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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고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

여호수아서의 내러티브

2018-06-22 16:12:20


여호수아 1장

하나님은 다시금 여호수아에게 땅의 약속을 확실하게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시므로  반드시 그 약속을 이루실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누구를 통해서 이뤄질 것인가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그 약속이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지길 기대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지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 자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인 만고에 불변하는 하나님나라 진리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굳세고 용감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업으로 물려줄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여호수아는 용기를 내어야 한다. 용기를 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붙드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약속을 믿고 붙든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지시한 율법을 다 지키고 치우치지 않는 일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라 약속하신 하나님이 요구하신 율법을 다 지키는 일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에서 율법을 지켜 살게하심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땅을 주신다는 약속이 아무리 있을지라고 그 약속이 실현되지 않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믿지 않아서이다. 약속을 믿는다는 것이 그 약속의 목적인 율법을 지키는 일이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나 그 약속의 실현을 확신하는 일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요구하신 일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이다. 

 

여호수아 2장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혹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부족을 보여준 행위가 아닐까? 이스라엘은 이미 광야에서 정탐꾼 사건으로 인해 모진 댓가를 치뤘다. 그러나 그때의 정탐군과 지금의 정탐꾼은 다르다. 그때는 가나안 거민이 과연 상대해서 이길만한지 아닌지를 살피려는 실리적 목적이었다면 지금은 이미 가나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2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인물은 여리고 성에 사는 라합이란 여인이다. 그 여인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그들이 안전하게 돌아가도록 협조를 했다. 어쩌면 여리고성 사람들 입장에서 라합은 배신자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라합이 그런 결단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라합의 말은 9-13절까지 길게 자세히 묘사된다. 라합은 이미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땅을 그들에게 주신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을 보니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과연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는 라합만이 아니라 여리고성의 백성들로 모두 아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거부했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거부한 것과 동일하다. 그러나 라합의 판단은 그들과 달랐다. 그렇기에 성경은 라합의 이야기를 여기에 길게 기록한다. 라합의 행위는 여리고성 사람들에게 배신일지 모르나 적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바른 판단에 근거한 믿음의 결과였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지만 그것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었다. 라합에게서 보듯이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는 죽임을 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이지 가나안족속이라는 이유때문이 아니다. 

 

여호수아 3장

요단강을 건너는 일에 제사장들이 맨 언약궤가 앞장을 섰고 그때 요단강물이 마르며 이스라엘은 마른 땅을 건너듯이 건너게 되었다.이런 모습은 가나안 땅을 치지하는 일이 이스라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앞장 서서 이루시는 일임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후에도 그 땅은 이스라엘이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임을 대대로 기억해야만 한다. 그 기억 속에는 물론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셨는지 왜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들을 그 땅에서 쫒아내셨는지에 대한 대답도 포함되어야 한다. 

 

여호수아 4장

그래서 하나님은 요단강 바닥에 있던 돌을 꺼내어 이스라엘에게 기념물을 삼게하셨다. 훗날  후손들이 요단강가에 세워진 그 돌들을 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게 되도록. 그런데 기념비된 돌들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라는 사실은 그런 기념이 반드시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공유해야 할 공적인 기억이어야 함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 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한 공적인 일이듯이 이스라엘이 기념해야 할 기억 역시 지극히 공적이고 공동체적이어야 한다. 그 기억은 땅의 모든 백성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게하려는 것이고 나아가 이스라엘이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호수아 5장

