고 살리심을 받아서 하늘에 함께 앉히시니 라는 말은
이미 부활했다는 말이다.
부활하고 승천했다. 언제? 전에!
아직도 나는 승천하지 않고 땅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면적으로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내면적으로는 자아를 죽이고 성령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을때
나는 이미 육에 속한자가 영에 속한자로 새로 태어나면서 부활했다.
옛사람이 죽고 새로 부활했다.
그런데 이 몸은 아직 옛사람으로 그대로 있다.
이것은 나중에 다시 살려주겠다고 되어있다.
어제 제가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이냐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담당하셨다라는 말은
이 육에 속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자기 사욕 옛사람 그것이 처형되어야지
내가 저지른 죄만 처형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죄를 범했을때 그 죄에 응당한 하나님으로 부터 형벌을 받는다고 해서
내가 의인이 되느냐? 아니다.
내가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는 받았지만
죄를 범하는 나는 여전히 죄인으로 있다. 나는 여전히 죄인이다.
감옥에 갔다왔다고 해서 죄를 안 범하는 의인으로 바뀌었느냐? 아니다 이말입니다.
감옥에 갔다온것은 갔다온것이고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나쁜짓 할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저지른 행동만 십자가에서 처형된다고 해서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알겠습니까?
또 도대체 내가 저지른 행동을 십자가에서 처형한다는 말이 무엇이냐?
내가 사람을 때려서 감옥에 갔다 나온다고 해서 그 때린 행동이 없어집니까?
나 자신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지만 때린 행동도 없어지는 것 아니다.
억제하기 위해서 앞으로 때리지 말라고 가르치기 위해서 감옥에 넣는 것이다.
교육을 위해서 감옥에 넣는 것이지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다고 해서 실제로 잘못한 행동이 없어지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것 때문에 감기를 앓고 일어났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해 봅시다.
거짓말 한번 했더니 감기를 앓았다.
그럼 감기를 앓았다고 해서 내가 거짓말을 한 그 행동이 과연 없어지느냐? 아니다.
아! 내가 거짓말 했더니 감기를 앓았구나!
거짓말하지 말아야지! 라고 교육을 받는 것뿐이지
실제로 형벌이 죄를 없이 하는 것이 아니다.
죄는 형벌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죄는 어떻게 없어지느냐?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교육으로도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예 사람을 새로 재창조(새창조)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에 첫창조 하실때에 재창조(새창조)할 계획이 이미 있었다.
이 첫창조 가지고는 완전하지 않다.
말 안들을 것이다. 자기 고집대로 살것이다.
그래서 자기 고집을 버리고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그 신앙의 단계인 재창조(새창조)를 설계하셨다.
옛사람을 죽이는 작업을 처음부터 설계하셨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내 대신 죽으신 것도 아니고
내 형벌이 없어진것도 아니고
내 죄가 없어진것도 아니다.
무엇이냐? 그냥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처형받는 것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사실은 내가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한다. 이말입니다.
내 자아가! 옛사람이 죽어야만 드디어 이제는 아무소리 안한다. 죽었으니까!
그리고는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말이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말이 내가 없어졌다가 다시 생겼다는 말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옛사람인 욕심을 부리는 자아가 자리를 비켜두고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것이니까 내 인격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지경과는 다른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왜 자꾸 죄를 범하느냐? 욕심이 있어서 범한다라고 그사람들도 깨닫고 있다.
욕심을 버려라라고 한다. 자기를 부정하라고 한다.
우리보다 더 철저하게 가르킵니다.
어떻게 버려지느냐? 버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절간에 가서 삽니다. 왜? 아무도 안보면 욕심이 줄어드니까!
그래도 무슨 생각이 자꾸 나니까 무슨 일을 자꾸 합니다.
옛날에 기독교에서도 수도원에서 자꾸 그렇게 했다.
천주교에서도 신부 훈련시킬때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 같다.
훈련시킬때 잡념을 가질 시간이 없도록 계속해서 일을 시킨다.
왜? 욕심이 자꾸 들어올 것이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치료법이 아니다.
임시로 그냥 못들어오게 막는것일 뿐이다.
또 잘 생각해 보세요.
가만히 있으면 죄가 없어지느냐?
가만히 있다는 것은 인격이 정지해야만 가능하죠.
인격이 정지한다는 말은 죽는다는 말이다.
살아도 돌처럼 멍청하게 아무생각 안하고 있으면 죄를 안 범하겠죠!
그것은 인간이 아니다.
아무리 절간에 가서 그렇게 해도 안된다.
자아가 바뀌기 전에는 안된다.
‘자아’를 밀어내고 다른 것이 오기 전에는 안 바뀐다.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않으면 자아가 밀려나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들어와야 자아가 자리를 비켜나죠!
그것이 ‘그리스도 성령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 내게 들어오셔야만 자아가 비켜날 수 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은 부활을 전제하고 있다.
성령님이 들어오셔서 그리스도가 들어오셔서 육에 속한 옛사람인 나보고 비켜라 라고 한다.
자리를 비켜라라고 한다. 그런 뉘앙스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래서 부활은 무언가를 죽이고 다른 것으로 살아나게 하기위한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부활과 붙어있어야 되고 십자가는 무엇이냐?
부정적인 면이고 부활은 긍정적인 면이다. 죽이는 부분이고 살리는 부분이다.
대속에 대한 이야기 합시다.
우리가 이런 이론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죄를 범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시느냐?
죄를 범했으니까 형벌을 내리셔야 하는데
형벌을 내리려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용서해 주셔야겠고
사랑을 하자니 하나님의 공의가 용서하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갈등을 느낀다.
그러나 그 말자체는 사실은 모순 투성이의 이야기 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한가지 대안을 만드셨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형벌하자 하면
그리스도를 형벌하고 우리를 용서하자 그러면 OK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형벌을 내리고 우리를 사랑해서 건져내신 것이 십자가의 원리이다 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살펴보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서 형벌을 주시고 싶지 않다 하시면서
자기 아들은 죄가 없는 자기 아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시고 그것은 사랑이 괜찮다 이말 입니까?
다시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벌하자 하니까 안된다 하고
그러면 아들 예수에게 벌하자! 그건 좋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까?
물론 이렇게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한 부분을 내 놓는 것이다 라고....
그러면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든지....
그리스도가 와서 대신 한다고 하니까 문제다.
또 우리에게 벌을 안 내릴 수가 없다.
죄를 범했으니까 벌을 반드시 내려야 된다 라는.... 그렇게 공의롭다는 하나님이
죄를 범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시지도 않고
죄가 없는 예수님에게 벌을 내리시면서 괜찮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하자 하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안된다 라고 죄는 반드시 벌해야 한다 라고 하나님의 공의가 외쳤는데
그러면 예수님에게 벌을 내리면 되지 않느냐? 그러면 된다 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되느냐? 이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다.
죄인은 용서하고 의로운 사람을 벌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가 아닙니다.
죄인은 봐주고 의로운 사람을 심판하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왜 그런 논리가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오래도록 기독교 역사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논리에 맞지 않아서 비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공의와 사랑의 갈등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란 한분안에 사랑과 공의가 갈등을 느낀다는 말자체가 말이 안된다. 왜?
한 인격안에서 두개의 성격이 나오느냐? 인격은 하나이다.
한 분이 사랑과 공의가 다 있어야지 한 분안에 사랑과 공의가 따로 있는것 아니다.
하나님이 한쪽에서는 사랑하자 한쪽에서는 벌하자 라고 되어있지 않다.
한 마음이 이쪽 저쪽으로 생각할수는 있지만!
또 죄를 벌하지 않는것이 사랑이냐? 아닙니다.
죄를 벌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은 불의입니다. 불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의를 용납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진짜 사랑은 잘못하는 것을 못참고 두둘겨 패고 해서 뜯어고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렇죠?
잘못하는데도 봐주자 봐주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보고 너희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때 잘못하는것 용서해주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부모에게 공경하라는 말이 부모가 너 교회 좀 가지 말고 쉬어라 라고 하면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해서 쉬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말입니다.
잘못하고 있는 행동을 인정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잘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니까 그것은 나쁜 것이다.
부모가 잘못 판단할때는 그러면 안된다고 깨우쳐 주어야 한다.
잘못하는 사람의 일을 도와주는 것은 악을 조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 사람 망하라고 하는 미워하는 행동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몰아가야만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범할때 때리고 꾸짖고 벌하시고 해서 바로 잡는 것이 사랑이지
때리는 것이 사랑이 아닌 미움이 아니다. 공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공의냐?
바로잡아주고 싶은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것이 공의이지
보기 싫어서 그냥 때리고 말겠다라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공의는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다.
죄를 범한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꺼내 가지고 속 시원하다.
그것을 공의라 말하지 않고 공의는 잘못하고 있는 사람을 잘 하도록 만들어야만 드디어 공의가 됩니다.
잘못 한채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잘못한 사람 어떤 방법으로든지 바로잡아 주는 것을 공의라고 하지
바로 잡아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벌하는 것을 공의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사람들이 하는 공의이다. 왜? 바로잡을 능력이 없으니까 벌을 내리고 끝나죠!
말이야 교도관이라고 하지만 그런것이 아니다.
죄인을 감옥에 넣지 않더라고 어떻게 하든지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공의죠!
하나님의 공의는 그런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정리합시다.
하나님 안에 사랑과 공의의 속성이 있다고 치고 이 사랑과 공의의 속성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할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할수 없는 사랑이 있고
그것을 반드시 의롭게 만들어야할 공의성이 있고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절대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똑같이 나타납니다.
우리를 내버려두자. 벌주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도 아니고 공의도 아닙니다.
벌을 주어서 바로잡자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요 사랑이기 때문에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를 보내셨느냐?
우리에게 벌을 내리기가 무엇해서 예수님에게 벌을 내릴려고 보내신것이 아니고
우리를 교육하고 바로잡으려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자기 아들을 보내서 자기 아들이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대표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의를 이루어가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내가 따라가게 하는, 나도 똑같이 하는
그래서 그리스도와 나를 연결 시켜서 데리고 가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나를 끌고 함께 십자가의 길과 부활의 길을 걸어가신다. 너 그러면 안된다.
바뀌어야 한다. 내가 같이 해 줄테니 가자!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와 같은 죄인이 되시고
나와 같은 인간으로 오시고
나와 같은 상태에서 나를 대표해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 죽으시고 함께 부활하신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주제인 것처럼 보이는 1장 8,9절을 보겠습니다.
8절에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그것이 구원입니다.
복음의 내용이 그런것입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고 복음이지 너의 죄 다 용서하고 예수님이 대신 형벌 받았으니까 믿는다고만 하여라 그냥 데려가겠다라는 것이 아니다.
9절에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우리 주라고 말했다.
상전과 내가 교제를 나눈다는 말은 그분의 명령을 듣고 따르고 해야 교제가 되지
그분의 명령을 안 듣고 도망치고 거역하고 그러면 교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들과 주종관계를 이루면서 교제를 가능케 하시는 그런 하나님의 사역을 구원의 사역 또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는 앞에 1장부터 4장까지 길게 무슨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
십자가의 원리를 십자가의 능력과 길을 말하면서 이 십자가를 통해서 무엇을 설명하는가 하면 공동체를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 거기 보면 글로에의 집편으로 들어온 소식 때문에 무엇을 들었냐 하면 서로 다투죠.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나는 게바에게 속했다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분파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바울이 왜 그렇게 싸우느냐?
바울은 무어며 게바는 무어며 아볼로는 무어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만이다. 십자가의 길로써 모두가 한 공동체가 되야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바울도 아니고 베드로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했다. 라는 말을 한다.
십자가의 원리는, 복음은 지금 제가 설명드린 십자가와 부활의 원리가 조금더 지나가서 무엇에 까지 연결되느냐하면 십자가를 통해서 옛사람이 죽은 사람들끼리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교회’를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교회는 서로 싸우면 안된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 어떤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를 변화시킨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십자가의 원리에 달려 있는 것이지
인간이 잘 가르치고 잘 훈련시켜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죽어서 다시 살아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내가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일이 어디있느냐고 바울이 말한다. 그런 말이 나온다.
내가 언제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느냐?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은 일도 없고 아무것도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너와 함께 와서 너를 죽이고 너를 부활시키셨기 때문에 그분만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앞장 세워서 높이거나 분파를 만들지 말라.
그리고는 그 아래 5장에 가면 음행, 소송, 먹는 음식문제, 결혼문제, 가정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헌금, 또는 심지어 성찬식까지 쭉 나가면서
공동체안에 일어나는 많은 갈등들을 이야기 하면서
교회는 십자가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를 내세우거나
분파를 만들거나 많이 있다고 해서 자랑하거나 많이 먹거나 그러지 말고
다 똑같이 나누어 쓰고 서로 사랑해야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면
자랑할것이 없는자가 된다. 자랑할것이 없다. 왜? 자기를 버렸으니까!
자랑할것이 없고 서로가 사랑하는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 사랑의 공동체를 잘 이해하셔야 복음의 원리가 살아납니다.
교회의 생활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상적인 교회가 어느 정도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의 회의가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된 모습이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는데 교회 모아놓고 보니까
아니다! 자기 욕심 다 채우고 앉았더라 라고 하면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옛사람이 죽은 것이 아닙니다.
나는 누구 보기 싫어서 교회 못가겠다. 그것도 아니고.
나는 누구와도 인사하기 싫다. 가만히 내버려 두라. 예배만 보고 가겠다. 그것도 아니고.
옆에 교회는 되든 말든 내 교회만 잘 하겠다. 그것도 아니다.
사람들끼리 의견의 차이가 있어서 교파가 나누어지는 것 까지는 좋지만
자기 교파만 생각하고 다른 교파는 무시하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이상적인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
교회지도자들 중에서 상당히 문제가 많이 있다.
교회지도자들이 교회 안에 분파를 자꾸만 일으키고 교인들 자꾸만 갈라내고 싸움붙이고 계속해서 화해가 아니고 바울의 이런 설명이 아니고 나는 바울파다 나는 게바파다 라고 하면서 계속 교회안에 분파작용을 하는 지도자들은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가 궁금하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죠.
어느 정도 자아가 완전히 안 깨어지고 ‘가끔’ 고개를 쳐들 수는 있어도
그래서 말씀을 들을때마다 체크를 받을때 마다 다른 사람이 충고할때 마다
‘잘못했다’라고 하고 정상적인 길을 갈수 있어야 하고
조금씩 자아부정이 잘되고 자라가야 되지
점점 자아가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면 이혼하자는 이야기밖에 아니다.
그것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주로 율법과의 관계이니까 생략하고요.
에베소서 1장에 나오는 부분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대한 이야기가 1장 14절에 길게 에베소서의 주제가 등장합니다.
거기에 중간에 한곳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이 10절에 나오고요.
그다음에 1장 끝부분부터 시작해서 끝까지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했다 라는 말은
육에 속한 내가 새로운 존재로 살아난다는 의미를 갖고 있음과 동시에
그것은 어떤 의미가 또 따라 나오느냐 하면
그리스도가 부활한다는 말은
항상 그리스도가 왕위에 오른다는 말을 함께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대한 설명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따라 다닌다.
영적인 존재로 살아났다는 동시에 왕위에 오르셨다는 의미가 부활사건에 따라 다닙니다.
그 바람에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되느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나는 의미와 동시에
내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왕인 공동체’에 내가 백성으로 복종하게 되는 주종관계가 형성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자마자 ‘교회의 머리’로 군림하신다는 말이 에베소서에 굉장히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만물위에 있는 교회의 머리로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모든 것을 충만케 다스리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십니다.
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왕으로 하는 ‘교회’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십자가와 부활에 내가 동참한 자가 아니다 이말입니다.
4장 17절 이하는 읽어드렸으니까 생략하겠습니다.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에베소서의 교회론중에 주제를 이루면서 쭉 지나갑니다.
그리고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 등등 그 모든 부분이 이 공동체의 원리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발전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빌립보서 1장 5절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복음에서 교제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그다음에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복음의 사역이 단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해서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때 까지 연장되어 간다고 설명하고 있다.
9절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것을 분별하면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 보면 복음의 사건은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고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출발해서 드디어 이상적인 교회가 형성되면서
점점 점점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의의 열매를 맺고 자라가는 개개인과
그 개개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이 나타나야만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끝나고 복음의 마지막이 된다.
골로새서 1장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주제로 등장한다.
13절 "그가 (즉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 으니"에서
구원을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그리스도의 나라에 데려다 놓는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운 국가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디어 육이 없어진다 이거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데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시기를 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육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것이 없는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지금 쭉 설명하고 이것을 복음이라고 말했다.
복음의 핵심이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와 ‘세계’를 새로 만들어 가시는 이야기입니다.
이 그리스도와 밀착되어 있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와 밀착되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옛사람이 죽고 나야만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 되시고, 내가 하나님과 화목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28절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사람을 구원하고 모든 지혜로 각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한다는 말은 ‘통치’를 제대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다라는 말이 단순히 저지른 죄가 십자가의 피로 씻음 받고 구원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이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죄를 범하고 있는 내 ‘자아’가 즉 옛사람이 죽고
‘성령님’이 내안에 들어오시고 나를 지배하고 그의 지배를 받게 될 때
드디어 내 구원이 시작되고 그 지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서 끝까지 내가 온전하고 흠없는자로 자라가야만 내 구원이 완성 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교회의 여러가지 공동체 원리가 나오는데 생략하고요.
디모데 전후서는 목회에 대한 이야기이니까 생략합니다.
히브리서 1장 1절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면 죄를 정결케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복음의 ‘핵심’이 나온다.
그리스도의 ‘생애’가 나오는데 그리스도가 창조주 이시고
그다음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의 형상으로 나타나셔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통치의 개념이 같이 있다)
그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던 죄, 육에 속한자 옛사람을 십자가라는 방법을 통해서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해서 왕위에 앉으셨다.
그리스도가 왕위에 앉기 위해서는 백성이 있어야 왕위에 오르시죠.
백성은 하나도 없는데 혼자 보좌 갖다놓고 왕위에 오른다고 왕이 되는것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어떤 일을 하셔야 하느냐 하면 백성을 데려다 놓아야 한다.
거역하고 간 백성들을 불러다 놓아야 한다. 어떻게?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변화시켜서 데려다 놓아야 한다.
자기를 주로 받아들이게 해서 데려다 놓아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나서 드디어 위엄의 우편에 앉아서 그들을 다스리시게 된다 이말입니다.
부활사건을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주제가 쭉 길게 히브리서에서는 십자가의 사건 속죄의 사건이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읽으면 제사법을 이야기 하고있기 때문에 단순히 죄를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서 죄가 없어지는 그런 설명같아 보이지만 그래도 잘 이해 해보세요.
히브리서에야 말로 구약성경에 짐승을 바쳐서 죄를 사함받는 이야기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분명이 제물이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고
십자가 사건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이 쭉 진행되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그리스도와 관계가 형성된다라고 말하고 있고
이 믿음이란 설명에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에 대한 이야기도 같이 나옵니다.
믿음의 예들을 들면서 믿음의 조상들 이 무엇을 어떻게 믿었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만들때 까지 일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난을 주십니다.
여러가지 주제가 나오지만 야고보서의 주제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방법으로 내가 온전하고 구비한 자로 성숙되어져 가는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이 설명되어 나옵니다.
그 안에 나오는 내용이 전부 믿음입니다. 즉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이란 분을 신뢰하고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해야 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야고보서입니다.
믿음에 대한 것을 오늘 다 설명하지 못하겠으니까 지나갑시다.
수제자인 베드로는 무어라고 말하는지 봅시다.
베드로전서 1장 3절 "찬송하리로 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거기에 ‘부활’로 말미암아 ‘중생’시켰다는 말이 분명히 나옵니다.
이 베드로서에는 아주 뚜렷하게 나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라고만 말하지 않고 부활로 말미암아 왜? 십자가는 죽음의 장면이니까!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중생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처형하고 새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 부활과 함께 다시 태어나면서 중생이 된다.
드디어 산 소망이 있게 된다.
그렇게 태어난 인간에게 하나님은 고난을 주신다는 것이 베드로 전서의 주제입니다.
고난이 쭉 나옵니다.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느냐? 성화를 배웁니다.
4장 1절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그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거기에 보면 정욕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된다 라고 되어있다.
그것이 고난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고난의 절정은 십자가입니다.
순교같은 것도 다 포함하고 있고. 야고보서의 고난과 역시 연결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느냐?
자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고난을 주시느냐?
십자가의 원리를 계속 배워가는 것이다.
고난 문제는 상당히 많은 논의가 필요 합니다 마는....부활에 대한 것을 3장 20절 부터 봅시다.
1장에서 설명한 비슷한 설명이 3장 1절에 또 나옵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노아의 가족이 홍수를 통해서 구원받았다라고 하고 있고요
21절에 다시 설명하기를 물은 홍수는 무엇을 말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노아 홍수 사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의미인 세례의 의미를 갖고 있다.
홍수 속에서 방주가 홍수에 비를 흠뻑 맞으면서 물위에 떠다녔다.
그것은 물속에서 옛 사람이 잠겨 죽고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애굽 사람이 출애굽할 때 홍해 바다 가운데로 지났다.
사실 세례는 물속에 쑥 들어갔다 나와야 되는데 약식으로도 많이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례를 다 주어야 하는데 한 사람씩 주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그냥 바다를 갈라놓고 가운데로 지나가면서 세례가 된다.
배를 타고서도 비를 맞으면서도 세례를 받았다.
꼭 세례의 의미를 풀장이 없으면 비오는 날 우산받고 밖에 나갔다 들어오게 해도 세례를 받은 것이다.
세례의 의미는 분명해야 합니다. 세례의 의미는 사람이 물속에 잠긴다. 그리고 새사람이 된다.
그것은 여기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느냐하면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부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부활을 강조하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이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는 굉장히 헤메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사실이 분명할 때 비로소 ‘자아’가 없어지더라 이거다.
다시 사는 그 부활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왕으로 등장할 때
드디어 그분을 받아들이게 되고 드디어 그 부활의 영역에 동참하게 되니까
현재 세상에서의 현재적인 자아의 욕심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기잡이도 다 필요 없고 장관이고 뭐고 아무것도 아니다.
바울처럼 다 배설물과 같다 이거다. 다 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 시시하다 이거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그 영광스런 영역 그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왕위’를 보니까 로마 나라의 왕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거다.
이 세상나라의 왕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왕권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의 왕권에 비교하니까 너무나 초라하고 아무것도 아니더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업을 내가 누리려고 하니까 영생을 누리려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조금 많이 받고 백배를 받고 그것도 아무것도 아니더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버린자는 백배를 받고라는 말은 처음에 들었을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나중에는 그것 필요 없습니다. 앞에 갖다가 주어도 안 가졌다.
목숨도 쉽게 내놓았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가던 베드로가 감옥소에 들어가서 내일 죽을 것인데도 오늘 잠을 잔다. 베드로가 놀랍게 변화되었습니다.
그 베드로는 복음서에 나타나는 베드로와 너무너무 다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그 잠을 쿨쿨 자는 베드로를 상상해 보세요.
복음서의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변화시켰느냐?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야 말로 자기에게 너무나 놀라운 메시지였다.
그것을 못 믿었으니까 계속 다른 생각을 하고 따라 다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부활이야 말로 구원의 길이다 라고 설명하고 부활로 말미암아 나는 중생했고 너희도 중생했다라고 설명한다.
요한일서 1장 1절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예수님이다.) 나타나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바 된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요한일서의 주제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또는 사랑의 사귐입니다.
그 아래 계속해서 너희들이 빛 가운데 있느냐?
어두움 가운데 있느냐? 라고 한다.
너희들이 빛 가운데 있다는 증거가 무엇이냐?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된다 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제대로 받는 즉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는 자가 드디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
그럼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던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과의 부자(父子) 관계가 형성되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 교제회복은 계명을 지키는 것 하고 연결되어 있다 이말입니다.
계명은 지키지 않으면서 말씀을 안 들으면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려는 자세로 기도를 해야 된다.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지금 이러이러한 상황에 있는데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 중에 잘못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죠?
그래서 하나님 말씀 들으면서 아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그것이 바른 길입니까? 그것이 잘못되었습니까? 고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다 놓고는
하나님 당신은 나의 왕이 십니다 라고 하고는
계속해서 명령하고 지시하고 하죠!
하나님 오늘까지 뭐 해 놓으십시요. 내일(모레)까지 뭐 해 놓으십시오.
하나님이 들어주시겠다고 말할 때까지 나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교제가 아닙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요한일서의 사상과는 전혀 안 맞죠!
하나님과의 교제가 친구도 아니고 내 부하도 아니고 내 비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나의 왕이신 하나님에게 어느 안전에 감히 콩나와라 팥나와라 하느냐 이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 복종하는 자세가 들어가지 않으면 교제는 거짓말입니다.
그런 기도하면 하나님이 앞에 앉아 계시지도 않고, 안 계신다. 자기 혼자 떠들지...
멀리서 보고 실컷 떠들어라 고함을 치든지 목을 따든지 알아서 하라 라고 하신다.
왜 내가 너에게 복종하느냐? 왜 내가 너의 말 듣고 사느냐? 하신다.
너는 아직도 옛사람이 죽지 않았구나! 너 옛사람이 죽고 그 다음에 만나자고 하신다.
너는 아직도 십자가가 의미가 없구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라 라고 하신다.
계시록 1장 4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와 보좌 앞에 일곱 영과(여기 왕권이 설명되어 있다.)그 앞에 일곱 영과 또 참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부활) 그리고 땅에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왕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거기 하나님의 왕권이 있고 성령님의 사역이 있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나타난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으로 우리를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켰다 라는 말은
'죄를 씻어냈다'가 아니고
죄에서 해방했다 라는 말은
육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옛사람에게 세상풍속에 사로잡혀있는 나를 이 세대에서 건져내셨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건져내어서 하나님의 나라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좀 이상한 표현이죠? 누가복음에 보면 '나라'를 준다는 말도 나오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다.
물론 '나라'라는 말을 왕이라고 표현할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나라'와 ‘제사장’ 삼으신 그에게서 왕의 개념과 제사장의 개념 두 가지가 따라 다닙니다.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말씀과 그것이 인용된 베드로전서 1장에 나온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말이 나온다.
그 왕권과 제사적 의미가 같이 따라 다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선지자직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리스도의 이 3직은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일치된 사역이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시려면 제사를 거쳐서 가능합니다.
즉 죄인을 정결케 하셔서 자기에게 복종케 하셔야만 자기가 왕이 되신다.
또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할 때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에게 다시 내 생애가 드려지는 제사적인 절차를 거쳐서 그분이 왕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기 때문에 그의 왕권에 대한 이야기와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는 또는 우리가 '나라와 제사장'이 된다는 말은 항상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결케 된다는 말과 하나님의 왕권에 복종해야 된다는 말은
또는 하나님의 통치권을 이 세상에서 행사해야 된다는 말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다.
거기에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의미가 동시에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제사의 길과
부활이라고 하는 왕권의 길이 둘이 늘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시려고 죄를 정결케 하셨다.
옛사람을 죽이셨다 이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받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전체적으로 내려가다가 보면 이 교회를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서 세우신 교회를 정결케 해가기 위해서 계속해서 시련의 과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승리하는 교회로 투쟁하게 하시고 마침내 완성된 교회가 나타납니다.
계시록은 교회가 시련을 거치면서 투쟁해 가면서 마침내 승리하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그리스도의 왕권이라고 할까요? 부활의 모습이 상당히 강하게 나타난다.
전투하고 승리해 가야 합니다. 구원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거다.
교회가 아직도 불완전한 상태에서 자라가야 된다.
온전하게! 마침내 21장에 가면 교회가 아름답게 완성됩니다.
21장 봅시다.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완성된 교회의 모습이 신랑 이신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이말입니다.
3절에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진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즉 구원 사역을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신 하나님이 드디어 완성하신다. 즉 구원은 이때 가서 완성됩니다.)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들은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제 1 주제이다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앞에서도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라는 말은 임마누엘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우리가 살폈던 이야기 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가?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져 내어서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재 해 계시려고
그래서 그들과의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시려고
이상적인 교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려고 구속사역을 시작하셨고
드디어 계시록에 와서 그 구속사역이 완성되어서
이상적인 교회가 완성되자 하나님이 그 가운데 임재해 계신다.
그들에게 안식과 영광을 주신다.
9절에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로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열두지파의 이름이더라 동편에 세문, 북편에 세문, 남편에 세문, 서편에 세문이니 그 성의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열두사도의 열두이름이 있더라"
이 새예루살렘의 모습은 완성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자꾸만 우리가 살 집이라고 성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엉뚱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 있는 말씀은 우리가 살 곳이라고 하지 않고 어린양의 아내 신부의 모습이라고 분명히 앞에 9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신부의 모습이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크고 높은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울타리가 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목자와 양의 비유에서 ‘울타리’가 나오죠?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께서 울타리를 쳐두고 자기 백성을 그 안에 보호하고 계시고 거기에 열두지파 열두사도의 문들이 있다.
기초석이 있고 그 성은 네모반듯하고 장광이 같고 깨끗하고 휘황찬란하고 영광스럽게 되어있다.
그 성 안에는 성전이 없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이 그 영광을 가지고 이 성안에서 산다라고 되어있는데 모든 구원받은 백성들이 이 하나님의 나라 교회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모시고 그 영광을 같이 나누고 사는모습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 교회에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축복이
모든 성도에게 모든 교회지체 멤버들에게 다 물처럼 강물처럼 다 흘러가서
모든 생명체가 모든 구원받은 성도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소생해서 살아나는
그러한 에덴동산의 회복된 모습처럼 영광스런 교회의 모습을 여기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 형성되어야만 구원이 완성됩니다.
그때까지 십자가의 길이 계속해서 있고 부활의 길이 계속해서 있고 그리스도의 왕권이 계속해서 집행되어야 한다.
이 시간에 제가 말씀 드렸던 것은 지난시간에 이어서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부활의 영의 차원에 들어간 것 하고
왕위에 오르신 것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구원받은 자에게 실행되는 것하고
교회가 형성되는 부분,
이교회가 완전하게 교회가 될 때까지 개개인이 완성되어져야 하고
그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은 지속적이 되고
그때 가야 완성이 되고 그래서 우리는 복음의 사역을 거기까지 계속해서
복음의 영역으로 확대해서 집행해 가야한다.
복음의 영역이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말입니다.