이제 이스라엘은 요단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왔고 가나안 첫 성인 여리고성을 눈 앞에 바라보는 지점인 길갈에 진을 치고 있다.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은 전쟁을 준비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갑자기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베풀 것을 명하신다. 임박한 전쟁을 앞두고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무쟁해제에 다름 아닌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성들은 모두  할례를 받았고 다 낫기까지 진 안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없애버렸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곳 이름이 길갈이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할례를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받은 수치를 없애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받은 수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연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며 살던 억압의 삶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애굽에서 바로왕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의 종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받은 수치였다. 그러니 할례를 행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다시금 확인하는 행동이었음과 동시에 하나님만이 그들의 주인이심을 선포하는 예식이었다. 이제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온 이스라엘에게 옛 공간에서 받은 수치는 제거되었다.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할 새로운 공간이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이유가 바로 여깅 ㅔ있다. 할례를 행한 후에 이스라엘은 여리고 근방 평야에서 유월절을 지켰다. 유월절은 애굽에서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였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온 즉시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 이스라엘에게는 가나안 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주어졌고 동시에 유월절을 지킴으로 새로운 시간이 주어졌다. 애굽에서 받은 모든 수치가 제거되고 이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 만난 사람은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묘사된다. 이는 요단강을 앞서 건너신 분이 하나님이었듯이 여리고 전투를 행하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암시한다.

 

여호수아 6장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인 여리고 전투는 여러가지 면에서 가나안 전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여리고성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무너진 것을 가지고 여리고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리고 성이 무너진 이후 이스라엘은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리고성을 돌 때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성을 돌았다. 여리고성을 도는 퍼포먼스에는 일곱이란 숫자가 많이 등장한다. 제사장 일곱명, 숫양 뿔 나팔 일곱개, 일곱번 성을 돌기 등, 이렇게 일곱이란 숫자가 많이 나오는 이유는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인 여리고성 전투를 통해 가나안 전쟁이 단순히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가나안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완전한 심판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민족이고 가나안 사람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땅을 얻고 가나안은 땅에서 쫒겨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패역하여 땅을 더럽힌 가나안을 심판하고 이제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 땅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나라를 세울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다. 여리고성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무너졌지만 그 과정에서 제사장들이 뿔 나필을 불고 백성들이 그 나팔 소리에 화답하듯이 함성을 질렀을 때 성벽이 무너진 일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일방적이고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스라엘의 반응과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전심으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이뤄지고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도도 그러함은 하나님나라의 불변의 진리다. 

 

무너진 여리고 성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는 안되고 성안에 있는 모든 것은 전멸시켜서 하나님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짐승까지도 죽여야 했고 물건도 모두 불살라야 하며 불에 타지 않는 은 금이나 놋이나 철 그릇은 모두 하나님의 금고에 바쳐야 한다. 어떤  물건도 개인이 손을 대서는 안된다. 여리고 전투나 전투후 그 처리 방법은 모두 매우 특이하고 이후의 다른 전투들과는 다르다. 이것은 앞에서 일곱이란 숫자가 반복해서 나오면서 가나안 전쟁이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임을 상징했듯이 여리고성의 철저한 진멸과 복구 금지는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철저함과 완전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철저한 진멸에서 예외인 사람이 있는데 바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이었다. 라합이 구원은 받은 것은 단지 정탐꾼을 감추어준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라합은 하나님은 대적하는 패역한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라합의 경우나 이후에 등장하는 기브온 족속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패역한 삶을 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진멸당하기로 예정된 가나안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 누구든지 돌이키는 자는 살아날 기회가 주어졌다. 라합이나 기브온 족속의 사례는 대단히 신약의 복음과 흡사하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신약의 복음과 마찬가지로 가나안 족속이라 할지라도 누구든지 돌이키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당시에도 열려있었다.

 