부활과, 승천과, 왕권에서, 계속해서 공동체가 완성될 때까지 복음의 사역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훨씬 더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
복음을 전할 때도 여기까지 폭넓게 설명해야 되지 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구원받았다.
그다음에 상급을 받으려면 열심히 하고 안 받으려면 그것만 해도 좋다라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가 이렇게 초라하고....아름다워야 하는데....
이 21장 22장처럼 호화찬란해야 되는데 교회라는 것이 참 혼란하고 오면 노출하기가 거북하고 인사하기가 거북하고 싸우고 이런 교회가 어떻게 영광스런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옛사람 ‘자아’가 죽어야 되는길 하고
하나님이 왕으로 나에게 교회로 군림하는 이 부분이 있어야 되는데 이 두가지가 다 잘 안된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자아가 죽지 않으면 하나님이 왕으로 군림할수 없으니까 마찬가지입니다 .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지 않는 나, 나의 모습 ,교회의 모습,
너무나 안타까운 아직도 복음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은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복된 소식이 무엇이냐? 무엇이 복된 소식이냐?
이 영광스런 모습을 보아야 복되지 않겠습니까?
이 영광스런 ‘그리스도의 왕권’과 ‘부활의 그 영광’을 보아야 복된 소식인데 겨우 내 마음이 나 구원 받았네 라고 하니까 지옥에 안가겠지!
나 형벌 안 받겠지! 어떻게 보면 속임수 비슷한....그래서 세상에서 병도 고치고 잘 살아가고 위로받고 그리고 교회 가서 얼굴 아는 사람 좀 만나서 좀 친교도 하고 사교도 좀 하고 하는 그것이 복이냐?
그것이 복이 아니다.
그렇다는 교회가 왜 고난을 받으며 사도행전의 교회가, 계시록의 교회가 고난의 길을 걷습니까?
왜 하나님이 고난으로 우리를 온전케 하시려고 하느냐 이겁니다.
거기에는 상당히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을 계속해서 십자가에 길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항상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온전한 자로 키워가야만 이상적인 교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욕망을, 욕심을, 시기하고, 서로 다투고 하는 부분을 최대한으로 억제하고
성도들이 갖는 그 꿈들을 없애 버리는 것이
우리의 메시지의 핵심이 되어야 하고 교회의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반대로 조장하고 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욕심꾸러기가 더 많이 나온다.
교회서 만일 욕심을 계속해서 비판하면 욕심꾸러기가 교회에 안 오려고 하겠죠?
그렇지 않으면 욕심을 버리고 오거나!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서로 사이좋게 ‘이상적인 교회’를 이루어야 하는데 안 그런다.
조금 좋아 보이는 교회가 구제도 잘하고 전도지도 잘 보내고 하는 교회가 자기들은 자기들대로 더 잘살고 더 큰차 몰고 다니고 더 큰집에 살면서 나누어 준다.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더 잘살고 많이 가져야 한다라는 자기 욕심을 키워가면서 동시에 교회 사업도 키워가는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또 따라온다 이말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교회, 즉 없는 교회들은 궁색하고 부럽고 그래서 큰 교회를 서로 하고 싶고 교회성장이 우리의 목적이고 교회성장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교회의 모습입니까?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을 지어놓고 다른 교회보다 더 높은 종탑을 세워놓고 더 멋있는 성가대를 가지고 있고 더 멋있는 강대상을 갖다놓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성장이냐?
그렇게 해서 모여드는 교인들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느냐?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어떻게 보면 예배당도 필요하고 성가대도 필요하지만 그래도 잘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의 육적인 욕심이 조장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난을 주시고 초라한 교회당을 주시는가?
그런 것 포기하게 하기위해서입니다.
왜 예수님은 머리둘 곳이 없이 사셨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내 대신 하시면 끝나는 것입니까?
그대신 나는 영광을 누리고? 그런것이 아니다.
언제 예수님이 ‘내 대신 너 영광 누리라’고 하셨습니까?
‘내 십자가를 지고 내게서 배우라’고 하셨다.
성경 어디에 고난이 아닌 영광의 길이 어디에 제시되어 있습니까?
계속해서 고난의 길을 이야기 합니다.
신약의 길이 영광의 길이 잘 안보이니까 구약을 자꾸 뒤적뒤적 하지요?
구약에 가야 복받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 구약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한번도 부(富)를 칭찬하거나 명예를 칭찬한 일이 없다.
한번도 그렇게 하신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이 철저하게 심하게 말하면 아주 염세주의적인 것 같고 심하게 말하면 아주 교행주의 같이 보일만큼 예수님이 철저하게 그런것을 부정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부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러셨느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
그 자체가 나쁜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마음의 욕심이 충동질 되고 자꾸 조장되기 때문에 예수님이 억제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어떻게 바뀌었느냐?
부활의 영광과 그 하늘나라의 기업이 내게 엄청난 큰것으로 부각되지 않으면 이세상 것은 버리지 않습니다.
초라하게 살고 싶지 않죠! 미국 사람들이 왜 초라하게 입고 다니죠?
아무 옷이나 입고 아무데나 굴러다닌다. 너무 많이 있으니까 부럽지 않아서 이다.
가난한 한국사람 넥타이 매고 카메라 들고 빼입고 다녀야만 좀 꿀리지 않을것 같죠?
없는 사람이 자꾸만 외식하죠?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그 그리스도의 부활의 왕권의 영광을 진짜로 누리고 맛보고 있다면 교회가 그런 외적인 치장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거 시시해 보이니까요!
그런데 진정한 것(보배로운 것) 못가진 사람이 이거라도 해야만 남 보기에 무어라도 있어 보이고 그래서 자꾸만 외적인 것을 가꾼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꾸만 그것을 정죄하시고 깎아 내리신 것이다. 아니다 이거다.
영광을 제대로 받아야 된다라고....
야고보서 2장 1절에 이런 말이 나온다.
“영광의 주를 너희들이 알고 있는데 왜 사람을 외모로 보느냐?” 라고 했다.
아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면 옷 잘 입고 있는 것이 무엇이 대단하냐?
그 영광의 주를 믿지 않고 있으니까 교회에서 옷만 잘 입은 사람이 와도 자가용을 가진 사람이 와도 집사 세워야 되고 장로 세워야 되고 잘해야 되죠!
왜? 우리교회가 없으니까 가난하니까!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디 가셨는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신뢰가, 믿음이, 아는 것이 없으니까 그런 미혹에 빠진다.
그것이 야고보서에 나오는 주제죠?
야고보서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느냐?
‘외모’를 보지 않고 ‘속’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적인 풍성함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움이 우리에게 가득찰 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윤종하 총무강의)
세번째 시간
핵심에 관한 부분은 거의 설명을 드렸는데요 다시조금 복습을 하면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고 다른 부분을 설명하겠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되어 있습니다.
자칫하면 복음이 내 중심으로 되기 쉬운데 제가 그것을 중심적 객관적 구원이라는 학자의 설명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복음이라고 말할 때는 1차적으로 ‘나’라는 개인의 구원여부를 제켜놓고 하나님이
‘자기 나라’를 어떻게 세워 가실 것인가.?
그 ‘자기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창세전에 설계하시고 그것을 아담때부터 설명하시고 약속하셨던 그 아들이 바로 복음이라고 로마서 1장에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아들이 자기 백성을 재창조(새창조)해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국민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아들이 육신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 오시고 그리고 아버지께 순종하시면서 사신 그 순종의 극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이고 그 죽으심에서 바로 ‘자아’ ‘자기의 뜻’을 내 놓은 것이다.
그것이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 할수 있거든 내게서 옮기시옵소서”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죠?
그러나 그것을 고백할 때, 제 생각은 저는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십자가 지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러나 “내 소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은 내 소원대로 십자가를 지나가게 마옵시고 아버지의 소원대로 십자가를 지게 해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의 소원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이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아버지의 뜻을 확실히 알고 계셨고 바로 앞에 까지 오셨다.
십자가를 질것을 여러번 여러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드디어 십자가를 지실 바로 전날밤에 그 십자가 바로 앞에까지 오셔서 너무 그것이 자기에게 힘드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자기가 기꺼이 순종하기 위한 자기 복종의 기도시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억지로 피하거나 기꺼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하겠는데 마음이 너무나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였다.
그래서 기도하시면서 너희들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 라는 말은 ‘시험에 들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욕심대로 곁길로 갈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 내 마음은 지금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만큼 이 십자가의 길이 힘듭니다. 그러나 내 소원대로 하게 내버려 두시지 마시고 이 마지막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5장에 있는 말씀 봅시다.
7절 "그는 육체에 계실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십자가를 지는 쪽으로 응답되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십자가를 지게 해달라는 기도였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리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이 ‘순종’하셨다.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드디어 온전하게 되었다 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드디어 메시야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순종을 안 하셨더라면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자격이 없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이 목숨까지 내놓는 십자가까지 지는 그 마지막 순종까지도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자기의 생각을 포기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그날밤에 결심하였는데
그 결심을 할때 까지 너무너무 힘들어서 같은 기도를 세번 반복하시면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자기와의 투쟁이 너무 힘드셔서 그러나 결국 ‘자아’를 쳐서 복종시키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나중에 십자가에 매어달린 일은 거기에 비하면 아무일도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기를 자기와의 싸움에서 피땀을 흘리는 투쟁을 하시고 자기를 부정하고 아버지께 복종했다.
그것이 바로 ‘육에 속한 자아가 죽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할 때 드디어 구원을 받는다 이말입니다.
앞에 돌아가서 5장 1절 봅시다.
"대제사장 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수 있는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라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또한 같이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것이 마땅하니라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또한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되 너는 내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이와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라고 구절이 계속 나오고 끝에 가서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자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 되셨다.
여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그렇게 간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긴 설명이 요하고 연구가 필요하고 그렇습니다.
특별히 그 아래
11절에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라고 하면서 그 아래 계속해서 해석이 나온 것인지 아닌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다른 이야기를 하시다가 뒤에 6장 끝부터 다시 멜기세덱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는데요.
그 11절에서 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라는 말은 생략 한것인지 아니면 그 6장 끝에서부터 나오는 내용인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멜기세덱에 대한 설명을 굉장히 어려운 신비가 깔려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요.
그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7장에 가면 멜기세덱을 그리스도와 비슷한 분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라고 그리스도와 유사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분인지 아니면 모형인지 하여튼 그런 상태인데요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말과 살렘왕이라는 말이 둘이 겹쳐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7장 2절에 설명한대로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라”
이 '멜키'라는 말은 나의 왕이라는 뜻이다.
'세덱'이라는 말은 ‘의’라는 말입니다.
나의 왕은 의다 라는 또는 의로운 왕이라는 뜻이다.
멜기세덱은 의로운 왕이신데 이 의로운 왕이 제사장에 연결된 그런 분으로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가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하는 분으로 등장하면서 멕기세덱의 반차를 좇는다고 나온다. 그런데 7장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레위지파’에서 태어나지 않고
왕지파인 ‘유다지파’에서 태어나셨다 라고해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냥 대제사장 계통인 레위지파에서 태어나시지 않고
왕지파인 유다지파에서 태어났다라고 하면서
‘대제사장직’이 ‘왕권’과 관계있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을 주의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름 자체는 ‘의의 왕’이라고 되어있기 때문에 어떤 왕이냐?
의를 행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시고
또 그 의를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그런 ‘의의 왕’이시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그 예수그리스도의 생애, 순종하셨던 생애 그리고 그 순종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는 그 순종의 삶 자체가 바로 의(義)의 제사장이 될 수 있다.
그분이 죽기까지 복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다시 부활시키실 때 ‘왕’으로 부활시키셔서 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왕권’을 행사하게 되신다.
그것은 ‘순종’과 관계가 있다.
순종하셨기 때문에 왕위에 올리시고 다른 모든 순종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다 라는 말은 순종의 개념의 상대편은 왕이시다.
순종을 받는 복종을 받는 왕이 되신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하심으로 왕위에 오르셨고
우리는 그 분에게 순종하는, 그를 왕으로 모셔 들이는,
통치를 받는 것이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어서
우리의 제사장이시면서 바로 왕이 되시는데
그의 제사장직 즉 십자가 사건은 죄의 문제를 청산하기 위한 제사장의 직인데
그 죄는 무엇인가? 불순종함이 죄이다.
불순종하고 자기 고집대로 자기생각대로 사는 그 자아를 말한다.
그 자아가 순종하는 자아로 바뀔 때 그리스도의 왕권이 회복된다.
하나님의 주권 왕권이 ‘회복’되는 것을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고 말하고 천국이 드디어 그리스도를 통해서 군림한다.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고 우리는 그에게 ‘복종’함으로 인해서 그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 복음 또는 구속사건은 바로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 핵심이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내 고집대로 살던 것을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자기를 버리고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피땀을 흘리면서 때로는 투쟁해야 될 만한 자기와의 투쟁을 해야 할 만한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처럼 기도하지 않고 거꾸로 한다.
피땀을 흘리면서 누구와 싸우느냐? 자기와 싸우지 않고 하나님과 싸운다.
그것은 굉장히 거역하는 행위이고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그런 반역의 행위이다.
그런 기도를 교인들에게 장려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 기도가 강화되는 만큼 자아가 강화됩니다 .
그런 기도를 훈련시키는 만큼 자아가 강화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철야기도 하면 하나님도 할 수 없이 나한테 항복하신다.
그래서 기도를 보좌를 움직인다. 그런 표현들을 쓰죠?
물론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에 보좌가 들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를 내리시겠다고 결정했다가 우리가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면 하나님이 거두시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변경시킬 수 있고 하나님의 보좌가 흔들린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어떤 경우에냐?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고백하고 자기를 부정할 때,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하게 순종의 자세로 돌아올 때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강하게 밀어 붙이면 하나님도 기도에는 꼼짝 못하고 복종하더라 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과 하나님의 주권 왕권의 개념이 이미 오래 전부터 특별히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주제가 하나님의 주권인데 그것을 우리가 들어 왔지만 도대체 이것은 천장에 붙여둔 무엇인지 그 수없이 말을 하면서도 그 주권을 따르려는 사람이 없는지 이유를 알수 없다.
또 요즘 우리가 LORDSHIP이라는 말을 학생단체를 통해서 들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LORDSHIP이 무엇이냐?
마치 성령 운동에서 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을 ‘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처럼 내가 ‘LORDSHIP’을 받으면 ‘내가 주인노릇’을 한다고 착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제까지 자아가 죽어야 된다 라고 말했을 때 오해가 조금 있는 것 같아서 보충설명을 합니다.
자아라는 ‘나’ 라는 것이 죄의 근원이다.
내가 거역하고 내가 순종하는 것이니까 내가 죄의 근원인데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상태를 ‘육적인 자아’라고 말했다.
그 ‘육적인 자아’가 죽어야 된다 라는 말은 자아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고집대로 하던 그 자아가 죽는 것 이니까 이제는 어떻게 되느냐?
이제는 성령님에게 따르겠습니다.
예수님에게 복종하겠습니다 라고 자기를 승복시키는 것을 ‘자아의 죽음’이라고 말하고 승복된 ‘순종하는 새로운 자아’가 거기에 있다.
자아가 죽는 것은 아니다.
자아는 있는데 자기 마음대로 하던 육적인 자아가 죽고 이제는 성령님을 따르는 영적인 자아로 바뀌는 것이지 ‘나‘라는 인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믿기 전이나 후나 나는 있는데 때로는 성격도 바뀌지 않습니다.