여호수아 7장

아간의 죄와 관련하여 생각할 점이 두가지가 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이 여리고성의 모든 탈취물을 이스라엘이 취하는 것을 금하셨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그 금령을 범한 아간의 죄악이 온가족이 죽임을 당하고 재산이 불살라질만큼 심각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여리고성 이후의 모든 전투에서는 탈취물을 갖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허용되었는데 유독 여리고성의 탈취물만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이것은 가나안 전쟁의 첫 전투인 여리고 전투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암시해준다. 첫 전투로서의 여리고 성 전투는 이후 계속되는 가나안 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기 위한 전쟁이기 이전에 가나안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다. 하나님은 단지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죄없는 가나안 족들을 쫒아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의 가득한 죄악을 미워하셨으며 그들을 적극적으로 심판하기로 작정하셨고 그 심판의 집행이 가나안 전쟁으로 나타났고 그들은 그 땅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일은 하나님의 적극적인 심판의 결과였다. 이렇게 볼 때 여리고성의 탈취물이 유독 금지된 것은 가나안 전쟁이 하나님의 엄중 심판이며 하나님이 가나안 족들의 죄악을 철저하게 미위하심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간이 범한 죄악은 단순히 절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나안 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삼각성을 가볍게 여긴 죄악이었다. 아간의 죄악 이후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했음은 그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은 위험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전쟁을 통해 하나님이 가나안의 죄악을 지극히 미워하심과 그로 인해 그들을 심판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범죄한다면 언제든지 그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 족속처럼 쫒겨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호수아 8장

아이성 전투 부터는 여리고 전투와는 달리 전리품과 가축을 갖는 일이 허용된다. 그리고 아이성 전투에서는 여리고 전투와 달리 기적적인 요소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첫 전투로서의 여리고 전투가 가나안 전쟁의 성격을 대표적으로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아이성 전투 후에 여호수아는 모세가 명한대로 에발산에 제단을 쌓고 모세가 쓴 율법을 그 돌에 새겼다. 그  뒤에 여호수아는 울법책에 기;록된 축복과 저주의 말을 일일이 그대로 낭독한다. 아마도 이 일은 여리고 전투후에 즉시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왜냐하면 가나안 전쟁을 대표하는 여리고 전투에서의 승리는 곧 가나안 정복의 승리를 의미할 것이고 그렇다면 여리고 전투후 즉시 율법을 선언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심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곳에서 율법을 지켜 살게 하려하심이다. 그러므로 여리고 전투 이후 즉시 에발산에서 율법을 선언하는 일은 바로 이런 의미를 분명히 하는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아이성 전투 이후로 연기된 것은 여리고 전투에서 일어난 아간의 범죄 때문으로 보인다. 

 

여호수아 9장

여리고성과 아이성 전투 소식을 들은 가나안 족속들은 함께 모여서 이스라엘에 맞서 싸우기로 뜻을 모았지만 유독 기브온 주민들은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는 일이 승산없는 무모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땅을 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주라고 명하셨고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다 죽이라고 명하셨음을 알았다. 물론 이런 사실을 기브온 주민들만 알았을리 없다. 다른 족속들도 알았겠지만 그들은 모두 합심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한데 반해 기브온 주민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으려고 했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해 부득이 이스라엘을 속일 수 밖에 없었고 이스라엘 역시 자신들이 속은 것을 알았지만 그 조약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브온 주민들이 속인 일이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조약을 맺은 일에 대해 아무 책망도 하지 않는다. 비록 속아서 맺은 조약이지만 이는 분명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기브온의 행동을 용납하셨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록 나무패고 물긷는 일이지만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허락되었다. 이는 여리고성의 라합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라합 역시 여리고성 주민의 하나로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정탐꾼을 살려줌으써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듯이 기브온 주민 역시 그러하다. 라합이나 기브온 주민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살려두지 말고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무조건적이고 예외가 없는 명령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자는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가나안 족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미워하시어 심판하시기 위함이지 그 죄악에서 돌이켜 순종하는 자들 조차 멸하시려함이 아니었다. 라합과 기브온 주민 이야기는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여호수아 10-11장