단 그 성격이 내 욕심대로 쓰이지는 성격이었는데 이제는 성령님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복종하는 그런 성격으로 사용만 바뀝니다.
주인만 바뀝니다.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중생이라고 영에 속한 자가 된다 라고 한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하고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예비하시고 자기 아들을 약속대로 보내시고, 그 약속대로 오셔서 실제로 우리와 같은 육으로 오셔서 그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철저하게 복종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영으로 부활하시고 살아계실 때도 예수님이 성령의 지배를 잘 받으셨지만 완전히 부활하셔서 새로운 세계를 여시고 그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기만 하면 그 왕권 하에서 그 나라에서 오는 세상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며 살 수 있다 라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내가 어떻게 그 혜택을 누리느냐?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순종해야 된다 라고만 말씀드렸는데 그러면 그것이 가능하냐? 가능하냐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또 실제로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혀야 한다 라고 했기 때문에 그럼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사실은 2000천년에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대표로 또는 대신으로 더 정확한 표현은 대표로 십자가에 혼자만 못 박히셨다.
그래서 대속이라는 말을 쓴다.
나는 사실 십자가에 못 박힌 일이 없다.
나는 가만히 있고 예수 그리스도 혼자 2000년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예수님 혼자 이 객관적이고 중심적인 구원사건에서는 그리스도 혼자서만 우리의 대표자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그 객관적인 구속사건을 나에게 연결 시켜질 때 나도 혜택을 누리지만
나도 함께 죽고 부활해야 되는데
그것은 자아의 주인이 바뀌는, 자기를 부정하는 행위를 곧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설명을 한다.
실제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아니고,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느냐면
이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된다라는 말이 요한복음 1장 12절에 한번 나오고요
그리고는 나머지 많은 구절에 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아들을 믿는자는 또는 그 이름을 믿는자는, 때로는 하나님을 믿는자는 이란 표현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러면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냐?
믿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야 한다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저 당신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라고 인정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정’은 믿기 위한 전초작업이다.
믿기 위한 하나의 전제입니다.
전도이론에서는 이것을 ‘사전전도(PRE-EVANGELISM)’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전전도’를 잘 인정하지 않는데 ‘사전전도’를 잘 배우셔야 됩니다.
복음을 충분히 설명 듣지 않고는 절대로 자기 목숨을 내놓지 않습니다.
왜 내가 내 고집을 버려야 되느냐? 왜 내가 내 욕심을 버려야 되느냐?
그럼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느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 내가 저분에게 복종해야 되느냐? 저분이 누구냐?
다시 산다. 다시 사는 것이 무엇이냐? 현세에서 그냥 살면 무엇이 나쁘냐?
그렇게 회의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현세와 내세가 무엇이 다르며 지금 내가 누리는 즐거움과 행복하고 부활의 영역에서 누리는 행복하고 어떤 차이가 있느냐?
또 그분이 누구냐? 왜 내가 그분에게 복종해야 되느냐?
또 나는 내 욕심을 과연 버려야 되느냐?
그런 많은 문제는 그렇게 하루 이틀에 처리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사전’에 상당히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
베드로가 오랜 세월이 걸려서 힘들었고 다른 사람 아니고 아주 훌륭한 예수님에게 3년 반동안 잘 안되더라 이말입니다.
그 다음에 3년 반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이니까 덮어두더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40일 동안 교육을 시켰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에서는 베드로가 전도할 때는 하루만에 3000명이 개종했다.
그러면 예수님은 베드로만큼 전도함이 모자라는 것 같죠?
우리는 전도를 베드로처럼 아주 쉽게 하려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글쎄요?
베드로의 설명이 충분히 그들에게 어필 했던것 같아 보이는데요, 한시간만에 설교를 다 한것인지 또 두고두고 했는지도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바울사도가 다른 곳에서 부활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 또 사람들이 와서 질문하고 이야기하다‘ 다음날도 오너라’ 다음날도 오너라라고 해서 두달 석달 삼년 이렇게 오래 바울이 가르친 것을 보면 사실 이 부활의 도리를 깨닫는데 그렇게 한시간만에 끝날일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사도행전 2장에서 그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라고 했지만 이것이 진짜 하루만에 된 일인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은 우리는 너무쉽게 이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상당히 ‘사전에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더라도 설령 하루라고 치더라도 2~3천명은 ‘사전에 교육’이 많이 되어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도 믿고 있고 메시야가 오실것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고 이들은 성경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저 멀리 살면서도 아주 먼 나라에 살면서 예루살렘에 오순절 지키기 위해서 올 만큼 열심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만 그들에게 궁금할 것은 메시야가 언제 오느냐?
누구냐? 이미 오셨던 예수님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는데 베드로라 자세히 설명했을 때,
아!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죽인 것이 아니냐?
그래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할꼬? 라고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들은 ‘사전전도’가 이미 충분히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전혀 기독교를 모르는 생판인 사람에게 하루저녁 부흥집회 2~3시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한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거의 사기 치는 것 비슷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런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다 이말입니다.
가끔 그런 말 하죠?
뭐 친구가 오라고 해서 따라갔더니 다 복음을 전한 후 에 그리스도를 영접하라라고 하는데 자기는 아직도 불확실해서 안하려고 하는데 자꾸만 영접만 하라 영접만 하라라니까 데려온 사람 체면을 봐서 자기가 영접하겠다 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자기들끼리 이야기 하는것 들으니 내가 이렇게 하니까 영접 하더라라고 하는것 들으니까 기분이 나쁘더라 이거다.
나는 자기 그냥 따라와서 자기 비위 맞추고 이용당한 것 밖에 더 되느냐?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 말 들었죠?
또 어떤 사람은 초청을 응해서 상담받고 영접하기로 다 결정하고 당신은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집에 들어가서 기분이 좋았는데 그 다음 언제 초청집회가 있었는데 자기 친구를 데리고 갔다.
메시지를 듣는데 어? 이상하게 메시지를 들으니까 내가 지난번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했는데 아니더라 이거다.
메시지를 들으니까 지난번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새로 자기가 초청에 응해가지고 또 상담받고 그리스도를 새로 영접했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한번 쯤은 그럴수 있다. 그런데 그다음에 또 초청집회에 갔더니 또 아닌것이다.
두 번 다 아닌 것이었다.
그래서 또 세 번 째 초청에 응해가야 하는데 그러고 나니까 다 아닌 것 같아 보이죠!
회의에 빠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구원이냐 라고!
그런 회의를 갖는 사람들이있다.
왜 그러느냐? 복음이라는 것은 충분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걸 그렇게 싸구려로 간단히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구원하시려면 복음을 전혀 들을 줄도 모르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간난아이도 구원하실 수 있으니까 뭐 구원을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니까 그렇게 말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게 말하면 아무 이의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영접한다 어떻게 한다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 주인을 바꾼다.
적어도 내가 나를 지배하던 내 삶을 포기한다라는 말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마 국민학생은 좀 쉬울것이다. 아직 자아가 강하지 않으니까.
자기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하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자기 주관이 별로 없었으니까 뭐 주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다.
뭐 예수님이 우리 아버지보다 좋을 수도 있고 하니까!
그러나 이미 자기 삶이 어느정도 살아져서 자아가 형성된 사람은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죽기 전에 영접합니다 라는 그런말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사전전도’가 굉장히 중요하고 상당히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싸구려로 전하시지 말고 조급한 마음 갖지 마시고 충실히 전해야 됩니다.
그런데 전도를 열심히 하는 분들 그런 이야기 하죠?
지금 당장 이 사람이 구원을 못 받아서 조금 후에 죽으면 어떻게 하느냐?
오늘 저녁에 이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 라고 한다.
뭐 하나님은 그 사람 구원하기로 계획했다가 힘이 모자라서 구원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는데 이때까지 그 사람을 전도할 기회도 제대로 못 만드시고 우물쭈물 하다가 시간이 다되었는데 죽을 날은 내일이 되었고 그렇게 불러 가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
아니 다른 것은 기도하면 보좌를 흔든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자기 그런 계획하나 바꾸실 수 없나요?
또 그렇게 계획되어 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구원하시려면 얼마든지 그에게 충분히 설명할 기회를 만들수 있다.
뭐 그렇게 하나님이 급하십니까?
물론 다 이것을 다 설명 듣고 다 제대로 믿어야만 된다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것이 성경에 많이 나오기 때문에 그런 방법을 취하도록 노력해야 되죠!
물론 나에게 시간에 1분밖에 없다.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났다.
1분만에 설명하고 지나가야 되겠다 라면 급행열차처럼 묶어서 설명하수 있다.
이 사람이 이해하던 말던 일단 씨를 뿌릴 수 있다.
요한복음 4장에도 다른 사람이 씨를 심고 다른 사람이 물을 주고 수확은 다른 사람이 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내가 전도해서 금방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미 다른 사람에 의해서 ‘사전전도’가 되어 있는 사람일 경우가 많다.
또 내가 설령 이렇게 해서 영접했다 하더라도 너무 졸속하게 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앞으로 양육 받으면서 다시 확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나오면서 계속 양육 받도록 해야 된다.
그것을 너무 우리가 조급하게 꼭 내가 이 사람을 영접시켜야지 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충분히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그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이 그리스도에 대한 사전 설명을 충분히 들은 후에 그 다음에 내가 그 사람이 자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셔 들이는 결정을 하려고 할 때 그 모신다는 말이 무엇이냐?
그것을 믿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믿는다 라는 말은 그 분을 내 안에 모셔 들인다 라고 말해도 좋고 내가 그 분 안에 들어간다 라고 설명해도 된다.
영접한다 라는 말은 그 분이 내게 오는 부분이다. 그런데 어떻게 오느냐?
왕으로 영접하라고 요한복음 1장에 나와 있다.
그가 자기 땅에 오메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 영접하는 자 라고 말했으니까 자기 땅에 온 자기 백성을 찾아온 왕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다’라는 말은 헬라 말에서 ‘이동을 저쪽으로 하는 것’이다.
( s)라고 하면 ‘다른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갑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의탁합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 나는 내 자아를 부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그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또 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가능성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인데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내 이 ‘자아’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이 복음으로 제시하신, 하나님이 복음으로 보내주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를 위임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위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온전히 내어 맡기면 그리스도가 나를 변화시키신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론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나를 맡긴다는 말이 무엇이냐?
물론 자기 부정의 이야기가 똑같이 나옵니다.
‘나는 못 합니다’ 라는 부정을 해야 하니까! 그러나 앞의 것하고 조금 다릅니다.
‘자기 욕심을 버려라’ 하는 말보다 자기 욕심을 버리는 일 자체를 내가 잘 안되니까
‘예수님!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라고 의탁한다는 말은 조금 더 쉬워지죠?
그래서 예수님에게 자기를 내어놓고 ‘의탁’할 때
예수님이 나를 변화시키시는데
그 변화의 내용은 사실 신비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LORDSHIP이라는 ‘왕’으로 ‘주인’으로 모신다는 내용을
훨씬 더 쉽게 이해하면
그 맡기는 부분도 쉬워지고 변화의 내용도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이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냐하면
‘사전전도’인 부분인 그 중에서 하나님 그리스도의 ‘왕권’ 그분의 ‘위대하심’에 대해서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왜 자기 부정이 잘 안되느냐? 이것은 아주 간단하다.
자기 부정이 잘 안되는 이유는 바꿔치기할 대상이, 다른 주인이 내가 보기에 별볼일 없다 이말입니다.
이집 비워주면 이집 주겠다.
그런데 바꿔주겠다는 집이 별로 마음에 안들면 안바꿔 준다.
그런데 바꿔 줄 집이 너무 멋지면 얼른 팔고 얼른 온다.
그래서 천국 비유에서 그런것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밭에서 보화를 발견했다.
이 보화가 값이 얼마나 비싼지 값이 수억원이 되는 모양이다.
밭 값은 불과 몇백만원 밖에 안되는데! 그래서 밭이니 집이니 다 팔아서 샀다 이말입니다. 왜 그 땅에 숨겨진 보화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너무 값지기 때문에 그 가치만 발견하면 누구 천국을 사지 않겠느냐?
자기 재산 다 팔아서 천국을 사죠!
하나님이란 분이 너무나 위대하시고 하나님 백성 되는 것이 너무 너무나 큰 축복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기업이 나에게는 이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큰 기업이다.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만큼 나에게는 큰 행복과 기쁨이 없다.
그 분에게 내 생애를 맡기면 그보다 더 수지맞는 일이 없다.
이것이 너무 너무 대조적으로 격차가 나고 크게 보이면 쉽게 자기를 포기합니다.
그것이 안될수가 없다. 그것은 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QT시간에도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가 중요하다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QT하다보면 LORDSHIP이 살아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QT하실때 잘못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 이십니까는 밤낮 아는 교리 같은 이야기 이니까 뭐 참되신 분이시다.
유일하신 분이시다. 영원하시다. 공의로우시다.
그런것만 밤낮 하면서 딱딱해 보이고 내가 할일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안되고 안할때 보다 더 골치아프죠?
매일 성경하고 나니까! 문제가 점점 더 노출되니까 ‘아! 나는 구제불가능하구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많다.
그러나 그 상대방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가?
나 같은 사람도 구원하실 만한 분인가?
나 같은 죄인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분인가?
왜 나는 안 되는가?
그리스도는 가능하신가?
그런 부분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훨씬 더 긍정적으로 많이 공부하시면
아! 이런 하나님이 계시고 이런 하나님이 다 해주시고 이런 하나님이 십자가 안에서 다 처리해주시고 용서 하신다는데 왜 내가 걱정하고 앉았지?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그러면 자연히 믿음이 생긴다.
마치 성경 공부를 많이 안한 사람은 질문이 많다.
자꾸 궁금하다. 물어보는 것이 참 많다.
왜? 모르니까 궁금한 것이 많으니까! 당연하다.
그러면 교회에서 대답하기 골치 아프니까 무조건 믿어라!
그런것 자꾸 묻고 믿는 것 아니다.
누가 다 알고 믿느냐?
모르니까 믿지! 알면 왜 믿느냐? 라고 하죠? 그것은 잘못된 대답이다.
모르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모르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지 알아야 믿지 믿을 내용이 있어야 믿지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잘못 알면 잘못믿죠! 잘못된 것을 믿고 있다.
잘 알아야 된다. 잘 알면 훨씬 잘 믿어집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느냐? 성경공부를 많이 하셔야 된다.
‘사전’에 미리 많이 배워간다는 사실은 믿음의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에서는 무어라고 했죠?
영생이 무엇이냐?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심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그것 진짜 알면 교제가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안될수가 없고 안 믿을수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에 대한, 그 나라에 대한 충분한 인식을 빨리 배울수록 유리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믿음에 들어간다라는 말은 나를 그분에게 맡겨 버립니다.
주님께서 처리해 주십시오.
그때 그분이 내게 임하시고 나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나를 그분에게 맡기고 그 분안에 소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학자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고 설명합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이 너무 많이 나온다.
IN CHRIST라는 말이 너무 너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요즘 신학자들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종교개혁때부터 지금까지 오래토록 개신교에서 주장하던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한다면 CHRIST FOR US(우리를 위하신 그리스도) 즉 우리를 대신 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그리스도, 그리스도가 내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내 대신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 라는 것이 제일 중요한 사상이었다 이말입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자들이 그 말이 맞긴 맞는데 조금 표현을 그 표현도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그보다도 좀 더 많이 나오는 표현이 있는데 다른 표현을 좀더 생각해 보자!
그것은 WE IN CHRIST(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라고 새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죽으셨다라고 이해하셔도 좋은데 또 나를 ’대표‘해서 죽으셨다라고 말해도 되는데 그 말을 조금 더 쉽게 바꾸어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거다.
골로새서에 있는 말씀을 봅시다.
2장 6절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들인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그분안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분안에!
이렇게 표현하나 저렇게 표현하나 큰 차이가 없겠지만 저는 그것을 좀 설명을 해보고 싶은 의도가 있는데요.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요라는 표현보다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요라는 표현이 더 좋으니까 성경에 그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입니다.
영접하라는 표현이 쉬우면 그 말을 더 많이 썼을텐데 그런데 그것은 한번밖에 나오지 않고 믿으십시요라는 표현은 수십번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즉 영접한다라고 말하는 말이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다라고 할때는 표현이 참 좋은데 영접할때 누가 어디로 들어가느냐?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오시죠?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으로 내 안에 들어오신다라는 표현도 가능한데
그럴 경우에 ‘나’라는 존재가 과연 어떻게 보면 큼직하게 그리스도를 포용할만한 ‘나’로 있을수도 있죠?
내가 문을 열어드리고 안방주인 노릇을 한다 이말입니다. 예수님은 손님 노릇하고!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갑니다라는 말은 그리스도라는 분 안에 내가 들어가야 하니까 들어간다는 말은 내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들어가는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고 부정하고 그 분안에 들어갔으니까 주인이 아니다.
주인의 집에 들어갔으니까!
그 주인의 집에 들어갔으니까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 되죠?
그런데 그리스도를 우리집으로 나에게로 ‘영접’하니까 내가 아직도 주인 노릇을 하더라 이말입니다.
그런데 심지어 어떤 표현이 우리 책자에 나왔느냐하면 계시록 3장 27절에 나오는 구절을 오해해가지고(그것은 처음 그리스도를 영접하던 이야기 아니고 믿음이 미지근한 신자들보고 회개하고 다시 나와 교제를 회복하자라는 뜻으로 문을 열어라는 말인데) 그 내문을 열고 나를 영접하면 이란 구절에서 이 문은 이 마음의 문은 손잡이가 안에만 있지 밖에는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밖에서 노크만 하고 계신다.
문을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들어 갈 수 없다 이거다. 그래서 네가 문을 열어라!
그 말이 너가 결정해야 된다라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그 도움을 받으려다가 어떤 부분을 놓치느냐하면 ‘내가 주인노릇’을 하게 된다.
내가 안 열어 주면 못 들어온다 이거다.
내가 열어주었으니까 들어오면 좀 조용히 앉아 계십시요라고 할 수도 있다 이거다.
심하게 말한다면!
제가 오버센스하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영접이라는 개념으로 많이 설명해서 도움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제가 보기에 LORDSHIP! 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 주 되심에 대한 이해가 참 약하다.
왜 약한가?
제가 또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고 하는데 그것을 좀 바꾸어서 설명하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저에게 나서이다.
물론 ‘믿으십시오’ 라고 하면 믿는다는 말이 어떤 오해가 있느냐면 긍정한다는 말로 오해하기 때문에 오해가 있는데 그 말을 제대로 해서 믿는다는 말은 ‘긍정’한다는 뜻만이 아니고 믿었으면 너를 그 분에게 ‘맡겨라! 들어가라!’
그러면 문 앞에 가서 ‘예수님 제발 문좀 열어주십시요’라고 해야 한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는 말을 잘 듣겠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자기가 돌아와야죠?
물론 앞의 비유에서 양을 찾아오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찾아 보내시고 예수님이 오신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 쪽은 그렇게 하시더라도 우리보고는 네가 일어나 와야 된다라고 도전하신다.
내가 일어나 가야되죠! 일어나 갈때 얼마나 이사람이 생각을 많이 했겠습니까?
아버지의 집에 다시 갈려니까 그나마 다 털어먹고 들어가려니까!
아무도 없고 아버지만 있으면 괜찮은데 옆에 형님도 계시고 종들이 수두룩한데 다 떨어진 옷입고 들어가려니까 이것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니다.
보통 결단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결단을 요구한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성서 유니온에서 전도하고 영접을 요청할때 그자리에서 일어서십시요라는 말을 잘 안씁니다.
왜? 분위기가 붕 떠있으니까 너도나도 손들면 쉽게 올수 있으니까 아니고 이리로 오십시오 한다는지 저쪽 방으로 오십시요라고 한다든지 일주일 후에 오십시오 한다든지 저녁에 메시지를 다 전하고 오늘밤에 그냥 주무십시오.
아침에 하루밤 잤습니까?
말똥말똥한 정신으로 다시 합시다. 영접하겠습니까? 이렇게 하라 이말입니다.
왜? 쉽게 결정하지 말라 이말입니다. 신중히 하라 이 말입니다.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상당히 깊이 생각하고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자아부정이 어느 정도 되지
쉽게 그리스도를 떡먹듯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란 분이 내 안에 들어오니까 그리스도가 내가 시키는대로 할테니까
내 일이 잘 될것이고 만사 형통 할것이니까! 라는 말은
'예' 주인이니까 의자를 내 놓겠습니다. 라고 하지만
집은 내가 갖고 있고 의자에는 잘 모시고 대접도 하겠습니다.
그대신에 내가 부탁하는것 잘들어 주셔야 됩니다.
그런 상전으로 의자에 모셔놓는다 이말입니다.
그런 과오를 굉장히 많이합니다.
주인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을 구원이라고 하느냐?
구원이 아니다.
예수를 ‘이용’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부분에 대해서 우리가 좀더 충실히 이해했으면 좋겠습니다.
골로새서 말씀 더 봅시다.
8절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복음에 대하여 생각할때에 그런 어떤 인간적인 사상,
철학적인 설명, 또 여러가지 속임수작 그런데에 미혹받지 말라
또 사람들의 유전, 가르침, 또 세상의 초등학문,
그런 아직도 몽학선생 아래 있을때 가정교사 밑에 있을때 하던 그런 어떤 식의 교사에게 따라 다니면 안된다 이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없다.
이것은 주의해야 됩니다.
내 주인이 그리스도 한분이어야 되지 이 사람도 있고 저 사람도 있고 하면 안된다 이말입니다.
"그 안에는(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몸으로 거하시고란 뜻입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모든 악의 세력을 말한다)의 머리시다 또 그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죽은 자들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여기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고 함께 살아난다는 말이 분명이 나오고 그때 그안에서 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어야 그리스도가 부활할 때 함께 부활하지요.
그다음
13절 "또 너희의 범죄와 육신(몸이라는 말이 아니고 육신이라는 말이다)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사죄한다는 말앞에 부활까지가 들어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했을때 만이 사죄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죄를 사한 후에 부활시키는 것이 아니고)"
14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을 도말하시고(율법을 말한다)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십자가에서 나도 못박히지만 율법도 못박혔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
15절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무장을 벗겨버린다는 말이다) 밝히 드러내시고(무장이 해제된 채로 옷을 벗긴 후에 공개시킨다는 말이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요즘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표준역이나 공동번역에는
"십자가로 그 권력들과 권세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개선 행렬에 따라오게 하여 구경거리고 삼으신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악의 세력이 무기로 사용합니다.
사탄이 우리들을 고발할 때 율법으로 고발합니다.
주일 성수 안했습니다.
십일조 안했습니다.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거짓말 했습니다.
간음했습니다.
부모 거역했습니다.
무엇무엇 했습니다.
사실 QT할때 보면 수없이 걸립니다.
QT할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지적받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께 지적받는 것은 괜찮은데 사탄이 나를 너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냐?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 사탄의 세력이 사용하는 무기인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분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무기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공격할 길이 없습니다.
정죄를 해야 되겠는데 율법이 있어야 정죄를 하죠?
율법이 완전히 십자가에서 처리되어버렸다 이말입니다.
그것을 십자가의 승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는 의미가 참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에는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복종’하신 모습이 있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할 모습이 있고
율법을 처형하는 모습도 거기에 있습니다.
16절에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다 그 실체는 그리스도니라" 라고 되어있다.
20절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율법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와 우리만 죽은 것처럼 되어있지만 여기서는 율법도 함께 죽는것으로 나와있다)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그 의문은 곧 붙잡지도 말라 맛보지도 말라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율법주의로 가면 믿음이 점점 없어지고 교회가 점점 더 부패하게 된다는 말이다.)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있는 모양이나(지혜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직 육신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디모데전서에는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나와있으나 여기에는 조금도 없느니라라고 나와있다)"
율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처형했다는 말은 너무너무 기쁜일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마귀가 고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8장 1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 무어라고 되었는지 봅시다.
같은 골로새서 3장에 5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유상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니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벗어버렸고 라고 해야한다. 오역이다)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옛사람이 죽었는데 행동을 그대로 따라 나온다면 문제가 있다.
자기욕심이 죽고 자아를 부정했다면서 계속해서 욕심에 따라 사는 죄를 범하면 안된다.
제가 요즘 십계명을 공부하는데
마지막 계명을 공부하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참고서적을 보니까
제일 마지막 계명이니까 제일 작은 것 같지만
사실은 계명을 마무리 짓는 제일 죄의 근원을 이야기 하고 있다.
아담 하와가 왜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을 거역했습니까? 탐심때문에 그렇다!
왜 안식일을 범하느냐?
돈 좀 더 벌고 싶은 탐심 때문에! 놀러 다니고 싶은 탐심때문에!
왜 사람을 죽이느냐?
욕심때문이다. 왜 간음하느냐? 마찬가지이다. 이성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결국 모든 죄는 탐심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라고 했다.
이 욕심 탐심 거기에서부터 벗어나면 죄를 안 짓게끔 된다.
그것이 안 없어지고 죄를 계속 범하는 이유는 바로 그 욕심, 탐심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욕심을 갖고 있나를, 어떤 탐심이 있나를, 점검받으셔야 한다.
그것이 점검 되는 만큼 나는 아직도 안 죽어있구나!
모든 것을 포기한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깨닫기 전에 가졌던 자세이다.
다 버린 것처럼 말했는데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라고 했는데
보니까 아니고 누가 더 높으냐하고 다툴때는 이유가 있죠?
내가 못 가질까봐서이다. 내것 빼앗기기 싫으니까!
그것이 완전히 탈피되어야만 한다.
자 그럼 율법문제를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율법을 십자가에서 다 못박아 죽였다라고 했는데 뒤에가면 아니죠?
새사람을 입어 새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니까!
그러면 그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무엇이냐?
한절만 더 읽고 설명을 합시다.
로마서 8장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래서 노래를 부른다. 해방된것을 많이 부른다.
그런데 해방된 것만 부르지 그 다음것은 부르지 않는다.
"생명의 성령의 법아래"
물론 그것도 가사에 나온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하였네’ 라고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에만 붙지 않고 생명의 법이 나를 사망에서 해방시킨 후에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이제는 마음대로 가도 좋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6장에서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셔서 사탄의 세력에서 돈을 주고 사서 건져 냈을때
이제는 너 맘대로 가라가 아니고 그때부터 나는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말이다.
주인이 바뀌는 것뿐이다.
구원 사건은 주인이 바뀌는 것이지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킨 후에 이젠 ‘너 맘대로 살아라’가 아니고
‘너는 이제부터는 내 종이다. 이제까지는 사망이 법아래서 종노릇 했지만 이제부터는 생명의 법아라서 종노릇하라’
3절 봅시다.
"율법이(죄와 사망의 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했다.
그 앞도 율법이 인간의 육적인 상태 때문에 자기 욕심을 가진 인간 때문에 그 율법의 힘으로서는 힘이 모자라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말입니다.
율법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는데 우리의 육에 속한 욕심 그것 때문에 이 율법이 아무리 우리를 보고 그렇게 하지 말라라고 하여도 마이동풍격이더라 이말입니다.
그럼 율법은 나를 어떻게 하느냐?
나를 변화시킬 능력이 율법에는 없습니다.
하지말아라 하지말아라 밖에 안되더라 이말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포기냐?
포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다른 방법이 있다 이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아들을 보내서 자기 아들에게 죄를 정하시고
자기 아들을 처형해서 죽여서 우리를 영에 속한 자로 바꾸어 놓으시고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다 이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한편에서는 율법을 십자가에 처형했다라는 설명이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왜 그렇게 했느냐?
율법 가지고는 안되니까 그 율법은 도말시키고 십자가에 못박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보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이말입니다.
우리를 변화시켜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한다 이말입니다.
즉 종전의 율법은 육에 속한 나를 어떻게 할 힘이 없더라 이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어떻게 하시느냐? 성령님은 나를 어떻게 하시느냐?
나를 육에 속한 자로 일단 바꾸어서 놓고 즉 성령님의 지배하게 들어오게 해서 그 성령님이 나를 지배해서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다 잘 지키게 하신다.
그럼 율법을 왜 폐지시키느냐? 그것 가지고 안 되겠으니까 바꾸자 이거다.
바꾸기 위해서 폐지시키는 것이지 율법이 필요없다 라는 말이 아니다.
그럼 무엇이 다르냐?
첫째, 율법은 우리를 변화시키기 전에 십자가에 죽게하고 부활시키기 이전의 상태에서 주어졌다. 그러니까 안된다.
그것은 율법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고 로마서 7장에서 계속해서 하는 말이 그말이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아무문제가 없는데 우리가 육신에 속해서 안된다는 말이 로마서 7장의 결론입니다.
그것이 8장에서 와서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고 우리 인간에게 있습니다.
첫창조된 상태가지고는 안되더라 이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재창조할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재창조해야만 된다. 즉 그말은 무슨 말이냐?
자기 욕심을 버리게 하고 성령님을 따르게 해야만 말을 들을 것이다.
너무나 쉬운이야기죠!
그러니까 율법자체 정죄하기 위해서 주어졌던 율법은 철수시키고
성령님께서 직접오셔서 나를 변화시키고 자기에게 복종케 한다.
성령님이 지배하는 작업을 먼저 하신다.
그것을 성령님으로 중생한다라는 말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앞에서 십자가와 부활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금 성령님을 도입해서 설명하는 것 뿐입니다.
그 성령님이 오신 사건 때문에 육에 속한자가 영에 속한자로 바뀐다는 표현을 쓰는 것 뿐입니다.
자기가 내가 주장하던 자가 성령님에 속한다는 말이
육에 속한자가 영에 속한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의 차이점이고
두번째 그러면 육에 속했던 내가
성령님에 속한 자로 바뀐것 까지는 되었는데 그다음에 내가 지켜야 할 법은 무엇이냐?
율법을 폐지했으니까 그러면 내가 무엇을 지켜야 되느냐? 같은 법이다.
같은 법인데 무엇이 다르냐? 다른 점이 있습니다.
마태 복음 5장이하에서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완성시켜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이 무엇이냐?
로마서에서 13장에 봅시다.
13장 8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것과 그 외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아까 십계명이 전체를 다 커버 한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 전체를 다르게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하는 그 안에 다들어 있다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말해도 충분하다.