이스라엘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점령한 사실과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했다는 소식을 들은 가나안 족들은 몹시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이스라엘과 화친한 기브온을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모리 족속의 다섯 왕들은 기브온을 공격하려고 진을 쳤고 기브온은 이스라엘에게 자신들을 구원하여주길 간청했다. 이제 기브온은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로 편입되었기에 기브온에 대한 공격은 곧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전군을 이끌고 길길에서 진군하여 올라갔고 결과는 이스라엘의 대승이었다. 이 전투의 결과 여호수아는 산간지방과 평지와 경사지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하솔왕 야빈을 비롯한 가나안 각 지역의 왕들은 총연합하여 자기들의 군대를 모두 출동시키니 그 군인의 수효가 마치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고 말과 병거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들을 무찌르고 그들을 전멸시켰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이 모든 땅 곧 산간지방과 네겝지방과 모든 고센 땅과 평지와 아라바와 이스라엘 산간 지방과 평지를 다 점령하였다. 결국 기브온 주민 말고는 이스라엘과 화친한 성읍 주민이 하나도 없었고 나머지 성읍은 이스라엘이 싸워서 모두 점령하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가나안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작정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들의 반응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작정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가나안족들이 어찌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라합이나 기브온 주민의 경우에서 보듯이 멸망받기로 작정되 가나안 족이라 할지라도 그들 가운데 누구든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굴복하고 이스라엘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살아남을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었다. 그러니까 가나안 족들이 멸망당한 직접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하나님은 그들에게 살 기회를 여전히 남겨두셨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모든 땅을 점령하고 그것을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을 따라 유산으로 나누어주었고 그 땅에서는 전쟁이 그치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이 당시에 모든 땅을 점령한 것도 아니고 전쟁이 완전히 종료된 것도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이미 가나안 전쟁의 대세는 결정되었고 가나안 족속들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되었음을 강조하려는 표현인 듯하다. 

 

여호수아 12-13장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과 아직 점령하지 못한 지역을 구분하여 나열하고 있다. 요단 동편 지역의 점령은 이미 끝났기에 그 지역이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나누어 주었음을 말하고 있다. 요단 동편 땅을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레위지파에게는 땅이 분배되지 않았음을 반복하여 언급하 레위 지파에게 주어지는 기업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게 드리는 제물이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요단동편의 이스라엘 자손이 구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쫒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서 살고 있다는 언급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고 화친하여 이스라엘과 함께 산 것처럼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마땅히 쫒아내야 할 사람들을 쫒아내지 않고 섞여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는 것 같다. 요단 서편의 땅 분배를 언급할 때도 이런 염려스런 언급이 등장한다. 

 

여호수아 14장

요단강 서편 지역을 분할하기에 앞서 갈렙 이야기가 등장한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자신에게 한 약속을 상기시키며 아낙자손이 살고 있는 산간지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헤브론이 갈렙의 유산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으며 이는 갈렙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충성스럽게 따랐기 때문임을 강조하고 있다. 갈렙은 가나안 땅을 주마는 하나님의 약속에 충성스럽게 반응한 모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군으로 갔을 때도 그랬고 지금 크고 견고한 헤브론 성을 달라고 요구할 때도 그렇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실하게 믿고 행동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갈렙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아직 이스라엘이 정복할 땅이 많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갈렙과 같이 그 약속에 대한 신실하고 충성스런 믿음이 이스라엘에게 요구됨을 말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원리를 확인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질지라도 그 약속을 믿고 행동하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지 못한다는 진리이다. 물론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약속이 모든 것의 출발이고 근원이지만 그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 약속을 믿고 행하는 사람들을 통해 실현된다. 사람의 믿음은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을 전제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사람의 믿음을 요구한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되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진리다. 

 

여호수아 15-17장

유다 자손 지파에게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준 땅의 목록이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다. 이 경우에도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 성에 살던 여부스 사람을 쫒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 성에 함께 살고 있다는 언급이 추가된다. 이어서 요셉 자손이 에브라함과 므낫세 자파에게 땅이 분배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에브라임 지파에게 땅이 분배되었는데 이 때도 그들이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쫒아내지 않았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살며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언급이 등장한다.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도 땅이 분배되었는데 아들 역시 자기 지역 성읍들의 주님을 쫒아내지 못했고 그래서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언급을 추가된다. 그런데 요셉 자손들은 자신들이 다른 지파보다 큰 무리이므로 더 땅을 분배받아야 하는데 한번만 제비를 뽑아서 한 몫만 유산을 가지게 한 것에 대해 여호수아에게 불평한다. 그러자 여호수아는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이 사는 삼림지대로 올라가서 그곳을 정복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나 요셉 자선은 그 산간 지방이 척박하고 그곳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철병거가 있어서 쫒아낼 수 없다고 대답한다. 요셉 자손의 이런 태도는 유다 지파의 갈렙의 태도와 매우 대조적이다. 갈렙은 스스로 강대한 아낙 자손이 살고 있는 헤브론을 차지하겠노라고 나셨는데 반해 요셉자손들은 땅을 더 분배해달라고 하면서도 정작 가나안 족의 철병거를 핑게로 땅을 정복할 엄두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동일하게 주어졌지만 그 약속을 믿고 행동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약속을 믿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유다 지파의 갈렙과 요셉 자손들은 상반된 이 두 모습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여호수아 18-19장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땅을 정복한 뒤에도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아직도 유산을 받지 못한 지파가 일곱이나 남아있었다. 땅을 정복했는데도 아직도 일곱 지파가 땅을 분배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언제까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땅을 차지하기를 미루겠냐고 말하는 것로 미루어보아 이스라엘 자손이 그 땅을 정복했다는 말은 이제 더 이상 가나안 족들이 대항하지 못하므로 전쟁이 그쳤고 그러므로 그 땅을 정복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이지 이스라엘이 가나안 모든 땅을 실제로 차지했다는 의미는 아닌 듯 하다. 이전에는 가나안 족들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했으므로 치열한 대규모 전투가 있었지만 그들이 그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더 이상 이스라엘을 대항하지 않으므로 전쟁은 그쳤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실제로 그 땅을 차지하고 살기 위해서는 그 땅에 아직도 살고 있는 가나안 족들을 쫒아내야 하므로 각 지파별로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 전투를 벌려야만 했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아직 땅을 분배받지 못한 일곱 지파에게 그런 노력을 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대세는 결정되었고 가나안 족들은 전의를 상실했으므로 각 지파들이 실제로  땅을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 전투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곱지파가  싸우기를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앞서 유다 자파와 에브라임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쪽 지파는 이미 땅을 분배받았는데 이는 그들이 지파변 전투를 통해 분배받은 땅을 실제로 차지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일곱 지파는 지파별로 싸우기를 미룬 관계로 아직도 땅을 분배받지 못한 듯 하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로 하여금 정복한 땅을 정찰하여 오도록 한 후에 제비를 뽑아 일곱 지파에게 각 지파별로 땅을 분배해 주었다. 이는 이들 일곱지파들이 분배받은 땅을 실제로 차지하기 위한 전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수아 20-21장

모세에게 이미 명령했던 도피성을 지정하고 있는데 요단강 서쪽 지역에서는 게데스, 세겜, 헤브론이 도피성으로 지정되었고 요단강 동쪽 지역에서는 베셀, 라못 그리고 바산 골란이 도피성으로 지정되었다. 도피성 제도는 살인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이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하기 위한 것이고 이는 이스라엘 자손뿐 아니라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도 공히 적용된다. 이어서 레위지파의 성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레위지파에게는 땅은 분배되지 않지만 그들이 거주할 성읍과 가축을 먹일 목장은 주어진다. 고핫 가문 가운데 이론 제사장 자손에게는 유다외 시므온 지파와 베냐만 지파의 몫에서 열세 성읍이 돌아갔다. 고핫의 남은 자손에게는 에브라임과 단과 므낫세 반쪽 지파의 몫에서 열세 성읍이 돌아갔다. 게르손 자손에게는 잇사갈, 아셀, 납달리, 그리고 요단 동편의 무낫세 반쪽 지파의 몫에서 열세 성읍이 돌아갔고 므라리 자손에게는 르우벤, 갓,스블론 지파의 몫에서 열두 성읍이 돌아갔다. 그러니까 레위 자손들은 이스라엘 공동체 모든 지파로부터 성읍과 목장을 제공받았고 결국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에 모두 골고루 퍼져서 살았던 던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이 차지한 유산의 땅 가운데 레위 사람이 얻은 것은 모두 마흔 여덟 개의 성읍과거기에 딸린 목장이었다. 그리고 이들 레위 지파들이 사는 성읍들 가운데 각 지역별로 골고루 요단 서편에서 세군데, 요단 동편애서 세군데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주님께서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한 모든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으며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이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 이렇게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은 모두다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일은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따라 그 땅을 차지하여 거기서 자리잡고 사는 일이며 또 하나님이 주신 그 땅에서 율법을 충성되이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셨으므로 이제 이스라엘도 그 언약에 신실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여호수아 22장