어떤 계명이 있던 원리는 한가지이다.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만 하면 문제가 없는데 사랑이 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예수님이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러 왔다라는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의미는 율법을 못 지키는 너희들 어차피 못 지킬것 집어치워라 라고 율법을 폐지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폐한다는 말이 율법을 안 지켜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해보니까 되지도 않고 하니까 내가 그냥 봐주겠다.
십자가에서 너희 죄를 다 처리하고 지나간 죄도 다 용서하고 앞으로 지을 죄도 다 용서하고 그냥 구원해 가겠다.
그러니까 그 십자가만 믿기만 해라라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아주 싸구려로 생각하시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느냐? 그냥 용서해주지 그냥 봐주지!
하나님이 그냥 다 없는것으로 하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뭐고 다 집어치우자. 해보니까 마찬가지더라 .
그냥 내가 봐 줄테니까 그냥 천국에 와서 살아라라고 해도 되지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장난치는 것입니까?
용서해줄 바에는 무엇때문에 자기 아들이 십자가에 죽고 나서 용서를 해줍니까?
공의 때문입니까? 공의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죄인들은 다 여기 있는데 죄인들은 벌도 내리지 않고 자기 아들 십자가에 처형해 놓고 나서 내 속이 좀 후련하다.
다 벌 내려야 되겠는데 참아야지 참아야지 하다가 안 되니까 내 아들이라도 좀 때리고 이제 속이 후련하다.
이제 너희들 봐 준다라는 멍청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처형합니까? 무엇 때문에?
왜 우리가 죄를 범했는데 자기아들을 무엇때문에 십자가에 처형하고 우리를 봐줍니까?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까? 자기 아들은 안 사랑하시고?
사랑이라고 하고 공의라고 합시다.
종전의 설명대로 사랑과 공의 때문이라고 치고 그래서 결과가 무엇이냐? 마찬가지이다.
자기 공의와 사랑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어서 우리를 용서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무슨 변화가 있느냐? 아무런 진전이 없다.
아담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고 무엇이 다르냐?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합니까? 이것이 어마어마하게 신비이고 비밀입니까?
십자가의 비밀이고 그리스도가 비밀이라고 골로새서에서 수없이 말하는데 이것이 너무너무 놀라운 신비로운 비밀입니까?
기가 막힌 하나님의 지혜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아무 지혜도 아닙니다.
그렇게 설명하면 기독교라는 것은 참 유치하고 참 우스꽝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면 리 는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예수님이 내 대신 고난 다 받으셨구나 하고 예 믿습니다 라고만 하면 간단하다.
그럼 누구 말대로 죽기전에 한마디 만 하면 되죠! 간단하죠!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그것이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냐? 그것이 재창조사역이냐? 아니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십자가 사건은 앞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인간을 변화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잘 들어보세요.
자아를 예수님과 함께 믿음으로 들어가서 자아를 복종시키겠다.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
이론으로는 되는데 사실 그렇게 되느냐?
잘 생각해보세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을 생각하고 나도 내 욕심을 버리겠습니다.
자아를 죽이겠습니다 라고 해서 아주 단단히 깨닫고 생각해서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님에게 나를 맡기고 이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그런 결심이 과연 쉽게 될것이며 설사 결심했다고 한들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하냐?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꼭 그냥 단단히 다짐을 받으면 되지 꼭 내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막힌 것은 아닌데 예수님만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데 꼭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있어야 되느냐?
우리가 다짐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자기를 버려라 자기를 부정해라 이제부터는 꼭 내말을 잘 들어라라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하는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담 하와에게 왜 처음부터 그렇게 다짐을 안 하셨느냐?
그렇게 하시면 되지 왜 그렇게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라 라고 해서는 왜 괜히 호기심 나게 만들고 그렇게 하셨느냐?
성경에서는 십자가를 ‘사랑’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는 말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의 원리가 또 굉장히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라는 것은 설명을 진짜 많이 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면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육신으로 보내시고 우리와 한 통속이 되게 하신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이 우리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다.
우리와 한 통속이 되어서 같이 죽고 같이 살자 이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에게 희생으로 내어 주십니다.
나는 너를 이만큼 ‘사랑’한다.
내가 너희들을 너무너무 ‘사랑’한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어 놓는다.
그리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는가 보라.
그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 일을 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고 따라오게 하시고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해야만 내가 나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배우는 것만 같고는 안됩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은 것이 죄인줄을 이제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행해졌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겠습니다.
그 이야기가 그렇게 간단하냐 이말입니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아마 요한 사도가 이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는지 ‘사랑’이라는 말을 자꾸 합니다.
‘사랑’하라는 말만 자꾸 한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말하고 요한도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고 원수고 대적관계에 있을때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큰 사랑을 인하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십자가의 사건에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가 이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도 너무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어코 나는 너를 내 아들로 만들겠다 이말입니다.
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놓고 이 아들과 함께 너희들을 다 같이 건져서 작은 아들로 만들겠다.
내 큰아들이 얼마나 잘하는가 보아라.
이 아들이 얼마나 순종하는지를 보고 이아들을 통해서 내 사랑을 배우라!
그래서 이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감격해서 이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아주 딱딱해져 버립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라는 말이 참 어떤 때는 싫다.
왜 하나님이 꼭 그렇게 군림하시기를 원하시느냐?
민주주의로 하시면 안되느냐?
꼭 하나님 혼자 일인 체제로 독재하시느냐?
자유를 좀 주시면 안되느냐?
물론 자유를 주십니다 엄청난 자유를 주십니다.
엄청난 자유를 주시는데 그러나 ‘사랑’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그럼 너 맘대로 해도 좋다. 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만 한다면은 이웃사람 때려도 좋다이거다. 왜? 자기 아이 사랑하니까 때린다.
간음을 해도 좋다 이거다. 왜? 사랑하니까 형수에게 아들을 낳아주죠!
거짓말도 하죠! 왜?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아픈데도 괜찮다고 한다.
배가 고픈데도 밥 먹었다고 한다. 어머니들이 나는 괜찮다. 너 어떠냐? 라고 잘 그러십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니까 자기것은 다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사랑으로 하는 거짓말 같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죄가 된다면 말이 아니죠!
왜 그러는가? ‘사랑’ 때문에 그렇다.
서로 ‘사랑’하고 살자 라고 ‘사랑’해야지 미워하고 탐심을 갖지 말아라 다 내놓고 같이 쓰자.
그 ‘사랑’ 때문에 일어나는 일에 불과합니다.
물론 서로 잘 모르니까 거짓말 하죠.
나중에 하나 나라가 완성되면 그런 거짓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뻔히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십자가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랑의 극치이면서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동되어서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된다.
그 사랑의 순종이 lordship의 주로 모시는 부분에 가서 사랑의 동기가 있어야 그것이 가능하지 그렇지 않으면 피곤하다.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라고 할때 ‘사랑’이 없으면 복종이 잘 안된다.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월급 받는 재미로 복종하지 뭐 월급도 안주면 누가 거기가서 복종하겠습니까?
그러나 부부사이에는 그래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때문에 복종한다. 부부가 싸우다가도 밤에 서로 사랑을 나누면 다 없어져 버린다. 자녀와 부모의 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부부사이나 자녀와 부모사이에는 법이 없다. 법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되죠! 법이 사회보다도 더 잘한다.
국회가 필요없다. 이세상에서는 법을 만들어 봐야 누가 지킵니까? 안지키지!
그러나 가정에서는 법이 없어도 지킨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복종할때 ‘사랑’ 때문이지 뭐 부모님이니까 의무적으로 지킬수도 있지만 ‘사랑’하고 다릅니다. 그것이 며느리와 딸의 차이입니다. 며느리가 딸보다도 부모님에게 훨씬 더 효도를 잘할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안된다. 사랑은 없습니다. 억지로 한다.
어쨌든 부모님 돌아가시면 시원한 사람은 며느리이다.
나에게 서툴게 하는 딸이 깔금하게 하는 며느리보다 더 귀엽다. 그렇죠?
그러니까 고부간의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 ‘사랑’이 만들어져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사랑’은 만들수 있느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결혼식만 하자마자 사랑이 생깁니까?
사랑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주고받고 주고받고 해야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딸과 며느리가 뭐가 다릅니까?
며느리도 결혼하고 딸노릇을 하러 들어왔는데 왜 안되느냐?
사랑이 금방 안생긴다.
그러나 십년 이십년 지나면 며느리가 딸보다 더 어머니하고 사이가 좋아질 수 있다.
불가능한 것 아닙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어머니도 사랑을 같이 주어야만 가능하다.
며느리도 어머니에게 사랑을 주고 시어머니도 며느리에게 사랑을 주기 시작한다면 아마 십년후에 딸보다 더 나을(사랑할)지도 모르죠! 좋지 않은 딸보다는!
그런데 딸은 왜 잘되느냐? 뱃속에서부터 사랑을 주고 주고 해서 사랑을 너무많이 주어왔으니까 이 딸이 싫어도 어머니에게 동되었으니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안 없어진다.
그것은 큰 사랑을 받았으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이 “형성”되어가 있다 이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때 구속한다라고 말할때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왜 안되느냐?
무엇이 문제이냐? ‘사랑’이 문제이다. ‘사랑’이 없다.
그래서 율법을 주었을 때는 사랑이 아니고 명령이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하니까 안 된다.
뻣뻣해지고 더 굳어지고 긴장하고 눈치보고 그것이 율법주의이다.
저도 율법주의에서 오래 자라오던 사람입니다. 기뻐서 하는것 아니죠?
그래야 되니까 하는 것이다. 할수없이.
그러나 ‘사랑’이 있다면 그렇지 않다. ‘사랑’은 전혀 다르다.
‘사랑’은 참 기쁘다. 어머니들밖에 배울 수 없습니다. 아버지들도 그만큼 없다.
부부사이에는 굉장히 ‘사랑’하죠? 왜 그런지 부부사이에는 ‘사랑’이 있다.
다른 사람하고 전혀 관계가 다르다.
그런 특별한 ‘사랑’의 관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꼭 아들이라고 한다.
자기를 아버지라고 하시고. 심지어 우리를 신부라고 하고 자기를 남편이라고 한다.
사랑의 관계이다. 그 사랑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 사건이 필요하다 이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사랑으로 맺어진 나라입니다.
이 사랑이 있기 때문에 율법에서 설명되어진 하나님의 뜻 율법에서 요구하신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율법을 철회했지만
우리는 하나님 전에는 우리가 이 율법을 어기고 거역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라고해서 오히려 율법을 훨씬 더 잘 지키게 된다 이말입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니까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해갑니다.
하나님이 그 십자가로서 율법의 모든 문제를 극복하고 율법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군림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우리도 그 사랑에 감동되어져서 이제는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순종해간다 이말입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처리되어져야 하느냐?
하나님이 법을 철회하신다.
네가 나를 진정으로 섬긴다면 나는 네게 법을 주지 않겠다.
법이 필요없다 이말입니다. 이래라 이래라 그런말이 필요없다. 사랑하는데 잘하는데!
법이 없어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게끔 된다.
그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이상적인 자녀이고 그것이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말입니다.
사랑이 없는 나라에서는 법을 많이 만듭니다.
사랑이 없는 곳일수록 점점 더 딱딱한 법이 많습니다.
가정처럼 사랑이 있는 곳으로 갈수록 법이 필요 없어진다.
법이 없어도 법 있는 사회보다 더 잘하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의 조문을 철폐시킨다.
율법이란 법조문은 하나님이 다 거두어 가셨지만 왜? 잘못해도 정죄하기 싫으니까!
사랑하는 자녀니까! 자기 부모가 자기 자녀를 감옥에 들여보내는 사람 봤습니까?
악한 부모외에는!
둘사이가 너무너무 나쁘면 법정에 갈런지 모르지만 부모와 자녀 사이에 너무 너무 사랑하고 있다면은 설령 잘못이 가끔 일어나더라도 법정에 끌로 가지 않습니다.
타이르고 귀여워해준다. 뽀뽀해준다.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면 법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 사랑 그 자체가 법보다 훨신 넘어서서 이루어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율법이란 조문은 없어져 버리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윤리가 형성된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법을 지켜간다.
그래서 드디어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간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태복음 5,6,7장에서 율법을 완성시키려고 왔다라고 하시고 예를 들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전에는 즉 너희들과 나와 ‘사랑’의 관계라 맺어지기 전에는 내가 살인하지 말라 살인한자는 돌로 쳐죽인다라고 말해서 너희들이 쩔쩔 매고 조심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말이 무슨뜻이냐?
서로 미워하거나 헐뜯는 말을 하거나 욕하거나 그것도 안된다. 그런 뜻이다.
간음하지 말라. 마음으로도 그러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니까 법의 수준을 훨씬 높인다.
실정법은 법을 하나님이 실제로 만드실 때는 수준을 낮추어서 만든다.
약간만 다른 사람에게 나쁜말 만 해도 살인죄다라고 하면 옛날에 모세때 살인한 사람은 돌로 쳐죽이라라고 하면 다 서로 돌로 쳐죽여야 한다.
부부 사이에도 나쁜말 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아무도 안남을 테니까!
그래서 그것도 봐주고 그것도 봐주고 해서 적어도 최저 이정도는 지켜라라고 최저 이정도는 벌을 주어야 한다.
적어도 사람을 때린 정도까지는 봐 줄수도 있지만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이것은 돌로 쳐죽여야 된다.
그렇게 만든것이 실정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 너희들과 나하고 사이에 겨우 최저 그런것이 필요하냐?
그런것이 필요없다. 그것 다 집어치우자 필요없다. 너 나를 사랑하지?
너 이웃을 사랑하지? 가족을 사랑하지? 그렇다면 욕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었을때 내 의도는 죽이는 것 그것은 최저이고 실제로 나는 서로 다투는 것도 싫다 이말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렇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조금 정리합시다.
율법을 주실 때는 그럼 왜 주셨느냐? 되지도 않는데 왜 주셨느냐?
율법을 주신 첫번째 목적은 말 안들으니까 정죄해서 심판하기 위해서 주셨다.
로마서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 되는지 안되는지를 알아보기 우해서도 주셨고 안 지킬때 정죄해서 심판하시려고 주셨다.
그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다음에 죄를 정죄해서 심판해서 죽이려고 율법을 주셨다는 말이 성경에 명백히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녀가 된 우리에게 정죄할 법을 줄 필요가 없다.
설령 사람을 죽이더라도 다 끌어 안으시겠죠 이제는!
타이르시고 너 왜 그랬느냐? 흥분했느냐? 너 나를 사랑하느냐?
그 이야기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주를 부인하고 고기잡이 하러 갔을 때 예수님이 만나가시고 베드로야 네가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물고기 같습니다.
이 물고기 잡으러 왔는데 이 물고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런데 원문에는 이렇게 나온다.
네가 나를 이 물고기 보다 더 아가페하느냐? 라고 물었다.
베드로가 그 대답을 차마 못 하겠는 것이다.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하고 도망쳐왔는데 어떻게 그 말을 합니까?
그래서 예 사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제가 필레오 합니다.
친구정도로 사랑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이 두번째 물었다. 아니 베드로야 내가 물을 때는 아가페라고 물었다.
이 고기보다 나를 더 아가페하느냐? 베드로가 예 제가 예수님을 필레오 합니다.
말꽁무니를 빼는 것이다.
사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데 예수님이 묻는 만큼 대답할 자신이 없습니다.