이제 요단 서편의 가나안 정복이 끝났고 모든 땅 분배가 완료되었으므로 여호수아는 르우벤, 갓, 그리고 므낫세 반쪽 지파를 불러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게 한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오직 하나, 주님의 종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한 계명과 율법을 열심히 좇아서 지키라고 당부한다. 그 일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지시하는 길로 가며 주님의 명령을 지켜며 주님을 가까이 하고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라는 당부였다. 그런데 그들은 요단동편으로 돌아가면서 요단강 서쪽의 강가에 아주 큰 단을 쌓았고 이 일로 인해 내전이 발생할 위기에 처했다. 왜냐하면 요단 서편 지파들은 그들이 단을 쌍은 이유가 주님을 배반하고 그 단에서 제사를 드리려는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단을 쌓은 이유는 훗날 세월이 지나 요단 서편 지파의 자손들이 요단 동편의 자손들을 막아서 주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발생할까 염려하여 요단 서편과 동편의 자손들이 동일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며 공동체임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을 이 단을 일컬러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함"이라고 하였다. 요단 동편 지파가 이런 목적으로 훗날을 염려하여  단을 쌓은 것은 십분 이해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으 요단 서편 지파와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증명하는 일은 이런식으로 단을 쌓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당부한대로 주님이 명령한 계명과 율법을 열심히 좇아서 지키는데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 23장

오랜 세월이 흘러서 여호수아도 나이가 많고 늙었으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 우두머리들을 불러서 마지막 당부를 한다. 이제 가나안 땅을 이미 정복했고 여호수아는 각 지파에서 그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모든 지파가 그 땅을 실제로 차지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친히 그들마저 쫒아내실 것이며 그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게 될 것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아주 담대하고 지키고 행하며 그것을 벗어나 죄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단지 선민이거나 그들을 편애해서가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 땅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웁게 살게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무엇보다도 그들과 이웃한 남아있는 이 나라들과 사귀지 말며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이름으로 맹세하지도 말고 섬기거나 경배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것을 어기고 그들 가운데 살아 남아있는 이방 민족들을 가까이 하거나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사귄다면 하나님은 이 민족들을 몰아내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올무와 덫이 되고 결국에는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선한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 반대로 약속하신 이 쫗은 땅에서 이스라엘을 쫒아내실 수 도 있는 분이심을 명심하라고 당부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지만 그 반대로 이스라엘을 징벌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선을 행하시든 징벌을 행하시든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하시는 일이다. 

 

여호수아 24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이게 하고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회고한다. 하나님이 이브라함을 이끌어 내신 일이며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긴 일.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신 일, 그리고 마침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신 일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 모든 일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하셨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 말을 하기 위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회고한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만일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나면 지금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어떤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이에 백성들은 주님을 저버리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대답에 대한 여호수아의 반응은 비관적인 듯하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당신들은 주님을 섬기지 못할 것인데 그 이유는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님이 거룩하시고 질투하시는 분이시란 표현은 그분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보기에 이스라엘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주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그들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다시금 주님만을 섬기겠다고 확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증거로서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신들을 내버리고 마음을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제안한다. 그 날 여호수아는 세겜에서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고 그들이 지킬 율례와 법도를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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