너무 죄송스러워서.
세번째 예수님이 베드로야 그럼 필레오는 진짜냐? 세번째는 필레오라고 물었다.
너 그 우정이란 말 그것은 진짜냐?
그래서 성경에는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우애하느냐라고 하시므로 마음에 근심했다로 나온다. 괴롭죠? 그 대답하기도 괴로운 것이다.
그래? 그 정도냐? 그러면 그 정도도 진짜냐?라고 묻는 예수님 앞에 너무너무 창피할 뿐만 아니라 이것도 진짜인가?
진짜라고 대답해야 될까? 창피하죠?
그래서 근심하다가 예 주님을 필레오 하는 줄은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정도는 주님이 믿어 주여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그정도의 우정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셨다.
‘사랑’을 요구하신다.
그 고백을 요구하십니다.
그 ‘사랑의 고백’을 주시지도 않고 하나님이 요구합니까?
그래서 너희가 먼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먼저 ‘사랑’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복음을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계획하시고 보내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이 복음을 받아들여야 lordship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쉽지
‘야! 지난번에 말 안들었다고 선악과 따먹었다고 이제는 하나님이 단단히 벼르시고 도전하시는구나 이제는 꼼작도 못하게 복종하시게 하시는구나’ 라고 생각하면 참 힘들다.
그래서 율법하에서 순종하려면은 피곤하다.
그래서 저는 요즘 율법주의로 안한다.
우리 교인들 새벽기도 안시킵니다. 그대신에 게을러지죠?
게으른 사람 게을러져도 좋다이거죠.
하나님 ‘사랑’하기 싫은 사람은 맘대로 하라 이거다.
의무적으로는 오지말라 하나님은 의무적이로 오는 것 이제는 싫어하시니까 그것은 율법시대에 다 지나갔으니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알아서하라 이거다.
그대신에 꼭 다섯시에 할 필요 없고 꼭 하나님이 뭐 너 다섯시에만 만나자고 하시는 그런 하나님 아니시니까 여덟시도 좋고 아무때나 좋으니까 아무때나 좀 만나자.
당신 일어나는 시간에 QT하시라고 저희교회에서는 훈련시킨다.
저도 아무때나 합니다. 편안하게 합니다.
늦잠잘때는 늦게 하고 어떨땐 3시 4시까지 책보고 하면 늦게까지 자야죠!
그런다고 하나님이 왜 몇시에 새벽기도 안하느냐라고 하시지 않는다.
그런 하나님 이라면 이제는 무서워서 못 섬기겠죠!
저는 우리 하나님 너무나 사랑스러우신 분이고 너무나 잘 이해해 주시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살죠!
죄를 범할때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하나님 또 잘못했습니다.
저 ‘사랑’하시죠? 제게 ‘사랑’을 더 일깨워 주십시오.
하나님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저를 용서하신 줄 믿고 감사합니다.
건방집니까? 자기가 감사하다고 하니까?
그러나 율법에서 자유함을 받은 이후에 저는 훨씬 더 섬세한 부분까지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는 노력이 훨씬 더 많아졌다.
전에는 주일만 철저하게 지키면 끝나고 십일조만 하면 되고 새벽기도만 잘 나가면 끝났는데 이제는 아니다.
하루종일 주님과 교제해야 되고 말씀을 묵상해야 되고 사소한 일까지도 다 신경써야 되고 예배를 드려도 아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되고 맡은 일을 하더라도 주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하고 주일만이 아니고 일주일 내내 주님의 날로 알고 섬겨야 되고 십분의 일만이 아니고 나머지 십분의 구 전체가 하나님의 것으로 알고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용해야 된다.
그러니까 훨씬 수준이 높아진다.
높아지니까 힘들다고 하는데 사랑이 없으면 힘들지만 사랑이 없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잘 알것입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청소해놓고 밥해 놓고 기다리는 재미가 너무너무 좋죠?
저는 남편이지만 부인들 보니까 그런것 같습니다.
집사님들 보면 자기 아이를 위해서 새벽잠이 많은데도 새벽에 일어난다. 즐겁다.
자기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참 힘들고 lordship 주로 모신다는 것이 참 빡빡하고 고달프다.
십자가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그것을 잘 배우시고 터득하시면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만큼 ‘사랑’하시는가 생각해 보세요.
이처럼 ‘사랑’하사.
이 처럼이라는 말은 설명이 안되니까 그렇게 표현했겠죠!
영어로는 so love that 너무너무 ‘사랑’해서 그래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하에 매어 있는것 아닙니다.
다 처형했습니다. 왜? 사랑하시니까!
너하고 나하고 사이에 그런 법이 필요없다. 이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너하고 나하고는 훨씬 더 긴밀해져야 한다.
율법을 만일 내가 만들어 두면 너는 그것만 겨우 지키려고 하겠지!
그러나 그것 싫다.
십일조 내라니까 너 딱 십일조만 계산하지? 아예 집어치우는 것이다.
그러면 아예 다 내놓겠죠? 한계가 없으니까!
새벽기도 시간 안정해놓으면 어떻게 하죠?
자기들이 알아서 정해서 잘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죠!
저희 교회의 프로그램을 줄이는 이유가 자기 일들도 열심히 하고 알아서 잘 섬기라는 것이다.
교회에 나올 때 넥타이 매지 말고 오라고 한다.
여자들 너무 꾸미지 말고 화장 너무하지 적당히 입고 오라고 한다.
왜?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훈련이 필요하다.
옷 맵시 다 내고 와가지고는 마음은 사랑하지 않는데도 겉으로만 하고 와서 옆에 사람쳐다 보고는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하고 왔다고 으시대고 있으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엉뚱한데로 가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따라서 어디 매어 있지 않기 위해서 자유함을 주는것입니다.
자유함을 주면 훨씬 더 사랑이 편하다.
그러나 사랑은 계속 자라가야 한다. 사랑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 아니다. 자라가야 한다.
사랑은 깊어지고 사랑은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계속해서 하셔야 사랑이 커 간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의 사랑의 관계가
고생을 많이 한 부모와 자녀사이하고 편안하게 지낸집 하고는 어떻게 다릅니까?
가난한집 아이들이 부모를 더 사랑하고 가난한집 부모가 자녀들을 더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생을 주셔야 된다. 고난을 주십니다. 고생을 시킵니다.
하나님도 우리 때문에 고생하시고 예수님도 나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님이 내 안에서 매일 탄식하시고 매일 눈물 흘리신다.
아버지 하나님이 매일 매일 나를 따라다니시며 부모가 자녀에게 하듯이 제발좀 제발좀 그러신다.
그 사랑을 배우셔야 된다.
성경에 보면 똑같은 말씀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한다.
나중에는 하나님 왜 같은 말씀 자꾸 하십니까? 지루해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너무너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매일 따라다니면서 잔소리 하는것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무엇때문에 잔소리 하겠습니까? 입아프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배우시고 내가 ‘사랑’하는 훈련을 받으셔야 합니다.
‘사랑’은 훈련하지 않으면 ‘사랑’은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실 때 완전하게 만드시지 않았다 이것입니다.
왜? 사랑이 만들어 지지 않으니까! 사랑이 만들어 집니까? 안 만들어 지죠!
그래서 하나님이 재창조라는 작업을 두시고 우리와의 긴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 자기 아들을 보내주시더라도 아담 하와가 범죄하고서 바로 보내주시면 어떻게 될까요? 오랜후에 저 마지막에 아들을 주신 이유는 해 보라는것이다.
하나님이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을 베푸셨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나는 너희를 독수리 날개로 업어 길렀다.
너희들이 벌거벗은 상태에 있는 것을 데려다가 덮어주고 이렇게 길렀다.
너가 죄를 범하고 범하고 하는데 나는 너를 사탄의 손에서 바알의 손에서 건져냈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수고 했는지 너희들이 아느냐?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신다.
그래도 안 통하니까 호세아 보고 너 저 음란한 여인하고 살아라!
내가 너희 음란한 너희들을 이렇게 ‘사랑’한다.
하여튼 자기 사랑을 설명하려고 수많은 사건을 제시하신다.
그 많은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배우고 그래서 십자가가 등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랑’을 오랜세월에 걸쳐서 우리에게 설명하셔야 하고 실제적으로 주고 계시고 그 ‘사랑’을 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도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사랑’도 주심을 통해서 더 커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다고 하니까 어떨지는 모르지만! 우리의 ‘사랑’은 물론 자란다.
우리의 받고 받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여러번 이 고난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살면 내 ‘사랑’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갑니다.
그래서 성화라는 것은 ‘사랑’에 근거한 loadship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윤종하 총무강의)
네번째 시간
로마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오늘 다른 면을 조금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보면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미리 약속을 하셨다라는 점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설계에 의해서 주관적으로 주권적으로 준비되어 있고 시행된 부분이다.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셔서 육에 속한자가 영에 속한자가 되게 하는
재창조(새창조)의 영역이 새로 개설되는 새로 시작하게 되는 그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첫창조하는 능력보다 훨신더 강한 능력이라고 비교해도 될런지 모르지만
첫창조할 때도 상당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지만
재창조(새창조)할 때도 큰 능력이 나타나서
이 첫창조가 멸망되는 부분을 완전히 소생시킬 정도가 아니고
훨씬 더 멸망하지 않을 영원한 나라이고 재창조(새창조)할 만큼 그런 엄청난 능력이 나타났다.
그다음 5절에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와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거기에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능력으로 이루어 가시는 것이 복음인데
그러나 이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에 믿어야 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믿어 순종해야만 이것이 자기의 복음이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전도가 필요합니다.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들어야 하고
깨달아 지는 대로 내가 순종해야 하고
나를 그분에게 맡기는 믿음에 들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때로는 칼빈주의 쪽의 강조가 너무 심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면 다 이루시고 구원하시기 때문에
중생과정이나 모든 과정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처리되는 것처럼
그런 설명들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하시지 않고
그렇게 하면 재창조(새창조)의 의미에 상당한 문제가 훼손되는데요
하나님이 첫창조하실 때도 우리를 인격자로 만드셨다.
자기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선악과를 먹을 것인가 안 먹을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인간으로 만드시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고 했고
그런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라고 했다.
다스릴 만한 능력이 있고 그 다스림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의도를 듣고 이해하고 소화해서
그것을 다시 내가 내 머리로 설계하고 구상해서
다스려 갈만한 능력 있는 위대한 인간으로 창조하셨다.
그 인간을 재창조하실 때에도 똑같이 인격적으로 처리하셔야 되기 때문에
재창조(새창조) 하실때도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순종하고
내 어떤 자기중심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던 나의 잘못을 다시 깨닫고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순종해야 하는데 불순종했었구나!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집행하는 청지기가 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자의(自意)로 따라 올수 있을만한 그런 인격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재창조(새창조)하시기 때문에
재창조(새창조) 사역에서도 우리의 자아 우리의 인격을 무시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의 사역이 맹목적이고 흥분상태에서 처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성서유니온에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의 사상의 사상만이 아니라!
이 ‘믿음에 이른다’ ‘개심한다’ ‘회개하고 중생한다’는 부분이
인간의 인격과 이성을 마비시킨 채로 처리하지 않는 것이 성서유니온의 특색입니다.
마비를 시켜서 처리하겠다는 말은 자신이 없는 사람이 하는 방법이다.
저 사람을 내 말을 듣도록 설득시켜야 되겠는데 잘 안되니까
또 장사하는 사람이 저 사람을 좀 설득시켜서 거래를 좀 해야 되겠는데
안되니까 어떻게 합니까?
술을 좀 먹여가지고 좀 멍하게 해가지고
에이! 하고 기분파로 돈내고 싸인하도록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이말입니다.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데려다 놓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계획과 복음을 잘 설명하면서
그 인격 자체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건실한 인격이 잘 듣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인격자체가 정복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설명할 자신이 없고 잘 안되니까 찬송을 막 부르고 불을 꺼놓고 무드를 조성해놓고 붕 띠워가지고 쓰러지게 만드는 그것은 아니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우리 성서 유니온에서 어떤 중고등학교에 가서 집회 인도를 한일이 있어서 갔는데 선교사 한분이 따라온 분이 계셨다.
호주분이 따라오셨는데 다하고 나서 자체평가를 하면서 이분이 막 화를 냈다.
그때 그 학교에 계신 선생님 한 분이 찬양리더를 잘하시고 은사가 있는 분인데
그래서 합창단도 갖고 계신 분인데 이분이 아주 분위기 좋고
제가 보기에는 아주 점잖게 찬송을 인도하고 했는데
누군가가 분위기가 좋아지니까 불을 꺼버렸다.
그것은 우연히 꺼진것이지만 그래도 하였튼 빙글빙글 돌고 무드를 조성하고 했는데
나중에 그분이 그것은 조작이다 라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 라고 했다.
그래서 제가 좀 쇼크를 받았다.
나는 그런 것을 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어느 정도는 그런것을 좋아 하는구나라고.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것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
도움을 주었다가도 다시 가라앉히고 어제 말씀 듣고 흥분했었는데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다시 흥분하지 말고 다시 생생하게 생각해보아라.
다시생각해보고 그래서 너 참 기쁘냐? 참 받아들이고 싶으냐?
그래서 우리가 정상적인 인격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대개 우리가 베드로나 제자들이 언제 변화되었을까?
그럼 오순절날에 되었다고 한다.
오순절날 소리가 나고 땅이 진동하는것 같고 바람같은 것이 있고 그런것이 나오죠?
불의 혀같은 것이 나타나고 아주 굉장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 장면 때문에 사람이 도취되어 가지고
자기의 본래 잘못 믿고 회의에 빠졌던 그 베드로가
갑자기 도취되어서 자기도 모르는 메시지를 방언하듯이 막 전했는데 3000명이 회개했다. 라는 그런 스토리가 아니다.
그 방언이라는 말 때문에도 오해가 자꾸 생긴다.
방언할 때 대게 도취경에 들어가 버린다.
막 자기도 모르게 자기 가 하려고 하지도 않는데 갑자기 막 방언이 터지더라.
다 했는데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라고 대개 이야기 하는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 봅시다.
2장 8절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
베드로는 무슨 말로 했는지는 모르지만 듣는 사람 귀에는 자기 나라 말로 들렸다.
그다음에
11절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잘 알아들었다.
그러고 나서 그 아래 베드로의 설교가 길게 나오는데 술취한 것이 아니냐? 아니다.
생생하게 깨어서 이야기 한다라는 대답도 나온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이 방언을 할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아주 맑은 정신으로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베드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충분히 알아 들을수 있었고
베드로의 설교도 자세히 살펴보면 붕뜬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논리정연하게 차근 차근 구약성경을 읽어주면서 잘 풀어간다.
논리정연한 설교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순절 사건은 흥분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앞에 나오는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온집에 불의 혀같은 것이 갈라지는 것이 있고 하는 그런 말이 도취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고 여기에는 성령님의 임재 장면을 그렇게 표현한것 뿐이다.
성령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성령님이 오셨는지 아닌지를 알수 없으니까 그런것을 통해서 아~ 특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성령님이 오셨다는 이야기다.
그런것에 불과하지 실제로 성령님이 오셔서 베드로나 듣는 사람을 혼미케 하지 않습니다. 맑은 이성으로 정상적인 인격적인 정신을 가지고 메시지를 듣게 하신다.
그럼 베드로가 언제 그런 변화가 일어났느냐?
제가 이미 조금 언급했지만 그 앞에 보면 열흘 동안에 예수님의 동생들이 기도회에 참석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을때는 믿지 않던 동생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 동생이들이 기도회에 참석했느냐?
승천하시는 자기 형님을 전송하고 자기들도 믿는다는 이야기다. 믿는다.
언제 믿게 되었느냐? 오순절 이전이다.
또 맛디아라는 사도를 보선하는 것 보면 만일 제자들이 전도하러 갈 마음이 없다면은 무엇때문에 사람을 더 뽑습니까?
자기들도 안 갈건데! 새로 뽑을 이유가 없다.
또 뽑을 때 부활을 증거 할 사람이어야 된다. 라고 자격자를 정한것 보면 자기들이 부활을 확신하고 있고 부활을 증거하러 가야되겠다라고 결심했으니까 사도를 보선하면서 이 사람도 부활을 증거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안된다라는 것을 보면 이미 베드로나 열한 사도 전체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고 그 의견을 듣고 좋습니다하고 투표하자고 하던 120명 전체도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럼 언제 그렇게 되었느냐? 오순절 전이다.
그래서 우리가 설명을 들을 때 무조건 어떤 말을 맞다고 듣지 마시고 실제로 성경을 잘 찾아보십시오.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오해하는 부분이 있죠!
오순절에 변화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 전에 이미 변화가 되어있다 이말입니다.
그것은 사십일 간의 사역입니다.
그 사십일 간의 사역은 예수님이 친절하게 가르치신 가르치심을 받아서 이성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물론 이성적으로 깨달았다는 말이 어떻게 생각하면 믿음이 아닌 것처럼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이성적이지,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것만 따라다니는 것만 따라다니는 것이 믿음이 아니죠!
믿음은 하나님 이 우리가 이해할 만큼은 이해를 시키고 물론 우리의 이해를 초월할 만한 영역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내가 받아들일 만큼 받아들여져서 그것에 대해서 내가 복종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런 상태로 변화시켜둔 후에 이제 오순절에 모여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고 그때 베드로가 아주 맑은 정신으로 논리정연하게 이성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을 주의 하셔야 됩니다.
그럼 왜 방언의 역사는 있느냐?
왜 자기 나라말로 듣게 했느냐?
그런 역사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한 이유는 이 귀한 베드로 자기들이 40일 동안 예수님에게 재교육 받으면서 확실히 깨달은 이 복음을 전해야 되겠는데 잘 못알아 들으면 골치아프다.
다른 나라 말이 어느 정도 되지만 그래도 자기 나라말 보다는 못하다.
자기 나라 말로 들어야 다 알아듣죠!
그래서 이 귀중한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 되겠는데 이 제대로 못알아 들으면 안 되겠으니까 그럼 믿음에 이르기 힘드니까 아예 본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령님이 역사해서 아주 생생하게 들려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을 깨닫고 3000천명이 구원에 이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사도행전을 쭉 읽어보면 한번도 신비하게 처리한 장면이 나오지 않고 자세하게 성경을 풀어 가르치고 가르치고 두번 세 번 네번 여러번 가르치면서 설명해 왔던 것을 우리는 알수 있다.
그래서 성령님의 사역은 이 복음의 사역은 우리들을 인격자로 대우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면서 동시에 그것이 신비롭고 기적적인 사실이지만 인격이 훼손되지 않고 인격이 모독되지 않고 아주 정상적인 이성속에서 메시지를 알아듣고 믿음에 이르도록 그렇게 하는것이 복음의 역사인것을 주의하셔야 되겠습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실 때 가르치실 때 될수 있으면 흥분시키시지 않고 설명하셔야 좋습니다.
잘 듣고 나서도 흥분하시죠!
어떤 한분이 부활의 메시지를 듣고서 너무 좋아서 막 찾아오시고 하는 것을 제가 보았는데요 잘 깨달으면 훨씬 더 인격이 흥분합니다.
막 이렇게 할 때는 모르고 하고 나서 지나고 나면 억울하죠! 속은 것 같죠!
반지 빼주고 와서 막 투덜투덜한다 이말입니다. 사기 당한것 같죠?
사실은 실제로 사기당합니다.
꼭 이성을 마비시키는 흥분 아니고도 메시지 자체가 사기를 칠때가 자주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은 한번 이렇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듣고 또 듣고 계속해서 확인해 가는 것이 참 중요하기 때문에 성서 유니온에서는 초청 같은 것을 첫날 저녁에 잘하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요라고 돌려 보낸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확인해봐야 합니다라고 한다. 두번 세번 네번. 왜? 그래도 자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도 더욱더 확인하면 확인할수록 확실해야 하나님의 복음이지 약간은 사기성이 있으면 살짝 넘어가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럴러면 눈치 못 채게 빨리빨리 처리하는 마술사가 하듯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항상 여유있게 자신있게 또 다시 설명하고 또 다시 확인하고 회의가 일어나고 질문하고 하는 것이 정상이다.
회의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우리의 생각하고 너무나 다른 것이기 때문에 들을수록 이상하고 들을수록 참 그 이상한 논리다.
그런 것이 정상이다.
다시 설명하고 설명하고 해서 아! 이해가 갑니다. 아 그런것 같습니다.
진짜 놀라운것 같습니다.
그럼 또 생각해보고 자고 일어나서 또 생각해보고 그렇게 해서 전해지는 것이 복음이라 이거다.
자 이 사역에서 제가 인간의 인격이라든지 이것은 충분히 설명해 드렸는데요.
한편은 제가 조금더 보충할 것이 있습니다.
이 복음은 1장 16,17절에 나왔던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더 주의를 기울입시다.
제가 이미 설명했지만 이 복음은 그냥 제시만 되어 있는 복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구원의 길을 제시만 하고 이제 믿고 안 믿고는 너희들에게 달렸다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듣고 우리가 믿어야하고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나 그 복음을 제시하신 하나님이 믿고 안믿고는 너희들에게 달렸다하고 내버려 두고 있다면은 한사람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로마서에 나온 설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복음을 제시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실 뿐 아니라 자기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우리에게 이것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키고 그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자기의 백성을 만들어 가실만 한 지혜와 능력이 있고 그리고 사랑이 있다.
하나님이 낙심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시고 우리는 전도하다가 낙심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하시고 하나님은 지혜가 많기 때문에 그런 술책을 쓰시지 않고 정상적으로 자신있게 설명하시고 또 하나님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기어코 구원해 가시는 그런 하나님이심을 이 복음에서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히브리서를 봅시다.
히브리서
6장 4절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맞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맞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여기에 타락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만큼의 타락을 이야기 합니다.
7절에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에게 쓰기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 안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십자가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대한 두 밭의 비유이다.
거기까지 보면 인간에게 굉장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9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낳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원문에는 이미 구원을 받아가고 있음을 확신 하노라라고 되어있다. having salvation)"
그래서 위로를 주죠?
그러나 그 정도 가지고 문제가 끝나지 않습니다.
10절에 "하나님이 불의치 하니 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 하시느니라"
거기보면 하나님이 사랑으로 섬기고 계신다.
하나님이 기어코 우리를 자기 백성을 만드시려고 수고를 하고 계십니다.
11절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저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자들을 본받는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열심히 일하신다고 해서 나는 가만히 있어도 된다라고 생각하시면 안된다.
나도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고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고 오래참고 약속을 기업을 받을 때까지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럼 역시 인간에 대한 강조가 나오죠?
13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 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하나님이 아주 단단히 약속한 것입니다.
틀림없이 너를 복준다. 나는 틀림없이 너를 번성케 할것이다.
그말을 두번 두번 반복 하시죠!
그런데 이게 어디 걸고 맹세를 해야 되겠는데 어디 걸고 맹세할 때가 아무도 없죠?
자기보다 더 확실한 분이 없으니까. 그래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죠.
내 이름을 두고 맹세하노니 라고!
15절에 "저가 이같이 오래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브라함이 문제가 있고 또 문제가 있고 하였지만 하나님이 결국은 아브라함과 씨름하셔서 결국은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게끔 하셨다.
25년만에 아들을 얻고 그후에 더 큰 믿음에 이른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증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반드시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의 맹세로 보증하셨느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수 없는 이 두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하심이라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하나님이 내가 틀림없이 하겠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한번 한일을 변치 않는다. 그렇게 분명히 말씀 하셨다. 아주 묘합니다.
하나님쪽에서 보면 이것은 너무너무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편에 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5장같은 데에서 나오는 구절이고 또 예수님이 내게 주신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겠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 그쪽의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읽고 기억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입니다.
구원은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제시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길을 마련하신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미 목적이 있고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만든 것이지
목적은 모르겠고 수단만 만들어, 구원을 받으려면 받고 말려면 말아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첫창조 전부터 그 재창조 후의 완성될 때 까지를 이미 설계하셨기 때문에 자기 설계대로 이상적인 나라 국민을 만드셔야 한다.
그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끝까지 하시겠다 이말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자기 아들에게도 이일을 맡기시고
자기 성령님에게도 이일을 맡기시고 해서 3위가 총동원되어서 이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성령님이 보증서고 계시다는 말도 에베소서에 나온다.
하나님이 자기도 보증서시고 성령님도 보증서시고 예수님도 우리의 중보자가 되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열심이 모든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우리를 인격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에
너는 잘 듣고 믿고 순종해야 된다.
타락하면 안된다. 라는 경고가 계속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너 해봤자 하시고 우리가 만만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에 비하면 우리가 너무나 약하니까
만만하시더라도 그래 너 뭐 신경쓸 것 없다 내가 다 알아 하겠다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왜? 훌륭한 국민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적당히 끌고 다니고 그런 정도를 하시지 않습니다. 할려면 간단하죠?
하나님 믿게 하는 것도 간단하고, 타락하는 것 방지하는 것도 간단합니다.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에덴동산의 선악과 나무를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이 그것 방지를 못해서 타락하게 한것 아니다.
그것 나무지키는것 어렵지 않다.
천사가 한사람만 늘 옆에 지키고 있으면 된다. 오면 오지마라 하면 된다.
못 따먹게 하고 손을 내밀면 마비시킬 수도 있고 땃더라도 입을 봉하면 못먹죠!
그런것은 너무 쉬운 일이다.
그렇게 해서 구원을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막는 것이고 안 믿으면 강제로 교회 끌고 오는 것도 쉽죠!
항복받는 것도 쉽고, 아주 쉽습니다.
하나님이 전도하시는 방법은 참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전도 하실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하면 하나님이 다 하신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꾸만 이렇게 어려워 보이는 것처럼 복음을 제시하시느냐?
그것은 우리를 그냥 갖고 노시는 식으로 안하고
우리로 하여금 잘 생각해 보고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닫고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복음의 위대하심을 충분히 인식하고 감사하고 기쁘고
그렇게 따라오기를 원하시지
아~ 이거 하다가는 매 맞을 테니까 하면 안되니까 하는 정도로 해가지고는
밤낮 눈치보는 백성이죠? 그런 자녀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것 뿐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책임이 상당히 주어져 있지만
그러나 그래도 하나님이 설계하실 때부터 선택하실 때부터
나는 기어코 너를 내 백성으로 내 아들로 만들겠다.
하나님의 설득에 우리가 안 넘어 갈수 없다.
또 그 설득이 꼬임수작이 아니다 이말 입니다.
속임수작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을 제시하시고
그 풍성한 사랑 때문에 감동해서
감동할 뿐 아니라 잘 설명해서 충분히 알아듣고 그렇게 됐다.
사실 제자 11명이 예수님에게 꾸지람 들어도 믿을수 있죠?
아니 내가 삼년반이나 데리고 다녔는데 라고 호통을 치면
겉으로는 ‘믿습니다’ 라고 대답할수 있죠?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또 설명하시고 설명하시고...
그런 인내가 하나님에게 필요하죠. 그것이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좀 더 신뢰하고 걱정하시지 말고 전도하시고
내 신앙에 대해서도 걱정하시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내 할일은 성실하게 잘 하셔야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 국가가 형성된다는 점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왕이 된다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나 혼자 때문에 왕이라는 말 필요치 않죠.
왕이 된다는 말은 국가를 이룬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 복음은 공동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훨씬 더 많이 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실현되어야 하느냐?
나 개인에게도 실현되어야 하지만
내가 속한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만
하나님의 나라 이 복음의 사역이 끝나기 때문에
사회 참여자 못지않게 우리는 사회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이상적인 대한민국이 되는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그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속았던 문제이다.
복음은 땅 끝까지 이르러야 되고
온 세계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복음은 민족주의적이거나 국가주의적인데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나라에 많은 운동이 있지만
이것이 단순한 사회 개량운동이나 단순한 민주화 운동이나
단순한 애국운동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하나님 나라 복음의 사역이 아니고
민주화 운동이라고 해서 어떤 인간을 위한 운동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늘 경계하셔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가끔 보수주의자 들은 굉장히 사회에 대해서 무책임하다 라는 비판을 받죠.
물론 무책임하면 비판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책임 한 것 아니죠.
물론 하나님 나라 개념이 확립되기 전에는
이 복음의 개념이 그 쪽으로 정립되기 전에는
죽으면 저쪽 천당에 간다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도피적인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다.
골치 아픈데 뭐 싸울 필요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 나라 아니고 버릴 것인데
저쪽에 가면 되는데 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우리의 잘못이지만
지금 하나님 나라가 공동체를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고
우리나라에 있는 우리 민족에게... 바울처럼 자기 민족에게 일차적으로 복음을 전해서
주께로 돌아오게 하고
어떤 정권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중심적인 그런 국가 아니고
하나님 중심적인 국가가 형성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불러 들여야 되고
이 불안한 부조리한 사회에서 속상해 하는 국민들을 만날 때 마다 어떻게 도와야 되느냐?
“당신 화나지? 나도 화난다.”
그래서 내가 좋은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아주 이상적인 나라 하나 만들자.
하나님께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고 계시다.
‘보라’라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잘 소개해서 아! 그렇게 이상적인 나라도 있느냐?
그렇게 설명 듣고 하나님 나라 쪽으로 관심을 갖게 만들어야지 이 사람을 자꾸 우리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라고 하니까.... 해 보세요, 안 되죠?
세상나라가 이상적인 나라가 되도록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인 복음의 사역만이 가능하지 사람을 재창조하지 않고 이 이상적인 나라가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심이 어떻게 빠져 나옵니까?
대치될 것이 없이는 빠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독재를 하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자꾸만 제시하고 우리가 교회 안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뭐 교회도 마찬 가지인데 라고 하면 내 하는 말이 거짓말이 돼 버리죠.
우리 교회로 와 보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리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야 되고 우리 교회는 민주주의적이 되어야 하죠.
물론 세상적인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 안에 똑같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 한국 교회가 자본주의 영향을 너무 너무 많이 받아 가지고 교회야말로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장소처럼 보인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느냐?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그 복음의 놀라움을 체험하고
그것에 너무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하나님에게 내 생애를 드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려고 하지 않고
내 왕국을 세우고 내가 혜택을 누리고 현세적인 욕심에 집착해 있고
내세는 덤으로 받고
현세에서 갖을 것은 다 갖겠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오는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교회를 이상적을 세워가야 하고
처음부터 깨끗한 마음으로 모든 교인들을 키워서
전혀 욕심 없는 교인들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래서 빨리 성장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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